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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2 13:01:41

장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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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트윈스 등번호 26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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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석
(1997~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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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005)
장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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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2006)
장문석
(2007~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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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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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석
張文碩 | Jang Mun Seok
출생 1974년 12월 15일 ([age(1974-12-15)]세)
부산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대신초 - 대동중 - 경남상고 - 동아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7년 2차 1라운드 (전체 3번, LG)
소속팀 LG 트윈스 (1997~2005)
KIA 타이거즈 (2006~2009)
지도자 부경고등학교 야구부 코치(2010~2011)
부경고등학교 야구부 감독(2011~2012)
1. 개요2. 선수 경력3. 연도별 성적4. 흑역사5. 여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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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G 트윈스, KIA 타이거즈에서 활동했던 투수.

2. 선수 경력

2.1. LG 트윈스

1997년 LG 트윈스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하며 상당한 기대를 모았으나, 기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데뷔시즌이던 1997시즌 7경기 2패에 방어율 13.50에 그쳤고, 5월 4일에는 대구에서 열린 삼성과의 경기에서 선발등판하여 5:27이라는 역대 최악의 대패의 원흉이 되기도 했다. 1998년에는 부상으로 인한 재활로 출장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9년 6월 28일 해태와의 홈경기에서 선발등판해 5이닝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데뷔 첫 승리를 기록하더니 7월 26일 사직 롯데전에서 데뷔 첫 완봉승[1]에 성공하며 무너진 LG 마운드의 난세영웅이 되기도 했다.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고 스윙맨으로 나오며 4승3패4세이브에 방어율 4.21로 입단 3년만에 드디어 1군 무대에서 제 몫을 했다.

2000년에는 두산과 LG의 플레이오프 6차전에 등판해서 김용수가 다 이겨놓은 9회초 2아웃에서 동점홈런, 연장전에서는 역전 홈런을 맞아 한국시리즈 진출을 놓치기도 했다. 두산과의 플레이오프에서 역전패를 허용한 임팩트가 워낙 커서 2000년에 부진한 것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 장문석은 정규시즌에는 상당히 잘 했다. 2000년은 6연승에 잠시나마 탈삼진 1위도 해보기도 했고, ERA는 3.42로 리그 6위인데 이는 우승팀 현대의 주축투수였던 정민태, 김수경보다도 높은 호성적이었다. 심화지표로는 스탯티즈 기준 ERA+ 130.9(선수 시절 2위), FIP+ 130.7(3위)에 WAR은 3.42를 기록하면서 커리어 하이로 여겨지는 2002년보다 높다.[2] 이 성적은 00시즌 LG에서 데니 해리거 다음 가는 성적으로, LG의 토종 에이스 역할을 했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못한 것이 이미지로 굳어버렸을 뿐.

2000시즌 장문석은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보직이동[3]과 마구잡이식 등판으로 인해 후반기에는 거의 퍼져버린 상태였다. 플레이오프에서 탈락의 원흉이 된 데는 2차전에서는 김동주에게 강습타구를 맞았고, 5차전에서는 심정수에게 역전 홈런을 맞는 등 부진했음에도 불구, 그것을 감안하지 않고 올려버린 이광은 감독의 책임이 크다. 더불어 페넌트레이스 때 이상하게 투수운용을 해서[4] 장문석이 퍼지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것까지... 아무튼 이 때 이광은 감독이 장문석을 혹사시키는 바람에 그 여파는 2001년까지 이어져 ERA 7.74를 기록하는 등 크게 부진했다.

그러다가 2002년 다시 각성, 이동현, 이상훈과 함께 든든한 승리조가 되어 LG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크게 일조했다. 이 때의 기록은 전천후 투수로 등판, 무려 10승 3패 4세이브 9홀드 평균자책점 1.60. 참고로 이 사람, 59경기에서 100이닝 넘게 소화했다. 이동현신윤호에 비해서 해당 선수가 묻혀서 그렇지 원조 살려조라고 봐조 무방한 수준. 이후 2003년에도 전천후로 나와 39경기 100이닝을 소화했다. 전반기 불펜으로는 부진했으나 시즌 중반 전격 선발 전환후 7승을 기록하며 총 9승을 거뒀다. 2004년에는 선발투수로 주로 나와 150이닝 동안 10승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526 대첩 항목과 아래 흑역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경향이 매우 강했고, 또한 김성근 재임 시절 혹사의 여파인지, 부상에 줄곧 시달리기도 했다. 장문석의 이미지가 이도저도 아닌 이미지로 굳어진 것은 이광은 - 김성근 - 이광환 세 감독이 계속해서 혹사시키는 바람에 퍼져서 생긴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2.2. KIA 타이거즈

2005 시즌이 끝난 후 손상정, 한규식과 함께 마해영, 서동욱, 최상덕을 상대로 KIA 타이거즈트레이드되었다.[5][6] 여담으로 장문석은 KIA로 트레이드될 당시 자신의 친정팀인 LG를 대놓고 디스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팀을 위해 뼈빠지게 던졌는데 돌아오는 것은 토사구팽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때부터 부상과 자기관리 실패로[7] 인해 본격적인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KIA 이적 후 첫 시즌인 2006년에는 마무리 투수로 나와 1승 3패 15세이브를 기록하여 겉으로는 괜찮은 성적을 냈으나, 후반기부터 맞아나가기 시작하며 마무리 자리를 윤석민에게 내준다. 이후 다시는 부활하지 못하면서 2007년과 2009년에는 1군 경기 출전 기록이 없고, 2008년에는 밑의 통산 기록에서 보다시피 승패 없이 패전처리조 격으로만 나와 승, 패, 세이브, 홀드 중 아무것도 기록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김진우에게 노장진을 소개시켜 나쁜 물을 들였다고 KIA팬들에게 이미지도 안 좋다. 김진우의 해명에는 한두 번 만난 게 다였다곤 하지만.

결국 2009 시즌 후 KIA에서 방출당했다. 2009년 한국시리즈 이후 선수단 정리 과정에서 방출당한 것.

2.3. 은퇴 후

이후 자신의 스승인 김성근 감독 밑으로 들어와 재기하기 위해 SK 이적을 시도하였으나, 무릎 부상이 재발해 결국 은퇴하고 말았다. 부상 문제와는 별개로, KIA 시절인 2006년 5월 9일 문학 SK전에서 장문석은 SK의 외국인 타자였던 시오타니 가즈히코를 맞췄는데, 시즌 초 SK의 주전 3루수로 타선에서 맹타를 휘두르던 시오타니는 이 때 손가락 골절상을 당하며 방출당했고, 시즌 후 그대로 선수 경력을 접고 말았다. 팀 역시 용병의 갑작스런 전력 이탈로 전체적으로 일정이 꼬이면서 6위로 시즌을 마감했고, 조범현 감독도 물러났다. 그런 장본인을 영입하려는 데 대한 SK 팬들의 여론은 매우 좋지 않았다.

은퇴 후 모교인 부경고등학교(경남상고에서 바뀜)의 코치를 지냈고, 이후 감독을 맡기도 했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3.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ERA 경기 완투 완봉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1997 LG 13.50 7 0 0 0 2 0 0 12⅔ 19 4 10 2 8
1998 1군 기록 없음
1999 4.21 23 1 1
(5위)
4 3 4 0 62 54 4 39 3 51
2000 3.42 40 0 0 9 8 11 0 137 123 10 50 12 134
2001 7.74 14 0 0 1 3 0 0 43 50 6 35 2 23
2002 1.60 59 0 0 10 3 4 9 101⅓ 75 3 39 3 86
2003 4.40 39 0 0 9 6 0 8 100⅓ 112 12 40 5 53
2004 4.03 28 0 0 10 8 1 0 152 168 15 55 8 75
2005 3.75 27 1
(5위)
0 5 5 7 0 84 93 2 31 5 60
연도 소속팀 ERA 경기 완투 완봉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2006 KIA 4.36 29 0 0 1 3 15 0 53⅔ 51 4 26 3 36
2007 1군 기록 없음
2008 5.40 21 0 0 0 0 0 0 20 22 0 6 4 11
2009 1군 기록 없음
KBO 통산
(10시즌)
4.05 287 2 1 49 41 42 17 766 767 60 331 47 537

4. 흑역사

선수 본인이 대량실점하며 큰 인상을 남긴 경기가 꽤 있다.

입단 첫 해인 1997년 어린이날 3연전의 두번째 경기인 5월 4일 대구 삼성전 선발로 등판했다가 정경배의 연타석 만루홈런 중 첫 번째를 헌납했고, 1⅓이닝 7피안타 10실점을 기록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 때 LG는 삼성과의 3연전 중 홈런 17개를 포함 무려 49점(…)을 내 주면서 3경기를 모두 패했다. 이후 천보성 당시 LG 감독이 부정배트 의혹을 제기했지만, 검증 결과 사실무근으로 입증되어 2중의 굴욕이 되었다.

그리고 2000년 플레이오프에서 4-3으로 앞서고 있던 9회초 투아웃에서 김용수로부터 교체되어 등판하였으나 안경현에게 동점홈런을 허용하고, 그리고 연장전에서는 심정수에게 역전홈런까지 맞아 패전, 탈락의 불명예를 떠안아야 했다. 다만 이는 전술했듯 플옵 내내 부진했는데도 장문석을 올렸던 감독의 책임이 큰 부분.

또한 2005년 5월 26일 롯데전에서는 무려 1이닝 7실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 날 경기는 결국 엄청난 난타전이 된 끝에 롯데가 13:11로 승리. 이 경기는 526 대첩으로 기록되었으며, 엘 꼴라시코의 원조격 경기라 할 수 있다. 물론 아래의 짤방은 지금도 야구팬들에게 전설로 회자된다.

파일:attachment/file449804_1.jpg

그리고 KIA로 이적한 첫해인 2006년 5월 9일, 인천 SK 와이번스전에서 SK의 일본인 타자 시오타니 가즈히코에게 사구를 던져 그의 선수 커리어를 끝내버렸다. 공교롭게도 18년 후인 2024년 4월 17일, 같은 구장에서 윌 크로우가 KBO 통산 최다홈런 신기록을 눈앞에 둔 최정에게 사구를 던짐으로서 장문석 사구 사건이 재소환되기도 했다.

5. 여담

6. 관련 문서


[1] 이 경기 승리로 LG는 롯데와의 사직 4연전을 싹쓸이했다.[2] 그 해 성적은 40경기 등판, 137이닝 9승 8패 11세이브를 기록했다.[3] 마무리로 시작해 5월 선발이 되었다가 8월 다시 마무리로 전업했다.[4] 마무리를 5번이나 바꿨다. 선발요원이었던 최향남, 장문석, 이승호, 경헌호 등이 마무리를 돌아가면서 하고 원래 마무리였던 김용수는 마무리-선발-계투 순으로 전환시키는 식으로... 이해 LG의 국내 투수 선발등판은 김용수의 18회가 최다로, 해리거를 빼고는 붙박이 선발이 없다시피 한 수준이었다.[5] 양 팀 모두 폐품정리 트레이드였다고 봐도 무방했다. 마해영은 기아에서 서정환 감독과 원수도 지고 하락세를 탔으며, 최상덕 역시 2004년을 기점으로 노쇠화로 무너졌다. 둘 다 LG에서 퇴물취급 받고서 2시즌도 안 돼서 방출되었다. 그나마 서동욱이 LG에서 오래 뛰었지만, 넥센으로 갔고 10년만에 친정팀으로 가서 포텐셜이 뒤 늦게 터진 노망주가 되었다.[6] 장문석과 묶여서 온 두 선수들도 다를 바가 없었다. 저 중에서 가장 오래 뛴 사람이 장문석.[7] LG 시절 전천후로 나와 혹사당한 탓에 피로가 누적되어 부상이 찾아온 영향도 있었으나 LG 시절 사진과 KIA 시절 은퇴하기 직전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체중이 상당히 증가했다는게 눈에 보일 정도로 자기관리에 소홀한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