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마사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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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
2007 |
이마나카 신지 (주니치 드래곤즈) | → | 야마모토마사 (주니치 드래곤즈) | →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94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이마나카 신지 (주니치 드래곤즈) | → | 야마모토마사 (주니치 드래곤즈) | →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9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야마모토마사 (주니치 드래곤즈) | → | 사사키 가즈히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1993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방어율 |
1993, 1994, 1997년 센트럴 리그 최다 승리 |
1997년 센트럴 리그 최다 탈삼진 |
1993년 센트럴 리그 최고 승률 |
보유 기록(NPB) | |
최장 재적년수 | 32년 |
최장 1군 활동년수 | 29년 |
1이닝 최다 폭투 | 3개 |
연속 시즌 승리 | 23년 |
연속 시즌 탈삼진 | 29년 |
최고령 출장 및 선발등판 | 50세 2개월 |
최고령 타석 | 49세 1개월 |
최고령 승리투수 | 49세 |
최고령 완투 및 완봉 | 45세 |
최고령 탈삼진 | 49세 12개월 |
최고령 홀드포인트(구원승+홀드) | 47세 1개월 |
최고령 노히트노런 | 41세 7개월 |
{{{#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34번}}} | ||||
코마츠 타츠오 (1978~1983) | → | 야마모토마사 (1984~2015)[1] | → | 후쿠 히로토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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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마사[2] 山本昌 | Masa Yamamoto | |
본명 | 야마모토 마사히로 山本昌広 | Masahiro Yamamoto |
출생 | 1965년 8월 11일 ([age(1965-08-11)]세) |
카나가와현 치가사키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니혼대학 후지사와 고등학교 (카나가와) |
신체 | 186cm, 87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입단 | 1983년 드래프트 5라운드 (주니치) |
소속팀 | 주니치 드래곤즈 (1984~2015) |
등장곡 | SPEEDWAGON - 夢の途中 |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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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前 야구선수. 본명은 야마모토 마사히로이며, 야마모토 마사는 등록명이며 1995년까지 본명인 야마모토 마사히로를 등록명으로 쓰다가 1996년부터 등록명을 현재의 이름으로 바꿨다.은퇴 시즌이었던 2015년 기준으로 현역 32년차[3], 만 50세의 현역 투수였다. 한국프로야구 출신의 동갑으로는 송진우, 한용덕 등이 있다. 당연히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고령 현역 선수였으며, 가장 긴 커리어도 갖고 있다. 일본 프로야구 최고령 선발 등판, 선발승(센트럴리그 기록이기도 하다) 기록을 가지고 있다.[4] 27년 연속 1군 등록은 노무라 카츠야의 앞, 쿠도 키미야스의 뒤에 위치하는 일본프로야구 역대 3위 기록.[5] 그 외에 1군에 등록된 시즌이 가장 많은 선수이기도 하다.[6]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야 하는 센트럴리그 소속이다보니 리그 최고령 안타, 타점이나 투수 부문 최다 희생타(2013년 기준 153희생타[7]) 같은 타격 관련 기록들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30여 년의 프로 생활을 모두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보낸 진정한 프랜차이즈 스타로, 그가 기록한 219승은 주니치 구단 역사상 최다승 기록이다. 프로 평생을 주니치를 위해 바쳤지만 영구결번이 되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 특유의 영결을 잘 안 하는 문화와 관계가 깊다. 등번호 항목 참조.
통산 성적은 581경기 등판 219승 165패 평균자책점 3.45, 3348.2이닝 2310탈삼진. 2022년 일본프로야구 야구전당에 타카츠 신고와 함께 헌액되었다.
2. 커리어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대학에 들어가 교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나, 1983년 드래프트에서 주니치 드래곤즈에 5순위 지명을 받게 되면서 고심 끝에 프로야구 선수의 길을 택하게 된다.[8] 입단 후에는 줄곧 2군에서 머무르다가 1986년 막바지에야 1군 데뷔를 했지만 1987년에 시즌 초반에 팔꿈치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다. 다음 해인 1988년 초에 당시 주니치와 업무제휴를 맺고 있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산하 마이너리그(당시 싱글 A 플로리다 주 리그)팀인 베로 비치 다저스에 파견되기도 했는데,[9] 여기서 야마모토는 25경기에 나와 13승 7패 평균자책점 2.00의 성적을 기록했다.일본으로 귀국한 1988시즌 말부터 야마모토는 본격적으로 1군 무대에서 중용되기 시작했고,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선발로 뛰기 시작했다. 1990년에 커리어 첫 10승을 달성했고, 1993년에는 부상에서 돌아와 사와무라상을 차지한 이마나카 신지와 함께 역대급 좌완 원투펀치를 형성하며 17승 5패 평균자책점 2.05의 성적으로 다승,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차지하며 2관왕에 올랐다. 그리고 1994년에는 19승 8패 평균자책점 3.48을 기록하며 2년 연속 다승왕에 올랐고, 사와무라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1997년에는 18승을 거두며 자신의 세 번째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한다.[10] 선동열이 활약하던 시절, 야마모토 마사와 카도쿠라 켄, 노구치 시게키의 선발 투구 경기에서 세이브를 주로 쌓았다.[11]
90년대 주니치의 중심타자이자 절친인 야마사키 타케시(왼쪽)와 함께.
이후에도 10년 넘게 꾸준히 주니치 선발진의 든든한 기둥으로 활약했고, 2006년에는 통산 2000탈삼진과 함께 그 해 9월 16일 한신 타이거즈 전에서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령(만 41세 1개월) 노히트 노런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다.[12] 그리고 2008년 8월 14일, 홈구장인 나고야 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완투승을 기록하며 NPB 역사상 24번째로 통산 200승 고지에 올랐다.
2009년을 기점으로는 주로 땜빵 선발로 나오게 되었지만 2010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역대 최고령 완봉승을 기록하거나 2012년에 13경기 12선발 67⅓이닝 평균자책점 2.94를 기록하는 등 땜빵 선발로서 준수한 활약을 했다. 하지만 공인구 반발력이 상향조정된 2013년에는 4.46의 평균자책점으로 그간의 모습과 비교한다면 노쇠화가 완연한 모습을 보였다.
2014시즌에는 2군 경기에서 5이닝 2실점의 호성적을 내면서 1군 등록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9월 5일 한신전에 1군 등판을 하였고, 5이닝 무실점으로 승리[13]해서 종전 하마사키 신지가 가지고 있던 최고령 등판 투수, 최고령 승리 투수 기록(48세 4개월)을 경신하였다(49세 25일). 이 시즌부터는 포수 타니시게 모토노부가 선수 겸 감독으로 뛰게 되면서 졸지에 감독보다 더 나이 많은 선수가 되었다.[14]
최종적으로 2014시즌에는 3경기 1승 1패, 평균자책점 4.50를 기록했다. 2014시즌 후 재계약에 성공해 2015년에도 뛸 예정이다.
2015년 8월 9일 자신의 50세 생일을 이틀 앞두고 선발 등판했다. 이 경기에서 승리 투수가 되었다면 제이미 모이어의 기록을 경신하며 세계 최고령 승리투수가 될 수 있었지만, 제구 난조로 1이닝 1실점에 그친 채 강판되었다. #
2015년 9월 26일 은퇴의사를 발표했다. # 그리고 그 해 10월 7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시즌 최종전에 등판, 마루 요시히로를 2루수 땅볼 아웃으로 잡아내며 32년 간의 길었던 여정을 마무리했다.
은퇴 이후에는 닛폰 테레비, 도카이 TV 방송 등에서 시청자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작전, 플레이 등을 상세히 설명하는 해설로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 NEWS ZERO의 야구 코너에 건장한 아저씨가 나와서 선수들과 인터뷰를 하거나 야구 해설을 하고 있다면 이 사람. 그리고 유튜브 채널도 새로 개설했다.
3. 플레이 스타일
186cm, 87kg[15]라는 건장한 체구에 걸맞지 않게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는 아니었다. 전성기에도 최대 140km/h대 초반의 속구를 던졌고 현역 마지막 시즌이었던 2015년에는 속구 최고구속이 130km/h를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디셉션이 좋은 독특한 투구폼, 높은 회전수 등의 이유들로 인해 구속에 비해서 구위가 좋은 편이며, 투구에서 속구의 비중이 다른 공 느린 좌완 투수들에 비해 매우 높다고 한다.[16] 본인은 스스로를 기교파가 아닌 속구파 투수라고 하는데, 구속은 안 나오지만 무브먼트와 디셉션을 바탕으로 자신있게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꽂아넣는다는 마인드는 우에하라 코지나 트레버 호프만 항목에 언급된 부분을 떠올릴 수 있을 듯. 마이너리그 유학 시절에 배워왔다는 스크류볼(싱커)은 그의 전매특허 변화구이다. 부상 위험이 높은 구질로 알려진 스크류볼을 던져왔는데도 30년 장수 커리어를 보낸 것도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2009년을 기점으로 풀타임 선발투수로서는 수명이 끝났는데, 원체 선발 타입인 선수라 불펜이 아닌 2군에서 몸을 만들고 있다가 선발진에 구멍이 나면 한 경기 던지고 다시 내려가서 또 몇주일씩 몸을 만들어와서 한달에 1~2번 정도 던지는 스팟선발로 몇년간 활약했다. 특히 한신전에 강해서 한신전 스케줄에 맞춰 몸을 만들어 저격카드로 유용하게 쓰였다. 나이는 많아서 긴 이닝을 소화할 순 없지만 5이닝 정도는 경험으로 완벽하게 막아주는 좋은 선수였다.말년인 2014~2015시즌에는 나이가 많아도 너무 많아 이조차도 힘들게 되어 몇 달씩 들여 몸을 만들어서 1년에 2~3시합 던지는 식으로 선수생활을 연장했다.
4. 그 외
- 선동열, 이상훈, 이종범의 한국인 트리오가 주니치에서 뛸 때 그들과 아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끝나면 한잔하러 자주 같이 갔다고. 배영수와도 오프시즌 중 자율훈련에서 만난 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 하며, 배영수와의 인터뷰에서 조언을 전해준 것으로 몇 차례 언급되기도 하였다.기사1기사2
- 무선모형 매니아로 유명하다. 주니치 시절 팀 동료였던 야마사키 타케시와 함께 스스로의 이름을 건 RC카 대회를 열었을 정도.그의 무선모형 취미를 다룬 영상 다만 최근에는 나이 때문에 오프시즌에 몸만들기에 전념하느라 자제하는 중이라고. 그 외에도 자동차 수집, 게임, 만화, 풍뎅이 수집 등 왠지 최고령 투수의 무게감과는 어울리지 않는 취미들을 다수 가지고 있다고 한다. 동 시기에 주니치에 있었던 오레류 강타자 오치아이 히로미츠와 삼성 라이온즈 코치였던 투수 오치아이 에이지도 오타쿠 기질이 다분했다.
- 경마 매니아이기도 하다. 보통 좋아하는 것이 아닌지 관련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은 물론 직접 말에 투자하기도 한다고. 2021년에는 경마 방송에 출연해 자신이 투자한 경주마 '샤흐리야르'가 일본 더비에서 라이벌 에프포리아를 간발의 차로 제치고 우승하는 것을 보며 기뻐하는 모습이 방송되기도 했다.
- 2023년에는 경주마 의인화 게임인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웹 애니메이션인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로드 투 더 탑에 경마 해설자 역으로 성우 데뷔까지 해 버린다. 야구계에 우마무스메 관계자가 몇 있긴 하지만[17] 야마모토의 등장은 정말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이 다수다.
덤으로 워낙 현역 기간이 길다보니 "게임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말들이 야마모토의 현역기간 중에 활동했었다"라는 점도 화재가 되기도 했다.[18] - 심지어 우마무스메 정규 넘버링 3기에서 해설자로도 등장했다. 원래 해설자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던 호소에 준코가 3기 내내 미등장한지라 이번 시즌 한정으로 교체된 것으로 추정된다.
- 급기야는 2024년 3월 개최된 우마무스메 5th 라이브에서는 2일차 시크릿 게스트이자 1일 사회자로 등장하기도 했다. 마침 사사키 소유마였던 비르시나네 3자매 성우들이 전원 2일차 공연에 출연해서 야구 관련 퍼포먼스를 보여주자 이에 대해서도 코멘트 해주기도 하고, MC 타임에는 애니 2기 오프닝인 '꿈을 걸어!(ユメヲカケル)'를 이미 가사도 다 아는듯 능숙하게 따라부르기도 했다. 이젠 팬들도 우마무스메 스탭 중 한명으로 인식할 지경(...)
- 어째선지 잘 알려져 있진 않으나 한입마주로 재미를 본 건지, 2023년 셀렉트 세일에서 말 두마리를 구입해 정식으로 마주가 되기도 했다. 단 웬만한 경마 전문가들이나 알아볼 외국 혈통의 말들이라 성적을 기대하고 구입한 게 맞는지 의아해 하기도.
- 1984년에 데뷔한 데다가 오랜 커리어 덕에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에도 초대부터 가장 오랫동안 시리즈에 출전한 선수가 되었다. 게다가 실황 이전에 큰 히트를 쳤던 야구게임인 패미스타에도 초기 몇 작품을 제외하면 꾸준히 출연했다. 은퇴 후에도 OB선수 항목으로 출전 중. 한때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패미스타 첫 시리즈부터 실황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야구게임에 개근했었지만, 2008년 은퇴를 하면서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2009를 끝으로 현역으론 더 이상 출연하지 않는다. 거기다 기요하라는 후에 마약 복용 혐의로 체포되는 바람에 2017년판엔 아예 OB선수 항목에서조차 짤려버렸다. 초대 ~ 2013까지의 능력치 정리
- 덧붙여, 패미스타 시리즈가 출시될 때부터 꾸준히 플레이해 온 유저이기도 하다. 출시 당시부터 주니치 클럽하우스에서 플레이했다고 하며, 반다이남코가 2018년 8월 시구식에 초청하기도 했다. #
- 2014년 LG 트윈스의 마무리 투수 봉중근이 개인훈련장소를 일본 돗토리로 바꾸면서 야마모토를 비롯해 아사오 타쿠야, 이와세 히토키 등 주니치의 필승조 선수들과 개인훈련을 같이 했는데, 야마모토에게 마구를 배워왔다고 언급했다. 야마모토가 먼저 다가와서 가르쳐줬다고 한다.기사 새로 배워온 구질은 스플리터였다고 한다.
- 기자들이 좋아하는 선수라고 한다. 이유는 인터뷰를 굉장히 잘 받아준다고. 하다못해 클럽하우스에서 나와서 집에 가려고 차타고 시동 걸은 상태에서 인터뷰한다고 들이닥친 기자에게 싫은 내색 하나 안하고, 오히려 시동끄고 아예 차 밖으로 나와서 인터뷰에 응해줬다고 하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게 왜 대단한거냐면, 보통 이런 상황에서 인터뷰를 요청하면 무시하고 그냥 가던가 차에서 그냥 창문만 내리고 "귀찮으니 짧게 하소" 오오라를 풍기면서 인터뷰 하는 게 보통인데, 야마모토 마사는 그런상황에도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기 때문에 더더욱 기자들 사이에서 평가가 높다고 한다.
- 일본에서도 투 머치 토커 이미지로 유명하다. 행사 시간을 넘겨서 방송녹화 일정 늦을까봐 걱정하는 영상도 있을 정도. 달변가로 유명하여 해설 외에도 광고, 예능, 강연, 각종 행사에서 섭외가 계속 들어오는 중이다. 대외적으로 저술활동도 많아서 책도 많이 내고 일본경제신문, 주니치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 투구할 때 혀를 위로 내밀고 투구하는 버릇이 있다. 뭔가 특이한 뜻이 있다거나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단지 동경하던 선배투수인 아라키 다이스케의 투구시 표정을 흉내내면서 던지다 보니 어느샌가부터 혀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다.
- https://youtu.be/6KEAE8xWPVM?t=389 명구회의 2016년 자선 야구대회에서 팀 동료였던 와다 가즈히로와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에게 연속 홈런을 맞았다.
5. 둘러보기
[1] 은퇴시합을 위해 단기 계약을 맺은 2016년에는 0번으로 등록을 했지만, 은퇴시합 때엔 협회의 허가를 받아 34번 유니폼을 입고 등판했다.[2] 성인 '山本'가 아니라 '山本昌'까지가 정식 등록명이다. 전광판에도 '山本昌'로 붙어서 나온다.[3] 선동열이 프로에 데뷔하기 1년 전에 프로 입단해서, 선동열의 말년에 같이 주니치에서 프로 생활을 하고 선동열의 은퇴를 눈앞에서 보았다. 그리고 선동열이 은퇴 후 삼성 감독을 거쳐 기아 감독을 하던 시절에도 현역이었다. 선동열이 기아 감독에서 물러나고도 1년이나 더 선수로 뛰었다.[4] 최고령 완봉승 기록까지 가지고 있는데 이 시점에서 동년배 와타나베 히사노부는 세이부 감독, 1년 후배인 노무라 켄지로는 히로시마 감독이었다.[5] 29년 연속 1군 등록한 나카지마 사토시가 있기 때문이다.[6] 이 기록은 앞서 말한 나카지마 사토시와 함께 공동 1위. 야마모토는 32년을 뛰었지만 3년은 1군에 못 올라왔으나, 나카지마는 29년을 뛰고 모든 시즌을 1군에서 잠깐이라도 보냈다. 다만 나카지마 사토시는 2007년부터 사실상 코치로 전업했으나 당시 소속팀이었던 닛폰햄이 1군은 홋카이도에, 2군은 치바에 있기 때문에 수도권 원정을 갈 때가 아니면 2군 선수를 1군에 콜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백업 포수 자리가 빌 때를 대비해서 나카지마를 선수 겸 코치로 등록한 덕분에 1군에서 오래 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1군 기록과는 별개로 은퇴하는 2015년까지 9년 동안 불과 110경기만 출장했고 타석에도 거의 서지 않았다.[7] 153희생타는 일본 전체 18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8] 여기에는 아버지가 주니치 드래곤즈의 팬이었다는 점도 작용했다고 한다.[9] 여담으로 당시 주니치와 LA 다저스의 유니폼 디자인이 비슷했던 것은 이 업무제휴 때문이었다.[10] 그러나 이 해부터 새로운 홈구장이 된 나고야 돔의 드넓은 그라운드에 이전의 작은 나고야 구장에 익숙하던 다른 선수들이 적응하지 못한 탓에 주니치는 이 해 리그 최하위로 시즌을 끝마치고 말았다.[11] 당시 선동열은 사사키 카즈히로(요코하마)와 구원왕 경쟁을 펼쳤으나 사사키가 세이브 포인트에서 근소차로 앞서며 타이틀을 차지했다.[12] 이 경기에서 야마모토는 안타는 물론 사사구도 허용하지 않았지만 3루수 모리노 마사히코가 아카호시 노리히로의 땅볼 타구 때 실책을 범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퍼펙트 게임은 달성하지 못했다. 당연히 모리노는 주니치 팬들에게 신나게 까였는데, 오히려 야마모토는 "모리노의 실책 이후 더 집중하게 되었고 그 결과 노히트노런을 달성할 수 있었다."라며 모리노를 감쌌다.[13] 상대 팀 선발은 노미 아츠시. 당시 한신 소속이던 오승환은 한신이 일찌감치 지는 분위기로 가자 당연히 나오지 않았다.[14] 위 영상 8분 50초 경에 등번호 27을 달고 대타로 나와 밀어내기 타점을 올리는 선수가 타니시게다.[15] 이건 프로필상 기록이고, 본인이 밝힌 바에 의하면 실제로는 188cm, 98kg라고 한다.[16] 비슷하게 롱런한 투수인 제이미 모이어도 체인지업 장인이란 이미지에 맞지 않게 속구 비중이 투구의 절반 가까이 차지할 정도로 높은 투수였다.[17] 사사키 카즈히로가 마주를 하고 있으며 소유마 중 G1마인 비르시나, 슈발 그랑, 비블로스 3남매들이 전원 게임에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츠자카 다이스케 역시 마주로 활동중이며 다나카 마사히로는 우마무스메 헤비 유저로 유명하다.[18] 2023년 4월 현재 총 94두의 말이 의인화 되었는데, 이 중 딱 3두만이 야마모토 보다 먼저 데뷔했고 야마모토 은퇴 후 데뷔한 말이 하나 있을 뿐이다. 그나마 미스터 시비와 카츠라기 에이스는 83년 데뷔해서 85년까지 뛰어서 현역 활동은 같이 한지라 야마모토와 전혀 연관이 없는 말은 76년에 데뷔해 77년에 은퇴한 마루젠스키와 마사 은퇴 후인 2019년 데뷔해서 아직 현역인 데어링 택트 두마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