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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6:45:19

영구 결번/KBO 리그

KBO 영구결번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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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일람
3.1. OB 베어스 - 두산 베어스
3.1.1. 영구 결번3.1.2. 설명3.1.3. 이후 영구 결번은?
3.2. 롯데 자이언츠
3.2.1. 영구 결번3.2.2. 설명3.2.3. 이후 영구 결번은?
3.3. 삼성 라이온즈
3.3.1. 영구 결번3.3.2. 설명3.3.3. 이후 영구 결번은?
3.4. 빙그레 이글스 - 한화 이글스
3.4.1. 영구 결번3.4.2. 설명3.4.3. 이후 영구 결번은?
3.5. 해태 타이거즈 / KIA 타이거즈
3.5.1. 영구 결번3.5.2. 설명3.5.3. 이후 영구 결번은?
3.6. MBC 청룡 / LG 트윈스
3.6.1. 영구 결번3.6.2. 이후 영구 결번은?
3.7. SK 와이번스 / SSG 랜더스
3.7.1. 영구 결번3.7.2. 이후 영구 결번은?
3.8. 키움 히어로즈
3.8.1. 영구 결번
3.9. NC 다이노스
3.9.1. 영구 결번3.9.2. 이후 영구 결번은?
3.10. kt wiz
3.10.1. 영구 결번3.10.2. 이후 영구 결번은?
4. 임시 결번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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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정일 기준으로 KBO 리그 역대 첫 번째, 두 번째 영구 결번은 모두 OB 베어스(現 두산 베어스)가 가지고 있다. KBO 리그 1호 영구결번의 주인공은 OB의 백업 포수였던 김영신의 54번인데 성적이나 공헌도가 아닌 추모의 의미로 영구 결번에 지정된 유일한 예외 사례다. 두 번째 영구결번의 주인공도 OB 출신인데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 선수 대표 선서를 했던 윤동균의 10번이다. 윤동균의 경우 박철순과 함께 팀을 상징하는 선수로서 활약했던 점을 고려해[1] 영구결번으로 지정한 것이다. 다만 1990년대 중반 윤동균의 영구결번은 해제됐다.[2] 세 번째는 해태 타이거즈에서 숱한 기록을 써낸 '국보 투수' 선동열의 18번이다.기사 2024년 기준 KBO 리그 내 영구 결번 주인공은 모두 17명.

2024년까지 이대호를 마지막으로 하여 총 17명의 선수가 영구결번의 영광을 얻었고, 이후에는 오승환[3], 최정, 김광현, 양현종, 류현진[4][5] 정도가 가장 유력한 영구결번 후보로 꼽힌다.

2. 특징

대체로 일본프로야구보다는 영구 결번이 약간 후하고[6], 미국 메이저리그에 비해 영구 결번이 굉장히 엄격한 편이다. 그리고 팀마다 영구결번 지정하는 기준선도 상당히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롯데 자이언츠는 타 팀에 비해서 영구결번 부여에 엄격한 편이다. 기본적으로 원 클럽 플레이어[7] 혹은 원 클럽의 위상에 준하는 선수들[8] 중 꾸준한 누적 혹은 단기 임팩트로 소속팀에 크게 공헌한 선수들이 대상이 된다. 팀 소속을 떠나 야구 성적 자체로 위대한 대선수들뿐이므로, 영구결번 선수들은 다 KBO 기준으로 레전드라 할 수 있다.[9]

다만 영구 결번의 주체는 각 구단이기 때문에, KBO 전체에서 레전드 대우를 받는 위대한 선수라도 구단과 마찰이 있었다면 영구 결번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대표적인 것이 사망 후에도 푸대접을 하다가 롯데 팬들의 분노 여론에 떠밀려 간신히 영구 결번으로 지정된 최동원의 11번, 사용한 등번호가 영구 결번이긴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후배 선수의 이름으로 영구 결번이 된 장효조의 10번이 있다.

특히 KBO는 팀 수가 적고 정통성과 상징성을 중시하는 분위기 때문에 영구 결번에 원 클럽 플레이어라는 조건을 타 리그보다 엄격하게 따지는 경향이 있다.[10] 그래서 현재까지 자발적인 이적은 단 한 명도 영구 결번이 된 적이 없다. 해태 시절 19번을 달았던 이강철도 자의적으로 팀을 옮긴 적이 있었기 때문에 영구 결번이 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11] 그래도 해태와 LG를 거쳤던 양준혁, 현대를 거쳤던 박경완 등의 사례를 보면 원 클럽 플레이어만 영구 결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양준혁과 박경완은 자의적인 이적이 아니라는[12] 이유도 있지만, 차후 양의지가 영구 결번으로 지정된다면 짧은 기간의 이적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한 NPB나 MLB로의 진출은 엄밀하게 따지자면 원 클럽 플레이어 조건은 깨지긴 하지만, 같은 리그가 아니기도 하고 포스팅 보상도 쏠쏠하게 들어오는 데다 선수가 더 큰 무대에서 도전하는 셈이라 갈 수만 있다면 기꺼이 진출을 도와주는 편이다. 그렇기에 구단이나 팬들은 선수가 해외 경력을 마치고 자팀으로 복귀하기만 한다면 여전히 원 클럽 플레이어로 대우해 준다.[13]

일본에서는 영구결번보다는 번호 세습을 선호해서 그렇고 옐카에서도 언급했듯이 아직 리그 차원의 명예의 전당이 없는[14] KBO 특성상 구단 영구결번이 사실상 명예의 전당을 대신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서 미국에 비해 기준이 상당히 높다. 그렇기에 이들은 예외적인 경우인 김영신, 선정 시점에서 아직 현역이라 후보군에서 제외된 이대호를 제외하고 전원이 KBO 40주년 레전드 4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키움 히어로즈, NC 다이노스, kt wiz의 경우 아직 구단 역사가 짧은 관계로 영구결번이 없으며[15], 해체된 구단인 현대 유니콘스, 쌍방울 레이더스도 영구결번이 없다.[16]

3. 일람

KBO 리그 역대 영구 결번 현황
순번 등번호 이름 영구 결번 지정 구단 영구 결번 지정일 소속 구단 변천사 KBO 내 원 클럽 맨 여부 비고
1 54 김영신 OB 베어스 1986년 8월 16일 OB(1985~1986) O 최초이자 유일한 추모 의미의 영구 결번
2 10 윤동균 OB 베어스 1989년 8월 17일 OB(1982~1989) O 1995년 영구 결번에서 해제[17]
2 18 선동열 해태 타이거즈 1996년 1월 16일 해태(1985~1995)-주니치(1996~1999) O[A] [19]
3 41 김용수 LG 트윈스 1999년 4월 19일 MBC-LG(1985~2000) O 최초의 영구 결번식 수혜자[20]
4 21 박철순 두산 베어스[21] 2002년 3월 28일[22] MIL 산하 마이너(1980~1981)-OB(1982~1996) O[A] [24]
5 22 이만수 삼성 라이온즈 2003년 6월 16일 삼성(1982~1997) O [25]
6 35 장종훈 한화 이글스 2005년 8월 29일[26] 빙그레-한화(1986~2005) O
7 23 정민철 한화 이글스 2009년 9월 10일[27] 빙그레-한화(1992~1999)-요미우리(2000~2001)-한화(2002~2009) O[A] [29]
8 21 송진우 한화 이글스 2009년 9월 22일[30] 빙그레-한화(1989~2009) O
9 10[31] 양준혁 삼성 라이온즈 2010년 9월 19일 삼성(1993~1998)-해태(1999)-LG(2000~2001)-삼성(2002~2010) X[32]
10 11 최동원 롯데 자이언츠 2011년 9월 21일[33] 롯데(1983~1988)-삼성(1989~1990) X[34] 사망 이후 영구 결번 지정 2호[35]
11 7 이종범 KIA 타이거즈 2012년 4월 4일[36] 해태(1993~1997)-주니치(1998~2001)-KIA(2001~2012) O[A]
12 26 박경완 SK 와이번스 2014년 3월 31일[38] 쌍방울(1991~1997)-현대(1998~2002)-SK(2003~2013) X[39]
13 9 이병규 LG 트윈스 2017년 7월 9일 LG(1997~2006)-주니치(2007~2009)-LG(2010~2016) O[A] 한국시리즈 우승 미경험자[41]
14 36 이승엽 삼성 라이온즈 2017년 10월 3일[42] 삼성(1995~2003)-치바 롯데(2004~2005)-요미우리(2006~2010)-오릭스(2011)-삼성(2012~2017) O[A]
15 52 김태균 한화 이글스 2021년 5월 18일[44] 한화(2001~2009)-치바 롯데(2010~2011)-한화(2012~2020, 2021[C]) O[A] 한국시리즈 우승 미경험자[47]
16 33 박용택 LG 트윈스 2022년 6월 20일[48] LG(2002~2020, 2022[C]) O 한국시리즈 우승 미경험자[50]
17 10 이대호 롯데 자이언츠 2022년 9월 29일[51] 롯데(2001~2011)-오릭스(2012~2013)-소프트뱅크(2014~2015)-시애틀(2016)-롯데(2017~2022) O[A] 한국시리즈 미경험자[53]

3.1. OB 베어스 - 두산 베어스

3.1.1. 영구 결번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131230><tablebgcolor=#131230>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svg두산 베어스
영구 결번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파일:OB베어스 영구결번_김영신.svg파일:OB베어스 영구결번_김영신.svg 파일:OB베어스 영구결번_박철순.svg파일:OB베어스 영구결번_박철순.svg
김영신
(1986.08.16.)
박철순
(2002.04.05.)
선수명 하단 일자: 은퇴식 및 영구 결번식 진행일
}}}}}}}}}}}} ||
두산 베어스 영구 결번
김 영 신
54
OB 베어스의 유망주 포수였으나, 성적 부진의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친 비운의 선수로 베어스 구단에서 추모의 의미로 영구결번을 지정했다. KBO 리그 최초의 영구 결번 선수이자, 통산 성적이나 활약이 아닌 추모의 이유로 영구 결번된 현재까지 유일한 경우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현재 두산 베어스에서도 54번은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고 있다.[54][55]
두산 베어스 영구 결번
박 철 순
21
KBO 리그 베어스 원년 우승을 이끌었고, 여러 차례 부상을 입고도 재기에 성공해 '불사조'라는 별명으로 칭해진 베어스의 아이콘. 90년대 중후반까지 김성한, 이만수, 신경식과 함께 원년 멤버 4인방 중 하나로 활약했다. 은퇴식은 1997년에 있었으나 영구결번은 OB에서 두산으로 바뀌고 난 후 약 5년이 지난 2002년이 돼서야 지정되었다. 하지만 박철순의 은퇴 후 구단명이 바뀐 과정에서도 21번은 단 한 명도 달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인 영구결번 지정 이전부터 베어스의 21번은 사실상 영구 결번 대우를 받았다.

3.1.2. 설명

OB-두산 베어스 구단은 KBO 리그의 출범과 함께한 원년 구단임에도 40년이 넘는 팀 역사상 영구 결번 선수가 단 2명밖에 없으며, 그것도 추모의 의미로 지정된 포수 김영신의 영구 결번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구단 영구 결번은 박철순이 유일하다. 다만 이는 몇몇 다른 구단과는 달리 영구결번을 받을만 한 선수가 없어서 안 줬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성적만 보면 받을만한 선수는 있는데 대부분 말년이 좋지 않거나 FA로 인한 타팀 이적, 모종의 이유로 아쉽게 영구결번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케이스가 많다.

80년대 OB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팀의 원년 우승을 함께한 윤동균의 등번호 10번이 1989년 그의 은퇴식과 함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된 적이 있었으나, 1994년 구단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 사건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영구 결번이 해제되고 말았다.[56]

KBO 역대 최고의 3루수이자 베어스 그 자체였던 간판 타자 '두목곰' 김동주는 성적만 놓고 보면 영구 결번을 이미 따놓은 양상이었으며 팬들의 지지도 굳건했음에도, 사생활 문제 및 말년의 구단과의 마찰 등으로 인해 영구 결번은커녕 제대로 된 은퇴식마저도 치르지 못했다. [57] 선수생활 마지막 즈음 여러 문제점이 터져 무산되어 아직까지도 안타까워하는 팬들이 많은데, 박철순 이후 원년 구단인 베어스를 상징하는 원클럽맨이자 슈퍼스타 그 자체였음에도 야구 외적인 문제가 지나치게 심각해 영구 결번의 수혜자가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OB - 두산 베어스 팬들로부터 안타깝고 슬프다는 반응이 많이 나온다.

김동주 외에도 영구 결번 후보로 꼽힐 만했던 안경현, 홍성흔, 박명환, 김상진은 타 구단으로의 이적이나 구단과의 마찰 등으로 물건너 가게 되었다.[58] 특히 2011년부터 7년간 두산에서 활약했던 KBO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투수 더스틴 니퍼트가 KBO 최초[59] 외국인 선수 영구결번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마지막 시즌에 kt wiz로 이적하며 두산 원클럽맨으로 남지 못하는 바람에 영구결번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도 2020년 준플레이오프 때 두산 구단의 초청으로 시구를 하긴 했다. 또한 2022년 KBO 개막전때 박철순, 김형석, 홍성흔과 함께 연대별 구단 레전드의 시구로 10년대 대표로 시구하는 등 팀 레전드로서의 대우는 챙겨받고 있는 편이다. 이후, 니퍼트도 두산을 떠난지 7년이 지난 후 2024년 9월 잠실 kt전에 공식 은퇴식을 주최한다는 점에서 과연 세월이 흐른 레전드 선수도 영구결번에 들어갈 수 있을지 주목을 받았으나 결국 영구 결번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은퇴식 이후 베어스 팬덤 사이의 니퍼트의 영구 결번에 대한 목소리가 더 커지며 상후 귀추가 주목된다.

3.1.3. 이후 영구 결번은?

2000년대 후반부터 두산이 꾸준히 리그에서 상위권의 성적을 내며 특유의 이천발 화수분 야구까지 더해져 슈퍼스타들을 많이 배출하였고 영구결번감도 충분히 있었으나 하필이면 2010년대 초반부터 모기업 두산그룹에 몰아닥친 재무 위기 탓에 영구결번 가능성이 큰 스타들을 FA 기간에 죄다 놓치는 바람에 영구결번 가능성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중반까지 중심타선을 이끌었던 김현수는 두말하면 입 아픈 베어스의 상징이었으나 메이저리그를 거쳐 자금난에 빠진 두산과 협상 자체를 못하고[60] LG로 이적했다. 또 '두산 육상부', '종박 베어스'라 불릴 정도로 두산의 팀컬러인 허슬두를 상징하던 슈퍼스타 이종욱도 말년에 FA를 통해 NC로 이적하여 NC에서 은퇴하였고, 2010년대 중반부터 또 다른 팀의 프랜차이즈였던 박건우 역시 FA로 NC 다이노스로 이적하여 팀을 떠났다.

그나마 양의지(25)가 NC 다이노스로 이적했다가 4년만에 리턴하면서 급격히 유력한 후보로 부상했다. 타 구단 얘기긴 하지만 비슷하게 잠시 타 구단을 돌아다녔던 양준혁박경완[61] 영구결번의 주인공으로 지정된 선례가 있고 최대 6년 계약으로[62] 사실상 베어스에서의 은퇴가 기정사실화되며 영구결번의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NC 4년동안 대기록을 써내려가며 NC의 첫 우승[63]까지 일궈냈다는 점은 아쉽지만, 두산 박정원 구단주가 4년 전의 아픔을 씻어내고자 직접 발 벗고 나서 거액으로 다시 데려왔으며, 이미 이적 이전에 두산에서 세운 활약으로도 영구 결번을 받기에 손색없는 기록이었다. 하마터면 가장 많이 스타들을 배출한 2010년대에는 열역한 모기업 사정으로 인해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죄다 FA로 떠나보내며 구단 역사에 비해 워낙 프랜차이즈 스타/영구 결번이 적었던 구단인 만큼 두산에서 다시 좋은 성적을 내고 은퇴한다면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하지만 프런트의 의중과는 별개로 팬들 사이에선 양의지의 영구결번에 대해 반대 의견이 훨씬 큰 편이다. 일단 국내 정서 상 자의로 KBO 리그 타 팀에 이적했다는 점부터가 영구결번으로서의 큰 결격사유인데다, 결정적으로 2020년 한국시리즈에서 다른 팀도 아니고 하필 두산 베어스를 꺾고 화려하게 집행검 세레머니를 해버리는 바람에 팬들의 민심이 싸늘해졌다.

두산이 FA로 핵심선수들을 죄다 잃어버렸을 때 유일하게 팀에 남았으며 전성기에 뛰어난 성적을 올린 김재환 영구결번 이야기도 간간히 나오지만 약물 전과가 있는지라 대부분의 두산 팬들도 묵살하고 있다. 물론 데이빗 오티스 같은 약물 전과에도 불구하고 영구 결번을 받은 사례는 있지만 오티스의 경우는 약물 사용에 있어서는 시인을 하고 사과를 빠르게 해서 여론을 잠재웠기 때문에 큰 얘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반면 김재환은 차기 결번 후보로 부상하기 전에 일어난 약물 전과이긴 하지만 사과는 커녕 봉인해제 드립을 치는 등의 좋지 않은 태도로 인해 두산 팬들 사이에서도 김재환의 존재 자체에 호불호를 지닌 팬층이 많다. 그리고 FA 계약 이후 계속 부진하고 있는지라 팬들의 인식도 좋다고 볼 수가 없다.

아직 가능성은 낮지만 정수빈이 영구결번이 될 수도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정수빈은 데뷔 시즌부터 경찰청 입대 시기를 제외하면 줄곧 31번을 달고 두산에서만 뛴 원클럽맨이라는 점, 가을의 영웅이라는 점, 수비에 일가견이 있다는 점, 통산 3루타 신기록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 동료들이 모두 떠날 때 에이전트까지 바꿔가면서 팀에 남았다는 점 등이 긍정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통산 sWAR가 27에 불과하고 통산 wRC+ 또한 100도 못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의견이 강하다. 일단 정수빈 본인이 2023시즌부터 뒤늦게 각성하여 활약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평가를 뒤집고 현재의 타격감을 선수경력 말기까지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만약 2000안타 마일스톤을 달성한다면[64] 가능성은 더 올라갈 것이다.

그 밖으론 팀의 레전드 감독인 김인식[65]과 팀의 최전성기를 이끈 김태형[66]의 영구결번도 이야기 되지만[67] 아직까지 KBO에서 감독 영구결번을 시도조차 했던 팀이 없으며 그 김응용도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는게 맞다.

여러 레전드 선수들이 차기 영구 결번 후보에 언급되었으나 두산 베어스 팬들의 주된 의견은 김동주더스틴 니퍼트의 영구 결번 여부에 제일 앞서 있었다. 하지만 은퇴한 시기가 점점 지나 영구 결번 가능성이 희박해짐에 따라 현재 제일 가능성이 높은 것은 양의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2. 롯데 자이언츠

3.2.1. 영구 결번

롯데 자이언츠 영구 결번
(선수명 하단 일자: 영구 결번식 진행일)
파일:롯데 자이언츠 영구결번_최동원.svg
파일:롯데 자이언츠 영구결번_이대호.svg
최동원
(2011.09.30.)
이대호
(2022.10.08.)

롯데 자이언츠 영구 결번
최 동 원
11
원년 시절부터 현재까지 롯데 하면 팬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상징과도 같은 투수. 최동원은 현역 시절 구단 최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화려한 성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구단과의 갈등으로 인해 은퇴 당시 영구 결번되지 못했다. 이후 2011년 최동원이 대장암 악화로 인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영구결번이 되지 않자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팬덤의 거센 비판에 부담을 느낀 롯데 구단에서 그의 등번호 1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영구결번식은 2011년 플레이오프 경기를 앞두고 진행되었다.
롯데 자이언츠 영구 결번
이 대 호
10
KBO 리그의 전무후무한 타격 7관왕과 2회의 트리플 크라운, 거기에 일본프로야구-메이저리그 경력까지 거친 구단 역대 최고의 간판타자. 2022년 예고 은퇴 전부터 영구결번은 사실상 확정적이었고, 9월 29일 구단측에서 영구결번을 공식 발표했다. 이로써 10번은 롯데 자이언츠의 두 번째 영구결번이 되었으며, 영구결번식은 10월 8일 이대호의 은퇴 경기 행사에서 진행되었다. 은퇴와 동시에 바로 영구결번이 되는 것은 롯데 자이언츠 구단 역사상 최초다.

3.2.2. 설명

이 문서는
이 문단은
토론을 통해 롯데 자이언츠 문단에서 특정 팬덤이나 야구계 인물들이 '롯데가 영구결번을 잘 지정하지 않음'을 언급한 것을 서술하며 특정 롯데 선수가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지 못하는 이유 및 롯데가 은퇴 선수를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는 정도를 지바 롯데 마린즈 등의 일본 야구 구단과 비교하는 서술을 하지 않는다.로 합의되었습니다. 합의된 부분을 토론 없이 수정할 시 편집권 남용으로 간주되어 제재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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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 합의사항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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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는 영구결번 기준이 좀 박하다는 얘기가 일부 팬덤이나 야구계 인물들로부터 나오는 편이다.[68] 리그와 역사를 함께한 원년 구단 답게 그동안 많은 프랜차이즈 스타가 배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모두 은퇴할 때까지 구단에서는 이대호 단 한명의 예외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영구결번 관련 가능성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두산이 구단의 레전드들이 죄다 팀을 떠나는 바람에 원클럽맨이나 그에 준하는 선수조차 없어 영구결번이 2명뿐이라면, 롯데는 반대로 영구결번감인 원클럽맨은 많으나 영결기준이 좀 박해서 등재를 못하고 있다. 심지어 그 최동원조차도 세상을 떠나고서야 여론에 떠밀려 롯데 프런트가 마지못해 영구결번으로 지정할 정도였으며, 만약 최동원이 현재까지 생존해 있었다면 안 그래도 최동원과 롯데구단의 껄끄러운 관계를 고려할 때 영구결번 지정이 지금까지도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도 있을 정도였다.

특히 롯데팬 입장에서는 10년넘게 팀의 프랜차이즈이자 슈퍼스타였던 강민호손아섭을 FA로 떠나보낸 것이 대단히 아쉽다. 그들이 롯데에 쭉 남아있었다면 영구결번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을 것이라는 의견에는 롯데팬 뿐 아니라 대다수 야구팬들이 동의하지만, 다른 팀으로 이적한 이상 기대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물론 최동원이 그렇듯 다른 팀 경력이 조금 있다고 영구결번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69], 그만큼 팀 기여도에 공백기가 생기는 셈이고 프랜차이즈의 이미지가 희석되기 때문에 강민호나 손아섭의 등재 가능성은 대단히 낮아진 상태다. 특히 강민호는 삼성 라이온즈에서 FA 계약만 두 번, 총합 8년의 계약을 체결하며 더 이상 롯데로의 리턴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며, 손아섭 역시 30대 후반에 NC 다이노스와의 계약이 끝나는 상황이라 영구결번 가능성은 부정적이다. 과거 강민호는 롯데의 영구결번이 목표라 밝힌 바 있고 손아섭도 NC로 떠날 때 롯데의 프랜차이즈를 포기하는 것이 가장 아쉽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 팬들의 안타까움이 더 강하다.

3.2.3. 이후 영구 결번은?

구단의 레전드 중에서 영결감으로 가장 자주 거론되는 선수는 윤학길(29)로, 구단 역대 최다승 1위에 리그 전체에서도 통산 100완투(1위), 20완봉(2위)[70]이라는 기록 보유자이자이며 무엇보다 롯데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기에 팬덤에서는 가장 이견이 없는 영구결번 후보로 꼽히고 있다. 윤학길의 29번은 2021년 한승혁을 끝으로 아무도 달고 있지 않아 팬들 사이에서는 영구결번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2024년부터 빅터 레이예스가 새로 달게 되면서 한동안은 영구결번으로 지정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기 롯데의 주장이자 롯데의 야수 중에서 가장 화려한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박정태(16)는 추후 충분히 영구결번을 노려볼만도 했으나, 은퇴 이후 술 때문에 사고를 치는 바람에 사실상 가능성이 사라졌다. 이 밖에도 염종석이나 주형광 등도 팬덤 내에서 영구결번 후보로 거론은 되지만 결정적으로 둘 다 100승을 못 했고, 윤학길보다는 스탯이 약간 부족한 관계로[71] 이 둘은 아직 가능성이 낮다. 감독으로는 롯데 역사상 단 두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모두 이끌어낸 명장 강병철 감독이 거론된다.

현역 원클럽맨으로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전준우(8)의 영구결번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지만, 이대호나 최동원에 비해서는 무게감이 조금 부족한 편이라 팬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치열하다. 2차 FA로 사실상 종신 계약을 맺었으니 남은 4년동안 떨어지지 않는 성적을 기록하거나 주장으로서 팀을 우승시켜야 가능성이 열린다. 전준우가 한국나이 37살까지 통산 WAR* 45를 기록한 만큼, 못해도 55이상은 찍고 은퇴해야 가능성이라도 높아진다. 당장 삼성의 박한이가 숙취운전으로 영구결번이 물건너가긴 했으나, 오히려 전준우보다 스탯은 떨어짐에도 팬덤에서 영결에 긍정적이었던 건 수많은 우승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전준우는 우승경력이 없는 탓에 좀 더 나은 누적, 통산을 기록해야 가능성이 올라간다.[72]

선수는 아니지만 메이저 리그에서 선수 이외 인물이 몇 명 영결로 지정 받은 사례[73]처럼 조지훈 응원단장의 영구 결번을 바라는 팬도 상당하다. 우리나라 응원단원들의 구조 특성상 야구 한정으로 봐도 원클럽맨은 아니지만 2006년 부임해 어지간한 선수, 코칭스태프, 직원 못지 않게 오래 부임 중인 응원단장으로 이는 2023년 야구계 한정으로는 최장 기간(23시즌 기준 18년 차) 단일 구단 재임이다. 만약 영구결번이 된다면 물론 줄곧 이용했던 등번호 'V3'는 개인의 번호가 아닌 팀의 특정한 상징성을 띄는 문구이기에 해당 등번호로는 영구결번을 지정하기엔 어렵겠지만, 해외에 사례에 그러했듯[74] 호루라기를 기념 번호처럼 남기는 등 기타 다른 방법으로 기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준 영구결번으로 대우하는 사례로 임수혁의 20번이 있다. 2016년 최영환을 마지막으로 아무도 달지 않고 있으며, 특히 진승현이 아버지 진갑용의 번호인 20번을 달려고 했지만 구단 내에서 허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사실상의 비공인 영구 결번으로 대우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참고로 이후 진승현은 0에 획을 하나 더 붙인 26번으로 등번호를 바꿨다. 마침 진승현보다 먼저 26번을 사용했던 DJ 피터스가 방출되면서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26번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3.3. 삼성 라이온즈

3.3.1. 영구 결번

삼성 라이온즈 영구 결번
(선수명 하단 일자: 영구 결번식 진행일)
파일:sl22.png 파일:sl10.png 파일:sl36.png
<rowcolor=#074ca1> 이만수
(2003. 06. 16.)
양준혁
(2010. 09. 19.)
이승엽
(2017. 10. 03.)
삼성 라이온즈 영구 결번
이 만 수
22
원년부터 삼성의 간판 스타이자 KBO리그 역사상 최고의 포수 중 한 명이며, 1997년까지 원클럽맨으로 활약한 KBO 리그 최후의 원년멤버이기도 하다. 성적도 성적이지만[75] 80년대 당시 이만수의 인기는 당대 최고였으며, 커리어 막바지까지도 훗날 양준혁이승엽의 인기에 비교해 안 밀린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진지하게 대구시장 출마 가능성 얘기도 나왔을 정도. 기량이 많이 떨어져 선발로 거의 안나오던 90년대 중반에도 경기 내용과는 상관없이 감독은 이만수를 꾸준히 대타 또는 대수비로 기용했는데, 이유는 이만수가 경기에 안나오면 분노하며 맥주캔을 던지던 대구아재들이 통제가 안돼서...[76] 지금은 삼성 구단과의 섭섭한 감정을 어느 정도 털어놓은 상태지만 은퇴 당시에는 은퇴식은 커녕 제대로 된 은퇴 소감도 밝히지 못하고 쓸쓸히 방출됐다. 물론 이만수의 상징성을 감안해 은퇴 이후 삼성 구단 내에서도 등번호 22번을 달았던 선수는 나오지 않았다. 22번이 공식 영구결번으로 결정된 것은 그가 은퇴한 후 6년이 지난 2003년이었다. 다만 훗날에 영구결번된 두 후배들과 달리 은퇴식과 은퇴경기, 영구결번식은 치르지 못했다. 원년에 데뷔했고 은퇴 후 영구결번 되기 전까지 이만수의 22번은 아무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만수는 삼성 역사에서 22번을 사용했던 유일한 선수다.
삼성 라이온즈 영구 결번
양 준 혁
10
원래 2011년에 사망한 장효조 코치가 현역 시절 삼성에서 달던 번호였지만, 결국 2010년에 은퇴한 양준혁의 번호로 영구결번 처리되었다. 삼성에 대한 충성심이나, 이미지, 통산 성적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어 이견없이 영구결번이 되었다. 양준혁 본인은 “장효조 선배와 공동 영구결번으로 생각한다.”고 밝혔으며, 팬들도 양준혁의 발언을 지지하며, 장효조 코치의 10번도 결번이 되길 염원한다. 참고로 영구결번 된 선수들 중 최초로 해외팀을 제외한 원 클럽 맨이 아니다.[77]
삼성 라이온즈 영구 결번
이 승 엽
36
삼성 라이온즈를 상징하는 구단 최고의 타자. 공식 지정은 이승엽이 은퇴한 2017년에 되었지만, 사실 이승엽이 56홈런을 치고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던 2003년 10월 3일김재하 당시 삼성 라이온즈 단장이 "은퇴 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할 예정"이라고 미리 밝힌 바 있다. 이후 36번은 준영구 결번 처리가 되어 아무도 36번을 달지 않다가 이승엽이 삼성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36번을 달게 되었고 이승엽의 은퇴경기 당일 은퇴식과 함께 정식으로 영구 결번 처리가 완료되었다.

3.3.2. 설명

삼성은 KBO 리그를 대표하는 명문 구단 중 하나로 여겨지며 그만큼 걸출한 스타 선수들을 여럿 배출했으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된 선수는 3명에 불과하다. 앞서 영구 결번으로 지정된 선수들의 이름값을 보면 기준이 꽤나 높은 편으로 KIA 타이거즈롯데 자이언츠 정도만이 삼성에 비견될만 하다. 이만수-양준혁-이승엽 모두 당대 리그 최정상 수준의 실력을 가진 전국구 슈퍼스타였고, KBO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많은 기록들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이었다. 이들 모두 야수 통산 WAR 10위 이내에 랭크되어 있는데, 양준혁이 2위, 전성기 8년을 일본프로야구에서 보낸 이승엽은 3위에 홈런 2위[78], 비교적 경기수가 적었고 선수 생명도 짧았던 시절에 활동한 이만수포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9위에 위치하는데다 이대호와 함께 단 둘뿐인 KBO 타격 트리플 크라운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셋 중 통산 WAR이 가장 낮은 이만수가 무려 65에 달한다.

다만 이는 삼성 구단이 특별히 영구 결번 기준을 높게 잡고 있다기보단, 영구 결번이 될 만한 선수들이 여러 이유로 인해 구단과 좋지 못한 이별을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과거 삼성은 프랜차이즈 스타에 대한 대우가 박하기로 악명높은 구단 중 하나였다. 초창기 삼성의 에이스 선발 투수로 활약하며 KBO 최초로 통산 100승을 달성했던 김시진은 말년에 최동원과 트레이드 되어 롯데에서 은퇴해야 했고, 선수협 문제로 구단과 갈등을 겪었던 타격왕 출신 장효조도 롯데로 보복성 트레이드를 당했다. 양준혁도 선수협 문제로 인해 3년간 해태와 LG로 떠나 있어야 했고, 원년부터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팀의 간판 스타 이만수조차 말년에 기량이 하락했다는 이유로 은퇴식도 없이 방출되어 커리어를 마감했다. 다행스럽게도 양준혁은 김응용 감독의 배려로 삼성에 복귀해 2010년 은퇴와 함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고, 이만수도 영구 결번식은 없었지만 팬들의 성화로 인해 2003년 뒤늦게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21세기 들어 본격적인 삼성의 전성기가 개막하면서 영구 결번으로 거론될만한 스타 선수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승엽 정도를 제외하면 이들 대부분이 2015년 즈음부터 FA를 통해 이적했거나[79]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불미스럽게 팀을 떠났다.[80]

3.3.3. 이후 영구 결번은?

현재까지 마지막 영구 결번자인 이승엽이 은퇴한 2017년 이후, 다음 영구 결번 후보로 가장 많이 언급됐던 선수는 박한이(33)였다. 2001년 삼성에 입단한 이래 19년간 단 한 차례도 팀을 떠난 적이 없으며 선수로서 무려 일곱 번(2002, 2005, 2006, 2011, 2012, 2013, 2014)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는데, 삼성의 첫 우승이 한국시리즈 없이 이뤄낸 1985년 전후기 리그 통합우승이었음을 생각하면 삼성의 모든 한국시리즈 우승을 함께 한 선수인 셈이다. 이것이 단순히 팀의 전성기에 선수 생활을 오래 해서 얻은 기록이 아니라, 16년 연속 100안타로 대표되는 장기간의 꾸준한 성적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한국시리즈 MVP까지 받을 만큼 여러 큰 경기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전 영구 결번자들인 이만수-양준혁-이승엽이 KBO 역사상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타자들이었다보니 이들에 비해서 임팩트나 성적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팬덤 사이에서 부정적인 소수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삼성 구단에서는 영구 결번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2019년 5월 박한이 본인이 숙취운전 적발[81]로 인해 시즌 중 갑작스럽게 불명예 은퇴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박한이 은퇴 이후 현역 시절 등번호 33번은 현재까지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2020년 말 코치로 삼성에 복귀한 박한이도 33번이 아닌 74번을 사용하고 있다.

현재로서 가장 유력한 영구 결번 후보는 삼성뿐만 아니라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오승환(21)이다. 삼성의 여덟 번 우승 중 다섯 번(2005, 2006, 2011, 2012, 2013)의 마무리를 장식한 투수로, 두 번(2005, 2011)의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또한 국내 선수로선 최초이자 유일하게 KBO 리그 통산 400세이브 및 한미일 통산 500세이브의 금자탑을 쌓아 세이브 부문에서 독보적인 1위에 올라있다. 다만 유일한 흠이 일본 한신 타이거즈 시절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으로 인해 벌금형을 선고받은 전과가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삼성 구단에서는 크게 개의치 않는지 2019년 여름 국내 복귀 당시 성대한 환영식도 열어주었고, 오승환 본인도 2015년 이후 도박 사이트 개설 자금 지원이나 승부조작 시도, 상습도박 등 추가적인 문제를 일으킨 다른 선수들과 달리 10년 가까이 문제없이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은퇴 후 등번호 21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삼성의 네 번째 영구 결번자가 된다면 비대경권 출신 및 투수로선 구단 최초다.

원조 '푸른 피의 에이스'였던 배영수(25)도 과거엔 유력한 영구 결번 후보였다. 대구 태생에 경북고를 졸업한 1차 지명자였기에 출신 성분에 있어서 성골 중 성골이었고, 2000년 입단 후 박한이와 마찬가지로 삼성에서만 일곱 번(2002, 2005, 2006, 2011, 2012, 2013, 2014)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2004년에는 삼성 소속 투수로선 최초로 KBO MVP를 수상할 만큼 2000년대 초중반 삼성뿐만 아니라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 선발 투수로 활약했으며, 삼성에서만 통산 124승을 거둬 2018년 윤성환이 추월하기 전까진 삼성 프랜차이즈 개인 최다승 투수였다. 그러나 2014년 시즌 종료 후 원 소속 구단인 삼성과의 FA 협상 과정에서 갈등을 일으켜 한화 이글스로 이적해 순수 프랜차이즈 타이틀을 잃었으며, 이후 2019년에는 두산 베어스로 또 다시 이적해 2019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 반지를 하나 더 추가하고 은퇴하면서 영구 결번 논의가 사그라들었다.

한편 배영수와 동갑내기 라이벌이었던 윤성환(1)도 한때 유력한 영구 결번 후보로 떠올랐었다. 고졸에 병역특례자인 배영수와 달리 대졸에 사회복무요원 근무까지 마친 윤성환은 배영수보다 데뷔가 실질적으로 6년이나 늦었던 선수였지만, 배영수가 하락세를 타기 시작한 2000년대 후반부터 선발 투수로 활약하기 시작해 2010년대 초반에는 팀의 토종 1선발로서 통합 4연패 삼성 왕조 건설에 큰 공을 세웠다. 비록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의 당사자 중 하나로서 왕조의 몰락에 일조하긴 했으나, 팀의 암흑기에도 선발진의 한 축을 지탱하며 개인 통산 135승을 거둬 삼성 프랜차이즈 투수 최다승 및 KBO 리그 다승 역대 8위에 올랐다. 그러나 2020년 말 석연찮게 돌연 방출된 이후 2021년 6월 불법 도박승부조작 시도 혐의로 구속되었고, 재판에서 징역 10월의 실형까지 선고받으면서 이제는 그 누구도 영구 결번을 거론하지 않는다.

그리고 삼성 왕조의 4번 타자로서 네 차례의 연속 우승을 이끌었던 최형우(34)도 삼성에 잔류해 커리어를 마쳤다면 팀 역사상 한 손에 꼽히는 성적과 기여도를 감안할 때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2016년 시즌 종료 후 KIA 타이거즈로 FA 이적하면서 "전라도 사람이라 소외감을 느꼈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고, 이후 제대로 된 후속 해명을 하지 않으면서 대경권 삼성 팬덤과 관계가 껄끄럽기에 현재로선 이적 사실뿐만 아니라 팬들의 반대 여론 때문에라도 영구 결번 지정 가능성이 낮다.

30대 주축 선수 중엔 구자욱(5)도 영구 결번 후보로 조금씩 거론되고 있다. 특히 2022년 삼성과 비FA 다년계약을 맺은 후 삼성에서 모든 커리어를 보낼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언급 빈도도 따라서 높아졌다.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고를 졸업한 순혈 프랜차이즈 스타이며, 선수 본인도 삼성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이 강하고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만큼 실력도 출중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 1군 데뷔 [age(2014-01-01)]년차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직 커리어가 절반 가량 남은 시점이기에 영구 결번 논의는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많고, 박한이와 비슷하게 기존 영구 결번자들인 이만수-양준혁-이승엽에 비하면 임팩트나 성적 면에서 부족한 것이 사실이며 이들 모두 우승을 경험한 것과 달리 아직은 우승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목소리도 존재한다. 만약 은퇴할 때까지 우승을 못하게 되더라도, 팀의 암흑기 타선을 토종 선수로선 거의 홀로 지탱해온 만큼 그 공로는 인정해야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다.

2000년대배영수, 2010년대윤성환에 이어 2020년대 이후 삼성의 새로운 에이스 선발 투수로 떠오른 원태인(18)도 대구경북고 출신이라는 순혈 프랜차이즈의 조건을 충족하며, 팀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도 높고 매년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본인이 다른 팀으로 이적하거나 큰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일 없이 배영수-윤성환에 필적하는 성적을 올린다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지만, 현재 프로 [age(2018-01-01)]년차로 구자욱보다도 어리기에 아직은 시기상조다.

그 밖에 2010년대 초반 삼성 왕조를 이끈 류중일(75) 감독의 등번호를 영구 결번으로 지정해야 된다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류중일은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경북고-한양대 졸업 후 삼성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했던 성골 중의 성골 프랜차이즈 스타였기도 했다. 현역 시절까지 감안하여 선수 때 사용한 1번을 대상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다.[82][83]

3.4. 빙그레 이글스 - 한화 이글스

3.4.1. 영구 결번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f73600><tablebgcolor=#f73600>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png한화 이글스
영구 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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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파일:35장종훈.png 파일:23정민철1.jpg 파일:21송진우1.jpg 파일:김태균 영결.png
장종훈
(2005.09.15.)
정민철
(2009.09.12.)
송진우
(2009.09.23.)
김태균
(2021.05.29.)
선수명 하단 일자: 은퇴식 및 영구 결번식 진행일
}}}}}}}}}}}} ||
한화 이글스 영구 결번
장 종 훈
35
빙그레-한화 이글스 구단 역사상 최초의 영구 결번. 리그 최초의 40홈런 시대를 열었던 90년대 홈런타자의 아이콘이자 은퇴 시점 기준에서 통산 최다홈런 1위였던 선수로, KBO리그 최초로 은퇴경기와 영구 결번식을 같은 날 동시에 치른 선수이기도 하다.

장종훈이 한화 코치로 있던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이 번호를 재사용하였다.
한화 이글스 영구 결번
정 민 철
23
은퇴 시점 기준으로 송진우에 이어 통산 다승 2위 기록을 보유했던 90~00년대 선발에이스. 참고로 이 번호는 과거 빙그레 이글스 시절부터 야구를 본 올드팬이라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인데, 정민철이 전성기 시절에 달던 번호는 55번이었기 때문이다. 23번은 2005년부터 달기 시작했으나 정작 이 번호를 달고 제대로 활약한건 2007년뿐이다. 이를 두고 일부 팬들이 정민철을 모욕하는 구단의 처사라며 반발하기도 했으나, 이후 정민철이 방송에서 밝힌 바로는 정민철 빠돌이(...)이자 초-중-고 후배인 윤규진에게 번호를 물려주고자 일부러 55번의 영구 결번화를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정민철의 은퇴 후 55번은 이후 윤규진이 물려받았고, 윤규진의 군 복무 기간중에는 이태양[84] 달고 있다가 윤규진이 복귀하면서 이태양은 55를 뒤집은 22번으로 변경[85]하고, 윤규진이 다시 55번을 받았다. 윤규진이 은퇴한 뒤에는 강재민이 55번을 이어받았다.[86]
한화 이글스 영구 결번
송 진 우
21
KBO 리그 최초이자 유일의 통산 200승-2000탈삼진-3000이닝 투수인 레전드로 은퇴 전부터 일찌감치 유력한 영구 결번 후보로 꼽혔으며, 영구 결번 처리 바로 다음날 은퇴경기를 치렀다.

송진우가 한화 코치로 있던 시절 중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잠시 이 번호를 재사용하기도 하였다.
한화 이글스 영구 결번
김 태 균
52
2000년대 이후 구단 최고의 간판타자로 2020년 시즌 중 은퇴를 선언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여파로 관중 입장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은퇴식과 영구결번 지정 시점이 2021년으로 연기됐다. KBO 리그의 은퇴경기 특별엔트리 제도의 첫 수혜자로서[87] 은퇴식 당일인 2021년 5월 29일 대전 SSG전 라인업에 4번타자 1루수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다만, 후배들의 자리를 빼앗기 싫다는 본인의 뜻으로 플레이볼이 선언되자마자 노시환과 교체되어 경기 출장 기록만 남기고 실제로 경기에서 뛰지는 않았다.

3.4.2. 설명

신용과 의리를 중시하는 모기업 한화그룹의 경영 철학에 따라 구단 출신 레전드에 대한 예우가 매우 각별하며,[88] 이에 따라 현 시점까지 가장 많은 영구결번 선수들을 보유한 구단이기도 하다. 류현진의 99번은 그가 MLB에서 선수 생활을 한 11년 동안 임시 결번으로 남아있었는데 한화에서 은퇴 후 영구결번으로 지정될 것이라는데엔 모든 야구팬들의 이견이 없다. 이로써 결번 하나가 더 늘어난다면 영구결번 선수가 5명이 된다.

이러한 기조에 영구결번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 말도 존재하지만, 냉정하게 지금 영구결번을 받은 4명의 선수만 봐도 리그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선수들로 다른 팀이었어도 무조건 영구결번인 선수들이다. 일단 최근에 영구결번된 김태균은 저평가가 있어서 그렇지 은퇴시점 타자 swar* 통산 5위, 2000안타-300홈런-1000타점-1000득점에 3-4-5 슬래쉬라인을 유지하며 은퇴한 3명 뿐인 선수 중 한 명이며, 장종훈은 현역 당시에는 홈런타자의 상징과 같은 선수로 명성이 높았다. 기록으로도 은퇴 당시 기준 KBO 최다홈런 1위에 kbo 최초 40홈런, 3년 연속 홈런왕 등을 기록한 선수이며 WAR 60대[89]에 300홈런-1000타점-1000득점을 기록했다. 송진우는 2023년 기준으로 200승 - 3000이닝- 2000K, 통산 WAR 2위, KBO 최다승, 최다패[90] 최다 탈삼진, 최다 이닝, 최다 피안타, 피홈런, 4사구[91] 선수이며 정민철 역시 골글을 못 받았다 한들 160승-2000이닝-1500K, 은퇴시점 통산 WAR, 승 3위, 이닝 2위 등 한획을 그은 선수다. 거기다 이 4명 모두 프로야구 40주년 레전드 올스타 40인에도 각각 5위 (송진우), 10위 (장종훈), 13위 (정민철), 14위 (김태균)으로 뽑히는 등 훌륭한 통산 성적을 기록했다. 또한 프랜차이즈 선수들의 이 적었기에 영구결번이 많은 것으로, 절대로 영구결번을 남발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다 구대성한용덕이 영구결번이 아니다. 구대성의 경우 67승 214세이브 2.85의 평균자책점으로 숫자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선발보다는 불펜으로 주로 나왔던 선수다. 물론 당시에는 보직이라는 개념이 없긴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이다. 사실 당시에도 영구결번감으로 거론되었지만 영구결번이 되지 않았다는 것에 의아심을 느낀 팬들이 많았다. 은퇴 이후 ABL로 넘어가 현역생활을 지속한 것과 더불어 본인의 의지인지 여부는 불분명하였고 결론적으로 후배 선수에게 등번호를 물려주기로 해서 무산되었다.[92]

또한 한용덕 역시 영구결번으로 뽑혀도 이상하지 않을 선수다. 골든글러브도 없고 타이틀 홀더도 없어서 간과하기 쉽지만 한용덕의 통산 기록은 결코 우습지 않다. 120승-2000이닝-1300K에 투수 통산 WAR 9위, 다승 13위, 이닝, 탈삼진 7위로 결코 평범한 수치가 아니며 최동원, 구대성, 정민태, 조계현, 손민한 등의 대투수들보다도 WAR이 높다. 송진우랑 정민철, 구대성에 가려져서 그렇지 충분히 영구결번급의 선수인 셈이다.

3.4.3. 이후 영구 결번은?

현역 선수로는 류현진(99)이 가장 유력하고 이견이 없는 후보다. 미국에 진출한 11년 동안 임시 결번으로 지정되었고, 만약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았어도 영구결번을 줬을 것이라 예상됐던 상황이었기에, 선수 생활 막바지에 큰 사건사고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무조건 영구결번으로 지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영구결번이 된다면 한화 최초의 비 충청권 출신 영구결번이 될 것이다.

다만, 한화의 암흑기가 길어지는 동안 프랜차이즈 중간층 선수들이 영 힘을 못썼고[93], 성적이 좋은 선수들은 대부분 FA로 들어왔다 보니 류현진 이후의 차기 영결감이 나오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구대성이나 한용덕이 영결이 되는 것이 훨씬 가능성이 높을 정도.

3.5. 해태 타이거즈 / KIA 타이거즈

3.5.1. 영구 결번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ea0029>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svgKIA 타이거즈
영구 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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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IA 타이거즈 영구결번 18선동열.svg
파일:KIA 타이거즈 영구결번 7이종범.svg
<rowcolor=#fff> 선동열
(1996.01.16.)
이종범
(2012.04.04.)
※ 선수명 하단 일자는 영구 결번 지정일이다. }}}}}}}}}
KIA 타이거즈 영구 결번
선 동 열
18
최동원과 라이벌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타공인 KBO 리그 역사상 최고의 투수. 원래 18번은 선동열이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한 후 1996년 해태 타이거즈에서 영구 결번으로 처리했던 번호였는데, 2001년 구단이 기아자동차에 매각된 후 해태색 지우기의 일환으로 영구 결번을 해지시키고 당시 신인 최고액 계약금을 받으며 '제2의 선동열'이라 불렸던 김진우에게 줘버리고 말았다.[94] 결국 팬들의 반발로 인해 시즌 시작 전 김진우가 배번을 41번으로 교체하게 되면서 18번은 KIA 타이거즈에서도 계속 영구 결번으로 남게 되었다. 정작 선동열 본인은 당시 영구 결번 여부에 큰 미련을 두지 않았으며, 오히려 김진우가 18번을 달고 타이거즈의 에이스로 성장하길 응원했다고 한다. 이후 그가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 복귀할 때 이 번호를 재사용할지 이목이 쏠렸지만 본인은 선수 시절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우려해 삼성 감독 시절에 쓰던 등번호 90번을 그대로 사용했다. 결과적으로는 감독 시절 5-8-8을 기록하여 선견지명이 되었다.
KIA 타이거즈 영구 결번
이 종 범
7
5툴을 모두 갖춘 유격수로 리그를 초토화시키며 야구천재로 불린 한 시대를 풍미한 바람의 아들. 해태 시절 세 차례, KIA 시절 한 차례 등 4차례의 팀 우승을 함께 했으며[95] 은퇴 선언 후 며칠 뒤 바로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영구 결번식을 겸한 은퇴식은 당년 5월 26일에 진행. 더불어 이 번호는 타이거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대타자였던 김종모의 현역시절 등번호이기도 하다. 또 KBO 리그 최초의 한 자리 수 등번호 영구결번이다.

3.5.2. 설명

타이거즈의 화려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영구 결번 인원이 2명이기 때문에 간혹 영결 컷이 높다는 인식이 있다. 물론 이는 영구 결번컷이 높다기 보단 해태-KIA 전환기에 있었던 사정들 때문에 레전드 선수들의 영구 결번을 제 때 하지 못한 게 큰 이유이긴 하지만. 영구결번 후보자로 김응용[96], 김봉연[97], 김성한[98], 이강철[99], 이순철[100], 한대화[101], 홍현우[102], 장성호[103], 조계현[104], 이대진[105], 임창용[106]등이 있다. 다만 이 중에 원클럽맨인 김봉연, 김성한을 제외한 나머지는 FA나 트레이드로 인해 타 팀으로 이적해 활약한 이력이 있어서 진지하게 거론되진 못하고 있다.[107]

3.5.3. 이후 영구 결번은?

현역 선수 중에서는 KIA의 3번의 통합 우승을 함께한 양현종(54)이 가장 유력하다. 통산 최다 선발승과 탈삼진이라는 누적 기록에 MVP와 골든글러브 및 다승왕과 평균자책점왕 등 수상 실적도 충분하다. 게다가 사생활 논란도 없으므로 사실상 확정에 가까운 상황이다.

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 초반 국가대표 투수이자 투수 4관왕까지 올랐던 윤석민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으나 부상을 겪으며 단명했으며, 타자 중엔 고졸 신인으로 주전에 입성하며 커리어를 쌓은 안치홍도 이야기가 나왔지만 영구 결번을 해주기엔 애매한 성적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FA를 통해 롯데-한화로 차례로 이적한 탓에 KIA로 복귀할 가능성이 사실상 사라져 조용해졌다. 한국시리즈 7차전 끝내기 홈런을 쳐 MVP 석권과 동시에 우승을 이끌었던 나지완도 갑론을박은 있었지만 그 외의 임팩트는 없던 탓인지 은퇴 후에는 잠잠해졌다. 가끔 최형우도 얘기가 나왔으나 아직까지 삼성에서의 활약이 더 많았던 선수라는 점에서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후 타이거즈의 프랜차이즈 스타 김선빈도 간혹 거론되나 영구 결번 지정까지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했으나, 2024년 한국시리즈 MVP 수상 이후 다시 이야기가 거론되고 있다. 아주 이른 이야기이지만 김도영의 2024시즌 역대급 활약으로 인해 김도영이 꾸준히 활약하고 KIA에서 은퇴한다는 가정 하에 3년차임에도 불구, 영구결번 이야기가 벌써 거론되고 있다.

3.6. MBC 청룡 / LG 트윈스

3.6.1. 영구 결번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c30452><tablebgcolor=#c30452> 파일:LG 트윈스 엠블럼.svgLG 트윈스
영구 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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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BO_Retired_LG_41_svg.png 파일:KBO Retired LG 9.png 파일:KBO Retired LG 33.png
김용수
(1999.04.19.)
이병규
(2017.07.09.)
박용택
(2022.07.03.)
선수명 하단 일자: 은퇴식 및 영구 결번식 진행일
}}}}}}}}}}}} ||
LG 트윈스 영구 결번
김 용 수
41
LG의 첫번째 한국시리즈 MVP이면서 KBO 리그 역대 최초로 100승과 200세이브 기록을 동시 달성한 LG 구단 역대 최고의 투수로,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일찌감치 영구 결번된 유일한 사례이다. 또한 KBO 리그 최초로 영구 결번식을 치른 선수이기도 하다.
LG 트윈스 영구 결번
이 병 규
9
90년대-00년대-10년대를 모두 거치며 활약한 구단 역대 최고의 타자 레전드. 영구결번 당사자가 은퇴 후 코치로 팀에 복귀하면서 해당 번호를 다시 재사용하기도 했다. 참고로 사망으로 야구 커리어가 끝난 김영신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KBO 리그의 영구결번 선수 중 KBO 우승 경험이 없는 선수가 되었다.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해봤기에[109]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이 없을 뿐 우승 경험 자체는 있다.
LG 트윈스 영구 결번
박 용 택
33
LG에서만 19년을 뛴 원클럽맨이자 프랜차이즈 스타로 은퇴 시점에서 리그 유일의 2500안타 및 통산 최다안타 2위 기록을 보유한 선수. 2020 시즌을 끝내고 은퇴했으나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경기장의 관중동원에 제약이 가해진 관계로 은퇴식 및 영구결번 지정이 바로 이뤄지지 못했다. 차명석 단장이 "박용택의 영구결번식과 은퇴식은 코로나사태 이후 만원관중 앞에서 진행하겠다."라고 일찌감치 언급했고 박용택 본인도 이를 원해 2022년 7월 3일에 이르러서야 만원관중과 함께 은퇴식을 치르며 공식적으로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110][111] 참고로 김영신을 제외하고 선수 커리어 중 클럽 우승이 단 하나도 없는 유일한 영구결번 선수이기도 하다.[112] 그리고 박용택의 33번은 이 날을 계기로 정점을 찍었는데, 야구에 입문할 때부터 은퇴까지 오로지 33번만 달았기 때문이다.[113]

3.6.2. 이후 영구 결번은?

현역 선수로는 어린 나이부터 팀의 주전 유격수를 맡아 꾸준히 누적을 쌓아온 오지환이 후보로 언급된다.[114] 이전에는 아직 영구결번 급까지는 이르다는 의견이 중론이었으나, 비FA 다년계약으로 2029년까지 연장하면서 사실상의 종신 계약을 맺게 된 데다 2023년 한국시리즈에서 LG의 29년 만의 우승을 이끌고 MVP까지 차지하는 활약을 보여주며 여론을 뒤집었다. 그동안 LG 프랜차이즈 스타들이 좋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끝내 얻지 못했던 한국시리즈 우승 커리어를 단숨에 달성하면서 영구결번의 확률이 급격히 올라간 셈. 선수 생활 한창 때 등번호를 바꾼 것이 좀 치명적이라는 의견이 많으나, 은퇴 직전에 바꾼 것도 아니고 정민철의 사례에서 보이듯 등번호를 바꾼다고 영구결번이 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세이버매트릭스가 보편화 되면서 오지환에 대한 평이 조금씩 더 오르고 있는 것도 호재다.

이밖에 오랜 기간 임시 결번이었던 이상훈의 47번[115], 유일무이 4할 타자이자 팀의 첫 우승 감독인 백인천과 90년대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김동수의 2번[116], 시대를 대표하는 좌타자였던 김재현[117] 당대의 슈퍼스타로 올드팬들의 많은 지지를 받는 김재박의 7번이 영구결번 후보로 거론 된다.

3.7. SK 와이번스 / SSG 랜더스

3.7.1. 영구 결번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ce0e2d><tablebgcolor=#ce0e2d> 파일:SSG 랜더스 엠블럼.svgSSG 랜더스
영구 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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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sg_pkw26_white.png
박경완
(2014.04.05.)
선수명 하단 일자: 은퇴식 및 영구 결번식 진행일
}}}}}}}}}}}} ||

SSG 랜더스 영구 결번
박 경 완
26
이만수의 계보를 이은 KBO 리그 역대 최고의 포수 중 한 명이며, KBO 리그 역사상 원클럽맨이 아닌 선수가 영구 결번을 받게 된 세 번째 사례다. 다만 최동원양준혁은 팀의 연고지에서 자란 프랜차이즈 스타이며,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팀을 떠났던거라, 사실상 원클럽맨에 준하는 선수들이다. 반면 박경완은 인천 출신도 아니고 쌍방울 레이더스현대 유니콘스에서도 맹활약했기에 위 두 명과는 다르게 SK 와이번스만의 색깔이 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현대 시절에는 포수 최초의 20-20과 더불어 2000년엔 단일 시즌 40홈런, 정규 시즌 MVP 수상 등 굵직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박경완 역시 최동원이나 양준혁과 마찬가지로, 현대에 처음 트레이드됐을 때 원치 않는데 강제로 트레이드된 케이스라 참작이 된다.[118]

다만 SK에서도 11년간 뛰면서 한국 시리즈 3회 우승의 주역으로 팀을 이끌었고, WAR이 가장 높았던 시즌 또한 SK 소속이던 2004년이므로 상징적인 측면에서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한 팀의 레전드로 보기에는 살짝 애매할지 몰라도, KBO를 대표하는 포수 계보를 잇는 선수이기도 하며, 이 점도 무시 될 수 없다. 또한 그의 전 소속팀들인 쌍방울과 현대가 모두 해체 수순을 밟으면서 SK 입장에서는 별다른 논란 없이 박경완을 영구결번시킬 명분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SK와 인천야구가 각각 쌍방울-현대와 복잡한 관계로 얽혀있는 것도 감안해야한다.[119][120] 그가 쌍방울 시절 현대로 원치 않는 트레이드를 당하지 않았다면 해체 후 자연스럽게 SK 선수가 되었을 것이다.

2021년 1월 26일자로 SK 와이번스의 매각이 공식 발표되었다. 신세계가 구단을 인수하여 SSG 랜더스로 바뀌며 박경완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SK 와이번스 영구결번으로 남게 되었으며, SK의 역사를 그대로 계승하는것이 확정되어 인수 후에도 영구결번은 이어진다.

3.7.2. 이후 영구 결번은?

향후 영구결번이 매우 유력한 후보로 최정(14)과 김광현(29)이 있다. 두 사람 모두 팀 내 위치는 말할것도 없고, 지금 당장 은퇴해도 KBO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을 기록을 쌓아올린 선수들이다. 최정은 이미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3루수이자 우타자로 자리잡았고, KBO 통산 홈런 1위, 역대 야수 WAR도 전체 1위이다. 김광현은 류현진, 양현종과 함께 한국 최고의 좌완 투수를 논할 때 반드시 들어가는 후보 중 1명이며, 중간에 미국 진출로 공백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비율은 물론 누적 기록도 역대급으로 쌓아가고 있기에[121] 팀 역사에 먹칠을 할 만한 중대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122] 사실상 영구결번 확정.

그 외에도 김강민이 영구결번 후보로도 거론되기도 한다. 20년 이상 긴 역사를 자랑하는 원 클럽 플레이어라는[123] 점, 가장 오랫동안 0번의 등번호를 달고 있어 상징성이 있다는[124] 점을 들어 영구결번이 되어야한다는 의견과 아무래도 누적 성적이 영구결번급까지는 아니기에 힘들 것으로 보는 의견이 혼재한다. 그러나 2022년 한국시리즈에서 나이를 잊은 대활약으로 팬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고 평소 타에 귀감이 되는 선수생활로 팬들은 물론 후배선수들도 극찬을 아끼지 않는[125] 선수라는 점에서 영구결번 가능 논란이 조금씩 잦아들고 오히려 점점 영구결번 지정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대안으로는 0번을 상징성 있는 번호로 만들어 후계자에게 물려주자는 의견도 존재하지만, 새로 등장한 주전 중견수 최지훈이 54번을 달고 잘 뛰고 있어 굳이 등번호를 바꿀 가능성은 높지 않다.[126] 그러나 2024년도 2차 드래프트로 한화로 이적하게 되면서 영구 결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졌다. 하술할 다른 후보들과 달리 자발적 이적은 아니라 가능성은 남아있지만 개인 문서에도 나와있듯 다른 사례[127]를 감안하면 이 둘이 누적기록이 압도적이라 전망이 밝지는 않다.

KBO 역대 최고의 2루수라 칭해졌던 SK시절 정근우나, 벌떼야구의 중심으로 여왕벌 이라는 별명을 가지며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과 베이징 올림픽 결승전 헹가래 투수 였던 정대현, 핵심 계투이자 이적 후 투수[128] 최다 출장 기록 및 순수 계투 최다 이닝 기록[129] 보유자가 된 정우람, SK 원년 멤버[130]로 SK 최초의 준우승과 우승을 함께 했고 국가대표로도 국민우익수란 별명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이적 후 통산 2000경기 출장과 2000안타를 달성한 이진영, SK에서만 20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했고 락커룸 리더로서 맏형 역할을 충실히 했던 이호준 등이 타팀 이적 전까지 이적을 안한다면 영구결번될 수 있는 후보들로 간주되었으나, 모두 FA를 통해 타 팀으로 자발적으로 이적하여 불가능하게 되었다.

3.8. 키움 히어로즈

3.8.1. 영구 결번

2024년 기준 영구결번이 없다. 다만 정민태의 20번은 그가 현대에서 히어로즈로 구단이 승계될때 방출되어 떠났을 때부터, 돌아와 코치를 하다 다시 나간 2012년까지 비공식 영구결번이었다. 이후 후보로는 강정호, 서건창, 박병호 정도가 있었으나 강정호는 거듭된 음주운전으로 야구 커리어가 불명예스럽게 끝나버렸고, 서건창은 LG에 트레이드 됐으며, 박병호는 FA로 kt로 이적해버렸다. 그나마 키움에서 역대급 전성기를 보냈고 FA 당시 구단에서 잡을 의지를 보이지 않는 등 큰 충돌 없이 팀을 떠나 히어로즈 팬들과 여전히 관계가 나쁘지 않은 박병호의 결번 가능성은 약간이나마 남아 있다.

이외에 가능성이 남아 있는 선수라면 김하성, 이정후, 안우진, 김혜성 정도다. 특히 메이저 진출에 성공한 김하성, 이정후가 복귀 후 이적이나 사건사고 없이 히어로즈에서 은퇴한다면 영구결번이 확정적이다. 다만, 구단의 공식 답변에 의하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세 명이 사용했던 7번, 16번, 52번은 그들의 노력을 존중하기 위해 비공식 영구결번 처리 중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원석이 키움에 트레이드로 입단할 때 삼성에서 사용했던 16번을 사용하지 못하고 17번을 달게되었다.

또한 이숭용도 원클럽맨으로 2000경기 출장을 이뤄낸 상징성으로 구단측이 영구 결번을 제안했지만 이숭용 본인이 거절하면서 무산됐다.

3.9. NC 다이노스

3.9.1. 영구 결번

2024년 기준 영구결번이 없다. 2011년에 창단되었고 2013년에 1군에 진입한 신생팀이라 영구 결번급 커리어를 가진 원클럽 멤버가 아직 없기 때문.

3.9.2. 이후 영구 결번은?

창단 멤버인 박민우나성범이 꾸준히 거론되었으나 나성범은 FA를 통해 팀을 떠나며 현재는 박민우(2)가 가장 유력한 후보이다. 박민우SNS를 비롯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여론이 나빠지기도 했으나, 엔데믹 시기를 지남과 동시에 나성범을 비롯한 다른 프랜차이즈 선수들이 이런저런 루트로 팀에서 사라지는 와중에 NC와 장기계약을 맺고 잔류하면서 팬들에게 이미지가 많이 회복되었고 본인의 기량도 2023시즌 이후 어느정도 반등에 성공하면서 가장 유력한 영구결번 후보로 꼽힌다. 만약 박민우조차 영구결번이 되지 못 한다면 오랜 기간동안 이 팀에 영구결번은 없을 것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박민우 이외에는 아직 영구 결번을 노려볼 만한 정도의 선수는 없다는 평이 많다. 그나마 언급이라도 돼 볼 만한 선수는 구창모, 이재학 정도가 있으나, 구창모는 커리어 내내 부상을 달고 사는 유리몸이라는 점이 매우 걸리고, 이재학은 NC 토종선발 최다승이라는 상징성이 있긴 하나 전성기가 커리어 초반에 집중되어 있고[131] 현재도 기복이 매우 심하지만 빈약한 토종 선발 뎁스 상 어쩔 수 없이 쓰는 선수인지라 영구결번으로 언급되긴 매우 아쉬운 모습이다. 백번 양보해도 창단멤버라는 상징성 정도고 사실상 어렵다.[132] 다만, 구창모의 경우, 군전역 후 앞으로의 경력에 따라 달려있다고 볼 수 있겠다.

3.10. kt wiz

3.10.1. 영구 결번

2024년 기준 영구결번이 없다. 2015년부터 1군 무대에 진입한 신생팀이라 아직 평생 커리어를 구단에 바친 선수가 나올 시기가 아니기 때문.

3.10.2. 이후 영구 결번은?

아직 FA도 오지 않은 젊은 나이지만 강백호가 커리어 내내 kt에서만 활약한다면 영구결번이 기대되나 아직까지는 그만큼의 활약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기대주 소형준과 박영현이 있으나 아직 커리어 초기라서 섣부른 단계이다.

초창기부터 함께 하며 비FA 다년계약으로 사실상 종신 kt맨이 된 원클럽맨 고영표의 가능성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대졸 출신에 투수라서 누적 커리어를 충분히 쌓기에는 상대적으로 활약 기간 측면에서 불리하다.

신생팀 특수성과 공헌도를 감안하면 '개국공신'이며 첫 우승의 주축인 박경수와 유한준을 고려할 수 있지만, 둘다 FA 입단이고 커리어 기간과 성적 면에서는 미치지 못한다고 보아야 할 듯 하다.

김재윤의 경우도 성적은 아쉽지만 상징적인 측면에서 가능성은 있었지만 FA로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그나마도 불가능해졌다.

2024 시즌부터 멜 로하스 주니어가 kt에 복귀해 리그 최정상 지표를 찍고있어 최초 외국인 용병 영구결번도 기대하는 팬이 늘어나고 있다. 일본에서 한번 실패를 경험하고 리턴한 만큼 기량을 계속 유지한다면 kt에서 은퇴할 가능성도 높다.

4. 임시 결번

영구 결번 외에도 일시적으로 번호를 비워 놓는 임시 결번 제도가 암묵적으로 존재하는데 이는 해외 리그 진출로 인해 팀을 떠난 선수의 번호를 비워 놓는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 사례가 있다.

4.1. 키움 히어로즈

히어로즈의 경우에는 영구결번은 없지만 해외 진출자들의 경우에는 임시 결번 처리를 해놓는다. 메이저리그 사관학교라는 별칭답게 상당히 많은 선수들이 메이저리그를 간 만큼 임시결번도 많다.

2023시즌 이원석키움 히어로즈로 트레이드되면서 기존의 자신의 번호인 16번이 아닌, 트레이드 대상이었던 김태훈의 17번을 달았는데, 이는 구단 차원에서 해외로 진출했던 7번, 16번, 52번을 관리 중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안우진, 조상우 처럼 군입대자들의 번호도 임시 결번 처리 해놓기도 한다. 2021 시즌이 끝나고 조상우가 사회복무요원으로 입대했고, 그의 등번호 11번을 임시 결번처리했다. 이후 그가 복무를 마치고 복귀하자 다시 11번을 가져갔다.
키움 히어로즈 임시 결번
김 하 성
7
현재 히어로즈의 임시결번으로 지정된 선수들 중 영구 결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선수로, 국내에서도 굵직한 성적을 기록하였고 2020 시즌이 끝난 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떠나면서 임시 결번으로 남게 되었으며,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그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한국인 내야수 메이저리거 중 가장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평가가 좋았다.

강정호처럼 중대한 사고를 치는 일 없이 히어로즈에 복귀해서 은퇴한다면 영구 결번이 될 가능성은 거의 확정적이나, 박병호의 선례 때문에 히어로즈 구단이 김하성을 키움에서 은퇴시킬 의지가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도 상당히 제기되는 편.
키움 히어로즈 임시 결번
강 정 호
16
사실 16번은 강정호의 여러 논란으로 인해 2020 시즌 이후 해제되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16번을 선택한 선수가 아무도 없어서 그랬는지 어느 순간 다시 임시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사실 음주 사건만 아니었으면 영구결번 확률이 매우 높았으나 현재로써는 불투명.
키움 히어로즈 임시 결번
이 정 후
51
2023 시즌이 끝나고 이정후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떠나면서 임시 결번으로 남게 되었다. 사건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김하성과 더불어 영구결번의 유력한 후보다.
키움 히어로즈 임시 결번
박 병 호
52
박병호의 등번호는 조금 애매하다. 히어로즈 시절 구단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였고 팀의 첫 전성기를 연 불세출의 홈런타자이긴 하지만 kt와 삼성을 거치는 등 팀을 많이 옮겼기 때문. 다만 FA 이적 과정에서 구단과의 갈등은 없었고 오히려 구단 차원에서 잡을 의지를 보이지 않는 등 팀에 잔류하기 힘들었다는 것이 명백했고 이런 사정으로 인해 히어로즈 팬들에게는 여전히 구단의 레전드로 인정받는 만큼 다시 히어로즈로 복귀한 후 은퇴한다면 영구결번 가능성은 충분히 남아 있다.
키움 히어로즈 임시 결번
안 우 진
41
2024 시즌부터 군 복무를 시작하는 안우진의 등번호를 군복무가 끝날 때까지 임시 결번을 할 예정이다.

4.2. 롯데 자이언츠

롯데 자이언츠 임시 결번
임 수 혁
20

2016년 최영환이 20번을 사용한 것을 마지막으로 롯데 자이언츠 어느 선수도 20번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진승현아버지의 현역 전성기 시절 등번호를 이어 쓰고자 20번을 쓰겠다는 뜻을 표했지만 구단에서 20번 요청을 반려하며 구단 차원에서 비공식 결번으로 관리 중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본래 윤학길의 29번도 20번과 더불어 임시 결번으로 관리되고 있었으나, 2024년 빅터 레이예스가 달 수 있는 번호가 29번 밖에 남지 않은 관계로[133] 29번을 선택하며 임시 결번이 해제되었다. 2025시즌 이후 레이예스가 등번호를 바꾸거나 롯데와의 재계약에 실패하는 등 거취에 변동이 있더라도 다시 29번의 임시결번이 이어질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상황.

4.3. 기타

거의 준영구 결번 대우를 받지만 임시 결번이 반드시 영구 결번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고 금방 해제되는 경우도 있다.

5. 여담

영구결번은 팬들이 해당 선수를 기릴 수 있고 선수들에게는 동기부여가 된다는 장점도 있지만 영구결번이 너무 많아지면 현역 선수들이 사용할 수 있는 등번호가 없어진다는 문제점이 있다.[135] 물론 KBO 리그 기준으로 지금과 같은 속도라면 약 몇백년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결국 번호 부족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136] 물론 세자리수 등번호를 사용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137]

다만 영구결번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MLB의 경우도 구단별 명예의 전당이 존재하지만 영구결번까지 되는 선수와 관련자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팀의 최상위 레전드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이기에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것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며, 선수들에게도 보다 큰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다른 얘기로, 팀이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현대 유니콘스가 존속했다면 영구 결번을 받았을 선수로 김기태[138]정민태[139], 정명원[140] 혹은 감독으로 김재박 등을 꼽기도 한다.


[1] 윤동균은 현역 시절 별명까지도 팀의 상징 동물과 같은 '백곰'이었다.[2] 영구 결번이 해제된 이유로 1994년 OB 베어스 항명파동으로 구단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불명예 퇴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대중적으로 유명하다. 다만 1993년 입단식을 했던 아마야구 최고의 강타자 강혁에게 주기 위해 10번을 해제했다는 말도 있다. 어떤 이유든지 간에 윤동균의 10번은 영구 결번에서 완전히 해제되었고, 2023년 기준으로는 박지훈이 달고 있다.[3]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이라는 흑역사가 있지만 국내 리턴 당시 구단 측에서 성대한 환영 행사를 열어준 것을 보아 구단 내에서는 크게 신경쓰진 않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삼성에서 투수 영구결번이 없기도 하고 마무리인데도 WAR이 삼성 역대 투수들 중 1위로 압도적인지라 영구결번에는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4] 한화 이글스의 홈구장이었던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에는 영구 결번 선수들의 번호판이 전시되어 있는데 영구 결번 선수 4명의 번호는 금색으로, 그 반대편에 류현진의 99번이 은색으로 전시되어 있고 구단 레전드에 대한 대우가 후한 구단 특성상 은퇴 후 영구 결번이 확실시 될 것으로 보인다.[5] 상술한 5명 중 최정 제외 전부 미국에 다녀왔다.[6] 참고로 롯데와 같은 모기업을 둔 자매 구단 치바 롯데 마린스의 경우 아예 영구 결번이 단 한 명도 없다. 한 평생을 치바 롯데에서만 뛰며 2000안타까지 달성한 원클럽맨이자 출신지도 치바현이라 치바의 긍지라고까지 불리는 후쿠우라 카즈야, 역시 원클럽맨으로 '미스터 롯데'로 불린 아리토 미치요마저도 영구결번을 부여받지 못했는데, 이는 팀의 레전드들이 남기고 간 상징적인 번호를 결번하는 대신 팀내 에이스들에게 물려주는 일본프로야구의 등번호 문화와 관련이 있다. 이는 퍼시픽리그 쪽이 특히 심한데, 구단에서 뛰었던 선수의 등번호를 공식적으로 영구결번한 구단은 세이부와 지금은 없어진 킨테츠뿐이다. 소프트뱅크, 치바 롯데, 오릭스는 공식적인 영구결번 자체가 없고 준영구결번으로만 기념하며, 라쿠텐은 구단 역사가 짧긴 하지만 선수가 아닌 감독 호시노 센이치의 등번호만 영구결번 되어있고, 닛폰햄은 선수들은 어지간하면 달지 않을 100번을 구단주 몫으로 영구결번한게 유일하다.[7] 김용수, 박용택, 김영신, 장종훈, 송진우, 이만수가 해당된다.[8] 해외 리그에서 뛰었으나 KBO 리그에서는 한 팀에서만 있었던 박철순, 선동열, 이종범, 이병규, 정민철, 김태균, 이승엽, 이대호와 같은 경우, 그리고 KBO 리그 내에서 다른 팀에서도 뛰었지만 한 팀의 색채가 짙은 최동원, 양준혁, 박경완의 경우가 존재한다. 이 중 박철순은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에서 뛴 이력이 있으나 KBO 리그가 창설되기 이전이며 무엇보다도 OB 베어스의 창단멤버인 만큼 원 클럽 플레이어로 취급된다.[9] 다만, 추모의 의미에서 영구 결번으로 지정된 김영신은 이들과 다른 경우라고 할 수 있다.[10] NPB는 애초에 영구 결번 자체가 활성화가 잘 안 되어 있고, MLB는 여러 구단을 옮겨다닌 선수들도 영구 결번으로 많이 지정돼 있다. 심지어 복수의 구단에서 한 선수를 동시에 영구 결번으로 지정한 경우도 있을 정도다.[11] 다만 타이거즈 구단의 인수와 이강철의 이적이 겹치는 바람에 KIA가 해태의 흔적을 지우느라 영구 결번을 일부러 진행하지 않은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12] 양준혁은 구단 내 전력 강화의 목적으로 삼성에서 내쳐졌고 박경완은 가난했던 구단의 살림살이 때문에 쌍방울에서 현대로 팔려갔다.[13] 실제로 2024년 기준 NPB나 MLB 경력이 있는 영구 결번인 박철순(두산 베어스), 선동열, 이종범(해태-KIA 타이거즈), 정민철, 김태균(한화 이글스), 이승엽(삼성 라이온즈), 이병규(LG 트윈스), 이대호(롯데 자이언츠)는 모두 KBO로만 따지면 원 클럽 플레이어들이다.[14] 없는 건 아니고 부산에 2026년 완공 예정인 명예의 전당이 지어지는 중이다.[15] 다만 키움 히어로즈는 2012년까지 20번을 비워두었는데, 이는 전신인 현대 유니콘스 시절 팀의 에이스였던 정민태의 몫이다. 다만 유니콘스와 히어로즈가 엄밀히 별개의 구단인 만큼 암묵적 영구결번으로 비워두다가 정민태 투수코치가 롯데로 가자 장시환에게 주었다. 같은 시기에는 112승의 레전드 김수경의 30번도 백업 1루수인 조중근이 받아가서 말이 좀 나왔다.[16] 다만 현대는 정명원의 28번이 해체 전까지 비공식 영구결번이었다. 이외에도 현대에서 11년간 뛰면서 통산 최다 도루 신기록을 쓴 전준호, 캡틴으로서 선수단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이숭용, 4차례 우승의 감독 김재박 등이 영구결번감으로 꼽힌다. 쌍방울은 팀의 굳건한 지주였던 김기태, 좌완 마무리 조규제, 전주 출신 에이스 김원형이 영구결번으로 지정될 만한 프랜차이즈 스타라고 볼 수 있다.[17] 자세한 사항은 이 문서 참조.[A] KBO 리그 한정[19] 은퇴식과 영구 결번식에 대한 개념이 불분명하던 시절이었고 일본에서 현역 생활을 유지하기로 했기에 별도의 은퇴식이나 영구 결번식이 없었다. 아울러 후술하겠지만 구단이 해태에서 KIA로 넘어가면서 스리슬쩍 영구 결번이 해제될 뻔 했다.[20] 다만, 구단과 감독이 은퇴를 갑작스럽게 종용하면서 은퇴식은 경험하지 못했다.[21] OB 시절인 1997년 은퇴했으나, 영구 결번 지정식은 2002년에 열려 두산으로의 구단명 변경 후에 이루어졌다.[22] 은퇴식을 먼저 하고 나중에 영구 결번 지정식이 열렸다. 은퇴식은 1997년 4월 29일에 열렸고 영구 결번 지정식은 2002년 4월 5일에 열렸다.[A] [24] 베어스의 창단 원년부터 21번을 달고 뛰었고, 은퇴 후 영구결번 지정 전까지도 21번은 공번 상태였기 때문에 베어스 역사상 유일하게 21번을 단 선수로 남게 됐다.[25] 후술하겠지만 삼성에서 쫓겨나다시피 현역 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결국 삼성과의 관계 개선이 이뤄지지 못한 상황에서 은퇴식과 영구 결번식 없이 팬들의 요구로 영구 결번에 지정됐다. 다만 라이온즈 구단 역사상 22번을 달았던 선수는 이만수가 유일하다.[26] 영구 결번 지정식은 2005년 9월 15일에 열렸다.[27] 영구 결번 지정식은 2009년 9월 12일에 열렸다.[A] [29] 다만 선수 시절 상당수를 55번을 달았고, 활약상도 55번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23번을 영구결번 시키는 것에 대해 팬들 사이에서 말이 좀 나왔다.[30] 영구 결번 지정식은 2009년 9월 23일에 열렸다.[31] 양준혁의 영구 결번이기도 하지만 삼성의 레전드 타자이자 양준혁의 대구상고 선배인 장효조의 삼성 시절 등번호이기도 했다. 양준혁은 "장효조 선배님과 공동 영구 결번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여러 번 밝힌 바 있다.[32] 다만 선수 생활의 80% 이상을 삼성에서 했고 대구 출신의 슈퍼스타인데다 타 팀으로의 이적도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진행됐기 때문에 저니맨보다는 삼성맨 이미지가 매우 강하다.[33] 최동원의 사망 이후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야 영구 결번 지정 계획이 확정됐는데 후술하겠지만 이 과정에서도 롯데 구단이 미온적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영구 결번 지정식은 2011년 9월 30일에 열렸다. 참고로 이 날은 최동원이 한국시리즈 역사상 최초로 9이닝 완봉승을 거둔 날이기도 하다.[34] 익히 알려진 것처럼 최동원은 트레이드 통보 직후 "롯데는 떠나도 부산은 못 떠난다"며 삼성으로의 합류를 거부하다시피 했고 우여곡절 끝에 삼성 유니폼을 입었던 최동원의 말년은 사실상 흑역사에 가깝다.[35] 영구 결번으로 지정된 선수 중 김영신을 제외하고, 영구 결번 지정 구단에서 가장 짧은 기간(6시즌) 동안 활약한 선수다. 다만 프로야구가 탄생하기 전에 이미 실업야구 선수 생활을 했고 롯데에서 뛴 6시즌 동안 최종우승을 포함한 불멸의 기록을 숱하게 쌓으며 부산=롯데=최동원이라는 이미지를 충분히 심어줬기 때문에 팬들은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년에 최동원과 사이가 나빴던 구단이 결번을 안 하려는 태도를 보여 팬들이 비난을 날릴 정도였다.[36] 영구 결번 지정식은 2012년 5월 26일에 열렸다.[A] [38] 영구 결번 지정식은 2014년 4월 5일에 열렸다.[39] 1998년 현대로의 이적은 박경완 본인의 의사와 무관한 이적이었다. 당시 구단 경영난이 극에 달했던 쌍방울이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박경완을 팔았고 졸지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박경완도 "현대에 가기 싫다"며 오열했다고 방송(OBS 불타는 그라운드)에서 스스로 밝혔었다. 2003년 SK로의 이적은 은사 조범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본인이 스스로 SK 유니폼을 찾아 입은 케이스다. 따지고 보면 쌍방울은 SK와, 현대는 인천과 연관성을 가지기에 소속팀들이 다 인천 연고의 SK와의 연관이 있기도 하다. 인천이나 SK와 무관한 팀은 가지 않았던 것. SK는 옛 쌍방울 선수단을 기반으로 재창단한 팀이기에 박경완 입장에서 낯설지 않은 팀이었다. 특히 이적 당시에는 평생 친구 김원형을 비롯해 김기태, 조원우, 최태원 등 옛 쌍방울 출신들이 많았다.[A] [41] 2007년 일본시리즈 우승 경험은 있고 한국시리즈도 1997년 한국시리즈, 1998년 한국시리즈, 2002년 한국시리즈 출전 경험이 있다.[42] 2003년 시즌 종료 후 이승엽이 해외 진출을 도모할 때 김재하 당시 삼성 단장이 "은퇴하면 무조건 영구 결번을 시켜주겠다"고 공언했고, 꼬박 14년이 지난 2017년 10월 3일에 영구 결번이 공식 지정되었으며, 당일 은퇴경기 및 은퇴식이 함께 열렸다.[A] [44] 영구 결번 지정식은 2021년 5월 29일에 열렸다.[C] 은퇴경기 특별엔트리 적용[A] [47] 한국시리즈 출전 경험은 2006년 한국시리즈가 유일. 2010년 일본시리즈 우승 경험이 있다.[48] 영구 결번 지정식은 2022년 7월 3일에 열렸다.[C] 은퇴경기 특별엔트리 적용[50] 한국시리즈 출전 경험은 있다. 2002년 한국시리즈가 유일. 김영신을 제외하면 영구결번 중 유일하게 리그 우승 경험이 없다. 한국시리즈 우승이 없는 이병규, 김태균, 이대호는 모두 일본시리즈 우승이 있다.[51] 영구 결번 지정식은 2022년 10월 8일에 열렸다.[A] [53] 한국시리즈 출전 경험이 있는 이병규, 김태균, 박용택과 달리 이대호는 소속팀 롯데의 약한 전력 탓에 한국시리즈 출전 경험조차도 없다. 한국에서 가장 높게 올라갔던 포스트시즌 스테이지는 2011년 플레이오프. 다만 2014년 일본시리즈2015년 일본시리즈에 출전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2015년에는 일본시리즈 MVP까지 수상했다.[54] 다만, 추모의 이유라는 점에서 다른 영구 결번 선수와는 약간 다르게 취급되는 편이다. 홈구장인 잠실야구장에도 구단 2호 결번인 박철순만 영구결번 깃발이 걸려 있고, 1호 결번인 김영신은 깃발이 따로 걸려 있지 않다.[55] 또한 매년 올라오는 선수단 등번호 명단에도 박철순은 표기를 하지만 김영신은 따로 표기가 되어 있지 않고 공란으로 있다.[56] 윤동균 이후 처음으로 10번을 달게 된 선수는 1998 시즌의 문희성이다. 이후 두산으로 이름이 바뀐 1999년부터 은퇴한 2006년까지는 43번을 달았다.[57] 그나마 소수의 팬들이 조촐하게 호프집에서 비공식 은퇴식을 열어준 것이 고작이었으며, 본인이 KBO와 국가대표팀에서 남긴 족적을 생각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이후 프로야구 40주년 레전드 올스타 40인에 선정되면서 시상을 위해 은퇴후 9년만에 잠실구장 그라운드를 방문해 팬들 앞에 섰다.[58] 홍성흔은 FA로 이적한 롯데에서 커리어하이를 맞았으며, 다시 복귀한 두산에서의 말년이 매우 초라했음에도 두산에서 은퇴하였고 두산 구단 측에서 성대한 은퇴식을 열어줬으나, 나머지 3명은 모두 다른 팀에서 은퇴하여 두산에서 은퇴식조차 치르지 못했다.[59] 여기가 중요한데, 대한민국 스포츠계 모든 종목의 외국인 선수 최초의 영결은 HL 안양패트릭 마르티넥이 있다.[60] 당시 두산 프런트쪽도 오퍼를 하고 싶었으나, 모기업 측에서 자금난을 이유로 받아들이지를 못했다고 한다.[61] 양준혁은 삼성의 지명을 받아 삼성에서 뛰다가 해태와 LG를 거쳐 다시 삼성으로 돌아와서 은퇴했고 박경완은 쌍방울의 지명을 받아 쌍방울에서 뛰다가 현대를 거쳐 SK로 이적한 뒤 SK에서 은퇴했다.[62] 보장은 4년이지만, 나머지 2년은 선수 옵션이기 때문에 건강하게만 뛴다면 굳이 이 옵션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63] 심지어 2020년 한국시리즈 상대가 친정팀 두산으로, 양의지는 친정팀을 상대로 집행검비수를 꽂으며 눈앞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64] 2024시즌 종료 기준 통산 안타는 1477개로, 상술했듯 2023시즌부터 각성하였기에 아예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다.[65] 1995년, 2001년 우승을 안겼으며 2000년에는 준우승을 기록했다.[66] 2015년, 2016년, 2019년 우승을 안겼으며 KBO 사상 최초 7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 이라는 대기록도 작성했다. 각각 2017년, 2018년, 2020년, 2021년은 준우승을 기록했다.[67] 2023시즌 기준으로 김인식 감독의 81번은 정수성 코치가, 김태형 감독의 88번은 정진호 코치가 사용중이다.[68] 대표적으로 김형준 기자 겸 해설위원도 롯데의 영구결번 기준이 박하다고 직접 언급하고 이에 진행자들이 동조하기도 했다.#[69] 단, 최동원은 롯데역사상 단 두번뿐인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궈냈으며, 그 우승은 본인이 말 그대로 선수생명을 갉아가며 투혼으로 만든 원맨쇼 그 자체였다. 게다가 최동원의 이적은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롯데 프런트에 의해 떠밀린 것이다.[70] 선동열의 29완봉에 이어 정민철과 함께 공동 2위다.[71] 물론 염종석과 주형광이 100승 고지를 밟지 못한 것은 결코 그들의 기량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이들이 롯데의 에이스로 뛰던 당시 감독이었던 강병철김용희가 이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굴린 여파가 가장 크고 1992년, 1995년, 1999년을 빼고는 롯데가 줄곧 중하위권을 맴돌았다는 점도 문제로 작용했다.[72] 엘지 그 자체였던 이병규의 통산이 wRC+ 119에 WAR* 55다. 이병규도 엘지에서 우승을 못해봤으나, 이병규는 국가대표에서 맹활약을 했던 선수였고 무엇보다 저쪽은 수비력이 넘사벽이라서...[73] 수백, 수천 경기 연속으로 중계한 구장 아나운서나 해설자 등의 인물, 심지어는 연속 좌석 매진을 기념하기 위해 팬들에게 영구 결번을 만들어 준 경우도 있다.[74] 해설자, 장내아나운서를 마이크 모양으로 기념[75] 단순히 잘했다 수준이 아니라, 당시 KBO의 리그수준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쌓은 통산 성적이 어마무시하다. 전성기 시절인 10년간은 말 그대로 리그를 폭격했으며, 말년에 스탯을 깎아먹었어도 통산 wRC+가 159다![76] 심지어 경기를 대패하고 있는 와중에 이만수가 대타로 나오기만 하면 방금까지 감독 선수 골고루 욕하던 아재들은 어디가고 우리 만수 나온다며 좋아하며 일어서서 경기를 지켜보았다.[77] 삼성(1993~1998)-해태(1999)-LG(2000~2001)-삼성(2002~2010)[78] 2024년 4월 24일 최정이 홈런 468개로 넘어섰다.[79] 배영수(2015년 한화행), 박석민(2016년 NC행), 최형우(2017년 KIA행) 등.[80] 임창용(2015년 마카오 원정 도박), 안지만(2016년 도박 사이트 자금 지원), 박한이(2019년 숙취운전), 윤성환(2020년 도박 및 승부조작).[81] 저녁 음주 후 다음 날 아침, 딸의 등교를 돕다 적발된 케이스[82] 주로 1980-90년대에 야구를 본 올드 팬들이 류중일의 1번 영구 결번을 주장하는 편이며, 그 외의 팬들에게도 윤성환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서 류중일의 이름으로 1번을 영구 결번 시키자는 주장이 나오곤 한다.[83] 혹은 1번과 75번 2개 번호를 모두 영구결번으로 하는 방법도 있다.[84] 이태양도 윤규진 못지 않은 정민철 빠돌이이다.[85] 이후 이태양은 트레이드로 잠시 팀을 떠났다가, 2023년에 FA로 복귀하면서 현재 정민철의 영구 결번인 23에 2를 곱한 46번을 쓰고 있다. 22번은 하루 먼저 FA로 이적한 채은성이 LG 시절 사용하던 55번을 뒤집어 사용하는 중.[86] 강재민이 군입대 한 뒤에는 공번으로 비어있었으나, 이후 대체 외국인 선수로 영입된 라이언 와이스가 배정받아 쓰고 있다.[87] 은퇴경기를 위해서 1군에 등록할 때 정원을 초과해도 등록이 가능한 제도. 등록된 선수는 다음 날 자동으로 등록이 말소되며, 남은 시즌동안 엔트리 등록이 불가능해진다.[88] 실제 영구결번이 되지 않았더라도 구단에 기여도가 높은 이들에 대한 대우는 타구단보다 매우 확실한 편이다. 롯데 출신 최동원도 한화 이글스 코치로 부임하면서 류현진을 탄생 시키는데 기여했는데 이러한 공과 한화 코치 경력을 고려해 사후 임직원 상에 준하는 장례식과 발생한 모든 비용을 한화그룹에서 지원했다.[89] 이정도 WAR이면 MLB에서도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는 수준이다.[90] 패가 많다고 부끄러운 기록이 아니다. 오히려 이 기록은 꾸준히 선수생활을 했다는 증거로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실제로 미국의 최다 패 투수가 야구 역사상 최고 투수인 사이 영이다.[91] 이 역시 꾸준히 선수생활을 하다보니 생긴 기록이며 절대로 부끄러운 기록이 아니다. 최다 패전이던 최다 4사구던 기회를 받지 못 하면 얻을수 없는 기록이며 정말로 못해서 기록을 세울 정도라면 그 전에 쫓겨나고도 남는다.[92] 다만 최근 발언으로 프런트가 결정할 일이라 하는 것으로 보아 프런트와 충돌이 있는 듯.[93] 영결급 선수를 제외하고 암흑기 한화에서 통산 성적이 제일 좋은 프랜차이즈 선수가 sWAR 15의 최진행이다(...) 거기다 최진행은 야구선수에게 치명적인 도핑걸린 적이 있어서 한화팬들 중에서도 좋지않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94] 실제로 2001년 말~2002년 초까지만 해도 등번호 18번이 새겨진 유니폼과 연습복을 입고 찍힌 사진이 몇 있다.[95] 1993, 1996, 1997, 2009년. 이 중에서 1993년과 1997년은 한국시리즈 MVP를 받았다.[96] 타이거즈에서만 9번의 우승, 삼성 시절까지 포함하면 10번이나 우승을 이끈 감독이다.[97] 누적 성적은 부족하지만, 원년의 슈퍼스타이자 초기 해태를 상징한다는 상징성이 있다.[98] 해태 왕조의 4번타자이자 김봉연 다음 1980년대 KBO 홈런왕 계보를 잇는 슈퍼스타였다.[99] 1989년에 데뷔하여 1996년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는 등 해태 왕조의 최전성기부터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투수 KBO 유일의 10년 연속 10승 + 100탈삼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100] 이종범 이전까지 해태왕조의 1번타자이자 2021년 이의리 이전까지 타이거즈 최초이자 최후의 신인왕이었다.[101]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KBO의 최고의 3루수이자 클러치 히터로서 해태왕조의 한 축으로 활약했다.[102] 이종범과 함께 1990년대 해태 왕조를 이끌었던 선수이자 한대화 이후 KBO 3루수 계보를 이었던 선수이다.[103] 1990년대 말 해태와 2000년대 초반 KIA 타이거즈의 중심타자로 활약하며 9년 연속 3할을 기록했다.[104] 이강철, 이대진과 함께 1990년대 해태 마운드를 책임지며 선동열을 이은 해태의 에이스로 활약했다.[105] 해태 타이거즈의 후기 왕조 에이스로 활약했으며 이후 부상으로 하락세를 겪고 타자 전향을 시도하는 등 고난을 겪었으나 다시 마운드로 복귀하여 통산 100승과 함께 2009년 V10에 기여했다.[106] 이쪽은 해태 출신이기도 하고 통산 성적으로 봤을때는 손색이 없으나 사생활 논란이 있으며 중간에 삼성에서 활동했던 이력도 있고 그곳에서 큰 사고를 친 적이 있어 가능성은 낮다.[107] 원클럽맨이나 원클럽맨에 준하는 프랜차이즈 플레이어가 영구결번의 1순위 요건인데, 후자쪽이라면 이순철, 이대진 정도까지는 고려가 가능하지만 삼성 선수로서의 이미지도 강한 임창용이나 자의로 FA로 또는 트레이드로 이적한 이강철, 홍현우, 한대화, 장성호 등은 가능성이 그만큼 낮아진다. 개중에 이강철홍현우는 친정팀으로 다시 돌아와 선수생활을 마무리했으므로 두산 양의지의 결번 여부에 따라 다시 재평가될 여지는 있다.[108] 원래는 등번호 9번에 알맞게 9월 9일에 영구결번식을 가지려고 했으나 이때는 한창 팀이 순위싸움에 집중할 수 있으니 시기를 앞당겨달라는 이병규의 요청이 있었다.[109] 그것도 1954년이후 무려 53년만에 차지한 우승반지이기에 더 의미가 있다.[110] 언제까지 미룰 셈이냐, 적당히 타협하자는 팬들의 의견도 많았지만 마침 거리두기 완화로 4월부터 육성응원이 가능해졌고, 응원가와 등장곡 모두 이 날 사용 허가를 받아 어마어마한 떼창을 연출해냈다.[111] 그리고, 구단 유튜브에 올라온 박용택의 은퇴식에서 차명석 단장이 박용택에게 '너무 날씨가 좋다. 너무 늦었다.'라고 미안함을 표현했고, 이병규와 김용수 역시 참석하여 LG의 영구결번이 모두 모이는 풍경을 보여주었다.[112] 팀 동료였던 이병규2007년 일본시리즈를, 같은 해 은퇴한 김태균2010년 일본시리즈를 우승해봤고, 비슷한 처지의 이대호는 아예 일본시리즈 2연패에 일본시리즈 MVP까지 경험해봤다.[113] 프로 이후 방송계를 포함하면 2022년부터 방영 및 출연중인 최강야구 최강 몬스터즈에서도 33번을 계속 달고있다.[114] 실제로 박용택이 인터뷰에서도 차기 영구결번 후보로 오지환을 언급하기도 하였다.[115] LG 측에서 비공식 영구결번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2023시즌과 함께 김윤식이 이상훈에게 직접 번호 변경 여부를 허가받고 47번으로 바꾸게 되었다.[116] 거기다 2번은 상술한 오지환도 오랫동안 달았고 현재는 팀의 차기 프랜차이즈인 문보경이 달고 있어 문보경이 리그를 지배할 만큼의 활약을 펼치지는 못하더라도 영구결번의 가치가 꽤 충분하다.[117] 그러나 김재현은 선수 생활 후반부를 SK 와이번스에서 보냈고, 2010 시즌을 끝으로 SK 와이번스에서 은퇴했기 때문에 영구결번을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118] 실제로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살림이 어려워진 쌍방울 구단이 조규제, 박경완, 김기태, 김현욱 등 팀의 주축 선수들을 불가피하게 타팀에 팔아야 했을 때 선수 당사자는 물론 선수단 전체가 매우 슬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박경완 본인도 불타는 그라운드에서 부상 후 수술을 받아 선수생활을 함께 한 2년 선배 조웅천의 병문안으로 대화할 때 "형 그때 기억 나? 나 그때 현대 가기 싫다고 울고불고 난리치고 그랬잖아"라고 말했다. 조웅천은 당시 쌍방울 선수가 아니고 태평양 선수였다가 자연스럽게 바뀐 현대 선수였지만 박경완의 호남지역 선배라서인지 어릴때부터 고교 야구로 친분이 있었기에 두 사람이 통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저 대화 후 "은퇴하면 형이랑 나랑 같이 코치해야지. 형 투수코치, 나 배터리코치."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말은 현실이 되면서 조웅천은 SSG에서, 박경완은 SK에서 코치 생활을 하다가 염경엽 감독의 요청에 따라 LG로 이적하게 되었다.[119] SK는 공식적으로 쌍방울의 역사를 승계하지 않는다. SK가 쌍방울 레이더스를 인수하지 않았고 쌍방울 레이더스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연고지 승계도 하지 않았다. 다만 쌍방울 구단 프런트는 그대로 승계받았고, 쌍방울이 해체되며 소속 구단이 없어지고 웨이버 공시된 선수들을 개별 계약으로 데려왔다. 즉 프런트는 이전 쌍방울 레이더스 직원이었던 것인데 박경완은 구단 재정상태 때문에 원치 않는 트레이드를 당했으므로 프런트에서 박경완에게 앙금이 남아있을리 없다. 쌍방울에서 그대로 SK로 건너온 팬들 역시 박경완에게는 좋은 감정과 미안한 감정만 남아있었다.[120] 현대는 SK 와이번스가 들어오기 전 인천 연고지를 맡았던 팀인데 인천 연고지를 버리고 떠나버렸다. 박경완의 경우 현대가 아직 인천 연고지였던 1998 시즌부터 현대에서 뛰었다. 그리고 이적 첫 시즌부터 포수 골든글러브를 받고 인천 연고지 팀 첫 우승을 이끄는 등 활약했다. 박경완이 현대 인천 연고지 시절에 뛴 것은 2년뿐이지만 인천 팬들에게는 좋은 인상을 심어놨다. 이후 박경완과 현대와 잡음이 있었다는 썰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썰에 불과하고 애초에 현대가 인천 연고지를 떠난 이후라서 인천 야구팬들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게다가 인천 야구 팬들은 연고지 야반도주 사건으로 현대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므로 더더욱 상관이 없는 상황. 그리고 현대가 인천을 떠나고 2년만에 박경완은 FA 자격을 얻어 SK로 이적하며 인천으로 돌아온 모양새가 되었으므로 인천 야구팬들에게는 많은 지지를 받을법도 하다.[121] 첫 FA 직전 시즌에 방송 인터뷰에서 "메이저리그 진출도 하고 싶고, 한국에 남아서 SK 레전드도 되고 싶어 고민이다"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한국에 있을 경우 다른 팀을 갈까말까하는 고민 자체가 없었다는 것.[122] 최정과 김광현은 리그 내 선수들 중에서도 품행이 가장 모범적인 선수로 꼽힌다. 심지어 둘 모두 겜덕후로 알려져 있어 술을 먹고 사고를 친다든가 음주운전을 한다든가 할 가능성도 낮다. 최정은 팬 폭행 사건이 있었으나 바로 해당 팬과 합의했고 이후에는 그럭저럭 묻히게 되어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광현은 2023년 WBC 대표팀 음주 논란이 일어나며 위기를 맞았으나 원래 알려진 것과 달리 경기에 지장을 줄 일은 없는 날 선수들끼리만 음주와 식사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마찬가지로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123] 2001년 SK에 입단해서 [age(2001-01-01)]년째 같은 팀에서 뛰면서 2000년 SK 창단 이후 최장수 현역 선수로 활약 중이다. 선수단 전체로 폭을 넓혀도 김강민보다 1년 먼저 들어와서 선수로 18년, 코치로 4년째 근속 중인 조동화에 이어 근속기간 2위에 속한다.[124] 1990년대를 풍미했던 공필성과 함께 KBO 리그 역대 선수 중 등번호 '0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수다.[125] 영구결번 후보들인 최정과 김광현도 한결같이 김강민에게 영구결번을 줘야한다는 언급을 했다.[126] 만약 김강민의 0번이 영구결번이 되지 않고 최지훈한테 물려준다고 하면 최지훈의 부담감은 막대할 것이다. 사실상 은퇴할 때까지 0번을 달고 뛰어야 하며 만약 바꾸었다가는 신인 시절 박재홍의 62번을 낼름 가져갔던 한유섬처럼 팬들한테 한 소리 들을지도 모른다.(한유섬이 박재홍이 물려준 62번을 개명과 함께 35번으로 바꾸자 팬들은 그 번호를 왜 바꾸냐며 불만을 표했고 박재홍 또한 한유섬이 자신에게 말을 하지 않고 바꾸었다며 아쉽다고 하였다.)[127] 최동원, 선동열. 타 종목을 포함하면 농구 이상민도 비슷하다.[128] KBO가 아니라 개인 기록으로 하면 한국 선수로는 일본과 미국 프로야구에서도 활동한 임창용이 1004경기로 타이를 이루고 있다.[129] 이쪽도 최고는 미국과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동한 오승환이 1000이닝을 넘겨서 독보적이지만, KBO만 치면 700이닝도 안 돼서 정우람이 더 많다.[130] 쌍방울 최후의 시즌이었던 1999년 데뷔했고 1년 후 선수단의 고용을 승계한 SK의 선수가 되었다.[131] 심지어 창단 첫 우승때도 이재학은 성적 부진으로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아예 들어가지 못 했다.[132] 물론 비슷한 사례로 박철순처럼 커리어 초반에 집중된 전성기와 상징성으로 받은 사례도 있기는 하다.[133] 본래 원하던 등번호의 주인이 개인사와 관련된 의미있는 번호라는 이유로 양보를 거절했다고 한다.[134] 김윤식이 번호를 바꾸기 위해 직접 이상훈에게 연락하였고, 이상훈이 이를 허락하게 되어 바꿨다고 한다.[135] 실제로 이런 이유로 스스로 영구결번을 거절한 선수도 있는데 바로 넥센 히어로즈이숭용이다. 후배들에게 자신의 번호를 주고 싶다는 이유로 구단측의 영구결번 제안을 사양했다.[136] 뉴욕 양키스의 경우는 120년 가까이의 역사를 보유했고,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선수가 많이 등장한 탓에 2022년 현재 영구결번으로 인해 한 자리수 등번호가 0번 빼고 남아있지 않다.[137] 이 방법을 사용하면 이론적으로 약 9천~1만년(…)이 지나서야 번호 부족 문제가 발생하게 되니 그때까지 KBO리그가 유지되지 않는 한 번호 부족 사태는 생기지 않는다.[138] 삼성으로 이적하긴 했으나, 이는 재정악화로 인한 선수팔이였다는 점에서 쌍방울이 건재했으면 이적은 없었을 것임에 이견은 없다. 이후 김기태는 쌍방울의 후신인 SK로 이적해 은퇴했다.[139] 히어로즈에서 은퇴식을 한 후, 코치로 뛴 09~12년 동안은 비공식 결번이었다. 마지막에 싸우고 나간 탓에 해제[140] 은퇴 후 해체 전까지 실제로 비공식 결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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