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word-break: keep-all"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69>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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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6298>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역대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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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오가와 준지 (2018~2019) | 22대 타카츠 신고 (2020~) ★★ | ||||
★:일본시리즈 우승 / ★: 센트럴리그 우승 |
이름 | 도바시 마사유키(土橋 正幸) |
출생 | 1935년 12월 5일 |
사망 | 2013년 8월 24일 (향년 77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생지 | 도쿄도 다이토구[1] |
체격 | 178cm, 78kg |
투타 | 우투우타 |
포지션 | 투수 |
학력 | 도쿄도립 니혼바시 고등학교 졸업 |
프로경력 | 토에이 플라이어즈 (1955~1967) |
지도자 경력 | 토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 투수코치, 2군 감독 (1969~1973) 닛타쿠홈 플라이어즈 감독 (1973)[2] 야쿠르트 스왈로즈 1군 투수코치, 감독 대행 (1984) 야쿠르트 스왈로즈 감독 (1984.6~1986)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1992) |
1962년 일본시리즈 MVP | |||||
미야모토 토시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도바시 마사유키 타네모 마사유키 (토에이 플라이어즈)[3] | →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
1. 개요
전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토에이 플라이어즈의 에이스로 활약한 투수였다. 플라이어즈 시절 마지막 감독이자 플라이어즈, 파이터즈 양 팀의 감독을 모두 지낸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2. 아마추어 시절
생선가게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서 전쟁이 끝난 후 중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하였다. 니혼바시 고등학교 졸업 이후 가업인 생선가게 일을 돕는 한편으로 아사쿠사 소재 스트립 극장 프랑스좌[4]가 운영하던 연식 사회인 야구팀 소속으로 활동하였고, 요미우리 신문이 주최하는 도쿄도내 연식야구 대회에서 다이토구 예선을 통과하여 고라쿠엔 구장 에서 열린 본선 1차전에서 전년도 우승팀인 후추 형무소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1954년 가을, 도바시는 친구의 권유로 토에이 플라이어즈 입단 테스트에 응시했다가 단박에 합격하며 프로에 입문하게 되었다. 당시 도바시는 생선가게에서 일할 때 신는 장화 차림으로 마운드에 올랐는데 다른 투수 응시생들은 30개 정도를 던져야 코치들이 합격 또는 불합격 판정을 내린 반면, 도바시는 10개만 투구했음에도 바로 합격을 외쳤다고 한다.
3. 프로 시절
계약금 없이 월봉 5천엔의 조건으로 토에이에 입단했지만, 합숙소 월 이용료가 6천엔 인지라 1958년 까지 4년 동안은 집에서 매달 1만엔 정도의 용돈을 받으며 생활을 꾸려나갔다. 당초 어머니는 도바시의 프로야구 입문을 결사 반대했지만, "3년만 뛰어보고 안 되면 집으로 돌아가겠다" 라며 조건을 걸고 계속 연습한 끝에 입단 3년만인 1957년 8월 1일, 대 킨테츠 펄스 경기에서 완봉승으로 데뷔 첫 승을 장식하고 그 해 26경기 등판에 5승 2패 평균자책 2.48로 가능성을 보였다.
이듬해인 1958년 시즌, 도바시는 54경기 에서 21승 16패, 평균자책 2.12 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토에이의 에이스로 자리매김 했고, 그 해 5월 31일 니시테츠 라이온즈 전에서 1회 2사 상황에 등장한 4번타자 오시타 히로시 부터 4회 1사에 나온 3번타자 나카니시 후토시 까지 삼진을 잡아내며 9타자 연속 탈삼진 이란 당시 일본 타이기록을 세우고,[5] 이날 1경기 16탈삼진으로 사와무라 에이지의 종전 기록인 15탈삼진을 경신하였다.[6] 1959년에는 올스타전 직전에 20승에 선착하며 신바람을 올렸지만, 후반기 이후 페이스가 떨어지며 7승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도바시는 스기우라 타다시(38승), 이나오 가즈히사(30승)에 이어 시즌 27승으로 다승 3위에 올랐고, 평균자책도 2.36으로 5위를 마크했다.
1960년 시즌 초반 컨디션 난조가 쉽게 회복되지 않으면서 12승 23패로 부진했지만, 도바시는 그 해 토에이에서 유일하게 두 자릿수 승수와 200이닝 이상을 기록한 투수였다. 그러나 토에이 구단은 성적이 영 좋지 않다며 그의 연봉을 10% 깎겠다고 하자 도바시는 크게 반발하였고, 마침 교진군의 코치이던 카와카미 테츠하루와 투수 후지타 모토시가 "교진으로 오지 않겠는가?" 라고 권유하여 도바시는 마음이 흔들렸다. 게다가 카와카미가 교진군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도바시의 이적은 구체화되는 듯 했지만, 해가 바뀐 1961년 토에이의 신임 감독으로 취임한 미즈하라 시게루가 "도바시 같은 에이스 없이 어떻게 야구를 하라는 거냐" 라며 그의 교진군 행을 반대하였고 직접 구단 측에 그의 연봉을 깎지 말아달라고 요청하였다.[7] 결국 도바시의 연봉은 동결되어 토에이에 잔류할 수 있었다.
1961년, 도바시는 63경기에 등판하여 30승 16패, 평균자책 1.90 으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지만 하필 니시테츠의 이나오 가즈히사가 당시 역대 시즌 최다승인 42승[8]에 평균자책 1.69로 1위를 차지하는 바람에 콩라인에 그쳤고(...), 이후 은퇴할 때 까지 시즌 타이틀과는 인연이 없었다.
다음 해인 1962년 도바시는 17승 14패에 평균자책 2.38로 전 시즌 보다 하락한 수치를 보였지만 여전히 팀의 에이스로 마운드를 이끌면서 한신 타이거스와의 1962년 일본시리즈에서 7경기 중 6경기에 등판하여 2승 1패를 거두면서 팀의 창단 이후 첫번째 일본시리즈 제패에 크게 공을 세웠다. 토에이가 3승 1무 2패로 앞선 7차전 10회초, 장훈의 안타와 진루타, 타네모 마사유키의 희생 플라이로 간신히 1점을 짜낸 후 도바시는 10회말 부터 등판하였지만, 한신의 후지이 에이지 에게 동점타를 맞고 말았다... 다행히 사이온지 아키오가 1대 1로 맞서던 12회초에 무라야마 미노루를 솔로포로 두들겼고,[9] 도바시는 12회말 한신 타선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면서 감격의 첫 일본 제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도바시는 팀 동료 타네모 마사유키와 함께 공동으로 시리즈 MVP를 수상하였다.
1963~1964년 2시즌 연속 20승을 거두며 7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마크한 도바시는 1965년 어깨 통증으로 인해 시즌 4승에 머물렀고, 1966년 시즌 도중 우측 옆구리 근육 파열로 시즌 아웃되는 불운을 겪으며 하락세로 돌아섰다. 1967년에도 우측 손목 부상과 양쪽 아킬레스건 통증으로 9경기 등판에 그쳤고, 결국 그 해를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12시즌 통산 455경기에 출장하여 162승 135패, 1562 탈삼진, 평균자책 2.66을 기록하였다. 도바시가 거둔 162승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전신을 포함한 프랜차이즈 개인 최다승 기록이다.
4. 지도자 시절
4.1. 토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
현역에서 은퇴한 도바시는 토에이에서 1969년 2군 투수코치, 1970~1971년 1군 투수코치를 역임하였고, 1972~1973년 토에이-닛타쿠홈의 2군 감독으로 재임 중 타미야 겐지로가 1973년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그 해 후기리그 부터 닛타쿠홈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이 때 도바시는 친한 후배이자 팀의 중심 타자인 장훈에게 "자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팀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다" 며 1군 수석코치 겸 타격코치 직을 제의하였고, 고민 끝에 장훈은 도바시의 청을 받아들여 플레잉 코치로 그를 보좌하였다. 미즈하라 감독 퇴임 이후 매년 하위권을 맴돌던 팀은 도바시가 나름 수완을 발휘하면서[10] 후기리그 3위로 오랜만에 A클래스를 달성하였지만,[11] 닛타쿠홈이 닛폰햄에 매각되면서 도바시는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후 후지 테레비와 닛폰 테레비의 해설가로 활동하였다.
4.2. 야쿠르트 스왈로즈
1984년 야쿠르트 스왈로즈 1군 투수코치로 영입되었는데, 감독이던 타케가미 시로와 수석코치 나카니시 후토시가 시즌 초반에 성적 부진과 건강문제 때문에 차례로 휴양을 선언하는 바람에 5월 22일 부터 감독 권한대행을 맡았고, 6월 15일 정식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도바시는 그 해 후반기 야쿠르트를 5할 이상의 승률로 이끌며 센트럴 리그 5위로 팀을 3년 연속 최하위의 위기에서 끌어내는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1985~1986년 야쿠르트는 2년 연속 꼴찌를 기록하며 도바시는 감독 직을 내려놓았다. 야쿠르트 시절 도바시는 유망주 히로사와 카츠미와 쿠리야마 히데키를 발굴하여 주전으로 육성한 바 있다.[12]
4.3. 닛폰햄 파이터즈
1987~1991년 후지 테레비 등의 야구 해설가로 활동한 도바시는 1992년 친정팀 닛폰햄 파이터즈의 감독을 맡아 그라운드로 돌아왔지만 닛폰햄 프런트, 특히 구단 상무이사 이던 오사와 케이지와 불화를 일으켰고 팀 성적도 5위에 그치며 계약기간이 1년 남았음에도 해임당하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도바시의 후임 감독은 오사와가 취임하였다.[13]
5. 이후
그라운드에서 완전히 물러난 도바시는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프로야구 마스터스 리그의 도쿄 드림즈 감독을 맡기도 했다. 그 외에 사와무라상 심사위원 및 심사위원장을 역임하였다.2012년 9월 근위축성측색경화증 진단을 받은 도바시는 자택에서 투병 생활을 이어가던 중 2013년 8월 24일, 도쿄도내의 병원에서 향년 77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 해 8월 27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선수단은 경기 전 유니폼 소매에 검은 리본을 달고 묵념으로 도바시의 명복을 빌었고, 같은 날 야쿠르트와 주니치 드래곤즈 경기가 개최된 진구 구장 에는 조기가 게양되었다.
6. 여담
- 지도자 시절 선수들을 자주 사랑의 매(?)로 다스리던 엄격한 스타일이었다. 도바시의 펀치에 몇 미터나 나가떨어진 선수도 있을 정도로 매운 주먹을 자랑했지만 한편으로 챙겨줄 때는 잘 챙겨주는 타입이라 도바시의 철권 통치에 대다수의 선수들은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 전형적인 에돗코(江戸っ子, 도쿄 토박이)이며, 선수와 감독, 코치직을 전부 도쿄 연고팀에서만 수행했다.[14] 야쿠르트 감독 시절 도바시의 에돗코 특유의 완고한 성격이 도쿄 연고임에도 불구하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밀려 변두리 구단이란 이미지가 강했던 야쿠르트와 맞아 떨어져서인지, 팀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팬들에게 인기는 많은 감독이었다.
- 평소 도쿄 사투리를 사용하여 히를 시로 발음하였고, 후지 테레비의 프로야구 뉴스 해설로 출연할 때 히로시마를 시로시마라고 하자 아나운서가 이를 지적하였는데 도바시는 화를 벌컥 내면서 그 이후로는 그냥 카프라고만 했다고 한다(...).
- 마작을 아주 좋아했다. 도바시가 닛폰햄 감독 시절 그의 휘하에서 선수로 뛰었던 니시자키 유키히로는 "감독님은 원정 시합 후 호텔에서 옷을 갈아입고 바로 마작방으로 갔기 때문에 코치들이 그를 따라 마작방까지 가서 경기 후 미팅을 하곤 했다(...)" 라고 회고한 바 있다.
[1] 출생 당시에는 도쿄부 도쿄시 아사쿠사구.[2] 후기리그 한정.[3] 일본 프로야구 사상 현재까지 유일한 일본시리즈 공동 MVP 수상이다.[4] 지금은 평범한 만담 극장으로 운영되고 있다.[5] 현재 연속타자 탈삼진 기록은 사사키 로키(롯데)가 2022년 4월 10일 세운 13타자 이며, 이는 일본을 넘어 메이저리그 까지 뛰어넘은 세계 기록이기도 하다. 이날 사사키는 퍼펙트 게임 까지 달성했다.[6] 1경기 최다 탈삼진은 1995년 4월 21일 기록한 노다 코지(오릭스)와 사사키 로키가 19개로 공동 1위이다(사사키는 앞서 언급한 13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과 퍼펙트 게임을 달성한 2022년 4월 10일 경기에서 수립).[7] 미즈하라는 토에이 구단주 오카와 히로시가 삼고초려 급 러브콜로 모셔온 인물이라 그만큼 구단에 대한 발언권도 강했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8] 차후 빅토르 스타루힌의 기록이 정정되면서 시즌 42승은 이나오와 스타루힌의 공동 기록이 되었다.[9] 믿노라 하던 강타자 장훈을 수비 강화 목적으로 바꿨는지라 타선의 힘이 빠진 상태에서 예상치 못한 일격을 날린 것이다. 사이온지가 홈런을 치기 전 장훈의 교체 야수가 범타를 치자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은 "장훈을 빼지 말걸 그랬어!" 라고 크게 탄식하기도 했다.[10] 도바시는 선수들의 의욕 고취를 위해 메리트 시스템을 도입하였고, 경기 때 수훈을 세운 선수들은 짭짤하게 용돈을 벌 수 있었다. 이것이 팀 성적으로 이어지기도 했고...[11] 그 해 전기리그의 부진으로 종합 성적은 5위였다.[12] 당시 선수 겸 타격코치 이던 와카마츠 츠토무가 쿠리야마의 스위치 히터 전향을 건의하자 도바시는 이를 찬성하였고, 이후 쿠리야마는 야쿠르트의 주전 중견수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13] 사실 감독으로 데려올 인물이 마땅치 않아 오사와가 마지못해 스스로 감독이 된 것이다.[14] 도바시가 감독을 역임한 닛폰햄은 2004년 시즌 홋카이도로 프랜차이즈를 이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