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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순수혈통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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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1군 도쿄 돔 · 2군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장 · 지방 홈구장 선 마린 스타디움 미야자키 | 과거 고라쿠엔 스타디움
홈 중계 채널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닛폰 테레비
주요 인물 감독 아베 신노스케 · 선수회장 오시로 타쿠미 · 주장 오카모토 카즈마
구단 상세 정보 역사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응원가 · 과거 응원가 · 유니폼 · 순혈주의 · 여담 · 전통의 일전 · 10.8 결전
도쿄 시리즈 · 2022년 센트럴 리그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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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예시
2.1. NPB의 다른 팀에서는?2.2. KBO에서는?
3. 정리4. 예외5. 해외파6. 감독 선임7. 비판8. 외국인 선수

1. 개요

일본프로야구요미우리 자이언츠에만 존재하는 불문율.

간단하게 말해 순혈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 출신이어야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군 감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미우리 순혈이 아니면 1군 코치나 2군, 3군 감독은 가능하지만 요미우리 1군 감독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게다가 이는 단순히 원 클럽 플레이어로서 오로지 요미우리에서만 선수 시절을 보내야만 하는 게 아니다. 선수 생활은 물론, 코칭 스태프 커리어까지 오로지 요미우리 한 팀을 위해 바쳐야만 감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KBO 리그의 KIA 타이거즈, 두산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나 K리그수원 삼성 블루윙즈, 라리가아틀레틱 빌바오[1]와 닮았지만 그 팀들과는 좀 방향이 다른 골품제이자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빡센 골품제이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수십년 역사상 이 골품제의 예외가 후지타 모토시 단 한 명이었을 정도.

이 탓에 오랜 구단 역사와 별개로 일본프로야구의 양대 리그 출범 이후 여태껏 요미우리의 지휘봉을 잡은 감독은 고작 9명에 불과하다. 거기에 더해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라는 조건까지 있으므로, 후술할 카토 켄 외에도 스타플레이어가 아니라서 감독 후보로도 못 언급된 선수는 한 트럭이며, 최근 대표적인 사례로 카메이 요시유키가 있다. 카메이는 1000안타도 넘기고 통산 OPS도 7할 이상인 꽤 성공적인 선수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2] 카메이 외에도 야마구치 테츠야 역시 요미우리에서 원클럽맨으로 뛰면서 홀드왕을 2번이나 차지하고 일본프로야구 통산 홀드 2위, 신인왕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마무리도 아닌 셋업 출신이라 그런지 감독으로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투수출신으로서 교진군 1군 감독이 되려면, 최소한 선수 시절 커리어 대부분을 에이스급 선발투수로 보냈어야 하는데, 야마구치는 커리어 대부분이 셋업맨이라서 이 조건에 해당되진 않는다.

물론 스타플레이어 출신은 좀 추상적인 기준이긴 하지만, 순혈 여부는 명백하기 때문에 절대적이다.

2. 예시

※우선 이 조건은 모두 스타플레이어 한정이다. 예를 들어 만년 백업이지만 요미우리에서 원클럽맨으로 선수-코치를 하는 선수도 없지는 않은데 이 선수들도 잘해야 5~6두품 취급. 1군 감독은 꿈도 꿀 수 없다. 대표적인 예시로 카토 켄이 있다. 18년 동안 요미우리에서만 뛰었지만 아베 신노스케에게 밀려 통산 185경기 출장(...)에 그친 백업 포수. 연평균 10경기 출전에 그칠만큼 백업으로도 중용되지 못한, 축구로 치면 제 3의 골키퍼 비슷한 포지션이었기에 감독 후보로 언급조차 되지 못했다. 다만 이 카토 켄마저도 은퇴 후인 2019년에 독립리그 코치를 1년 해서 애초에 순수혈통마저 애매해지긴 했다. KBO에서 비슷한 케이스를 찾으면 삼성의 만년 대주자 요원이던 강명구를 생각하면 될 듯. 그나마도 가와카미 데쓰하루 이후로는 요미우리의 스타플레이어 출신들만 감독이 되는 바람에, 최소한 요미우리에서 준 레귤러급은 되어야 감독 후보에 비빌까 말까한 수준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후술할 모든 예시 또한 골품제에 비유해 서술되었다.

추가로 이건 1군 감독 한정이며 2군 이하의 감독은 이 순혈주의 조건에 해당하지 않으나 2군과 3군 감독도 요미우리에 단 1년이라도 뛰었던 경력이 있었던 인물들[3]만 맡는 등의 불문율이 존재하는 듯 하다.

좀더 알기 쉽게 말하자면 요미우리 소속으로 레전드급의 활약을 펼쳤지만 다른 팀에 잠깐 몸담았던 경력이 있는 A와, 마찬가지로 레전드급이되 A보다는 조금 덜 잘했지만 계속해서 요미우리에만 몸담은 B가 있다면, A가 요미우리의 1군 감독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 반면 B는 조금 덜 잘했음에도 1군 감독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일단 타 구단에서 뛰다 요미우리에서 은퇴한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이 정도는 4두품 이하에 해당하며 어디가서 자이언츠 출신이라고 말도 못한다. 예를 들어 롯데 자이언츠에서 뛰다 말년에 몇 년만 삼성 라이온즈에서 뛴 최동원을 아무도 삼성 출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와 같다. 하지만 최동원의 사례와는 또 다른 게 선수 본인이 자이언츠에 애착을 가지고 있더라도 OB회 등에서 거의 허용을 안 하는 분위기. 물론 대놓고 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지만 알게 모르게 타 팀 출신들은 알아서 짜지는 분위기이고(...), OB들이 그나마 인정을 해줘야 주변에서도 자이언츠 출신으로 인정을 해주는 식이다.

4두품 이하 조건에서 팀에 웬만큼 공헌도가 높거나 압도적인 통산 성적을 쌓았을 경우 5두품 대접. 가네다 마사이치장훈이 이런 케이스이다. 이 둘은 그나마 일본 야구계에서 넘사벽의 업적을 남겼기에 그나마 요미우리 순혈은 아니더라도 공로자로서 인정은 해준다. 특히 가네다는 고작 5년만 뛰었는데도 요미우리가 그의 등번호인 34번을 영구결번 시켜줄 정도. 위에 언급한 국내에서 순혈을 따지는 두산 베어스나 K리그 수원 삼성 블루윙즈는 여기부터 감독이 가능하다.[4]

요미우리에서 20년 뛰고 선수 생활 막판에 1~2년 정도 다른 팀에서 뛰거나, 반대로 아주 어릴 때 팔려와서 평생을 요미우리맨으로 지냈어도 인정을 못 받는다. 이 정도면 6두품 취급. 즉 요미우리 기준이면 레알 마드리드 CF의 수호성인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5] 바르셀로나 FC리오넬 메시, NBA 시카고 불스마이클 조던조차 6두품 취급받는다는 소리. 그래도 이정도면 어디가서 요미우리 OB라고 말하고 다녀도 되고 또 대우는 그렇게 해준다. 그리고 본인의 능력 여하에 따라서는 코치까지도 할 수 있다. 명투수 니시모토 다카시, 통산 최다 희생타 기록 보유자인 카와이 마사히로 등이 이런 케이스. 최동원의 케이스를 대입하면 만약 롯데에서 최동원을 순혈로 인정 안 한다면 이 케이스로 해석 가능하다.[6] 삼성으로 치면 김시진, 양준혁, 성준, 진갑용 두산으로 치면 홍성흔, 안경현, 정재훈 LG로 치면 이상훈이 대충 이 케이스에 들어맞을 듯. 정확히 말하자면 양준혁, 이택근, 홍성흔은 잠깐 다른 팀을 다녀온 케이스이지만, 어차피 니시모토도 은퇴 직전 마지막 1년은 요미우리로 복귀해서 요미우리 소속으로 은퇴했다.

심지어는 선수 생활 내내 요미우리에서만 뛰다 은퇴를 했더라도 지도자 생활을 다른 팀에서 잠시라도 한 경우도 순혈로 인정 못 받는다. 이쯤 되면 진골 대접을 받는다. 삼성으로 치면 딱 이만수, 류중일, 전병호, 김재걸, 장태수, 두산으로 치면 전 감독인 김태형, LG로 치면 차명석 현 단장이나 서용빈 kt 2군 수석코치, 한화로 치면 한용덕, 이상군, 장종훈, 롯데로 치면 김민호, 김응국 정도가 되는 셈이다. 그래도 다른 팀 코치직에서 물러나면 코치로 다시 불러들이기도 하고 요미우리 OB회 회장직을 맡아서 팀 운영에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허용된다. 현 OB회 회장인 나카하타 키요시가 이런 케이스. 다른 피가 섞이면 대우가 내려간다는 점 또한 묘하게 골품제를 닮았다(...). 오 사다하루도 대만 국적이지만 요미우리 순혈로 간주되다가 1995년 다이에 호크스 감독직을 수락하여 자진하여 요미우리 순혈에서 진골로 강등되는 선택으로 세간에 적잖은 충격을 선사했다.[@] 참고로 구단 역사상 유일한 예외였던 후지타 모토시가 바로 이 케이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한들 범죄 등의 대형사고를 치는 순간 두품이고 뭐고 없다. 애초에 요미우리뿐만이 아닌 어느 구단에서도 진심으로 뼈저리게 반성하지 않는 이상 수뇌부, 팬들 모두에게 범죄 등으로 자신 및 구단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행위를 저지른 선수를 두품 운운하며 받아주는 경우는 없다. 마약 복용으로 체포된 키요하라 카즈히로가 대표적인 예시.[8]

다만 고향이 어딘지는 따지지 않는다. 출신지를 도쿄로 한정하면 감독을 선임할 수 없는 수준까지 가기 때문이고, 실제로도 없다. 애초에 현재 시점에서 저 기준까지 충족한 일본프로야구 선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아닌 치바 롯데 마린즈[9]의 후쿠우라 카즈야 정도밖에 없다[10]. 출신지까지 따지지 않는 건 요미우리가 전국구 구단을 지향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11]

독립리그 팀에서 뛰는 경우는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 독립리그를 전전할 클래스의 선수는 쿄진의 감독 후보로 꼽히지 않았고, 쿄진의 감독 후보인 선수는 쿄진에서 코치를 시켜주기 때문에 독립리그 코치를 역임할 가능성도 거의 없어서 감독 후보인 선수가 독립리그 경력 때문에 문제가 생길 확률은 앞으로도 희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2.1. NPB의 다른 팀에서는?

같은 일본프로야구 내 다른 11개 팀에서도 순수 성골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으로 어렵다.[12] 그나마 역사가 긴 한신 타이거스주니치 드래곤즈 정도가 수월한 편이고 그 외 다른 센트럴리그 팀들도 전반적으로 역사가 길어서 그런지 그나마 수월한 편이지만, 퍼시픽리그연고이전이나 모기업 변천 등이 워낙 많아서 이것까지 따지면 정말 없다시피 하다.

다만 해설자로 활동하는 경우는 조금 느슨한데 해설자 생활은 꼭 요미우리 계열인 니혼 테레비에서 안 해도 상관 없다. 실제로 하라 다쓰노리는 은퇴 후 해설자로 활동할 당시에는 주로 NHK에서 해설위원으로 활동했었다. 이건 또 어쩔 수 없는 게 친정팀인 요미우리의 코치 자리와 니혼 테레비의 해설자 자리는 한정이 돼 있는데[26] 해설자 생활까지 요미우리 계열사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 그 수많은 OB들더러 친정팀에서 코치를 하거나 니혼 테레비에서 해설을 하지 않으면 그냥 굶어 죽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그리고 NHK는 일본 내에서도 탑티어 위치에 있는 국가기간방송사라 니혼TV와의 비교가 불가능하며, 요미우리의 스프링캠프지 미야자키에서는 니혼TV가 온전히 안 나온다(...).

요미우리의 골품제는 사실 트레이드와 FA 등의 수단 외에는 국내 이적도 제한적이고 해외로의 선수 이동이 아주 흔하지는 않은 야구니깐 지켜질 수 있는 전통이다. 가령 축구 같이 이적이 더 개방적인 스포츠인 경우에서는 이런 조건으로 감독을 선임하는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교진군의 감독선임 이상의 순혈주의 선수선발 조건을 자랑하는 아틀레틱 클루브에서도 감독 선임에는 순혈주의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다. 그나마 축구계의 사례를 꼽아보면 베르더 브레멘에서 유소년 선수, 프로선수, 유소년 감독, 수석코치, 2군 감독을 거쳐 1군 감독을 한 토마스 샤프 정도나 이 경우에 속한다. 이 사람은 무려 41년이나 베르더 브레멘에서만 활동한 성골이었다. 그러나 2013년 이후에는 다른 팀들을 맡으면서 진골이 되었다. 또한 전 대한민국 국가대표 감독이었고 현재 인도네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인 신태용도 이 조건에 그나마 거의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선수생활 말년에 1년 동안 호주 A리그에서 단 1경기만 뛰고 은퇴한 것을 제외하면 오로지 성남 일화 천마에서만 선수생활을 했으며 K리그 역사상 올타임 넘버원급 공격형 미드필더로 꼽힐만큼 선수로서의 커리어도 뛰어났으며 지도자 생활도 국가대표팀으로 가기 전에는 역시 성남에서만 지도자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최소 6두품~진골 정도의 위치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교진군이 외국에서 뛴 커리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성골로 볼 여지도 있다. 서술되듯이 외국에서 뛴 선수가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관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약간 애매한 경우. 비슷하게 유럽인이 타 유럽 클럽으로 이적했다면 보스만 판결로 인해 빼박 6두품이다. 하지만 아예 이견 없는 요미우리식 성골 끝판왕은 의외로 축구에서 나왔다. 볼턴 원더러스의 냇 로프트하우스가 성골에 필요한 건 다 갖춘 인물. 임대 없이 진짜 한 클럽에서만 뛰었으며, 후쿠우라와 비슷하게 출생지도 볼턴이다. 말 그대로 성골의 최종보스. 로프트하우스 급은 아니지만 AS 로마의 전설 프란체스코 토티 역시 교진군의 사례에 부합한다. 로마 유스에서 데뷔해 2017년까지 로마에서만 뛰었으며 선수 커리어 역시 뛰어나고 주장도 역임했다. 그 후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로마의 디렉터로 재임했다. 이제는 에이전트 사업을 한다고 하니 일단은 성골 조건도 유지 중이다. 한국내에서도 2024년부터 고요한이 이 성골 조건에 맞춰졌다.[27]

2018년에는 이 골품제의 성골이었던 우츠미 테츠야세이부 라이온즈 소속이었던 스미타니 긴지로를 요미우리가 FA로 데려오면서 매몰차게 28인 보호명단에서 빼버렸고 우츠미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이부로 가게 되었다. 우츠미는 구단 사무실에 펑펑 울면서 찾아온뒤 기자회견을 하며 요미우리에서 선수생활을 끝내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해서 슬프다면서도 세이부에서 남은 선수생활을 보내면서 더 강해져 돌아오겠다는 인터뷰를 했다. 이로써 우츠미 테츠야도 차기 요미우리 감독 후보에서 완전히 나가리.(...) 현지 요미우리 팬들 반응은 선수생활 동안 좋은 커리어를 쌓고 사생활도 깨끗한데다가 한팀에 오래 제적한 선수를 요미우리가 FA영입을 이유로 보호명단에서 빼버린걸 놀라워하면서 우츠미가 여기에 빡쳐서 바로 은퇴해버릴걸로 예상했으나 우츠미가 세이부행을 받아들이자 두번 놀라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2019년 1월 7일에 마루 요시히로의 보상선수로 오뎅장수 초노 히사요시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떠나게 되자 요미우리 팬들은 또 놀랐다. 초노 히사요시 같은 경우엔 자기가 요미우리를 가고 싶어서 드래프트 재수 3수까지 해서 들어온 것이기에 더더욱 충격이 컸다. 일각에서는 감독으로 돌아온 하라 다쓰노리가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팀내 베테랑들을 쳐내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28]그리고 스미타니는 라쿠텐으로 갔다. 2022 시즌 종료 후 초노 히사요시는 무상 트레이드로 요미우리로 돌아왔다.

2021년에는 요미우리가 KBO 리그 출신 김기태 감독을 1군 타격코치로 내정하는 충공깽한 행보를 선보였다. 외국인이 1군 코치를 맡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2. KBO에서는?

이러한 요미우리식 골품제를 KBO 리그에 대입해보면 다음과 같다. 단, 군 입대로 상무나 경찰 야구단에서 뛴 것은 제외한다. 독립리그 팀에서 뛴 경우나 질롱 코리아처럼 선수단 전원이 파견 형식인 경우는 일단 외부 경력으로 간주한다.

아래에 다시 설명이 나오지만 출신 지역까지 따지는 것[50]은 현실적으로 곤란한데, 이 정도까지 완벽하게 충족하는 경우는 KBO 전체를 통틀어 봐도 강기웅, 염종석, 주형광, 김상훈, 김종국, 류지현, 박용택, 박정진, 이종열, 윤규진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여기에 좀 더 억지를 부려서 출신 학교까지 친다면 대학교를 서울에서 나온 김상훈, 김종국, 박정진 등도 걸리므로, 정말로 강기웅, 염종석, 주형광, 류지현, 박용택, 이종열, 윤규진 등 극히 일부 밖에 안 남는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국토 면적이 좁은 한국이라 많아 보일 뿐이지 좀더 큰 일본에서는 로컬 보이가 거의 없는 수준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역대 요미우리 감독 중에서 출신지까지 도쿄인 성골은 구단 전체 역사를 통틀어서 감독 취임 당시 기준으로 오 사다하루 단 한 명 뿐이라, 거기서도 출신 지역은 예외로 처리해 놓는다.[51]

참고로, KBO의 영구결번 기준을 요미우리의 순혈주의에 대입할 경우, 구단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성골부터 진골, 혹은 경우에 따라서 타의에 의해[52] 6두품이 된 케이스부터 영구결번을 노릴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 해외진출은 요미우리와 달리 이런 순혈주의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KBO 영구결번 문서 참조. 아마도 미국리그에 대한 관심이 없는 요미우리와 다르게 해외진출을 전력이탈보다는 구단의 쾌거로 보는 편이며, 포스팅 시스템의 경우는 이적료를 받을수 있고 국내 리턴도 원소속 구단으로만 할 수 있다보니 팬들의 인식이 전력이탈보다는 자랑스러운 스타 수출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더 강한 편이라 그렇다.[53]

3. 정리

프로야구에 입문하는 순간부터 인생 종치는 순간까지 요미우리의 유니폼[54]이 아닌 다른 프로팀의 유니폼을 1초라도 입었으면 요미우리에서는 절대로 순혈로 취급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키요하라 카즈히로는 요미우리의 감독이 될 수 없지만[55] 키요하라의 동기인 쿠와타 마스미는 요미우리의 감독이 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지만 쿠와타 역시 말년에 딱 한 시즌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바람에 감독을 하기엔 애매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도 쿠와타도 요미우리에 대한 충성심이 보통이 아니라는 점과 마쓰이와는 달리 메이저리그에 가기 직전 상황에 요미우리에서는 이미 효용 가치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본인의 개인적인 도전을 구단이 흔쾌히 수락했다는 점에서 그 처우도 주목거리지만 이미 하라 타츠노리에서 타카하시 요시노부로 감독 승계가 되었으나 타카하시가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게 되면서 다시 하라가 복귀한 상황이라 타카하시도 아직 지도자로 돌아올 찬스가 있고 그 뒤에도 아베 신노스케, 사카모토 하야토[56], 스가노 토모유키[57], 오카모토 카즈마 등등이 줄줄이 대기 중이라[58] 쿠와타도 요미우리 감독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59]

그런데 2022년 사카모토가 섹스파트너에게 항문성교낙태를 강요한 것이 주간지를 통해 전화 녹음내역까지 보도되는 대형사고를 터뜨리면서 지도자는 고사하고[60] 팀에서 축출당할 위기에 처했다.[61] 따라서 현재로썬 현역 중 아베와 스가노 순으로 차기 감독직이 유력한 상황이었고 2023년 시즌 종료와 함께 하라의 사임, 아베의 1군 감독 취임이 발표되었다.

요미우리의 골품제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원칙은 다른 팀 유니폼을 입게 되는 경위는 자의든 타의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즉, 본인의 의지로 제 발로 팀에서 나간 것이 아니라 구단의 뜻에 의해서 타구단으로 트레이드된 경우에도 가차없이 순혈이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 즉, 타구단으로 트레이드된 선수는 사실상 구단으로부터 감독 후보 탈락 선고를 받았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들면 불륜 소동을 일으켜 구단에서 쫓겨나다시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로 트레이드 된 니오카 토모히로와 2018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포수 스미타니 긴지로를 FA 영입하는 과정에서 보상선수로 지명된 우츠미 테츠야가 이런 케이스다. 우츠미는 고등학교 때부터 요미우리가 아니면 프로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그 때문에 고등학교 때 드래프트에서 오릭스에 지명되자 입단을 거부하고 사회인 야구팀인 도쿄가스 야구부에서 3년을 재수를 한 뒤에 본인의 의지대로 요미우리에 입단한 경력이 있다. 요미우리 입단 이후 2019년까지 현역 NPB 통산 2위[62]인 133승에 2012년 일본시리즈 MVP 등의 활약으로 막대한 공헌을 했음에도 방출 후 현역생활 연장을 위해서도 아니고 보상선수로 가는거라 우츠미가 감독직을 원했다면 그야말로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구단에서 효용가치가 떨어져서 방출 통보를 받은 선수 중에는 기량만 따지면 다른 팀으로 옮겨서 몇 년 정도는 충분히 더 뛸 수 있는데도 요미우리 순혈을 지키기 위해서 그냥 자진 은퇴의 길을 택하는 경우도 꽤 있다. 다만 앞에서 언급했듯 스타플레이어가 아닌 경우는 순혈이어도 감독 후보로도 꼽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오 사다하루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감독직을 수락했을 때, 일본 야구계는 이를 충격적인 뉴스로 받아들였다. 당시 다이에 GM이었던 네모토 리쿠오의 강력한 러브콜을 받고 호크스 감독직을 수락할 때까지 오 사다하루는 누가 뭐래도 카와카미 테츠하루, 나가시마 시게오와 더불어 요미우리의 상징이자 전설이었고 성골 중의 성골이었다. 비록 감독 시절(1983~1987) 센트럴리그 1회 우승에 5년 연속 A클래스를 달성했음에도 이에 만족하지 못한 구단 운영진들의 우승 지상주의에 밀려 5년 만에 감독직을 내놓아야 했지만, 그럼에도 해설가로서 성골 신분만 유지하고 있었으면 당시 감독이던 나가시마 시게오처럼 다시 한 번 요미우리의 감독직으로 복귀해서 권토중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63] 그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진골 신분으로 내려앉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워낙에 일본 전체에서 레전드 오브 레전드급인지라 레전드 대우는 변함이 없지만 이게 더 무서운 거다. 여전히 일본프로야구 전체에서 레전드 대우를 받으며 변함없는 존경의 대상이지만 그래봐야 요미우리 내부에서는 "본인이 감독하고 싶어서 스스로 다른 팀 유니폼을 입은 진골"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니.

4. 예외

우선 일본 국대 감독 경력은 순혈주의와 무관하다. 순혈주의를 명분으로 국대 감독 자리를 거절하면 구단 이미지가 곤란해지므로 구단도 국대 감독 경력은 논외로 친다. 실제로 WBC 일본 국대 감독 경력이 있는 하라 다쓰노리를 2019년에 다시 감독에 재취임시켰다.

어느 구단이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사실 초창기 감독이야 현 기준으로는 순혈이 아닐 수 밖에 없다. 고교 졸업 후 바로 교진군에 입단한 카와카미 테츠하루를 사실 상 최초의 순혈 감독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감독으로 선임된 후지타 모토시의 경우, 요미우리 순혈 대스타로 선수 생활을 마쳤으며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 밑에서 투수코치를 오랫동안 맡는 등 요미우리 최전성기를 받친 가신이었지만, 카와카미 감독 퇴진과 함께 교진군을 나와서 2년간 다이요 훼일즈 투수 코치를 역임한 경력이 있는데, 1980년 시즌 후 나가시마 시게오가 감독 직에서 사임하자마자 바로 감독 자리에 올랐다. 다른 팀, 그것도 같은 리그의 경쟁 구단에서 코치로 활동한 커리어가 있는, 진골임에도 요미우리 감독이 된 것이다.

당시로서도 이게 워낙 충격적인 일이라 팬들이나 팀 내 프런트, 선수단 내에서도 반대가 심했고, 이후 요미우리 감독을 그만둘 때까지 안팎에서 수도 없이 디스를 당해야 했다. 요미우리 감독 시절에 일본시리즈 우승도 했지만[65], 나가시마가 깔아준거 받아먹은 운장이란 폄하를 팬과 언론에게 숱하게 받았다. 그런데 그걸 막아주고 감독을 보호해야 할 프런트마저도 그 폄하에 맞장구 쳐주는 자들이 많아서 후지타의 편은 거의 없이 외로운 요미우리 감독 생활을 해야 했다. 어쨌든 1기 감독 시절 1981년에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고, 이후 요미우리 감독으로 재취임한 1989년에도 팀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래도 그가 2006년에 사망했을 때 구단장으로 그의 장례를 치르면서 요미우리도 그에 대한 대우는 나름대로 해줬다.

순혈주의 정립 이후에 다른 팀 지도자 경력이 있음에도 요미우리 감독이 된 인물은 후지타가 유일하다. 그러나 후지타는 신인왕-2년 연속 MVP와 다승왕 1회를 거머쥐었고 지금도 이어지는 18번 세습의 전통을 만들어낸 당대 교진이 자랑하는 대스타였고, 코치로 타 팀 유니폼을 입긴 했지만 그 기간이 2년으로 짧았으며, 지도자로서도 V9기간 동안 투수코치를 맡아 명투수코치로 소문난 우수한 지도자였다. 또한 당시 교진도 나가시마 체제에서 창단 첫 최하위를 겪는 등 팀이 크게 흔들리고 있어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었는데, 그렇다고 마땅한 감독 후보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기에 교진도 과감히 진골인 후지타를 앉힐 수 있었던 것. 단순히 "예외 있네?" "순수혈통주의라더니 별것 아니구만?" 정도가 아니라 그조차 극복한 후지타가 대단한 것이다.

뜬금없게도 와타나베 츠네오 요미우리 신문 회장이 요미우리에서 한 시즌도 뛴 적이 없는 스즈키 이치로에게 요미우리 감독 제안을 한 적이 두 번이나 있었다. 물론 덕담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설령 진지한 의도로 접근했더라도 일본 야구계에서의 이치로의 위상을 떠나서 요미우리 OB들이 반발하지 않을 리가 없었을테고, 본인이 정중하게 거절했다.

5. 해외파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케이스는 커리어의 후반을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보낸 마쓰이 히데키이다. 마쓰이는 비록 미국에 가서 다른 구단의 유니폼을 입긴 했지만 일본 국내에서는 요미우리 외에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어본 적이 없다. 만약 마쓰이가 일본 야구계로 복귀할 경우 요미우리의 감독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이 요미우리의 순혈주의의 정의와 요미우리로 대표되는 일본 프로야구의 메이저리그에 대한 인식이 확실하게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과연 메이저 리그에 진출한 것도 피에 불순물이 섞인 것으로 간주해서 내칠지 아니면 메이저 리그 경력은 예외로 인정해서 메이저 리그 경력이 있는 요미우리 OB는 순혈로 간주해서 받아들일지. 요미우리의 마쓰이에 대한 태도에 따라 콧대 높은 요미우리의 순혈주의도 메이저리그의 위엄 앞에서는 꼬리를 내릴지 아니면 "메이저리그? 그거 먹는 거냐?"라는 위엄을 과시할지 주목을 받는 부분이다.

일단 구단의 최종 의사결정권자인 와타나베 츠네오 요미우리 신문 회장은 2013년에 마쓰이가 차기 감독으로 최적의 인물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66] 마쓰이가 코치진으로 합류해서 감독 수업을 받는 것이 우선이긴 하겠지만 감독 선임에 대해서는 과연 OB회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문제. 그런데 정작 마쓰이는 2015년 이후 뉴욕 양키스 단장 특별 고문으로 있으면서 양키스 올드 타이머스 데이에도 출전하는 등 요미우리 자이언츠 OB가 아닌 뉴욕 양키스 OB로서의 행보와 자원봉사 활동만 하며 지도자 생활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다만 마쓰이 히데키는 국민영예상 수여식 당시 지도자를 목표로 하겠다고 말한 바 있고 내 마음에는 늘 요미우리가 존재한다고 말한 적도 있기 때문에 향후 어떤 행보를 보일지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67]

비슷한 케이스인 우에하라 고지 역시 성골 취급은 물건너간데다 강도 높은 요미우리 비판 때문에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대지진으로 인한 정전 사태 중에도 프로야구를 강행하려는 요미우리를 비판했는데 그 이면에는 입단 과정에서 구단 측의 야쿠자 동원 등 안 좋은 루머에다 이런저런 일로 요미우리에 대한 감정이 나빴던 우에하라의 작심이 한 몫한 듯한 느낌도 있는 듯하다. 다만 우에하라가 팬들의 예상을 뒤엎고 2018년 요미우리로 복귀를 해서 서로간의 서운했던 일들은 봉합을 한 듯 하기 때문에 아직은 알 수 없다.

비슷한 케이스였던 타카하시 히사노리는 2014년 시즌부터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서 뛰게 되어 성골에서 탈락했다.

6. 감독 선임

선수 시절에는 요미우리에서 뛰었지만 코치, 감독 생활은 다른 팀에서 한 히로오카 타츠로[68]이나 모리 마사아키[69] 등은 맡은 팀을 몇 번씩이나 우승으로 이끈 명장임에도 불구하고 요미우리가 침체기일 때조차 감독 인선에서 고려돼 본 적이 없다. 감독 선임을 위한 수뇌부 상황을 표현하자면, 구단 내외부에서 "요새 우승에서 좀 멀어진 거 같은데 이쯤 되면 능력도 검증된 히로오카나 모리를 감독으로 모셔와야 하지 않겠음?"이라고 변죽을 울리면 바로 "어디 감히 야쿠르트, 세이부 같은 평민 팀 유니폼에 손을 댄 작자들을!" 하고 반응이 나온다고 이해하면 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호리우치 츠네오는 감독으로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퇴 이후에도 요미우리의 코치직 이외에는 해설자를 제외한 그 어떤 자리에도 앉지 않았던 덕분에 감독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준비도 없이 단지 다른 팀 유니폼을 입어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호리우치 츠네오를 감독으로 내세웠다가 팀 역사에 남을 흑역사만 기록하고 말았다. 이 시절 호시노 센이치의 감독 선임설도 나왔는데 OB 회장인 카와카미 테츠하루를 위시한 요미우리 OB회가 발끈하면서 난리를 치는 통에 무산됐다. 하긴 선수 시절부터 안티 요미우리 이미지[70]로 먹고 살았고 일본시리즈 우승 경력도 없었으며[71], 요미우리 유니폼을 1초도 입어본 적이 없는 호시노 따위야...[72]라는 게 흔히들 생각하는 호시노의 이미지인데 호시노 센이치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호시노가 안티 요미우리의 스탠스를 취하는 건 일종의 쇼맨십이다. 호시노의 요미우리 콤플렉스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에 지명받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생각했던 사람이다. 실제로 호리우치 시절 팀이 난맥상을 보이고 호시노가 잠시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을 때 호시노의 반응은 평소에 보이던 안티 요미우리 열혈남의 반응이 아니라 "혹시나 선수로 요미우리 유니폼을 못 입어본 한을 감독으로 풀 기회가 오나"하는 상당히 솔깃해 하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은근히 자신이 요미우리의 순혈 전통을 타파하는 최초의 감독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감독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식의 의중을 내비치고는 했다. 결국 위에서 기술한대로 요미우리 OB회의 반대로 그냥 한때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것 때문에 요미우리는 팀이 서서히 가라앉는데도 융통성이 없다는 엄청난 비난을 들었다. 덧붙여서 호시노는 2018년에 사망했으므로 이젠 논외.

2012~15년에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지휘봉을 잡았던 나카하타 키요시도 비슷한 케이스이다. 미스터 자이언츠라고 불리던 나가시마 시게오의 골수 심복이던 나카하타도 오매불망 요미우리의 감독직만을 바라보며 다른 팀의 코치 제의를 거절하고 요미우리를 떠나 있을 때는 해설자 생활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인의 바람과는 다르게 결국 요미우리의 감독 자리가 자기랑 같이 뛰던 후배인 하라 다쓰노리로부터 자기보다 19년이나 프로 입단이 늦은 새카만 후배타카하시 요시노부로 이어질 조짐[73]이 보이자, 그대로 갔다간 평생 프로에서 감독 한 번 못해보고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꿩 대신 닭으로 평생의 꿈이던 요미우리의 감독 자리를 포기하고 요코하마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74] 이렇기 때문에 수많은 요미우리의 OB들이 다른 팀 감독이나 코치 자리를 마다하고 오로지 해설자나 평론가 생활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2012년 기준으로 하라 다쓰노리의 자리가 위태위태해지고 에가와 스구루의 수석 코치 영입을 둘러싸고 광풍이 한 차례 불었는데 정작 에가와는 '난 감독을 절대 안 할 거임' 하고 선을 그어버렸고[75] 아직 코치 생활 시작조차 안 한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경험을 충분히 쌓을 때까지 몸빵을 해줄 요미우리 감독 후보로는 한 번도 요미우리 이외에 유니폼을 입은 적이 없는 선수 중에서 60년대생 중에 사이토 마사키마키하라 히로미[76] 등이 꼽히고 있긴 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타카하시가 감독 이을 커리어를 쌓을 때까지 땜빵 후보일 뿐... 현직 코치들 가운데 순혈로는 오카자키 카오루와 무라타 신이치가 있지만 이 둘은 위의 2명에 비해서는 커리어가 평범하고 그저 준수한 수준이었던 선수들인지라 애매한 상황이다. 마키하라의 경우는 너무 현장을 오래 떠나있어서 과연 코치로서 복귀가 쉬울지도 의문 부호가 있기도 하고.

2014년, 평생의 숙적 한신에게 2014년 일본시리즈 진출권을 헌납한 후 하라 다쓰노리감독 경질설이 부각되면서 마쓰이 히데키를 감독이 아니라 코치라도 좋으니까 수뇌진으로 불러오려고 했으나, 마쓰이 본인이 오고 싶지 않다며 거절해서 무산되었다. 결국 2015시즌 후에 하라 감독이 사임하고 후임 감독 인선에 나섰는데 이전부터 예측된 대로 타카하시 요시노부를 감독 후보 1순위로 올려놓고 의사 타진 중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문제는 타카하시 본인이 선수 생활에 미련을 보이고 있다는 점과 하라 감독 집권기 동안 후계 구도를 명확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독은 고사하고 코치 수업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나가시마 시게오가 처음 감독 자리에 올랐을 때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단 측은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2015년 10월 23일 다카하시 요시노부가 신임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이 정도면 구단이 존속하는 한 순혈주의는 계속될 듯.[77]

그렇기 때문에 이 팀은 극소수의 엘리트급 선수들을 거의 신인 시절부터 감독 후보로 내정하고 철저한 이미지 관리와 제왕학 교육을 통해서 감독 후보를 양성하는 방법으로 저 조건을 만족하는 감독 수요를 충족하고 있다. 그런 엘리트급 선수가 연륜을 쌓으면서 기대를 충족하는 활약을 하는 경우 중참급으로 올라오면 팀의 리더 역할을 맡기고 고참이 돼서 선수생활 말년이 다가오면 거의 플레잉 코치에 준하는 대우를 해준다. 물론 선수가 현역에 미련을 보이지 않도록 은퇴시기는 최대한 선수의 의견을 존중해준다. 그리고 선수에서 은퇴하면 코치 혹은 해설자 생활을 거쳐서 야구를 보는 시각을 넓혀준 뒤 적당히 시기가 무르익으면 우리 나라의 수석코치급인 벤치코치 등의 자리에 앉혀서 현직 감독으로 부터 감독이 되기 위한 도제식 수업을 받게 한다. 그렇게 벤치 코치 자리에서 2~3년 정도 지나면 현임 감독도 어느 정도 장기 집권을 한 상태가 돼서 구단 안팎에서 슬슬 신진대사에 관한 얘기들이 나오기 시작하며 감독 교체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리고 현임 감독의 계약 임기가 만료되면 원만 퇴직의 형태로 정권을 이양하게 된다. 다카하시의 전임인 하라 다쓰노리가 이러한 코스를 제대로 밟은 경우이다.

그래서 다카하시 요시노부가 감독 재임 기간 동안 최하위 혹은 2년 연속 B클래스 등의 대형 사고를 치거나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판이다. 막장 행각으로 쉴드를 쳐줄 수가 없을 정도로 사회적 물의를 빚는 경우[78], 아니면 불의의 사고로 감독직 수행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지 않는 한 다음 감독 후보는 아베 신노스케, 그 다음 감독 후보는 사카모토 하야토[79] / 스가노 도모유키[80]로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할 정도이다.

물론 감독 교체가 항상 저렇게 진행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적 부진의 책임을 만만한 감독에게 뒤집어 씌우고 아무 생각 없이 잘라놓고 궁여지책으로 지도자 경험도 인성도 부족한 무능력자를 덜컥 감독 자리에 앉힌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카하시 요시노부 또한 현역 연장 의지가 있는 상태에서 하라 감독과 구단 프런트간의 알력에 의한 교체 움직임 때문에 제왕학 수업단계를 거의 건너뛴 상태에서 서둘러서 앉힌 느낌이라 구단 안팎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결국 그에 대한 부작용으로 다카하시는 3년의 계약기간이 종료되고 구단으로부터 재계약 오퍼를 받았음에도 본인이 고사를 하고 감독직에서 물러났을 정도였다. 거기다 다카하시의 후임으로 부임한 감독은 바로 다카하시 직전 전임이었던 하라 타츠노리(...). 이로서 하라는 2000년대 이후 요미우리 한 팀에서만 무려 세 번이나 감독직에 오르는 희귀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81] 이미 60대가 되어버린 하라를 다시 또다시 감독직에 앉혔다는 자체가 요미우리 감독 후보군의 심각한 인재난을 그대로 반영하는 케이스라 봐도 무리가 아니다.[82] 2021년 기준으로 가장 유력한 차기 요미우리 감독 주자는 아베 신노스케이지만, 아베도 지도자로써는 2020년에 첫발을 내딛은 초짜이기에 못해도 2~3년의 시간은 더 필요한 상황이다.[83] 결국 아베는 2군 감독(2020~21), 1군 작전/수비치프코치(2022), 1군 수석/배터리코치(2023)를 거쳐 2024년 시즌을 앞두고 1군 감독으로 임명됐다

사실 이 말도 안되게 빡센 조건 때문에 스스로 감독 후보군을 좁힌다는 위의 기술이 일반적으로 보면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일본프로야구가 양대리그로 분립된 이후로 여태껏 이 팀의 감독 자리에 앉아본 사람은, 현직인 아베 신노스케를 포함해 딱 9명 밖에 없으며, 대개 최소 5년 이상의 임기는 보장을 받아왔다는 것이다.[84] 즉 한 번 임명되면 웬만하면 장기 집권이기 때문에 현직 감독이 지휘를 하는 동안 이미 차기 감독 후보가 베테랑으로서 팀의 리더 역할을 하고, 현직 감독이 물러날 때쯤 돼서 감독직을 물려주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무르익고, 그 동안에 차차기 감독 후보가 팀 분위기를 이끄는 주축 선수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조건이 감독 선임에 큰 영향을 안 미치고 있는 것도 현재까지는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면서도 NPB에서 독보적인 성적을 올리고 있는 교진군의 행보를 보면, 야구 감독이 팀 성적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반증일 수도...[85]

7. 비판

이 점에 있어서 너무나도 보수적이고 새로운 야구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고 너무 배타적인 게 아니냐는 의견도 많다. 같은 일본인이자 같은 야구인임에도 타 구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감독을 못한다는 건 가혹하다는 평이 대세이다.

비록 프랜차이저가 감독 코치를 이루면서 잘 나가는 팀이야말로 진정한 명문 팀으로서 의미가 있는 만큼 나쁜 것만은 아니겠으나, 프랜차이즈 스타를 찾는 것도 정도껏이지 선수도 아니고 지도자 생활을 다른 팀에서 했다고 능력 있는 인재를 내칠 정도의 결벽증에 가까운 순혈주의는 2004~2005년 호리우치의 사례처럼 도리어 팀을 망치는 족쇄로 작용하는 경우가 나올 가능성이 많은 것이 문제이다. 이 문제점은 2016 시즌 이후로 팀을 맡고 있으면서 결국 팀을 B클래스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타카하시 요시노부체제에서도 반복된 바 있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저 조건을 만족하는 케이스 그 자체가 매우 적다는 점이다. 즉 저런 말도 안되게 빡센 조건을 다 만족하는 사람도 몇 명 안되는데, 그 적은 후보 사이에서 또 감독감을 골라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 코치고 뭐고 지도자 경력이 하나도 없거나[86], 인덕도 영향력도 없는 사람이지만, 조건에 만족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감독에 앉힐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스스로 만든다는 점이다.[87] 그나마 출신지를 안 따지는 게 용할 지경. 사실 출신지까지 따지면 성골 자체가 씨가 말라 버리니 못하는 것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구단의 전 역사를 통틀어서 출신지까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경우는, 호크스 부임 이전의 성골인 오 사다하루 한 명 뿐[88]. 그런데 오 사다하루는 국적이 중화민국이다. 만일 국적까지 철저히 따진다면 성골은 진즉에 전멸하는 데다가 애초에 그런 성골은 나온 적도 없다

8. 외국인 선수

감독 순혈주의와는 별개의 내용이긴 하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선수 구성에서도 일본인 순혈주의를 고집해서 외국인 선수 개방에도 가장 늦었던 구단이기도 했다. 정확하게는 미국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한 외국인 선수의 영입이다.[89] 물론 러시아계였던 빅토르 스타르핀이라든지 하와이 출신의 일본계 미국인이었던 요나미네 카나메가 있긴 했지만, 일본에서 오랜 기간 거주했거나 일본계라 여기서는 논외. 일본 프로야구는 출범 초창기부터 외국인 선수를 자유로이 기용했지만 요미우리는 1975년에 가서야 메이저리그 출신 내야수이자 전 워싱턴 내셔널스 감독인 데이비 존슨을 영입했다. 다만 데이비 존슨은 그닥 잘하지 못했고 나중에 워렌 크로마티가 영입되어 대박을 친 이후에 좀 나아졌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요미우리는 신입 외국인 선수가 성공하는 경우가 별로 없고 그나마 성적을 낸 선수들은 타팀 출신 외국인 선수라는 점에서 여전히 신입 외국인 선수에게 힘든 구단인 건 여전하다. 그 빡센 규율을 외국인 선수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니 요미우리 특유의 경직된 팀 문화를 외국인 선수들이 버티질 못하기 때문. 그래도 8년간 마무리와 필승계투조를 오가며 활약한 스캇 매티슨이나 한때 몸담았던 마일스 마이콜라스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가서 성공을 거두는 등 성공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며, 외국인 선수들과 일본인 선수들의 사이도 좋은 편. 이승엽아베 신노스케타카하시 요시노부 등과 친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애초에 외인을 뽑을 때 신입보다는 웃돈을 더 주더라도 타팀에서 활약을 한 검증된 선수를 데려오는 것을 선호해서 신입 자체가 많지 않아 성공 사례가 적은 것일 뿐이다. 물론 빡센 규율이나 애초에 신입에게도 돈을 많이 주는 만큼 기대치도 높아서 타팀보다 신입 외인의 실패가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신입 외인의 무덤 소리 들을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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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는 요미우리보다 심하다고 볼 수 있는데 요미우리는 감독 선임에서는 순혈주의여도 선수 기용에선 융통성이 있는 반면 아틀레틱 빌바오는 무조건 바스크 혈통 or 바스크 출신 or 빌바오 유스 출신만 선수로 뛸 수 있다. 그나마도 뒤의 두 조건은 최근에나 생긴 것으로 과거에는 무조건 바스크 혈통의 선수만 기용했다. 다만 코칭스태프 구성에서는 제한이 없다는 점은 요미우리와 대비되는 점이다.[2] 다만, 카메이는 2005년부터 각 시즌별 성적을 놓고보면, 풀타임으로 뛴 시즌이 3시즌 반정도(2008년 후반기, 2009년, 2018년, 2019년)에 불과하고, 풀타임으로 뛴 시즌 중에서, 눈에 돋보일 만한 활약을 펼친 시즌은 2009년 시즌이 유일하다. 게다가, 카메이는 2005년~2008년 전반기까지는 아예 백업이었고, 2010년~2017년, 2020년 시즌은 성적 부진, (개인성적이 괜찮을만 하면)부상으로 2군으로 밀려나서 풀타임을 소화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요미우리에 오래 있었음에도, 통산성적은 준주전급 수준으로 평범한 편이다. # 그리고 카메이와 아베 신노스케는 겨우 3살 차이인데 아베는 차기 감독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고 카메이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 봐도 말 다한 셈. 대신 카메이는 1군 외야수비, 주루.코치로 임명되면서 커리어가 감독급이 아니라 그렇지 순혈주의 자체는 유지했다.[3] 예외적으로 1955, 1957년에 2군 감독을 맡은 닛타 쿄이치는 프로에 진출하지 않은 아마추어 선수 출신이며, 2017년 시즌 도중 잠시 2군 감독을 역임한 우치다 쥰조는 현역 시절 야쿠르트, 닛폰햄, 히로시마에서만 뛰었으며 요미우리와는 접점이 없었다.[4] 다만 두산 베어스같은 경우에는 2023 시즌 삼성 라이온즈 영구결번이자 두산에서도 한번도 뛴 적이 없고 지도자 경력도 없는 이승엽을 선임해서 순혈주의가 슬슬 깨지려고 하고 있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 역시 2023 시즌 시작부터 강등권으로 처지며 위기 의식을 느끼자 팀과 무관한 김병수 감독을 새로 선임했다. 근데 시즌 끝나기도 전에 잘라버렸다[5] AT 마드리드로 임대되어 1경기 뛰었다.[6] 선수협 문제로 인해 구단이 부당하게 내친 것에 가산점을 주자면 진골이지만, 다른 팀에서 뛰긴 뛰었으니 일단은 6두품이다.[@] 다만 1990년대 들어와서 요미우리는 당시 막 도입된 FA 제도, 역지명제도를 통해 마구잡이로 최우수 유망주들이나 타 팀의 주축 전력들을 연달아 영입하면서 매년마다 충분히 우승을 노릴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시켰던 데다 때마침 이러한 요미우리의 전력 강화에 맞춰 감독으로 돌아온 나가시마도 1994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결과를 냈기 때문에 당시 시점에서 오 사다하루가 요미우리 감독으로 돌아올 수 있을 확률은 적었다. 그래서 호크스 GM 네모토 리쿠오오 사다하루를 설득할 때, "이미 거인이란 집안은 장남인 나가시마 시게오가 대를 이은 셈이다. 당신은 차남이니 부담 가질 필요가 있는가? 이제 시대는 나가시마 vs 오 사다하루의 라이벌전을 원한다" 라는 식으로 설득했다.[8] 단 이쪽은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이적한 거라 애초에 5~6두품딱이었다. 그러나 마약 사건으로 인해 그 뒤론 아예 두품 취급도 못 받는 중.[9] 아래에서도 서술하겠지만 이 사람은 아예 초중고까지 치바현 출신인 순혈주의 끝판왕이다.[10] 현역 선수 중에는 고향 팀에서 뛰는 원클럽맨이 없진 않다. 물론 이들이 은퇴할 때까지 원클럽맨으로 남아 감독으로 추대될지는 미지수지만.[11] 구단의 시초가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이었던 것도 있고 해서, 쿄진은 도쿄라는 일개 지역의 팀으로 비쳐지는 것을 꺼려선지 연고지 언급을 은근히 피하는 경향이 있다. 2010년대 와서 유니폼이나 로고에 "도쿄"를 넣는 등 은근 도쿄 구단이라는 걸 드러내고 있지만, 2000년대만 해도 유니폼과 로고에서 TOKYO를 완전히 빼고, 야쿠르트가 팀명에 도쿄를 넣으려 하자 예전만한 반발을 안 하는 등 도쿄 지우기를 철저히 했다.[12] 심지어 골품제라는 말의 어원인 신라에서도 결국 진덕여왕에서 성골의 대가 끊어졌다. 그러나 요미우리는 어떻게든 유지 중. 당연하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역사는 신라만큼 길지 않으니까.[13] 이들 중 히라타와 키도는 선수 시절 커리어가 부족한 편이지만 1985년 일본시리즈 우승 멤버라서 레전드로 인정받고 있다. 통산 1000안타를 넘긴 사노와 히야마도 비슷한 케이스.[14] 한신의 유일한 원클럽맨 명구회 타자 멤버. 본래는 토리타니가 추가되어야 했지만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하면서 또 다시 혼자 남았다. 1995~1996년 사이에 감독을 맡았으나 2시즌 모두 최하위에 그치면서 중도 사임했다.[15] 2005년 센트럴리그 우승 감독이긴 하지만 같은 해 일본시리즈에서의 33-4, 2008년에 전반기 매직넘버 점타 → 13게임차 역전으로 우승 실패란 흑역사를 만드는 바람에 그렇게까지 좋게 평가받지 못한다. 다만 2022년 야노 아키히로 감독이 사임을 발표하면서 차기 감독 후보로 이름이 오르고 있더니 결국 2023년부터 한신 감독으로 복귀했고 그 해 리그 우승을 넘어 1985년 이후 38년 만에 일본시리즈 및 통합 우승을 해냈다.[16] 다만 감독으로서는 10.8 결전 패배 및 2013년부터의 암흑기를 오게 만든 책임이 있다.[17] 이와 별개로 한신 시절에 코로나 19 유행 당시 규정에 없던 회식을 주관했다 집단 감염 사태를 일으킨 적도 있었다.[18] 다만 이쪽은 킨테츠-오릭스 합병 당시 선수협 회장으로써 합병 반대를 강력 주장하며 구단주 측과 정면으로 대립한 전력과 선수 겸 감독 시절 성적이 그닥 좋지 않은 점 때문에 지도자로 복귀하긴 어려울 것 같다는 의견이 많은 편. 본인 또한 지도자에는 별다른 뜻이 없는지 은퇴 후 2021년 친정팀의 스프링캠프 임시 코치를 역임한 것 외엔 현장에 복귀하는 일 없이 해설가에 전념하고 있다.[19] 다만 후루타는 한큐 브레이브스의 팬이었고, 미야모토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팬이었다.[20] 단, 초중고까지는 히로시마현에서 나왔으나 대학은 도쿄의 호세이대학으로 갔다.[21] 다만 메이저에서는 원클럽맨이 아니었는데, 커리어 초반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후반을 뉴욕 양키스에서 뛰었기 때문이다.[22] 후에 아내가 될 노무라 사치요와 당시 불륜 관계였는데, 이 사치요가 노무라와 애인 관계라는 점을 앞세워 선수단 운영에 끊임없이 간섭을 일삼으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결국 이것이 문제시되어 감독직 해임으로 이어진 것.[23] 엄밀히 말하자면 도중인 2004~2006년에 자진 트레이드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어서 진골 기준엔 미달하나 당시 다이에 프런트가 워낙 막장이었던 탓에 선수들을 푸대접하여서 사실상 타의로 이적한 것에 가까웠고, 이후 FA로 친정팀에 복귀하여 2011년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하는 등 꾸준히 활약해줬기 때문에 팬들에게선 원클럽맨에 준하는 대접을 받는다. 다만 지도자로 친정팀에 복귀한 후엔 구시대적 야구관으로 팀 성적을 악화시키는 모습을 보이며 평가가 나빠졌다.[24] 은퇴 시점에선 성골이었지만 이후 치바 롯데 마린즈 코치를 맡게 되면서 진골로 격하되었다. 다만 현역 말년에 구단과 불화를 겪으며 다소 안 좋은 모양새로 이별한 것 때문에 당시에도 취급이 애매했다.[25] 다만, 후쿠우라가 입단할 당시의 치바 롯데 마린즈는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서 치바현 치바시로 연고지 이전한지 2년 정도에 불과한 상태였다.[26] 2021년 현재, 니혼 테레비의 고정 해설자는 10명 전후 정도이고, 대부분 니혼 테레비 계열 지역 방송사 해설자를 겸하거나, 다른 방송사의 해설자를 겸하고 있다. 그리고, 니혼 테레비에만 출연하는 해설자는 에가와 스구루가 유일하다.[27] 심지어 고요한은 군입대 경력도 없다.[28] 다만 우츠미와 초노는 성적도 떨어지고 둘다 30대 중반의 적지않는 나이라 순혈주의라는 명분으로만 냅두기엔 장기적으로 봤을때 팀 전력에 플러스 요소가 되기 힘들어 구단의 미래를 고려하면 보호명단에서 제외될만 했다. 설령 둘이 잔류했다해도 2019년 이후 요미우리는 영입대신 육성에 공을 들이고 있어 성적도 좋지않고 나이도 많은 선수들은 구단에겐 그저 엔트리 낭비에만 불과해 순혈주의라는 추상적인 개념보단 냉정하게 둘을 쳐내는 게 이득이 될 수 있다.[29] 여담으로 이 중 문규현을 제외하면 모두 로컬 보이이다.[30] 오릭스 버팔로즈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시애틀 매리너스[31] 뛴 기간은 길지 않지만 이마양이라는 말도 있고 V2 확정 끝내기포라는 거대한 임팩트를 남기면서 두품 취급은 한다.[32] 이전에도 해외 진출로 인해 성골로 처리하기 애매했다.[33] 그러나 돌아와서도 여전히 잘하는데다 현재는 영구 결번도 유력해진 상황인지라 적어도 팬들 사이에선 두품 취급은 받을 것으로 보인다.[34] 박한이는 다시 육성군 코치로 삼성에 합류했다.[35] 진골 출신으로 감독이 된 후지타 모토시 감독의 일례가 있기 때문에 교진군식 기준으로 진골에 해당되는 김태형 감독의 경우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다. 다만 후지타 감독은 프런트가 야심차게 키워온 스타플레이어 출신 나가시마 시게오, 오 사다하루가 성적 저조로 단기간에 물러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원칙을 최소한으로 깨고 선임한 것에 가까우므로 만의 하나의 우연이 있어야 겨우 선임 리스트에 오를 수 있는 케이스.[36] 2차 FA를 통해 귀환.[37] 장원준의 보상선수로 갔다가 2016년에 2차 드래프트로 귀환했는데, FA 영입에 따른 보상선수로 팀을 떠났다가 귀환하여 초노 히사요시와 비슷한 경우이다.[38] 2차 FA를 통해 귀환. 귀환 이후엔 팬들 사이에선 진골로 간주 중. 히로시마의 구로다 히로키와 비슷한 케이스다.[39] 결과적으로는 6두품이나 FA 이적 과정에서의 사소한 잡음으로 인해 팬들 사이에선 두품 이하로 간주된다.[40] 사실 이쪽은 강제 엘전드로써 1차 지명이라 실패하면 망신이니 오래 붙잡았던거지 2라운드 쩌리였고 저런 사고를 쳤으면 즉각 방출감이었다.[41] 말이 임시코치지 사실상 1년간 코치 연수를 다녀온 것이다.[42] 단 액수는 겨우 100만원으로 형사처벌없이 3년간 자격제한을 받았다. 아마야구에서 심판이나 윗사람 그리고 진학문제로 금품이 오가는건 이 당시엔 당연하게 생각되던 시점이라 맘먹고 잡으면 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고교 & 대학야구 감독들중 무사할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43] 그래도 다른 해외진출 케이스와 달리 포스팅 과정에서 큰 이적료를 남겨주고 진출한데다 류현진 측에서 친정팀에 대한 애정이 여전히 남아있는지라 말년에 복귀후 은퇴한다면 김태균, 정민철 케이스처럼 팬들 사이에서 성골 대접은 받을 것으로 보안다.[44] 오선진, 이태양의 경우 트레이드를 통해 한화를 떠났다가 FA 신청 후 한화로 돌아온 케이스라 사고 없이 한화에서 쭉 활약하다가 은퇴한다면 KT 이적 전의 안영명과 같은 명예 진골 정도의 대우까지는 받을 것으로 보인다.[45] 단, 해당 건을 폭로한 피칭 애널리스트가 악질 사이버 렉카라는 사실이 전부터 널리 알려졌던 터라 순수한 의도로 볼 수는 없다.[46] SSG는 SK를 인수하여 구단 역사를 그대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구단 차원에서 SK 출신이라도 엄연히 SSG 프랜차이저로 인정하고 있다. 해태-KIA 타이거즈MBC 청룡-LG 트윈스와 같은 케이스다.[47] 이쪽은 SK-SSG와 달리 해체 후 재창단 + 연고이전으로 역사가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선수 커리어가 '사실상의' 원클럽맨이지 '공식적인' 원클럽맨은 아니다.[48] NC에 이적해 온 베테랑으로는 이현곤도 있으나, 이현곤은 타격왕 1회 말고는 커리어가 이호준에 비할 수준이 안 된다.[49] 히어로즈 이력을 인정할 경우 진골이다.[50] 애초에 로컬 보이까지 겸하는 원클럽맨은 야구가 아닌 타 스포츠들에서도 잘 안 나온다.[51] 그 오 사다하루도 국적이 맞지 않았다. 다만 국적이 안 맞았던 케이스는 이전에도 있긴 했다.[52] 트레이드, 웨이버 공시, 2차 드래프트, FA 보상선수 등을 통해 방출되거나 이적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53] 다른 종목도 크게 다르지 않으며, 몇몇 리그는 자국 리그 스타의 해외진출이 드문 현실을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국 리그가 1류라는 자부심을 지닌 League of Legends Champions Korea는 전력이탈이라는 시각이 매우 강하다.[54] 혹은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유니폼.[55] 애초에 외부 선수 출신이라는 커리어와 선수 시절 부상에 시달리며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건 넘어간다 쳐도, 요미우리 시절 파벌을 만들어 맘에 안드는 선수를 괴롭히고 감독/코치진을 좌지우지하며 팀 분위기를 망치는 존재였던 탓에 결국 구단에서 참지 못하고 내쫓아버릴 만큼 이미 요미우리 구단에선 지도자로써 미적합한 인재로 분류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키요하라는 은퇴 후 마약 복용으로 체포되면서 두품 취급도 못 받는 흑역사로 전락했다.[56] 단 이쪽은 불륜과 불륜 상대에게 변태적 성행위 요구 정황까지 포착되며 감독 후보에서 밀려날 가능성도 있다. 일단 2023년에는 1군에서 살아남으며 계속 주전자리를 유지했지만 이런 경우 성적이 떨어지면 언제 팽당할지 모르는 상황. 당장 또래인 스가노도 있고 한 세대 아래긴 하지만 오카모토 카즈마도 있으니.[57] 원래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려 했지만 상황이 맞물리며 무산되었고 그 대신 요미우리 감독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외조카인 덕에 가족력으로도 어필이 가능하므로 언제 은퇴할 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유력한 아베 다음 감독 후보다.[58] 의외로 후보가 없어 보이지만 꽤 많은 편. 야마구치 테츠야나 카메이 요시유키가 감독 후보로 언급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야마구치는 쿄진에서 13년을 뛰면서 홀드왕 2회에 통산 홀드 전체 2위를 기록했고, 카메이도 쿄진에서 16년째 원클럽맨으로 뛰면서 통산 1000안타를 넘긴 나름 주축 선수임에도 이 정도.[59] 저들 외에 사와무라 히로카즈도 혹시? 하는 상황이었으나 2020년에 트레이드로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하면서 후보에서 탈락했고 이후 메이저리그까지 가버리며 요미우리 감독이 될 가능성은 아예 제로가 되었다.[60] 본인의 선배이자 똑같이 여성관계 문제를 일으킨 니오카 토모히로가 지도자로 복귀한 전례가 있긴 한데, 낙태 강요까지 한 사카모토와는 달리 이쪽은 상대적으로 도의적 문제가 적은 불륜 정도에 그친 데다 징벌성 트레이드로 이적한 닛폰햄에서 이전의 강타자로써의 면모는 사라졌지만 준주전 이하로나마 나름대로 활약을 이어갔고 행실이 개선된 모습을 보여주며 지속적으로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줬기 때문에 용서받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에 가깝다.[61] 일단은 그래도 용서받고 1군에서 주전으로 꾸준히 나오고는 있으니 할 사람이 없으면 그래도 사카모토에게 자리가 갈 가능성은 있다.[62] NPB에서의 성적만 따져서. MLB 등의 성적 제외.[63] 실제로 1992년에 닛폰햄 파이터즈의 차기 감독 제안을 받았으나 당시 요미우리 감독이었던 후지타 모토시의 경질설이 돌면서 차기 감독을 노린다는 계획 하에 이 제안을 거절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나가시마 시게오의 감독 복귀였다.[@] [65] 한지붕 두 가족 시리즈, 역대급 리버스 스윕 시리즈를 이끌었을 때의 감독이었다.[66] 하지만, 요미우리에서는 마쓰이에게 코치 제안을 여러번 했으나, 감독 제안을 정식으로 했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게다가, 마쓰이와 와타나베 회장과의 관계는 2002년 시즌 종료 후, 구단의 제안을 거절하고 메이저 리그로 이적한 부분 때문에,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여전히 불편한 관계에 있다.#[67] 하지만, 하라 감독의 계약 만료 이후, 차기 감독은 아베 신노스케라는게 구단 내부의 방침이라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마쓰이가 요미우리 감독에 오를 가능성은 높지 않은 편이라는 의견 역시 존재한다.#[68] 야쿠르트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과 세이부의 80년대 전성기를 이끈 명장. 히로오카는 선수 생활은 요미우리에서 했지만 코치, 감독 생활은 히로시마, 야쿠르트, 세이부, GM 생활은 롯데에서 지냈다. 그래서 감독 인선에서는 거의 고려가 되지 않지만 요미우리 OB회 회장 자리는 역임한 바 있으며 회장 재임시절 감독이하 선수단의 운영에 이런 저런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69] 히로오카의 후임으로 세이부에서 리그 우승 8번, 일본시리즈 우승 6번의 위업을 이룬 OB조차도 선수 시절도 아니고 코치, 감독 시절을 다른 팀에서 보냈다는 이유로 감독 인선에서 진지하게 고려된 적이 없다. 게다가 모리 감독의 경우 그의 마지막 감독 생활이었던 1994년에 요미우리의 모종의 계략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자세히 얘기하자면 요미우리가 3승 2패로 우승하기 바로 직전인 1994년 일본시리즈 6차전 경기 시작 직전에 "세이부, 모리 감독 경질"이라는 루머를 도쿄돔 전광판에 떡하니 띄워놨다. 그야말로 OB고 뭐고 간에 상대편 감독 죽이기 밖에는...[70] 그러나 2018년 1월 암으로 사망했을 때에는 요미우리 구단 차원에서 추도문을 보내며 경의를 표했다. 나가시마 시게오 종신 명예 감독에 의하면 호시노와 맞붙을 때마다 최선을 다해서 승부했으며, 다카하시 감독에 의하면 "거인이 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말을 만날 때마다 했다고.[71] 2013년 라쿠텐의 2013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한을 풀었다.[72] 호시노의 경우는 오사카, 나고야를 중심으로 후원회이자 팬클럽인 코센카이(虎仙会)가 있어서 굳이 도쿄에 갈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이 빽이 있어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있었던 코센카이 모임에서는 요미우리 OB들을 대놓고 디스할 정도.[73] 그리고 진짜로 하라에서 다카하시로 감독직이 넘어갔다가 2019년 다시 하라가 감독으로 돌아왔다.[74] 성적은 재임 기간 내내 하위권을 맴돌았지만 이전부터 팀성적이 워낙 막장이어서 웬만하면 망한 감독이라 하지 않는데다 뭐니 뭐니 해도 관중이 크게 늘었으니... 게다가 나카하타는 선수들의 워크에틱을 강화하고, '포기하지 않는 야구'라는 팀컬러를 확립하였으며, 훗날 요코하마의 주축 선수가 되는 츠츠고 요시토모, 야마사키 야스아키 등을 적극적으로 믿고 기용하면서 이들이 활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줬다. 그리고 이는 훗날 요코하마가 A클래스 성적을 거둘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재임 시절 성적과 별개로 요코하마 팬들의 평은 좋은 편이다. 심지어 2022년 요미우리가 최하위 추락 위기에 처하자 나카하타를 차기 감독으로 추천하는 기사가 작성되기도 했다.[75] 한신 타이거스에 드래프트 지명을 받았어도 유니폼을 입은 적은 없어서 순혈로 부르기에는 뭔가 애매한 케이스.[76] 마키하라의 경우 1993년에 고향팀인 주니치로 갈 것을 염두에 두고 FA를 신청한 전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구단에 찍힌 것 아니냐는 말이 있다. 아직 요미우리에서 코치도 못 해봤다.[77] 지금까지 호리우치와 오 사다하루를 제외하면 순혈주의로 실패한 케이스가 없기도 하다.[78] 그것도 어느정도 수준까지는 모기업인 요미우리 신문의 미디어 장악력을 동원해서 덮어 주었다. 단 요미우리가 시발점이 된 야구도박 스캔들은 얄짤없어서 요미우리도 대놓고 깠다.[79] 그러나, 사카모토 하야토가 2022년에 스캔들 이슈가 생겨버리면서 두품 이하로 강등당할 가능성이 생겼다. 하지만, 현재 일본의 주요 언론이나 요미우리 구단 측은 사카모토 하야토의 스캔들에 대해서 어떠한 언급도 없는 상태이다. 사카모토 하야토가 성골로 남을지, 아니면 두품 이하로 강등될지는 올해 말이나 내년 이후의 구단의 움직임에 달려있다.(사카모토의 계약기간은 2023년 까지다.)[80] 단, 요미우리의 역대 감독은 주로 통산 성적이 4번 타자급 홈런타자인 타자 출신이 주로 임명되었고, 통산 성적이 에이스급 선발투수인 투수 출신이 임명된 경우는 두 명에 불과하다. 4번 타자급 홈런타자인 타자 출신을 우선적으로 쳐주는 프런트의 특성상, 스가노에게 까지 기회가 갈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81] KBO 리그에서는 강병철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세 번이나 역임한 사례가 있다.[82] 에가와 스구루는 아예 감독을 할 생각이 없다고 못박았다.[83] 전임자인 타카하시 요시노부또한 지도자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급하게 감독으로 올렸다가 탈이 났다는게 중평이라, 아베를 바로 감독직에 올리기는 부담스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84] 예외는 2년만에 물러난 호리우치 츠네오 단 한 명 뿐이다. 2016~2018 시즌까지 감독을 역임한 타카하시 요시노부의 경우 3년의 재임 기간 뒤에 물러나긴 했지만 경질이나 사퇴가 아닌 계약 기간 종료였고, 무엇보다 구단에서는 재계약을 희망했으나 본인이 고사한 케이스라 타카하시 또한 5년 이상을 보장받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아베의 경우 2024시즌부터 감독을 시작해기때문에 5년 이상 보장 여부는 두고봐야 한다.[85] KBO에서는 통일된 육성 시스템을 강조하는 두산 베어스가 비슷하다. 이쪽은 감독이 아니라 코치 개인의 영향이 미비한 편.[86] 지도자 경력이 있다고 해도, 대부분 5년 이하이고, 코치만 오래한 지도자는 1군 감독이 되는게 어렵다. 애초에 프런트도 그런 지도자는 1군 감독 후보군으로 고려하지 않는 편이다.[87] 단순한 순수혈통 뿐만 아니라 선수 시절 통산 성적까지 보는 게 더 문제다. 현역 시절에 백업, 2군 붙박이, 극단적으로는 프로 미지명자 출신의 명감독, 명코치도 생각보다 많다.[88] 오 사다하루는 도쿄도의 대표적인 서민 지역인 스미다구 출신으로 고등학교도 도쿄의 야구 명문고인 와세다 실업고를 나왔고 고교 시절에 모교를 고시엔 우승으로 이끌며 사상 최초로 도쿄의 학교가 고시엔에서 우승하는 기록을 세웠다. 요미우리 성골의 다른 대표격인 카와카미 테츠하루구마모토현 출신, 나가시마 시게오치바현 출신이며, 하라 다쓰노리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이주한 가나가와현에서 성장했다.[89] 미국 리그 외에서라면 무려 단일 리그, 그것도 2차대전 이전에 영입한 선수가 있다. 필리핀 출신의 아데라노 리베라라는 선수로, 1939년 1월에 당시는 도쿄 교진군이었던 자이언츠가 마닐라로 원정 경기를 갔을 당시 상대팀인 마닐라 세관 팀의 주장 겸 4번 타자로 나서서 이날 경기 때 당시 교진군의 에이스였던 빅토르 스타르핀을 격파하는 데 큰 공헌을 했는데 이것이 주목을 받게 되어 1939년 교진군에 입단하게 된다. 그후 1939년 딱 1년간만 뛴 후 필리핀으로 돌아갔는데, 이후 행적은 그의 딸에 의하면 귀국 후 세관원으로 일하다가 필리핀 독립의용군이 되어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이 선수는 지금도 NPB 사상 유일한 필리핀 출신 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