우에하라 고지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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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
2000 | 2002 |
MLB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
2013 |
2004 아테네 올림픽 {{{#bd5c24 동메달}}} |
2004 |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c7bc69 우승 반지}}} |
2006 |
노모 히데오 (킨테츠 버팔로즈, 1990년) | → | 우에하라 고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9년) | → | 사이토 가즈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06년) |
카와사키 켄지로 (야쿠르트 스왈로즈) | → | 우에하라 고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수상자 없음 |
마쓰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라이온즈) | → | 우에하라 고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사이토 가즈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이가와 게이 (한신 타이거스) |
1999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최우수 신인 | ||||
카와카미 겐신 (주니치 드래곤즈) | → | 우에하라 고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킨죠 타츠히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1999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사사키 가즈히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 | 우에하라 고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쿠도 키미야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
2002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후지이 슈고 (야쿠르트 스왈로즈) | → | 우에하라 고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이가와 게이 (한신 타이거스) |
1999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 ||||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우에하라 고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쿠도 키미야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
200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 ||||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우에하라 고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카와카미 겐신 (주니치 드래곤즈) |
1999, 2004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방어율 |
1999, 2002년 센트럴 리그 최다 승리 |
1999, 2003년 센트럴 리그 최다 탈삼진 |
2013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 | ||||
델몬 영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 | 우에하라 고지 (보스턴 레드삭스) | → | 로렌조 케인 (캔자스시티 로열스) |
보유 기록(NPB) | |
1경기 최다 피삼진[1] | 5개 |
신인 최다 연속 승리 | 15연승 |
1달 간 최다 세이브 | 11개 |
통산 최고 K/BB[2] | 6.68 |
최고령 올스타전 등판 | 43세 3개월 |
보유 기록(MLB) | |
단일 시즌 포스트시즌 최다 세이브 | 7개 |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19번}}} | ||||
카네이시 아키히토 (1998) | → | 우에하라 고지 (1999~2008) | → | 츠치모토 쿄헤이 (2010) |
볼티모어 오리올스 등번호 19번 | ||||
오스카 살라자 (2008) | → | <colbgcolor=#000000> 우에하라 고지 (2009~2011) | → | 크리스 데이비스 (2011~2020) |
텍사스 레인저스 등번호 19번 | ||||
크리스 데이비스 (2008~2011) | → | 우에하라 고지 (2011~2012) | → | 헥터 노에시 (2014) |
보스턴 레드삭스 등번호 19번 | ||||
조시 베켓 (2006~2012) | → | 우에하라 고지 (2013~2016) | → | 재키 브래들리 주니어 (2017~2020) |
시카고 컵스 등번호 19번 | ||||
조나단 에레라 (2015) | → | 우에하라 고지 (2017) | → | 현재결번 |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11번}}} | ||||
루이스 크루즈 (2016~2017) | → | 우에하라 고지 (2018) | → | 야마구치 슌 (2019) |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19번}}} | ||||
스가노 도모유키 (2013~2018) | → | 우에하라 고지 (2019) | → | 다나카 도요키 (2020) |
}}} ||
우에하라 고지 上原浩治 | Koji Uehara | |
출생 | 1975년 4월 3일 ([age(1975-04-03)]세) |
오사카부 네야가와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도카이대학 부속 교세이 고교 (오사카) - 오사카체육대학 |
신체 | 187cm, 87kg[3] |
투타 | 우투우타 |
포지션 | 투수 |
프로입단 | 1998년 드래프트 1라운드 (요미우리)[역지명] |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9~2008) 볼티모어 오리올스 (2009~2011) 텍사스 레인저스 (2011~2012) 보스턴 레드삭스 (2013~2016) 시카고 컵스 (2017) 요미우리 자이언츠 (2018~2019) |
국가대표 |
|
등장곡 | Darude - Sandstorm |
응원가 | 요미우리 시절[5] |
가족 | 장남 우에하라 카즈마[6] |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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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프로야구 선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이자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다가 2009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구원투수로 정상급 활약을 선보였다.국제대회에서도 매우 강한 모습을 보였으며[7], 한국 타선에 악몽을 선사한 스플리터 낚시꾼으로도 알려져 있다.
2. 플레이 스타일
1999년 데뷔시즌 147km/h 포심 패스트볼 |
130km/h 스플리터 |
129km/h 슬라이더[8] |
2013년 141km/h 포심 패스트볼[9] |
81마일(130.3km/h) 스플리터 |
요미우리 입단 후 초창기에는 평균 140km 초반, 최고 152km/h의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를 주무기로 구사하는 선수로 구위는 99년 데뷔 시즌을 정점으로 떨어졌었는데, 13시즌 종료 후에는 '2013시즌이 직구에 있어서 만큼은 15년 중 가장 좋았다'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2013년 정점을 찍은 이래 구속은 계속 감소하여 메이저 마지막 시즌이던 2017년에는 평속 87마일(약 139km/h), 최고구속 90마일(144km/h)이 나왔다. 메이저 기준에서 좌완이어도 느린 구속 소리를 듣는데 하물며 우에하라는 우완이어서 더욱 느린편이다. 그럼에도 메이저리그에서 통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에 대해 우에하라 본인은 '메이저리그에서는 무빙 패스트볼이 유행하는데 타자들이 그런 무빙이 없는 자신의 공에 적응을 못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견을 나타낸 적이 있으나 이건 우에하라 본인은 공을 던지는 입장이기 때문에 몰라서 하는 말이고,[10][11][12] 실제로 우에하라의 패스트볼은 압도적인 무브먼트를 바탕으로 상대 타자를 제압하는 무빙 패스트볼이다. 우에하라가 '구속이 느린 내 공이 통하는 이유는 무브먼트가 없어서 타자들이 적응을 못 하는 게 아닐까?' 라고 말하는 것은 이병헌이 '키 작은 내가 인기 많은 이유는 얼굴이 평범해서 다른 배우들과 차별화되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족으로 이병헌의 키는 170대 중반으로 결코 작은 키는 아니긴 하지만.
우에하라의 포심은 수직 무브먼트에서 압도적이다. 야구의 구질 항목에 나와 있지만 수직 무브먼트가 평균치보다 좋은 포심은 같은 속도의 포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떨어짐으로써 타자들이 '공이 떠오른다'는 느낌을 주게 된다. 포물선 운동을 하는 물체가 직선에 가깝게 움직일 수록 인간의 두뇌는 그 물체가 빠르다고 해석하는 것. 그리고 우에하라의 88마일 똥볼은 팬그래프 측정에 의하면 클로저 중에서 2위에 해당하는 수직 무브먼트를 갖추고 있으며, 수직 무브먼트 만으로는 무려 클레이튼 커쇼에 필적할 정도다. 이를 증명하듯 MLB 커리어 동안 우에하라의 포심 수직 무브먼트는 10인치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 거기에 그렇다고 수평 무브먼트가 안좋은것도 아니라서 투심성 횡무브먼트도 있다. 우타자 몸쪽으로, 좌타자 바깥쪽으로 공이 휜다.
압도적인 무브먼트에서 유추할 수 있듯 회전수도 엄청난데, 2500에 육박하는 RPM으로 포심 패스트볼 부문 메이저리그 탑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즉, 그의 패스트볼은 구속에 비해 원래 공이 들어와야 할 위치보다 덜 떨어져서 상대적으로 높게 들어오고 마지막에 공이 휘기에 정타를 맞추기도 힘들다. 88마일 공이 실제로는 90마일 초반대로 느껴지게 되고 배트가 빨리 나와서 파울이나 플라이 볼을 양산할 뿐이다. 본인 말마따나 공이 무브먼트가 없고 깔끔한 작대기가 절대 아닌 메이저리그 최상급 무빙 패스트볼이다.
결정구인 스플리터 역시 엄청난 강점이다. 낙폭이 클 뿐만 아니라 피치 터널도 길며[13] 구속이 다른 투수들의 스플리터와 달리 패스트볼 구속과 꽤 차이가 나는 편인데[14] 오히려 그 점이 체인지업처럼 작용해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다.
이렇게 우에하라는 뛰어난 위력의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를 앞세워 구속은 느리지만 투피치 파워 투수로 활약한다. 간혹 우에하라를 제구파 투수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는데, 물론 우에하라의 제구력이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공의 제구에 크게 신경을 쓰는 타입은 아니다. 당장 그의 투구 분포도를 나타내는 핫 존을 보면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을 중심으로 고르게 퍼져있는데, 클레이튼 커쇼, 맷 하비, 켄리 잰슨의 핫 존 등 공을 존 한복판에 꽂아넣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강속구 투수들의 핫 존과 유사한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제구에 신경을 쓰는 투수들의 핫 존은 분포가 명백히 이질적이다. 마리아노 리베라의 핫 존이나 로이 할러데이의 핫 존, 류현진의 핫 존을 보면 그 차이점이 명확히 보인다.[15]
우에하라처럼 구속이 느리지만 스타일은 제구파인 다른 불펜 투수들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욱 명확하다. J.P. 하웰의 핫 존이나 파코 로드리게즈의 핫 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여타 제구파 불펜투수들은 존의 아래쪽, 타자의 바깥쪽으로 공을 뿌리며 정면승부를 피하는 반면 우에하라는 그런 거 없다. 한 마디로 우에하라는 '구위'를 '구속'으로 끌어올리는 게 아니라 '무브먼트'로 끌어올리는 강속구 투수에 가깝다. 공은 존 한가운데로 던지면서 '칠 수 있으면 쳐 봐' 라며 승부를 걸고 설령 맞는다 해도 '뭐 그런 날도 있는 거지' 하고 잊어버리고 다음날 또 다시 '칠 수 있으면 쳐 봐' 라고 승부하는 스타일.
거기에 본인의 배짱 역시 대단하고 이에 기반한 빠른 투구 리듬으로 단순한 투피치임에도 타자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않고 몰아붙인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평균 Pace, 투구와 투구 사이에 걸리는 시간은 22.6 초이며 불펜 투수들로만 한정할 경우 23.7 초까지 올라가는데,[16] 우에하라는 20.7 초 라는 시간을 보여준다. 여기에 위에서 말한 것 처럼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을 두려움없이 공략하며 볼카운트 싸움에서 타자를 공격적으로 밀어붙이고 빠른 승부를 하기 때문에 한국 타자들처럼 타석에서 볼을 기다리고 변화구 공략에 취약한 타자들은 어 하는 사이 3~4구 이내에 멀삼 내지는 땅볼로 돌려보낸다. 이때문에 국제대회에서 대표적인 한국 킬러 투수로 유명하다. 특히 1회 WBC 4강전에서 7이닝 무실점으로 한국 타자들을 관광태우며 한국 킬러로 자리잡아서 베이징 올림픽 예선 한일전에서 4:3으로 앞선 9회말 마무리로 등판해 세이브를 따냈다. 베이징 올림픽 본선에는 마무리로 확정되었지만 준결승인 한일전때는 앞 투수 이와세 히토키의 불쇼로 등판이 무산되었다.
이렇듯 뛰어난 무브먼트의 패스트볼, 승부를 망설이지 않는 배짱, 그리고 빠른 승부에 포심을 뒷받침해주는 스플리터가 더해져 우에하라가 무시무시한 클로저로 자리잡은 것이다. 때문에 구속도 느리고 투피치로 승부하는 투수지만 빠른 투구 템포와 쩔어주는 패스트볼의 무브먼트, 뛰어난 스플리터 등의 장점이 합쳐져 타자는 '스플리터? 포심?' 이렇게 고민하다가 우에하라는 벌써 투구를 시작하고 있고, 어어어 하다가 생각을 못 정하고 그냥 지켜보거나 되는대로 휘두르다가 삼진을 먹게 된다.
대신 무브먼트가 다소 안 좋은 날에는 그대로 한복판에 실투를 꽂는 셈이 되다보니 빠른 템포의 승부와 느린 구속이 겹치며 뜬금없는 장타, 홈런 맞는 일이 많다. 일본에서도 메이저에서도 여전하다.
3. 경력
3.1. 프로 데뷔 전
오사카에서 태어나 중학생 때까지 육상을 하다가 뒤늦게 야구를 시작했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외야수에서 투수로 전업했다. 이 때문에 특기자 전형에 실패해 1년 재수를 한 뒤 오사카 체육대학에 들어가 대학에서 숨겨진 기량을 뽐냈다. 4년간 성적은...36승(13완봉) 4패. 괴물이었다. 국제대회에서도 에이스 역할을 하며 1997년(3학년) 스페인에서 열린 인터컨티넨탈컵 결승에서 아마야구 최강이었던 쿠바를 상대로 5⅓이닝 1실점 투구로 승리했었고 이 덕에 대학 최대어로 주목을 받았다. 물론 당시 스포트라이트는 1998년 갑자원을 장악한 괴물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3년 동안 실업야구를 방황하다 역지명 연차를 채운 후쿠도메 고스케에게 쏠려 있었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꾸준히 우에하라를 원하였다. 하지만 당시 우에하라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목표로 삼았고, 실제로 300만 달러라는 적지 않은 금액을 제시한 애너하임 에인절스와의 계약이 유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에하라를 어떻게든 잡고자 했던 요미우리는 요미우리의 팬이었던 우에하라의 부친을 설득했고[17], 여기에 '일단 일본에서 검증받은 후에 메이저리그에 도전해도 늦지 않다' 는 지인들의 조언을 듣고 마음을 돌린 우에하라는 결국 요미우리행을 선택했다.[18] 다만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입단한 팀이기도 하고, 입단 당시부터 최종 목표를 메이저리그로 설정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후에도 요미우리 구단과는 복잡미묘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3.2. 요미우리 자이언츠
어쨌든 요미우리에 입단한 우에하라는 데뷔 첫해 1999년부터 25경기 197⅔이닝 179탈삼진, WHIP 0.895, 12완투 1완봉을 포함해 20승 4패 평균자책점 2.09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며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는 경이적인 활약을 선보였다. 타이틀은 다승, 승률, 탈삼진, 평균자책점 1위로 4관왕. 신인이 데뷔 첫해 20승을 올린 사례는 현 시점까지도 한미일 프로야구를 다 털어 우에하라 이후 단 한 명도 없다. 당연히 1999년 신인왕, 센트럴리그 최우수투수상, 베스트나인, 골든글러브, 사와무라상 등 투수로서 받을 수 있는 상은 거의 다 싹쓸이했다. 아무리 잘했어도첫 해 루키 시즌이 워낙 압도적이라 이를 능가하는 시즌을 만들 수 있을까 우려가 높았고, 역시나 우려대로 이후 루키 시즌만큼의 압도적인 포스를 뽐낸 적은 한 해도 없다. 2000년에는 전해 너무 달린 나머지 오른쪽 허벅지 근육 파열로 후반기를 날리며 9승밖에 거두지 못했고 2001년에는 10승에 4점대 평균자책점으로 더 하락세였지만 2002~04 3년동안 17,16,13승 승률 7할에 3점대 초반의 평균자책점을 안정되게 쌓아주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21]
또한 2002년 11월 9일 미일 올스타전에서 배리 본즈를 상대로 3연타석 삼진을 먹이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22]
팀이 혼란기였던 05~06 두 시즌에는 8승, 9승에 머물렀지만 꾸준히 3점대 평균자책점을 찍어주며 팀 선발진의 기둥역할을 했다. 2006 WBC에 출전해 한국 선수들을 울렸으며, 해외에서도 다시 한번 우에하라의 입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2007년에는 시즌 개막 전에 부상을 당하면서 선발 투수 역할에 차질이 생기자 끝내 임시 마무리 투수로 전업했지만, 4승 3패 32세이브 1.74의 평균자책점으로 특급 마무리 급의 성적을 거뒀다. 2008년 4월 4일에 FA 자격을 충족하게 되었고, 시즌이 끝나면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시즌 초 슬럼프를 겪으며 2군에 내려가는 고난을 겪기도 했지만 후반기에 어느 정도 부활하며 6승 5패 5세이브 평균자책점 3.81의 비교적 평범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일본시리즈 우승을 한 뒤에 미국으로 떠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으나, 요미우리는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시리즈에서 7차전까지[23] 가는 접전 끝에 시리즈 4:3 역전패하면서 그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시즌이 끝난 뒤, 우에하라는 정식으로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했고,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2년 계약을 맺었다. 등번호는 요미우리 시절과 마찬가지로 19번을 택했다. 끝끝내 요미우리는 우에하라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24]
3.3. 메이저리그 진출
2008년 시즌종료 후 FA 자격을 획득한 우에하라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하였고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2년 계약을 맺게 된다.하지만 우에하라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다른 투수와는 달랐다. 알려진대로 원래 메이저리그를 꿈꾸던 선수였지만 10년이 지난 30대 중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진출한데다 그 전시즌 당한 부상경력 때문에 당시 전망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았다.
이적 첫해인 2009년 시즌 초만 해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5선발로 나와서 첫 두경기 승리뒤 두달동안 단 1승도 추가하지 못하며 6월달에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을 당하면서 사실상 선발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우에하라는 불펜투수로 강등된 뒤에야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하는데, 2010년부터 완전히 불펜투수로 전향해서 5월달부터 셋업맨으로 나온 우에하라는 8월부터 마무리로 정착해 13세이브 2블론에 평균자책점 2.86이라는 준수한 성적으로 시즌 후반 마무리 투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2011년에는 케빈 그렉 앞의 셋업맨으로 돌아가 13홀드에 1.72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안정적인 8회 셋업역할을 수행하던 도중, 월드시리즈 진출을 노리는 텍사스 레인저스의 불펜 강화 목적으로 텍사스의 유망주 토미 헌터, 크리스 데이비스와 2:1 트레이드 되어 텍사스로 이적한다. 그러나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하고 나서는 17이닝동안 홈런을 5방이나 맞는 구위가 문제가 되어 4.00의 만족스럽지 못한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입지가 축소되어 6~7회에 나오거나 패전처리를 맡는 등 텍사스에서는 볼티모어 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했다.
2012시즌 역시 텍사스에서 뛰며 6~7회 셋업맨 역할을 하였고 다소 실망스러웠던 지난해와는 달리 부상으로 많은 기간을 결장했음을 감안하더라도 1점대 ERA와 10개가 넘는 9이닝당 탈삼진 비율 등 좋은 활약을 펼쳤다.
3.3.1. 보스턴 레드삭스
2013시즌을 앞두고 425만불을 받는 조건으로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했다. 팀의 같은 일본인 투수인 타자와 준이치와 함께 불펜의 기둥을 이루며, 기존 마무리 투수였던 앤드류 베일리의 부진과 시즌아웃이 겹쳐 38세의 나이에 특급 클로저로 각성했다[25]. 시즌 후반 37타자 연속 범타 기록등 그야말로 특급 클로저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고 9월 20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홈경기에서 8회 1사 이후 등판, 1 2/3이닝을 2K 퍼펙트로 틀어막고 메이저리그 데뷔 처음으로 한시즌 20세이브 달성과 동시에 팀의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우승을 확정지었다.정규 시즌 최종 73경기 74.1이닝 4승 1패 13홀드 21세이브(총 24번 세이브 기회) ERA 1.09 101삼진을 기록했다. fWAR는 3.1, bWAR은 3.6을 찍었는데 MLB에서 선발-불펜 분업화 이후 불펜 투수로는 역대급 시즌에 들만한 성적을 찍었다. 다만 시즌 중반부터 마무리로 투입되었기 때문에 세이브 수가 적다는 게 아쉬운 점이다. 만약 풀타임 마무리로 뛰었다 40세이브 이상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26]
10월 7일 보스턴과 템파베이의 디비전 시리즈 3차전 5:5 동점상황 9회말에 올라오지만 끝내기 홈런을 내주며 3차전 패전투수가 되고 만다. 하지만 10월 8일 디비전 시리즈 4차전 8회 2사부터 등판해 9회까지 깔끔하게 막고 보스턴을 챔피언십 시리즈로 올려놓았다. 10월 17일 보스턴과 디트로이트의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5게임에 등판하여 6이닝 9삼진 무실점 3세이브로 아시아 선수 최초로 ALCS MVP를 수상했다.
2013 월드 시리즈 4차전에서 세이브를 올리며 아시아 선수 최초 월드 시리즈 세이브를 기록했다. 5차전에서도 등판하여 이틀 연속 세이브를 기록했고 레드삭스가 시리즈 전적 3:2, 스코어 6:1로 앞서있던 6차전 9회초에 등판,[27]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레드삭스의 95년만의 홈 우승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했다.
월드시리즈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내고나서
참고로 이 시리즈는 3차전에서 끝내기 주루방해, 4차전에서 끝내기 픽오프가 나오는 등 참 다이나믹한 시리즈였는데 그때 투수가 모두 우에하라였다. 거기다 마쓰이 히데키를 이은 2번째 일본인 월드시리즈 MVP가 될뻔했지만 데이비드 오티즈가 무시무시한 활약을 보여주어 아쉽게 월드시리즈 MVP는 수상하지 못했다.
월드시리즈 우승트로피를 드는 우에하라와 타자와 준이치. 어디서 본거 같은 느낌이 든다.[28]
무엇보다 경악할점은 ALDS, ALCS, 월드시리즈까지 포스트 시즌동안 볼넷을 하나도 허용하지 않은것은 물론이고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로 단 1볼넷만을 허용할 정도로 미친 제구력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시즌의 반과 포스트시즌 동안 무려 1볼넷만을 허용한 우에하라
시즌후 백악관 투어때는 오바마에게 믿을수 없는 투구였다고 극찬을 받기도 하였고 실제 정규시즌부터 포스트시즌까지의 활약을 전부 고려했을때 선발 불펜 분업화 이후 불펜투수로 메이저리그 역대급에 들어갈만한 활약을 한 시즌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시즌까지 합친 전체 시즌 성적으로는 87.3이닝, 평균자책 1.03, 117삼진을 기록했다.
또한 불펜 투수라는 한계에도 불과하고 사이영 상, MVP 투표에서도 무려 사이영 상 7위, MVP 19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게 되었다. 당장 불펜 투수 거기다 시즌 중반부터 겨우 마무리로 투입되어 클래식 누적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런 성적을 기록했다는 것을 보면 정말 놀라운 시즌이 아닐 수 없다.
2014년에도 초반에는 작년의 모습을 이어가는가 싶었지만 시즌이 지나면서 나이가 속일 수 없는지 점점 페이스가 떨어졌다. 다만 올스타로 뽑혀 올스타전에도 출전하여 쉽게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마쳤다. 2014시즌 성적은 6승 5패 26세이브 평균자책점 2.52. 시즌이 끝나고 보스턴과 2년 1,800만달러에 재계약을 맺었다.
40살이 된 2015년에도 안정적인 마무리로 활약하고 있었으나, 8월 8일 열린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이안 킨슬러가 친 강습타구에 손목을 맞았고, 골절 진단을 받으면서 시즌 아웃되었다. 시즌 성적은 2승 4패 25세이브 평균자책점 2.23이었으며 시즌 후 보스턴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1:4 트레이드로 크레이그 킴브럴을 영입하면서 2016시즌은 마무리가 아닌 셋업맨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트레이드 발표를 앞두고 존 패럴 감독이 우에하라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했다고 하는데, 우에하라 본인은 이에 대해 흔쾌히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2016시즌 초반에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중반 들어 다소 부침을 보이며 평균자책점이 4점대까지 올라가기도 했고, 부상 때문에 한 달 넘게 결장하는 등 레드삭스에 온 뒤 가장 어려운 시즌을 보냈다. 그래도 부상에서 돌아온 후에 등판한 11경기를 전부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팀의 지구 우승에 기여했다. 시즌 성적은 2승 3패 7세이브 18홀드 평균자책점 3.40.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디비전 시리즈에서도 두 번 등판해 전부 무실점으로 막았으나 팀은 3연패로 허무하게 광탈했으며 시즌 후 레드삭스와의 계약이 만료되는데, 우에하라 자신은 불러주는 팀만 있다면 메이저리그에서 계속 뛰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뒤 시카고 컵스와 1년 600만 달러에 계약을 체결하면서 시카고 컵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3.3.2. 시카고 컵스
2017년 4월 22일까지 8경기 1패 2.70 ERA로 괜찮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후반기에는 무릎 부상의 여파로 인해 성적이 떨어졌고, 최종적으론 49경기 3승4패 2세이브 14홀드 ERA 3.98이라는 아쉬운 성적을 기록했다.시즌 후 컵스와 단년 계약이 끝나면서 FA로 풀렸다. 본인은 일본 복귀는 물론 마이너 계약도 수락할 생각이 없으며 메이저 계약 오퍼가 없을경우 은퇴하겠단 결의를 다지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역대급 얼어버린 FA 시장에 2018년 3월이 되어서도 팀을 구하지 못했고, 자신도 현역으로 뛰기 위해 일본 복귀도 다시 생각해보고 있댜는 기사가 나왔다.
3.4. 다시 요미우리로
요미우리 복귀식에서의 모습(2018년 3월) |
그리고 2018년 3월 9일 일본 복귀를 결정, # 10년 만에 친정팀 요미우리로 돌아왔다. 과거 팀메이트이자 생년월일까지 같은 동갑내기 친구 타카하시 요시노부와는 선수-감독 관계로 재회하게 되었다. 기존의 등번호 19번은 후배 에이스 스가노 도모유키가 달고 있어 우에하라는 11번을 달게 되었다.
첫 등판인 3월 31일 한신전에서 1이닝 11구 1탈삼진 무실점으로 홀드를 챙기면서 4월 초까지는 무실점으로 계속 홀드를 챙기면서 4연속 홀드를 기록했다.
그러나 4월 10일 DeNA전 접전 상황에서 아웃 카운트를 1개밖에 못 잡고 3피안타 3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되었다. 그리고 5일 휴식 뒤 15일 히로시마 전에서도 접전 상황에서 2/3이닝동안 피홈런 1개 사구 1개 피안타 3개 3실점으로 다시 패전투수, 2시합 연속으로 접전 상황에서 불을 지르면서 전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5월부턴 조금씩 안정을 되찾은듯 방어율을 조금씩 내렸으나 피안타 및 피홈런은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히 많다.
복귀 후 과거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팬들이 많겠지만 흐르는 세월 앞에선 천하의 우에하라도 어쩔수 없는 모양...
9월 25일 왼무릎 수술을 받아 팀동료들보다 먼저 시즌아웃되었고 시즌 후 보류선수명단에서 제외되어 FA 자격을 취득했으나 나이가 40이 넘은 베테랑을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영입하려는 구단이 없어 사실상 은퇴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선수 본인은 현역 연장 의지가 강했고 결국 요미우리와 75% 삭감된 금액인 1년 5000만엔에 재계약을 맺었다. 등번호도 스가노 토모유키가 공식 '에이스 번호'인 18번을 달면서 2008시즌 이후 11년만에 19번을 되찾았다.
하지만 수술로 인한 재활로 인해 2019시즌 히로시마와의 원정개막전[29] 출장은 불발되었고 4월중 복귀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3.5. 은퇴
그러나 1군에 한번도 올라오지 못했고 2019년 5월 20일 은퇴를 발표했다. 시즌 중 이례적인 발표했으며 '더이상 직구가 통하지 않는다' 가 이유라고 한다. 이날까지 2군경기 9경기 등판 11피안타 4실점 3.60의 방어율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나쁜 성적은 아니지만 2군을 압도했다고 할 만한 수준도 아닌 성적이었다.스포츠호치와의 인터뷰에서 "1군에서 통할 만한 선수는 2군을 확실히 압도하는데, 2군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내가 통할 리가 없다", "2군에서 내가 1이닝 이상 던지면 그만큼 젊은 투수는 던질 기회가 줄어든다. 때가 됐다 싶으면 미련없이 떠나는 게 후배들과 팀을 위하는 길이다" 등등의 말을 남겼다. 구단에서는 일단 시즌을 완주할 것을 권했지만 본인이 거절하였다고 하며 결국 구단도 본인의 뜻을 존중해주기로 했으며 이렇게 레전드가 또 한명 마운드를 떠나게 되었다.
3.6. 국가대표 경력
우에하라 고지는 아마추어 때부터 프로 때까지 국제전에 통산 25전 12승 무패 2세이브라는 기록을 남겼다. 프로로 출전한 경기로만 제한해서 보더라도 10전 4승 무패 2세이브로 '승리의 보증수표'같은 존재로 국가대표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한국에는 2006 WBC 준결승전에서 스플리터 낚시로 악몽을 선사한 투수로 유명하다. 이 덕에 팀은 탄력을 받아 WBC 초대 대회를 우승하였다.하지만, 우에하라 개인의 성적은 한눈에 봐도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는 있으나 일본의 프로 1군 선수가 선발된 대회에서 우에하라가 참여한 대회 중 2006년 WBC를 제외하고는 팀은 메이저 대회에서 그닥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경우에 호주에 밀려 4강전에서 탈락하고 3,4위전에 가서 가까스로 동메달로 마친 경우나,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노메달 굴욕을 맛본 것이 대표적이다.
아마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이 징크스는 유효함을 알 수 있다. 1997년 8월 11일, 스페인 대륙간컵에서 쿠바를 꺾고 우승이라는 업적을 이루기는 했지만,[30] 이 외에는 번번이 한국의 벽에 가로막혔다. 1997년 6월 대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결승 한국전에서는 김동주한테 연타석홈런을 허용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고,[31] 1998년 8월 이탈리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8강 한국전에서는 8회까지 탈삼진 13개 포함 1실점 호투했지만, 9회 대거 4실점하면서 동점을 허용했고,[32] 이후 연장 10회 접전끝에 팀도 패배한다.[33][34][35]
다만 1997년 8월 31일, 고베 그린스타디움에서 열린 <애틀랜타올림픽 기념 4개국 친선대회> 한국전에서는 완봉승을 거둔 적이 있다.[36]
한편으로 이런 점은, 원조 한국킬러로 불린 노모 히데오와 묘한 대조를 이루기도 한다. 노모는 아마시절에 대결한 한국전마다 개인호투와 팀승리를 동시에 달성했다.[37][38]
- 1988년 9월 서울올림픽 준결승 한국전 구원승.[39][40][41]
- 1989년 8월 푸에르토리코 대륙간컵 예선 한국전 구원승.[42][43]
- 1989년 9월 한국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결승 한국전 선발승.[44][45]
3.6.1.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우에하라는 아마추어 시절에도 1997년 6월 대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46] 1997년 8월 스페인 대륙간컵,[47] 1998년 이탈리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48] 등 국제대회에 숱하게 출전한 선수였다. 하지만, 프로 선수로서 우에하라가 일본 야구 국가 대표팀 일원으로 참여한 첫 대회는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이다.[49] 이 대회는 아테네 올림픽 예선을 겸한 대회기도 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삿포로 참사로 불리는 대회로도 유명하다.이 대회에서 우에하라는 한국과의 결전에 선발로 예상되었으나 예상 외로 대회 첫 번째 경기인 중국전에 나왔다. 1회, 선두 타자에게 안타를 내주었으나 이후, 5회 1아웃까지 단 한타자만 출루 시켰을 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7회, 장 시아위에게 가운데 직구가 쏠리는 바람에 솔로 홈런을[50]내줬지만, 더 이상 실점하지 않았다. 팀 타자들은 2회와 7회에 각 4점씩 점수를 뽑아주는 등 무난하게 팀은 최종 스코어 13:1로 승리했고 우에하라는 승리 투수가 된다. 이날 리그에서의 모습을 재현하며 그야말로 중국 타자들을 꽁꽁 묶어 7이닝 3피안타 11탈삼진 2볼넷 1실점 ERA 1.29을 기록하였고 팀 타자들이 7회까지 8점을 득점하는 등 타선도 호조를 보이며 우에하라는 프로 첫 국제전[51]에서 승리 투수가 되었다. 이후, 팀은 한국과의 경기까지 모두 이기며 대회를 3승 무패 전적으로 1위를 기록하여 아테네 올림픽에 직행하게 된다.
3.6.2.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상술된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예선을 겸한 대회였는데, 일본은 3승 무패로 예선을 통과해 아테네 올림픽 본선을 출전한다. 우에하라는 대표팀에 발탁되며 총 2경기에 나와 ERA 2.08을 기록하며 국제용 투수다운 면모를 보이며 팀의 동메달 획득에 기여한다.- 먼저, 팀의 첫 경기인 이탈리아 전에 선발로 나와 6이닝 4피안타 4탈삼진 1볼넷 무실점을 기록하였고, 팀 타선도 폭발하여 12:0으로 이기는 덕에 선발승을 챙긴다.
- 이후, 휴식을 취하다가 예선전에서 일본이 가장 고전했다고 볼 수 있는 대만전에 선발로 나온다. 의외로 대만 타선에 꽤나 고전한다. 2회까지 잘 막아낸 우에하라였지만, 우에하라는 3회에 들어 대만 타자들에게 점수를 내주고 만다. 3회 2아웃까지 잘잡아 놓았지만 2번 타자 훙퉁위에게 좌전안타를 내주었고, 3번타자 펑정민에게 볼 넷을 내줘 2사 1,2루 위기를 맞는다. 여기서, 4번 천진펑에게 스리런 홈런을 맞으며 순식간에 스코어 3:0으로 뒤지게 된다. 투아웃까지 잘잡아놓고도 연속 세 타자 출루, 게다가 그 마지막은 방점을 찍은 스리런 홈런이었기에 멘탈이 흔들리만도 했지만, 이후 우에하라는 컨디션을 되찾아 6회까지 더 이상 실점하지 않고 막아낸다. 그러나, 7회에 또 위기가 찾아온다. 7회도 투 아웃까지 잘 잡아놓고 연속 2안타를 맞으며 2사 1,2루 위기를 내준 상황이었고 점수가 더 벌어지면 사실상 경기가 넘어갔다고 볼 수 있는 상황에서 2번 타자 훙퉁위가 친 잘맞은 타구가 나왔는데, 우익수 후쿠도메 고스케의 멋진 다이빙 캐치로 다행히 무실점으로 7회 이닝을 마무리한다. 우에하라가 내려간 뒤 7회말 미야모토 신야의 1타점 내야 땅볼, 리그내 같은 팀 동료 타카하시 요시노부의 동점 2점 홈런이 터지며 우에하라는 패전을 면했고 8회부터는 이시이 히로토시가 마운드를 이어받았다. 이후 정규 이닝에서는 양팀의 득점은 없었고 10회말 1사 만루에서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의 끝내기 1타점 희생플라이로 4:3 일본이 신승을 거두며 조별 예선에서 가장 힘든 혈전을 마무리하였다. 이 날 우에하라의 기록은 7이닝 8피안타 6탈삼진 2볼넷 3실점 ERA 3.86 노디시전으로 이전보다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상대 선발 왕젠민도 6과 3분의 2이닝 동안 3실점을 하며 선발 싸움에서는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이후, 일본은 4강 호주전에서는 마쓰자카 다이스케,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예선 캐나다전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였던 와다 츠요시를 선발로 내보내면서 우에하라 고지는 더 이상 출전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고 대만과의 경기를 끝으로 대회를 동메달로 마무리한다. 아테네 올림픽에서 우에하라 고지의 최종 성적은 총 2경기 1승 무패 13이닝 12피안타 12탈삼진 3볼넷 3실점 ERA 2.08로 대만전 초반에 흔들리기는 했으나 그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국제용 투수 다운 면모를 보였다.
3.6.3. 2006 WBC
2005년 시즌 중에 무난한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9승 12패를 기록하면서 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시즌 패전 수가 승리 수를 넘는 시즌을 보내며 일각에서는 2006 WBC 일본 야구 대표팀에 발탁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다.[52] 하지만, 당시 대표팀 감독이던 왕정치 감독은 그간 국제대회에서 국제용 투수다운 면모를 보여온 그를 다시 대표팀에 승선시켰다. 그리고, 감독이 그를 상당히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1,2라운드 각 라운드의 첫경기와 준결승전같이 분위기를 잡는데 중요한 경기나 굵직굵직한 매치업에서 그를 선발로 내보냈다는 것이다.- 우에하라는 팀의 대회 첫 경기인 중국과의 경기에 선발로 나온다. 1회 안타와 데드볼을 내줘 2사 1,2루의 위기를 맞았지만 후속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1회를 실점없이 마무리한다. 이후에는 별 다른 위기 없이 3회까지 잘 막고 있었고, 팀 타자들도 점수를 내주어 2:0으로 앞선채로 4회말에 다시 마운드에 들어선다.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으나 후속 타자에게 안타를 맞았고 곧바로 다음타자 왕웨이에게 우측 담장을 넘기는 동점 투런 홈런을 맞는다. 스코어는 2:2가 되었고, 멘탈이 흔들릴법한 상황에도 이후 두 타자를 범타처리하며 4회를 잘 마친다. 5회초에는 니시오카 츠요시의 스리런 홈런과 후쿠도메 고스케의 솔로 홈런으로 4점을 뽑았고 5회말에 우에하라는 다시 등판했다. 5회에는 선두타자 안타를 내주었으나 후속 타자를 유격수 땅볼 처리한다. 이후 두 타자에게 연속 안타를 내주며 1사 만루의 위기가 엄습하였지만 다음 타자를 병살 처리하여 실점 없이 5회를 마무리한다. 이후 6회부터는 투수는 시미즈 나오유키로 교체되었고 팀 타선은 봇물 터지듯 계속 터져 18:2로 대승을 거둔 덕에 우에하라는 1승을 올린다. 이 날 경기에서 기록은 중국전 5이닝 7피안타 6탈삼진 1사구 2실점 ERA 3.60으로 비교적 약체인 중국을 상대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왕웨이에게 홈런을 맞았을 뿐 아니라 여러번 위기를 내주는 등 국제용 투수같던 그간의 모습과는 다르게 첫 경기 약체에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이때문에, 그가 2005 시즌의 부진의 여파가 2006 WBC 대회까지 이어지는 것아니냐며 일본 언론에서는 불안해했다.
- 이후, 대만전과 한국전에서 그는 휴식을 취하여 1라운드 아시아시리즈에서는 더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2라운드 당시 강팀으로 분류되었던 미국과의 첫 경기에 등판하게 되었다. 이날 팀 타선은 1회에 스즈키 이치로의 선두 타자 홈런으로 1점, 2회에 2점을 추가해 3:0으로 우에하라를 지원해주었다. 우에하라도 2회 치퍼 존스에게 솔로홈런을 내주기는 했으나 이후에는 추가 실점을 하지않고 5회까지 마무리하였고, 승리투수 요건을 갖춘 채 마운드를 시미즈 나오유키에게 넘겨 주었다. 이날 우에하라의 기록은 5이닝 7피안타 2탈삼진 무사사구 1실점 ERA 1.80 이었다. 하지만, 시미즈 나오유키가 상대 타자 데릭 리에게 6회에 동점 투런 홈런을 맞는 바람에 그의 승리는 날아가 버린다. 설상가상으로 주최국인 미국의 농간으로 편파판정에 의해 득점이 취소되는 등 악운까지 겹쳤고, 결국 팀은 마무리 후지카와 큐지가 상대 알렉스 로드리게스에게 끝내기 안타를 내주며 4:3으로 패배한다. 첫 중국과의 경기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였던 그였으나 직후 등판인 미국전에서 좋은 피칭을 선보이며 왜 그가 국제용 투수인지를 증명해 보인 경기였다. 특히, 초호화 미국 라인업을 상대로 본인의 주무기인 스플리터로 미국 타자들의 헛스윙을 유도해내며 그 위력을 과시했다. 현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훗날 MLB에 진출한 그였기에 이 경기는 본인의 무기를 미국 최고 타자들에게 미리 시험해본 격이 되었다.[53] 하지만 팀은 편파판정이 겹쳐 찝찝하게 미국에 패하였고 설상가상으로 2라운드 마지막 한일전에도 패하며 1승 2패로 일찍 귀국할 뻔 하였으나 미국이 뜬금없이 멕시코에 패하는 덕에 어부지리로 일본은 준결승전에 진출하였고 대회 당시 2연패로 아픔을 안겨주었던 한국을 재차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날 우에하라는 한일전 선발로 예고되었고 대회 세 번째 등판을 준비한다.
특히, 이 때 한국 대표팀은 6전 6승 무패 승률 100%로 파란을 보이고 있었던 데다가 일본을 이미 당대회에서 두 차례나 꺾은 후였으므로 기세가 등등해있던 때다. 게다가, 상대팀 감독이던 김인식감독은 두가지 이유로 직전 한일전 2경기에서 엄청난 호투를 보여준 와타나베 슌스케보다 우에하라가 편하다고 밝혔다. 첫 번째는 우에하라의 직구 스피드가 전성기에 비해 떨어졌다는 이유였다. 두 번째는 투구 매커니즘이나 릴리스 포인트가 독특하고, 정교한 제구력에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하는 와타나베보다는 정통파 우완에다 직구와 스플리터의 투 피치인 우에하라를 상대하는 것이 편하다는 이유를 들어 오히려 그의 준결승 선발을 반겼다. 한국 내에서도 여러 기자들도 아무리 우에하라가 미국전에 좋았다지만, 직전 한일전 선발로 2경기 나와 10.2이닝 1실점 ERA 0.84이란 말도 안되는 기록을 남긴 와타나베보다 까다로울 수 있겠냐며 우에하라의 선발로 인해 경기를 낙관하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한국 팬들도 경기 이후 와타나베보다 우에하라가 더하다며 그를 경기 전에 얕보고 경계심이 덜했던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경기 전에 우에하라에게 한국 타자들이 당하기 전에는 일본 내에서도 한국의 간판타자 이승엽[54]과 이종범[55]의 타격 컨디션은 물이 올라있던 때라 우에하라의 번뜩이는 활약 없이는 한국에게 힘들 것이란 부정적인 전망이 나왔다.
- 그 우려를 날려버리며, 우에하라는 준결승전에서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었고 한국 타자들을 7이닝 동안 무실점으로 돌려세운다. 심지어 7이닝간 무사사구의 쾌투였다. 시원시원하게 직구로 스트라이크를 거침없이 던져대는 그를 상대로[56] 한국 팬들은 알고도 못치는 공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거기다가 스플리터 낚시로 일본산 피네스 피처[57]스러운 면모까지 동시에 보여주었다. 이 경기 덕에 한국에서 우에하라는 오타니 쇼헤이와 더불어 한국 킬러라 불리는 일본 투수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웠던 우완 선발 투수로 종종 회자된다. 경기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자면, 우에하라는 1회 첫타자 이병규를 공 네개만에 좌익수 뜬 공처리 하였으나, 이종범에게 2루타를 맞아 1사 2루의 위기를 맞게 된다. 다음 타자는 당시 대회에서 홈런 1위에 한국 타선에서 타격 컨디션이 가장 좋던 이승엽이었다. 그러나, 우에하라는 높은 직구로 그의 헛스윙 삼진을 유도하였고 후속 타자인 최희섭도 1루 땅볼 처리하며 위기 상황을 실점 없이 넘긴다. 상술한 1회 1사에서 이승엽의 삼진을 시작으로 5회 투아웃 까지 무려 13 타자 연속 범타 처리를 하며 5회 2사까지 1회의 이종범에게 2루타를 내준 단 한차례를 제외하고는 출루 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셈이었으며 5회 투아웃에 박진만에게 풀카운트에서 던진 직구가 가운데에 몰렸고, 박진만이 이를 받아쳐 중전 안타를 만들어냈다. 13타자 연속 범타 처리에서 기록은 끊겼으나, 다음 타자인 조인성을 중견수 플라이 처리하며 실점없이 5회 이닝을 마무리한다. 6회에도 이병규를 삼진 처리하는 등 삼자범퇴 처리하며 6회를 무난하게 막아내었다. 그리고 7회초에 5회까지 상대 선발 서재응의 피칭에 막혀 침묵하고 있던 팀 타선이 폭발하며 후쿠도메 고스케의 김병현을 상대로한 2점 홈런을 앞세워 대거 5점을 득점하였고, 7회말 우에하라는 5:0 앞선 채로 여유있게 마운드에 오를 수 있었다. 타자들이 점수를 많이 뽑아준 덕인지, 더 여유만발해진 우에하라 공의 무브먼트는 더욱 좋아졌고 3,4번 타자인 이승엽[58]과 최희섭을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이후, 이진영에게 중전 안타를 맞았으나 이범호의 대타로 나선 정성훈을 삼진 처리하며 7회 이닝도 무실점으로 마무리하였다. 8회에는 마운드를 야부타 야스히코에게 넘겨주며 우에하라는 경기를 마쳤고, 팀도 8회초에 1점을 추가한데다가 8,9회는 야부타 야스히코와 오츠카 아키노리가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6:0 팀 영봉승 게임을 만든다.
우에하라는 7이닝 3피안타 8탈삼진 무사사구 무실점 승리투수가 되었다. 이 날 경기에서 놀라웠던 점은 당시 컨디션이 최고였던 이승엽[59]을 상대로 겁없이 직구승부를 해서 두 개의 삼진을 직구로 잡아내었던 점이다. 당일 경기에서 우에하라는 고작 평균 80마일 중후반대[60]의 직구를 뿌렸지만, 원하는대로 족족 과감하게 스트라이크존에 직구를 넣으며 한국 타자들을 당황케 했다. 버리는 공 없이 빠르게 승부하는 공격적 투구 패턴에 한국타자들은 당황했고, 여기에 특유의 스플리터를 섞어 던지니 공격적인 피칭에 기교까지 섞여 한국 타자들은 그에 당황해 배트를 힘없이 휘둘르거나 빗맞은 땅볼과 평범한 플라이볼이 다수 양산되었다. 특히, 7회 당시 많은 공을 던졌음에도 지치지 않으며 오히려 직구의 구위가 더 살아나 이승엽에게 직구로 룩킹 삼진을 뺏어내는 것은 압권. 7회 마지막 아웃카운트도 직구로 정성훈을 잡아내면서, 한국 팬들에게 '쟤는 공도 그닥 안 빠른데, 직구로 삼진을 뭐 저리 자신있게 잡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였다.[61] 직구뿐 아니라, 스플리터 낚시로도 무수히 많은 땅볼과 빗맞은 혹은 평범한 플라이볼을 양산해 내었다.[ 특히, 이날 우에하라의 쾌투로 일본은 투수를 세 명[62]만 기용한 채로 준결승전을 마쳐 결승전에 총력을 다할 수 있게 된다. 여담으로, 한국의 김동주는 1997년 제19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비거리 162M의 홈런을 포함, 우에하라를 상대로 총 4방의 홈런을 쳐냈을 정도로 우에하라에게 상당히 강한 면모를 보인 타자였다. 실제로, 우에하라에게 막혀 허무하게 대회에서 탈락하자 우리나라의 주포 김동주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야구팬과 한국 기자들이 많았다. 대회 시작전 부터 김동주는 우에하라와의 맞대결을 회상하며 "우에하라 같은 투수들도 그리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였고 "우에하라, 와다 나와라"라고 자신감을 표하기도 했었다. 김동주는 당대회에서 1라운드 대만과의 경기 중 1루 슬라이딩을 하다 대회에서 낙마한 바람에 우에하라와의 맞대결은 성사되지 못했다.
3.6.4.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우에하라는 2007년 부터 마무리로 보직을 변경하였고 좋은 모습을 보여 그해 12월에열린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도 발탁되어 출전한다. 이 대회는 2008 베이징 올림픽 본선행 티켓이 걸려있는 대회였으며 1위만이 직행을 확정할 수 있는 대회였다. 우에하라는 이 대회에서 2경기에 마무리 투수로 출전하였으며, 특히 한국과의 경기에서 다시 출전해 한국 타자들을 삼자범퇴로 막아내며 2006 WBC에서 한국을 상대로 악몽을 선사했던 그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재현하였다.- 우에하라는 첫 경기인 필리핀과의 경기에서는 점수차가 많이 벌어져 휴식을 취하였고, 중요한 경기였던 한국과의 경기에서 마무리 투수로 출전한다. 팀이 4:3으로 이기고 있던 9회말 대타 장성호를 2루수 플라이 처리, 고영민을 삼진 처리, 이택근을 1루수 플라이 처리하며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하며 팀의 승리를 지켜냈다.
- 다음 경기이자 마지막 경기인 대만전에 팀이 10:2로 이기고 있던 9회말 세 번째 투수로 나와 첫 타자 장타이산을 삼진 처리 하는 등 세 타자를 범타로 돌려세우며 2경기 연속 삼자 범퇴로 마무리하여 팀의 승리를 지켜냈고 일본은 베이징 올림픽 본선에 직행하게 된다.
이 대회에서 기록은 2이닝 무피안타 2탈삼진 무사사구 무실점 ERA 0.00 1세이브. 한국에게는 한국 킬러다운 면모를 재차 확인시켜 주었고, 대만에게는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부진했던 것을 조금이나마 설욕할 수 있었다.
3.6.5. 2008 베이징 올림픽
우에하라는 2008년에 2007년과 달리 매우 부진하였다. 2008년에는 다시 선발로 복귀를 원했던 그였고 정규시즌 첫 등판 경기에서 10개의 탈삼진을 솎아내지만 4실점하며 완투패한다. 하지만, 그 이후에 더욱 상태가 안좋아지며 4월 한달에만 5경기에서 4패, 평균자책점 6.75로 부진하였고 결국 2군에 내려가게 된다. 7월에 당시 대표팀 감독이던 호시노가 인터뷰에서 대표팀에 가장 필요한 선수라고 발언하며[66] 우에하라의 국제대회에서 풍부한 경험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우에하라를 대표팀에 승선시켰다. 이때문에, 부진하던 우에하라는 국제대회 출전을 위해 부랴부랴 셋업맨으로 다시 포지션을 변경하여 선발이 아닌 구원으로서 1군에 다시 등판한다. 결국, 전반기 마지막 경기였던 7월 29일, 8회 1점차인 상황에서 등판하여 1이닝 무실점을 기록 하였고 삼진 3개까지 솎아내며 전반기 부진을 딛고 베이징 대회 직전에 다시 반등하는데 성공했다.- 본선에서 첫 경기인 쿠바와의 경기는 출전하지 않았고 팀의 두 번째 경기였던 대만과의 경기에서 팀이 6:1로 이기던 9회말에 출전하였다. 선두타자를 투수 땅볼, 이후 3번 타자 펑정민도 투수 땅볼로 처리하였다. 다음 타자는 대만 팀의 4번타자이자 직전 대회인 아테네 올림픽에서 3점홈런의 아픔을 주었던 천진펑. 우에하라는 천진펑을 삼진처리하며 4년전 올림픽에서 홈런을 내줬던 것을 설욕한다. 결과적으로 삼자범퇴로 대만 타자들을 돌려세운 그는 이날 1이닝 무피안타 1탈삼진 무사사구 무실점 기록했다.
- 이후, 이전대회에서도 한국전에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였으나 한국과의 예선 경기에서 의외로 그가 등장하지 않았고 캐나다와의 경기에서 접전인 1:0에서 9회말에 등판한 그는 1이닝을 다시 삼자범퇴로 막아내며 팀의 승리를 지켜냈다.
본 대회에서 2경기 2이닝 무피안타 1탈삼진 무사사구 무실점 ERA 0.00 1세이브로 좋은 모습을 보인 우에하라였지만, 의외로 이후 중요한 경기들에서는 출전하지 못했다. 준결승전인 한국전에서도 9회에 등판할 예정이었으나 이와세의 불질로 불발되었고[67] 동메달 결정전에도 출전하지 못하면서 캐나다와의 예선 경기를 마지막으로 우에하라는 대회를 마무리한다. 리그 내에서는 당해년도 전반기에 안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대표팀에서 우에하라 개인은 좋은 모습을 보여 국제용 투수다운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팀은 참사급 경기들을 펼치며 노메달의 굴욕을 맛보는 바람에 우에하라의 커리어 마지막 국제대회인 베이징 올림픽에서 결국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 우에하라는 대회 직후 일본 팬들에게 노메달로 돌아와 죄송하다며 사과[68]하였고 대표팀 은퇴를 시사하였다. 결국, 다음년도 부터 열린 2009 WBC대회 등에 불참하며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그는 국가대표 커리어를 마무리 하였다.[69]
그의 프로 통산 국가대표 경기 성적은 통산 10전 4승 무패 2세이브 41이닝 35피안타 42탈삼진 5볼넷 1사구 7실점 ERA 1.54[70]로 국제용 투수다운 모습을 보였다. 특히 한국과의 경기는 통산 2경기 1승 1세이브 8이닝 3피안타 9탈삼진 무사사구 무실점 ERA 0.00으로 지지않는 에이스[71] 다운 면모를 보였다.
신기한 점은, 한국보다 비교적 약체인 중국과 대만과의 경기에서는 한국전에 보여줬던 모습에 비해 그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중국과의 경기 전적은 통산 2경기 12이닝 10피안타 17탈삼진 3사사구(2볼넷 1사구) 3실점 ERA 2.25이고 여기에 무려 홈런은 2방을 맞았다. 대만과의 경기 전적은 3경기 9이닝 8피안타 8탈삼진 2볼넷 3실점 ERA 3.00이었다. 물론, 못 던졌다고 볼 수는 없는 기록이다.
4. 연도별 성적
4.1. NPB
역대 기록 (NPB)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세 | 홀 | 이닝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WHIP | ERA+ | WAR |
1999 | 요미우리 | 25 | 20 | 4 | 0 | - | 197⅔ | 2.09 | 153 | 12 | 24 | 4 | 179 | 0.895 | 196 | 6.8 |
2000 | 20 | 9 | 7 | 0 | - | 131 | 3.57 | 112 | 20 | 22 | 1 | 126 | 1.023 | 105 | 2.2 | |
2001 | 24 | 10 | 7 | 0 | - | 138⅔ | 4.02 | 133 | 18 | 28 | 5 | 108 | 1.161 | 90 | 2.3 | |
2002 | 26 | 17 | 5 | 0 | - | 204 | 2.60 | 173 | 18 | 23 | 6 | 182 | 0.961 | 132 | 5.1 | |
2003 | 27 | 16 | 5 | 0 | - | 207⅓ | 3.17 | 190 | 28 | 23 | 5 | 194 | 1.027 | 132 | 4.7 | |
2004 | 22 | 13 | 5 | 0 | - | 163 | 2.60 | 135 | 24 | 23 | 5 | 153 | 0.969 | 167 | 3.6 | |
2005 | 27 | 9 | 12 | 0 | 0 | 187⅓ | 3.31 | 164 | 24 | 22 | 0 | 145 | 0.993 | 124 | 3.2 | |
2006 | 24 | 8 | 9 | 0 | 0 | 168⅓ | 3.21 | 157 | 24 | 21 | 1 | 151 | 1.057 | 114 | 3.0 | |
2007 | 55 | 4 | 3 | 32 | 4 | 62 | 1.74 | 47 | 4 | 4 | 1 | 66 | 0.823 | 204 | 2.5 | |
2008 | 26 | 6 | 5 | 1 | 5 | 89⅔ | 3.81 | 90 | 11 | 16 | 0 | 72 | 1.182 | 99 | 1.2 | |
2018 | 36 | 0 | 5 | 0 | 14 | 34⅔ | 3.63 | 32 | 5 | 5 | 2 | 24 | 1.067 | 110 | 0.1 | |
2019 | 1군 기록 없음 | |||||||||||||||
NPB 통산 (11시즌) | 312 | 112 | 67 | 33 | 23 | 1583⅔ | 3.02 | 1386 | 188 | 211 | 30 | 1400 | 1.008 | 128 | 34.1 |
4.2. MLB
역대 기록 (MLB)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세 | 홀 | 이닝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WHIP | ERA+ | fWAR | bWAR |
2009 | BAL | 12 | 2 | 4 | 0 | 0 | 66⅔ | 4.05 | 71 | 7 | 12 | 0 | 48 | 1.245 | 113 | 1.8 | 1.3 |
2010 | 43 | 1 | 2 | 13 | 6 | 44 | 2.86 | 37 | 5 | 5 | 0 | 55 | 0.955 | 146 | 1.3 | 1.4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세 | 홀 | 이닝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WHIP | ERA+ | fWAR | bWAR |
2011 | BAL/TEX | 65 | 2 | 3 | 0 | 22 | 65 | 2.35 | 38 | 11 | 9 | 0 | 85 | 0.723 | 183 | 1.2 | 2.1 |
2012 | TEX | 37 | 0 | 0 | 1 | 7 | 36 | 1.75 | 20 | 4 | 3 | 0 | 43 | 0.639 | 252 | 0.8 | 1.4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세 | 홀 | 이닝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WHIP | ERA+ | fWAR | bWAR |
2013 | BOS | 73 | 4 | 1 | 21 | 13 | 74⅓ | 1.09 | 33 | 5 | 9 | 1 | 101 | 0.565 | 379 | 3.1 | 3.6 |
2014 | 64 | 6 | 5 | 26 | 1 | 64⅓ | 2.52 | 51 | 10 | 8 | 1 | 80 | 0.917 | 159 | 1.1 | 1.8 | |
2015 | 43 | 2 | 4 | 25 | 0 | 40⅓ | 2.23 | 28 | 3 | 9 | 0 | 47 | 0.917 | 194 | 1.4 | 1.3 | |
2016 | 50 | 2 | 3 | 7 | 18 | 47 | 3.45 | 34 | 8 | 11 | 2 | 63 | 0.957 | 130 | 0.6 | 0.7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세 | 홀 | 이닝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WHIP | ERA+ | fWAR | bWAR |
2017 | CHC | 49 | 3 | 4 | 2 | 14 | 43 | 3.98 | 38 | 7 | 12 | 0 | 50 | 1.163 | 111 | 0.6 | 0.2 |
MLB 통산 (9시즌) | 436 | 22 | 26 | 95 | 81 | 480⅔ | 2.66 | 350 | 60 | 78 | 4 | 572 | 0.890 | 162 | 11.9 | 13.7 |
5. 기타
- 우에하라의 등번호 19번은 대학입시 실패후 1년 재수를 하는 동안 자신의 실수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에 선택해 지금까지 달고 있다고 한다.
- 1999년 7월, 신인으로서 올스타전 1차전 센트럴리그의 선발투수로 등판했다.[72] 그리고 1회 첫타자 마쓰이 가즈오를 삼구삼진 처리하며 기분좋게 출발하지만, 이후 3번타자 스즈키 이치로와의 생애 첫 맞대결에서 중월 솔로홈런을 허용한다.[73]
- 1999년 10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선발로 등판한 시즌 마지막 경기[74]에서 벤치의 지시로 야쿠르트의 강타자인 로베르토 페타지니를 고의사구로 거르게 되자 정면 승부를 못했다는 생각에 분했는지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영상 1분 53초부터. 페타지니를 거른 이유는 페타지니(홈런 42개)가 팀 동료 마쓰이 히데키(홈런 41개)와 홈런 레이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 참고로 이날 경기에서 둘다 홈런을 치지 못하며 홈런왕은 페타지니가 차지했다.
- 한 토크쇼에 출연해서 자신이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이유로 영어를 전혀 공부하지 않는 것이라고 꼽았다. 자신이 마운드에서 야유를 들으면 벌벌 떨 정도로 소심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한 미국팬은 일본어를 공부해서 우에하라상, 죽어라는 말을 일본어로 하기도 했다고 한다
- 김동주가 한때 우에하라의 천적이었다. 1997년 제19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비거리 162M의 홈런을 포함, 우에하라를 상대로 총 3방의 홈런을 쳐냈다.[75]
- 성 때문에 우에하라 아이 드립이 항상 붙는다.
- 요미우리 이승엽의 한일통산 400호 홈런 당시, 같은팀 선발투수였다.
- 은퇴 후에는 유튜브 채널을 열었다. 구독자 수가 약 78만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큰 채널이다.[76] 게스트를 섭외해 토크쇼를 하는 것이 주 컨텐츠인데 섭외력이 특히 뛰어나다고 한다. 2020년 10월 4일엔 채널을 통해 코로나 19 양성 판정을 받은 것을 밝혔다.
- 신인 시절이나 지금이나 외모 변화가 크게 없는 편이다. 덕분에 일본 야구인 중에서는 꽤 미중년이거나 동안에 들어간다.
- 장남 우에하라 카즈마(미국명 Kaz Uehara, 일본명 上原 一真)는 미국의 IMG 아카데미에서 투수 겸 외야수로 활동하고 있다. 투구와 타격 양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타격 쪽 재능이 조금 더 뛰어난 편이다. SNS를 보면 어린 시절 대부분을 미국에서 자라서 그런지 영어만 사용하고 일본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피드에서 풍기는 느낌 자체도 미국 느낌이 강하다. 추신수의 장남인 앨런 추와 비슷한 케이스라 할 수 있겠다.
- 후지카와 큐지와 유튜브 합동라이브때 한신 타이거스 감독을 맡고 싶다고 할 정도로 은퇴한 지금도 한신빠심이 매우 강하다.
- 2024년에는
- 7월 15일, 도쿄돔에서 개최된 요미우리와 한신의 은퇴선수들 매치.
- 7월 22일, 에스콘필드에서 개최된 한국과 일본의 은퇴선수들 매치 - 한일 드림 플레이어즈 게임에
연달아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1] 투수로써 탈삼진을 기록한게 아닌 타자로 당한 기록이다.[2] 1000이닝 이상 던진 투수들 한정.[3] NPB 공식 프로필[역지명] [5] 熱き体の 血潮燃やし 男だ上原 一球入魂(뜨거운 몸의 피를 불태워라 사나이다 우에하라 일구입혼)[6] 일본명 上原 一真, 미국명 Kaz Uehara[7] 국제대회에서 통산 25전 12승 0패 2세이브를 기록했다.[8] 본인은 커터라고 불렀다. 요미우리 초창기 시절 사용하다가 포심의 위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봉인하였고, MLB로 진출하며 다시 꺼내들었다. 구사율은 2~5% 정도.[9] MLB로 오며 딱딱한 MLB 마운드에 맞춰 점프하는 듯한 투구폼으로 변경한 걸 볼 수 있다. 제이크 피비를 많이 참고 했다고.[10] 투수들이 자신의 공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체감하지 못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로저 클레멘스도 자신의 패스트볼 구위를 올스타전에서 드와이트 구든의 공을 타석에서 겪어보고 포수에게 '내 공이 이것보다 느리냐 빠르냐' 물어봐서 알았으니. 참고로 그 때 포수의 대답은 '비슷하다' 였고 클레멘스는 '인간은 이런 공을 칠 수 없다' 라며 자신의 포심에 대한 자신감을 더욱 굳혔다고 한다. 특히 무빙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같은 경우는 투수들이 가장 자각하지 못하는 요소 중 하나로 뱀직구로 유명한 임창용조차 '내가 볼 때는 그냥 똑바로 날아간다. 포수가 오늘 공 움직임이 좋았다고 말해주거나 나중에 영상으로 올라온 거 보고 아는 거지' 라 대답했고, 마리아노 리베라와 켄리 잰슨처럼 쩔어주는 무브먼트의 커터를 던지는 투수들도 자기 공이 휘어지는 줄은 받는 선수들이 말해줘서 알았다.[11] 앞선 각주의 비슷한 예시로 스티브 칼튼이 있는데, 자신이 개발한 슬라이더의 위력을 MLB 정규시즌도 아닌 오 사다하루와의 친선전 대결로 체감했다. 당시 NPB와 메이저 리그와의 격차는 지금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여기서 큰 자신감을 얻었다. 참고로 칼튼의 슬라이더는 그냥 A급도 아닌 역대 최고로 손꼽힌다.[12] 분야를 막론하고 재능있는 자들이 본인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매우 흔하다. 본인에게 일상인 것에 특별함을 느끼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13] 2017년 4월 3일 컵스와 카디널스 경기에서 해설을 맡은 최희섭이 우에하라의 스플리터는 배트를 휘두르기 전까지 빠른 공과 구분이 안될 정도라고 평했다.[14] 우에하라의 2013년 패스트볼 구속은 89마일이며 스플리터 구속은 81마일이다. 보통 스플리터의 구속은 패스트볼과 4~5마일 정도 밖에 차이나지 않는다.[15] 물론 로이 할러데이는 항목에도 있지만 구속도 필요하면 90마일 중반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제구력과 구속을 모두 갖춘 투수였다. 핫 존의 크기가 유독 다른 투수들보다 좁은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제구력까지 괴물 수준이어서 그 장점이 더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16] 선발투수들은 21.9초[17] 하지만 정작 우에하라 본인은 마쓰이 히데키처럼 골수 한신빠돌이였다.[18] 혹자는 입단 과정에서 요미우리의 하청 업체에 근무하던 친척에게 압력이 가해졌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딱히 신빙성은 없는 루머다.[19] 사실 우에하라가 신인 때부터 주전을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실력도 있지만 운이 큰 몫을 했다. 바로 전 시즌인 1998년 당시 요미우리는 조성민을 선발로 쓰려고 시도하고 있었는데, 올스타전에서 부상을 입어 내리막길로 접어들면서 기회를 잡은 것.[20] 어지간하면 리그 우승팀에게 주는 MVP 역시 우승팀 주니치의 에이스 노구치 시게키가 받았다. 이쪽도 좋은 성적(19승 7패, 평균자책점 2.65)를 냈다. 그러나 1999년 일본시리즈 우승은 다이에 호크스가 차지했다.[21] 일본이나 한국은 1999년도~2003년도까지 똑같이 타고투저 경향이 심했었다. 하지만, 이후 2011년부터 일본은 투신타병 시대가 돌아왔다.[22] 02시즌 본즈는 149안타 46홈런 .370/ .582/ .799 BB/K 4.21개 fWAR 12.7 bWAR 11.7이라는 정신나간 성적을 찍었다.[23] 당시 요미우리 소속이었던 이승엽이 이해 일본시리즈를 뛰면서 18타석을 소화하면서 12삼진을 당한 걸로 유명하다.[24] 장훈의 일본 모 방송 프로에서는 의외로 일본이 아닌 해외 어디든 통할 것 같다고 확실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25] 2013시즌 101개의 삼진을 잡는동안 내준 볼넷이 단 9개, 무려 K/BB가 11.22다![26] MLB 아시아 출신 마무리 투수의 단일 시즌 최다 세이브 기록인 사사키 가즈히로의 2001시즌 45세이브를 넘었을 수도 있다. 세부 기록에서 우에하라가 월등히 우위였고 등판 경기수도 더 많았기 때문이다.[27] 세이브 상황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팀의 마무리를 내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며 일종의 세레모니다.[28] 실제로 일본인 선수, 그것도 같은 투수 듀오가 바로전의 보스턴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그 주인공의 오카지마와 마쓰자카 [29] 센트럴리그 개막전 매치 기준은 2년전 리그 순위(리그3위팀까지 홈개막전)를 토대로 짜여진다. 2017시즌 리그 4위에 그쳐 2019 시즌 공식 개막전은 원정 경기가 된다.[30] 당시 대표팀동료 중 한명이 (후에 요미우리에서도 같이 활약하는) 다카하시 요시노부이다.[31] 예선 한국전에서는 승리투수가 되긴 했었다. 이 경기에서도 김동주에게 홈런 1개 허용.[32] 9회종료 후 우에하라는 강판된다.[33] 연장 10회 시작과 함께 (우에하라의 후속투수로) 올라온 투수는 야마무라이다.[34] 최종스코어는 8대5로 한국 승리. 당시 한국타선은 최희섭, 홍성흔, 박한이, 신명철 등으로 구성되었다.[35] 여담으로 이 대회 직후, 프로선수들의 국제대회 출전이 허용되었다. 즉, 아마추어 선수들만으로 치러진 마지막 국제대회가 바로 1998년 8월 이탈리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이다.[36] 최종스코어는 7대0으로 일본 승리.[37] 오죽하면 노모가 프로에 진출한 1990년에 펼쳐진 북경 아시안게임 한일전 당시, 한국측 중계진의 고 하일성 해설위원이 중계 도중 노모의 프로진출로 한국타자들이 부담을 덜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38] 북경 아시안게임이 열렸던 1990년은 프로선수들의 국제대회 출전이 금지되던 시절이었다. 프로선수들의 국제대회 출전이 허용된 시점은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때부터이다.[39] 일본이 0대1로 뒤진 7회 1사 만루 위기상황에서 구원등판해, 9회까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최종스코어는 3대1로 일본 승리. 이후 일본은 결승에서 미국에 패배하며 은메달을 차지한다(노모는 결승 미국전에서도 불펜투수로 등판했다).[40] 준결승 한국전에서 일본의 선발투수는 (후에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하는) 이시이 다케히로이다. 프로진출 후인 1992년에는 일본시리즈 MVP까지 차지했다.[41] 준결승 당시 상대팀인 한국은 선발 김기범-구원 박동희가 이어던졌다.[42] 2대2 동점상황인 5회부터 구원등판해 연장 12회까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최종스코어는 3대2로 일본 승리.[43] 당시 한국 선발투수가 바로 구대성이었다. 연장 12회까지 완투했지만 끝내기안타를 맞고 패전투수가 되었다. 최종기록은 11.2이닝 3실점.[44] 1실점 승리투수.[45] 반면 한국 선발투수인 구대성은 5회를 못 넘기고 강판당한다.[46] 김동주가 162M의 홈런을 포함, 우에하라를 상대로 총 3방의 홈런을 쳐낸 대회로도 유명하다.[47] 쿠바전에 선발등판해 승리투수 기록.[48] 8강 한국전에서 호투했지만, 우에하라 강판 이후 팀은 역전패.[49]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는 요미우리를 포함한 대다수 센트럴리그 팀들이 선수차출을 거부했다. 주니치 드래곤스의 백업포수 스즈키 정도만이 센트럴리그 소속 선수 중에서는 유일하게 올림픽기간 내내 주전으로 출전한 케이스.[50] 당시 홈런 영상[51] 아마추어 시절까지 포함하면, 첫 승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프로 1군이 출전한 대회만을 메이저로 치는 경우가 대다수기에 사실상 그의 국제대회 커리어 첫 승이라고 봐도 무방하다.[52]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세이버 매트릭스 발달이 덜해 세부 지표로 선수를 평가하는 일이 드물었고 일명 투승타타를 중시해 투수의 승리와 승률을 중시하던 풍토가 있었다.[53] 사실, 우에하라와 미국 최고타자와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국제전 성격은 약했고 교류전 성격이 강했던 2002 미일 올스타전에서 풀 도핑 상태의 배리 본즈를 만나 3연타석 삼진을 잡는 등 이전에도 우에하라는 미국 타자들과도 만나 좋은 모습을 보였던 적이 있었다.[54] 직전, 아시아시리즈에서 결정적인 홈런 한방을 쳐냈기에 일본의 경계심이 극도에 달했을 때였다.[55] 직전 경기 2타점 결승타를 날리며, 일본 격파의 첨병이 되었다. 실제로, 일본 무대에도 뛰어봐서 일본 야구 스타일을 잘 알기에 당시 경기 전 일본입장에서는 경계 1순위였다.[56] 적어도, 이 날경기에서도 직구를 팍팍 스트라이크로 꽂아 넣는 모습은 리그에서 보여준 그의 파워 피처다운 모습이었다.[57] 하지만, 이 날만 스플리터 낚시와 컨드롤, 커맨드로 수많은 땅볼과 플라이볼을 양산해 보이면서 피네스 피처다운 면모를 선보인 것이지 리그내에서 우에하라의 피칭 스타일은 파워 피처에 가깝다. 실제, 당일 경기에서도 직구는 스트라이크에 거침없이 꽂아 넣으면서 파워 피처다운 면모도 동시에 보여주었다.[58] 특히, 이승엽에게 직구를 거침없이 스트라이크 존에 꽂으며 간간히 변화구를 섞어주다 결정구로 직구를 다시 겁없이 꽂아 넣어 삼진을 뺏어내는 장면은 당시 피칭에서 백미 중에 백미였다.[59] 다만 컨디션과는 별개로, 2005 시즌 지바 롯데 마린즈 소속으로 요미우리의 우에하라를 만난 이승엽은, 7타수 무안타로 매우 부진했다. 이미 상성상 이승엽에게 우에하라가 쥐약이었던 셈이다.[60] 최고 구속은 1회 1사 2루에서 3번 이승엽을 상대할 때 던진 90마일(145km)이 최고 구속이었다.[61] 물론, 지금에야 우에하라의 직구 수직 무브먼트가 굉장하다는 인식이 있어 그의 직구를 재평가하게 되었지만 당시는 패스트볼을 평가할 때 무브먼트보다 구속을 더 중요시했다. 평균 130후반에서 형성되는 직구를 왜 못칠까 의아했던 것도 시대를 감안하면 당연했던 것. 당연하지만, 당시에는 종속 이론이 판을 치고 있던 때니 이런 쪽에 대해서는 지금보다야 무지할 수 밖에 없었다.[62] 나머지 두 명도 각 1이닝씩 공도 몇개 별로 안던졌다.[63] 당시 대회 전에는 그닥 강팀은 아니라는 평이 주를 이뤘으나 대회가 시작하자 준결승전 전까지 6전 6승 0패 승률 1.000의 미친 성적을 기록하며 기존의 강팀으로 꼽히던 팀들을 죄다 꺾어버리는 파란을 일으켰다.[64] 당시 대회에서, 3경기 3승 0패 13이닝 3실점 ERA 1.38로 미세하게 우에하라보다 성적이 더 좋았다.[65] 그러나, 2006 WBC 초대 대회 MVP는 마쓰자카에게 넘어간다. 마쓰자카는 당시 대회에서 유일하게 3승을 기록한 투수였고 결승전도 좋은 피칭을 선보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다. 우에하라도 좋은 성적을 기록했고 준결승전 엄청난 임팩트를 보여줬지만, 첫 경기에서 부진했던 것이 흠이었고 미국과의 경기에서 승을 챙기지 못한 것이 컸다.[66] 하지만, 정작 그렇게 데려간 우에하라는 2이닝 밖에 기용을 안시켰고, 당시 베이징에서 처참한 컨디션을 보이던 이와세 히토키를 중요한 경기에서 계속 중용하는 허접한 용병술을 선보이며 노메달 굴욕을 맛본다.[67] 당시, 호시노 감독은 경기 직후 9회까지 동점상황이 이어졌다면 우에하라를 투입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근데 이와세가 우에하라의 팀동료인 이승엽에게 시원한 투런을 쳐맞고 떡실신 당하고 말았다.[68] 사과하기는 했으나, 당시 대표팀에서 우에하라는 제 몫을 다한 몇 안되는 투수 중 하나였다.[69] 이후, MLB로 건너가 2012년에 부활하며 전성기를 다시 맞이한 뒤 2013 WBC 대회 참여도 고려되었으나, 그가 은퇴를 재번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천명하며 완강히 거부하였고 구단도 선수차출 거부를 논하였기에 그가 원했더라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70]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직전 평가전이었던 호주 대표팀과의 두 경기까지 포함하면 통산 12전 43이닝 7실점 ERA 1.47 기록.[71] 사실 이 별명의 원조는 사이토 가즈미다. 하지만, 이 투수는 일찍이 사이버 투수화 되는 바람에 잘 던지는 투수들에게 유행처럼 이 별명이 번졌다.[72] 세이부돔.[73] 이치로와는 훗날 메이저리그에서도 보스턴(우에하라)과 양키스(이치로)를 대표한 자격으로 수차례 맞대결한다.[74] 메이지진구 야구장.[75] 다만 이 때는 타자들이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를 사용했었다. 올림픽 야구의 경우, 2000 시드니 올림픽 때부터 알루미늄 방망이 사용이 금지되었지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국제 야구 연맹(IBAF)이 1999년에 투수 보호를 위해서 나무 방망이 사용을 적극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2001년까지도 일부 참가팀들은 알루미늄 방망이를 사용했었다.#[76] 24년 1월 기준 일본 프로야구 선출 유튜브 채널 중 구독자 수 1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