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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01:23:05

후쿠우라 카즈야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width=320><tablebordercolor=#000000><tablebgcolor=#000000> 파일:치바 롯데 마린즈 로고.svg치바 롯데 마린즈
2024 시즌 코칭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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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cccccc,#323232> '''<1군>
21 요시이 마사토 [[감독#s-1.1|
]] · 70 후쿠우라 카즈야 · 71 무라타 슈이치 · 73 카나자와 타케시
80 오츠카 아키라 · 82 오노 신고 · 84 구로키 토모히로 · 87 네모토 슌이치
88 가네코 마코토 · 90 미츠야마 히데카즈'''
<2군>
72 미키 료 · 75 호리 코이치 · 76 에무라 나오야 · 77 구리하라 켄타
78 오토나리 켄지 · 81 이시미네 쇼타 · 83 모로즈미 켄지 · 86 사부로
<재활/잔류군>
79 마츠나가 타카히로 · 85 오타니 토모히사
<트레이닝>
1군 키쿠치 다이스케 · 네모토 준페이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육성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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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우라 카즈야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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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치바 롯데 마린즈 우승 엠블럼 V3.svg파일:치바 롯데 마린즈 우승 엠블럼 V4.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1]
2005 2010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1 NPB 퍼시픽리그 수위타자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3, 2005, 2007 NPB 퍼시픽리그 골든글러브(1루수)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10 NPB 퍼시픽리그 베스트나인(지명타자)

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70번
쥰푸 슈이치 (1990~1993) 후쿠우라 카즈야 (1994~1997) 츠츠이 요시노리 (1999~2003)
네모토 슌이치 (2019) 후쿠우라 카즈야 (2020~) 현역

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9번
이가라시 아키히토 (1991~1997) 후쿠우라 카즈야 (1998~2019) 공석
}}} ||
<colbgcolor=#191919><colcolor=#ffffff> 치바 롯데 마린즈 No.70
후쿠우라 카즈야
福浦和也 | Kazuya Fukuura
출생 1975년 12월 14일 ([age(1975-12-14)]세)
치바현 나라시노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나라시노시립 나라시노고등학교
신체 183cm / 88kg
포지션 1루수, 외야수[2], 지명타자[3]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3년 NPB 신인드래프트 7순위[4]
소속팀 치바 롯데 마린즈 (1994~2019)
지도자 치바 롯데 마린즈 1군 타격코치[5] (2018)
치바 롯데 마린즈 2군 타격코치 (2019)[6]
치바 롯데 마린즈 2군 수석·타격코치 (2020~2021)
치바 롯데 마린즈 1군 타격코치 (2022)
치바 롯데 마린즈 1군 수석·타격코치 (2023~)
등장곡 ATSUSHI - 願い[7]
응원가 1997?~2002: 영화 <럭키 레이디> 주제가[8]
2000~2001?: SMiLE.dk - Butterfly[9]
?~2010 안타 테마: #[10]
2001년 여름: Recedo Bossa Noba[11]
2002~2010: 해변으로 가요[2002여름][2003~2009][2010]
2011~2019: 응원단 자작가[15]
2003?~2019: Let's Go 나라시노[16]

1. 개요2. 선수 생활
2.1. 2018 시즌2.2. 2019 시즌2.3. 총평
3. 은퇴 후4. 연도별 기록5. 플레이 스타일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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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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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바 롯데 마린즈 소속의 야구선수이자 현 치바 롯데 마린즈의 수석코치.

치바현 출신으로 학교도 모두 치바에서 나왔으며, NPB에서 오로지 치바 롯데 한 팀에서만 뛰었고, 은퇴 후 코칭스태프 커리어까지 보내고 있어 '치바의 긍지'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하다.

2. 선수 생활

치바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치바 현에서 졸업하고[17] 1994년에 전체 최하위 픽으로[18][19][20]투수로써 팀에 입단하였으나 어깨 부상으로 3년간 2군에서 고생만 하였다. 결국 어깨 부상 때문에 1994년 시즌 도중 타자로 전향하게 되는데, 이것이 프로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다.[21][22]

타자전향 후 2년간 2군에서 기량을 쌓은 후 1997년 7월에 처음으로 1군에 승격하였고, 승격하자마자 곧바로 주전 1루수 자리를 꿰차며 규정타석의 절반 정도밖에 소화하지 못했음에도 타율 .287, 6홈런 23타점의 출중한 성적을 기록하였다. 이후 주전으로 꾸준히 뛰면서 2000년대 들어 포텐이 대폭발하여 2001년부터 2006년까지 6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하는 등 치바 롯데의 간판타자로 자리 잡았다. 특히 2001년에는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와 시즌 막판까지 경쟁을 이어간 끝에 타율 .346으로 스즈키 이치로가 떠난 퍼시픽리그의 첫 수위타자를 수상하며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 이 시기에 배트를 앞뒤로 흔드는 진자 타법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롯데 시절의 이승엽을 지명타자/좌익수로 보낸 장본인이기도 한데[23], 그만큼 주전 1루수였던 후쿠우라의 팀내 입지가 상당히 컸다.[24] 더군다나 1루 수비는 최상급인 이승엽에게 수비로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의외로 준수한 수비수이기도 했다.[25] 2003년, 2005년 2007년 총 3번 1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도 노쇠화를 피할 순 없었는지 30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꾸준한 하향세를 보이고 있다. 그래도 팀 내에서 베테랑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잊을만 하면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치바 롯데 팬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오오무라 사부로가 은퇴했고 이구치 타다히토도 2017시즌 후 은퇴하고 바로 감독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당분간 팀내 야수진 최고참으로써 후배들을 이끌 것으로 보인다. 지금 팀 돌아가는 꼬라지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다.[26][27] 무엇보다도 2000안타에 30개 정도가 남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명구회 가입 조건은 채워주고 은퇴시키자는 분위기라 내년에도 팀에서 계속 뛸 듯 하다.

2.1. 2018 시즌

자세한 정보는 후쿠우라 카즈야/2018년 항목으로. 2018년 9월 22일, 시즌 16경기를 남기고 2000안타를 달성하며 명구회 가입조건을 충족시켰으며, 2018년 10월 8일 명구회에 가입했다.[28]

2.2. 2019 시즌

그리고 2019년에도 플레잉코치를 하게 되면서 선수로 계속 뛰게 되었다. 보직은 2군 타격코치. 그리고 스프링캠프에서 롯데의 1라운드 지명자 후지와라 쿄타의 타격훈련을 돕기 위해 배팅볼 투수를 맡는다고 한다. 이는 25년만의 투수 복귀라고 한다.

1월 24일에 예고은퇴를 선언하였다. 도중에 번복하지 않는 이상 2019년이 선수 커리어 마지막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2군에서 코칭에 집중하며 경기는 안 나오는 중. 오오무라 사부로처럼 은퇴경기 아니면 1군에 안 올라올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5월 7일 2군에서 대타로 나와 2루타를 쳤다.

9월 23일 은퇴식이 예정되었고 9월 22, 23, 24일 모두 은퇴 기념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 때 경기에 올라올 지는 미지수이나 일본프로야구는 은퇴경기 특례 1군등록 규정이 있다 보니 어지간하면 못해도 대타 정도로는 나올 듯. 현재 후쿠우라 특별 상품이 수십 종류나 발매 예정이며, 은퇴경기 특별 페이지까지 나오는 중 매우 성대한 은퇴식을 준비하고 있다. 아무래도 명구회 가입 정도의 큰 족적을 남긴 롯데의 프랜차이즈 선수가 한동안 없었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나오기 힘들 것이기 때문인듯.[29][30] 그리고 7월 21일 후쿠우라의 은퇴경기 팬클럽 선예매가 시작되는 날, 치바롯데 티켓 예매 사이트의 서버는 폭발해버렸다. 개막전이나 도쿄돔 경기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골드회원 예매 시작 이후 30분도 못 돼서 서버가 터졌다. [31][32]

롯데가 9월이 되도록 치열하게 3위경쟁을 하는 중이라 후쿠우라 본인은 은퇴경기날 출전을 고사하고 은퇴식만 하겠다고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이구치 타다히토 감독은 후쿠우라를 위해서 은퇴경기 날 선발로 출장시킬것이라 밝혔다.

그리고 예정대로 은퇴식 경기에 올 시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발 출장했다. 7번 지명타자로 출장해서 4타수 무안타를 기록하였고, 9회에는 지명타자에서 해제되어 1루 수비로 출장하였으며 경기를 끝내는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되는 1루 직선타를 포구하면서, 드래프트 최하위 픽으로 시작하여 치바를 대표하는 1루수의 자리까지 올라간 파란만장했던 현역생활을 마쳤다.

2.3. 총평

치바현 출신으로 학교도 모두 치바에서 나왔으며 치바 롯데의 초창기 시절부터 현재까지 오로지 치바 롯데 한 팀에서만 뛰었고, 지금도 치바 롯데에서 스태프 커리어까지 보내고 있는 말 그대로 치바의 긍지다. 실제 응원가 가사에도 치바의 긍지라는 표현이 들어가며, 구단에서 공식으로 은퇴 후 반드시 감독에 임명할 계획이라는 발표까지 나왔으니 말 다한 셈. 전체 최하위 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산 2천안타를 달성하며 명구회 가입까지 이뤄낸 인간승리의 표본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후쿠우라가 지명된 1993년 드래프트에서 그보다 윗 순번으로 지명받은 치바 롯데 선수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1순위 지명자 카토 타카야스는 첫해 12경기 등판을 마지막으로 부상 때문에 1995년에 은퇴하고 음식 사업을 하고 있고, 2순위 지명자 타치카와 타카시는 백업 외야수로 뛰다가 2005년 한신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뒤 K-1 격투기 선수로 데뷔한 적이 있다.

3라운드 픽 오오츠카 아키라는 백업 외야수로 활동하다 2010년에 은퇴 후 현재는 롯데의 3루 주루코치로 있고, 4순위 지명자 나카야마 마사유키는 카토처럼 첫해 15경기 등판을 끝으로 1996년에 은퇴(이후 미국 독립리그에서 한해 더 뛰었다), 5순위 지명자 모로즈미 켄지는 2006년에 은퇴하고 롯데의 2군 1루 주루코치로, 6라운드 픽 오노 신고는 2013년에 은퇴하고 롯데의 스카우터로 활동 중이다.

내구성도 그렇고 성적도 그렇고 7순위 지명자인 후쿠우라 카즈야가 제일 뛰어났으며, 그 다음으로 괜찮았던 선수는 통산 293경기 등판의 6순위 지명자 오노 신고였다. 게다가 3번째로 잘한 선수도 통산 103도루를 기록하고 잠깐이나마 주전 중견수를 맡기도 한 5순위 지명자 모로즈미 켄지였다. 그 밑으로는 오오츠카와 타치카와가 비록 백업인생이어도 1군에 자주 올라오면서 30대까지 선수생활을 하긴 했으나, 카토와 나카야마는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한 최악의 픽이 되었다. 결론적으로는 상위 지명자들이 망하고 하위 지명자들이 팀의 주축으로 성장한 기묘한 드래프트.[33]

3. 은퇴 후

2020년부터 롯데의 2군 타격코치 겸 수석코치를 맡는다. 수뇌부에서는 이미 이구치 다음 감독으로 후쿠우라를 내정한 상황이라고 한다.[34] 그리고 등번호도 데뷔했을 때의 등번호인 70으로 회귀했다.

2군에서 2년간 타격코치 겸 수석코치를 맡은후 2022년부터는 본격적으로 1군 타격코치를 맡으며 감독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2022년 시즌 초 타격코치로서의 평판은 최악. 롯데의 타율, 홈런, 출루율이 모두 최하위권이며 전체 타석 대비 내야 뜬공아웃 비율은 1위[35], 안타 중 내야안타 비율 1위, 내야를 넘어간 공[36] 중 홈런 비율 꼴등등 온갖 불명예스러운 수치를 보이게 되며 까이고 있다.

다만 유일하게 타카베 아키토 한 명만큼은 제대로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 중. 같은 좌타자 출신이라 타격폼을 전수하기도 편하며, 2021년 당시 타카베의 타격폼과 비교하면 상당히 후쿠우라와 유사한 폼으로 타격을 하는 중이다.

2022년 시즌 종료 후 이구치가 퇴임을 선언하면서 유력한 차기 감독 후보로 부상했다. 다만 후쿠우라가 타격코치로 그렇게 좋은 소리를 못 들어서인지, 팬들의 여론은 은퇴 직후와 다르게 "2군 감독을 먼저 하고 1군 감독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차라리 토리고에 유스케[37]를 감독으로 만드는 게 낫지 않냐."등의 반응이 많이 나오고 있다. 롯데는 파벌싸움도 심한 만큼 여기서 감독직이 나가리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보인다.

결국 후쿠우라는 1군 수석코치를 일단 맡게 되고 요시이 마사토가 감독이 되었다. 아마 예상에 비해 코칭스태프로서의 평가가 좋지 않아서 감독수업을 더 시키려는 모양.

2023년 시범경기에 한해서 요시이 마사토가 WBC 국가대표팀 투수코치로 차출됐기 때문에 감독대행을 맡았다. 일본에서의 반응 중 "야쿠르트에서는 WBC에 선수들이 차출돼서 백업들이 시범경기를 통해 주전을 노리는데 이 팀은 감독이 WBC에 차출돼서 수석코치가 시범경기를 통해 감독을 노린다."는 반응이 백미다.

4. 연도별 기록

역대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1997 롯데 67 242 63 8 1 6 27 23 0 19 36 .289 .353 .417 .770 1
1998 129 526 132 32 3 3 61 57 1 51 78 .284 .356 .385 .740 1.2
1999 114 284 71 15 1 3 21 35 0 21 38 .277 .338 .379 .717 0.1
2000 131 494 132 21 4 7 58 56 1 34 59 .296 .348 .408 .756 0.1
2001 120 519 156 30 4 18 94 66 0 58 74 .346 .424 .550 .973 4.8
2002 135 565 148 40 0 9 48 66 2 52 73 .300 .384 .436 .820 2.8
2003 140 623 172 50 1 21 75 76 2 48 89 .303 .357 .506 .863 3
2004 128 569 159 42 1 11 67 73 2 47 82 .314 .381 .466 .847 2.9
2005 114 491 130 25 1 6 54 72 0 39 55 .300 .363 .403 .766 2.5
2006 114 484 136 20 1 4 43 52 0 33 52 .312 .362 .390 .752 1.7
2007 110 445 102 20 1 4 41 57 0 38 44 .258 .325 .344 .669 0.7
2008 105 370 78 9 0 1 39 44 0 50 49 .252 .352 .290 .643 0.2
2009 129 460 108 18 0 6 47 39 1 46 65 .273 .352 .364 .716 1
2010 116 359 95 19 0 13 42 61 0 38 47 .295 .354 .475 .829 1.4
2011 116 405 80 13 0 3 22 43 0 37 72 .223 .297 .285 .582 -0.1
2012 84 199 45 3 0 0 5 25 0 15 27 .250 .308 .267 .575 0
2013 78 169 32 5 1 0 5 17 0 26 30 .229 .349 .279 .628 -0.1
2014 43 106 26 2 0 0 4 15 0 12 14 .283 .377 .304 .682 0.3
2015 73 199 47 3 0 2 17 21 1 20 34 .272 .367 .324 .691 -0.1
2016 36 90 20 2 0 0 4 7 0 5 12 .244 .311 .268 .579 -0.1
2017 70 155 30 7 0 0 6 18 0 18 25 .224 .316 .276 .592 -0.4
2018 82 196 38 4 0 1 6 11 0 10 34 .210 .256 .249 .505 -1.1
2019 1 4 0 0 0 0 0 0 0 0 0 .000 .000 .000 .000 -0.1
NPB 통산
(23시즌)
2235 7955 2000 388 19 118 774 935 10 707 1089 .284 .354 .395 .739 21.7

5. 플레이 스타일

당겨치기와 밀어치기에 모두 능하며 플라이볼보다는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를 많이 친다. 야마모토 코지 감독은 타격에 천부적인 센스를 갖고 있으며, 배트 컨트롤은 타고났다고 평가하였다. 특히 2001년 이전까지는 좌상바 기질이 있었다가 2001년에 갑자기 좌투수 상대로 4할을 치면서 타율이 대폭 좋아졌다. 또한 전성기 시절에는 진자 타법을 많이 이용하였으나 지병인 요통 때문에 노쇠화가 오면서 진자 타법을 그만두었다.

파워는 전성기 때에는 준수했던 편. 15~20홈런에 40개 안팎의 2루타를 꾸준히 칠 수 있었다. 거기다가 타법 자체가 홈런을 노리기보다는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를 노리는 스타일이었고, 구장 역시 투수친화구장인 것을 감안하면 장타력은 충분했다. 그러나 30대 초반에 이미 전성기가 끝나갔기 때문에 그 후로는 장타력보다는 교타력으로 버텼다. 2010년에 지명타자 전향 이후 다시 13홈런을 치며 잠깐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1년만에 공인구가 바뀌면서 완벽하게 똑딱이화. 그냥 똑딱이도 아니고 마지막 8년 동안 홈런을 3개 칠 정도로 엄청난 똑딱이가 되었다.

하지만 2011년 이후에도 중요한 상황에서 유독 잘 치는 능력 덕분에 대타 스페셜리스트로 꾸준히 뛰어왔고, 결국 2000안타를 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수비는 수비력의 중요성이 낮은 1루수지만 매우 훌륭한 수비력을 가졌기 때문에 30대 중반까지 꾸준히 1루수로 뛰어왔다. 신인 시절에는 외야수 도전도 했었으나 애초에 어깨부상으로 투수를 포기해 택한 야수의 길인 만큼 송구가 좋지 않아서 포기. 하지만 좋지 않은 어깨라고는 하지만 가끔 송구해야 할 일이 있을 때의 송구 능력은 상당히 좋았다. 그러나 후쿠우라의 진가는 역시 포구 능력. 몸이 유연하다 보니까 어지간한 실책성 악송구들은 전부 잡아냈다. 한때 팀메이트였던 이마에 토시아키는 후쿠우라가 없었으면 팀의 송구실책은 두 배로 늘어났을 거라고 말했을 정도. 실제로 수비 관련 지표를 보면 후쿠우라는 역대 NPB 1루수 중 한 손 안에 꼽히며, 동시대 1루수 중에는 거의 최강급이었다. 하지만 2010년 즈음부터는 거의 전문 지명타자/대타로 전업했다.

주루는 체격 때문에 발이 빠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보기보다 발이 느려서 2001년엔 시즌 0도루 수위타자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획득하기도 하였다.[38] 두자릿수 도루를 기록한 시즌 역시 한 번도 없다. 애초에 통산 도루가 10개에 시즌 최다 도루는 2개[39]인 판이다. 도루 실패도 무려 17개로 도루성공률이 절반은 커녕 40%(도 안 된다. 한마디로 (수비를 제외하면) 교타력 하나로 먹고사는 타자. 참고로 2003년에는 22병살타로 병살왕을 한 적도 있다. 참고로 1루까지 뛰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4.8초로 팀에서 제일 빠른 오카다 요시후미랑 비교하면 거의 1.5배 수준이다. 빠르지 않다를 넘어서 느리다.[40] 일본프로야구에서 후쿠우라와 주력으로 견줄수 있는 선수는 소프트뱅크 호크스 &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거친 전문 지명타자와 대타출신 오미치 노리요시 정도밖에 없다. 크보까지 확장하면 김태군 & 이성우가 후쿠우라와 견줄 정도다.

여담으로 이런 유형의 한국 선수로는 서용빈, 박종윤, 채태인이 있다. 하지만 셋 다 플레이 스타일도 조금 다르고 후쿠우라와 비교하기에는 급이 떨어지는 편.[41] 최하위픽으로 프랜차이즈 스타 자리까지 꿰찼다는 임팩트만 놓고 보면 서용빈이, 준수한 중장거리포로 꽤 누적기록을 잘 쌓아왔다는 면에서는 채태인이 비슷하긴 하지만 리그의 수준차이를 무시한다 해도 후쿠우라보다는 밀린다.

6. 기타



[1] 사실 2010년의 경우는 말이 우승반지지 일본시리즈 우승을 엔트리에서 겪었다는 기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치바 롯데 마린즈는 2010년애 공식적인 우승반지를 만들지는 않았기 때문. 다만 2005년에는 만들었다.[2] 커리어 초반에 외야수도 병행했으나, 외야 수비가 좋지 못한 점도 있어서 2003년 이후론 1루수에 전념하게 되었다. 2010년부터는 1루수는 백업 위주로 들어갔고, 선발출장은 주로 지명타자로 나왔다. 물론 타격이 더 좋은 지명타자 후보가 있을 때는 1루수로도 나와서 2017년까지는 1루 수비를 자주 보았다.[3] 2010년부터는 대타 아니면 지명타자로 주로 출장하였다. 선술했듯 1루수 선발출장도 2017년까지는 아예 없던 것은 아녔지만.[4] 전체 64순위로, 그 해의 롯데 최하위 픽이자 그 해 드래프트 전체 최하위 픽. 롯데를 제외하면 7라운드에서는 전원 패스를 선언했다.[5] 플레잉코치라서 선수생활을 접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선수로써 성적이 잘 안나오자 5월부터 코치를 중단하고 한동안 선수로만 남기로 했다.[6] 플레잉코치이며, 1군에 콜업된 기간 동안은 코치 등록 말소. 그런데 1군 콜업이 딱 하루 됐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었다.[7] 네가이라고 읽는다. 소원이라는 뜻. 해당 한자는 원할 원.[8] 별다른 가사는 없었고, 반주에 맞춰 어이야!를 3번 외치다 마지막에 어이어이야!를 외치는 방식으로 불렸다. 여담으로 해당 주제가가 수록된 영화의 정식 원제는 <Those Magnificent Men in their Flying Machines; Or, How I Flew from London to Paris in 25 Hours 11 Minutes>로 무지막지하게 길다.[9] 일명 라인 댄스라 불리는 응원가로 주로 세이부돔 원정경기에서 사용되었으며, 별다른 가사 없이 반주에 맞춰 아카펠라를 이어가다 어이어이야! 3번 - 후쿠우라! 순으로 외치는 방식으로 불렸다.[10] 주로 메인 응원가 앞에서 연주된 테마송으로 반주 끝부분마다 후쿠우라 히트!를 외치는 방식으로 불렸다. 2010년 시즌 종료 후 응원가가 전면 물갈이되면서 폐지.[11] 福浦 2001夏はお前の季節 焼け付く太陽がお前を呼んでいる (후쿠우라 2001년 여름은 너의 계절 타오르는 태양이 너를 부르고 있어) / 수위타자를 수상했던 2001년 여름 한정으로 사용된 응원가로, 본인의 커리어하이 시즌을 대표하는 응원가이나 이후 은퇴할 때까지 이 곡이 사용된 적은 없었다.[2002여름] 真夏で燃えろ 打て福浦 打て福浦 潮風受けて 打て福浦 2002夏も お前の季節 (한여름에 타올라라 쳐라 후쿠우라 쳐라 후쿠우라 바닷바람을 받고서 쳐라 후쿠우라 2002년 여름도 너의 계절) / 2002년 여름 한정으로 사용된 가사로, 본래는 이 응원가도 여름 시즌에만 사용할 것으로 보였으나 반응이 좋아서인지 아예 2003년부터 이 응원가를 메인 응원가로 사용하게 된다.[2003~2009] 俺らは叫ぶ 打て福浦 打て福浦 声援受けて 打て福浦 打て福浦 勝利をつかめ (우리들은 외친다 쳐라 후쿠우라 쳐라 후쿠우라 성원을 받아 쳐라 후쿠우라 쳐라 후쿠우라 승리를 붙잡아라) / 후술할 2011년 응원가와 함께 후쿠우라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응원가로, 2002년 여름 응원가를 가사만 바꾼 채 그대로 가져와 2010년 가사가 바뀔 때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링크에 올라온 영상 역시 2003~2009시즌 버전.[2010] 不屈の闘志 打て福浦 頼れる男 打て福浦 一発かませ (불굴의 투지 쳐라 후쿠우라 믿을 수 있는 사나이 쳐라 후쿠우라 한 방을 날려라) / 2009년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해임 문제로 응원단이 구단과 갈등을 일으켰던 MVP 사건으로 응원단이 전면 물갈이된 후 새로 제작된 가사로, 이해 13홈런을 치고 지명타자 베스트나인을 수상하며 간만에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나 시즌 종료 후 응원가가 전면 교체되면서 1년짜리 가사로 그쳤다.[15] 俺達の福浦 一打に全て込めて 不屈の闘志を見せてくれ 千葉の誇り胸に(우리들의 후쿠우라 이 한방에 모든 걸 담아 불굴의 투지를 보여다오 치바의 긍지를 가슴에) / 상술한 MVP 사건 이후 응원단, 응원가가 전면 물갈이되며 새로 만들어진 곡으로, 팀의 연고지이자 후쿠우라의 고향인 치바의 긍지를 강조한 것이 특징인 응원가로 치바 롯데 굴지의 응원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6] 모교인 나라시노 고등학교의 응원가로, 후쿠우라! 2번 - (발음을 끊으며) "후! 쿠! 우! 라!" - 후쿠우라! - Let's Go! 3번 순으로 응원 콜을 외치는 방식으로 불렸다. 일종의 서브 응원가로 나라시노 고등학교 응원단이 구장에 초청될 때마다 불려지던 응원가였으며 은퇴시합에서도 이 응원가가 연주되었다.[17] 즉 가장 좁은 형태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태어난 지역에서 초중고를 나오고 태어난 지역의 연고지 팀에 입단하여 그 팀에서 은퇴할 때까지 뼈를 묻는다는 조건에 제대로 부합하는 선수이다. 참고로 그 순수혈통 따지는 요미우리에서도 오 사다하루만이 저 조건을 다 지켰었다.(이제는 팀 옮겨서 오 사다하루도 순혈이 아니지만) 그런데 그 오 사다하루는 화교다.[18] 드래프트 동기가 쟁쟁한 상위픽 코쿠보 히로키, 오카지마 히데키, 마츠이 카즈오, 야부 케이이치다. 이 중에서도 명구회 회원자격을 보유한 사람이 코쿠보와 마츠이.[19] 후쿠우라를 제외하고 일본프로야구 역대 전체 최하위픽 중 몇 년뿐이라도 주전으로 뛴 선수는 1966년 한큐에 지명받은 사카모토 토시조(2차 5라운드), 1968년 롯데에 지명받은 이이즈카 요시히로(14라운드), 1990년에 다이에에 지명받은 타바타 카즈야(10라운드) 정도밖에 없었다. 이중 사카모토 토시조는 통산 1303안타, 도루왕 1회 및 통산 243도루, 베스트나인 4회 수상을 달성하며 후쿠우라 이전까지 가장 출중한 커리어를 쌓은 최하위픽으로 평가받았으나 타바타는 다이에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이적한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노무라 카츠야 감독의 눈에 들어 1997-98시즌에 풀타임 선발로 27승을 거둔 뒤 다시 성적이 나빠지면서 킨테츠, 요미우리를 거쳐 2001년에 은퇴했고, 이이즈카는 집시 롯데 시절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면서 통산 171도루를 기록했으나 규정타석에 아쉽게 미달한 채 타율 .306을 기록한 1977년을 제외하면 타격에선 통산 593안타, 12홈런으로 그다지 돋보이는 성적을 거두진 못했다.[20] 사실 사카모토, 이이즈카, 타바타 셋과 후쿠우라를 제외하고도 10년 이상 프로에서 버텨온 전체 최하위 지명자들은 몇 명 더 있다. 하지만 이런 선수들은 다들 만년백업이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방출만 안 당했을 뿐이지 1군에 자주 올라온 선수는 없다고 봐도 되는 수준. 그나마 백업으로라도 자주 보인 전체 최하위 지명자 중 최근에 뛰었던 선수로는 미와 마사요시가 있다.(야쿠르트가 2007년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6라운드로 지명하여 12년 간 418경기에 출장하고 2019년에 35세로 은퇴했다. 주 포지션은 외야수였으니 1시즌 당 40경기도 못 나왔다. 즉 정말 수비 유틸로 가늘고 길게 버텨온 셈.)[21] 1994년에 코치가 동갑내기 동기 오노 신고와 함께 타격 테스트를 시켜보았는데, 후쿠우라는 타자로의 가능성이 보인다고 타자로 전향시켰고 오노는 타자로써는 어려울 것 같다고 판단하여 그대로 투수를 시켰는데 결국 후술하겠지만 오노 역시 주전 투수 자리를 꿰차면서 둘 다 해피엔딩을 맞았다.[22] 이 와중에 장타자보다는 중장거리 교타자 스타일임에도 불구하고 1루수로 정착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좌완투수 출신이었기 때문. 후쿠우라 본인도 1루수와 외야수밖에 못 하는데 자신이 타자로 잘 하게 될지 의구심을 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좌익수마저 못 하고 1루수만 전문으로 하게 된 이유는 바로 드럽게 느린 발과 소녀어깨. 2000~2001년에 주로 대수비 위주로 외야수에 76경기 출전했는데 수비율이 .950을 찍을 정도로 못했다. 외야수는 수비실책이 적어 수비율이 .980 정도여도 수비 못 한다는 소리 듣는데 후쿠우라는 .950을 찍었으니 단순히 못하는 것을 넘어서 사실상 불가능한 선수를 세워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23] 결국 이승엽은 수비를 보장받기 위해 연봉이 1억엔 넘게 삭감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요미우리로 이적했다.[24] 똑딱이 1루수라는 말도 있는데, 이승엽이 들어오기 직전인 2003년에는 20홈런을 넘겼고, 10홈런 이상 친 해도 몇 차례 존재하는 데다 2루타도 꽤 많이 쳤던 나름 장타력을 보유한 타자였다. 다만 하다 못해 3루수 정도만 됐어도 준수한 중장거리포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통산성적을 보면 역시 1루수로서는 아쉬운 성적. 거기다 2011년부터 반발력이 현저히 적어진 공인구가 새로이 도입되면서 그 영향 때문에 2011년엔 작년 기록한 13홈런에서 두 자릿수가 지워진 3홈런밖에 기록하지 못하였고, 2012년부터는 아예 이대형 수준의 똑딱이가 되어 버리면서 주전 자리에서 밀려나 버렸다. 안 그래도 원래도 1루수로썬 그닥이었고 노쇠화로 심하게 하락한 장타력이 공인구 도입으로 고인이 되다시피 하면서 2016년까지 6년 동안 386경기에 출장하면서 홈런을 2개밖에 못 쳤다.[25] 하지만 노쇠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2010년에는 수비력이 썩 좋지 못한 김태균에게 밀려 지명타자로 나서는 일이 많았다. 다만 이 해 규정타석에 미달하긴 했어도 13홈런으로 어느 정도 부활에 성공하며 생애 첫 베스트나인을 지명타자 부문으로 수상했다. 참고로 수위타자를 수상한 2001년엔 오가사와라 미치히로가 전시합 출장에 타율 .339/OPS .989 32홈런 86타점, 필딩률 .997으로 타율을 빼면 후쿠우라보다 공수 양면에서 훨씬 더 좋은 성적을 기록해서 베스트나인, 골든글러브를 둘 다 내줘야 했다.[26] 같은 포지션에 좌투좌타인 오마츠 쇼이츠도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인해 2016년 단 한경기도 뛰지 못하고 방출되었다.[27] 현재 치바롯데에서 1루수로 자주 나오는 선수들 중 네모토 슌이치는 센터라인 출신이다 보니 식물타격이고 이노우에 세이야는 2군 본즈라서 주전은 커녕 풀 시즌 뛰기도 힘든 상황이다. 따라서 후쿠우라가 아직도 1루수로 필요한 상황.[28] 2018년에 같이 가입조건을 충족시킨 선수로는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있다.[29] 이마에 토시아키는 아직 명구회 가시권이기 때문에 만약 FA로 팀을 떠나지만 않았어도 후쿠우라의 계보는 이마에가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마에가 FA로 떠났고, 밑 세대의 선수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오기노와 키요타는 풀 시즌을 제대로 뛴 해가 없어서 명구회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밑의 카쿠나카 카츠야, 이노우에 세이야, 스즈키 다이치의 경우는 카쿠나카와 이노우에는 1군 정착이 너무 늦었고, 그나마 다이치가 명구회 가능성이 있는 편인데 다이치도 가진 툴이 애매하다는 이유로 자리보전이 잘 되지 않고 있는데다가 대졸이라 주전으로 발돋움한 시기가 늦었다는 점이 발목을 잡는다. 그보다 밑에는 타무라 타츠히로, 나카무라 쇼고, 후지오카 유다이 등이 고정 주전인데 타무라와 후지오카는 타격이 뛰어난 경쟁자가 나와서 자리를 빼앗길 가능성이 높은 편이고 나카무라는 1군 정착이 너무 늦었다.(92년생인데 2018년부터 주전으로 정착.) 따라서 한동안은 후쿠우라만큼의 경력을 남긴 롯데의 선수는 없을 것이다.[30] 투수 쪽으로 돌리자면 후쿠우라만큼의 임팩트가 있는 선수가 아예 없다. 일단 현재 중심투수들을 보자면 선발 중 이시카와 아유무는 일시적인 부진인지 하락세인지 알 수 없으나 초반 몇 년을 제외하면 계속 예전만큼의 성적이 나와주지 않으며 와쿠이 히데아키는 FA 이적생이라 후쿠우라만큼의 대우는 힘들 것이다. 그 외에 오오타니 토모히사, 마츠나가 타카히로, 마스다 나오야, 우치 타츠야, 카라카와 유키 등은 괜찮은 불펜투수지만 임팩트가 없다. 신인이나 어린 투수들을 보자면 후타키 코타, 타네이치 아츠키, 이와시타 다이키, 아리요시 유키 등이 잘 던져주고 있는데 아리요시는 데뷔가 한국나이로 27살(심지어 빠른이라 사실상 28살이다.)이라 신인은 신인인데 서비스타임이 짧아서 큰 커리어를 남기기가 힘들다. 그러면 부상 없이 꾸준히 롱런해서 명구회, 혹은 그에 준하는 훌륭한 커리어를 남길 가능성이 있는 투수는 끽해야 후타키 코타부터 나온다.[31] 오전 10시 30분 직전에 터졌는데 오후 2시가 되도록 서버가 복구가 안 되고 있다. 물론 중간중간에 아주아주 낮은 확률로 예매가 가능하다 보니 표는 느리게 느리게 줄어드는 상황이였다.[32] 이날 경기는 연고지 팬 중에서도 표를 못 구해서 못 간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참고로 응원단도 홈 응원단 뿐만 아니라 전국의 응원단이 다 올 만큼 성황리에 치러진 경기였다.[33] 또한 동기에 동갑내기인 후쿠우라, 오노, 오오츠카, 나이는 많지만 입단 동기였던 모로즈미까지 4명은 은퇴 후에도 롯데를 떠나지 않으면서 원클럽맨으로 아직까지 활동하고 있다. 전형적인 롯데의 성골 라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34] 사실 이미 치바 롯데에서 선수, 코치, 감독 원클럽맨 사례는 니시무라 노리후미라는 전례가 있긴 했다. 대신 니시무라는 고향이 치바가 아니었으며 롯데 감독을 내려놓은 후 오릭스로 가며 원클럽맨 칭호를 내려놓았다.[35] 즉 아웃 중 내야뜬공아웃 비율이 높다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내야뜬공아웃을 가장 많이 쳤다는 것이다.[36] 즉 내야안타가 아닌 안타, 외야수 플라이아웃, 홈런.[37] 1군 수석코치를 거쳐 현재는 롯데 2군 감독을 역임하고 있다.[38] 당시에는 0도루 타격왕이 상당히 드문 케이스라 화제가 되었지만, 이후 세리그에서도 아베 신노스케미야자키 토시로가 해당 기록을 차지하였다.[39] 2002~2004년 각 2개씩[40] 팀에서 아예 꼴찌 수준이다. 50미터 달리기는 7초를 넘기며 이대호와 경쟁하는 수준이다. 거기다가 후쿠우라는 좌타다,[41] 서용빈은 레벨 스윙을 통한 생산성에만 주력한 타자고 박종윤은 커리어 하이 때 레벨 스윙를 장착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약한 파워를 극단적인 어퍼스윙으로 극복해내는 타자이며 채태인은 서용빈과 비슷한 레벨 스윙에 라이너성 타구에 주력하지만 발사각이 더 높고 파워가 좋아 두 자릿 수 홈런을 곁들이는 타자이다.[42] 2011년 즈음부터 안 쓴다. 응원단이 이 즈음에 프런트와 싸우면서 물갈이돼서 그렇다.[43] 후쿠우라 카즈야와 함께 신인 시절 타자 전향을 염두에 두고 배팅 테스트를 했던 투수. 근데 후쿠우라와 달리 투수로써의 재능이 보였는지 투수를 계속했고, 일요일에 주로 등판하여 선데이 신고라는 별명을 얻고 프랜차이즈 스타로 성장하여 팀내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은퇴 후에는 스카우터를 하다가 현재는 롯데의 2군 투수코치를 맡고 있다.[44] 포지션은 외야수였는데 실력은 백업급이어서 많이 나오지는 못했으나(통산 737경기 출장) 롯데에서 17년 동안이나 뛴 나름 프랜차이즈라고 부를 만한 선수. 2010년 시즌 후 은퇴.[45] 현역 시절 끝내 터지지 못한 5툴 플레이어 유망주였다. 발도 빠르고 장타력도 중간 이상이었으나 야구센스가 심하게 안 좋아서 주루사를 엄청 당했다. 문제는 은퇴 이후 3루 주루코치를 맡으면서 현역 시절마냥 생각 없이 주자를 돌리다가 2019년 롯데의 홈 주루사를 무진장 양산하는 중.[46] 2라운더 타치카와도 고졸신인인데 중간에 타팀으로 이적했고 은퇴 후에는 롯데에서 일을 하지 않다 보니 친분에 대한 언급이 잘 안 나온다. 또한 입단 동기고 2020년 현재도 꾸준히 롯데에서 코치를 하면서 원클럽맨으로 남아있는 있는 모로즈미 켄지는 나이가 많아서(대졸사회인이라 6살 차이가 난다) 그런지 특별히 절친이라는 묘사는 없다.[47] 사실 2017년 이노모토 켄타로 등 롯데 선수단 내에서도 70번을 단 현역 선수가 있긴 있었다.[48] 에토 미사가 드라마에서 소프트볼 선수 역할을 맡았는데 타격폼이 후쿠우라와 비슷해서 개드립을 치는 것 영상[49] 얼굴 자체는 50~60년 전의 미남상을 선호하는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꽤 괜찮게 생겼다고 평가할 얼굴이다. 머리를 민 스타일도 나름 잘 소화하고. 그러나 21세기식 미적 기준으로는 꽃미남과는 거리가 먼데다가 탈모가 있다.[50] 예를 들면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51] 반대로 이구치 타다히토사토자키 토모야는 항상 돈을 더 내고 앞으로 가서 뒷자리에 앉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