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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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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석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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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4

LG 트윈스 등번호 31번
정재훈
(1991)
차명석
(1992~2001)
김용우
(2002~2004)
LG 트윈스 등번호 90번
황병일
(2003)
차명석
(2004~2007)
결번
LG 트윈스 등번호 76번
유지현
(2007)
차명석
(2008)
유지현
(2009~2018)
LG 트윈스 등번호 90번
결번 차명석
(2009~2011)
류택현
(2012)
LG 트윈스 등번호 77번
이동욱
(2007~2011)
차명석
(2012~2013)
강상수
(2014.5.11.~2018)
LG 트윈스 등번호 70번
김선진
(2012~2014)
차명석
(2015)
박철영
(2017~2018)
{{{#ffffff [[kt wiz|kt wiz]] 등번호 90번}}}
이시미네
(2015)
차명석
(2016)
고영민
(2017~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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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차단장.jpg
<colbgcolor=#c30452><colcolor=#ffffff> LG 트윈스 단장
차명석
車明錫 | Cha Myeong-Seok
출생 1969년 4월 20일 ([age(1969-04-20)]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사당초 - 성남중 - 성남고 - 건국대
거주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신체 183cm, 92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2년 2차 1라운드 (전체 4번, LG)
소속팀 LG 트윈스 (1992~2001)
지도자 LG 트윈스 1군 투수코치 (2004~2005)
LG 트윈스 1군 불펜코치 (2006)[1]
LG 트윈스 1군 투수코치 (2006)[2]
LG 트윈스 1군 불펜코치 (2007~2008)
LG 트윈스 2군 재활코치 (2009)
LG 트윈스 1군 불펜코치 (2010)
LG 트윈스 2군 투수코치 (2011)
LG 트윈스 1군 투수코치 (2012~2013)[3]
LG 트윈스 잔류군 총괄코치 (2014)[4]
LG 트윈스 1군 수석코치 (2015)
kt wiz 육성군 총괄코치 (2016)
프런트 LG 트윈스 단장 (2019~)
해설위원 MBC SPORTS+ 야구 해설위원 (2002~2003, 2014, 2017~2018)
경력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기술위원 (2014)
본관 연안 차씨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후
3.1. 지도자 경력
3.1.1. LG 트윈스 지도자 시절3.1.2. kt wiz 지도자 시절
3.2. 해설위원 경력
3.2.1. 해설위원 1기3.2.2. 해설위원 2기3.2.3. 해설위원 3기
3.3. 프런트 경력
4. 코칭 스타일5. 여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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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AKR20231115167200007_01_i_P4.jpg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現 LG 트윈스 단장. 1992년 LG 트윈스에 입단하였다. 잠시 야구해설과 kt wiz 코치로 있었던 때를 제외하면 LG 트윈스에 입단하고 30여년을 쭉 LG의 오욕과 영광을 함께 한 LG맨으로 LG 트윈스 역사에 한 축을 담당한 인물이라고 할 만하다. 셋업맨, 마무리 투수라는 개념이 완전히 정착하기 전 셋업맨으로서 활약한 KBO의 셋업맨 선구자이기도 하다.[5]

2. 선수 경력

성남고등학교건국대학교를 거쳐 1992년 2차 지명 1라운드에서 LG 트윈스의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덧붙여 그 해 1차 지명 선수는 휘문고등학교임선동.

초기에는 주로 선발 투수로 등판했다. 그러나 공이 빠르지도 않고 아직 가다듬어지지 않은 차명석에게 선발이라는 보직은 버거웠던 듯. 그대로 가면 존재감이 없는 선수인 채로 아무도 모르게 은퇴의 길을 걸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결국 중간계투로 강등되었는데, 거기서 터졌다.

다만, 별 거 아니던 선수가 불펜에서 운 좋게 터졌다는 식의 인식들이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2차지명 1라운드(전체 4순위)라는 지명 순위에서 알 수 있듯이 아마추어 시절 좋은 제구와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즉시 전력감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입단했고 바로 투입되었으나 선발로써 꽃 피우지 못했을 뿐이다. LG 구단으로써는 조계현 같이 공이 빠르지 않으나 팔색조 투구를 하는 선수를 생각하고 지명했다.

김용수가 KBO 리그에서 1이닝 마무리 투수의 선구자였다면, 차명석은 중간계투의 에이스, 즉 셋업맨의 선구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전까지의 패턴이 '선발 투수의 승리 요건 충족 → 최대한 이닝을 길게 끌고 간다 → 7~8회에 마무리를 올린다'였다면 차명석은 주로 선발 투수의 승리 요건이 충족된 상황에서 등판하여 셋업맨으로써 1~2이닝을 책임지고, 그 후 마무리 투수에게 마운드를 넘기는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이전에 그러한 역할을 수행했던 선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차명석 이전에 팀 선배인 차동철과 후배인 강봉수, 해태 타이거즈의 마당쇠 송유석 등이 있었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마무리 투수를 불러내기 애매한 상황일 때마다 마구집이로 혹사당한 승리조 투수에 가까웠지 메이저 리그 식의 프라이머리 셋업맨 개념은 아니었다. 물론 차명석도 마구잡이로 혹사당한 경력이 상당하므로 현재처럼 완전한 1이닝 셋업맨의 역할은 아니었다.

이런 시스템이 도입되고 정착한 것은 투수 분업 시스템을 최초로 도입한 이광환 당시 LG 트윈스 감독의 영향력이 지대하다. '6~8회에 공을 던지는 투수'와 '전문 셋업맨'을 본격적으로 분리시킨 것이 바로 이광환 감독이 도입한 라루사이즘식 투수 분업화이기 때문. 차명석은 이런 시스템에서 '전문 셋업맨'이라는 역할을 잘 해내면서, KBO 리그 최초로 성공한 투수로 평가받을 만한 선수다. 그 덕에 중간계투 투수로서 최초로 억대 연봉자에 이름을 올렸다. 즉 이 성공이 이동현, 안지만, 정현욱 등을 있게 해준 뿌리인 셈. 이처럼 이광환 감독의 체계적인 투수 분업화 도입은 KBO 리그에서 보직도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혹사당하면서 사라졌을 수많은 투수들의 선수 생명을 10년 이상씩 연장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커리어 하이는 11승을 기록했던 1997년이다. 그 해 1군 68경기에 등판해 119.1이닝이라는, 중간계투로서는 파격적으로 많은 등판을 해서 11구원승 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2.79를 기록했다. 이 당시의 뛰어난 활약상 덕분에 그에게 붙은 별명이 바로 차덕스였다. 1990년대 후반 LG 트윈스 마운드의 대표적인 셋업맨으로 활약했다. 일례로 1999시즌 중간계투로서 5월 초까지 6승으로 자신은 다승 선두, 팀은 전체 승률 1위에 올랐다가 그가 부상으로 빠지자마자 LG 성적이 급추락할 정도로 LG에서의 비중이 컸다. 비록 그가 A급 선수라고 부르긴 힘든 성적을 남기긴 했지만, 그가 2001년에 방출되어 은퇴한 이후 2000년대 LG 마운드에서 이동현을 제외하면 그에 버금가는 활약을 해준 셋업맨은 전무했다. 그래도 LG는 2012년 이후로 투수 명가로 발돋움하며 유원상(12시즌)-이동현(13-14시즌)-윤지웅(15시즌)-김지용(16시즌)-진해수(17시즌)-정우영(19시즌)으로 이어진 불펜진을 보유하며 양상문이란 제어 장치 없이 폭주한 강상수가 망친 18시즌을 제외하면 언제나 리그 원탑의 위치를 놓지 않았다는 점.

2001년에는 부상으로 1군에서 9경기밖에 등판하지 못하고 재활에 매진하다가 시즌 후 방출되어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것도 결혼을 며칠 앞두고였다. 다른 구단에서 혹시나 데려가지 못하도록 당시 LG 프런트는 악랄하게 그를 늦은 시기에 방출했다. 옛 스승 이광환의 한화 이글스 입단을 시도했으나 선수단 구성 완료라는 소식과 함께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32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한지라 차명석 본인으로서는 후회도 물론 많지만, 처음 본인이 하고자 목표로 세웠던 선수 생활 10시즌, 억대 연봉, 300게임 출장을 모두 달성해서 나름대로 만족하고, 특히 대한민국 야구계에서 중간계투 최초의 억대 연봉 기록은 그에게서도 의미가 깊은 듯. 몇 달 뒤 조웅천이 1억 400만원에 계약해 이를 뛰어넘었다. 차명석은 "내가 먼저 계약해 최초가 된 것뿐"이라고 말했다. 1990년대 트윈스 프랜차이즈 계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을 거둔 것이 아마 그일 것이다. 김용수, 이상훈 등 엄청난 성적을 거둔 투수들이 있지만 그들은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고 출전했기에 이름 넣기에는 애매하다. 해설자로서 워낙에 자학 드립을 많이 쳐서 그 시절 야구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별 볼일 없는 선수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만만한 투수가 아니었으며, 특히 한국 야구에 전문 셋업맨이라는 역할을 가져오는 데 공헌했다는 점에서 LG 트윈스와 KBO 리그 역사에 이름 석 자 정도 남길 수 있는 괜찮은 투수였다.

주로 중간계투로 뛰었기 때문에 저평가가 있는 편이다. 차명석이 뛰던 당시에는 홀드가 도입되기 전이었고, 홀드가 도입된 것이 차명석의 선수 생활 말년인 2000년이었다. 송유석 등과 함께 홀드가 좀 더 빨리 도입되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선수.

다만 LG팬들의 좋은 인식과는 다르게 객관적으로 세이버를 통해 봐도, 높은 평가를 주기는 어렵다. 누적 WAR은 고작 12로 전체 150위권 겨우 안쪽에다가 WAR 3.47을 찍은 1997년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는 성적도 없다. 한 이닝 만에 1:8을 동점으로 만들어준 짤방으로 유명한 장문석조차 차명석보다 누적 WAR이 더 높다.

반론하자면 원래 중간계투는 소화 이닝이 적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WAR이 낮게 나온다. 계투가 누적 WAR이 낮고 전체 순위가 낮다고 세이버로 높은 평가를 주기 힘들다는건 야알못적인 관점. 보통 WAR 스케일로 2 정도가 솔리드한 1군 주전급이라는 것만 어디서 주워들은 야알못들이 저런 소리를 자주 한다. 참고로 손승락이 본격적으로 전문 불펜투수로 활동한 10시즌 동안 22.45의 WAR을 기록했으니까 야수나 선발투수 기준의 WAR 스케일을 적용하면 평범한 1군 주전급 선수가 되는데 어디 가서 손승락이 평범한 1군 주전급 불펜이라고 하면 비웃음만 당할 것이다.

메이저리그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라이브볼 시대 최고 선발투수인 그렉 매덕스의 연평균 bWAR은 약 4.63이고 역대 최고 마무리인 마리아노 리베라의 연평균 bWAR은 약 2.96이다. 비슷한 급이면 선발 WAR이 불펜 WAR보다 못해도 1.5배 수준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발과 마무리로 모두 톱클래스였던 존 스몰츠의 커리어를 봐도 마무리 시절의 WAR은 선발 시절 WAR보다 절반 내지 2/3 정도 수준이다. 누적이닝은 WAR에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므로 이닝을 쌓기 힘든 계투는 계투끼리 놓고 클래스를 비교하는 것이 당연하다. 계투가 WAR 1점대 언저리여도 계투로는 선방한 것이고, 2점대를 넘기면 뛰어난 계투로 취급받는다.

차명석이 선발로 주로 나왔던 1993년과 방위 복무로 등판이 많이 없던 1995년, 마지막 시즌이던 2001년을 제외하면 당대 중간계투 전문 투수들 중에선 꽤나 선방한 성적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불펜투수들의 경우 WAR보다는 WPA등으로 더 평가하는게 일반적이다. WAR이 디자인 자체가 불펜투수들에게는 매우 불리하게 설계되어 있다.[6]

같은 LG 출신 투수 중에서 차명석과 커리어나 방어율, 누적 WAR이 유사한 선수는 이동현이다. 위에서 비교 대상으로 언급한 장문석은 주로 선발로 나온 선수이므로 1대1 비교하기엔 부적합하다. 장문석은 통산 선발 등판이 차명석보다 세 배나 많을 정도로 중간계투 전문은 아니었다. 같은 방어율이라도 선발이 더 많은 이닝을 뛰니 WAR가 더 쌓일 수 밖에 없는 것. 그러나 그런 사정을 무시하고 굳이 두 선수를 비교한다한들 차명석과 장문석은 방어율도 유사하고 누적 WAR도 12 vs 16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중계에 비해 선발이 최소 1.5배는 WAR을 쌓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클래스가 비슷한 선수였던 것.

이동현의 경우 누적 WAR은 16.85이다. 이동현은 차명석보다 더 많은 시즌을 뛰었다. 이동현이 36세에 은퇴하여 차명석보다 4년 더 뛰었음을 감안하면 두 선수는 비슷한 WAR을 찍었고 역시 클래스도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불펜으로 대부분의 커리어를 뛰었던 선수가 WAR 12를 쌓은 것이 그저그런 선수였다고 여겨지는 것부터가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다. 차명석과 비슷하게 WAR을 9~13 정도 쌓은 차명주, 이상열, 신철인, 류택현이 그저 그런 불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이 외에도 매우 괜찮은 커리어를 쌓고도 차명석과 WAR이 비슷하거나 뒤떨어지는 불펜은 꽤 된다. 2000년대 ~ 2010년대에 전성기를 보냈던 선수들로 얘기하자면 이재우, 윤길현 같은 선수들이 WAR이 12~13대인데, KBO 팬들 중 그 누가 이 선수들을 평범한 수준의 듣보잡 선수 취급하겠는가. 위에 언급한 불펜들이 모두 한 팀의 필승조, 셋업 자리를 맡길 만한 팀의 주축 불펜이었음은 자명하다. 한 시즌 WAR을 1 이상 찍을 줄 아는 불펜이면 소속 팀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탑급 불펜이라는 것. 소속 팀을 떠나서 보더라도, 만약 전성기 시절에 트레이드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면 모든 팀이 탐낼 만한 인재들이었다. 또는 FA 시장에 나올 시, 2010년대 후반의 KBO 기준으로 총액 2~30억은 족히 받을 수준. 까놓고 말해 어느 평범한 불펜투수가 30억 FA를 따낸단 말인가. 불펜으로서 리그 수위권에 들어야 가능한 영역인 것이다.

애시당초 이런 오류는 당시 야구를 본적 없는 젊은 세대가 어설프게 줏어들은 세이버 지식으로 선수를 평가하면서 시작되는 오류이다. 예를 들어 차명석과 이동현, 장문석, 송유석, 윤길현, 류택현등을 모두 지켜본 올드팬이라면 쉽게 클래스를 인지하고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절을 체감한 적이 없는 세대가 숫자로 보면서 짧은 지식으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차명석이 역사에 남을 레전드,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불펜은 아니지만 그저 그런, 좋은 평가를 주기 힘든 선수라는 건 매우 어불성설이다. 차명석이 그간 선수 시절을 회상하며 자기비하성 개그를 해 왔는데, 그게 진짜인 줄 알고 농담을 리얼로 받는 꼴이다. 이상훈이 선발과 마무리로써 LG에서 비교적 짧은 커리어로도 최고의 임팩트를 남겼듯이 차명석 역시 중간계투로써의 임팩트는 대단했다. 특히,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엄청난 임팩트라 아니할 수 없다.

3. 은퇴 후

3.1. 지도자 경력

3.1.1. LG 트윈스 지도자 시절

2003년 시즌이 끝난 뒤 친정 팀 LG 트윈스의 투수코치로 선임되어 이후 불펜, 재활, 육성군 투수코치 등의 다양한 방면에서 코치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박종훈의 뒤를 이어 김기태 수석코치가 LG 트윈스의 감독이 되자 2011년 10월 14일 LG의 1군 메인 투수코치로 임명되었다.

그 전에 코치일 때도 큰 실적이 없었고 해설가일 때 개드립(?)을 많이 날렸던 탓에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구단 윗선의 명망있는 투수코치를 데려오라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김기태감독은 차명석을 투수코치로 기용했고 명목상 1군 투수코치일 뿐 사실상 조계현 수석코치가 1군 투수진을 총괄하는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LG 팬들로부터 의외로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나 변화구를 잘 전수해 준다는 듯했다. 2011 시즌까지 고인화되었던 김광삼 & 정재복의 부활이라든지 중간계투의 투입 타이밍이라든지 괜찮은 평가를 들었다. 아쉬운 점은 투수코치 재임 후 2012년 LG 투수들의 최고 구속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는 것. 물론 2012 시즌 LG 1~2군 투수코치진을 보면 전원이 현역 시절 변화구와 제구력이 특기였고 구속은 떨어지는 사람들이긴 했다.

2012 시즌에는 팀 평균자책점이 4.02로 3점대 평균자책점에 근접했고, 불펜 평균자책점이 3.65로 전체 3위를 기록하면서 마운드의 개선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2013 시즌에는 정현욱의 FA 영입과 더불어 팀 불펜진이 더 강해졌고, 우규민신정락, 류제국 등 토종 선발진이 자리를 잡으면서 6월 21일 기준 팀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했다. 그 와중 7월 8일 콩팥 종양 제거 수술을 받느라 2주 동안 병가를 냈다. 따라서 엔트리에서 잠시 말소되었고, 그 사이 1군 투수코치 대행은 강상수 1군 불펜 투수코치가, 1군 불펜코치 대행은 경헌호 2군 투수코치가 1군에 잠시 올라와서 맡았다. 7월 23일 후반기 첫 경기인 잠실 KIA전에 요양을 마치고 복귀하였다.

2013 시즌 시작 전 단장, 사장과 같이 모인 자리에서 2013 시즌에는 적응기라 생각하고, 빠르면 2014 시즌, 늦어도 2015 시즌까지 삼성 라이온즈의 평균자책점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공언해 모인 사람들을 어이없게 만들었다는 후문이 있다.[7] 그러나 2013시즌 LG트윈스의 팀 평균자책점은 실제 삼성을 제치고 1위를 달렸기에 수많은 팬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리고 2014년 정규 페넌트레이스가 끝나고 삼성의 평균자책점은 4.52로 2위, LG의 평균자책점은 4.58로 3위이다. 참고로 1위는 4.29의 NC 다이노스. 타고투저의 시즌으로 불린 2014년 시즌에서 팀 평균자책점이 4점대인 팀은 위 세 팀 뿐이다. 2015시즌에도 비록 타격이 멸망하며 팀은 9위로 망했지만 평균자책점은 NC에 이어 2위였다.

LG 트윈스의 2013 시즌 돌풍의 원인으로 김기태 감독의 형님 리더십, 김무관 타격코치의 무관매직과 더불어 마운드를 꾸려낸 차명석 투수코치의 능력이 상당히 높게 평가받았다. 게다가 2013 시즌 후반에 내놓은 공약으로는 2014 시즌에는 국내파 선수 중 15승을 거두는 에이스 투수를 키워내보겠다는 말도 있었다. 이런 돌풍에 가까운 활약 덕분인지 이듬해인 2014년 3월에 2013 조아제약 프로야구 대상 시상식에서 프로코치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2013년 시즌 후, 3군 투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어 팬들을 놀라게 했다. 다행히 팀 내에서 정치적인 문제랑은 상관없이, 잠시 몸을 추스르게 하기 위해 구리로 보낸 것이라고 프런트가 밝혔다. 앞서 언급했듯 신장 종양 제거 수술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음에도 가을야구까지 선수들을 지도했으니. 실제로 병원에서도 1년간 안정을 취하라는 진단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조규제가 LG 트윈스에 새로 영입되었다.

2014년 시즌을 앞두고 3군 총괄코치를 맡게 되었으나 아내의 병환으로 수술을 받게 되자 자신의 건강 문제도 있고 해서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2014년 2월 11일 3군 총괄코치직에서 사임했다. 하지만 건강과 가정상의 이유로 잠시 쉬는 형태인지라 완전 떠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 사정이 좋아지는 대로 코치직에 복귀할 예정이라고 했다.

2014 시즌 도중 김기태 감독의 사퇴 과정에서 수석코치였던 조계현이 2군 감독으로 옮기며 공석이 된 LG의 수석코치직을 맡아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기간에 팀에 합류하여 선수들을 지도할 것으로 추측되었다. 지난 2014년 2월 3군 총괄코치 사직 이후 약 7개월 만에 다시 LG에 복귀하는 셈이다.

그러나 양상문 감독은 "아직 계약서에 도장도 찍지 않았다. 설령 계약하더라도 지금 체제로도 잘 돌아가고 있으므로 당장 1군에 합류시킬 계획은 없다"며 차명석이 수석코치로 임명된다는 이야기에 선을 그었고, "10월 미야자키 교육리그 파견이라던가 손이 모자란 부분을 지원하게 될 것이며, (차명석 코치의) 선수단 합류는 2014 시즌 후가 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한편으로 LG 선수들은 차명석의 복귀를 모두 환영하는 분위기이다.관련기사

뒤이어 나온 기사내용으로 볼 때, LG에서의 차명석의 역할은 인천 아시안 게임 기간 투수코치로 파견된 조계현 2군 감독의 대행 10월 초 미야자키 교육리그 파견 선수단 담당인 것으로 보여지며, 정식 계약은 시즌 종료 후가 될 것이고 보직 또한 그 때 정해질 전망이다. 아무튼 차명석의 LG 복귀는 거의 기정사실이며 그 시기가 문제일 뿐이라는 얘기이다.

플레이오프 종료 후 LG에 복귀, 2014년 시즌 마무리 훈련을 총괄 지휘하게 되었다. 양상문 감독이 2015년 시즌을 대비한 외국인 선수 영입을 위해 시즌이 끝나고 바로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출국했고, 약 2주 동안 차 코치가 양감독을 대신하여 선수단을 이끄는 것이다. 언론에서도 그렇고 차 코치 자신도 수석코치라고 호칭하는 것을 보아 LG 수석코치직은 확정된 것으로 보인다. 관련기사

그러나 2015년 시즌 팀의 부진으로 책임을 지고 KIA 타이거즈와 맞붙은 최종전 이후 수석코치직에서 사퇴했다.

3.1.2. kt wiz 지도자 시절

그리고 조범현 감독의 제안으로 kt wiz의 투수 육성 총괄코치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다른 팀에 몸담게 됐다. 타 팀에서 시야를 쌓기 위한 것도 있고 발전 가능성을 높게 평가해 팀을 옮기게 되었다고. 시즌 중에는 1군과 2군을 오가는 투수들을 집중적으로 관리하게 될 것이라고. 어린 투수들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것을 보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시즌이 끝나고 조범현 감독이 재계약하지 못하게 되자, 육성총괄직에서 사임했다. 신임 김진욱 감독이 적극적으로 잡지 않았다고 하며, 야구발전연구소라는 유망주 육성 프로젝트가 감독, 단장 등이 바뀌면서 백지화된 것도 이유 중 하나라는 듯. kt에서는 차 코치의 사임으로 육성총괄 파트도 해체시켰으니 이쯤이면 타팀에서 투수코치직 러브콜이 올 수 있다.

스포츠 서울 야구x파일이라는 팟캐스트에 출연하여 미래의 지도자 커리어에 대해 밝힌 바로는 투수력이 굉장히 약한 팀의 투수코치를 희망한다고 한다. 해당 팟캐스트에서 여러가지 얘기를 했는데 특히 김기태 기아 감독에 대해 인간적으로나 지도자로서의 역량으로나 고평가를 내리고 있으며 LG에서의 인연으로 현 한화의 박종훈 단장과도 관계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3.2. 해설위원 경력

3.2.1. 해설위원 1기

은퇴한 후 허구연의 제안으로 2002년부터 2003년까지 MBC 스포츠에서 메이저리그 해설위원을 맡았다. 해설가로 활동한 시절에 특이한 어록 등을 많이 남겨서 재미를 선사했는데, 수많은 어록들은 해설가를 맡았던 단 1년 사이에(…) 나온 것이다. 해설자 경력은 다음 해에 코치 신분으로 친정 팀에 복귀하게 되면서 마무리하게 되는데, 해설을 계속 해보라는 권유도 많았지만 자신은 현장에서 뛰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해서 코치로 복귀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MLB 중계를 처음 할 당시에는 신승대 아나운서와 호흡을 맞췄다고 한다.

3.2.2. 해설위원 2기

2014년 3월 2일 11년 만에 MBC SPORTS+에 해설자로 돌아왔다. 1년 뒤 현장에 복귀하려면 경기 감각과 더불어 MLB 해설을 하면서 공부도 같이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선택했다는 것이 이유. 오전에 메이저리그 방송을 하고 저녁에 가족을 돌볼 수 있다는 점 또한 이유로 작용한 듯 싶다. 그러나 메이저리그 해설만 맡는 것은 아니며 한국프로야구 중계와 베이스볼 투나잇 출연도 병행했다. 결국 2014년 3월 8일 시범경기를 통해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이후 2014년 시즌 초반 LG 트윈스의 투수진이 막장으로 치닫자 새삼스레 차명석의 위엄이 부각되기도 하였다.그런데 김기태 감독 사퇴 관련 기사 내용을 보면 자진 사퇴라기 보다는 프런트가 계약을 해주지 않아서 그만둔 것처럼 보인다.

2014년 9월 13일, 엠스플의 해설위원을 그만두고 친정팀인 LG 트윈스의 코치로의 복귀가 확정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같이 중계를 하던 한명재 캐스터도 경기 중간에 차명석이 해설자를 그만둔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10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이렇게 또 헤어지게 된다니 아쉽다면서 솔직한 감정을 토로했다.

스스로는 개인적인 사정이라고 했지만, 알고 보니 코치로 현장에 복귀하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차명석은 이날 중계 초반에는 선수들 사이에 줄무늬 피가 흐른다는 말을 한다고 언급했으며, 스트라이프 셔츠에 붉은 넥타이를 매고 왔다.

3.2.3. 해설위원 3기

kt 육성총괄직을 사임한 후 MBC SPORTS+와 해설위원 계약을 체결하며 해설 복귀를 선언했다. 여담으로 차명석 위원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한명재 캐스터와 중계할 때 사진인데, 본인이 기계치라 바꾸는 법을 잘 몰라서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2017년 5월 3일 KBO리그 롯데 : kt 전에서 한명재 캐스터와 허구연 해설위원과 함께 지상파 해설 데뷔전을 치렀다. 지상파 두 번째 경기는 2018년 5월 22일 KBO리그 NC : LG 전에서 김나진 (지상파 캐스터)와 허구연 해설위원과 함께 1년만에 다시 지상파에서 중계를 맡는다.

해설은 전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지만 유독 극도의 두산 베어스 안티 해설로 두산팬들에게는 평가가 매우 나쁘다. 두산 경기를 중계하면 무조건 상대팀 위주의 해설을 하며, 두산의 플레이에 대한 칭찬은 절대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두산 공격 때 상대팀이 잘 막으면 투구나 볼배합을 칭찬하며, 반대로 두산 타자가 좋은 타격을 하면 이에 대해 언급을 전혀 하지 않으며 대신 볼배합이 아쉬웠다 등의 해설만 하는 식이다. 물론 두산 수비시에는 반대가 성립한다. 2015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두산이 14년만에 우승을 거의 확정짓는 정수빈의 3점 홈런이 터졌을때는 몇분 이상 침묵하면서 탄식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2018년 LG와의 경기에서 8점차를 역전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 침묵하였다. 아마도 두산팬들이 좋아할만한 상황에서는 본인의 분노의 감정을 꾹꾹 참느라고 아예 말을 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차라리 마해영마냥 대놓고 문제 발언을 하면 공론화라도 될텐데 발언 자체는 전혀 문제가 없기 때문에 공론화도 안 되고 있는 실정이다. 차명석 해설에 대한 두산팬들의 여론

심지어 2017년 KBO 플레이오프 4차전, 심지어 지상파 중계에서도 이런 식의 편파 해설을 거리낌없이 하였고, 당연히 수많은 시청자들에 의해 게시판은 난리가 났으며 오죽하면 담당 PD한테 방송 중에 편파 자중하라고 직접 쿠사리를 먹었다. 제대로 된 사과 대신 변명만 늘어놓고 넘어간 건 덤. 물론 이후로도 해설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차명석이 LG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엠스플이 특유의 어그로로 인해 호불호가 갈리는 점과 합쳐져서 잠실시리즈+엠스플+차명석은 그야말로 두산팬들이 최고로 극혐해 마지 않는 조합 중 하나다. 그중 압권은 7월 21일 경기로 경기 초반 LG가 크게 앞서나가자 싱글벙글하며 칭찬을 잔뜩 늘어놓다가 7회 두산이 매섭게 추격하자 역시나 LG의 투수 교체에 대한 아쉬움만 잔뜩 늘어놓는 해설을 했다. 그리고 두산이 아예 경기를 뒤집어버리자 침묵만 지키다가 서상우의 투런으로 잠시 반색하더니 그 뒤로도 두산의 점수가 계속되자 다시 침묵하여 남은 경기 내내 해설을 거의 하지 않았다(...). 8초부터는 사실상 한명재와 박재홍 둘이서 해설한 수준...

차명석이 왜 극도로 반 두산 해설을 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현역 시절을 두산과 라이벌 의식이 강한 LG에서 보내서 그런 게 아니냐는 막연한 추측만 돌 뿐... 차명석 이야기만 나오면 돡갤, 엠팍 가릴 거 없이 부정적인 반응이 나온다.

해설과는 별개로 LG 트윈스가 2018년 들어 타선의 힘이 강해진 대신 투수진이 완전히 붕괴되어 버리면서 외인선발 투수 2명과 어린 불펜 투수 1명을 빼고는 도저히 믿고서 불펜을 운영할 수 없는 지경까지 되자 강상수를 경질하고 차명석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는 팬들의 요구가 거셌다.

결국 2018년 10월 19일, 양상문의 후임으로 LG 트윈스 단장으로 선임됐다. 선임됐다는 기사가 뜬 당일, 차명석은 하필이면 보스턴 레드삭스 대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2018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5차전 해설 중이었다. 아마도 2018년 월드 시리즈까지 다 끝나고 나서 취임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2019년 두산은 기어이 SK와의 9경기를 뒤집고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나중에 스톡킹에서 밝힌 바로 원래 월드시리즈 현지 해설에 낙점이 되었고 본인도 그 자리를 위해 1년 동안 달렸는데 출국 3일전 LG 사장에게 단장 취임을 제안 받았고 월드시리즈 끝나고 가면 안되겠냐고 했다가 헛소리 하지 말라고 하면서 바로 취임하고 월드시리즈는 저 멀리 날아갔다고 한다.

3.3. 프런트 경력

4. 코칭 스타일

2013년까지 LG 트윈스의 투수코치로 재직하면서 LG 트윈스의 마운드를 부활시켰고 kt wiz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했으며 야구 팬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정명원 투수코치는 전형적인 속구 & 포크볼 전수에 강력한 카리스마로 지도하는 스타일인데 반해, 역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차명석 투수코치는 정작 스타일이 정명원 투수코치와 완전히 다르다.

우선 안정된 제구부터 먼저 잡아야 한다는 지론을 가졌으며, 실제로 주축 투수들의 볼넷이 크게 줄었다. 사실 그 동안 LG를 거쳐간 많은 투수코치들이 대부분 이런 스타일이었지만 능력이 딸리는 고로 스피드만 왕창 줄고 제구는 눈꼽만큼 업된 악순환을 불러왔는데, 차명석은 이렇게 하면서 투수들의 제구도 확실히 잡고 그 나비효과로 속구도 자신있게 던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만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면, 신정락에게 구속을 약간만 줄이자고 했을 때 설득에 두 달이 걸렸다는 일화가 있기는 하다.

2번째로는 포크볼 성애자 소리를 듣는 정명원과 달리 대표적인 포크볼 족까 스타일이다. 투수들에게 무리한 부하가 들어가는 변화구를 무조건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외의 변화구 전수에 있어서는 역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다. 주로 투수의 어깨나 팔꿈치를 덜 갉아먹는 종류의 변화구를 가르치는 방법을 쓴다.

3번째로는 투수를 절대로 갈구지 않는다는 것. 은근히 자존심이 강한 류제국이 승리 투수를 눈앞에 두고 위기에 빠질 때면 그가 마운드로 올라와 씨익 웃으면서 "내려가기 싫지? ㅋㅋㅋ"라는 말로 긴장을 풀어주며 잘 다독여 주었고, 멘탈이 약하다는 평가를 듣는 신정락을 확실하게 선발의 한 축으로 만든 점은 최고의 성과라 할 수 있다. 유원상을 중간계투 보직으로 고정하고 유원상어 드립이 나올 정도로 활약하게 만든 당사자도 차명석이었다.

아무튼 확실한 사실은 6668587667로 대표되는 LG의 암흑기 시절 상상조차 불가능했던 투수 왕국을 차명석이 구축했다는 것이다. 2014년 시즌 막판 차명석이 LG 코치로 복귀한다는 소식에 LG 팬들은 물론 선수들 모두가 쌍수를 들고 입을 모아 환영했다는 점도 그가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 투수코치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양상문 단장이 감독이나 단장 체제 때 일명 아바타 강상수 코치가 최악의 경우를 맞이하는 가운데 다시 보고 싶다는 의견도... 그리고 강상수는 KIA 이적 이후 투수를 작살내고 있어서 평가가 더 올라가고 있다.

5. 여담

6. 관련 문서


[1] ~6월 6일[2] 6월 7일~[3] 차명석의 신장 혹 제거수술로 인해 2013년 7월 9일~7월 22일은 강상수 1군 불펜코치가 대행.[4] 시즌 시작 전 개인적 가정사로 사임.[5] 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야구에선 불펜 에이스 투수가 선발 다음등판해 세이브까지 올리는 중무리 투수의 개념만있었지 셋업맨과 마무리투수로 분리되지 않았다. 차명석의 현역시절은 이제 막 셋업맨과 마무리라는 개념이 정착하려고 하던 때이다.[6] WAR의 경우, 누적 이닝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많은 이닝을 소화할 일이 없는 불펜투수가 WAR을 높게 기록하기 힘들 수밖에 없다.[7] 윤세호 기자의 회고록 '승리의 함성을 다 같이 외쳐라'에도 이 얘기가 나온다. 그 때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쟤 취했다. 데리고 들어가라"(...)였다고..[8] 보통 양상문이 짧은 시간 안에 팀 리빌딩을 이뤄낸 명단장으로 평가받으며, 그 리빌딩을 잘 갈고 닦은 것은 차명석이라 평가받는다. 트레이드 실패도 사실 정찬헌을 제외하면 잉여 자원으로 이뤄낸 트레이드기도 해서 실패가 팀 뎁스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하기 뭐하다.[9] 당장 2023시즌에조차 최원태 트레이드 실패가 발생했다. 다만 결과가 망한거지 당시엔 할만한 트레이드긴 했다. 게다가 트레이드 당해와 다음해 실패작으로 평가받던 함덕주가 3년차인 2023년에 완벽하게 부활하면서 이 트레이드는 성공작이 되었다.[10] 비슷한 사례로 박노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