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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0:15:58

요시다 요시오

요시다 요시오의 수상 경력 / 감독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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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무라 후미오 무라야마 미노루 요시다 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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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1985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54년 센트럴리그 최다 도루
1953년
카나야마 지로
(히로시마 카프)
58도루
요시다 요시오
(오사카 타이거스)
51도루
1955년
혼다 이츠로
(주니치 드래곤즈)
42도루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56년 센트럴리그 최다 도루
1955년
혼다 이츠로
(주니치 드래곤즈)
42도루
요시다 요시오
(오사카 타이거스)
50도루
1957년
이이다 토쿠지
(코쿠테츠 스왈로즈)
40도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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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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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 현재
초대
모리 시게오
(1936)
2대
이시모토 슈이치
(1936~1939)
3대
마츠키 켄지로
(1940~1941)
4대
와카바야시 타다시
(1942~1944)
5대
후지무라 후미오
(1946)
6대
와카바야시 타다시
(1947~1949)
7대
마츠키 켄지로
(1950~1954)
8대
키시 이치로
(1955)
9대
후지무라 후미오
(1956~1957)
10대
타나카 요시오
(1958~1959)
11대
카네다 마사야스
(1960~1961)
12대
후지모토 사다요시
(1962~1965)
13대
스기시타 시게루
(1966)
14대
후지모토 사다요시
(1967~1968)
15대
고토 츠구오
(1969)
16대
무라야마 미노루
(1970~1972)
17대
카네다 마사야스
(1973~1974)
18대
요시다 요시오
(1975~1977)
19대
고토 츠구오
(1978)
20대
돈 블레이싱게임
(1979~1980)
21대
나카니시 후토시
(1981)
22대
안도 모토오
(1982~1984)
23대
요시다 요시오
(1985~1987)
24대
무라야마 미노루
(1988~1989)
25대
나카무라 카츠히로
(1990~1995)
26대
후지타 타이라
(1996)
27대
요시다 요시오
(1997~1998)
28대
노무라 카츠야
(1999~2001)
29대
호시노 센이치
(2002~2003)
30대
오카다 아키노부
(2004~2008)
31대
마유미 아키노부
(2009~2011)
32대
와다 유타카
(2011~2015)
33대
카네모토 토모아키
(2016~2018)
34대
야노 아키히로
(2019~2022)
35대
오카다 아키노부
(2023~2024)
36대
후지카와 큐지
(2025~)
:일본시리즈 우승 / : 센트럴리그 우승 / ☆: 일본시리즈 진출(리그 2~3위) / : 단일리그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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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jiji.com/vic009-12jpp01422205.jpg
한신 타이거스 No. 23
요시다 요시오
(吉田 義男)
생년월일 1933년 7월 26일 ([age(1933-07-26)]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일본 교토 부 교토 시 나카교 구
포지션 유격수
학력 교토 시립 제2 상업 고등학교(폐교로 인해 전학[1])
교토 시립 야마시로 고등학교
리츠메이칸대학(중퇴)
투타 우투우타
신체조건 167cm, 56kg
프로입단 1953년
소속팀 오사카-한신 타이거스 (1953~1969)[2]
지도자 경력 한신 타이거스 플레잉코치 (1969)
한신 타이거스 감독 (1975~1977, 1985~1987, 1997~1998)
프랑스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1990~1995)
파리 대학[3] 감독 (1990~1993)

1. 개요2. 현역 시절3. 지도자 시절
3.1. 한신 감독 1기3.2. 한신 감독 2기3.3. 한신 감독 3기
4. 감독 은퇴 이후5.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3번에 걸쳐 한신 타이거스 감독으로 재임하며 한신 역사상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인물.

2. 현역 시절

교토 제2 상업 고등학교 시절부터 출중한 실력으로 일찌감치 프로의 주목을 받아왔다. 종전 이후 학제 개편으로 제2 상업 고등학교가 폐교되자 야마시로 고등학교에 편입학하여 야구를 계속 했으며, 2학년 때 고시엔 여름대회에 출전했지만 1회전에서 탈락했고, 이듬해엔 지역예선 결승에서 패퇴한 경력이 있다.

파일:external/www.kcc.zaq.ne.jp/yoshida.jpg
병살타를 처리하는 요시다(가운데). 우측 41번 선수는 2루수 카마다 미노루.

고교 졸업 후 리츠메이칸대학에 진학했으나 중퇴하고 1953년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하며 프로에 첫 발을 디뎠다. 신장 165cm로 야구선수로서는 상당히 왜소한 체구[4]였지만 날렵한 몸놀림과 안정된 수비가 일품이었고 날카로운 타격으로 타선에서도 첨병대장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발도 빨라서 도루왕 타이틀을 2회 석권하는 등 매년 두 자릿수 도루는 꼬박꼬박 찍었고, 그런 활약을 바탕으로 마침내 1962년 한신 타이거스[5]를 처음으로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 후 토에이 플라이어즈와의 1962년 일본시리즈에선 비록 팀의 패퇴를 막진 못했지만 5할에 가까운 시리즈 타율을 기록하면서 감투선수상을 수상했다.[6]

1964년 시즌엔 0.318의 타율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3할 타율을 마크했고 그 해 179타석 연속 무삼진이란 진기록을 수립하면서[7] 한신의 2번째 센트럴리그 우승(하지만 일본시리즈에선 난카이 호크스에게 패배)에 기여했는데, 투고타저 시대였던 당시로서는 엄청난 기록이었다. 또한 유격수 부문 베스트 나인을 9번이나 수상했고 팀메이트인 3루수 미야케 히데시[8], 2루수 카마다 미노루와 함께 사상 최강의 내야진을 구축하며[9] 최고의 유격수로 이름을 남겼다. 특히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명 유격수 히로오카 타츠로와 불꽃 튀기는 라이벌 전은 그야말로 백미 중 백미.[10]

은퇴 시즌인 1969년에는 플레잉 코치로 활약하였으며, 그 해를 끝으로 17시즌 동안 1864안타, 66홈런, 434타점, 350도루, 타율 0.267의 통산 성적을 남기고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3. 지도자 시절

3.1. 한신 감독 1기

선수생활을 접은 후 1974년까지 후지TV, 간사이 테레비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1975년 카네다 마사야스의 후임으로 한신 타이거스 감독에 취임했다.[11] 감독으로선 특이하게도 보통 팀의 주전 선수들이 다는 등번호 1번을 달았다.

이해 홈런왕 수상으로 오 사다하루의 연속 홈런왕 기록을 저지한 팀의 주포 타부치 코이치 등을 앞세워 시즌 중반까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주니치 드래곤즈센트럴리그 우승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시즌 막판에 추락하면서 3위로 마감했다. 취임 당시 "달리는 야구"를 표방한 요시다였지만 정작 팀 도루가 양대리그제 도입 이래 팀 최저 기록인 31개에 그치며 스피드를 전혀 보여주지 못한 것도 원인.

감독 첫 시즌을 마치고 팀의 주축 투수였던 에나츠 유타카난카이 호크스로 보내는 등[12] 대형 트레이드를 감행하며 팀의 체질개선을 꾀했고 다음 해인 1976년, 신예 슬러거 카케후 마사유키와 에나츠와의 트레이드로 영입한 에모토 타케노리 등 투타에서 맹활약하는 에이스 선수들을 앞세워 이해 숙적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치열한 우승 경쟁 끝에 불과 2게임차로 센트럴리그 2위에 머물렀지만 그래도 승률 .615를 찍으며 꽤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77년엔 주포 타부치 코이치의 부진과 투수진 붕괴로 팀 성적이 승률 .466으로 떨어지면서 순위도 리그 4위로 하락했고, 이로 인해 요시다는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승률 .466은 한신 사상 최악의 승률이었다. 다만 바로 1년 만인 1978년 한신이 승률 .339로 작년보다 더 비참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구단 사상 최초로 센트럴리그 최하위로 추락하는 굴욕을 맛보는 바람에 최저 승률 타이틀은 어찌저찌 떼게 되었다.

3.2. 한신 감독 2기

파일:85한신.jpg
1985년 한신의 사상 첫 일본시리즈 우승이 결정된 후 헹가래를 받는 장면.

이후 해설가로 일하다가 1985년 다시 한신의 감독으로 복귀[13]했다. 시즌 전에는 랜디 바스의 재계약을 강력히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고, 당시까지 유망주에만 그치고 있던 포수 키도 카츠히코를 주전으로 낙점해서 개막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해 한신은 랜디 바스-카케후 마사유키-오카다 아키노부로 이어지는 레전드클린업 트리오를 주축으로 한 이른바 뉴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앞세워 1964년 이래 21년 만의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그 여세를 몰아 일본시리즈 에서 세이부 라이온즈를 4승 2패로 일축하고 구단 사상 최초의 일본시리즈 제패를 이룩하였다.[14] 한신 우승 당시 오사카를 비롯한 간사이 지방 전역에서 우승의 희열을 이기지 못한 한신 광팬들이 도톤보리강에 뛰어들고 거리의 간판과 기물, 다수의 차량이 파손되는 등 축제를 넘어 거의 폭동에 가까운 분위기로 들썩일 정도로 한신의 우승은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대 사건이었다.[15]

이듬해 리그 연패를 노리며 1986년 시즌을 맞았고 중심타자 바스가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타격 삼관왕을 석권하는 등 변함없이 맹활약 했지만 주포 카케후가 손가락 부상으로 결장하고 요시다는 투수기용 문제로 투수코치인 요네다 테츠야, 타격 코치 보좌역 타케노우치 마사시와 대립하는 등 내홍을 일으키면서 정확히 승률 5할로 리그 3위에 그쳤으며, 1987년엔 구단 사상 최악의 승률인 0.331을 찍으며 리그 최하위로 추락하는 쓴잔을 들이키고 요시다는 또다시 감독직에서 물러나야 했다.[16] 다만 이 시기의 요시다는 처음으로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했는데도 불구, 언론과의 험악한 관계로 인해 우승 감독으로 대우받긴 커녕 오히려 사소한 발언도 왜곡 보도되며 피해를 보는 등 다소 억울한 면도 있었다고 한다.

2번째 감독 퇴임 후 1989년 프랑스로 건너가 이듬해인 1990년 프랑스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겸 파리 대학 야구부 감독을 맡아 1993년 까지 파리 대학 감독을, 1995년까지 프랑스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3.3. 한신 감독 3기

이후 1997년 세번째로 한신 감독을 맡아[17] "Again 1985" 를 외치며 신인 츠보이 토모치카,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영입해온 노망주 포수 야노 아키히로[18]를 주전으로 키워내고 전력외로 분류됐던 야기 히로시는 전문 대타요원으로 변신시키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투수진의 심각한 부진과 중심타선[19] 공갈포 일변도의 타격으로 인한 득점력 침체 등으로 인해 팀 성적은 나아질 기미 없이 계속 침체된 채로 머물렀고 2년 연속으로 야쿠르트 스왈로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경기의 희생양이 되는 끝에 2년간 5위, 6위에 그치며 별볼일 없이 또다시 퇴임하고 말았다. 당시 4466566664의 비밀번호를 쓰던 한신에서 가운데의 56을 기록했다. 그나마 재취임 첫 해에 5위를 찍어서 7년 연속 최하위[20]라는 막장 대기록을 안 찍은 게 위안일 정도.

감독으로서의 통산 성적은 484승 511패 56무승부(승률 0.486), 한신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감독 치곤 생각 외로 승률이 다소 낮은데 한국으로 치면 김인식 감독과 거의 비슷한 성적이며, 같은 팀을 세 번에 걸쳐 지도한 점은 강병철 감독과 흡사하다.[21] 다만 1,051시합 출장으로 한신 타이거스의 역대 감독 중 가장 많은 경기를 지휘했고, 한신 감독 중 유일하게 세 번에 걸친 임기, 네 자릿수 경기 출장을 달성한 인물이다.[22]

4. 감독 은퇴 이후

파일:external/cdn-ak.f.st-hatena.com/20040112093139.jpg

현장에서 물러난 요시다는 현재까지 테레비 아사히의 해설가와 닛칸 스포츠의 객원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1992년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인 야구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10년에는 한신 코시엔 구장에 개설된 코시엔 역사관의 고문에 취임했다. 2011년 7월엔 프랑스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프랑스 야구계에 공헌한 것을 기려 프랑스 야구, 소프트볼 연맹 명예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85년 일본시리즈 우승 당시 요시다의 애제자이자 한신의 주축 강타자였던 오카다 아키노부가 한신 타이거즈를 2023년 일본시리즈에서 38년만의 우승을 달성한 것에 대하여 제일 먼저 축하해 주었다.


자택에서 한신의 일본시리즈 제패 장면을 TV로 보며 기뻐하는 요시다. 90대로 접어든 노령임에도 아직 건강해 보인다.

5. 여담



[1] 전후 학제 개편으로 폐교되었다.[2] 1953~1960까지 오사카 타이거스.[3] 대학야구 팀이지만 디비시옹 엘리트에도 소속되어 있는 세미프로 팀이기도 하다.[4] 카더라 성 일화이지만, 요시다의 대학 재학시절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이던 하마자키 신지가 요시다에게 관심을 보이며 영입을 시도했으나 키가 작다는 것을 알고 "그런 꼬맹이를 데려와서 뭐해" 라면서 단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웃기는 사실은 하마자키 자신도 키가 154cm에 불과했다.[5] 1961년부터 팀명 변경.[6] 도에이의 중심타자 장훈은 그 해 정규시즌 퍼시픽리그 MVP로 선정됐고 일본시리즈에서도 맹활약하며 우승에 기여했다.[7] 이 기록은 1975년 킨테츠 버팔로즈오가와 토오루180타석 연속 무삼진으로 경신했다.[8] 수비는 요시다와 쌍벽을 이루는 명 3루수였고, 882경기 연속출장과 700경기 연속 전 이닝 출장이란 기록을 세운 적도 있다(이 기록은 2004년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경신했다). 그러나 1962년 9월, 시합 전 캐치볼 도중 공에 왼쪽 눈을 강타당하는 사고로 시력을 거의 잃으면서 기량이 급격히 하락했고 결국 1967년 아쉽게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9] 이 당시 한신의 투수들은 내야 땅볼이다 싶으면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이 마운드를 고르며 마음 편히 다음 타자를 맞이할 준비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10] 이때 전통의 일전 3연전에 대해 첫 경기는 무라야마 vs 나가시마- 경기를 보고 그 다음에는 히로오카 vs 요시다의 명 수비를 보는 재미로 본다라는 말도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히로오카-요시다 둘 다 서로를 가리켜 "굉장히 뛰어난 유격수다" 라고 틈만 나면 상대를 추켜세운 희한한 라이벌 관계 였다는 점이다.[11] 이 당시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나카니시 후토시 감독과의 다소 불편한 관계로 인하여 자유계약으로 풀린 장훈이 요시다에게 한신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넌지시 밝혔고 요시다가 단박에 OK하여 장훈이 오사카에 집까지 마련했지만, 뒤늦게 영입 경쟁에 뛰어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장훈을 내줘야 했다.[12] 이 트레이드의 배경엔 요시다와 에나츠가 여러 차례 의견 차이로 대립하면서 사이가 벌어졌다는 속 사정도 있다.[13] 애초에 한신은 한큐 브레이브스, 킨테츠 버팔로즈를 첫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던 명장 니시모토 유키오를 감독으로 영입하려 했지만 이를 거절한 니시모토가 대신 요시다를 추천한 것이 감독 복귀의 계기가 되었다.[14] 당시 세이부 감독은 현역 시절 라이벌이었던 히로오카 타츠로였다. 히로오카는 이 해를 끝으로 감독직을 사임했다.[15] 그러나 우승 뒤 흥분한 나머지 한신 팬들에게 사랑받던 랜디 바스를 닮았다 하여 팬들이 어느 통닭집호호백발 할아버지의 마네킹을 도톤보리강에 집어던진 뒤 타이거스의 1987~2002년의 16년간의 암흑기가 찾아온, 이른바 "커널 샌더스의 저주"가 시작된 것이 이 때였다.[16] 이 해 요시다의 등번호였던 23번이 영구 결번이 되었다.[17] 아이러니 하게도 한신은 니시모토 유키오에게 한번 더 감독 취임을 요청했지만 역시 응하지 않았고, 1985년 시즌과 마찬가지로 요시다가 한신 감독으로 재취임했다.[18] 세키카와 코이치쿠지 테루요시를 트레이드해서 야노 아키히로타이호 야스아키를 영입했다.[19] 데려올 때마다 먹튀였던 외국인 선수들은 물론이요, 토종 중심타자인 신조 츠요시, 히야마 신지로도 매년 삼진 1위를 다툴 정도의 선풍기 스윙으로 일관했다.[20] 참고로 NPB 연속 최하위 기록은 1954~1959년 타이요 훼일즈, 1957~1962년 킨테츠 버팔로즈의 6년.[21] 단 요시다는 한신 감독 경력만 있지만, 강병철은 롯데 자이언츠 외에 한화 이글스, SK 와이번스 감독으로도 재직했다.[22] 다만 이건 한신 타이거스가 과거엔 워낙에 프런트, 코치진, 선수단 3자 간의 대립과 반목이 심해서 툭하면 2~3년마다 감독들이 바뀌기 일수였던 것도 원인이다. 보면 알겠지만 요시다도 여기에 워낙 휘말렸기에 임기를 3번이나 치렀던 것.[23] 현대의 우시와카마루라는 뜻에서 이마우시와카마루'(今牛若丸)로 불리기도 했다. 같은 시기 옆 리그의 간사이팀인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요시다와 마찬가지로 빠른 발과 괜찮은 수비력을 주무기로 삼아 활약하던 외국인 선수 로베르토 바르본도 이 별명을 얻었다. 이쪽은 쿠바 출신이라서 쿠바산 우시와카마루로 불렸다.[24] 타니는 데뷔 첫해부터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찼지만 주전 자리는 단 한 해로 끝나면서 곧바로 다른 선수들에게 밀려 출장 기회가 급감해 버렸고, 결국 명선수였던 외삼촌과는 달리 통산 100안타만 간신히 넘긴 채 은퇴했다. 은퇴 후 1991~1996년까지 킨테츠에서 코치를 역임한 후 현재는 킨테츠 버팔로즈오릭스 블루웨이브의 합병으로 탄생한 오릭스 버팔로즈의 스카우트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