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립켄 주니어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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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칼 립켄 주니어 | |||||||||||||||||||||||||||||||||||||||||||||||||||||||||||||||||||||||||||||||||||||||||||||||||||||||||||||
헌액 연도 | 2007년 |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
투표 결과 | 98.53% (1회) |
칼 립켄 주니어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메이저 리그 올센추리 팀 일원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이름 | 칼 립켄 주니어 Cal Ripken Jr. | |
포지션 | 유격수 | ||
득표수 | 669,033 |
MLB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
1983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 ||||
1983 | 1984 |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2000 | 2001 |
1983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MVP | ||||
로빈 욘트 (밀워키 브루어스) | → | 칼 립켄 주니어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윌리 에르난데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9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MVP | ||||
리키 헨더슨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 | 칼 립켄 주니어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데니스 에커슬리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1982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 | ||||
데이브 리게티 (뉴욕 양키스) | → | 칼 립켄 주니어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론 키틀 (시카고 화이트삭스) |
1991년 ~ 1992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유격수 부문 골드 글러브 | ||||
아지 기옌 (시카고 화이트삭스) | → | 칼 립켄 주니어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오마 비즈켈 (시애틀 매리너스) |
1983년 ~ 1986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유격수 부문 실버 슬러거 | ||||
로빈 욘트 (밀워키 브루어스) | → | 칼 립켄 주니어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앨런 트래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89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유격수 부문 실버 슬러거 | ||||
앨런 트래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 | 칼 립켄 주니어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앨런 트래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9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유격수 부문 실버 슬러거 | ||||
앨런 트래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 | 칼 립켄 주니어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트래비스 프라이맨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93년 ~ 1994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유격수 부문 실버 슬러거 | ||||
트래비스 프라이맨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 | 칼 립켄 주니어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존 발렌틴 (보스턴 레드삭스) |
훌리오 프랑코 (텍사스 레인저스) | → | 칼 립켄 주니어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켄 그리피 주니어 (시애틀 매리너스) |
데릭 지터 (뉴욕 양키스) | → | 칼 립켄 주니어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개럿 앤더슨[2003년] (애너하임 에인절스) |
1991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게임 홈런 더비 우승자 | ||||
라인 샌버그 (시카고 컵스) | → | 칼 립켄 주니어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마크 맥과이어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해럴드 레이놀즈 (시애틀 매리너스) | → | 칼 립켄 주니어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배리 라킨 (신시내티 레즈) |
→ | 칼 립켄 주니어 마크 맥과이어 새미 소사 | → | 토니 그윈 리키 헨더슨 배리 본즈 시애틀 매리너스 (2001) |
1995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 ||||
보니 블레어 요한 올라브 코스 | → | 칼 립켄 주니어 | → | 타이거 우즈 |
볼티모어 오리올스 등번호 8번 | ||||
데이브 스캑스 (1977~1980) | → | 칼 립켄 주니어 (1981~2001) | → | 영구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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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f4601><colcolor=#ffffff> 볼티모어 오리올스 No. 8 | |
칼 립켄 주니어 Cal Ripken Jr. | |
본명 | 캘빈 에드윈 립켄 주니어 Calvin Edwin Ripken Jr. |
출생 | 1960년 8월 24일 ([age(1960-08-24)]세) |
메릴랜드 주 하버 디 그레이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아버딘 고등학교 |
신체 | 193cm / 90kg |
포지션 | 유격수 → 3루수[2]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78년 드래프트 2라운드 (전체 48번, BAL) |
소속팀 | 볼티모어 오리올스 (1981~2001) |
기록 | 사이클링 히트 (1984.5.6.) |
가족 | 아버지 칼 립켄 시니어, 동생 빌리 립켄 |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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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야구 선수. 현역시절 포지션은 유격수, 3루수이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원클럽맨이자 프랜차이즈 스타. 2,632경기 연속 출장이라는 대기록으로 유명하다. 또한 19년 연속으로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 출장하기도 했다.
2. 선수 시절
1960년 메릴랜드 주 아브르 데 그레이스에서 태어난 칼 립켄 주니어는 그의 아버지인 칼 립켄 시니어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코치였기 때문에 매우 어린 나이부터 야구를 접하고 자랄 수 있었다. 그는 오리올스의 3루수였던 더그 디싱에게서 야구를 배울 수 있었고 부모님과 야구에 관한 대화를 해가며 자라났다. 그는 3살 때부터 야구선수의 꿈을 키웠고 10살 때는 야구경기 안팎의 일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야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립켄과 그의 동생인 빌리 립켄[3]은 애버딘 고등학교에 진학해 같이 야구를 했다. 립켄은 고등학교 시절 투타겸업을 했지만 지금처럼 유격수로 경기를 소화하지 못했고 그가 제대로 송구를 할 팔힘이 부족해보인다는 야구부 코치의 우려에 의해 2루수로 경기를 소화했다. 2학년으로 올라가서야 지금처럼 유격수 자리에 있을 수 있었고 3학년이 되어서는 지역 리그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졸업반 시절에는 팀을 주 챔피언에 올리는 업적을 세웠다.
2.1. 마이너 리그 시절
1978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의해 2라운드 48순위로 선발된 립켄은 마이너 리그 선수가 되었지만 루키 리그에서 .264의 타율에 홈런 없이 24타점을 기록하면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듬 해인 1979년 싱글 A 리그에서 뛸 수 있었고 감독은 그를 유격수가 아닌 3루수로 기용했다. 싱글 A 리그에서 .303의 타율에 5홈런 54타점이라는 좋은 성적을 보여주면서 올스타에 선정된 립켄은 더블 A 리그로 승격할 수 있었으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1980년 더블 A 리그에서 뛰던 립켄은 4개의 홈런에 78타점을 기록하면서 감독의 믿음에 보답해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자신의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1981년 오리올스는 립켄을 40인 로스터에 포함시켰고 스프링 캠프를 거쳤지만 곧 트리플 A 리그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는 이 때 가장 긴 야구 경기를 뛰게 된다. 연장 32회동안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두 달을 기다려야 재개되었던 이 경기는 상대 팀의 승리로 끝났다. 이 경기에서 13타수 3안타를 기록한 립켄은 체력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고 이는 그가 선수 생활 내내 체력 훈련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는 계기가 되었다.[4]
2.2. 메이저 리그 시절
본래 오리올스는 1981년 내내 립켄을 트리플 A 리그에 둘려고 했지만 마음을 돌려 그를 후반기에 콜업시켰다. 그는 1981년 8월 10일 캔자스시티 로얄스를 상대로 데뷔했다. 그리고 6일 후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 첫 안타를 신고했다. 1981년 립켄은 .128 .150 .128 0홈런 0타점이라는 부진한 모습으로 자신의 루키 시즌을 보냈다.이듬 해인 1982년 오리올스는 립켄을 주전 3루수로 기용했다. 그러나 그는 시즌 초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고 이에 동료 선수들과 코치들의 자문을 받아보았으나 좋은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는 레지 잭슨의 조언을 통해 슬럼프를 극복해냈고 이후 감독이었던 얼 위버는 그를 유격수로 전환시켰다. 1982년 립켄은 .264 .317 .415 28홈런 93타점을 기록하고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에 오르게 된다.
1983년 립켄은 더욱 진화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지 얼마 안되어 그의 선수시절을 통틀어 최고의 시즌 중 하나를 기록했다.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318 .371 .517 27홈런 102타점으로 안타, 2루타, 득점 1위를 차지하면서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신인왕 수상 다음 해에 MVP를 수상한 첫번째 선수가 되었다.[5] 이 시즌 팀은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고 립켄은 공격에서는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지만 여러 중요한 수비를 해내면서 오리올스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1984년에도 .304 .374 .510 27홈런 86타점으로 뛰어난 공격력을 선보였고 비록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지 못했지만 583개의 어시스트로 아메리칸 리그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팀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이후에도 립켄은 좋은 성적을 냈으나 팀의 성적은 그를 받쳐주지 못했다.
1987년 그의 아버지인 칼 립켄 시니어가 얼 위버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7월 11일 그의 동생인 빌리 립켄이 경기에 출장하면서 삼부자가 같은 경기를 뛴 사례를 만들어냈다. 립켄은 1987년 .252 .333 .436 27홈런 98타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1988년 오리올스는 시즌을 6연패로 시작하자 립켄 시니어를 해임했고 프랭크 로빈슨이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 팀은 21연패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립켄은 .264 .371 .431 23홈런 81타점을 기록했고 그 해 올스타 게임에서는 명수비를 보여주었다.
1989년 립켄은 8월 2일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에서 동생인 빌리 립켄과 함께 7안타를 기록했다. 이는 아메리칸 리그 첫 기록이었다.[6] 1989년 립켄은 .257 .317 .401 21홈런 93타점과 .990의 수비율을 기록했고 47경기 연속으로 에러를 기록하지 않는 좋은 수비를 선보였다. 이듬 해인 1990년 립켄은 첫 59경기동안 .209의 타율을 기록하며 공격 면에서 슬럼프를 보였지만 뛰어난 수비를 선보이며 팬들을 놀랍게 했다. .250 .341 .415 21홈런 84타점을 기록한 그는 시즌 내내 단 3개의 에러만을 기록했지만 골드 글러브는 17개의 에러를 기록한 아지 기옌이 수상하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1991년 립켄은 메이저리그 시절 단일 시즌 기준으로 최고의 해를 보낸다. 그는 전반기까지 1947년 루 부드로 이후 최초로 타격 순위에서 선두를 달린 유격수였다. 홈런 더비에서 우승한 립켄은 올스타 게임 MVP까지 수상하면서 두 상을 모두 수상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323 .374 .566 34홈런 114타점을 기록한 립켄은 최초로 30개의 홈런과 200개의 안타, 40개의 2루타를 기록한 유격수가 되었다. 그 결과 첫 골드글러브를 수상했고 실버 슬러거와 AP통신 올해의 선수상, 스포팅 뉴스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 해 팀은 67승 95패를 기록했다. 그리고 립켄은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뛴 마지막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1992년 립켄은 고작 .251 .323 .366 14홈런 72타점에 그치는 부진에 시달렸고 시즌 후반에는 홈관중들에게서도 야유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다. 이듬 해인 1993년 립켄은 처음으로 팀에서 혼자 있게 된다. 그의 동생인 빌리가 텍사스 레인저스로 트레이드 되었기 때문이다. 시즌 초반까지 슬럼프에 시달리던 립켄은 5월부터 슬럼프에서 벗어난 기록을 보였으나 사람들은 그의 출전 기록에 비난을 하기도 했다. 바비 본즈[7]는 "정말 바보짓이다. 내가 만약 감독이라면 립켄을 출전시키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리올스의 감독이던 데이비 로페즈는 "립켄만이 자신이 쉬는 날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대답했다. 6월 6일 립캔은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경기에서 무릎을 다쳤고 사람들은 그가 경기에 나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여전히 경기에 출장했다. 그리고 7월 10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경기에서 통산 2000안타를 기록했다. 일부 사람들은 립켄을 올스타 게임에 출장시키지 말고 휴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팬들은 그를 올스타로 선정했다. 그리고 올스타 게임 이후 그의 타격 성적은 한결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1993년 립켄은 .257 .329 .420 24홈런 90타점을 기록했다.
1994년 립켄은 5월 24일 밀워키 브루어스를 상대로 통산 300홈런을 기록했고 선수단의 파업으로 시즌이 조기 마감될때 까지 .315 .364 .459 13홈런 75타점을 기록했다. 1995년 파업의 여파로 단축 시즌을 치르는 가운데 립켄은 .262 .324 .422 17홈런 88타점으로 전년보다 처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1996년 립켄은 .278 .341 .466 26홈런 102타점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이듬 해인 1997년 팻 길릭 단장은 립켄의 양해를 구하고 그를 다시 3루수로 이동시켰다. 그 해 립켄은 신경 손상으로 불편을 겪었지만 .270 .331 .402 17홈런 84타점을 기록했다.
이후에도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던 립켄이였지만 하락세를 피할수는 없었다. 1999년 개막 전 아버지를 잃은[8] 립켄은 연이은 맹타를 보였지만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출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9월 3일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와의 경기에서 통산 400홈런을 기록했다. 2000년 4월 15일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통산 3000안타를 기록한 립켄은 2001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게 되었다.
그의 마지막 올스타전이었던 2001년 7월 10일 아메리칸 리그의 올스타전 선발 유격수였던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3루수를 보던 그를 유격수의 자리로 돌려보냈다.[9] 그리고 그 경기에서 립켄은 박찬호[10]를 상대로 홈런을 치면서 올스타 게임 MVP에 올랐다. 립켄은 2001년을 끝으로 수많은 기록을 남긴 채 은퇴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
그를 상징하는 수많은 기록 중 가장 위대한 기록은 2632경기 연속 출장 기록이지만 그는 통산 3000안타와 400홈런을 기록한 뛰어난 공격력을 가진 유격수이기도 했다. 데뷔 시즌을 제외하고 은퇴할 때 까지 단 한 번도 10개 이하의 홈런을 기록해 본 적이 없는 립켄은 345홈런으로 통산 유격수 홈런 1위[11]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스탠 뮤지얼, 칼 야스트렘스키와 함께 한 팀에서 3000안타와 400홈런을 동시에 기록한 선수이기도 하다.그는 수비 또한 뛰어난 선수였다. 비록 아지 스미스나 오마 비즈켈같은 작은 체구의 명수들처럼 화려하고 날렵하다는 느낌은 심어주지 못했으나, 20년이 넘도록 유격수로 뛰면서 통산 .976의 수비율을 기록했다. 이는 다소 이중적인 평가의 잣대가 될 수 있는 수치이나 립켄의 통산 dWAR인 34.6은 아지 스미스, 브룩스 로빈슨, 마크 벨란저의 뒤를 이은 역대 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 기록으로 보건데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뿐더러 관점에 따라서는 역대급이라 할 수 있는 수비능력을 보여줬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마른 몸매에도 불구하고 주력이 무척 안좋아서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해 본 시즌이 없다. 통산 도루가 고작 36개이며 도루자는 그보다 많은 39개고 도루 성공률은 48%다. 뚱뚱하면 못하는 포지션 특성상 메이저리그 주전 유격수들의 평균적인 도루 성공률은 60%를 넘고 도루 암흑기를 포함해도 40대까지 롱런하며 풀타임 경험이 많은 유격수가 통산 100도루를 못 기록하는 경우는 적으며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하는 경우는 정말 드문 편이라 상당히 독특한 사례다.[12]
도루만 적은게 아니라 메이저리그 통산 병살타 3위이기도 하다.[13][14]
동 시대에 존재하기 않았던 달리기가 느린 거포형 유격수라는 신개념 내야수였던 립켄은 넓은 수비범위와 흠잡을 데 없는 수비능력으로 다른 유격수들과 궤를 달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의 성공은 알렉스 로드리게스, 데릭 지터, 노마 가르시아파라, 미겔 테하다 등 공수를 겸비한 대형 유격수들의 시대를 예고했다.
3.1. 철인(鐵人)
립켄은 1982년 5월 31일부터 1998년 9월 20일까지 2632경기를 연속 출장[15]했고 그 시간동안 그는 21세의 풋풋한 신입에서 38세의 베테랑이 되어 있었다. 그는 1982년 6월 15일부터 1987년 9월 4일까지 단 한 이닝도 빠지지 않고 904경기에서 8243이닝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당시 감독이었던 그의 아버지 칼 립켄 시니어의 중단 요청으로 인해 중단되었다.그의 연속 출장 기록이 더 빛나는 것은 단 한 번도 편법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130경기 연속 출장을 기록한 루 게릭이 '1회 한 타석 후 교체'라는 방법을 통해 기록을 이어나가기도 했던 반면 립켄은 팀 이닝의 무려 99.2%를 소화했다. 7회가 끝나기 전에 립켄이 경기에서 빠진 건 단 네 번 뿐이었고 그중 두 번은 심판과 언쟁을 벌이다 퇴장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록을 세운 그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1985년에는 2루에서 슬라이딩을 하다 발목을 다쳤지만 천만다행으로 다음날 경기가 없었다. 1993년에는 집단 난투극 도중 투수 마이크 무시나를 보호하려다 무릎을 다쳤다. 주위의 만류를 뿌리친 립켄은 붕대를 친친 감고 끝까지 경기를 소화했다. 1996년에는 올스타전에 앞서 사진을 찍다가 다른 선수가 넘어지면서 휘두른 팔에 코뼈에 금이 가기도 했지만 올스타전은 물론 이후 경기를 모두 소화했다.
최대 위기는 1996년 아내의 2번째 출산이었다. 립켄은 출산을 지켜보기 위해 기록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얼마나 중요한 기록인지를 알았기 때문일까 립켄의 둘째 아들은 경기가 없는 날 세상 빛을 봤다.
립켄의 기록이 더 빛나는 것은 2632경기의 84%에 해당되는 2216경기를 체력 부담이 큰 유격수로 뛰었다는 것이다. 나머지 416경기 역시 3루수로 뛴 것으로 1루수로만 출장한 게릭과는 대조적이다. 16년 동안 립켄은 29명의 2루수와 호흡을 맞췄으며, 522명의 상대 팀 유격수를 만났다. 거기다가 그는 키 193cm의 거구 유격수로, 수비 도중에 필연적으로 부상이 생길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16]하고 이런 기록을 달성했는데 코리 시거나 카를로스 코레아 등 현대의 덩치 큰 유격수들이 자주 깨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칼 립켄 주니어의 내구성의 위대함이 더욱 빛나보이는 면이 있다.
그리고 그가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도장을 찍은 16년 동안 총 3695명의 선수가 부상자명단에 올랐다. 한편 1994년 파업이 없었다고 가정하면 립켄의 기록은 2700경기가 될 수 있었다.
1995년 9월 6일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와의 경기에서 5회 말이 지나고 1939년 루 게릭이 달성한 213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마침내 경신하게 되자 심판진과 상대 팀인 에인절스 선수들을 포함한 모든 관객들이 22분 동안 기립박수를 보냈다.[17] 방송사는 광고 없이 이 장면을 계속 중계했으며 이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 메이저리그 인기가 지금같지 않던[18] 당시 한국의 스포츠 뉴스에서도 그의 최다 경기 출장 기록만은 따로 코너를 만들어 방송했었을 정도였다. 결국 이 기록으로 인해 립켄은 1995년 올해의 스포츠 인물에 선발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리고 그는 그의 기록을 1998년 9월 20일 뉴욕 양키스와의 경기에서 중단했다. 당시는 시즌 종료가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부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굳이 빠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기록이 팀에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립켄은 16년을 이어온 기록을 스스로 중단했다. 그를 대신해 선발 3루수로 출전했던 선수는 당시 신인이었던 라이언 마이너다.[19]
훗날 립켄은 기록에 도전하면서 만났던 가장 큰 적은 게으름과 식상함이라고 했다. 더 나은 대우를 받고 새로운 팀으로 옮기고 싶은 욕망도 있었으며 컨디션이 좋지 않은 데도 코칭 스태프의 배려로 출전할 때에는 스스로 부끄러웠고 동료들에게 미안했다고 술회했다.
4. 명예의 전당 입성
연도 | 득표율(%) |
2007 | 98.5 |
4.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 그레이잉크 | HOF 모니터 | HOF 스탠다드 | |
칼 립켄 주니어 | 19 | 116 | 236 | 58 |
HOF 입성자 평균 | 27 | 144 | 100 | 50 |
- JAWS - Shortstop (3rd)
career WAR | 7yr-peak WAR | JAWS | |
칼 립켄 주니어 | 95.9 | 56.1 | 75.8 |
유격수 HOF 입성자 평균 | 66.7 | 42.8 | 54.8 |
5. 은퇴 이후
은퇴 후 야구용품 사업, 투자 자문업, 마이너리그 구단주, 저술 활동 등 다분야에서 활동을 해서 크게 성공했다. 물론 자선사업도 선수 시절보다 더 활발하게 하는 중이다.2000년대 들어 립켄이 은퇴한 후의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바닥을 기다 보니, 팬들은 그가 구단주가 되어 팀을 구해주길 기대하기도 했다. 2010년 텍사스 레인저스가 텍사스의 레전드 놀란 라이언에게 인수되었다는 점에서 오리올스 역시 조만간 그렇게 되지 않을까 기대한 팬들이 있었지만,
근데 2012년에 갑자기 각성해서 악의 제국과 1위 싸움을 하다 2위로 와일드 카드 플레이오프에 나가서 조시 해밀턴의 활약(...)으로 디비전 시리즈에 나가는 이변이 일어났고, 결국 악의 제국에 무릎을 꿇었으나 오랜 부진을 벗어나서 상당히 선전했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포스트시즌에는 존 스몰츠와 짝을 이뤄 tbs의 포스트시즌 해설을 맡고 있다.
6. 이모저모
- 성이 같은 키스톤 콤비가 역대 네 콤비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칼-빌리 립켄으로 유일하게 형제 키스톤 콤비기도 했다.
빌리 립켄이 설명하는 칼 립켄의 수비 연습 |
립켄 주니어 어머니를 납치한 납치범이 월마트에서 찍힌 CCTV 장면 |
- 2012년 7월에는 어머니 바이올렛 여사가 정체를 알수 없는 한 괴한에 의해 집 차고에서 납치되어 인질이 되었다가 풀러난 적도 있었다. FBI가 적극적으로 수사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범인 검거는커녕 신원파악도 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상태.
- 2013년 5월 19일에는 오리올스의 연고지인 메릴랜드 주의 플레그쉽 대학교인 메릴랜드 대학교의 졸업식이 있었는데, 립켄은 대학교의 졸업사회 연설을 하였으며 연설 이후 메릴랜드 주에서의 활약 및 봉사를 인정받아 명예졸업장을 받기도 하였다.
- 역대 3,000안타 타자 중 가장 낮은 통산 타율과 출루율을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수비력과 장타력이 매우 훌륭하기에 별 문제될 부분은 아니다.
- 팬들의 사인 요청을 거절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인 뿐만 아니라 사진 촬영에도 흔쾌히 응하며 이 때문에 선수단 일정이 늦어져 동료 선수와 갈등이 생겼던 적도 있다.(...) 그의 실력이 S급이라면 인간성과 팬 서비스는 SS급인 진정한 유격수(SS)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실력, 매너, 인기, 깨끗한 사생활, 지역사회 공헌 등을 모두 달성한 인생의 5툴 플레이어.
- 메이저 데뷔 2년째였던 1983년부터 은퇴한 해인 2001년까지, 무려 19년 연속으로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 출장했다.
- 최태원이 2002년 SK 와이번스 시절 1000 경기 연속 출장을 돌파하자 영상을 통해 축하를 보낸 적이 있다.
- 칼 립켄 주니어의 별명은 철인(아이언맨)으로, 립켄 이전 시대에 연속경기출장 기록을 가진 루 게릭의 별명 철마(Iron Horse)에서 땄다. 그러다보니 마지막 올스타전이었던 2001년 올스타전에 그의 업적을 다루는 영상의 배경음악으로 오지 오스본의 'Iron Man'이 브금으로 깔리기도 했다.
7. 연도별 기록
칼 립켄 주니어의 역대 MLB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팀 | G | PA | H | 2B | 3B | HR | R | RBI | SB | BB | SO | AVG | OBP | SLG | OPS | fWAR | bWAR |
1981 | BAL | 23 | 40 | 5 | 0 | 0 | 0 | 1 | 0 | 0 | 1 | 8 | .128 | .150 | .128 | .278 | -0.4 | -0.5 |
1982 | 160 | 655 | 158 | 32 | 5 | 28 | 90 | 93 | 3 | 46 | 95 | .264 | .317 | .475 | .792 | 4.6 | 4.7 | |
1983 | 162 | 726 | 211 | 47 | 2 | 27 | 121 | 102 | 0 | 58 | 97 | .318 | .371 | .517 | .888 | 8.5 | 8.2 | |
1984 | 162 | 716 | 195 | 37 | 7 | 27 | 103 | 86 | 2 | 71 | 89 | .304 | .374 | .510 | .884 | 9.8 | 10.0 | |
1985 | 161 | 718 | 181 | 32 | 5 | 26 | 116 | 110 | 2 | 67 | 68 | .282 | .347 | .469 | .816 | 5.4 | 5.6 | |
1986 | 162 | 707 | 177 | 35 | 1 | 25 | 98 | 81 | 4 | 70 | 60 | .282 | .355 | .461 | .816 | 6.9 | 6.7 | |
1987 | 162 | 717 | 157 | 28 | 3 | 27 | 97 | 98 | 3 | 81 | 77 | .252 | .333 | .436 | .769 | 3.5 | 3.3 | |
1988 | 161 | 689 | 152 | 25 | 1 | 23 | 87 | 81 | 2 | 102 | 69 | .264 | .372 | .431 | .803 | 5.0 | 5.7 | |
1989 | 162 | 712 | 166 | 30 | 0 | 21 | 80 | 93 | 3 | 57 | 72 | .257 | .317 | .401 | .718 | 5.8 | 6.7 | |
1990 | 161 | 695 | 150 | 28 | 4 | 21 | 78 | 84 | 3 | 82 | 66 | .250 | .341 | .415 | .756 | 6.2 | 7.5 | |
1991 | 162 | 717 | 210 | 46 | 5 | 34 | 99 | 114 | 6 | 53 | 46 | .323 | .374 | .566 | .940 | 10.6 | 11.5 | |
1992 | 162 | 715 | 160 | 29 | 1 | 14 | 73 | 72 | 4 | 64 | 50 | .251 | .323 | .366 | .689 | 3.7 | 4.1 | |
1993 | 162 | 718 | 165 | 26 | 3 | 24 | 87 | 90 | 1 | 65 | 58 | .257 | .329 | .420 | .748 | 3.7 | 3.7 | |
1994 | 112 | 484 | 140 | 19 | 3 | 13 | 71 | 75 | 1 | 32 | 41 | .315 | .364 | .459 | .823 | 4.6 | 4.0 | |
1995 | 144 | 613 | 144 | 33 | 2 | 17 | 71 | 88 | 0 | 52 | 59 | .262 | .324 | .422 | .745 | 4.1 | 3.9 | |
1996 | 163 | 707 | 178 | 40 | 1 | 26 | 94 | 102 | 1 | 59 | 78 | .278 | .341 | .466 | .807 | 3.8 | 3.8 | |
1997 | 162 | 686 | 166 | 30 | 0 | 17 | 79 | 84 | 1 | 56 | 73 | .270 | .331 | .402 | .733 | 1.6 | 1.8 | |
1998 | 161 | 659 | 163 | 27 | 1 | 14 | 65 | 61 | 0 | 51 | 68 | .271 | .331 | .389 | .721 | 1.6 | 1.9 | |
1999 | 86 | 354 | 113 | 27 | 0 | 18 | 51 | 57 | 0 | 13 | 31 | .340 | .368 | .584 | .952 | 2.9 | 2.7 | |
2000 | 83 | 339 | 79 | 16 | 0 | 15 | 43 | 56 | 0 | 23 | 37 | .256 | .310 | .453 | .763 | 1.3 | 1.4 | |
2001 | 128 | 516 | 114 | 16 | 0 | 14 | 43 | 68 | 0 | 26 | 63 | .239 | .276 | .361 | .637 | -0.5 | -0.6 | |
MLB 통산 (21시즌) | 3001 | 12883 | 3184 | 603 | 44 | 431 | 1647 | 1695 | 36 | 1129 | 1305 | .276 | .340 | .447 | .788 | 92.5 | 95.9 |
8. 관련 문서
[2003년] [2] 유격수 2,302경기/3루수 674경기. 마지막 5시즌에 완전히 3루수로 전향했다. 1982년에도 3루수로 70경기 출장했다.[3] 메이저 리그 선수로 한때 형과 같이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수비를 책임진 적 있던 2루수다.[4] 특이할 점이 있다면 이 경기에서 상대 팀 3루수로 나선 선수가 역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웨이드 보그스였다는 것이다.[5] 이후 라이언 하워드(2005년-2006년), 더스틴 페드로이아(2007년-2008년), 크리스 브라이언트(2015년-2016년)가 뒤를 잇는다. 그런데 이 셋은 모두 립켄과 달리 부상으로 커리어가 꺾여 버리고 말았다.[6] 메이저 리그 기록은 1932년 6월 25일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로이드 워너와 폴 워너 형제가 기록했다.[7] 배리 본즈의 아버지이다.[8] 칼 립켄 주니어의 아버지인 칼 립켄 시니어는 1999년 3월 25일 자신의 고향인 메릴랜드주 애버딘에서 폐암으로 향년 6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는데 칼 립켄 시니어가 죽기 17일전인 1999년 3월 8일에 뉴욕 양키스의 레전드 조 디마지오가 타계하였다.[9] [10]
경기 직후 박찬호 본인은 "립켄이 잘 쳐서 넘어간 것"이라고 인터뷰 하였지만, 기자나 팬들 대부분은 립켄에게 홈런을 선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실제 구속은 91마일 가운데 몰린 실투였다. 그걸 철인이 잘 받아넘긴 거고, 구장도 세이프코 필드였는데 메이저 구장중에서도 가장 홈런 치기 어려운 구장이다. 2001년 올스타전 영상. 해당 영상 48분경에 나온다.[11]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한 개 차이인 344개로 접근하기도 했었지만 그는 뉴욕 양키스에서 3루수로 전향했다. 통산 512홈런을 기록한 어니 뱅크스도 있지만 뱅크스는 유격수로는 277홈런을 기록했다[12] 참고로 유격수도 아니고 뚱뚱한 홈런왕 이미지로 잘 알려진 베이브 루스의 통산 도루가 123회이며 심지어 도루성공률 또한 51%가 넘는다![13] 350병살타와 294실책.메이저리그 최초 300-300은 실패했다 (원래는 통산 병살타 1위였으나 2017년 8월 4일 경기에서 알버트 푸홀스가 351번째 병살타를 때리며 립켄의 기록을 넘어섰고, 립켄은 병살타 2위가 되었다. 그리고 5년 뒤인 2022년에 미겔 카브레라가 립켄을 제치고 통산 병살타 2위로 올라섰다.) 300병살타를 넘긴 사람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총 9명이지만 유격수는 칼 립켄 주니어뿐이다. 유격수는 대체로 날씬한 몸매에 발이 빠른데 심지어 체격이 크고 유격수치고 빠르지 않다는 후세의 공격형 유격수들도 평균 정도의 주력은 거의 다 갖추지만 칼 립켄은 그런 쪽이 아니었다. 야수로는 뛰어난 유격수이면서도 타자로써는 런닝 툴을 포기하다시피한 전형적인 순수 거포형 타자였다.[14] 메이저리그에서 7000타수 이상을 기록한 역대 유격수 중 칼 립켄보다 도루가 적었던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50~60년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유격수이자 농구선수 출신 야구선수였던 딕 그로트의 14개. 듀크 대학교 농구팀 가드 출신에 NBA 상위지명 유망주 농구선수였다는데 키가 180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 시즌만에 NBA를 그만두고 내셔널리그 야구선수가 되었다고 한다. 1960년 피츠버그의 주장이었는데 우승과 타격왕빨로 MVP를 했었다. 자세한 정보는 없지만 당대가 도루암흑기이기도 했고 본인도 발이 느려서 안 한 거 같다. 1960년 반짝 성적 외에는 통산타격 성적도 OPS 7할이 안 될만큼 다른 레전드들에 비해 투고타저 시대의 유격수치고도 형편없어서 칼립켄과 비교할 수준의 선수는 아니다.[15] 한국프로야구의 연속 출장 기록은 최태원의 10141009경기 연속 출장이고(후에 기록 정정) 일본프로야구의 연속 출장 기록은 기누가사 사치오의 2215경기 연속 출장이다.[16] 덩치 큰 센터 내야수들은 땅으로 굴러오는 공을 잡기 위해 몸을 숙이고 빠른 속도로 움직여야 하므로 당연히 몸이 남아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립켄 주니어 말고도 지터, 에이로드같은 키 190짜리 유격수가 대선수로 평가받은 것.[17] 참고로 이 경기에는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과 앨 고어 부통령이 현장에서 이 광경을 직접 관람했는데 이들도 기립박수를 쳤다.[18] 박찬호가 진출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메이저리그는 (감히 범접하지 못할) '대단한 미국야구'라는 먼 존재처럼 인식되어 왔다. 박찬호도 96년부터 어느 정도 메이저에서 입지를 확보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시즌 10승 이상의 에이스급은 아니었다. 이후 97~98년 다저스에서 노모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에이스가 되면서 야구 스포츠 방송도 아닌 오락방송에서도 취재를 가거나 섭외를 받는 등, 단순히 야구팬들만의 스타가 아닌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코리안 특급'으로 인정받았다. 같은 시기 IMF 외환위기 당시의 박세리와 비슷했던 셈.[19] 이후 마이너는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2004년을 끝으로 은퇴, 2006년부터 꾸준히 지도자 활동을 했지만 2023년 12월 22일에 향년 49세의 젊은 나이를 뒤로하고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이너 본인은 생전에 칼 립켄 주니어의 대기록을 끝낸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 나쁘진 않았다고 한다.[20] 역대 1위 HOF 헌액 득표율은 마리아노 리베라의 100.0%, 2위는 데릭 지터, 3위 켄 그리피 주니어. 4위는 톰 시버. 5위는 놀란 라이언이다. 역대 내야수 득표율로는 칼 립켄이 2위다. 자세히 보면 메이저리그 역사에 손에 꼽히는 선수 중에 주니어(아버지와 이름 같은 2세)들이 꽤 많다. 저 6위까지 중에 4명이 주니어다. 마리아노 리베라도 주니어고, 놀란 라이언도 주니어다. 참고로 94.68퍼센트를 기록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5툴 외야수 레전드라는 윌리 메이스도 주니어다. 그래도 득표율 탑10 중 토니 그윈은 아들이 토니 그윈 주니어라 본인이 시니어이며, 타이 콥도 타이 콥 주니어라는 아들을 둔 시니어다. 오오 시니어 두명
경기 직후 박찬호 본인은 "립켄이 잘 쳐서 넘어간 것"이라고 인터뷰 하였지만, 기자나 팬들 대부분은 립켄에게 홈런을 선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실제 구속은 91마일 가운데 몰린 실투였다. 그걸 철인이 잘 받아넘긴 거고, 구장도 세이프코 필드였는데 메이저 구장중에서도 가장 홈런 치기 어려운 구장이다. 2001년 올스타전 영상. 해당 영상 48분경에 나온다.[11]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한 개 차이인 344개로 접근하기도 했었지만 그는 뉴욕 양키스에서 3루수로 전향했다. 통산 512홈런을 기록한 어니 뱅크스도 있지만 뱅크스는 유격수로는 277홈런을 기록했다[12] 참고로 유격수도 아니고 뚱뚱한 홈런왕 이미지로 잘 알려진 베이브 루스의 통산 도루가 123회이며 심지어 도루성공률 또한 51%가 넘는다![13] 350병살타와 294실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