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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28 17:48:27

카케후 마사유키


카케후 마사유키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한신 타이거스 엠블럼.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1985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76~1979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기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타이거스)
기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1, 1982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기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타이거스)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5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기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타이거스)
레온 리
(야쿠르트 스왈로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78, 1979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다이아몬드 글러브
타카다 시게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타이거스)
기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1~198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다이아몬드 글러브
기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타이거스)
기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5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다이아몬드 글러브
기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타이거스)
기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79, 1982, 1984년 센트럴 리그 최다 홈런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2년 센트럴 리그 최다 타점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1, 1982년 센트럴 리그 최다 출루수[1]

보유 기록(NPB)
4타수 연속 홈런 1978년 8월 31일 ~ 9월 1일

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31번
윌리 커클랜드
(1968~1973)
카케후 마사유키
(1974~1988)
하기와라 마코토
(1992~1997)
린웨이추
(2006~2013)
카케후 마사유키
(2016~2017)
제프리 마르테
(2019~)
}}} ||
파일:카케후 마사유키 노년.jpg
카케후 마사유키
掛布雅之 | Masayuki Kakefu
생년월일 1955년 5월 9일 ([age(1955-05-09)]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니가타현 산조시[2]
학력 나라시노시립 나라시노 고교 (치바)
신체 175cm, 77kg
포지션 3루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73년 드래프트 6라운드 (한신)
소속팀 한신 타이거스 (1974~1988)
지도자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 (2016~2017)
프런트 한신 타이거스 시니어 익스큐티브 어드바이저(2018~)

1. 개요2. 학창시절3. 프로선수 시절4. 은퇴 이후5. 인간관계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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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카케후 마사유키 선수시절.jpg
ミスタータイガース云々というのは、自分でいうことではないと思うんです。ただファンの方々がそう言ってくださるのは嬉しいですよ。タイガースの4番としての宿命なんですから。
(미스터 타이거즈 운운하는 것은, 스스로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팬분들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이 기쁜거죠. 타이거즈의 4번으로서의 숙명이니까요.)
일본프로야구 선수, 해설가.

2. 학창시절

치바 상업학교 교사로 야구부 감독을 겸하며 학교를 고시엔 일보 직전까지 이끈 경력이 있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러나 아버지가 여러가지 사정으로 야구와의 연을 끊고 식당을 운영하는 등 다른 직업에 종사하다 카케후가 초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중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다시 야구와 인연을 맺었는데, 이 때 카케후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야구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카케후가 우투좌타로 전향한 것도 아버지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훈련을 받아 기초부터 실력을 쌓아온 카케후는 나라시노 고교[3]의 주전 유격수이자 4번타자로 이름을 날렸고 2학년이던 1972년 고시엔 여름 대회에 진출했지만 1회전에서 토요대 히메지 고교한테 패하며 탈락, 이듬해엔 예선탈락으로 쓴맛을 보기도 했다.

3. 프로선수 시절

파일:attachment/카케후 마사유키/Example.jpg
고교 졸업 무렵 아버지의 치바 상업학교 시절 제자이던 오가와 요시하루(당시 야쿠르트 스왈로즈 2군 감독)을 통해 야쿠르트 입단을 주선하려 했으나 좌절당하고 다른 루트를 찾은 끝에 한신 타이거스에 드래프트 6번으로 지명되며 프로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포지션은 후지타 타이라가 이미 주전 유격수로 뿌리를 내렸는지라 3루수로 전향해야 했고[4] 데뷔 첫해 시범경기에서 범상치 않은 실력을 선보이며 1군 무대에 발을 들였지만 2년차까지는 그리 눈에 띄는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데뷔 3년째 되던 1976년 두각을 나타내며 27홈런, 83타점, 타율 0.325를 기록, 명실상부한 한신의 주전 3루수로 자리잡게 된다. 1977~1978년 시즌에도 각각 23개, 32개의 홈런과 3할대 중반의 타율을 마크한 카케후는 1978년 시즌 종료 후 한신의 4번이던 타부치 코이치세이부 라이온즈로 이적하면서[5] 4번 타자 자리까지 꿰차게 되었고 1979년 48홈런으로 생애 첫 홈런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6]

이후 1982년, 1984년에도 홈런왕 자리에 오르는 등[7] 카케후는 한신의 확실한 주포로 명성을 날렸고, 1985년 시즌엔 3번 랜디 바스-4번 카케후 마사유키-5번 오카다 아키노부로 이어지는 팀 역사상 최강의 클린업 트리오의 멤버로 팀을 창단 이후 첫번째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끄는 주역이 되었다.[8] 특히 그 해 4월 17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홈 경기 7회말에 폭발한 백스크린 3연발은 아직도 한신 올드팬들이 "그때를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고 할 정도로 당시 한신 클린업 트리오의 위력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그러나 1986년 시즌 초장에 주니치 드래곤즈의 신인 투수이던 사이토 마나부의 사구에 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은 후 그의 타격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1987년 시즌 개막 직전에 음주운전 현행범으로 체포되며 비난의 중심에 서는 흑역사까지 창조하는 등 이런저런 안좋은 일만 겹치는 통에 심신이 많이 지쳐버린 카케후는 결국 1988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15시즌 동안 349홈런[9], 1019타점, 1656안타, 타율 0.292의 통산 성적을 남겼다.

4. 은퇴 이후

유니폼을 벗은 후 닛폰 테레비[10], 마이니치 방송, 요미우리 TV 등에서 해설가로 일했으며, 특이하게도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잠깐 코치를 한 것 이외엔 이상하리 만치 지도자 생활과는 인연이 없었다. 물론 다른 구단에서 여러 차레 오퍼가 들어왔고 2004년 신생팀인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창단 감독 제의도 있었지만[11] 그 때마다 자신의 야구관과는 맞지 않는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한편 카케후기획이라는 주식회사를 차려 음식점 등의 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도쿄상공리서치 보도자료 집이 날아갔다. 빚이 4억엔[12]

그러나 2013년 스토브리그에 한신 타이거즈가 젊은 타자를 육성할 포석으로 그를 육성+타격 코디네이터로 초빙하자 이를 승낙하며 25년 만에 그라운드로 돌아왔고, 2015년 가네모토 도모아키 감독이 취임하면서 2군 감독으로 영전했다. 감독이면서도 현역 시절 자신의 배번인 31번을 사용했었다.

이후 2군 감독으로써 신인 육성에 전념했고, 그 결과 타카야마 슌신인왕 획득, 오오야마 유스케의 주전 확보 등 나름의 성과를 거두며 지도자로써의 능력을 보였다. 2017년 시즌 종료 후부턴 1군 배터리코치였던 야노 아키히로에게 2군 감독직을 넘기고 구단 최초의 시니어 익스큐티브 어드바이저(약칭 SEA)에 취임하여 프런트로 전임한다. SEA로써는 타 구단 시찰과 오너에 대한 조언 위주의 일을 하는 듯.

팀 동료였던 오카다 아키노부가 한신 감독으로서 2023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자 축하 인사를 전했다. 오카다와 카케후는 38년 전 한신의 첫 일본시리즈 제패에 공헌했다.

5. 인간관계

프로 2년차이던 1975년, 경기 도중 상대 타자의 타구를 가랑이 사이로 빠뜨리는 실책을 범했는데 그게 화근이 되어 대량 실점으로 패배한 적이 있었다. 게임 후 라커룸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 주저앉아 끙끙 앓고있던 카케후에게 그날 선발 투수이자 팀 선배인 에나츠 유타카가 "멍청한 녀석, 뭐 하고 있는거야? 신경쓰지 마라"면서 그를 위로했다고 한다.

고향 선배인 나가시마 시게오를 경애하고 있다. 요미우리 전에서 프로 데뷔 첫 안타를 기록하고 득점을 노렸으나 3루수 나가시마에게 태그아웃 당했는데도 기뻐서 견딜수가 없었다고 한다. 나가시마는 훗날 카케후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넌 요미우리와의 시합에서 홈런을 많이 쳐서 분하기도 했지만 넌 치바 후배다. 분하지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큰 박수를 진심으로 너의 홈런에 선물하고 있다"고 말한바 있다. 나가시마가 야구 평론가로 활약할 시에는 전화로 나가시마에게 조언을 구했다. 전화기 너머로 카케후는 본인의 스윙소리를 들려주었는데 "그래, 지금의 스윙이다. 기억하라!" 하면서 통화를 마치고 카케후는 슬럼프를 벗어났다고 한다. 참고로 나가시마는 같은 3루수 레전드인 후지무라 후미오를 매우 경애하여 어릴때 간토 토박이임에도 골수 한신빠돌이로 성장했다.

거인의 오 사다하루와는 별로 이야기 한 기억은 없고 라이벌이었던 요미우리 투수 에가와 스구루와는 현역 때 올스타전에서만 대화하고 은퇴 후 해설자로 일을 같이 하면서 친해졌다.

현역 시절 같이 팀을 이끌었던 오카다 아키노부와의 불화설이나 각각의 파벌이 있다는 설이 스포츠신문에 보도되었으나 오카다는 후에 자서전에서 "입단 후 같이 식사하지 않은 건 사실"이라고 하면서도 불화설을 부정하고 "함께 가지 않으니까 = 사이가 나쁘다"고 단정하는 건 곤란하다고 말했다. 오카다는 카케후의 은퇴 경기 때 "부탁한다"고 말한 것이 "처음으로 두 사람간의 본심 대화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뭐 흔히 있는 그렇게까지 싸울 정도로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친하지는 않고 서먹서먹한 정도의 직장동료 관계였던 듯.

요미우리의 포수 아베 신노스케의 부친은 카케후의 고등학교 동급생으로 야구부에서 팀메이트였다. 카케후는 3번, 아베의 아버지는 4번타자였다고. 지금도 카케후는 아베의 아버지와 깊은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아베가 어린 시절부터 카케후를 동경하고 있던 것은 이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6. 기타

애니메이션 거인의 별에선 호시 휴마스크류 스핀 슬라이딩을 깨뜨린 유일한 선수로 유명하다. 애니메이션에서의 성우는 와카모토 노리오. 애니에서는 카케후 본인이 원래 치바 현 출신임에도 왠지 간사이벤을 구사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당시에는 초상권 개념이 잘 자리잡지 않아 카케후는 자신을 모델로 한 캐릭터가 애니에서 저런 활약(?)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 야구계에서 우투좌타 슬러거 계보의 시조같은 인물로 카케후를 따라 우투좌타가 된 야구선수들이 더러 있는데, 대표적으로 요미우리의 강타자 포수이자 카케후와 동향 치바현 출신인 아베 신노스케가 카케후를 동경해 우투좌타가 되었다. 또 카케후를 따라 우투좌타가 된 건 아니지만 역시 우투좌타 슬러거인 마쓰이 히데키가 소년 시절 가장 동경했던 선수였다고 한다. 이쪽은 어릴적에 한신 팬으로 자라났기 때문. 만화 H2에서 메이와와 연습시합을 하던 중 자기 타격 방법을 잊어먹고 우타석에서 스윙하던 키네 류타로에게 타치바나 히데오가, "너 원래 왼쪽에서 치지 않았었냐?"라는 말을 하고 자기가 원래 우투좌타라는걸 알았을때 스윙 모션과 함께 등번호 31번이 보이는데, 이게 카케후 마사유키의 오마쥬.

https://youtu.be/FTujuqe3Omk?t=159
1988년 4월 26일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와의 경기에서 인사이드 파크 호텔을 기록했다(...).

1980년대 말에는 아역 배우인 사가라 켄지가 '카케후 군'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 아역 배우를 주인공으로 한 패미컴플랫포머 게임인 "카케후 군의 점프 천국 스피드 지옥"(カケフくんのジャンプ天国 スピード地獄)이 발매되기도 했다. 문제는 제목처럼 주인공의 상상을 초월하는 점프력과 스피드 덕분에 지옥같은 고난이도의 게임이 되었다는 것. "Kid Kool"이란 제목으로 미국에 수출되었고, 후일 AVGN에 의해 위와 같은 이유로 대차게 까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5BqCAOGRR2Q[13]
[1] 당시 출루율이 비공식 기록이었던(이 시기엔 퍼시픽리그에서만 공식 기록으로 채용했고 이땐 희생플라이가 계산에서 빠졌다.) 센트럴리그에서 1967~1984년까지 단독으로 시상하던 타이틀로, 안타+사구(출루)를 합산해 합산값(출루수)이 가장 높은 선수에게 타이틀을 시상했다. 1985년부터 출루율양대리그 모두 공식기록으로 채용되어(이때 희생플라이도 계산에 포함) 최고출루율 타이틀을 시상하면서 폐지되었다.[2] 어머니의 고향인 니가타에서 태어났지만, 성장은 1살 무렵부터 아버지의 고향인 치바현 치바시 주오구에서 했다.[3] 치바에 존재하는 공립고교로 공립고교치고는 야구 실력이 괜찮은 편이다. 2019년 여름 코시엔에서는 칸토 지역에서 유일하게 본선에 진출한 공립고교이고.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 후쿠우라 카즈야가 학교 후배다.는 20년 뒤에 학교를 다녀서 의미가 없다[4] 비슷한 시기에 한신에 입단했던 사노 노리요시는 이 카케후에게 밀리며 좌익수가 되었다. 그래도 1985년엔 좌익수 자리에서 족적을 남기며 팀의 리그 및 일본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5] 당시 타부치의 반대급부로 영입한 선수 중 한명이 이후 한신의 공포의 1번 타자로 맹활약한 마유미 아키노부였다.[6] 팀 선배인 후지무라 후미오가 1949년에 세운 구단 기록인 46개를 경신한 것이었다. 이 기록은 1985년 랜디 바스가 54개로 뛰어넘었지만, 아직까지 한신의 일본인 선수 시즌 최다홈런 기록으로 남아있다.[7] 1978~1984년 사이 카케후는 야마모토 코지와 홈런왕 경쟁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카케후가 홈런왕을 차지하지 못한 해는 야마모토 코지가 홈런왕을 차지했다. 다만, 중간에 주니치의 오오시마 야스노리우노 마사루가 공동수상으로 홈런왕을 차지하기도 했다.[8] 1985년 카케후는 40홈런, 108타점, 타율 0.300으로 4번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당시 한신의 타선은 1번에 30홈런 타자 마유미 아키노부가 버티고 있었으며, 오카다 아키노부 뒤로 나오는 6번 사노 노리요시, 7번 히라타 카츠오, 8번 키도 카츠히코하위타선 치고는 펀치력이 상당했던 타자들이었다. 7홈런을 친 히라타 카츠오마저도 53타점이나 기록하며 무시할 수 없는 클러치 능력을 자랑했다.[9] 한신 선수로선 통산 최다기록.[10] 이때 에가와 스구루와 함께 요미우리 4번타자였던 이승엽한일통산 400호 홈런을 직접 목도했다.[11] 얼마 안가 다오 야스시가 감독직을 맡으며 없었던 일이 됐지만.[12] 이 때문에 2019년까지도 개인회생 후 빚을 갚고 있다.[13] 리뷰에도 나오지만, 이 게임은 빅 토카이가 만든 플랫폼 게임을 스킨만 바꿔서 내놓은 게임이다. 마스터 시스템에는 사이코 폭스라는 이름으로, 제네시스에는 Decap Attack이라는 이름으로 화면 스프라이트만 바꾸고 게임 자체는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