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모토 유타카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후쿠모토 유타카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1976년 일본시리즈 최고 수훈 선수(MVP) | ||||
야마구치 타카시 (한큐 브레이브스) | →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브레이브스) | → | 야마다 히사시 (한큐 브레이브스)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bordercolor=#3fb1e5> | 퍼시픽 리그 역대 최우수선수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rowcolor=#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벳토 카오루 마이니치 / 외야수 | 야마모토 카즈토 난카이 / 내야수 | 유키 스스무 난카이 / 투수 | 오카모토 이사미 난카이 / 내야수 | 오오시타 히로시 니시테츠 / 외야수 | |
<rowcolor=#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이이다 토쿠지 난카이 / 외야수 |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내야수 |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투수 | 스기우라 타다시 난카이 / 외야수 | ||
<rowcolor=#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야마우치 카즈히로 마이니치 / 투수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포수 | 장훈 토에이 / 외야수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포수 | 조 스탠카 난카이 / 투수 | |
<rowcolor=#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포수 | 아다치 미츠히로 한큐 / 투수 | 요네다 테츠야 한큐 / 투수 |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외야수 | ||
<rowcolor=#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키타루 마사아키 롯데 / 투수 |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외야수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외야수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포수 | 카네다 토메히로 롯데 / 외야수 | |
<rowcolor=#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카토 히데지 한큐 / 내야수 | 야마다 히사시 한큐 / 투수 | 찰리 매뉴얼 킨테츠 / 외야수 | |||
<rowcolor=#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키다 이사무 닛폰햄 / 투수 | 에나츠 유타카 닛폰햄 / 투수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내야수 | 히가시오 오사무 세이부 / 투수 | 부머 웰즈 한큐 / 내야수 | |
<rowcolor=#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내야수 |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 내야수 | 히가시오 오사무 세이부 / 투수 |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 외야수 | 랄프 브라이언트 킨테츠 / 외야수 | |
<rowcolor=#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노모 히데오 킨테츠 / 투수 | 궈타이위안 세이부 / 투수 | 이시이 타케히로 세이부 / 투수 |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 투수 | 이치로 오릭스 / 외야수 | |
<rowcolor=#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이치로 오릭스 / 외야수 | 니시구치 후미야 세이부 / 투수 | 마츠이 카즈오 세이부 / 내야수 | 쿠도 키미야스 다이에 / 투수 | ||
<rowcolor=#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외야수 | 터피 로즈 킨테츠 / 외야수 | 알렉스 카브레라 세이부 / 내야수 | 조지마 켄지 다이에 / 포수 |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외야수 | |
<rowcolor=#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스기우치 토시야 소프트뱅크 / 투수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내야수 | 다르빗슈 유 닛폰햄 / 투수 | 이와쿠마 히사시 라쿠텐 / 투수 | 다르빗슈 유 소프닛폰햄 / 투수 | |
<rowcolor=#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와다 츠요시 소프트뱅크 / 투수 | 우치카와 세이이치 소프트뱅크 / 외야수 | 요시카와 미츠오 닛폰햄 / 투수 | 다나카 마사히로 라쿠텐 / 투수 | 카네코 치히로 오릭스 / 투수 | |
<rowcolor=#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외야수 | 오타니 쇼헤이 닛폰햄 / 투수, 외야수 | 데니스 사파테 소프트뱅크 / 투수 | 야마카와 호타카 세이부 / 내야수 | 모리 토모야 세이부 / 포수 | |
<rowcolor=#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외야수 |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투수 | 콘도 켄스케 소프트뱅크 / 외야수 |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91db><tablebgcolor=#0091db> |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다안타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단일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tablewidth=100%> 1936년 ~ 1949년 | ||||
<rowcolor=#ffffff> 1936秋 | 1937春 | 1937秋 | 1938春 | 1938秋 | ||
후지이 이사오 오사카 / 40개 | 마츠키 켄지로 오사카 / 70개 | 버키 해리스 고라쿠엔 / 62개 |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50개 |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56개 | ||
<rowcolor=#ffffff> 1939 | 1940 | 1941 | 1942 | 1943 | ||
카와카미 테츠하루 도쿄쿄진군 / 116개 | 키토 카즈오 라이온군 / 124개 | 카와카미 테츠하루 도쿄쿄진군 / 105개 |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111개 | 이시이 마사유키 도쿄쿄진군 / 89개 | ||
<rowcolor=#ffffff> 1944 | 1946 | 1947 | 1948 | 1949 | ||
오쿠무라 토시아키 킨키닛폰 / 48개 | 카네다 마사야스 오사카 / 152개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137개 오시타 히로시 토큐 / 137개 | 아오타 노보루 요미우리 / 174개 |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187개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센트럴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191개 | 고토 츠구오 오사카 / 155개 |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 163개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162개 |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 172개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147개 요시다 요시오 오사카 / 147개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160개 |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 160개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53개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50개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51개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58개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51개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63개 | 쿠와타 타케시 타이요 / 161개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콘도 카즈히코 타이요 / 152개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63개 | 후지타 타이라 한신 / 154개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57개 | 나가시마 시게오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56개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38개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55개 | 키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 138개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52개 | 마츠바라 마코토 타이요 / 157개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이노우에 히로아키 주니치 / 149개 | 하리모토 이사오 요미우리 / 182개 |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 158개 | 마츠바라 마코토 타이요 / 164개 | 오시마 야스노리 주니치 / 159개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타카하시 요시히코 히로시마 / 169개 | 짐 라이틀 히로시마 / 157개 | 타오 야스시 주니치 / 174개 | 타오 야스시 주니치 / 161개 | 타오 야스시 야자와 켄이치 주니치 / 166개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랜디 바스 한신 / 174개 | 랜디 바스 한신 / 176개 | 카를로스 폰세 타이요 / 159개 | 짐 파치오렉 타이요 / 165개 | 워렌 크로마티 요미우리 / 166개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짐 파치오렉 타이요 / 172개 | 노무라 켄지로 히로시마 / 170개 | 짐 파치오렉 한신 / 159개 | 후루타 아츠야 야쿠르트 / 161개 와다 유타카 한신 / 161개 | 노무라 켄지로 히로시마 / 169개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노무라 켄지로 히로시마 / 173개 | 알론조 파웰 주니치 / 176개 | 루이스 로페스 히로시마 / 170개 | 이시이 타쿠로 요코하마 / 174개 | 로버트 로즈 요코하마 / 192개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로버트 로즈 요코하마 / 168개 | 이시이 타쿠로 요코하마 / 171개 | 시미즈 타카유키 요미우리 / 191개 | 알렉스 라미레스 야쿠르트 / 189개 | 시마 시게노부 히로시마 / 189개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 202개 |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 192개 | 알렉스 라미레스 야쿠르트 / 204개 | 우치카와 세이이치 요코하마 / 189개 | 알렉스 라미레스 요미우리 / 186개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맷 머튼 한신 / 214개 | 맷 머튼 한신 / 180개 | 사카모토 하야토 초노 히사요시 요미우리 / 173개 | 맷 머튼 한신 / 178개 | 야마다 테츠토 야쿠르트 / 193개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카와바타 신고 야쿠르트 / 195개 | 키쿠치 료스케 히로시마 / 181개 | 마루 요시히로 히로시마 / 171개 호세 로페스 DeNA / 171개 | 다얀 비시에도 주니치 / 178개 | 오오시마 요헤이 주니치 / 174개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오오시마 요헤이 주니치 / 146개 | 치카모토 코지 한신 / 178개 | 사노 케이타 DeNA / 161개 오카바야시 유키 주니치 / 161개 | 나카노 타쿠무 한신 / 164개 마키 슈고 DeNA / 164개 | 나가오카 히데키 야쿠르트 / 163개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퍼시픽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벳토 카오루 마이니치 / 160개 | 키즈카 타다스케 난카이 / 130개 | 이이다 토쿠지 난카이 / 153개 |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146개 | 래리 레인즈 한큐 / 184개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이이다 토쿠지 난카이 / 163개 로베르토 바르본 한큐 / 163개 | 사사키 신야 타카하시 / 180개 |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154개 | 카츠라기 타카오 다이마이 / 147개 | 카츠라기 타카오 다이마이 / 163개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에노모토 키하치 다이마이 / 170개 | 에노모토 키하치 다이마이 / 180개 | 에노모토 키하치 다이마이 / 160개 | 히로세 요시노리 난카이 / 187개 | 도이 마사히로 킨테츠 / 168개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156개 | 에노모토 키하치 도쿄 오리온즈 / 167개 | 도이 마사히로 킨테츠 / 147개 | 조지 알트만 도쿄 오리온즈 / 170개 | 나가부치 요조 킨테츠 / 162개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176개 | 오오스기 카츠오 토에이 / 154개 |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169개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152개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156개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히로타 스미오 롯데 / 148개 | 후지와라 미츠루 난카이 / 159개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165개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171개 | 카토 히데지 한큐 / 163개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레론 리 롯데 / 175개 | 후지와라 미츠루 난카이 / 157개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150개 | 스티브 온티베로스 세이부 / 153개 | 부머 웰즈 한큐 / 171개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부머 웰즈 한큐 / 173개 | 부머 웰즈 한큐 / 173개 | 아라이 히로마사 킨테츠 / 184개 | 타카자와 히데아키 롯데 / 158개 | 부머 웰즈 오릭스 / 165개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짐 트라버 킨테츠 / 150개 | 사사키 마코토 다이에 / 158개 | 사사키 마코토 다이에 / 164개 | 이시이 히로오 킨테츠 / 147개 | 이치로 오릭스 / 210개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이치로 오릭스 / 179개 | 이치로 오릭스 / 193개 | 이치로 오릭스 / 185개 | 이치로 오릭스 / 181개 | 마츠이 카즈오 세이부 / 178개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182개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195개 | 마츠이 카즈오 세이부 / 193개 | 타니 요시토모 오릭스 / 189개 | 마츠나카 노부히코 카와사키 무네노리 다이에 / 171개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와다 카즈히로 세이부 / 153개 | 오오무라 나오유키 소프트뱅크 / 165개 | 이나바 아츠노리 닛폰햄 / 176개 | 쿠리야마 타쿠미 카타오카 야스유키 세이부 / 167개 | 나카지마 히로유키 세이부 / 173개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니시오카 츠요시 롯데 / 206개 | 사카구치 토모타카 오릭스 / 175개 | 우치카와 세이이치 소프트뱅크 / 157개 | 하세가와 유야 소프트뱅크 / 198개 | 나카무라 아키라 소프트뱅크 / 176개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아키야마 쇼고 세이부 / 216개 | 카쿠나카 카츠야 롯데 / 178개 | 아키야마 쇼고 세이부 / 185개 | 아키야마 쇼고 세이부 / 195개 | 아키야마 쇼고 세이부 / 179개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146개 | 오기노 타카시 롯데 / 169개 | 시마우치 히로아키 라쿠텐 / 161개 |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163개 | 타츠미 료스케 라쿠텐 / 158개 |
최다안타는 1994년부터 공식 타이틀로 시상했다.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91db><tablebgcolor=#0091db> |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다도루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단일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tablewidth=100%> 1936년 ~ 1949년 | ||||
<rowcolor=#ffffff> 1936秋 | 1937春 | 1937秋 | 1938春 | 1938秋 | ||
카리타 히사노리 도쿄 세네터스 / 16개 | 야마구치 마사노부 오사카 / 29개 | 시마 히데노스케 나고야킨코군 / 22개 키토 카즈오 라이온군 / 22개 | 에구치 유키오 나고야킨코군 / 14개 | 사사키 츠네스케 나고야킨코군 / 20개 | ||
<rowcolor=#ffffff> 1939 | 1940 | 1941 | 1942 | 1943 | ||
야마다 덴 한큐군 / 30개 고미 요시오 나고야킨코군 / 30개 | 이시다 마사요시 나고야군 / 32개 | 츠보우치 미치노리 아사히군 / 26개 | 츠보우치 미치노리 아사히군 / 44개 | 야마다 덴 한큐군 / 56개 | ||
<rowcolor=#ffffff> 1944 | 1946 | 1947 | 1948 | 1949 | ||
이시이 마사유키 한신군 / 19개 하기하라 히로시 도쿄쿄진군 / 19개 | 카와니시 토시오 킨키그레이트링 / 39개 | 카와니시 토시오 난카이 / 53개 | 카와니시 토시오 난카이 / 66개 | 키즈카 타다스케 난카이 / 59개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센트럴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카나야마 지로 쇼치쿠 / 74개 | 츠치야 마사타카 코쿠테츠 / 52개 | 카나야마 지로 쇼치쿠 / 63개 | 카나야마 지로 히로시마 / 58개 | 요시다 요시오 오사카 / 51개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혼다 이츠로 주니치 / 42개 | 요시다 요시오 오사카 / 50개 | 이이다 토쿠지 코쿠테츠 / 40개 | 오카지마 히로지 주니치 / 47개 | 오카지마 히로지 주니치 / 41개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나카 토시오 주니치 / 50개 | 콘도 카즈히코 타이요 / 35개 | 코노 아키테루 주니치 / 26개 | 타카기 모리미치 주니치 / 50개 | 코바 타케시 히로시마 / 57개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타카기 모리미치 주니치 / 44개 | 시바타 이사오 요미우리 / 46개 | 시바타 이사오 요미우리 / 70개 | 코바 타케시 히로시마 / 39개 | 시바타 이사오 요미우리 / 35개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토죠 후미히로 야쿠르트 / 28개 | 타카다 시게루 요미우리 / 38개 | 시바타 이사오 요미우리 / 45개 | 타카기 모리미치 주니치 / 28개 | 나카츠카 마사유키 타이요 / 28개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오오시타 츠요시 히로시마 / 44개 | 키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 31개 | 시바타 이사오 요미우리 / 34개 | 시바타 이사오 요미우리 / 34개 | 타카하시 요시히코 히로시마 / 55개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타카하시 요시히코 히로시마 / 38개 | 아오키 미노루 야쿠르트 / 34개 | 마츠모토 타다시 요미우리 / 61개 | 마츠모토 타다시 요미우리 / 76개 | 타카기 유타카 타이요 / 56개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타카하시 요시히코 히로시마 / 73개 | 야시키 카나메 타이요 / 48개 히라노 켄 주니치 / 48개 | 야시키 카나메 타이요 / 48개 | 야시키 카나메 타이요 / 33개 | 쇼다 코우조 히로시마 / 34개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오가타 코이치 요미우리 / 33개 노무라 켄지로 히로시마 / 33개 | 노무라 켄지로 히로시마 / 31개 | 이이다 테츠야 야쿠르트 / 33개 | 오가타 코이치 요미우리 / 24개 이시이 타쿠로 요코하마 / 24개 | 노무라 켄지로 히로시마 / 37개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오가타 코이치 히로시마 / 47개 | 오가타 코이치 히로시마 / 50개 | 오가타 코이치 히로시마 / 49개 | 이시이 타쿠로 요코하마 / 39개 | 이시이 타쿠로 요코하마 / 39개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이시이 타쿠로 요코하마 / 35개 | 아카호시 노리히로 한신 / 39개 | 아카호시 노리히로 한신 / 26개 | 아카호시 노리히로 한신 / 61개 | 아카호시 노리히로 한신 / 64개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아카호시 노리히로 한신 / 60개 |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 41개 | 아라키 마사히로 주니치 / 31개 | 후쿠치 카즈키 야쿠르트 / 42개 | 후쿠치 카즈키 야쿠르트 / 42개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소요기 에이신 히로시마 / 43개 | 후지무라 다이스케 요미우리 / 28개 | 오오시마 요헤이 주니치 / 32개 | 마루 요시히로 히로시마 / 29개 | 카지타니 타카유키 DeNA / 39개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야마다 테츠토 야쿠르트 / 34개 | 야마다 테츠토 야쿠르트 / 30개 | 타나카 코스케 히로시마 / 35개 | 야마다 테츠토 야쿠르트 / 33개 | 치카모토 코지 한신 / 36개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치카모토 코지 한신 / 31개 | 나카노 타쿠무 한신 / 30개 | 치카모토 코지 한신 / 30개 | 치카모토 코지 한신 / 28개 | 치카모토 코지 한신 / 19개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퍼시픽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키즈카 타다스케 난카이 / 78개 | 키즈카 타다스케 난카이 / 55개 | 키즈카 타다스케 난카이 / 55개 | 래리 레인즈 한큐 / 61개 | 스즈키 타케시 킨테츠 / 71개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모리시타 노부야스 난카이 / 59개 | 코노 아키테루 한큐 / 85개 | 코노 아키테루 한큐 / 56개 | 로베르토 바르본 한큐 / 38개 | 로베르토 바르본 한큐 / 38개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로베르토 바르본 한큐 / 32개 | 히로세 요시노리 난카이 / 42개 | 히로세 요시노리 난카이 / 50개 | 히로세 요시노리 난카이 / 45개 | 히로세 요시노리 난카이 / 72개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히로세 요시노리 난카이 / 39개 | 야마모토 코시 한큐 / 32개 | 니시다 타카유키 도쿄 오리온즈 / 32개 | 야스이 토시노리 킨테츠 / 54개 | 사카모토 토시조 한큐 / 47개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75개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67개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106개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95개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94개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63개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62개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61개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70개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60개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54개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54개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54개 | 오오이시 다이지로 킨테츠 / 60개 | 오오이시 다이지로 킨테츠 / 46개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마츠나가 히로미 한큐 / 38개 | 니시무라 노리후미 롯데 / 36개 | 니시무라 노리후미 롯데 / 41개 오오이시 다이지로 킨테츠 / 41개 | 니시무라 노리후미 롯데 / 55개 | 니시무라 노리후미 롯데 / 42개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아키야마 코지 세이부 / 51개 | 오노 히사시 다이에 / 42개 | 사사키 마코토 다이에 / 40개 | 오오이시 다이지로 킨테츠 / 31개 | 사사키 마코토 세이부 / 37개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이치로 오릭스 / 49개 | 무라마츠 아리히토 다이에 / 58개 | 마츠이 카즈오 세이부 / 62개 | 마츠이 카즈오 세이부 / 43개 코사카 마코토 롯데 / 43개 | 마츠이 카즈오 세이부 / 32개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코사카 마코토 롯데 / 33개 | 이구치 타다히토 다이에 / 44개 | 타니 요시토모 오릭스 / 41개 | 이구치 타다히토 다이에 / 42개 | 카와사키 무네노리 다이에 / 42개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니시오카 츠요시 롯데 / 41개 | 니시오카 츠요시 롯데 / 33개 | 카타오카 야스유키 세이부 / 38개 | 카타오카 야스유키 세이부 / 50개 | 카타오카 야스유키 세이부 / 51개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카타오카 야스유키 세이부 / 59개 혼다 유이치 소프트뱅크 / 59개 | 혼다 유이치 소프트뱅크 / 60개 | 히지리사와 료 라쿠텐 / 54개 | 양다이강 닛폰햄 / 47개 | 니시카와 하루키 닛폰햄 / 43개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나카시마 타쿠야 닛폰햄 / 34개 | 이토이 요시오 오릭스 / 53개 카네코 유지 세이부 / 53개 | 니시카와 하루키 닛폰햄 / 39개 | 니시카와 하루키 닛폰햄 / 44개 | 카네코 유지 세이부 / 41개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슈토 우쿄 소프트뱅크 / 50개 | 니시카와 하루키 닛폰햄 / 24개 겐다 소스케 세이부 / 24개 오기노 타카시 롯데 / 24개 와다 코시로 롯데 / 24개 | 타카베 아키토 롯데 / 44개 | 슈토 우쿄 소프트뱅크 / 36개 코부카타 히로토 라쿠텐 / 36개 | 슈토 우쿄 소프트뱅크 / 41개 |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91db><tablebgcolor=#0091db> | 일본프로야구 역대 외야수 베스트나인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단일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tablewidth=100%> 1940년, 1947년 ~ 1949년 | ||||
<rowcolor=#ffffff> 1940 | 1947 | 1948 | 1949 | |||
키토 카즈오 라이온군 야마다 덴 한큐군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교진군 | 오오시타 히로시 토큐 카네다 마사야스 오사카 츠보우치 미치노리 킨세이 | 아오타 노보루 요미우리 벳토 카오루 오사카 츠보우치 미치노리 킨세이 | 코즈루 마코토 다이에이 카네다 마사야스 오사카 오오시타 히로시 토큐 |
}}}}}}}}}}}} ||
연도별 최다 도루 기록 | ||||||
1970년 | 1971년 | 1972년 | 1973년 | 1974년 | 1975년 | 1976년 |
75도루 | 67도루 | 106도루[1] | 95도루 | 94도루 | 63도루 | 62도루 |
1977년 | 1978년 | 1979년 | 1980년 | 1981년 | 1982년 | |
61도루 | 70도루 | 60도루 | 54도루 | 54도루 | 54도루 |
}}} ||
후쿠모토 유타카 福本豊 | Yutaka Fukumoto | |
출생 | 1947년 11월 7일 ([age(1947-11-07)]세) |
오사카부 오사카시 이쿠노구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다이테츠 고등학교 |
신체 | 168cm, 68kg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경력 | 한큐 브레이브스 (1969~1988) |
지도자 경력 | 오릭스 블루웨이브 타격,주루코치 (1989) 오릭스 블루웨이브 2군감독 (1990 ~ 1991) 한신 타이거스 타격코치 (1998) 한신 타이거스 외야수비, 주루코치 (1999) |
[clearfix]
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現 야구 해설가.2. 프로 입문 전
오사카 오오테츠(大鉄)고등학교[2] 3학년 때 고시엔 본선에 참가했으나, 자신의 실책성 수비로 인해 아키타고와의 1회전에서 패한 흑역사가 있다.고교 졸업 이 후 마쓰시타 전기 경식 야구부[3]에 입사, 입사 3년차인 1968년 도시대항야구대회에 지역 라이벌 후지제철 히로하타공장 야구부의 보강선수[4]로 출전해 후지제철 히로하타공장의 전국대회 우승에 기여하고 본인도 대회 베스트 나인에 뽑혔다.
3. 프로 시절
1968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에 7위[5]로 지명되어 프로에 입문한다. 이 때의 입단동기로 야마다 히사시(1위), 가토 히데지(2위)[6] 가 있는데, 후쿠모토를 포함한 세 명이 명구회에 가입할 정도로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3.1. 주요 활약들
(후쿠모토의 타격 모습)
첫 해에는 대주자, 대타 등으로 주로 나오는데 만족했으나, 입단 2년차인 1970년에 타격에 눈을 뜨면서[7] 2할 7푼 4리의 타율에 75도루를 기록하며 생애 첫 도루왕을 수상한다.
사진은 1972년 9월 26일 난카이 호크스전에서 한 시즌 최다 도루 신기록인 105도루를 달성한 장면
그리고 그는 도루 관련 각종 신기록을 세우고, 한큐를 일본시리즈 3연패로 이끌면서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대선수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 화려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 통산도루: 1,065개(NPB 역대 1위)
- 시즌 최다 도루: 106도루(NPB 역대 1위)
- 도루왕: 1970년~1982년(13년 연속, NPB 역대 1위)[8]
- 통산 3루타: 115개(NPB 통산 1위)
- 통산 1회 선두타자 홈런[9]: 43개(NPB 통산 1위)
- 통산 2루타: 449개(NPB 통산 2위, 퍼시픽리그 통산 1위)
- 통산 득점: 1656점(NPB 통산 2위, 퍼시픽리그 통산 1위)
- 퍼시픽리그 MVP: 1972년[10]
- 다이아몬드 글러브[11]: 1972~83년(12년 연속, NPB 통산 1위)
- 규정타석(403타석[12]) 17년 연속 만족(1970년~1986년)
- 외야수 풋아웃 : 5102개(NPB 통산 1위)
- 외야수 수비 기회 : 5272개(NPB 통산 1위)
- 일본시리즈 MVP: 1976년
- 일본시리즈 우수선수상: 1977, 1984년
- 일본시리즈 타격상: 1976년
- 일본시리즈 기능상: 1975년
- 최다안타[13]: 1973, 1974, 1977, 1978년(통산 4회)
- 퍼시픽리그 베스트나인[14]: 1972~1974년, 1976~1982년(통산 10회)
- 올스타전 MVP: 1973년 제1차전, 1974년 제2차전, 1982년 제1차전(통산 3회)
- 20-20 클럽 가입: 1980년(20홈런-54도루)
- 야구전당 헌액 : 2002년
- 명구회 가입: 1983년(통산 2000안타 달성)
한편으로 도루 관련 신기록도 계속 써나갔는데, 1977년 7월 6일 난카이 호크스 전에서 개인통산 597번째 도루를 성공하면서 난카이 호크스의 히로세 요시노리의 종전 일본기록을 깼고[15], 1983년 6월 3일 세이부 라이온즈 전에서는 939번째 도루를 성공하며 루 브록의 메이저리그 기록(938개)을 깼으며, 그후 계속해서 도루 수를 늘린 끝에 1984년 8월 7일 난카이 호크스 전에서 마침내 세계 최초로 개인통산 1,000도루를 달성했다. 다만 현역 시절 많은 도루를 한 만큼 도루사도 299번으로 NPB 통산 1위다. 그렇지만 통산 도루성공률은 78%로 세이버메트릭스상으로 확실히 이득을 본 수치이다.
(통산 1,000도루 성공을 기념하는 모습)
3.2. 타 구단들의 공략 시도
당대 최고의 도루왕이었기 때문에, 각 구단마다 그의 도루를 막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다음은 다른 팀에서 연구한 후쿠모토의 도루 저지 방법들이다.한큐와 같은 퍼시픽리그 소속팀으로서, 후쿠모토의 도루는 난카이에게 매우 현실적인 골칫거리였다. 당시 난카이의 감독 겸 주전 포수였던 노무라 카츠야는 후쿠모토의 도루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현대 야구에서 널리 투수에 사용되는 슬라이드 스텝[16] 을 고안하여 야구를 한 단계 진화시켰다. 그 이전에도 노무라는 후쿠모토를 다음 이닝의 선두 타자로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생각에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9번타자에 주로기용되는 투수에게 볼넷을 내준 다음 1번타자를 주로 맡은 후쿠모토와 승부했다.[17]
후쿠모토가 2루 도루를 시도할 때 홈에서 2루에 송구를 일부러 원바운드로 던져 다리에 부딪히게 하는 것도 생각했다. 최초 시도는 성공했지만, 2번째 시도에서는 목적이 발각되어,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인 니시모토 유키오가 투수에게 도루를 지시했다. 다리에 일부러 공을 던져 부상을 입히려는 시도는 실제로는 공이 후쿠모토의 허리를 때리는 바람에 난감해졌다.
센트럴리그였고, 당시에는 리그간 교류전도 없어서 정규 시즌에는 한큐와 직접 상대할 일이 없었다. 때문에 위에 나온 난카이에 비해서는 후쿠모토의 도루가 현실적인 위협은 아니었다. 대신 일본시리즈에서 한큐와 대결하는 것을 상정하고, 투수가 1루 견제 시 일부러 악송구를 던지고 1루 쪽 펜스에 맞고 나오는 볼을 2루에 던져 후쿠모토를 아웃시키는 걸 연습했으나 실전에서는 실행되지 않았다.
주전 포수 모리 마사히코는 1971년 일본시리즈 직전 2루 베이스에 도루 저지 송구를 던져 맞히는 연습을 반복했다. 모리 자신이 투수에서 받은 공을 2루 베이스로 겨냥해 송구하고 2루수가 2루 베이스에서 포구 한 곳에 후쿠모토의 다리가 미끄러져 들어오는 형태로 보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전략은 일본시리즈 1차전에서 성공했다. 후쿠모토는 일본시리즈에서 도루를 많이 하지 못한 것은 당시 요미우리의 에이스였던 호리우치 츠네오의 존재가 컸다고 회고 하고 있다.
* 긴테쓰 버팔로즈
한큐와 같은 퍼시픽리그 소속팀으로서, 난카이 못지 않게 후쿠모토의 도루가 현실적인 위협이었다. 주전 포수 나시다 마사타카는 2루 송구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후쿠모토가 출루하면 오른 발을 반 보 내려두고 있었다고 한다. 한큐와 긴테쓰의 게임 전에 후쿠모토와 나시다 어느 쪽이 이기는가 내기를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후쿠모토는 알려진 습관이 없는 투수에게도 습관을 알아채는 데 성공하는 경우가 많았고, 때문에 강한 어깨를 가진 나시다에게도 후쿠모토가 이긴 적이 많았다. 후쿠모토는 "도루를 허용하는 것은 투수의 책임이 70%, 포수가 30%"라고 말하고 있다.
역시 같은 퍼시픽리그 팀인지라 위협적이었다. 당시 이나오 카즈히사 감독은 후쿠모토 유카타 한명 막으려고 1루 베이스 주변에 물을 잔뜩 뿌리는 방법을 썼었다고 이하라 하루키가 회고했다.
3.3. 은퇴
그러나 이 기록의 사나이도 나이는 속일 수 없었는지 만으로 40세가 된 1987년에 불과 6도루에 그치더니,[18] 이듬해인 1988년에는 데뷔 이래 가장 적은 3도루에 그쳤다. 이렇게 입지가 좁아지던 도중 구단이 한큐에서 오릭스로 넘어갔고, 설상가상으로 우에다 토시하루 감독의 말실수가 그를 은퇴로 내몰았다.한큐 브레이브스의 이름으로 치르는 마지막 홈경기이자 해단식이 있는 1988년 10월 23일 롯데 오리온즈와의 시합에서, 경기를 마치고서 우에다 감독이 감사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떠나는 야마다(히사시), 그리고 남아있을 후쿠모토"라고 말해야 되는 것을 "떠나는 야마다, 그리고 후쿠모토"라고 잘못 말했고, 이 발언이 선수단, 팬들과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퍼져나가며 엄청난 논란이 되어버리면서 결국 후쿠모토는 "감독님(우에다)께서 그렇게 말했다면 은퇴하겠다."고 말하며 화려했던 선수생활을 접는다.
다만 은퇴 후 후쿠모토가 인터뷰에서 본인의 은퇴에 대해 말한 걸 보면 우에다의 말실수만으로 은퇴를 정한 건 아닌데, 말년에 기량 저하로 인해 주루실력이 감퇴하면서 출루하더라도 벤치에서 "도루하지 말고 기다려라" 라고 지시하면서 도루수가 급감한 것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던 게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결정적으로 우에다의 말실수 이전에 지인들에게 "올해(1988년)를 끝으로 은퇴하겠다" 말했다는 증언도 나온 걸 보면 이미 본인이 은퇴를 확실하게 결정했던 것 같다.[19] 우에다의 말실수는 후쿠모토의 결심에 쐐기를 박은 셈이다.[20]
아무튼 그렇게 은퇴선언을 한 뒤, 한큐에서 오릭스로 구단이 바뀐 이듬해인 1989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오픈전에서 오랫동안 한큐에서 함께 뛰어온 동료 야마다 히사시와 합동 은퇴식을 치르며 영광의 선수생활의 막을 내렸다.[21][22]
은퇴할 때까지 그가 기록한 도루는 총 1,065개였다. 이 기록은 그가 은퇴한 4년 후인 1992년 6월 16일, 리키 헨더슨에 의해 깨졌으며 후쿠모토는 헨더슨이 자신의 기록을 넘어선 경기에 등장해 시구식을 하였다. 그날 헨더슨이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자 후쿠모토는 축하 메시지를 전하며 금색 스파이크를 선물했고, 이에 헨더슨은 보답으로 그에게 기록경신 때 훔친 2루 베이스를 주었다.
4. 은퇴 이후
은퇴 후 상단 각주에 적힌 것처럼 오릭스의 1군 타격코치 겸 주루코치로 임명되어 오릭스를 1989시즌 팀 타율 1위로 올려놓는 수완을 발휘한다. 그후 1990~1991년엔 2군 감독을 맡았으며 이후 오릭스를 떠난다.이 후 야구해설가로 일하다가 1998년 한신 타이거스 1군 타격코치로 다시 현장에 복귀했다. 이후 이듬해인 1999년엔 외야수비, 주루 코치로 보직을 옮겼으나 "안타를 못 치면 주전이 될 수 없고, 주전이 될 수 없으면 출루도 할 수 없고, 출루를 할 수 없으면 도루도 할 수 없다."라는 지론에 따라 선수들의 타격에 간섭하는 바람에 노무라 카츠야 감독의 분노를 사면서 결국 시즌 종료 후 해임되었다.
현재는 아사히 방송의 야구해설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2년에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현재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활동 중이다
해설자로서는 헤드 슬라이딩과, 견제구 때 손부터 귀루하는 것 등에 대해 "부상의 위험성이 크다" 며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플레이로 유명했던 아카호시 노리히로에 대해 "잘하는 수비수는 점프 안하고 낙하지점에서 그냥 잡는다", "부상 위험성이 높아진다" 등으로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23] 근데 정말, 후쿠모토의 말대로 아카호시는 다이빙 캐치 중 당한 치명적인 목, 척추 부상으로 엄청 이른 나이에 은퇴하게 되고 만다..
그 외에도 나가시마 시게오 마냥 기상천외한 의성어를 말하는 것이나 우스갯소리를 자주 하는 것 등으로도 유명하다. 아예 일본 위키백과의 후쿠모토 항목엔 "후쿠모토 어록" 이 따로 만들어져 있을 정도다.
5. 플레이 스타일
13년 연속 도루왕, 일본프로야구 유일의 한 시즌 세자릿수 도루, 세계 최초의 1,000도루[24]를 기록하며 현역 시절 도루 관련 일본, 세계기록을 독식한 리드오프로써, 입단동기였던 야마다 히사시와 함께 한큐 브레이브스의 황금기를 상징하던 선수. 이 둘은 한큐의 마지막과 선수 은퇴도 함께했다.똑같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통산 기록을 돌파하고도 인정받지 못했던 홈런왕 오 사다하루와는 달리, 후쿠모토는 훗날 리키 헨더슨이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인정하는 '세계의 도루왕'으로 남았다. 방망이의 재질, 구장 크기 등의 변수에 영향을 받는 홈런과는 달리, 야구 경기장의 루상 거리는 세계 어디든지 27.432미터(90피트)다.
워낙 통산 도루 1위의 임팩트가 커서 대부분 시대를 풍미한 대도 정도로 유명하지만, 후년대의 리키 헨더슨처럼 공격, 수비, 주루 3박자를 모두 갖췄던 선수이기도 하다. 선수생활 내내 중견수를 보며 역대 최다이자 12년 연속 다이아몬드 글러브를 수상할 만큼의 뛰어난 수비력에, 타격에서도 20년 동안 1만 번이 넘는 타석에 서며 통산 OPS 8할과 120이 넘는 Wrc+를 기록했다. 여기에 통산 208홈런을 쳤을 정도로 장타력도 준수하고, 선구안도 준수해서 타율-출루율 격차도 9푼에 육박했다. 이런 유형의 호타준족 선수는 투수들이 정말 루에 보내기 싫어해서 볼넷을 주느니 차라리 안타를 맞겠단 생각으로 피해가는 투구를 거의 안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만큼 빼어난 선구안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6. 여담
- 야구만화 ONE OUTS에 등장하는 데니스 존슨의 모델이다.[25] 실제로 작중에서 토쿠치 토아가 존슨을 막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들은 후쿠모토 유타카를 막아내기 위해 실제로 쓴 방법들로 당시 파리그 포수들은 후쿠모토의 도루를 막기 위해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들을 가동했다고.
- 현재 일본프로야구에서 통용되는 쿠세(버릇)라고 하는 개념을 만들어낸 선수이다. 입단당시만 해도 워낙 주루센스가 형편 없었기에 이대로는 곧 은퇴하겠지라는 생각에 추억을 남기기 위해 비디오를 녹화해 달라고 했는데 집에 돌아와서 그 비디오를 유심히 보다 우연히 견제와 공을 던질때의 동작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이후로 투수들이 견제를 하는 동작과 던지는 동작의 버릇찾기에 몰두. 이후 투수들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후쿠모토가 전설적인 도루왕이 되면서 너도나도 후쿠모토의 방법을 따라하게 되었고 쿠세라고 하는 하나의 개념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역으로 후쿠모토를 잡아내기 위해 비슷한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했던 것이 노무라 카츠야였고, 결국 이러한 연구들은 노무라 특유의 'ID 야구'로 이어지기도 했다.
- 쿠세와 관련하여 스즈키 케이시와 칸베 토시오[26] 쿠세만큼은 찾아내기가 힘들어서 비디오를 수없이 반복하여 본 결과 칸베 토시오는 축을 2mm정도 움직이면 투구, 스즈키 케이시는 눈이 타자쪽으로 가면 견제 주자 쪽으로 가면 투구라는 비범한 쿠세를 찾아내었으나 호리우치 츠네오만큼은 결국 쿠세를 찾아내지 못 해 일본시리즈에서 발이 꽁꽁 묶일 수 밖에 없었다.
- 사회인 시절부터 팔꿈치 부상이 있었기에 입단 초창기에는 수비가 엉성해서 만세를 한 채 머리위에 날아가는 공을 놓치는 경우도 잦았다. 하지만 매일 200개 가까운 노크로 훈련을 거듭한 결과, 은퇴 할 당시에는 개인 최다 골든글러브 수상이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뛰어난 수비 능력을 갖출 수 있었다.
-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는데, 아내는 야구에 관심이 전혀 없었고 그래서 후쿠모토를 야구 좋아하는 회사원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하게 된 것을 "나 마츠시타에서 한큐로 옮긴다"고 간단히 얘기했는데, 아내는 한동안 후쿠모토가 한큐 역무원으로 취업한 것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아내는 나중에 한큐의 각 역마다 남편을 찾으러 다녔다가 역무원에게 자신의 남편이 '한큐에서 일하는 후쿠모토'라고 이야기했더니, 그 역무원이 "당신이 찾는 사람이 설마 그 도루왕 후쿠모토 아닌가요?"라고 되물은 뒤에야 자신의 남편이 프로야구 선수인 걸 알게 되었다.
- 그의 아버지는 다른 구단 계열의 식당 직원이었는데, 후쿠모토의 한큐 입단 후 입단에 대한 은혜를 느껴서 퇴직했다고 한다.
- 도루왕 3연패와 단일시즌 100도루를 동시에 달성한 1972년, 양다리에 1억엔의 상해보험을 들었다. 이 보험은 후쿠모토가 은퇴할 때까지 계약이 갱신되었으나, 철저한 자기관리와 탁월한 주루센스로 부상없이 선수생활을 계속한 터라 후쿠모토가 보험금을 타는 일은 없었다. 그의 별명 중엔 "1억엔의 다리"란 별명이 있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27]
- 당시 관중동원에 어려움을 겪던 퍼시픽 리그의 사정과 그를 타개하고자 했던 구단 측의 기묘한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일화로, 1983년에 있었던 후쿠모토 대 말의 달리기 시합 이벤트가 있었다. 기사 소개 영상. 9분 10초부터. 후쿠모토와 경주마 외에 메이저리그 통산 196도루를 기록한 한큐의 외국인 선수 범프 윌스[28]가 참가했는데, 결과는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의 인조잔디 그라운드의 감촉에 당황한 경주마가 기수의 말을 듣지 않고 우왕좌왕하며 일찌감치 탈락한 끝에 윌스가 승리를 차지했다.[29]
- 메이저리그 통산 도루 기록을 깼을 때 국민영예상 수상이 검토되었으나 "노상방뇨를 할 수 없게 된다"는 특이한 이유로 거부한 적이 있다.기사 보다 정확히는 후쿠모토 스스로가 자유분방한 성격에 사적으로도 마작이나 술담배를 좋아하거나 했던지라, 행실에서도 타의 모범이 되었던 오 사다하루마냥 전국민적인 동경을 살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스스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 미국에서는 왕정치의 홈런 기록은 코라쿠엔 구장 크기가 작다며 인정하지 않았지만, 후쿠모토 유타카의 기록은 메이저리그나 일본 프로야구나 베이스 간 거리는 같다는 이유로 세계기록으로 인정했다. 코라쿠엔이 작기도 했지만, 홈런은 야구의 꽃이고 도루는 그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홈런만큼은 화려한 기록은 아니기에 자존심 상에 문제도 있지 않을까 싶다 미국인 중에서도 그래도 기록은 기록이라며 왕정치의 홈런 세계기록을 인정하고 왕정치의 홈런볼이나 배트 등을 기념하는 곳도 있다.
7. 관련 문서
[1]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다 시즌 도루 기록이자 유일한 시즌 100도루 기록[2] 현 한난대학 부속고등학교(阪南大学高校). 강타자 도이 마사히로가 그의 고교 선배다.[3] 현재는 파나소닉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당시 이름은 마쓰시타 전기였다. 현재의 팀명은 2008년부터 사용.[4] 도시대항야구대회 본선진출팀이 지역예선 탈락팀들 가운데 필요로 하는 선수를 본선기간 동안 임대선수로 쓰는 제도. 올림픽의 와일드 카드제 생각하면 이해가 갈듯 싶다.[5] 요즘이라면 최종순위 지명도 될 수 있을만한 순위이지만 이 해 한큐는 무려 15순위까지 선수를 지명했고 그 중 9명이 입단을 거부했다. 입단을 거부한 선수들 중 12순위로 지명된 카도타 히로미츠가 있었는데, 카도타는 다음 해 2위로 난카이 호크스에 지명되어 프로 선수가 된다.[6] 1948년생으로 한큐 브레이브스의 1루를 오래 지켰다. 1969~1987년 선수생활을 하였으며 타율 0.297, 347홈런, 2,055안타, 1,268타점을 기록하였다. 재직한 팀들은 한큐(1969~1982), 히로시마(1983), 킨테츠(1984~1985), 거인(1986), 그리고 난카이(1987)였다. 1975년에는 퍼시픽리그 최우수선수로 뽑혔다.[7] 입단 당시만 해도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주루센스가 워낙 형편 없었기에 땅볼을 치고 내야안타를 만들겠다는 타격 스타일을 고집하면서 당대의 타격 이론가이자 철권통치의 대명사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매를 벌었으나, 1970년 스프링캠프에서 동료로부터 빌린 일명 '타이 콥 배트'로 프리배팅을 하다가 라인드라이브성 장타를 치고서는 타격폼을 수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20-20클럽에도 가입을 한적이 있고, 통산홈런갯수가 200개가 넘는다. 슬래시라인도 .291/.379/.440 OPS .819로 리드오프로서는 아주 더할나위 없는 타자였다.[8] 13년 연속수상 또한 역대 1위 기록이며, 이 기록은 1983년 긴테츠 버팔로즈의 오이시 다이지로가 60개의 도루를 기록해 도루왕을 차지하며 멈췄다. 그리고 후쿠모토는 이후 다시는 도루왕을 수상하지 못했다.[9] 1회(초/말 공통)에 1번 타자, 즉 팀에서 맨 먼저 타석에 서는 선두타자로 나와서 친 홈런을 말한다.[10] 위에 나오듯 이 해 세운 NPB 최초의 한 시즌 세자릿수 도루인 106도루의 기록은 앞으로도 깨질 가능성이 요원한 일본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도루 기록.[11] 골든글러브란 명칭은 1986년부터 사용[12] 후쿠모토의 현역생활 당시엔 130시합 제도였으니 규정타석은 130시합 × 3.1 = 403타석이 된다.[13] 당시엔 연맹표창이 없었다. 1994년부터 표창.[14] 수비를 평가하는 골든글러브와 달리 이쪽은 타격 성적을 주로 평가한다.[15] 심지어 히로세는 이때까지 멀쩡히 현역으로 뛰던 상황이었다. 히로세는 이 해를 끝으로 은퇴한 후 영 좋지 않은 사정으로 해임된 노무라 카츠야의 후임으로 난카이 감독에 부임한다.[16] 퀵모션은 재플리시이다.[17] 당시 퍼시픽리그는 아직 지명 타자 제도 도입 전이었다.[18] 이 해 386타석만 기록하며 1970년부터 17년이나 이어지던 규정타석 연속 만족도 끝나게 되고 말았다.[19] 또 한큐 구단이 오릭스에게 매각된다는 소식이 보도된 후, 최종전 전날 구단 프런트에게 코치 전임을 제안받았는데, 본인은 자유계약으로 방출시켜 주거나 플레잉 코치로 뛰게 해주길 바랬지만 거절당하고 임의탈퇴 처리될 상황까지 되자, 어차피 한큐 구단도 없어지고 지인의 조언도 있어서 그냥 은퇴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20] 덤으로 본인은 "체력적으론 3년 정도는 더 뛸만 했지만, 은퇴번복을 하기 귀찮았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밑에 아내와의 일화를 보면 귀차니즘이 강하다.[21] 이 때 둘이 함께 한큐 유니폼을 입고 은퇴 퍼포먼스를 한 뒤, 오릭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코치를 보는 독특한 상황을 만들었다. 야마다 히사시의 마지막 삼진 허용타자는 같은팀 동료였던 미노다 고지였다. 미노다는 같은 해 요미우리의 일본시리즈 대역전 우승의 주역이 되면서 이듬해에 은퇴했다.[22] 이날 요미우리의 선발투수 고다 이사오는 오릭스의 용병 거포 부머 웰즈에게 난타당했지만, 그해 일본시리즈에서는 혼자 2승을 차지해 팀의 대역전 우승에 기여하였다.[23] 물론 아카호시가 싫어서 그랬던건 전혀 아니다. 한신코치시절 엄청나게 총애하던 선수였기 때문에 돌직구를 거침없이 날릴수 있었다.[24] 전 세계의 프로야구리그를 통틀어서 1,000도루를 기록한 선수는 후쿠모토 유타카와 리키 헨더슨 2명 뿐이다. 심지어 둘은 루 브록의 기존 세계 1위 도루 기록을 경신할 때도 똑같이 3루 베이스를 훔쳤다![25] 작중에서 데니스 존슨은 육상선수 출신으로 수비에 능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입단 초기의 후쿠모토 유타카의 수비가 이랬다고 한다. 물론 이 만화는 아예 야구선수 자체를 안해 본 미국 흑인 육상선수를 일본프로야구팀이 달리기만 시키려고 순수 대주자용 용병으로 데려왔다는 터무니없는 설정이라 현실성이 지극히 낮다.[26] 이후 기아 타이거즈의 투수코치였던 그 칸베 토시오 맞다[27] 그리고 후쿠모토의 1억엔 보험 가입 소식을 접한 최동원의 부친은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최동원에게 어깨 상해보험을 들게 했다. 최동원의 부친은 당시 일본 방송을 수신할 수 있던 부산의 사정도 있고 해서 일본 야구에 관심이 많았고 호리우치 츠네오의 드롭커브를 모티브로 최동원의 커브를 단련시키기도 했다.[28] 메이저에서 주전 2루수로 5년 가까이 뛰었기에 4년 4억엔 보장(부머 웰즈가 연봉 2500만엔이었다.)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입단하였고 1년차 때는 12홈런-20도루에 2할대 중후반 타율과 8할 즈음의 OPS를 보여준 훌륭한 공격형 2루수가 되었다. 그러나 2년차에 먹튀가 됐고 시즌 중인 8월 귀국하였으며 시즌 후 입단 시 보장받았던 남은 2년치 연봉의 절반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자진퇴단하였다. 당시 똑같이 일본프로야구 용병선수 출신으로 은퇴 후에 일본에 눌러앉았던 로베르토 바르본의 말에 의하면 선수로서의 자기관리(work ethic) 자세가 매우 안 좋았다고 한다. 일본 야구를 무시하고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으며 미국에 돌아갈 생각만 해 댔다고. 근데 경기 내적으로는 나름 최선을 다했는지 일본에서의 플레이는 호평을 받았고, 먹튀가 된 2년차 때도 범프가 있었으면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했을텐데.. 라는 말이 나온 걸 보면 자기관리는 형편없었지만 실력만큼은 뛰어났던 듯. 사실 지금도 차이나지만 그 당시에는 미국과 일본의 야구실력 차이가 더더욱 엄청났기에 워크에식은 안 좋아도 성적이 좋은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29] 하지만 이벤트 당시 어느 프런트 직원이 미노다 고지를 설사유망주라고 조롱하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미노다는 불참했고 결국 87시즌 직후 미노다 고지가 원한 고향팀인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아닌 당시 최신형 신칸센 300계 차량 기준으로도 고베에서도 3시간 넘게 걸리는 도쿄에 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내쫓아버렸다. 미노다는 대신 도쿄돔 개장경기인 한신전 시범경기때 1번타자로 선발출장해서 홈런을 날렸다. 이후 1989년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의 우승에 일조한 후 은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