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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14:35:53

와타나베 슌스케

와타나베 슌스케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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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치바 롯데 마린즈 우승 엠블럼 V3.svg파일:치바 롯데 마린즈 우승 엠블럼 V4.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1]
2005 2010


파일: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 파일: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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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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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슌스케
渡辺俊介 / Shunsuke Watanabe
출생 1976년 8월 27일([age(1976-08-27)]세)
출신 도치기현 시모츠가군 츠가정[2]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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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고쿠가쿠인대학
포지션 투수
투타 우언우타
프로입단 2000년 드래프트 4순위
소속팀 치바 롯데 마린즈 (2001~2013)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 마이너 (2013~2014)
랭커스터 반스토머스 (2014~2015)[3]

1. 개요2. 플레이 스타일3. 한국과의 관계4. 일대기
4.1. 학창시절4.2. 프로입단4.3. 메이저리그 진출 선언4.4. 그 후4.5. 국가대표 경력
5. 기타6. 연도별 주요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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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前 프로야구 선수.

세계에서 가장 낮은 릴리스 포인트를 가진 언더핸드 스로 투수로 유명했으며, 2000년대 치바 롯데 전성기의 주축 선발로 활약했다. 또한 후술되듯이, 한국과의 대결에서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로도 유명했다. 일명 한국 도살자.

2. 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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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의 처음부터 끝까지 변칙으로 똘똘 뭉친 선수인데, 패스트볼의 완급을 조절할 때 단순히 힘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미세하게 투구폼의 속도까지 조절했다. 그리고 릴리즈 포인트까지 최저 5cm에 맞추고 있지만 미묘하게 릴리즈 포인트 높이도 조절한다고 했다. 그래서 국가대표전에서는 더더욱 강했다. 그를 상대했던 한국 타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공이 엄청 낮은 곳에서 오다가 갑자기 무릎 근처에서 솟아오른다고 했다.

국가대표전에서 한국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와타나베지만 변칙 기교파이면서도 컨트롤이 뛰어난 편은 아니라서 제구가 안되는 날에는 털릴 때가 많았다. 볼 끝도 상당히 가벼운 편.

3. 한국과의 관계

대한민국 야구 팬들에게 이래저래 유명한데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나오면 대한민국을 미친듯이 털어버리기 때문이었다. 특히 2006 1라운드 한일전2라운드 한일전 당시 한국을 겨냥해 등판한 선발 투수이기도 했고, 실제로 와타나베는 매우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1라운드 도쿄돔 한일전 경기에서는 4⅔이닝 3피안타 1삼진 1실점, 2라운드 한일전때에는 6이닝 1피안타 2볼넷 2삼진을 기록했다. 즉, 2006 WBC에서 10.2이닝 1실점 ERA 0.88을 한국 상대로 기록한 것이다.

또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와타나베 슌스케가 한국을 상대로 호투한 것은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 전부가 아니었다. 와타나베는 2009 WBC에도 출전하였는데 한국을 상대로 1라운드 승자조 경기에서 선발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뒤로 마운드를 이어받아 불펜 투수로서 1이닝 무피안타 무실점 호투하여 14:2 대승에 일조한다. 또한, 2라운드 승자조 경기에서도 불펜 투수로 나와 마찬가지로 1이닝 무피안타 무실점 호투하였다.[4] 즉, 2009 WBC에서도 불펜 투수로 나와 2이닝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2006 WBC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결론적으로 와타나베는 한국을 상대로 통산 성적이 12.2이닝 4피안타[5] 2볼넷 5사사구 1실점 ERA 0.71(...) WHIP 0.71로 어마무시한 성적을 보여주었다. 이 때문에, 일본내에서도 역대 한국 킬러들을 꼽을 때 와타나베는 항상 거론되는 편.

국내에는 이미 와타나베와 같은 정통 언더핸드투수, 그것도 선발 투수메이저리그 시절 김병현이 사실상 마지막이었다.[6] 하지만 SSG 랜더스 박종훈이 15-16시즌부터 선발로 안착하면서 언더핸드 선발투수 계보를 물려 받게 된다.

국내에도 한때 한희민, 이강철, 이태일, 박정현, 김기덕 같은 잠수함 투수가 많았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사라지고 현역 언더핸드 투수중 와타나베와 같이 무릎 아래에 릴리스포인트가 있는 투수는 정대현, 김병현, 박종훈 3명만 남았으며 박종훈을 제외하면 모두 와타나베보다는 릴리스포인트가 높다. 사실 박종훈도 와타나베보단 릴리스포인트가 높다. 그나마 전 세계에서 채드 브래드포드와 함께 와타나베에게 비빌 수 있는 투수이다.'[7] 국내에서는 2000년대 이후 사이드암에 가까운 높이에서 적당히 빠른 볼에 적당한 지저분함을 조합하는 옆구리타입이 많이 생겨났지만, 이들이 오히려 양산화되면서 프로 1군에 오면 타자들이 적응해 처참하게 무너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기속성으로 키워서 써먹을려고 하는 학원야구 감독의 욕심 때문이라는 비판도 상당하다. 그래도 특히 국가대표전에서는 그 적응하기 어려운 생소함때문인지 강한 면모를 보였다.

그리고 2015년 11월 5일 한화 이글스에서 투수 인스트럭터로 영입했다는 기사가 났다.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3194771 그동안 옆구리투수로 영 재미를 못봤던 한화 이글스라.. 이번 기회를 통해 있는 옆구리 투수들이 잘 할수 있을지 두고보자. 개밥신이 과연 살아날 것인가 했지만 살아난건 정대훈(...)

4. 일대기

4.1. 학창시절

초등학교 시절부터 야구를 좋아했으나 사실 투수로서도 타자로서도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몸집이 큰 것도 아니었고, 힘이 좋은 것도 아니었으며 발이 빠른 것도 아니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불펜 투수였다. 하지만 대학에 가서도 야구가 하고 싶었기에 아버지로부터 언더핸드로 바꿔보지 않겠냐는 말을 들었다. 운동선수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은 부족했지만, 유연한 몸 덕택에 언더핸드로 전향할 수 있었고 극단적으로 낮은 릴리스 포인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대학교 모두 야구리그에서 강팀이 아니었고 그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불펜 투수였다. 하지만 일본의 사회인야구에서는 팀을 도시대항 야구 8강에 올려놓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에도 뽑혔다.

4.2. 프로입단

그리고 2001년 드래프트 4위로 치바 롯데 마린즈에 입단했다. 첫 2년간 2승 5패라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특히 2년차에는 방어율이 6점대까지 치솟기도 했다.

절치부심한 3년차 2003년 시즌, 첫 등판에서 그는 홈런 4방을 얻어맞아 8실점했고, 이윽고 수뇌진으로부터 "니 다음 등판이 마지막 기회야. 우천 취소되면? 그럼 넌 그냥 끝"이라는 최후 통첩을 받았다. 그의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등판 날, 비가 오긴 했지만 다행히 우천 취소는 안 되었고 어찌저찌 5⅔이닝을 2실점으로 막으면서 승리투수가 되었다. 이 경기를 기점으로 자신의 투구 스타일을 바꿨다. 원래는 강속구 언더핸드로 승부를 봤지만, 이때부터 철저한 변칙 기교파로 탈바꿈. 패스트볼 평균 구속이 120km/h대이다. 커리어 하이 시즌이었던 2005년 계측된 패스트볼 최고구속이 고작 132km/h에 불과했을 정도. 어쨌든 3년차부터 드디어 선발투수로 자리잡아 규정이닝을 채우며 9승을 올렸고 이듬해인 2004년 12승을 따내며 처음으로 두 자리 승수를 올렸다.

언급했듯이 2005년이 커리어 하이였으며 15승 4패 2.1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이 시즌 첫 등판 경기가 개막 2차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상대 경기였는데 9이닝 동안 안타와 볼넷 1개씩만을 내주고 그렇게 출루시킨 주자는 병살로 다 잡아들이며 완봉승에 성공했다. 팀은 라쿠텐 상대로 0-26으로 신나게 점수를 뽑아 와타나베를 받쳐줬다. 2015년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일본프로야구 최다점수차 영봉패 기록. 이 해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맹활약을 펼쳤고, 일본시리즈 2차전에 선발등판해 9이닝을 무실점으로 깔끔하게 막으며 완봉승을 기록했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롯데 선발진의 한 축을 맡아 매해 많은 투구이닝과 준수한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 영 승운이 따르지 않는 탓인지 두 자리 승수를 거둔 적은 2008년뿐이다. 2007년엔 177이닝을 먹고 2.44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음에도 달랑 9승에 그쳤고, 2009년의 경우 144이닝에 4.0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 승패는 고작 3승 13패에 그치며 당해년도 최다패를 뒤집어썼다. 다음 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카가 시게루라는 투수는 이보다 3점대 ERA로 3승 12패를 찍는다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노쇠화와 부상을 겪으며 4승에 그쳤고, 급기야 2013년엔 단 1승도 따내지 못하고 6차례 등판해서 4패에 4.62의 평균자책점으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4.3. 메이저리그 진출 선언

2013시즌 후, 뜬금없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도전을 선언했다.기사

나이가 38세가 되는 노장인데다가 2013년 성적도 썩 좋지 않았으며, 제구가 안되면 무조건 홈런으로 연결된다는 약점도 있으나, 2군에서 절치부심하였고, 본인은 인생의 마지막 도전으로 생각한다며 테스트도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 지바 롯데 구단은 2000년대 2회 우승에 큰 공헌한 그를 대승적 차원에서 FA로 풀어준다고 한다. 롯데는 노쇠화에 접어든 와타나베가 없어도 큰 영향이 없고 일본내 타 팀으로 이적한다는 것도 아니니 왕년의 에이스에게 인심 한번 쓴 것.

나이가 있고, 부상전력도 있으며, 작년 성적이 영 좋지 않기 때문에 메이저리그 계약은 어려울 것이라는게 중론이며, 마이너리그 계약이나 스프링캠프 테스트 참가 등을 노려야 할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하지만 투구 스타일 자체가 대단히 변칙적이고 유니크하기 때문에 제구만 전성기 시절로 돌아온다면 메이저리그에서 나름 원 포인트 릴리프 정도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전망도 있었다.

2013년 12월 13일, 보스턴 레드삭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으나 2014년 3월 29일 메이저리그 진입에 실패해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방출되었고 독립리그 애틀랜틱 리그의 랭카스터 반스토머에서 뛰었다.

4.4. 그 후

2015년 시즌이 끝나고 KBO 리그한화 이글스의 투수 인스트럭터로 영입되어 한화의 마무리 훈련 기간 동안 언더핸드 - 사이드암 투수 육성에 힘을 보태게 되었다. 이것이 선수 은퇴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2015년 12월에는 신일철주금 사회인야구팀의 코치 겸 선수로 부임했다. 2016년 3월 16년만의 사회인 야구 공식전 등판에서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으며, 같은해 6월 도시대항전 예선에서 본인의 사회인야구 최장 이닝 투구(6이닝)을 기록하며 4피안타 무실점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 날 승리로 팀을 도시대항전 본선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본인의 친정팀인 지바 롯데의 TV 중계 경기 해설자로 출연하고 있다.

2018년까지 선수와 코치를 병행하다 2019년부터 코치로 완전 전환,[8] 본격적인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2020년부터는 감독 자리에 올랐다. 감독 승격 후 2021년 도시대항전 예선을 돌파해 3년만에 팀을 본선 무대로 올려놓았고 1회전에서 세이노 운수를 격파하며 감독 신분으로 도시대항전 첫 승을 거두었다.

4.5. 국가대표 경력

와타나베 슌스케는 프로 선수로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참가한 대회는 2006 WBC, 2009 WBC의 단 두차례에 불과하다. 아마추어 시절까지 범위를 넓혀봐도 2000 시드니 올림픽까지가 전부이며, 그의 커리어에서 국가대표 경력은 단 세 번이었다. 그러나, 한국과의 관계에도 서술되어있듯이 대한민국 대표팀을 만나면 미친듯이 털어버리는 그의 활약에 한국 야구 팬들에게는 국제전에서 그의 모솝이 꽤나 강렬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다른 나라와의 경기에서는 항간의 인식과 다르게 그닥 강한 모습을 보이는 투수는 아니였다. 실제, 우리나라 정대현이나 박종훈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언더 투수는 그 유형이 생소한 북미나 중남미 타자들에게 단기전에서 상당히 강한 모습을 보이고는 하는데 와타나베의 경우 오히려 상당히 약한 모습을 보였다.

4.5.1. 2000 시드니 올림픽


이후, 이 부진때문인지 중용받지 못하고 중요한 경기인 4강전과 동메달 결정전[10]에도 등판하지 못하였다. 결국 예선전 쿠바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와타나베는 올림픽 대회를 마친 셈. 올림픽에서 최종 성적은 2경기 1승 1패 5.1이닝 4피안타 2탈삼진 무사사구 3자책점 ERA 5.06이었다. 개인으로서도 부진하였지만, 팀도 동메달 결정전에서 한국에 3:1로 패해 노메달로 쓸쓸히 고국행 비행기를 타야했다.

4.5.2. 2006 WBC

이후, 와타나베는 2000 드래프트에서 지바 롯데에 지명 받아 프로 무대로 진출하지만, 2005년 전까지는 별다른 활약이 없었기에[11] 그 사이에 있던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등 1군 정예가 선발되는 국제 대회에는 발탁되지 못한다. 하지만, 2005년 절치 부심하여 엄청난 성적을 기록했고 일본 시리즈 2차전에서는 무사사구 완봉승을 기록하며 엄청난 한 해를 보낸다. 당연하게도 그는 다음해 2006 WBC에 선발되었고, 일본 대표팀 감독 왕정치는 대회 시작 전부터 그를 한일전 선발로 낙점했음을 공표했다. 그래서 와타나베는 1라운드 한국전에 선발로 출전하게 되는데…

와타나베는 1회 WBC 대회에서 3경기 13.2이닝 8피안타 6탈삼진 5사사구(2볼넷 3사구) 4실점(3자책) ERA 1.98로 훌륭한 성적을 보여주게 된다. 특히, 한국과의 두 차례 만남에서 10.2이닝 1실점 ERA 0.84라는 엄청난 기록을 보여주며 일본 언론의 찬사를 받게 된다. 한국에서는 이 와타나베의 두 차례 투구와 더불어 준결승전 우에하라 고지의 저승사자 같은 모습의 피칭 모습을 두고 한국 킬러인 일본 투수들을 꼽을 때 이 대회에서의 두 명을 언급하는 경우도 많다. 여하튼, 와타나베 본인은 결승전에 의외로 부진하기는 했으나 한국전에 잘 던진 덕에 국가대표 커리어에 우승도 추가했고 기분 좋게 2006 시즌을 시작할 수 있었다.

4.5.3. 2009 WBC

와타나베 슌스케는 2008년 평범한 성적에 오히려 2007년에 비하면 부진한 성적을 보여주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 야구 대표팀 감독이었던 하라 타츠노리는 단기전에서 언더 투수의 이점을 높게 사서 그를 다시 대표팀에 발탁한다. 와타나베는 이전 대회와는 달리, 중요 경기에서 선발로 나서는 기회를 받지 못했지만 불펜으로 점수차가 매우 벌어진 경기나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경기에 등판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 대회에서 한국을 상대로만 두 경기 다시 등판하게 되는데 여전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와타나베는 1라운드 아시아 라운드와 2라운드에서 각 한번씩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 대회에서 와타나베는 총 2경기 2이닝 무피안타 1탈삼진 2볼넷 무실점으로 여전한 한국 킬러다운 면모를 보였다. 이 대회에서 별 다른 활약은 없었으나, 유종의 미를 거뒀고 결국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국제전 커리어를 마무리한다. 여담으로, 와타나베가 한국전에서 개인으로는 엄청난 성적을 거두었으나 정작 팀은 와타나베가 호투했던 것과는 달리 와타나베가 출전한 경기에서 한국을 상대로 전적이 안좋다. 대표적으로, 2006 WBC 1,2라운드 한일전에서는 와타나베가 선발로 호투했지만 정작 팀은 각각 3:2, 2:1의 한점차로 석패한다. 2009 WBC에서도 와타나베가 불펜으로 나선 경기에서도 4:1패, 14:2승을 기록했고, 이를 통틀어 보면 일본은 와타나베가 나선 4번의 경기에서 한국을 상대로 1승 3패인 것이다. 와타나베 개인은 굉장했지만, 한일전 승리 보증수표까지는 되지 못한 것.[19]

그의 통산 국제전 성적은 21이닝 12피안타 9탈삼진 7사사구(4볼넷 3사구) 7실점(6자책) ERA 2.57[20]을 기록했다. 아마추어 신분으로 참여한 시드니 올림픽을 제외한 프로 선수로서 참여한 국가대표 기록은 15.2이닝 8피안타 7탈삼진 7사사구(4볼넷 3사구) 4실점(3자책) ERA 1.72로 국제전에서 엄청난 위용을 보인 셈. 특히, 한국과의 경기에는 통산 4경기 12.2이닝 4피안타 2볼넷 5사사구 1실점 ERA 0.71(…)한국 담당 깡패 같은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서양권 타자들 보다 언더 투수들에 더 익숙한 우리나라 타자들[21]이 와타나베에게 더 약했고 반대로 와타나베는 서양권 타자들에게 더 약했다. 실제로, 한국과의 기록을 제외하면 와타나베는 8.1이닝 8피안타 6실점(5자책) ERA5.4로 평범 이하의 성적이 된다. 언더 투수가 단기전에 북미 혹은 중남미 타자들에게 강하다라는 항간의 인식의 반례인 셈. 이는 와타나베가 시드니 올림픽과 2006 WBC에서 쿠바 타자들에게 쉽게 공략당한 탓이 크다. 어쨌거나, 와타나베는 그의 국제 대회 커리어에 WBC 2번의 우승이라는 일반 프로 투수들이 얻기 힘든 메이저 타이틀을 얻은데다가 한국 타자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으므로 그의 국제전의 모습은 한국의 팬들에게만은 엄청난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5. 기타


6. 연도별 주요 성적

연도 소속팀 경기 선발 이닝 완투 완봉 홀드 탈삼진 방어율 비고
2001 치바 롯데 13 6 50⅔ 1 1 2 2 - 31 2.66
2002 8 8 34 0 0 0 3 - 6.35
2003 20 18 140 6 0 9 4 - 74 3.66
2004 23 23 150⅓ 4 0 12 6 - 101 3.59
2005 23 23 187 8 3 15 4 0 101 2.17 투구회수 4위, 완투 3위, 완봉 공동 1위
다승 3위, 방어율 2위
2006 23 23 147 4 0 5 11 0 105 4.35 최다패전 3위
2007 25 24 177 8 2 9 6 0 93 2.44 완투 3위, 완봉 공동 4위, 방어율 4위
2008 26 26 172⅔ 3 2 13 8 0 104 4.17 완봉 공동2위, 다승 공동4위
2009 25 21 144⅓ 3 0 3 13 1 74 4.05 최다패전 공동1위
2010 26 25 148⅓ 3 0 8 8 0 63 4.49
2011 24 24 132 1 0 7 9 0 43 3.68
2012 13 13 69⅔ 1 0 4 4 0 43 4.39
2013 6 6 25⅓ 0 0 0 4 0 9 4.62
NPB 통산
(13 시즌)
255 240 1584⅓ 42 8 81 82 1 841 3.64


[1] 사실 2010년의 경우는 말이 우승반지지 일본시리즈 우승을 엔트리에서 겪었다는 기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치바 롯데 마린즈는 2010년애 공식적인 우승반지를 만들지는 않았기 때문. 다만 2005년에는 만들었다.[2]도치기현 도치기시[3] 미국 독립 리그 애틀랜틱 리그 소속.[4] 다만, 팀은 당시 선발 투수 다르빗슈 유의 난조로 인해 1회에만 3실점 하여 4:1로 패배한다.[5] 여담으로, 한국이 와타나베에게 쳐낸 4안타 중 절반인 2안타는 조인성이 혼자서 기록했다.[6] 김병현과 박종훈 사이에 우규민이 있기는 하지만, 정통 언더스로로 분류하기는 좀 애매한 측면이 있다. 또, 김병현도 팔각도는 사이드암보다 약간 낮은 변칙 언더핸드 투수이다.[7] 사실 박종훈과 브래드포드는 낮을 땐 와타나베보다 더 낮게 던진다. 그러나 평균적으론 와타나베가 약간 더 낮다.[8] 이 시기부터 팀명도 일본제철 카즈사 매직으로 변경.[9] 대회 참가 이전에도, 기요하라 가즈히로 등이 와타나베에게 '프로에서도 통할만한 재목' 이라는 평가를 내렸을 정도로 프로 수준의 투수였다.[10] 애초에, 이 경기는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제외하고 어떤 투수도 등판하지 못했다. 선발이었던 마쓰자카는 8이닝 3실점하며 완투패한다.[11] 물론, 2002년이나 2004년은 번뜩이는 경기는 있었지만 성적 상 다른 투수들을 제치고 국가대표에 발탁될 정도는 아니었다.[12] 여담으로, 이 날 이종범은 상대 선발 와타나베 슌스케에게 2번이나 공이 몸에 맞았다. 5회 몸에 공이 3번째 맞자 와타나베를 노려보는 것이 압권.[13] 이 경기 뿐아니라 와타나베가 국제전에서 한국을 만났을 때 내준 유일한 실점이기도 하다.[14] WBC는 올스타전처럼 5이닝을 다 채우지 않아도 승리투수 요건을 갖출 수 있다.[15] 8회 올라온 이시이 히로토시를 상대로 이승엽이 8회에 결정적인 역전 투런 홈런을 때려냈다.[16] 와타나베는 한국과의 경기를 끝내고 결승까지 단 3일밖에 쉬지 못했다.[17] 한국의 일본 상대의 국제전에서 유일한 콜드 패이다.[18] 하지만 정작 팀은 선발 다르빗슈 유가 1회에만 3실점 하였고, 일본 타자들은 봉중근에게 또 다시 당하고 침묵하며 4:1로 졌다.[19] 물론, 이것은 와타나베 개인의 역량에 의한 일은 아니므로 와타나베 책임은 아니다. 실제 오늘날에는, 선발 투수의 선발승에 선발 투수 본인이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는 것이 정설이기에.[20] 2009 WBC 직전 호주와의 평가전 3분의 2이닝 기록까지 포함하면 그는 국제대회 통산 21과 3분의 2이닝 동안 6자책 ERA 2.49 기록.[21] 실제로,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활약한 언더 투수가 굉장히 생소하고 드문 MLB와 달리 비교적 역사가 짧은 KBO의 역사에서는 그 기간 대비 언더 핸드 투수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한희민, 이강철, 이태일, 박정현, 김기덕 같은 잠수함 투수와 정대현, 김병현, 박종훈같이 비교적 현재 야구팬에게 익숙한 선수들 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