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00:21:11

장준관

장준관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oeiwjnFKre1sqk8veo7_r1_540_2.jpg 1999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MVP

LG 트윈스 등번호 35번
김태원
(1986~1998)
장준관
(2000~2003)
진필중
(2004~2007)
LG 트윈스 등번호 27번
최향남
(1997~2003)
장준관
(2004~2006)
박명환
(2007~2012)
LG 트윈스 등번호 62번
서용빈
(2005~2006)
장준관
(2007~2008.5.31.)
김태군
(2008.6.~2011)
}}} ||
파일:external/file.thisisgame.com/707l.png
장준관
張準菅 | Jun-Kwan Jang
출생 1981년 4월 14일 ([age(1981-04-14)]세)
대구광역시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학력 대구중앙초 - 경상중 - 대구상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2000년 2차 1라운드 (전체 3번, LG)
소속팀 LG 트윈스 (2000~2008)
지도자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후4. 여담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전 LG 트윈스의 투수.

2. 선수 경력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등학교) 출신으로 2000년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 후보로 유력한 선수였는데, 대구상고 시절에는 당시 경북고투수배영수(!)보다도 더 뛰어난 선수였다. 당시 대구상고의 에이스로 1999년 대구 개막전에서 고교야구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시구를 했고, 1999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에서는 1년 후배 이정호와 함께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최우수선수로 선정됐고 청소년 국가대표팀에도 뽑혔다. 하지만 삼성 라이온즈는 잠재성을 높이 평가한 배영수를 1차 지명했으며 LG 트윈스가 그를 2차 1순위로 지명했다.[1]

계약금도 2억 8천만 원으로 배영수보다 3천만 원을 더 받았다. 하지만 첫 해부터 1군 20경기 2승 평균자책점 5.14로 부진하면서 이후로는 1군에 올라와도 계투로나마 간간히 등판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2007년 1군에서 겨우 3경기 등판한 게 1군에서의 마지막이었다. 그 뒤 오버핸드에서 사이드암으로 변신을 시도했으나 별 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하면서 2008년 6월에 신윤호, 박석진 등과 함께 웨이버 공시되어 방출당했다.

3. 은퇴 후

은퇴 후 모교인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에서 코치를 하고 있다. 2014년 경 LG 트윈스 갤러리에 본인인증을 했다.

4. 여담

당시 LG 트윈스의 상위픽 흑역사 선수 중 하나로 LG는 1996년 이정길, 1997년 김민기, 1999년 김상태, 2000년 최경환, 장준관 2002년 김우석, 김광희, 2004년 장진용, 2005년 박병호, 정의윤, 2006년 김기표, 신창호 2007년 김유선, 2008년 이형종[2]등 1996년부터 2008년까지 1차~2차 2라운드로 지명한 선수들을 보면 박용택이나 2009년 1차 지명 오지환 같이 성공한 케이스도 있지만 망한 사례가 많다. 이 외에도 2012년 조윤준, 2013년 강승호, 2014년 임지섭등등 많다.

5. 관련 문서


[1] 장준관은 고등학교 내내 좋은 기량을 선보였고 최정상권 투수로 활약했지만 고3 때 계속 슬라이더 위주로 피칭을 한 점, 계약금을 올릴 목적으로 미국행을 추진한 점, 배영수의 딱 벌어진 어깨, 면담 시 보여줬던 배영수의 강한 의지와 정신력 등을 높게 평가해 배영수로 선회했다고 한다. 프로야구 스카우터들은 완성형과 소재형 선수를 놓고 고민하는 데 제구력은 형편없지만 구속이 좋은 원석이고 그런 원석을 발굴하는 건 스카우터, 원석을 갈고 닦는 건 코칭스태프의 몫이다. 결과적으로 스카우트의 판단이 옳았던 셈. 마쓰자카 다이스케류현진처럼 프로야구에 데뷔해 당장 1군 에이스급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는 완성형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북일고에서 에이스 놀이하던 김용주가 폭망한 게 그 예다.[2] 그나마 이형종은 오랜 방황을 끝내고 프로에 안착하는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