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사키 류조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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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
1979 | 1980 | 1984 |
1984-1985, 1987-1988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
1984-1985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베스트나인 |
1991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베스트나인 | ||||
반스 로우 (주니치 드래곤즈) | → | 야마사키 류조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잭 하웰 (야쿠르트 스왈로즈) |
{{{#ffffff [[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23번}}} | ||||
시바타 타케시 (1976) | → | 야마사키 류조 (1977-1982) | → | 오오하라 테츠야 (1983) |
{{{#ffffff [[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1번}}} | ||||
오쿠보 미치오 (1979-1982) | → | 야마사키 류조 (1983-1993) | → | 마에다 토모노리 (1994-2013) |
{{{#ffffff [[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76번}}} | ||||
나카 토시오 (1987-1990) | → | 야마사키 류조 (1994-2011) | → | 쿠라 요시카즈 (2017~) |
야마사키 류조 山崎 隆造 | Ryuzou Yamasaki | |
출생 | 1958년 4월 15일 ([age(1958-04-15)]세) |
일본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나카구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소토쿠고등학교(崇徳高等学校) |
신체 | 178cm, 82kg |
투타 | 우투양타 |
포지션 | 외야수, 2루수, 3루수 |
프로입단 | 1976년 드래프트 1위 (히로시마) |
소속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7-1993) |
지도자 | 히로시마 도요 카프 2군 외야수비·주루코치 (1994-1998) 히로시마 도요 카프 2군 감독 (1999-2000) 히로시마 도요 카프 1군 외야수비·주루코치 (2001-2005) 히로시마 도요 카프 2군 감독 (2006-2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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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로시마시 나카구 출신의 로컬보이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만 선수-코치로 35년을 지내며 3회 우승에 공헌한 원클럽맨 선수.2. 선수 경력
소토쿠 고교 3학년이던 1976년, 봄 코시엔에 1번 유격수로 출전하여 우승했고, 여름 코시엔에서는 3차전에서 패퇴했다. 같은 해 드래프트에서 고향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1순위로 지명되며 프로에 데뷔했다.1978년, 코바 타케시 감독의 권유로 타카하시 요시히코에 이어서 스위치 히터로 전향하여 데뷔전을 치렀다. 다만, 타카하시가 주전 유격수로 기용되면서 처음엔 2루수로 뛰었다. 팀이 1979년 일본시리즈와 1980년 일본시리즈를 우승할 때는 백업으로 주로 출장하며 서서히 출장기회를 늘려갔는데, 1981년 3월 8일 구마모토현 후지사키다이 구장에서 개최된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시범경기에서 타구를 쫓다가 외야 펜스에 부딪혀[1] 오른쪽 무릎이 골절되는 전치 2개월의 부상을 입으며 선수 생명의 위기가 찾아왔다. 당시 얼마나 세게 충돌했는지 펜스에 직격했을 때의 충격음이 벤치까지 들렸을 정도였으며, 슬개골이 보통 골절상처럼 두동강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산산조각 나서 뼛조각을 긁어모아 와이어로 겨우 묶어놓는 전례가 없는 수술까지 하고 나서야 겨우 완치되었을 정도. 이 일로 결국 1981년은 1군 출장 없이 부상 회복에 전념해야 했다.
부상에서 돌아온 1982년에는 2루수와 외야수로 번갈아 가면서 출장했고, 1983년에는 야마모토 코지를 대신하여 개막전 선발 중견수로 출전하면서 타카하시와 함께 테이블 세터로 활약하였다. 6월 이후에는 중견수 자리를 나가시마 키요유키에게 넘겨주고 우익수로 주로 출장하며 처음으로 규정타석에 도달, 리그 9위의 타율 .305를 기록했다. 이 해부터 3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하였고, 1984년에는 26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고 수비에서도 다이아몬드 글러브를 수상한 것은 물론 1984년 일본시리즈 우승에도 크게 공헌하면서 전성기를 보냈다.
비록 현역 시절 단 1번도 타격 타이틀을 수상하지 못했지만 베스트나인 외야수 부문 2회, 3루수 부문 1회 수상 및 골든글러브 4회 수상을 달성했으며, 선수 생명이 끝날 뻔한 부상을 겪고도 재기하여 1984년에서 1989년까지 6시즌 연속 전 경기 출장[2] 및 통산 도루도 228개를 기록하며 공격, 수비, 주루 모두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1990년부터는 3루수로 출장하였고, 1991년에는 커리어 마지막 3할 타율과 함께 카프의 6번째 센트럴리그 우승을 이끌며 베스트나인에 선정되었다. 이후 1992년부터 하락세를 겪으면서 1993년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이후에는 바로 코치로 전임하여 2군 감독 및 코치, 1군 외야수비·주루코치 등을 역임하며 2011년까지 계속해서 카프에서 뛰었다. 2012년부터는 주고쿠 방송의 해설 및 주고쿠 신문의 야구평론가를 지내고 있으며, 모교인 소토쿠고교 경식야구부 OB회 부회장에 추대되었다.
그가 달던 배번호 1번은 1994년에 마에다 토모노리가 물려받아 은퇴할 때까지 썼다.[3]
3. 연도별 성적
통산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점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colbgcolor=#dcdcdc> 1978 | 広 島 | 1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 | - | - | - |
1979 | 24 | 58 | 5 | 8 | 14 | 1 | 0 | 1 | 8 | 4 | 11 | .264 | .328 | .340 | .667 | |
1980 | 75 | 189 | 6 | 37 | 40 | 5 | 2 | 0 | 17 | 15 | 27 | .252 | .343 | .308 | .651 | |
1982 | 86 | 218 | 14 | 26 | 44 | 1 | 2 | 2 | 14 | 20 | 29 | .240 | .335 | .301 | .635 | |
1983 | 107 | 427 | 34 | 51 | 109 | 17 | 5 | 6 | 26 | 39 | 60 | .305 | .375 | .431 | .807 | |
1984 | 130 | 576 | 43 | 79 | 158 | 27 | 3 | 6 | 39 | 57 | 59 | .319 | .393 | .422 | .815 | |
1985 | 130 | 610 | 46 | 86 | 167 | 23 | 2 | 10 | 35 | 77 | 53 | .328 | .412 | .440 | .852 | |
1986 | 130 | 551 | 43 | 63 | 135 | 25 | 2 | 7 | 23 | 40 | 71 | .275 | .330 | .377 | .707 | |
1987 | 130 | 568 | 43 | 79 | 143 | 20 | 2 | 12 | 21 | 55 | 72 | .294 | .366 | .417 | .782 | |
1988 | 130 | 546 | 47 | 51 | 113 | 17 | 6 | 10 | 14 | 37 | 61 | .240 | .298 | .366 | .664 | |
1989 | 130 | 426 | 34 | 45 | 97 | 13 | 1 | 8 | 12 | 36 | 53 | .266 | .334 | .374 | .708 | |
1990 | 127 | 474 | 50 | 51 | 118 | 22 | 3 | 7 | 8 | 40 | 61 | .294 | .361 | .415 | .776 | |
1991 | 122 | 455 | 50 | 54 | 121 | 19 | 0 | 8 | 9 | 47 | 68 | .301 | .372 | .408 | .780 | |
1992 | 111 | 376 | 31 | 32 | 88 | 18 | 0 | 6 | 2 | 36 | 54 | .265 | .339 | .373 | .712 | |
1993 | 98 | 271 | 31 | 21 | 57 | 10 | 0 | 5 | 0 | 24 | 43 | .236 | .302 | .339 | .641 | |
NPB 통산 (15시즌) | 1531 | 5745 | 477 | 683 | 1404 | 218 | 28 | 88 | 228 | 527 | 722 | .284 | .355 | .393 | .747 |
- 볼드체는 리그 1위.
[1] 1977년 사노 노리요시가 카와사키 구장에서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났던 외야 펜스에 부딪혀 두개골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는 사고가 터진 후, 각 야구장에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외야 펜스에 고무를 두르게 하는 등 내부 시설들을 전면 개설하라는 권고가 전해졌으나 지방에 있던 몇몇 야구장들은 기존 시설을 그대로 쓰는 경우도 있었다. 하필 야마사키가 그 운 없는 케이스에 걸려버린 것. 이후에도 1984년 롯데 오리온즈의 타카자와 히데아키가 야마사키와 같은 사고로 슬개골 골절상을 당하는 일들이 터지고 나서야 1988년부터 외야 펜스에 고무를 두르는 것이 의무화되었다.[2] 1983년 10월 16일부터 1990년 4월 28일까지 803경기 연속 출장을 달성했다.[3] 프로 입단 후 1991년까지는 51번, 1992~1993년에는 31번을 사용했다. 스즈키 이치로가 배번을 51번으로 고른 이유는 마에다를 동경해서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