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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후지타 모토시 (1981~1983) ★★ | 12대 오 사다하루 (1984~1988) ★ | 13대 후지타 모토시 (1989~1992) ★★ | 14대 나가시마 시게오 (1993~2001) ★★★ | 15대 하라 타츠노리 (2002~200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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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보우치 미치노리 (1944)[1] | → | 후지모토 사다요시 (1946~1947) | → | 하세가와 노부요시 (1948) |
긴세이 스타즈 / 다이에이 스타즈 역대 감독 | ||||
츠보우치 미치노리 (1946~1947) | → | 후지모토 사다요시 (1948~1956) | → | 마츠키 켄지로 (1957) |
이름 | 후지모토 사다요시(藤本定義) |
생년월일 | 1904년 12월 20일 |
사망일 | 1981년 2월 18일 |
출생지 | 일본 에히메 현 마츠야마 시 |
투타 | 우투우타 |
포지션 | 투수 |
학력 | 마츠야마 상업학교 - 와세다대학 |
프로경력 | 없음 |
지도자 경력 | 도쿄 철도국 감독 도쿄 교진군 감독(1936~1942) 퍼시픽 / 타이요 로빈스 감독(1946~1947) 긴세이 스타즈 / 다이에이 스타즈 감독(1948~1956)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1957~1959) 한신 타이거스 수석 겸 투수 코치(1960~1961) 한신 타이거스 감독(1961~1965, 1966~1968) |
1. 개요
일본 프로야구 지도자, 해설가이며 도쿄 교진군(이하 교진군)의 초대 감독[2]으로 교진군 초창기의 기틀을 잡은 인물이다.2. 선수 시절
마츠야마 상업학교와 와세다대학 야구부에서 투수로 활약했고, 1925년 가을 소케이센에 등판하여 승리를 거둔 적도 있다. 현역 시절에는 커브의 후지모토라 불릴 정도로 예리한 커브를 자랑하는 투수였다.와세다를 졸업한 후지모토는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도쿄 철도국 야구부 감독으로 취임하여 1935년 제1회 미국 원정에서 귀국 후 일본 전국 순회 경기를 벌이던 교진군를 상대로 2승을 거두었다. 당시 순회 경기에서 교진군은 36승 3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었지만 그 중 2패가 후지모토 감독이 이끌던 도쿄 철도국에게 당한 것이었다. 후지모토의 지도력을 알아본 교진군은 이듬해인 1936년 그를 감독으로 영입하였다.
3. 프로 감독 시절
3.1. 전쟁 전, 초대 교진군 감독
1936년 훗날의 일본 프로야구의 모체가 될 일본 직업야구 연맹이 출범하면서 프로야구 리그가 (처음엔 실업야구 리그에 가까운 형태이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후지모토의 교진군은 하계 대회에서 2승 5패로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지만,[3] 병역을 마친 미하라 오사무를 조감독 겸 선수로 팀에 복귀시키고 이른바 모린지(茂林寺) 구토 사건, 1000개의 펑고로 대표되는 선수들이 지쳐 퍼질 정도의 스파르타식 맹 훈련으로 팀 워크를 다진 결과, 그 해 추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교진군 창단 최초이자 일본프로야구의 공식적인 첫 우승 기록을 남겼다.[4]
이후 후지모토는 7년, 9시즌[5] 동안 교진군 감독으로 7번의 우승을 거두며 교진군의 1차 황금기를 이끌었지만, 1942년 시즌을 끝으로 감독에서 물러났다. 교진군을 나온 후지모토는 아사히군 구단주 다무라 고마지로가 운영하던 섬유회사 다무라고마의 임원[6]으로 영입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 까지 근무했다. 사실 다무라 구단주가 후지모토를 불러들인 것은 장래에 아사히군의 감독으로 중용하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쟁 말엽인 1945년 아내를 잃고 이후 다무라의 먼 친척이던 여성과 재혼했다.
3.2. 전쟁 후
전쟁이 끝난 후 프로야구가 부활했고, 후지모토는 다무라의 의향대로 퍼시픽(아사히군의 후신)의 감독에 취임하면서 현장으로 돌아왔다. 한편으로 후지모토는 프로 선수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일본야구 선수회(일본 프로야구 선수회 전신)를 발족시켰고, 자신이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선수들이 최소한의 생활 여건을 마련하는데 노력했다. 그러나 감독으로서 승률 4할대 초중반에 머무르는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고, 결국 2년 만인 1947년[7] 시즌을 끝으로 감독에서 물러났다.
그 이듬해인 1948년에는 긴세이 스타즈[8] 감독으로 취임하여 1956년 까지 재임했지만 리그 3위가 최고 성적이었고, 1957~1959년엔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으로 적을 옮겨 팀을 2년 연속 승률 5할로 이끌고 요네다 테츠야를 발굴하는 성과를 보였지만, 1959년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사퇴하는 등 역시 눈에 띄는 성적은 거두지 못하면서 전쟁 전 명감독으로서의 이미지가 퇴색되는 듯 했다. 하지만 후지모토는 곧 교진의 전통적 라이벌 팀에서 그러한 눈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줬다.
1960년, 후지모토는 한신 타이거스[9]의 수석 겸 투수 코치로 입단하여 후배인 가네다 마사야스 감독을 보필했지만, 가네다가 1961년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사퇴하면서 후임 감독으로 취임했다. 이듬해인 1962년 후지모토는 타도 교진군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면서 교진군 시절 제자인 아오타 노보루 를 수석 코치로 영입하고 팀 전력을 끌어 올리는데 온 힘을 다하여 그 해 한신은 양대리그제 개시 이래 최초로 센트럴 리그 제패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룩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일본시리즈에서는 교진군 시절 제자였던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이 당시 프로 4년차이던 신진 강타자 장훈 등을 이끌고 이해 창단 후 첫 퍼시픽 리그 우승을 달성한 토에이 플라이어즈에 2승 1무 4패로 패퇴하며 고배를 마셨지만...[10]
후지모토는 2년 후인 1964년에도 한신을 2번째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일본시리즈에서 츠루오카 카즈토 감독이 이끄는 난카이 호크스에게 3승 4패로 고배를 맛보며 또다시 패퇴했다. 1965년 시즌 후 구단 총감독으로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후임 감독 스기시타 시게루가 시즌 도중인 1966년 8월에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면서 후지모토가 감독으로 복귀하여 1968년까지 팀을 이끌었다.
1968년 시즌 종료 후 후지모토는 한신 감독을 끝으로 그라운드를 완전히 떠났다. 감독 경력만 무려 29년으로 일본 프로야구 역대 최고이며, 미하라 오사무, 이시모토 슈이치와 함께 5개 구단에서 감독으로 재직하며 최다 감독재임 구단 수 타이 기록을 남겼다. 또한 프로 선수 커리어 없이 일본 프로야구의 1군 감독으로 재임했던 최후의 인물이기도 하다.
감독 통산 성적은 3200경기 출장, 1657승 1450패 93무승부, 승률 0.533이며, 1리그 시절 우승 7회, 양대 리그 시절 우승 2회를 기록했지만 일본시리즈 우승은 경험하지 못했다. 일본 야구계에서 통산 1000승 이상을 거두고도 일본 제일 경력이 없는 감독은 후지모토와 니시모토 유키오, 벳토 카오루 세 명뿐이다.
위에서 언급 했듯이 교진군 시절엔 엄격하고 매서운 호랑이 감독의 전형적인 인물이었지만 종전 이후 나이가 들면서 늙은 너구리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지략가 적인 면모가 돋보였다.
4. 이후
현장을 떠난 후지모토는 1970년 부터 호치 신문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고, 1974~1979년 에는 선 텔레비전의 해설가로 재직하며 주로 한큐 브레이브스 경기의 해설을 맡았다.1974년 야구 전당에 헌액되었다.
1981년 2월 18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6세.
5. 여담
- 자신이 투수 출신이라 그랬는지 투수들의 혹사를 굉장히 싫어했다. 투수 로테이션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던 프로야구 초창기부터 같은 상대팀과 2연전을 치를 경우, 1차전은 사와무라 에이지, 2차전은 빅토르 스타루힌 또는 마에카와 하치로를 차례로 등판시킨다와 같은 방식의 원초적 선발 로테이션을 확립하거나, 선발 투수에게는 사전에 등판할 날을 통지하여 준비할 시간을 주는 등 최대한 투수의 연투를 피하는 방향으로 마운드를 운영했고, 1957~1959년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 시절에 일본 프로야구 최초로 선발 로테이션을 도입하여 팀의 양대 에이스인 요네다 테츠야와 카지모토 타카오의 등판 간격을 일정하게 보장해 주는 등 투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 오죽하면 "30승 투수가 나온다는 것은 감독의 수치이다"라고 당시 에이스 투수들의 혹사에 대해 공공연히 비판할 정도였으니.
- 반면에 선발 투수과 중간계투, 마무리 투수로 이어지는 마운드 분업화는 선호하지 않았고, 선발 투수라면 무조건 완투해야 한다라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예컨대 한신이 처음으로 센트럴 리그를 제패한 1962년에 고야마 마사아키가 26완투, 무라야마 미노루가 23완투를 기록했고 2번째로 우승한 1964년에는 진 바키가 24경기를 완투했다. 아무래도 완투보다는 연투 쪽이 투수에게 타격이 더 크다고 판단한 듯. 그 당시 감독들은 전부 다 선발이라면 무조건 완투해야 된다고 생각을 다 하고 있기에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연투의 문제점을 남들보다 먼저 알았기에 어찌보면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라 볼 수 있다.
- 도쿄 철도국 감독 시절 통계부서에 근무하면서 열차 이용객수를 집계하는 업무를 맡기도 했다. 이 때의 경험이 후지모토가 프로 감독으로 재임할 때 투수 로테이션을 짜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몰수 게임을 당한 인물이기도 하다. 전쟁이 끝나고 1946년부터 프로야구가 부활했지만, 전쟁 이후의 혼란 속에서 기존 선수들과의 계약을 둘러싸고 각 구단 사이의 이해 관계가 엇갈렸다. 즉 프로야구가 중단된 시점에서 어느 한 팀에 소속되어 있던 선수들의 보유권을 놓고 "각 구단의 전쟁 이전의 선수 보유권을 인정해야 한다"라는 의견과 "전쟁 이후의 프로야구가 새롭게 출발하기 위하여 이전의 선수 보유권은 백지화해야 한다"라는 의견이 팽팽히 대립한 것이다.
1946년 퍼시픽 감독으로 야구계에 돌아온 후지모토는 후자를 지지하며 선수들의 구단 선택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이었고,[11] 따라서 후지모토는 자신의 생각대로 도쿄 쿄진군 시절 제자였던 빅토르 스타루힌, 시라이시 카츠미와 전쟁 이전 한신군 선수였던 후지이 이사무를 원 소속팀의 허가 없이 퍼시픽 선수로 영입했다. 이에 대해 일본야구연맹에서는 "연맹의 조사와 각 구단의 의견 취합 및 정리 전 까지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므로, 각 구단에서 자유 영입한 선수들의 출장은 당분간 보류해 달라"며 권고했지만, 조사가 예상 외로 장기화되었고 전쟁 전 스타 선수였던 스타루힌, 시라이시, 후지이의 출전을 희망하는 팬들의 목소리도 컸기 때문에 후지모토는 1946년 5월 20일 대 세네터스 전, 5월 23일과 26일 대 킨키 그레이트링 전, 5월 24일 대 한큐군 전 등 총 4경기에 시라이시와 후지이를 연맹 허가 없이 출장시키면서, 두 선수의 원 소속 구단 쿄진군과 오사카 타이거스(前 한신군)는 퍼시픽 구단과 후지모토를 연맹에 제소하기에 이르렀다.
후지모토는 전술한 각 구단의 일방적인 선수 해고와 전쟁 전 도쿄 쿄진군 소속이던 아오타 노보루, 마에카와 하치로도 한큐군과 계약을 맺고 시라이시나 후지이와 마찬가지로 경기에 출장했음에도 아무런 지적이 없었다는 점을 바탕으로 항변했지만, 그 해 10월 4일 연맹은 심사를 거쳐 "해당 선수들이 원 소속팀의 급여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퍼시픽 입단은 인정하겠지만, 시라이시와 후지이가 출전했던 4경기는 본 심사 이전의 시합이므로 전부 몰수 게임 처리한다"는 판정을 내렸고, 후지모토는 출장 정지 8일(10월 10일~18일)에 벌금 200엔의 징계를 받았다. 그나마 퍼시픽은 이미 문제의 4경기 중 3경기를 졌기 때문에 몰수 게임 판정 영향이 거의 없었지만 7대 4로 승리한 5월 26일의 킨키 그레이트링 전이 몰수패로 뒤집히면서 그 해 1승을 손해봐야 했고, 결국 골드스타에게 그 몰수패당한 1승 차이로 밀려서 주부닛폰과 공동 최하위로 시즌을 마쳤다. - 그런데 이 결정은 쿄진군이 스스로 판 무덤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앞서 언급한 5월 26일 경기 결과가 바뀐 덕분에 1승을 벌게 된 그레이트링은 그 해 65승 38패 2무 승률 .631로 전후 최초의 리그 우승 이라는 영예를 안은 반면, 쿄진군은 64승 39패 2무 승률 .621의 성적으로 그레이트링과 불과 1게임차 2위에 그쳤기 때문이다. 만약 퍼시픽의 몰수패 결정이 없었다면 교진군과 그레이트링 모두 64승 39패 2무 승률 .621로 동률이 되어 플레이오프로 우승팀을 가려야 했겠지만, 결국 그 몰수패로 인하여 쿄진군은 본의 아니게 라이벌 팀에게 천금같은 1승을 내주면서 전후 최초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선수들의 소속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리그 우승팀과 꼴찌팀을 바꿔버리는 나비 효과까지 부른 셈.
- 에나츠 유타카가 한신 타이거스의 초년병 시절 올스타전에 출장하여 당시 센트럴 리그 감독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의 지시로 3경기에 모두 등판했지만, 에나츠 자신은 혹사당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명 감독에게 인정받은것 같아 만족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올스타전이 끝나고 후반기 첫 한신과 요미우리의 경기 전에 후지모토 감독이 카와카미를 한신 벤치로 부르더니 "네 이놈 테츠!! 우리 유타카를 그렇게 막 굴리면 어쩌란 말이냐?! 이 멍청한 녀석아!!"라고 불같이 화를 내면서 에나츠를 올스타전 때 3연투 시킨 것에 대해 맹렬히 꾸짖었고 카와카미는 찍 소리도 못한 채 현역 시절 스승님의 꾸지람을 부동 자세로 순순히 받아 들였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 투수의 연투를 질색하던 후지모토가 손자같은 자기 팀 선수를 옛 제자가 올스타전에서 혹사시킨 것에 대해 분노하여 나이가 들면서 수그러진 호랑이 감독의 모습을 봉인 해제한 셈이었다.
사실 후지모토는 손자뻘의 에나츠를 무척 귀여워 했고 틈만 나면 에나츠와 차를 마시며 옛날 야구에 대해 이야기 해주는 것을 즐겼으며 에나츠도 후지모토를 인자한 할아버지 처럼 생각하며 따를 정도였지만, 후지모토가 눈을 부릅뜨고 길길이 뛰며 카와카미 감독을 힐책하는 장면을 본 에나츠는 "와 이렇게 무서운 분이셨구나"라며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 선수들에게는 매우 엄격한 모습을 보이며 도깨비 같은 존재였지만 그래도 엄격한 모습과는 별개로 선수들을 잘 챙겨주는 면이 있었고 특히 젊은 투수들을 유난히 귀여워 했다. 쿄진군 시절 부상으로 실력이 쇠퇴하는 바람에 냉대받던 사와무라 에이지가 군에 재입대 하기 전까지 그를 돌봐준 것을 비롯하여 동료들에게 외국인이라고 따돌림 당하던 빅토르 스타루힌을 감싸주며 그가 팀의 에이스로 발돋움 할 수 있도록 후원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12] 그리고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2년차 유망주이던 요네다 테츠야를 팀의 기둥 투수로 성장시켰고, 한신 타이거스 감독 시절엔 위에서 말했듯 에나츠 유타카를 손자처럼 아끼며 중용하기도 했다. 1979년 일본시리즈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이른바 에나츠의 21구로 창단 이래 최초로, 그리고 에나츠로서도 처음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을 거두자 후지모토는 히로시마의 우승 축하 연회장에 지팡이를 짚고 찾아와 에나츠를 "잘 했다, 잘 했어!!"라고 칭찬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한다.
[1]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1945년은 프로야구가 중단됨.[2] 도쿄 교진군의 전신인 대일본 도쿄 야구구락부는 1934년 창단하여 후지모토 이전에도 감독은 있었지만, 교진군에서는 일본 프로야구 공식전이 시작된 1936년부터 감독을 맡은 후지모토를 정식 초대 감독으로 인정하고 있다.[3] 당시 교진군 선수단이 제2회 미국 원정을 다녀온 지 얼마 안된 시점(이 원정 때문에 교진군은 이해 춘계리그에 불참했다)이라 피로감이 남아있던 탓도 있었다. 그나마 그 2승도 대도쿄군(후의 쇼치쿠 로빈스. 1952년 타이요 훼일즈와 합병)이 14전 14패, 즉 시즌 전패라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써내려가며 2승을 교진에게 주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 2경기마저 졌다면 오히려 교진이 전패팀이 될 뻔했다.[4] 1936년 춘/하계 리그는 당시 우승팀 등의 순위를 따로 정해놓지 않았기에 공식 기록엔 미포함된다.[5] 1936~1938년 까지 일본 프로야구는 하계, 추계의 2시즌으로 운영되었고 1939년부터는 단일 시즌으로 1944년까지 진행했다.[6] 정확한 직책은 다무라 대표의 비서였다.[7] 이 해 구단명이 타이요 로빈스로 변경되었다.[8] 1949년에 다이에이 스타즈로 구단명 변경.[9] 당시 구단명은 오사카 타이거스. 1961년 부터 한신 타이거스로 바뀌었다.[10] 그것도 초반 2경기는 한신이 먼저 이겼지만 3차전을 비긴 후 4~7차전을 내리 토에이에게 내준 것이었다. 장훈의 자서전에 따르면, 2차전을 마친 후 간사이에서 도쿄로 이동하는 야간 열차에 두 팀이 같이 탑승했는데 2승을 선취한 한신 선수단은 대부분 숙면을 취한 반면 2패로 몰린 토에이 선수들은 오히려 밤새도록 맥주를 마시고 왁자지껄 떠들면서 이동했다고 한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승자와 패자를 착각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선수들과 같은 칸에 타고 있던 토에이의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은 이런 시끄러운 상황에서 "다들 뭐하는 거냐. 그만하고 일찍 자라" 고 한마디 할 법 했지만, 자신의 방의 커튼을 닫은 채 도쿄에 도착할 때 까지 선수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즈하라는 나중에 장훈에게 "처음엔 '저 녀석들은 머리가 없는 건가 철이 덜 든건가?' 라는 생각도 했지만 '아니다, 저놈들의 젊음과 패기를 믿어보자. 여기서 울분을 털고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자.' 라는 마음으로 일부러 조용히 있었다" 며 털어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정이 일치한 건지, 결국 토에이는 3차전은 비겼지만 이후 4~7차전을 연달아 이기면서 처음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11] 사실 후지모토는 1944년 11월 프로야구 중단 및 각 구단 해산 시에 선수들의 향후 생계는 고려하지 않은 채 전부 일방적으로 해고해 놓고, 이제 와서 선수 보유권을 주장하는 구단 측 입장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12] 이 때문에 스타루힌은 후지모토를 아버지처럼 따르며 존경했고, 종전 후인 1946년부터 1953년까지 계속해서 후지모토의 휘하에서 선수로 뛸 정도였다. 이후 1954년 스타루힌이 타카하시 유니온즈의 이적 제의를 망설이며 후지모토와 계속 함께 있고 싶어했지만 후지모토는 "이제 자네가 선수로 뛸 날도 얼마 안 남았다. 타카하시는 계약금을 준다고 하니 가서 은퇴 이후를 준비하라"며 스타루힌을 설득했다. 결국 스타루힌은 후지모토의 곁을 떠나 타카하시로 소속을 옮겼고 그 때 받은 계약금으로 은퇴 후 미용실과 약국을 차려 노후를 대비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은퇴 후 얼마 안가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몰고 가던 도중 열차와 충돌하는 교통사고로 요절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