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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12:32:48

김상진(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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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ed1c24,#e31119> '''<1군>
70 조웅천 · 73 박흥식 · 75 김한수 · 77 이승엽 [[감독#s-1.1|
]]
78 세리자와 · 79 박정배 · 88 정진호 · 89 고토
91 이영수 · 92 조성환'''
<2군>
71 이도형 · 76 이정훈 · 80 김진수 · 81 김지용
82 권명철 · 83 김동한 · 84 김상진 · 86 강석천
<재활/잔류군>
72 조경택 · 74 조인성 · 90 가득염
<트레이닝>
1군 천종민 · 조광희 · 유종수
2군 87 이광우 · 이덕현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군 입대 선수등록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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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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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982 1983 1984 1985~1990 1991
박철순 장호연 김진욱 장호연 김진욱
<rowcolor=#fff> 1992 1993 1994 1995 1996
장호연 이진 김상진 장호연 진필중
1997~1998 <rowcolor=#FFD700> 1999 2000~2001 2002~2003 2004
김상진 강병규 조계현 박명환 키퍼
<rowcolor=#FFD700> 2005 2006~2007 2008 2009 2010
랜들 리오스 레스 김선우 히메네스
<rowcolor=#fff> 2011~2014 2015 2016~2017 2018~2019 2020
니퍼트 마야 니퍼트 린드블럼 알칸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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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봉 이선희 김시진 김일융 김시진
1987 1988 <rowcolor=#fff> 1989 1990 1991
김훈기 전용권 진동한 김상엽 김성길
1992~1993 <rowcolor=#fff> 1994~1996 1997 1998 1999
김상엽 김태한 전병호 조계현 김상진
<rowcolor=#fff> 2000 2001~2002 2003 2004 2005~2006
노장진 임창용 엘비라 호지스 배영수
2007 <rowcolor=#fff> 2008 2009~2010 2011~2012 2013
브라운 배영수 윤성환 차우찬 배영수
<rowcolor=#fff> 2014 2015 2016 2017 2018
윤성환 피가로 차우찬 페트릭 윤성환
<rowcolor=#fff> 2019 2020 2021~2023 2024
맥과이어 백정현 뷰캐넌 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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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진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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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두산 베어스 우승 엠블럼 V2.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5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투수 마일스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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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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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진
(1983~1992)
1987년 / 124승
최동원
(1983~1990)
1990년 / 103승
선동열
(1985~1995)
1990년 / 146승
장호연
(1983~1995)
1993년 / 109승
윤학길
(1986~1997)
1994년 / 117승
정삼흠
(1985~1996)
1996년 / 106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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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2005)
1996년 / 152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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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2001)
1996년 / 126승
송진우
(1989~2009)
1997년 / 210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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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2000)
1998년 / 126승
정민철
(1992~2009)
1999년 / 161승
김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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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 100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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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 120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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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 124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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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 112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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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2009)
2008년 / 100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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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 100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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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삼
(2006~2020)
2015년 / 121승
윤성환
(2004~2020)
2016년 / 135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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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 158승
장원준
(2004~2023)
2016년 / 132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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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 168승
송승준
(2007~2021)
2017년 / 109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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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 400세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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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2009)
2008년 / 2048탈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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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 기록
연속경기 완봉승 3경기 연속

{{{#fff [[OB 베어스|OB 베어스]] 등번호 61번}}}
결번 김상진
(1989~1998)
이경수
(1999~2000.7.15.)
{{{#fff [[삼성 라이온즈|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1번}}}
곽채진
(1997~1998)
김상진
(1999~2001)
브리또
(2002~2003)
{{{#fff [[SK 와이번스|SK 와이번스]] 등번호 31번}}}
브리또
(2000.5.~2001)
김상진
(2002~2003)
브리또
(2004)
{{{#fff [[SK 와이번스|SK 와이번스]] 등번호 86번}}}
손상득
(2003~2004)
김상진
(2005~2016)
정수성
(2017~2020)
{{{#fff [[삼성 라이온즈|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80번}}}
김성래
(2011~2016)
김상진
(2017~2018)
황승현
(2020~)
{{{#fff [[두산 베어스|두산 베어스]] 등번호 84번}}}
조웅천
(2017~2019)
김상진
(2020~)
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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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4김상진.png
<colbgcolor=#131230> 두산 베어스 No.84
<colcolor=#ffffff> 김상진
金尙珍 | Kim Sang-Jin
출생 1970년 3월 15일 ([age(1970-03-15)]세)
경상남도 마산시[1]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마산월포초 - 마산동중 - 청강고[2]
신체 182cm, 91kg, O형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9년 연습생 (OB)
1990년 2차 3라운드 (OB)[3]
소속팀 OB 베어스 (1989~1998)
삼성 라이온즈 (1999~2001)
SK 와이번스 (2002~2003)
지도자 SK 와이번스 1군 투수코치 (2005~2011)
SK 와이번스 2군 투수코치 (2012~2014)
SK 와이번스 1군 투수코치 (2015)[4]
SK 와이번스 재활코치 (2015)[5]
SK 와이번스 2군 투수코치 (2016)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 (2017)
삼성 라이온즈 육성군 투수코치 (2018)
두산 베어스 2군 재활코치 (2020~2021)
두산 베어스 재활군 투수코치 (2022)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23~)
해설 위원 MBC ESPN 야구 해설위원 (2004)
가족 아들 김웅(2002년생)
파일:두산 베어스 홈 심볼.svg
1. 개요2. 선수 경력
2.1. OB 베어스 시절2.2. 삼성 라이온즈 시절2.3. SK 와이번스 시절2.4. 연도별 주요 성적
3. 지도자 경력4. 여담
4.1. 저평가?
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OB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 SK 와이번스 소속 투수이자 現 두산 베어스 2군 투수 코치.

2. 선수 경력

2.1. OB 베어스 시절

파일:20180406_batman.jpg
파일:OB김상진 투구폼.gif
김상진의 투구폼
"암흑기의 우울한 나날이 이어지던 1991년, OB 베어스 팬들의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준 투수 한 명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두산 베어스 공식 홈페이지 <이재국의 베팬알백> 38편.

경상남도 창원 출신[6]으로 1989년 연습생으로 OB 베어스에 입단했으며, 이듬해 OB의 2차 3순위 지명을 받아 정식 선수가 되었다. 1991년부터 OB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 4년동안 10-11-11-14승을 올리면서 2년 연속 꼴찌로 추락했던 OB의 재건을 이끌었다. 특히 OB가 2번째 KS 우승을 차지한 1995년에는 17승(8완봉승 포함)[7] 7패 2.11의 ERA를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1995년에는 3경기 연속 완봉승[8], 12이닝 17탈삼진이라는 진기록을 달성했다. 12이닝 17K는 5월 23일 잠실 한화전에서 달성하였다. 영상. 공교롭게도 이 기록은 2010년 5월 11일 LG와의 경기에서 무려 정규이닝만에 17K를 잡아낸 류현진에 의해 재조명된다. 기사 하단 사실 저 때 투수교체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본인이 더 던지겠다고 자청했다고 한다.

외국인 선수제가 도입되기 전의 1990년대 한국프로야구는 토종 에이스들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삼성 김상엽, 한화 정민철, 현대 정민태, LG 이상훈, 해태 이대진, 롯데 주형광, 쌍방울 김원형과 같이 OB의 대표 에이스는 단연 김상진이었다.

그러나 1991~1995년까지 연평균 181.8이닝을 던진 혹사[9]로 구위가 서서히 하락하기 시작해 1996년부터는 잦은 부상에 시달렸으며, 이로인해 예전의 묵직한 강속구를 잃고 기교파로 변신했다.

전성기 김상진은 최고구속 145km/h 강속구와 커브를 주무기로 하는 올드스쿨 파워 피쳐에 가까운 스타일이었다. 특히 1995년의 포스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해서, 이 한 해만 놓고 보면 선동열이나 최동원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제구력도 준수한 편이라 피네스 피쳐로 변신한 후에도 꽤나 좋은 성적을 올렸다. 두산의 구단 역사를 놓고 보면 박철순 이후 최고의 투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선수였다.[10]

2.2. 삼성 라이온즈 시절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00819220224214A2.jpg

결국 1998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에 현금 6억 5,000만 원에 현금 트레이드됐다.[11] 2년 연속 두자릿수 승수를 올리며 그럭저럭 활약했다.

이에 힘입어 2000년이 끝나고 FA 자격을 얻어 삼성과 3년 8억 5000만원에 재계약을 맺는다. 다만 성적을 보면 하락세가 보이는데, 1999년은 4점대 방어율을 찍었지만 해당 시즌이 워낙 타고투저였던 것도 있고 그나마 선발투수로 179이닝을 소화하면서 이닝을 많이 먹어줬지만, 2000년에는 12승에 3점대 방어율을 찍으며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으나 소화 이닝은 겨우 89이닝으로 100이닝도 못 찍었다. 다만 나이가 30대 초반으로 아직은 젊었기에 반등의 여지가 보였고, 전년도 FA 먹튀들인 김동수, 이강철보다 5천만원을 더 얹어줬다.[12][13]

그러나 노쇠화 및 부상이 겹치며 2001년에는 7점대의 평균자책점을 찍고 성적이 대폭 하락하였다. 당시 32세로 그리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과거 OB 시절부터 혹사가 누적된 탓에 발생한 후유증이 하락세의 큰 이유였다.

한편 OB 베어스 항명파동의 주동자로 낙인찍혔던 탓인지, 김상진 외에도 이 사건에 관련된 OB 베어스 주축 선수들이 같은 시기 다른 팀으로 떠나야 했다.[14]

2.3. SK 와이번스 시절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20903225549437.jpg

결국 2001 시즌 후 SK - 삼성 간의 2:6 대형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브리또, 오상민을 상대로 김동수, 김기태, 김태한, 이용훈, 정경배와 함께 SK 와이번스트레이드되었고[15], 그럭저럭 이닝을 먹어주며 4~5선발로 뛰었지만 전성기에 비해서 못 미치는 활약이었다. 결국 2003 시즌 후 FA 계약이 끝나자 SK에서 방출당하며 은퇴했다.[16]

2.4.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9 OB 1군 기록 없음
1990
1991 32 151⅔ 10 6 1 - 0.625 3.74 136 10 62 65 74 63 1.33
1992 33 168⅔ 11 13
(공동 3위)
1 - 0.458 3.63 131 11 95
(4위)
96 79 68 1.30
1993 33 187⅓
(5위)
11 11 0 - 0.500 3.07 156 6 63 142
(3위)
75 64 1.13
1994 34 194
(4위)
14 10 7 - 0.583 2.37
(3위)
170
(5위)
4 52 148
(2위)
64 51 1.12
1995 27 209
(2위)
17
(2위)
7 0 - 0.708
(3위)
2.11
(3위)
174
(2위)
6 52 159
(3위)
58 49 1.04
1996 22 94 5 7 3 - 0.417 3.64 81 6 44 83 48 38 1.28
1997 24 136⅓ 12 9 0 - 0.571 3.30 122 8 51 108 59 50 1.24
1998 27 141⅔ 8 8 0 - 0.500 3.81 149 13 51 97 71 60 1.33
연도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9 삼성 31 179⅓ 12 7 0 - 0.632 4.67 195
(2위)
22 64 136 104
(4위)
93
(4위)
1.42
2000 22 89 12 6 0 1 0.667 3.84 91 8 37 63 43 38 1.37
2001 16 30⅔ 2 3 2 0 0.400 7.04 39 5 24 15 26 24 1.96
연도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2 SK 32 116⅔ 6 5 0 2 0.545 4.71 122 21
(공동 5위)
35 95 62 61 1.29
2003 26 89⅓ 2 8 0 2 0.200 4.53 90 7 39 30 51 45 1.32
KBO 통산
(13시즌)
359 1787⅔ 122 100 14 5 0.550 3.54 1656 127 679 1237 814 704 1.26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1년 3완투 1완봉
1992년 9완투 1완봉
1993년 7완투 2완봉
1994년 9완투
(공동 3위)
2완봉
1995년 13완투
(1위)
8완봉
(1위)[17]
1996년 2완투 0완봉
1997년 2완투 1완봉
1998년 3완투 2완봉
2000년 2완투 0완봉
KBO 통산 50완투 17완봉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2004년에는 MBC ESPN에서 메이저리그 해설가로 1년 간 활동했다.[18]

3.1. SK 와이번스 시절

파일:external/www.sksports.net/20150606164453_1.jpg

2005년 자신이 은퇴했던 팀 SK 와이번스에서 투수코치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김성근 체제에서는 주로 1군 투수코치를 맡았다.

허나, 이만수 체제로 넘어오면서 2군 투수코치로 보직 변경되었다.

SK 투수코치 시절에는 꽤나 좋은 평가를 받았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SK 팬들도 김상진의 투수코치로서의 역량은 인정하는 편. 특히 1군 투수코치 시절 투수 교체 타이밍 및 적절한 투수 운용 능력과 2군 투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된 뒤에는 2군에서 서진용, 김주한, 김찬호 등 유망주들을 조용히 육성해 1군으로 올리는 등 능력만큼은 인정받았던 좋은 코치였다.

2015년부터 조웅천과 자리를 맞바꿔 오랜만에 1군 투수코치를 맡게 됐다. 시즌 초반에는 순항하는 듯 하다가, 중반 들어 SK 투수진이 부진하고 팀 순위가 쳐짐에 따라 불펜코치 김원형에게 메인 투수코치 자리를 넘기고 2군 투수코치로 이동했다. 이 때 김원형의 불펜코치 자리에는 김경태가 들어왔다. 이후에는 계속 2군에 있었다.

2016년 시즌 종료 후 김원형과 함께 SK 와이번스를 떠나는 게 확정되면서 11년간 역임해온 SK 코치직을 내려놓았다.

3.2. 삼성 라이온즈 시절

2016년 시즌 종료 후 김한수 감독 체제로 새롭게 출범한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로 합류하였다.[19] 기존 투수코치였던 김태한이 수석코치로 보직이 변경됨에 따라 삼성의 1군 투수코치를 맡게 됐다. 이로써 삼성에는 선수 시절이었던 2001년 이후 15년만에 돌아오게 됐다.

팀 순위는 최하위권인 가운데 감독과 수석코치가 투수 혹사나 보직 파괴 등으로 욕을 먹는 것과 달리, 메인 투수코치를 맡고 있음에도 투수진 운용에 대한 비판 여론은 적다. 애초에 김상진이 오기 전부터 삼성 투수진이 많이 약해져 있는 상태였던 데다, 과거 SK 시절 투수코치로서 명성이 높았고, 반대로 투수코치 시절 쌓여온 비토 여론이 상당한 김태한 수석코치가 있기 때문인 듯 하다.

2017년 시즌 후 1군 투수코치 자리에 오치아이 에이지가 영입됨에 따라 육성군 투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됐다.

이후 소식이 없다가 2018년 시즌 후 조용히 팀을 떠났다. 강기웅, 김재걸 등의 코치가 팀을 떠났을 때는 별도의 기사가 나온 것과 달리, 김상진에 대해서는 어떤 기사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3.3. 두산 베어스 시절

파일:batMan_OB-95_n.jpg

삼성에서 나온 후에는 1년간 야인으로 지내다가, 2020년 1월 14일 배영수, 공필성과 함께 두산 베어스의 코치로 영입되면서 무려 22년 만에 친정팀 베어스로 돌아오게 되었다.[20] 보직은 2군 재활코치.

이승진의 구속 상승을 이끌었고, 아리엘 미란다가 부상으로 이탈한 상황에서 긴급하게 선발 로테이션을 맡게 된 최승용 등 다른 투수들의 기량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키며 두산팬들 사이에서 뛰어난 육성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이 때문에, 2021년 후반기 2군 투수들이 두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한 숨겨진 원동력으로 꼽히고 있다.

2022시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정철원을 필승조로 발굴했고, 투구폼을 많이 바꾸지 않고도 리그 최고 수준의 불펜투수로 키워내는 데 성공했다. 22시즌 정철원은 두산 최고의 발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좋은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2022년 정철원은 신인왕이 되었다.

2023 시즌 역시 2군에서 투수를 육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4. 여담

4.1. 저평가?

5. 관련 문서


[1]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2]마산제일고등학교의 전신.[3] 1989년에 연습생 신분으로 입단하여 1990년 지명을 받음으로써 정식 선수가 되었다. 당시 마산에서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아들이 정식 선수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해 우셨다고 한다. 구단에서 800만원 계약금을 수표로 받은 다음 은행으로 가 계약금을 모두 부모님께 드렸다고 한다.[4] ~8월 14일[5] 8월 15일~[6] 오래 전에 야구부가 없어진 청강고등학교(現 마산제일고등학교)를 나왔다.[7] 한 시즌 8완봉승은 1986년의 선동열과 타이 기록이며, 이 해 3경기 연속 완봉승을 기록했다. 하기룡, 이상군, 선동열, 송승준 등과 더불어 한국프로야구에서는 5명만 달성한 기록이다.[8] 이후 기록이 없다가 2009년 송승준이 14년만에 3연속 완봉승을 기록했다. 송삼봉이라는 별명은 그래서 생긴 것.[9] 통산 기록한 50완투 가운데 41완투가 1991~1995년 5시즌에 집중되어 있다.[10] 박철순계형철, 장호연, 김상진으로 이어진 베어스의 에이스 계보는 이후에도 박명환-리오스-니퍼트-린드블럼으로 이어진다.[11] 같은 시기에 삼성은 해태에 현금 18억 원과 간판 타자 양준혁을 내주면서까지 임창용을 영입하였고, 곧이어 쌍방울에 현금 20억 원과 양용모, 이계성을 내주고 김기태김현욱을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그 전해에 해태에서 4억 원에 조계현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한 것에 이은 현질이었다.[12] 다만 화폐가치가 급상승하던 시기라는 것을 감안하면 엇비슷한 수준.[13] 아이러니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삼성과 FA 계약을 체결한 김상진, 김동수, 이강철 셋 다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모두 타 팀으로 트레이드된다. 그리고 김상진과 같이 FA 자격을 얻어 삼성과 재계약한 김기태 역시 계약기간 1년만에 김상진, 김동수와 묶여 SK로 트레이드된다.먹튀 수집 결론적으로 이 당시 우승에 목메던 삼성의 현질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14] 예시로 권명철 - 해태, 김상호 - LG 등[15] 사실상 FA 먹튀인 김동수와 먹튀기질이 보이던 김기태, 김상진, 여기에 내야자원 중복으로 써먹을 데가 없던 정경배와 재활하던 이용훈을 넘긴 것이다. 그리고 삼성이 받아온 선수는 좋은 모습을 보이던 브리또와 그럭저럭 던지던 좌완 오상민. SK는 선수층을 보강했고, 삼성은 외국인을 보강했다고 보면 된다.[16] 비슷한 시기 방출 통보를 받은 김태한과 위로할 겸 같이 술을 마시고 있는데, 전화로 방출 통보가 왔다고 한다. 그 전화를 받고 나서 김태한에게 자신도 위로해 달라고 말했다는 웃픈 상황이 되어 버렸다고.[17] 선동열의 86년 8완봉과 함께 유이한 한 시즌 최다 완봉이다. 그런데 선동열보다 경기수도, 이닝수도 더 적다.[18] 당시 MBC ESPN에서는 최태원을 해설가로 영입하려고 했으나, 최태원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지도자 연수를 떠나게 되자 김상진을 영입하였다.[19] 한편 같이 SK에서 나온 김원형 코치는 조원우 감독의 부름을 받고 롯데 자이언츠의 수석코치 겸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겼다.#[20] 김상진은 1998년까지 무려 두산으로 바뀌기 전인 전신 OB 베어스 이름일 때에만 뛰었다.[21] 여담으로 이상훈과는 말년에 같은 팀에서 뛸 뻔했는데 2003년 말 김상진이 SK에서 방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순철 감독과 갈등을 겪던 이상훈이 시즌 개막을 앞두고 LG에서 SK로 트레이드되면서 간발의 차이로 엇갈리고 말았다. 본인도 이에 대해 상당히 아쉬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상훈은 트레이드되고 얼마 후 은퇴했다는 것...[22] 참고로 이상훈은 김상진 대뷔시절 조언을 해주었던 선배 김태형과 같이 기타치고 돌아다니던 사이였다,[23] 하지만 불행하게도 해태 투수 김상진은 1999년에 위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24] 타자와 포수를 제외하고는 투수들의 구위를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25] 한창 SK 와이번스두산 베어스가 서로 라이벌 구도를 달리고 있던 시절인 2007~2009년 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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