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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모토 토모아키

가네모토 도모아키에서 넘어옴
카네모토 토모아키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5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카와카미 켄신
(주니치 드래곤즈)
카네모토 토모아키
(한신 타이거스)
후쿠도메 코스케
(주니치 드래곤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95, 2000, 2001, 2004~2006, 200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베스트나인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4년 센트럴 리그 최다 타점

파일:기네스 세계기록 로고.svg
Guinness World Records
Most consecutive matches played without missing an inning\
(프로 야구 최다 경기 연속 풀 이닝 출장)
대상 기록 장소 등재 시일
카네모토 토모아키
1\
일본
기네스 등재 기록 링크


보유 기록(NPB)
연속 경기 풀 이닝 출장 1,492경기
연속 타석 무병살타 1,002타석
}}} ||
카네모토 토모아키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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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fefe01><tablebgcolor=#fefe01> 파일:한신 타이거스 엠블럼.svg한신 타이거스
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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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555,#aaaaaa
1935년 ~ 현재
1대
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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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2대
이시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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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1939)
3대
마츠키
파일:일본 국기.svg
(1940~1941)
4대
와카바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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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44)
5대
후지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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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6대
와카바야시
파일:일본 국기.svg
(1947~1949)
7대
마츠키
파일:일본 국기.svg
(1950~1954)
8대
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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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9대
후지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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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1957)
10대
다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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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1959)
11대
가네다
파일:일본 국기.svg
(1960~1961)
12대
후지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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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1965)
13대
스기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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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14대
후지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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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1968)
15대
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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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16대
무라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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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972)
17대
가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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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1974)
18대
요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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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1977)
19대
고토
파일:일본 국기.svg
(1978)
20대
블레이싱게임
파일:미국 국기.svg
(1979~1980)
21대
나카니시
파일:일본 국기.svg
(1981)
22대
안도
파일:일본 국기.svg
(1982~1984)
23대
요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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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1987)
24대
무라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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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989)
25대
나카무라
파일:일본 국기.svg
(1990~1995)
26대
후지타
파일:일본 국기.svg
(1996)
27대
요시다
파일:일본 국기.svg
(1997~1998)
28대
노무라
파일:일본 국기.svg
(1999~2001)
29대
호시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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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2003)
30대
오카다
파일:일본 국기.svg
(2004~2008)
31대
마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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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11)
32대
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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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015)
33대
카네모토
파일:일본 국기.svg
(2016~2018)
34대
야노
파일:일본 국기.svg
(2019~2022)
35대
오카다
파일:일본 국기.svg
(2023~)
:일본 시리즈 우승 / ☆: 일본 시리즈 진출 / : 일본 시리즈(1950년) 이전 단일 리그 우승
한신 타이거스, 틀:한신 타이거스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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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10번
타카자와 히데아키
(1990~1991)
<colbgcolor=#b30000> 카네모토 토모아키
(1992~2002)
히가 토시미츠
(2004~2008)
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6번
데릭 화이트
(2002)
카네모토 토모아키
(2003~2012)
준영구결번
준영구결번 카네모토 토모아키
(2016~2018)
준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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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mage/410/2015/12/29/20151229_1359397_99_20151229101911.jpg
카네모토 토모아키[1]
金本知憲[2] | Tomoaki Kanemoto
생년월일 1968년 4월 3일 ([age(1968-04-03)]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미나미구
학력 코료 고등학교 - 토호쿠 복지대학
신체 180cm, 88kg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91년 드래프트 4순위 (히로시마)
소속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92~2002)
한신 타이거스 (2003~2012)
지도자 한신 타이거스 감독 (2016~2018)
등장곡 Darude - Sandstorm
응원가 히로시마 시절[3][4]
한신 시절 1번째(2003~2004)[5]
한신 시절 중반 이후(2005~2012)[6]

1. 개요2. 선수 시절
2.1. 연속 출장 기록, 그 빛과 그림자2.2. 은퇴
3. 연도별 기록4. 선수 은퇴 이후5. 한신 감독 시절
5.1. 2016시즌5.2. 2017시즌5.3. 2018시즌5.4. 감독 성적
6. 기타

[clearfix]

1. 개요

일본프로야구 선수 및 現 야구 해설자. 포지션은 외야수로 커리어 내내 주로 좌익수를 보았다. 등번호는 10번(히로시마) - 6번(한신).

재일교포 3세 출신으로,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86년에 봉황대기에 출장한 경력이 있으며 2001년 결혼과 동시에 일본으로 귀화했다.


2. 선수 시절

파일:external/m.sponichi.co.jp/G20120912004099250_view.jpg 파일:external/www.kjclub.com/6.jpg
카프의 달리는 4번타자 시절 한신의 철인 시절

코료 고등학교[7]-토호쿠 복지대학[8][9]을 졸업하고 1992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해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초창기에는 타격도 수비도[10] 못 미더운 모습이었지만, 강훈련 끝에 기량이 상승해 노무라 켄지로, 오가타 고이치, 마에다 토모노리, 에토 아키라 등과 함께 1990년대 중후반 카프 '붉은 악마 타선'의 한 축을 이루었다.[11]

2003년 호시노 센이치의 강력한 권유로 FA를 통해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였고[12], 이적한 뒤에는 2003, 2005년의 리그 우승에 공헌하는 등 2000년대 중반의 한신 상승세의 일등공신이 되면서 오랜 기간 한신의 중심타자로 활약했다. 특히 만 37세의 나이로 .327/.429/.615 OPS 1.044 40홈런 125타점[13]을 기록하며 센트럴리그 MVP가 된 2005년의 활약이 그 백미였다.

통산 2,539안타, 476홈런, 1521타점, 사이클링 히트, 18년 연속 두자릿수 홈런 등 여러 모로 어마어마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안타, 홈런, 타점은 모두 헤이세이 시대의 일본프로야구 선수로서는[14] 최다. 젊었을 적에는 발도 빨라서 두 자릿수 도루도 여러 번 기록했고, 트리플 쓰리(3할-30홈런-30도루)를 기록한 시즌(2000년)도 있으며, 2001년엔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볼넷 기록 6위[15]에 해당하는 128볼넷을 기록하는 등 정말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였다. 한신으로 이적한 이후에는 출루[16]와 장타 생산에 주력하면서, 도루가 줄기는 했지만 30대 중반~40대에 접어드는 나이에도 20홈런 이상에 3-4-5급 비율스탯을 찍는 세리그 대표 강타자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2009년 4월에는 3연타석 홈런을 2번이나 기록하기도 했고영상, 1002타석 연속 무병살타 기록 등 은근히 희귀한 기록들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2.1. 연속 출장 기록, 그 빛과 그림자

그 중에서도 가장 특기할 기록이라면 연속 출장 기록인데, 1999년 7월 21일부터 2010년 4월 17일까지 1,492경기, 13,686이닝 동안 기록한 전(全) 이닝 연속 무교체 출장 기록은 세계 기록이며 이 기록이 중단된 후에도 2011년 4월 15일까지 1,766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달성했다. 대한민국 최장 기록이 돌격대 출신 철인이 기록한 1,009경기[17]이니 차원이 다른 셈. 게다가 그 돌격대 출신 철인도 막판에는 대타나 대수비 등으로만 나왔으니 전 이닝 연속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어쨌든 이는 일본의 철인 기누가사 사치오에 이은 NPB 역대 2위. 이 기록을 달성하는 와중에 왼손에 골절상을 입은 적이 있는데, 그 상태에서도 출장해 오른손만으로 스윙해 2안타를 날렸다든가, 후두부에 데드볼을 맞고 쓰러졌다가 다음 타석에 홈런을 날렸다든가 하는 전적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데드볼을 맞은 다음 타석에는 타율이 6할을 넘었다고 한다.

호시노 센이치 전 감독 왈, '가네모토는 몸 상태가 완벽하지 않을 때 120%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야말로 정신이 육체를 초월하는 인간으로 여겨지는 선수였다. 아예 대놓고 '철인'으로 캐릭터화할 정도.

파일:external/www.suruga-ya.jp/g6621664.jpg
한 번은 시즌 중 부상을 입어 데이비드 베컴, 웨인 루니가 사용했던 산소캡슐을 친히 이용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2010년에는 시즌 초기부터 어깨 부상으로 신음하며 제대로 공조차 던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결국 4월 18일 요코하마 원정 경기의 선발 멤버에서 제외됨으로써 1999년 7월 21일부터 계속된 '연속 풀 이닝 출장 기록'은 1,492경기에서 종지부를 끊게 되었다. 이날 한신의 스타팅 라인업 발표 장면, 4번 타자에 아라이 타카히로가 불릴 때부터 장내에 비명이 들리며 서서히 동요하더니, 사실상 마지막 8번 타자에 좌익수 카츠라기 이쿠로[18]가 불리며 카네모토의 선발 미출장이 확정되는 순간 장내의 비명과 동요가 절정에 다다른다.

김기태[19]가 연속경기 출장을 이어 가는 이유를 묻자 관중석을 가리키며 "난 저 분들을 위해 뛸 의무가 있으며,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뿐이다" 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일단 이 시합부터는 주로 대타로 출장하는 것으로 '연속 출장 기록'은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2010 시즌은 규정타석 미달. 규정타석 미달로 전 경기 출장한 사례는 NPB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러나, 2011년 시즌이 개막한 지 3경기 만인 4월 15일[20]에 연속 출장 기록은 중단되고 말았는데, 이날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나고야돔 원정경기 8회초 2사 주자 1루 상황에서 대타로 출장했으나 1루 주자가 도루자를 당하면서 타석이 증발, 이어진 8회말에 수비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빠지면서 기록상 출장하지 않은 것으로 처리되어 대기록에 마침표를 찍었다. 야구 규칙에서는 대타는 출루 또는 아웃으로 타격행위를 완료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수비수로 투입이 되어야 경기 출장이 인정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규칙의 빈틈을 탓하거나 도루하다 죽은 주자를 갈구지 않았고, 기록이 멈춘 것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인터뷰를 했으니 기록중단에 크게 미련을 가지지는 않는 듯하다. 항간에는 구단 높으신분들과 감독의 상의 하에 대주자에게 몰래 지시를 내려 무리한 도루를 지시해서 점점 활용도도 떨어지고 엔트리 낭비를 초래하는데 연속 출장을 이어가는 카네모토의 기록을 이쯤에서 엎어버리려고 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이로써 달성한 기록이 1,766경기 연속 출장.

사실 가네모토의 몸 상태는 2009년 이후부터 엉망이었던 데다 2010년부터는 송구 자체가 안 될 정도로 어깨 상태가 심각했다. 한때는 30도루를 기록했던 발도 엄청나게 느려져서 수비 범위도 극히 좁아졌고, 어떻게 플라이를 잡거나 좌익수 앞에 떨어진 공을 잡아도 백홈은 커녕 고작 3루까지도 공을 던질 수 없어 유격수[21]가 중계 플레이를 해야 했을 정도(참고). 60%도 안되는 몸 상태로 계속 연속출장을 시키는 것에 대해서 물론 대다수 팬들이야 "연속출장 끊기면 안돼!" 를 외쳤지만, 객관적으로 보는 소수의 팬들은 "이쯤에서 연속 출장을 중단하고 수술한 뒤 확실히 재활해서 오래오래 선수생활 하는 방향으로 가자"는 말도 있었다. 물론 가네모토의 연속출장이 상징하는 그것이 너무 강했기에 적극적으로 표명 안 했을 뿐이다.

지명타자가 있는 퍼시픽 리그였으면 그냥 붙박이 지명타자 시키면 끝났을 문제였지만, 한신의 소속 리그는 지명타자가 없는 센트럴 리그. 게다가 지명타자로 출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 게 가네모토의 경우 연속경기출장이 아니라 연속이닝출장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지명타자로 돌리면 연속 이닝출장 기록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실제로 한신 구단 측이 지명타자제도를 쓸 수 있는 교류전 기간 중에 가네모토의 몸상태를 고려해서 지명타자로 출전시키는 방법을 고려하고 리그 사무국 측에 지명타자로 출전하는 경우 연속이닝출장 기록이 인정되는지 문의했으나 사무국 측으로부터 "인정되지 않는다"는 답변을 듣고 할 수 없이 교류전에서도 좌익수 선발로 출전을 시켰다. 결국 꾸역꾸역 좌익수로 선발 출전하며 전 이닝 연속 출장기록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 수비부담이 적은 1루수로 돌리는 방법도 있었으나 가네모토 본인이 선수생활 내내 외야수였고 아무리 1루 수비가 부담이 덜하다고 해도 결코 현대 야구의 1루수가 결코 내야수의 송구만 받는 단순한 포지션이 아니라서 그렇게 생각처럼 뚝딱 수비위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선수생활 늘그막에 갑자기 1루수로 전환한다고 결코 수비부담이 주는 것도 아니고, 잘못하면 1루에 커다란 구멍을 만드는 결과만 초래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1루에는 FA로 이적해 온 같은 팀 출신의 후배 아라이 타카히로와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던 용병 크레이그 브라젤이 있었다.

2.2. 은퇴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42515c58.jpg

부진을 이어가던 도중 결국 2012년 9월,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드디어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당초 한신 타이거스에서 여러 기록들을 수립해낸 카네모토의 커리어와 2000년대 타이거스의 중흥기를 이끈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등번호인 6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기로 했으나, 카네모토 본인이 고사하면서 우선은 준영구결번으로 지정됐다. 참고로 한신의 6번은 나름 의미있는 번호인데, 한신 역사상 유일한 원클럽맨 명구회 회원인 후지타 타이라와 카네모토가 은퇴할 당시 감독이었던 와다 유타카가 현역 시절 썼던 번호이기도 하다.

한신 팬들은 이적 후 오랫동안 팀을 지탱해온 철인의 은퇴를 아쉬워하면서도 말년에 카네모토가 기록을 연장하느라 성적이 나빠진 것과 그동안 카네모토의 기록 문제 등으로 출장 기회를 많이 받지 못했던 다른 선수들의 대두를 기대하면서 '드디어 떠나는구나'하는 안도감을 느낀, 복잡한 심경을 가지게 하는 은퇴였다.

은퇴시합은 순위가 결정된 후 잔여시합인 10월 9일 고시엔 홈 경기에서 치뤘다. 마지막이고 순위가 결정된 만큼 이날만큼은 특별히 4번 좌익수로 선발출장했다.

이날은 4타수 1안타에 도루도 하나 하며 왕년의 철인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아라이 타카히로의 적시타로 홈까지 들어오며 득점도 기록하며 0-3으로 이겼다. 9회말 마지막 공이 또 좌익수 플라이였기에, 은퇴시합의 마지막 아웃을 본인이 처리하며 마지막까지 달리고 치고 수비하는 철인으로 선수 생활을 마쳤다. 이날 승리 투수는 랜디 메신저로 이날 시합으로 시즌 10승을 달성했다.

3. 연도별 기록

파일:NPB 로고.svg 카네모토 토모아키의 역대 NPB 기록
<rowcolor=#d9d9d9> 연도 소속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1992 히로
시마
5 5 0 0 0 0 1 0 0 0 2 .000 .250 .000 .250 -0.1
1993 42 95 17 3 0 4 9 9 0 5 16 .191 .242 .360 .602 -0.5
1994 90 293 69 14 2 17 41 43 2 31 64 .268 .345 .537 .882 3.1
1995 104 438 101 15 1 24 72 67 14 61 78 .274 .381 .515 .896 4.6
1996 126 511 127 18 2 27 84 72 18 77 104 .300 .407 .544 .951 5.7
1997 133 552 140 17 2 33 77 82 13 80 104 .301 .404 .559 .963 5.8
1998 133 573 126 33 3 21 77 74 9 68 94 .253 .347 .457 .804 3.4
1999 135 576 147 21 2 34 84 94 10 70 92 .293 .382 .546 .928 4.6
2000 136 588 156 20 2 30 96 90 30 80 101 .315 .415 .544 .959 6.3
2001 140 615 148 28 1 25 101 93 19 128 69 .314 .463 .536 .999 6.7
2002 140 604 148 30 2 29 80 84 8 60 99 .274 .348 .498 .846 3.1
<rowcolor=#000000> 연도 소속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2003 한신 140 632 154 24 2 19 94 77 18 93 89 .289 .399 .449 .848 5
2004 138 613 165 32 3 34 92 113 5 79 100 .317 .406 .589 .995 5.9
2005 146 662 183 35 3 40 120 125 3 98 86 .327 .429 .615 1.044 8.3
2006 146 634 165 24 4 26 85 98 2 79 98 .303 .393 .505 .891 5
2007 144 624 141 17 3 31 74 95 1 81 113 .265 .361 .482 .843 3.4
2008 144 623 164 33 2 27 87 108 2 77 99 .307 .392 .527 .919 5
2009 144 619 135 37 0 21 66 91 8 88 98 .261 .368 .454 .822 3.2
2010 144 396 85 12 0 16 39 45 1 39 90 .241 .321 .411 .732 0.2
2011 122 372 76 11 1 12 27 31 1 24 53 .218 .269 .359 .628 -1.4
2012 126 406 92 16 0 6 24 30 3 49 54 .258 .347 .360 .707 1.3
NPB 통산
(21시즌)
2578 10431 2539 440 37 476 1430 1521 167 1368 1703 .285 .382 .503 .884 78.7

4. 선수 은퇴 이후

2009년 이후부터 송구조차 못할 정도로 엉망이었던 오른쪽 어깨는 2013년 돼서야 수술을 했다고 한다.

은퇴 후에는 야구 지도자 활동을 하지 않고 방송 해설가나 게스트로 활동했다.

그러나 2015년 구단 창설 80주년 기념으로 우승을 목표로 내건 한신 타이거스가 9월까지 아슬아슬하게 1위를 지키다가 9월 부터 추락하면서 DTD를 시전. 최소한 리그 우승이 재계약의 필요조건이라는 와다 유타카 감독의 경질이 확실한 가운데 유력한 차기 감독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선수 은퇴 후에 그동안 벌어놓은 연봉의 상당액을 선수생활 동안 친하게 지내던 지인을 믿고 사업자금으로 빌려줬다가 파산하는 바람에 한푼도 못받고 다 날려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FA 등으로 상당한 액수를 벌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경제적으로 조금 힘든 상태라고...이 때문에 법정에 출석해서 증언도 해야만 했다. TV 쇼에 게스트로 자주 출연하는 이유가 그래서라고 한다. 선수시절 몸 혹사해 가면서 열심히 벌어서 늘그막에 좀 편하게 사시나 했더니. 감독 취임 후 전지훈련 일정 전에도 TV에 자주 나오고 있다.

그런데 2016년부터 와다 유타카 감독의 후임으로 차기 감독을 맡는다는 보도가 떴고, 스포츠 신문 1면에 대서특필됐다. 특히 닛칸스포츠, 스포니치뿐만 아니라 한신의 당기관지로 불리는 데일리스포츠에서도 이 소식이 1면으로 뜬 것으로 보아 차기 감독이 기정사실화된 듯.[22]

그리고 10월 17일, 한신의 차기 감독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이 떴다. 등번호는 선수 시절과 같은 6번.

5. 한신 감독 시절

우선, 한신 모기업 쪽에서는 3년 계약 기간 중에 2년은 꼴찌를 해도 좋으니 우승을 시켜 달라고 말을 하는 등, 가네모토에게 기대하고 있는 부분이 큰 상황이다. 우승은 일본 구단 통틀어 1번 밖에 하지 못했으니, 이제라도 제대로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는 듯 보이고, 그것이 카네모토와에 계약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일단 시즌 전의 기대치는 굉장히 높다. 선수 시절 혹독한 자기관리로 유명했던 만큼 와다 감독 시절의 뭔가 미적지근한 분위기를 화끈하게 일신할 것이라고 기대를 많이 하는 모양. 드래프트 때도 1순위로 지명한 다카야마 슌에게 "훈련은 꽤 힘들거니까 각오는 해두도록"이라는 메시지를 날리는 등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기대치를 반영하듯 한신은 연일 기자들을 몰고 다니며 스프링캠프의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다.

5.1. 2016시즌

매너리즘 기미가 보였던 팀 분위기를 화끈하게 일신하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 리빌딩을 추진한다는 의미에서 "초변혁"을 시즌 캐치프레이즈로 정했다. 3월 25일 교세라돔에서 벌어진 개막전에는 2-5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패배하면서 첫 단추를 잘 꿰메지는 못했으나, 신인선수 (와카토라,若虎)인 타카야마 슌이나 3년차 요코타 신타로를 테이블세터에 기용한 과감한 전략이 어느 정도 먹히고, 작전 역시 신인감독 치고는 잘 먹혀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개막 3연전을 2승 1패의 위닝시리즈로 마무리하는데 성공했다. 한신 팬들은 이제야 초변혁이 시작되는구나 하면서 기대를 하고 있는 중.

2016년 5월 31일 현재, 25승 25패 3무로 정확히 승률 0.500를 찍고 있으며 선두 히로시마를 3게임차로 뒤쫓았다. 그러나 6월에 접어들면서부터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모드를 보여주면서 5위까지 떨어졌다. 게다가 초변혁 운운 하면서 도리타니 다카시 등 노장들은 떨어진 성적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등 구단의 푸시를 받는 베테랑들의 성역은 건드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세대교체도 지지부진한 중이다. 참을성 없기로 유명한 팬덤 측에서는 슬슬 뭐가 초변혁이냐면서 비아냥도 나오는 중.

그래놓고 경기를 지면 경기 경험이 부족한 유망주들에게만 "패기가 없다", "근성이 부족하다", "한 타석 한 타석의 소중함을 모른다", "정신상태가 나약하다"등 정신론만 강조하면서 갈구는 중이다. 성적이 안 나오니까 애꿎은 유망주들에게만 책임을 묻고 1, 2군을 왕복시키면서 리빌딩도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평가다. 하는 거라고는 끌려가는 경기 중후반 덕아웃 앞에 선수들을 모아놓고 분발을 촉구하는 것 정도 밖에 없다.

그나마 야쿠르트가 떡실신급으로 나가떨어진 덕에 최하위는 면하고 있고 전반기 종료 기준 2위와의 승차를 10게임으로 벌린 히로시마를 제외하고 나머지 팀들이 다 고만고만해서 충분히 반등의 가능성이 있어 보였으나 7월 3일, 7월의 첫 시리즈였던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대결을 루징 시리즈로 마감하며 최하위로 추락했다. 이어 벌어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도 접전 끝에 연패하면서 최하위가 점점 굳어지고 있다. 그나마 7월 7일 게임은 무실점으로 이겼지만 그러고도 5위 야쿠르트와는 반 게임 차이로 꼴찌. 급기야 7월 8일 히로시마와의 경기에서는 후지나미 신타로가 초반부터 대량 실점한 데에 분노하여 8이닝 동안 무려 161구를 던지게 하는 징벌성 투구까지 시켰다. 후지나미는 8실점(6자책) 패전하면서 동시에 자력으론 리그 우승이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그보다 앞서 5월 17일 도리타니의 낙구경기를 망치자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관중들과 TV카메라가 지켜보고 있는데 괜히 옆에 있는 의자를 걷어차면서 화풀이를 하는 추태를 보이는 등 이제 겨우 감독생활 반년 정도 밖에 안 한 감독이 30년 전 수준의 사고방식을 가진 구닥다리 감독들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쯤되면 슬슬 주주총회에서 지금 한신의 끔찍한 상황에 대한 성토가 당연히 나올 듯 하다.[23]

결국 감독첫해 리그 4위를 기록. 꼴지는 면했지만[24] 처음 부임인데다가 프랜차이즈급 스타였으니까 수뇌부가 많이 이해해 주고 기회를 더 주려는 모습이다. 다음 시즌 이후 명예회복이 절실하다.

5.2. 2017시즌

부임 2년차인 2017년은 시즌전 오릭스의 주장이자 정신적 지주를 FA로 영입하며 공격 및 수비력를 보강하였다. 하지만 제 아무리 운동신경이 좋고 빠른발을 가졌다 하더라도 30대 중반이라는 적지않은 나이때문에 예전같지 않을수도있어 우려를 낳고있다.

3월 31일 히로시마에서 벌어진 친정 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원정 개막전에서는 양 팀 모두 난타전을 벌인끝에 승리하였으나, 그 후 3연패에 빠져 올시즌도 험난한 시즌이 예상된다.

4월 4일 야쿠르트와의 홈개막전에서는 후지나미 신타로가 던진 공이 하타케야마 가즈히로의 머리를 강타해 벤치 클리어링이 났는데 이 과정에서 블라디미르 발렌틴야노 아키히로 배터리코치간에 몸싸움을 목격해 발렌틴에게 달려들자 주위의 제지로 또하나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4월 내내 요미우리와 더불어 호시탐탐 선두자리를 위협하며 부단한 노력을 한끝에 5월 5일부터 시작된 히로시마와의 홈3연전을 스윕하며 선두로 올라섰다! 그러나 5월 중순들어 연패를 하고 히로시마가 다시 상승 분위기를 타자 선두자리를 빼앗겼다. 그 이후로도 히로시마가 사기유닛급 성적을 내는지라 올해도 리그 우승은 어려울 듯 하다. 한신답게 1위 탈환은 커녕 3위로 내려앉지 않을까 의심스러운 순간도 적잖이 있었으나, 그래도 3위권의 DeNA 및 요미우리와 4~5게임 정도의 차이를 두고 2위 자리를 지켰다.
결국 히로시마와의 큰 승차를 좁히지 못하고 홈에서 히로시마의 2연패를 지켜보게 되었으나, 9월 28일 DeNA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2년만에 클라이막스 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고, 30일에 요미우리를 꺾으며 2위를 확정지었다. 정규시즌 우승은 실패했으나 이 정도면 그나마 작년의 오명을 씻는 정도는 되었다 할 수 있겠지만...클라이막스 시리즈에서 3위 DeNA 상대로 1승 2패를 거두며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에 실패했다.
시즌종료 후에는, 당초 3년 계약으로 알려졌던 계약이 2년 계약이었고, 2020년까지 새로 3년 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5.3. 2018시즌

감독 지휘봉을 잡은지 3년째이건만, 나아진 게 하나도 없다. 아니 오히려 퇴보했다. 작년에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 유망주들은 퇴보해서 도로 벤치만 채우고 있고 중심 타선은 40이 넘은 후쿠도메와 36인 이토이가 차지하고 있다. 더 절망적인 건 30대 후반~40대의 두 베테랑과 나머지 타자들의 격차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는 것과 주전 야수 중 막내가 1991년생 우메노 류타로였다는 것. 결국 12개 구단 최악의 타선으로 히로시마를 제외한 나머지 센트럴리그 4팀과 함께 승률 5할 밑에서 서로 치고 받는 이전투구를 하면서 순위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이미 6월달에 열린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의 시선은 싸늘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시즌 끝나고 과연 이 성적으로 유임이 가능할지 아닐지가 관건이라 하겠다. 아마도 그래도 간신히 A클래스라도 들으면 본인은 간신히 유임이 될 수 있지만 본인의 요청으로 수석 겸 타격코치를 맡은 카타오카 아츠시[25]가 대신 책임을 뒤집어 쓰고 경질 될 가능성이 있고, 만약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도 실패하면 아마도 사이좋게 짐을 싸게 될 듯 하다.

결국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과 한신 프랜차이즈가 팀을 맡으면 성적이 망한다는 속설만을 증명하며 후반기 들어 실속을 거듭한 끝에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실패했고, 그것도 모자라 17년만의 리그 최하위라는 끔찍한 결과를 기록하고 말았다. 아직 계약기간이 2년 남았다지만 이런 결과로는 시즌 후 해임당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후 후속 기사들에서 나온 바로는 한신 구단 측에서 가네모토를 교체할 의사가 없다고 한다. 심지어 한신 팬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는 코칭 스탭 역시 한명의 교체도 없이 그대로 간다는 방침이라고. 당연히 한신 팬들의 반응은 안좋은 의미로 난리가 났다.

그러나 10월 11일에 한신이 가네모토의 사임을 발표했고(#), 주니치와의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26] 후임은 야노 아키히로 2군 감독.

5.4.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승률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16 한신 타이거스 143 64 76 3 .457 리그 4위 -
2017 143 78 61 4 .561 리그 2위 CS1 탈락
2018 143 62 79 2 .440 리그 6위 -
총계 429 204 216 9 .486 1CS1­

6. 기타

* 자기 몸관리에 철저하고 연속 출장 등의 세계 기록을 보유하고 있지만, 담배에 환장한 사람이기도 하다. 덕아웃에서 담배 피우다가 카메라에 제대로 잡힌적도 있고, '올해 담배를 끊어 줬으면 하는 사람 No.1'으로 꼽힌적도 있고 자기 라커룸에 소주를 놓고 산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의 눈에 낯익다는 걸 보면 진로 소주다. 박동희 기자의 리포트 몸관리에 철저한 덕에 긴 시간 동안 뛰며 출중한 기록을 남겼으나 골초라는 이면을 가진 점에선 29시즌을 뛰었던 투수 쿠도 키미야스와도 비슷한 유형.


[1] 귀화 전 한국명은 이름인 토모아키(知憲)의 한자를 그대로 읽은 김지헌(金知憲)으로 알려졌으나, 재일교포 야구계 원로 한재우의 인터뷰와 코료 고교 시절 등록명을 통해 김박성(金博成)으로 밝혀졌다.[2] 코료 고등학교 공식 사이트에 등재된 역대 졸업생 명단엔 카네모토의 등록명이 金本博成(1987년)로 등재되어 있는데, 이후 대학 시절에 현재의 이름으로 드래프트 지명을 받은 것으로 보아 고등학교 때까진 본명인 김박성을 통명으로 쓰다가 대학 진학 후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博成는 이름으로 쓸 경우 훈독으로 히로나리 혹은 히로시게로 읽히나 成를 '시게'로 읽는 경우는 많지 않아서 원래의 통명은 '카네모토 히로나리'일 가능성이 높다.[3] 전주:ミラクルアーチ狙え レッツゴー レッツゴー 金本(미라클 아치를 노려라 Let's Go Let's Go 카네모토)[4] 自慢のパワーで 敵を撃て ライトへレフトへ ミラクルホームラン(자랑하는 파워로 적을 쳐라 우측으로 좌측으로 미라클 홈런)[5] 打球がライトスタンドを ひとまたぎ それ行けチャンスだ金本 燃えろ金本(타구가 라이트 스탠드를 단번에 넘는다 나아가라 찬스다 카네모토 타올라라 카네모토) / 2001시즌까지 한신에서 뛰었던 호시노 오사무의 응원가를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했다. 2004년 응원가 제작을 주도하던 중호연합회가 저작권 문제로 해산됨과 동시에 기존 응원가들의 사용 중단이 결정되면서 시즌 종료 후 응원가가 변경되었다.[6] 鍛えたその身体 あふれる気迫 さぁここまで(それ向こうへ)ぶち込め ライトスタンドへ(단련해온 그 신체 넘치는 기백 자 여기까지(자 저 편으로) 날려라 라이트 스탠드에) / 2005년 응원단 체제 변경과 함께 새로 만들어진 응원가로 한신 시절 카네모토의 커리어하이 시기를 상징하는 응원가이다. 응원석의 위치에 따라 가사가 바뀌었는데 오른쪽 스탠드가 응원석일 경우에는 さぁここまで로, 오른쪽 스탠드 이외의 위치가 응원석일 경우에는 それ向こうへ로 바꿔 불렀다.[7]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에 단골로 출전하고 여러 차례 우승도 차지한 히로시마 지역의 야구 명문교다. 노무라 유스케, 코바야시 세이지 등 많은 프로 선수를 배출했다. 업셋의 상징인 사가키타의 기적의 제물이 되었던 학교이기도 했다.[8] 대학 진학 과정이 다소 순탄치 못했는데, 본래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호세이대학 진학을 계획했으나 당시 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이 8월에 있는 야구부 입단 테스트를 12월에 있다고 잘못 알려주는 바람에 테스트조차 치르지 못한 채 입학에 실패하여 재수를 선택했고, 1년 뒤 츄오대학 진학에 도전했으나 이번엔 츄오대학 야구부 감독이 직접 "재수생은 추천입학제가 없다"라고 말했음에도 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이 추천 제도로 뽑힐 테니 괜찮다고 사실과 정반대로 말한 걸 덜컥 믿어버려 또 다시 입학에 실패하면서 결국 일반입시를 통해 토호쿠 복지대학으로 진학했다. 본의 아니게 같은 사람에게 2번이나 속는 바람에(...) 대학 진학이 꼬여 버린 것. 여담으로 불확실한 정보긴 하나 zakzak발 기사에 의하면 이 당시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입단 테스트도 보았으나 실패했다고 한다.[9] 1년 선배로 사사키 카즈히로, 야노 아키히로, 동기로 사이토 타카시, 후배로 카도쿠라 켄 등이 있는 야구 강호이다. 명문대는 아니고 평범한 지방대학, 지잡대라고 불러줘도 무리없는 수준의 대학이지만 야구부만은 강해서 프로선수를 많이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학교다. 참고로 사사키와 야노는 카네모토와 동갑이지만 상술했듯 카네모토가 1년 재수를 하는 바람에 선배가 되었고, 사이토는 카네모토보다 1년 늦게 태어났으나 빠른 생일이라 동기가 되었다.[10] 패대기 송구를 자주 해 팀 내에서 별명이 '두더지 잡기'였다고 한다.[11] 여담으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에는 선동열 상대로 엄청나게 강했다. 아니, 히로시마 타자들이 선동열에게 무척 강했다.[12] 가네모토는 후배들을 위해 FA 잔류로 히로시마에 남는 길을 선택하려고 했지만, 금전적인 여유가 없는 히로시마는 전통적으로 FA 선언을 한 선수들을 잡지 않는 주의였다.[13] 여기에 더해 가네모토 다음 타자로 주로 나오던 이마오카 마코토(현 치바 롯데 마린즈 수석코치)는 0.279 29홈런 147타점을 기록했다. 더 무서운 건, 이 시즌 이마오카는 만루에서 상당히 강해서 만루 타율이 6할에 49타점이라는 것.[14] 범위를 해외 리그까지 넓히면 안타 수로는 넘사벽인 스즈키 이치로가 있고 마쓰이 히데키, 마쓰이 가즈오도 미일 통산 안타로는 카네모토를 살짝 앞선다. 홈런은 역시 마쓰이 히데키가 미일통산 500홈런을 넘겼고 카네모토의 바로 뒤에 불과 13년간 NPB에서만 464홈런을 깐 용병 터피 로즈가 있다. 키요하라 카즈히로는 통산 홈런 수가 카네모토보다 많지만 '헤이세이 시대'로만 한정하면 434홈런을 쳤다.[15] 참고로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볼넷 탑 10 기록 중 9개는 오 사다하루의 것인데, 그 사이에 끼어든 선수는 카네모토의 카프 후배인 마루 요시히로(공동 4위, 130볼넷 - 2017년)와 카네모토 뿐이다.[16] 2003~05 3년 연속 센트럴리그 최다 볼넷을 기록했고, 통산 1308개의 볼넷은 오 사다하루오치아이 히로미츠에 이은 일본프로야구 역대 3위의 기록이다.[17] 현역 중에는 황재균의 618경기. 2016 시즌 도중 부상으로 기록이 끊어졌다.[18] 1977년생으로 나름 장타력을 가진 외야수였으나 112안타, 14홈런을 기록한 2001년과 71안타, 9홈런을 기록한 2003년을 제외하면 주전으로 나온 해는 없었다. 원래는 오릭스였고 한신으로 이적한 후에는 주로 대타로 나왔다. 2008년에 땜빵 주전을 먹으면서 100경기 이상 나오기도 했지만 일반적인 포지션은 대타 요원. 2011년까지 뛰고 은퇴해서 닭꼬치집을 열었다.[19] 당시 김기태이승엽을 따라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들어와 이승엽의 보조 타격코치를 하다 2010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에서 코치를 하고 있었다.[20] 동일본 대지진으로 개막일이 4월 중순으로 밀렸다.[21] 공교롭게도 하술하듯 카네모토가 감독을 맡던 시절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고 기량이 크게 저하했음에도 연속출장 기록 때문에 계속해서 출장하며 팀 전력의 구멍이 되는 수모를 반복했다가 2020 시즌부터는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했다.[22] 하지만 이 소식이 나오기 이전 9월 23일에는 한신의 나카무라 카츠히로 GM이 호텔에서 급사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23] 일본기업의 주주총회는 회계연도의 마지막 분기인 1/4분기의 결산이 끝나고 시기적으로 교류전이 끝날 무렵에 행해진다. 일부러 교류전 종료 시점에 맞춰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교류전 종료 시점이 우연찮게 일본 기업들의 주주총회 시즌과 맞물려 들어간 것. 주주총회가 팀 사정이 더 나빠지기 전에 넘어간 덕분에 일단 2016년은 주주들의 성토를 피해갔다. 아직까지는 팬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스타출신에 겨우 감독생활 1년차인 초보 감독이고 2016년은 팀에서 성적보다는 리빌딩에 집중한다는 식의 분위기를 내비쳤기 때문에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다는 데에 주주들도 일단 암묵적으로 동의를 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큰 비난 없이 넘어갔지만 만약 다음 해 주주총회 때까지 변화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 그 때는 경질이다.[24] 5위는 야쿠르트, 최하위 6위는 주니치였다.[25] 2003년 우승 당시 카네모토, 히야마와 함께 한신 맹호타선을 이끈 멤버였다. 하지만 지도자로써는 카네모토보다도 욕을 몇배로 처먹는 순페이금지어 취급을 받는데 실제로 그가 손을 대는 타자들마다 죽을 쑤고 있고 덩달아 팀 성적도 내리막길이라서 욕이 안 나올 수가 없다. 시즌 중반에 카타오카의 코칭 스타일에 대해 기사가 나온 적이 있는데 장타력이 있건 없건 타자의 스타일이 어떻건간에 일단 2루수쪽 땅볼을 치게 하는 훈련을 하게 한다고 한다. 한신 관련 뉴스/동영상 댓글엔 거의 카타오카 욕이 태반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 비난받고 있다. 2023년 주니치 2군 감독으로 재임했으나 평판이 안 좋다.[26] 이 경기 이후 팬 폭언, 폭행 논란도 일어났으며 위에서 언급한 카타오카도 같이 사임했다.[27] 여기에 더해 리더십도 출중해 2021 시즌에는 주장을 달았다.[28] 사사키도 2021시즌에는 기교파 투수로 변신하여 시즌 내내 불펜투수로서 무패투구를 이어갔으나 마지막 등판에서 부진하는 바람에 자기 손으로 팀의 우승 실패를 결정짓고 말았다.[29] 1998년 9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