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조(스포츠)
KBO 리그 역대 왕조팀 | |
★★★★ 1986~1989 해태 타이거즈 (해태 왕조) | ★★★★ 2011~2014 삼성 라이온즈 (삼성 왕조) |
왕조를 달성한 당시 구단명과 엠블럼으로 서술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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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 | 구단주·대표이사 유정근 | 단장 이종열 | 감독 박진만 | 2군 감독 최일언 | 주장 구자욱 | |
경기장 | 1군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 · 포항 야구장 | 2군 경산 삼성 라이온즈 볼파크 스프링캠프 온나손 아카마 볼파크 | 재활 삼성 트레이닝 센터 | 이전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 |
주요 정보 | 선수단 | 등번호 | 유니폼 |마스코트 블레오 | 사건 · 사고 | 프랜차이즈 스타 | 삼성 왕조 | 암흑기 (2차) | 통산 기록 일지 | 상대 전적 | |
관련 정보 | 삼적화 | 여름성 | 이마양 | 채최박 | 조원수박차 | JOKKA 라인 | 곤규엽 | 굴비즈 | 삼나쌩 · 삼상바 클럽 | 기롯삼한 | 라떼동맹 | 임김오 | |
라이벌리 | vs KIA 달빛 시리즈 | vs 롯데 클래식 씨리즈 | vs 두산 싸대기 매치 | vs 현대 재계 라이벌 시리즈† | |
영구 결번 | 10 양준혁 | 22 이만수 | 36 이승엽 | |
최종 우승 | 1985 | 2002 | 2005 | 2006 | 2011 | 2012 | 2013 | 2014 | |
현재 시즌 | 삼성 라이온즈/2024년 | |
팬덤 정보 | 응원가(구단 · 선수)|디시인사이드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 |유튜브 LionsTV | 네이버 카페 사자 사랑방 | 팬 게시판 | |
지역 연고 | 경북고 | 대구고 | 상원고 | 포철고 | 경주고 | 강릉고 | 설악고 | 도개고 | 예일메디텍고 | |
기타 | 이승엽 와도 자리 없다| 나믿가믿|삼팬이지만 인정한다|돈 내놔라 먹튀야|못 참겠어서 왕조 선언합니다|김헌곤 유니버스 | 세이브 조작단 | 오승환/밈 | |
틀 문서 | ||
역대 시즌 | 역대 감독 | 역대 주장 |역대 1차지명 |응원단|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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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성 왕조의 화룡점정을 찍었던 2014년 한국시리즈 우승.[1] |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해태 왕조와 더불어 3회 연속 우승(3-peat)을 달성한 단 둘뿐인 사례이기에 해태 왕조와 마찬가지로 논란 없이 왕조의 정통성을 인정받는다. 2013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가 3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에 성공하면서 1988년 해태 왕조 수립 이후 25년 만에 나타난 왕조다.
삼성 왕조는 KBO 리그 역사상 최고의 강팀 중 하나를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된다. KBO 리그에서 전무후무한 4년 연속 통합우승을 이룩했던 시기였던 데다가[2] 아시아 시리즈 우승까지[3] 가져온 적도 있었기에 왕조가 붕괴되고[4] 만 [age(2015-10-3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많은 삼성 라이온즈 팬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는 시기다.
2. 역사
2.1. 왕조 이전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에 맞춰 창단한 삼성 라이온즈는 국가대표 선수를 많이 배출할 만큼 우수한 대경권의 고교야구 팜과 삼성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고 화끈한 빅볼 야구를 선보이며 해태 타이거즈, OB 베어스와 함께 KBO 리그의 대표적인 강팀으로 군림해왔다. 그러나 리그 최상위권의 공격력과 상반되는 빈약한 투수진과 새가슴 기질[5] 때문에 한국시리즈 우승과는 지독하게도 인연이 없었는데,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하기 전까지 무려 7번의 준우승을 거쳐야 했을 정도였다.사실 삼성도 1985년 전·후기 리그 체제에서 전기 리그와 후기 리그 모두 우승하여 한국시리즈를 소멸시키고 통합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었으나, 대다수 KBO 리그 팬들뿐만 아니라 삼성 구단조차 한국시리즈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제대로 된 우승으로 취급하지 않았었다.[6] 다른 원년 구단들은 1980년대[7]와 1990년대[8]에 이미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반면 삼성만 유일하게 20세기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다. 심지어 원년 구단이 아닌 한화 이글스[9]조차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보다 먼저 우승하면서 '무관의 제왕', '준우승 전문팀' 이라는 조롱을 받던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대한 갈망은 더욱 더 커져갔다.
특히, 1986년 한국시리즈, 1987년 한국시리즈에 이어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도 해태 타이거즈에게 패하자 삼성은 무기력해졌다. 해태에게만 무릎을 꿇은 것이 벌써 세 번째이니 선수들은 물론 구단 전체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국내 최초의 미국 전지훈련, 미국 교육리그 파견, 코치 해외연수, 2군 육성을 위한 경산 볼파크 건립 등 팀 성적을 올리기 위해 온갖 처방을 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반면 해태는 삼성의 절반도 안 되는 팀 운영비를 쓰면서 우승을 밥 먹듯 해대니, 당시 프로야구는 돈 쓰는 구단이 바보 취급받던 시절이었다. 실제 삼성 구단 관계자가 자신들의 적극적인 투자에 대해 자랑삼아 설명하다 해태 구단 관계자로부터 "우승도 못하는 주제에 입 닥쳐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던 삼성에게 2000년은 구단 역사에 전환점이 된 해다. 삼성이 선택한 마지막 카드는 바로 해태 야구의 이식이었다. 이는 라이온즈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신필렬 사장, 김재하 단장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그동안의 제일주의, 자존심을 내려놓은 신필렬-김재하 조합은 삼성을 송두리째 바꿨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김응용 모셔오기였다. 주변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우승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특히 보수적인 대구 민심은 삼성을 세 번이나 좌절시킨 해태 감독 김응용에 대한 반감으로 들끓었지만, 김재하 단장은 "해태 구정물이라도 마시고 싶은 심정"이라고 당시 절실했던 상황을 나타냈다.
그 다음 '신필렬-김재하 콤비'가 공언한 내용은 '현장은 현장에게'였다. 다시 말해 선수단 내부 문제는 전적으로 감독을 위시한 코칭스태프에게 맡긴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삼성의 '현장 간섭'은 도를 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김대호의 야구생각] 20년 전 삼성 “딱 한 번만 우승하면…” (MBN, 2014. 07. 08.)
그러나 김응용 감독 취임 첫 해인 2001년에도 또 준우승에 그쳐 더 이상 구단 수뇌부에서도 우승을 언급하지 않는 지경까지 갔었지만, 이듬해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이승엽과 마해영의 극적인 백투백 홈런으로 첫 우승을 차지하며 오랜 숙원을 풀게 되었다. 이후 2005년 김응용 감독은 제자인 선동열 수석코치 겸 투수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자신은 삼성 라이온즈 사장으로 영전하였다. 그리고 김응용은 네모토 리쿠오처럼 왕조설계에 박차를 가했다.
끝내기 홈런을 치고 환호하는 마해영과 박흥식 코치 |
그러나 선수 시절 번번이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좌절시켰던 선동열에 대한 악감정, 전통적인 삼성 야구와 어긋나는 선동열식 스몰볼 야구에 대한 반감, 양준혁 · 김한수 · 박한이 · 이승엽 등 삼성 프랜차이즈 선수들에 대한 홀대, 2005년 심정수 · 박진만 FA 영입으로 씌워진 '돈성' 이미지, 그리고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4강 진출의 열기로 인한 한국 야구의 침체기(2002~2008년)가 맞물려 선동열 감독 재임 당시 창단 첫 2년 연속 통합우승(2005~2006년)을 일궜음에도 선동열호에 대한 삼성 팬들의 여론은 냉랭한 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2009년 13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고 이듬해 2010년 한국시리즈에선 SK 와이번스에게 4연패 스윕을 당하면서 팬들의 불만이 폭발하게 되었다. 혹자는 이 시기를 멍게강점기라고 부르기도 하며 2010년대 후반 삼성이 긴 암흑기에 진입하기 전까지 선동열은 1990년대 초반 재임했던 김성근과 함께 삼성 역대 최악의 감독으로 여겨졌었다.[10][11]
때마침 비자금 사건으로 물러났던 이건희 삼성 회장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면받고 경영 일선에 복귀하면서 삼성그룹의 정치적 상황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이학수 부회장 라인이 정리되자 삼성 구단도 이에 영향을 받아 이학수가 데려온 김응용 사장이 물러나고 김응용이 데려온 선동열 감독도 자연히 물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선동열의 후임 감독으론 선수 시절 삼성의 프랜차이즈 유격수였고 이후 지도자 커리어까지 삼성과 함께한 원클럽맨 류중일 작전코치가 선임되었다. 류중일 신임 감독은 취임식에서 전통적인 삼성의 공격 야구 부활을 선언하며 2010년대를 삼성의 시대로 만들 것을 공언했다.
2011년 1월 5일 류중일 삼성 라이온즈 감독 취임식 |
2.2. 왕조
2.2.1. 2011년
류중일 감독의 첫 시즌. 1번 타자 배영섭은 신인왕을 수상했고, 4번 타자 최형우는 홈런왕, 타점왕, 장타율왕을 석권하며 2010년대 최고의 좌타 거포로 우뚝 섰다. 또한 선동열 감독 시기와 달리 선발 투수를 길게 끌고 가는 경기 운용이 시작되었다. 불펜에선 JOKKA 라인이 KBO 리그 사상 최강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특히 오승환은 평균자책점 0.63, 47세이브에 블론세이브는 단 1회에 그치는 등 몬스터급 시즌을 보내 마무리 투수임에도 정규시즌 MVP 후보에 오를 정도였다. 한국시리즈에선 전년도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던 SK 와이번스와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삼성이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설욕하는 데 성공하며 2006년 이후 5년 만에 통합우승을 차지하였다. 이후 2011 아시아 시리즈에서도 2011년 일본시리즈 우승팀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KBO 리그 역사상 유일무이한 트레블 시즌(페넌트 레이스-한국시리즈-아시아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KBO 팀 최초 · 유일의 아시아 시리즈 우승 |
2.2.2. 2012년
라이온킹 이승엽이 일본으로 떠난 지 8년 만에 돌아온 시즌. 이 해 삼성은 시즌 초엔 개막 3연패를 시작으로 4월을 8개 팀 중 6위로 마감할 정도로 상당히 부진하였으나, 6월부터 빠르게 치고 올라오며 결국 예상대로 페넌트 레이스 우승을 차지했다. 불펜진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리그 최정상급 안정감을 보였고 심창민이라는 신예도 발굴되었으며 중심 타선은 최형우, 박석민에 이승엽까지 가세하여 더욱 강력해졌다. 선발진에선 장원삼이 17승을 거두며 다승왕을 차지했고, 논란이 있긴 했으나 투수 골든글러브까지 받았다. 한국시리즈에선 2010년과 2011년에 이어 3년 연속 SK 와이번스를 상대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삼성이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승리하며 2년 연속 통합우승을 거머쥐었다. 빅게임 피처인 윤성환-장원삼 원투 펀치가 맹활약했으며 한국시리즈 MVP는 1차전 선제 2점 홈런과 6차전 쐐기 3루타를 날린 이승엽이었다. 다만 1, 2차전을 먼저 가져가고도 3차전에서 6:1 리드를 8:12로 뒤집히는 희대의 졸전을 치렀고, 이 후폭풍으로 4차전도 놓친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2012년 삼성은 투수와 타격 양면에서 모두 WAR 리그 1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1985년, 2001년, 2002년 이후 네 번째 있는 일이었고[12] 왕조 시대에는 유일했다. 그만큼 2012년은 투타 전력 조화가 완벽에 가까웠던 시즌으로 꼽힌다.
이승엽: "윤성환 선수가 3점만 내 달라고 했습니다"[13] |
2.2.3. 2013년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류중일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타이중 참사로 탈락하며 류중일 리더십에 대한 평가가 어느 때보다 급락했고, 시범 경기에서도 사상 첫 9위를 기록하며 불안 요소들을 보였으나 예상대로 페넌트 레이스 우승을 차지했다. 그동안 부진했던 채태인이 비록 규정타석엔 미달했으나 타율 3할 8푼이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했고, 이 해에 극도로 부진한 이승엽도 6월에 한국프로야구 통산 최다 홈런 신기록을 세웠다. 시즌 말 6668587667의 긴 암흑기를 끊고 우승까지 노려보는 LG 트윈스가 추격했으나 삼성이 막판 8연승에 힘입어 3년 연속 페넌트 레이스 우승을 확정지었고, 한국시리즈에선 두산 베어스와 8년 만에 격돌해 1승 3패로 수세에 몰렸다가 남은 3경기에서 3연승에 거두며 시리즈 전적 4승 3패로 전무후무한 3년 연속 통합우승의 위업을 이뤘다. 특히 류중일 감독이 투수 9명(릭 밴덴헐크-배영수-차우찬-심창민-권혁-안지만-신용운-조현근-오승환)을 투입하며 총력전을 펼친 6차전에선 6회 말 채태인의 역전 2점 홈런과 7회 말 박한이의 쐐기 3점 홈런으로 삼성 상대로 극강인 더스틴 니퍼트를 무너뜨렸기에 더욱 기분좋은 승리였다. 또한 2002년 한국시리즈 이후 13년만에 홈구장인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로써 1988년 해태 타이거즈 이후 25년 만의 한국시리즈 3연패, KBO 리그 최초의 통합 3연패를 이룩하여 삼성 왕조를 수립했다.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더스틴 니퍼트를 상대로 쐐기 3점 홈런을 날리고 포효하는 박한이 |
2.2.4.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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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환이 일본 한신 타이거즈로 떠났고, 대신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임창용이 마무리 투수를 맡게 되었다. 시즌 전 류중일 감독과 용병 투수 릭 밴덴헐크의 재계약이 성사되었고, 용병 타자 야마이코 나바로를 새로 영입했다. 2014년은 2015년과 함께 삼성의 공격력이 절정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 해다. 팀 타율은 0.301을 기록하며 1987년 삼성이 기록한 0.300을 넘어 신기록을 세웠다. 30홈런을 넘긴 타자가 세 명(이승엽, 최형우, 야마이코 나바로)에[14][15] 네 명의 타자가 평균 타점 99.5를 달성했다.[16] 여기에 발야구까지 갖춰 김상수가 도루 53개를 기록하며 삼성 역사상 첫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고, 이 시즌부터 주전 중견수로 자리잡은 박해민과 호타준족 2루수 나바로도 각각 36도루와 25도루를 추가해 그야말로 공격력에서 부족함이 없는 한 해였다. 게다가 영입 당시 기대치가 낮았던 나바로가 공 · 수 · 주 모든 면에서 대활약하면서 삼성이 전통적으로 가장 취약한 포지션이었던 2루수까지 넘치도록 해결되어 버렸다. 다만 오승환이 떠난 마무리 보직에서 임창용이 기대만큼 제 몫을 해주지 못하면서 불펜진 약화가 가시화된 것은 아쉬운 점이다. 한국시리즈에선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 히어로즈)와 대결했다. 이 당시 넥센은 52홈런 4번 타자, 40홈런 유격수, 201안타 타격왕 등을 보유해 흉악한 공격력을 자랑하던 팀이었고 투수진에서도 20승 선발 투수, 세이브왕 마무리 투수, 홀드왕 셋업맨이 존재하던 KBO 역사상 최강의 팀 중 하나로 손꼽혔다. 이 당시 삼성도 넥센과 겨우 반 게임차로 힘겹게 페넌트 레이스 우승을 차지했지만, 삼성은 이런 넥센마저도 시리즈 전적 4승 2패로 제압하며 전무후무한 4년 연속 통합우승을 이룩하였다. 1989년 해태 타이거즈 이후 25년 만에 나온 한국시리즈 4연패. 특히 5차전 9회 말 1점차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4번 타자 최형우가 손승락을 상대로 때린 2타점 끝내기 2루타가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왔다. 한국시리즈 MVP는 6경기 동안 타율 0.333, 4홈런, 10타점을 기록한 나바로. 2014년은 지금까지도 많은 삼성 팬들이 최고의 시즌으로 꼽는 시즌이다.
한국시리즈 5차전 9회말 2사 1 · 3루 상황에서 나온 최형우의 끝내기 2루타. 흔히 날타빼로 잘 알려져 있다.[17] |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조상우를 상대로 쐐기 3점 홈런을 날리고 포효하는 야마이코 나바로 |
2.3. 왕조의 붕괴
2.3.1. 2015년
2015년 페넌트 레이스 우승 엠블럼 |
시즌 전 배영수와 권혁이 FA를 통해 한화 이글스로 이적했고, 용병 투수 릭 밴덴헐크는 일본으로 떠나 대신 알프레도 피가로를 영입했다. 야마이코 나바로는 재계약에 성공했다. 이 해에도 삼성의 공격력은 뜨거웠다. 팀 타율은 0.302를 기록하여 2014년 삼성이 세웠던 팀 타율 신기록 0.301을 1년만에 넘어섰고, 이는 지금까지도 단일 시즌 최고 팀 타율로 남아있다. 또한 리그 역사상 최초로 10명의 타자[18]가 100안타를 달성하기도 했다. 야마이코 나바로는 타순을 1번에서 3번으로 옮겨 48홈런을 때려내며 2루수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했고, 1군 첫 시즌인 구자욱은 데뷔 첫 시즌 23경기 연속 안타 신기록을 세우고 신인왕을 차지했으며 박해민은 60도루를 뛰어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선발진에서는 장원삼이 부진하긴 했으나, 나머지 선발 투수들이 활약하였다. 특히 윤성환은 이 해 17승을 기록하며 개인 커리어 최다승을 달성했다. 한편 타일러 클로이드는 전반기에는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시즌 중간 미국으로 아내의 출산 휴가를 다녀온 후 급격히 기량이 하락한 모습을 보였고, 전반기 굉장한 활약을 펼쳤던 알프레도 피가로도 원래 선발 투수가 아니었던 탓인지 후반기 들어서 폼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삼성 타선의 득점 지원이 워낙 강력했고, 불펜도 이전보다 많이 약해지긴 했으나 홀드왕 안지만과 세이브왕 임창용이 버티고 있었기에 리그 역사상 최초로 선발 투수 5명 전원 10승[19]을 달성하였다. 삼성은 10월 3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하며 5년 연속 페넌트 레이스 우승과 6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고, 이렇게 사상 최초의 통합 5연패로 순항하는듯 하였으나...
2.3.1.1. 갑작스러운 붕괴
자세한 내용은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왼쪽부터 윤성환, 오승환, 안지만, 임창용[20] |
10월 15일, 한국시리즈까지 2주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TV조선이 삼성 라이온즈 소속/출신 투수 4명의 원정 도박 혐의를 보도하였다. 이윽고 후속 보도로 투수 4명의 실명이 알려졌는데, 충격적이게도 삼성의 1선발 윤성환, 셋업맨 안지만, 마무리 임창용과 일본 한신 타이거즈에서 뛰고 있던 삼성 출신 마무리 오승환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들의 혐의는 2014년 한국시리즈를 마친 후 중국 마카오에서 한국인 조직폭력배들이 운영하는 정킷방에서 불법 도박을 즐긴 것으로, 이미 2015년 중반부터 수사기관의 내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한국시리즈를 앞둔 삼성의 팀 분위기는 그야말로 박살이 났다.
경기를 치른 후 더그아웃에서 차분하게 소감을 이야기하던 류중일 감독은 '도박'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작심한 듯 "큰 경기를 앞두고 누가 우리를 흔들려고 하는지 몰라도 근거 없는 얘기"라고 주장했다. 류 감독은 "그런 의혹에는 일절 대응하지 않겠다"며 "모든 선수가 정상적으로 한국시리즈를 대비한 훈련과 연습 경기에 참여할 것"이라고 했다. 말을 거듭하면서 류 감독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됐다.
2015. 10. 17. 조선일보 기사
2015. 10. 17. 조선일보 기사
하지만 이미 2015년 중반부터 수사가 진행중이었기에 류중일 감독과 삼성 프런트가 주축 선수들의 도박 의혹을 정말 몰랐을 가능성은 낮다. 윤성환, 안지만, 임창용 3인의 한국시리즈 엔트리 포함을 놓고 거센 논란이 일어났고, 결국 류중일 감독은 10월 25일 KS 미디어데이에서 이 세 명을 제외한 한국시리즈 엔트리를 발표했다. 그렇게 두산 베어스와의 2015년 한국시리즈가 시작되었다.
야구친구 최훈 카툰의 한국시리즈 1차전 평 |
1차전 삼성의 선발은 알프레도 피가로. 두산 타선이 피가로를 무너뜨리면서 두산이 5점차까지 앞서 나갔지만 이후 삼성이 추격을 시작했고, 7회 말 야마이코 나바로가 함덕주를 상대로 3점 홈런을 때려내면서 1점차까지 따라붙었다. 거기에 두산 1루수 오재일의 포구 실책이 겹치며 삼성이 2득점, 역전에 성공하여 극적으로 1차전을 가져갔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2차전부터 삼성은 투타할 것 없이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리며 두산에게 시리즈 전적 1승 4패로 무기력한 참패를 당했다.[21]
선발진은 모두 제 몫을 하지 못했고, 4 · 5번 타자인 최형우와 박석민은 극악의 타격감을 보여주었다. 특히 최형우는 21타수 2안타로 한국시리즈 타율과 출루율 모두 1할을 밑돌았으며 타점 하나 기록하지 못했다. 그나마 투수 중 차우찬이 분전했으나 이미 기울어진 판을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삼성의 통합 5연패 도전은 허무하게 좌절되었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왕조도 리그 최초의 두 자릿수 준우승(10회)을 기록하며 끝이 났다.
한국시리즈 준우승 후 도열해 박수를 쳐주면서 두산 베어스의 우승을 축하하는 삼성 선수단과 코칭스태프들 |
삼성은 2011년부터 계속되어 온 우승 행진 속에서 선수층이 점점 얇아지고 있었다. 타선에선 배영섭, 박해민, 구자욱 등 걸출한 신인들이 제법 나타났지만 투수진에서 새로 발굴된 선수는 심창민 정도뿐이었다. 삼성 투수진은 권오준(2013년 토미 존 수술), 정현욱(2013년 LG행), 오승환(2014년 일본 한신행), 배영수 · 권혁(2015년 한화행) 등이 연달아 이탈하고 권오준 · 장원삼이 노쇠화하는 과정에서 릭 밴덴헐크, 임창용 등 외국인 선수나 국내 복귀 선수로 땜질하며 버텨왔는데, 여기서 1선발, 셋업맨, 마무리까지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한번에 빠지게 된 것은 매우 치명적이었다. 실제로 WAR 기준 2015년 윤성환, 안지만, 임창용이 팀 전체 전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18%, 투수진에선 약 44%에 달했을 정도로 특정 선수들에 대한 의존도가 심했고, 2014년 삼성 투수진의 WAR은 약 28로 리그 1위에 해당했으나 2015년에는 약 14로 반토막나며 리그 8위로 추락한 것만 보아도 투수진 붕괴는 이미 가시화되었다. 또한 오랜 기간 성적이 최상위권이었기에 성적 역순으로 선발하는 신인 드래프트에서 우수한 자원을 얻지 못했고, 우승 전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나마 있는 유망주들에게도 충분한 기회를 부여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통합 5연패 실패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슬슬 리빌딩을 시작해야할 시점이었지만, 이후 삼성은 구단 역사상 유례없는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2.4. 암흑기 돌입
자세한 내용은 삼성 라이온즈/암흑기/2차 문서 참고하십시오.시즌 종료 후 삼성 구단은 검찰 조사에서 원정 도박 사실을 시인한 마무리 투수 임창용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2016년 1월부터 삼성 구단은 제일기획 산하로 편입되었고, 제일기획이 구단의 '자생력'을 키울 것을 강조함에 따라 모기업의 지원이 크게 줄어들면서 FA 신분이 된 주전 3루수 박석민을 놓쳤다. 여기에 워크에식을 이유로 용병 타자 야마이코 나바로와의 재계약이 불발되면서 2016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상당한 전력 유출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많은 전문가들은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며 삼성이 상위권에서 버틸 수 있을 거라 전망했지만, 2016년 삼성은 1군 말소가 31번[22]에 달할 정도로 역대급 부상 병동에 시달렸고 영입한 외국인 선수 5명[23]이 모조리 실패했으며, 시즌 도중 셋업맨 안지만까지 도박 관련 혐의가 추가로 드러나 방출됨에 따라 구단 역사상 가장 낮은 순위인 9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2016년 말에는 실질적 구단주인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연루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모기업의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해졌고, 결국 4번 타자 최형우와 좌완 에이스 차우찬까지 FA 잔류에 실패하여 각각 KIA 타이거즈와 LG 트윈스로 떠나보냈다. 계약 마지막 시즌에 9위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기 때문인지 삼성 구단은 류중일 감독과 재계약하지 않았다.
리그 역사상 최악의 성적을 거둔 2016년 삼성의 외국인 선수들 |
허삼영 감독의 첫 시즌인 2020년은 비록 용두사미로 끝났지만 팀 재건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2021년엔 시즌 내내 1위 경쟁을 벌인 끝에 페넌트 레이스를 2위로 마감해 플레이오프에 직행하면서 비밀번호(7년 이상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작성을 막아냈다.[26] 그러나 2022년 곧바로 하위권에 복귀했는데, 이 해엔 KBO 리그 역사에 남을 정도로 극심했던 김헌곤의 부진[27], 구단 최다 연패 기록 타이인 13연패, 알버트 수아레즈의 역대 최악 윤석민상 수상[28] 등 온갖 부정적인 대기록이 쏟아져 나왔고 결국 시즌 도중 허삼영 감독의 자진 사퇴로 이어졌다. 라이온즈의 실질적 구단주인 이재용 부회장조차 "우승까지 바라는 건 아니지만, 13연패는 너무 심하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이후 2023년 박진만 감독대행이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나 여전히 근본적 체질 개선을 하지 못해 전력은 하위권에 머무르고 있었으나, 다행히 2024년에는 정규 리그 2위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해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며 1차전에 2015년 이후 포스트시즌 첫 승을 거두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2차전에서는 수비의 흔들림이 있었고 3차전에는 거짓말처럼 패배하면서 흔들렸지만, 결국 4차전에서 1:0으로 승리하여 9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었다.
3. 여담
2013년 스프링캠프 중. 왼쪽부터 이우선-안지만-신용운-최형우-장원삼-권혁-조동찬-이동걸.[29] |
- 1983년생 선수들을 의미하는 일명 83라인은 삼성 왕조를 이끈 주축이었다. 최형우는 왕조의 4번 타자이자 KBO 역사에서 한 손에 꼽히는 좌타 거포였고, 장원삼은 큰 경기에 강한 빅게임 피쳐답게 한국시리즈에서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안지만은 통산 홀드 1위에 올라있는 리그 정상급 셋업맨이었으며 권혁 또한 팀내 핵심 불펜 요원이었다. 이우선과 신용운도 불펜진에서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었고, 조동찬은 다양한 툴을 갖춘 내야 유틸리티맨이었다. 그러나 권혁은 FA 이적을 통해 2015년부터 한화 이글스에서 뛰기 시작했고, 안지만은 2016년 시즌 도중 도박 관련 혐의로 입건되면서 방출되었으며 2016년 말엔 최형우가 KIA 타이거즈와 FA 계약을 맺고 떠났다. 장원삼은 2018년 시즌 종료 후 구단에 방출을 요청해 LG 트윈스로 옮겼고, 이우선 · 신용운 · 조동찬은 각각 2014년, 2017년, 2018년 은퇴했다. 이로써 2018년을 끝으로 83라인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주축 선수가 아니었지만 나이상 83라인에 속했던 이동걸은 인상깊은 활약을 남기지 못한 채 2014년 한화 이글스로 옮겨 2018년 은퇴했다.
- 왕조 시절엔 삼성이 6-7회에 리드를 잡고 있으면 상대 팀 팬들은 TV를 끄거나 경기장에서 나와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실제로 이 시기 삼성은 2012년 5월 24일 롯데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2014년 5월 27일 LG전에서 역전패를 당할 때까지 7회 리드시 144연승이라는 불멸의 대기록을 세웠었다. 특히 2013년에는 7회 이후 단 한 번의 역전패도 허용하지 않았다. # 그래서인지 9회에 마무리 투수 오승환이 등판하면 '얼레리 꼴레리' 리듬에 맞춰 '오승환인데~ 오승환인데~'를 외치며 상대를 놀리는 응원 문화도 있었고, 학교 종소리로 유명한 소녀의 기도가 울렸다.[30] 이 당시 추격조였던 이우선, 정인욱(2011시즌 한정)은 하위권 팀으로 간다면 필승조가 가능했을 것이란 말도 있었다. 그랬기에 삼성과 투수전에 돌입했으면 사실상 삼성이 이긴거나 다름 없었다.
- SK 와이번스 소속으로 3년 연속(2010~2012) 삼성과 한국시리즈를 경험한 안치용 前 선수가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선발 투수를 공략하지 못하면 진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만큼 삼성의 불펜진이 매우 막강했다.
- 이때 삼성은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중간 이상은 갈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2011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 열린 2011 아시아 시리즈에서 그 해 일본시리즈 우승 팀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꺾고 우승한 적이 있었으니 이 말이 마냥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왕조 시절의 삼성과 연습 경기가 잡힌 NPB 팀들은 평소와 달리 풀전력으로 맞대결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소프트뱅크는 후쿠오카 돔 담장 공사 후 첫 경기를 삼성과의 맞대결로 잡았다.
- 2012년 개장한 포항 야구장에서 유독 더 좋은 성적을 올려 포항이 '약속의 땅'으로 불리기도 했다. 실제로 2012년 2승 1패(승률 0.666)를 시작으로 2013년 7승 3패(0.700), 2014년 8승 1패(승률 0.889), 2015년 9승 1패(승률 0.900)까지 엄청난 승률을 보였다.
- 이 시절 삼성은 시즌 초반에는 중하위권에 위치하다가 6월쯤부터 치고 올라와 여름에 미친 페이스를 보여주어 1위에 안착하기를 반복했기에 여름성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연고지인 대구광역시가 한반도에서 가장 더운 지역이기도 하고, 홈구장인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의 그라운드가 인조 잔디였기에 여름에는 지글지글 끓는 수준이라 삼성 선수들이 다른 팀 선수들보다 더위에 더 강해서 그렇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왕조 붕괴 이후론 오히려 초반에 순항하다가 여름에 미끄러지는 일이 잦아져 여름성이란 별명이 잘 쓰이지 않고 있다.
- 팀의 슬로우 스타터 기질 때문인지 2011년 우승 이후 2015년까지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선 '올해는 우승 쉽지 않다(쫄보) vs 올해도 당연히 우승한다(널널)로 나뉘어 이른바 쫄널대전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2010년까지 한국시리즈에서 3번 우승한 반면 준우승은 무려 9번이나 했으니 삼성 팬덤의 준우승에 대한 두려움이 여느 팀보다도 컸기 때문이다. 류중일 감독도 매년 시즌 시작 전 '올해가 진짜 명장 시험대'라는 평을 들었기에 'n수생'이라는 별명도 붙었었다.
- 왕조 시절 응원 문화와 관람 환경은 이전부터 그랬지만 호성적에 걸맞지 않게 좋지 않았다. 이른바 '용짜르트'라는 반어적 별명을 갖고 있는 김용일 응원단장이 만든 응원가의 퀄리티가 하나같이 처참했고, 때문에 당시 삼성 팬들은 응원에 소극적인 경향이 강했었다.[31] 홈구장인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또한 1948년에 건설된 리그에서 가장 오래된 구장이었기에 시설이 심각하게 낙후되었고 관중 수용 인원도 최대 1만 명에 그쳤다.[32] 그래서 신 구장 건설과 관련된 한 설문조사에선 '낙후된 구장 때문에 직관을 가지 않는다'는 응답자가 44%에 이를 정도였다.
- 이 시절 삼성에는 유독 미남 선수가 드물어 얼빠와는 거리가 가장 먼 구단이었다. 심지어 입단 당시엔 제법 미남이었던 선수들조차 외모가 망가지는 경우가 많았으며,[33] 대부분이 정감가는 아저씨 같은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나마 (모자 쓴) 윤성환,[34] 오승환이나 이우선 정도가 잘생긴 편이었고 왕조 말기(2014~2015)부턴 박해민, 구자욱 등 훈훈한 외모를 가진 선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리그의 대표적인 개그캐인 박석민을 필두로 안지만, 채태인, 진갑용, 야마이코 나바로 등 성격이 활발하고 개그 본능이 충만한 선수들이 많았었다. 팀 마스코트인 블레오도 지금과는 달리 여러 기행을 선보였던 시기였다.
- 왕조 멤버들의 팬 서비스에 대한 평가는 투수진과 야수진이 극과 극으로 갈렸다. 일명 JOKKA 라인에 속하는 투수들과 윤성환, 장원삼, 차우찬 모두 팬 서비스가 훌륭했고, 정인욱 정도만이 예외적으로 팬 서비스가 좋지 않았다. 반면 야수진은 최고참인 이승엽부터가 "저리가라 이새끼야"라는 썰이 나올 만큼 팬 서비스가 좋지 않았고,[35] 주장을 역임한 최형우는 그 이승엽보다도 좋지 않다는 말이 많았으며[36] 신진급인 박해민과 구자욱도 팬 서비스가 나쁜 편이었다.[37] 한편 야수 출신인 류중일 감독은 팬 서비스가 좋은 편이었고,[38] '류상수' 소리까지 듣던 김상수는 '연쇄싸인마'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삼성 야수진에선 드물게도 팬 서비스가 매우 훌륭했다. 왕조가 무너진 이후로 팀 성적은 하위권을 전전하고 있지만, 선수들의 팬 서비스는 전반적으로 크게 개선되어 현재는 안 좋은 말이 나오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2010~2023년 한국갤럽 프로야구 구단 선호도 조사 |
- 역대급 호성적에 힘입어 삼성 라이온즈의 인기도 가장 높았던 시기였다. 1997년 이만수 방출과 2000년대 중후반 선동열 체제에 대한 반발로 인해 떠나갔던 대구·경북 지역 올드 팬들을 다시 불러 모았고, 왕조 시절(2011~2015)에 학생이었던 많은 젊은 팬들이 이때 유입되었다. 대구·경북, 넓게는 경상도에 연고가 전혀 없고 삼성그룹과도 무관한 사람이 라이온즈 팬이라면 높은 확률로 왕조 시절의 호성적에 이끌려 팬이 된 경우다. 2013년 삼성이 사상 첫 통합 3연패를 달성하자 이듬해인 2014년에는 한국갤럽 프로야구 구단 선호도 조사에서 1위에 올랐고, 이후 암흑기 초입인 2016년까지 이 순위를 유지했다. 그럼에도 인터넷상에선 '비인기 구단'이라는 음해를 당하기도 했는데, 홈구장인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의 수용 인원이 최대 1만 명에 불과했고 시설도 리그에서 가장 열악했던 탓에 관중 동원력은 비교적 떨어지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로 홈구장을 옮긴 2016년 이후로는 긴 암흑기를 겪고 있음에도 리그 수위권의 관중 동원력을 보여주며 '기롯삼한'에 포함되는 대표적인 인기 구단임을 증명했다.
- 이 시절 삼성이 파죽지세로 연이어 우승을 추가해나가자, KBO 리그 우승 횟수 1위에 올라있는 KIA 타이거즈의 팬들 사이에선 "이러다 삼성이 우리를 넘어설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돌기도 했었다. 타이거즈는 진보의 심장 호남의 대표팀이자 한국시리즈의 최강팀,[39] 라이온즈는 보수의 심장 대구·경북의 대표팀이자 정규시즌의 최강팀[40] & 한국시리즈 최다진출팀(17회)라는 타이틀로 인해 1980년대부터 라이벌 관계로 여겨져 왔다. 1980-90년대에는 KIA의 전신 해태가 아홉 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룩하며 삼성을 세 번이나 굴복시켰으니 꿇릴 게 없었으나, 2000년대에 삼성이 우승을 세 번 추가할 동안 KIA는 한 번밖에 추가하지 못했고 2010년대 초반엔 삼성이 4연속 우승에 성공하면서 2010년까지 10:4였던 격차가 2014년 한국시리즈 이후 10:8까지 좁혀졌기 때문이었다. 2015년에도 삼성이 도박 스캔들만 아니었다면 또 우승을 추가하여 10:9까지 따라붙을 가능성이 높았으나 결국 한국시리즈에서 참패했고, 이후 삼성이 암흑기를 겪는 사이 KIA가 2017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격차는 11:8로 다시 벌어졌다. 그리고 KIA는 2024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상대로 우승하며 격차는 12:8로 더 벌어졌다.
- 리그에서 외국인 선수(특히 투수)를 가장 못 뽑기로 소문난 삼성이지만,[41] 역대급 성적을 올린 왕조 시절엔 외국인 선수들도 준수한 편이었다. 2011년 라이언 가코와 류중일 감독의 나믿가믿, 2013년 역대급 먹튀 에스마일린 카리대의 임팩트가 워낙 강했어서 그렇지, 2013년엔 라이온즈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투수였던 릭 밴덴헐크를 뽑았고 2014년에는 KBO에서 역대급 외국인 타자였던 야마이코 나바로를 뽑았다. 2011년의 카도쿠라 켄은 부상 전까진 평균자책점 1위 경쟁을 할 정도였고, 덕 매티스와 저스틴 저마노는 후반기에 합류하여 한국시리즈 우승에 힘을 보탰다. 2012년의 미치 탈보트와 브라이언 고든 모두 10승을 올렸고, 2014년의 J.D. 마틴은 무난한 성적을 거뒀다. 2015년 알프레도 피가로와 타일러 클로이드는 전반기엔 좋은 활약을 보여줬지만 전자는 데드암, 후자는 출산 휴가 후유증으로 후반기엔 부진했다.
- 왕조가 붕괴된 후 암흑기 삼성 팬덤에선 '왕조 부활', '왕조 선언' 등이 밈으로 쓰이고 있다. 보통 시즌 초중반 삼성이 좋은 페이스를 보일 때 나타나나 대부분 설레발이며 삼성판 타어강으로 취급받는다. 2020년엔 최종 8위를 기록하며 DTD로 끝나긴 했지만, 시즌 중반에는 4위까지 올라갔었기에 엠엘비파크의 한 삼성 팬이 왕조 선언을 했다가 박제되는 일이 있었다. 2024년 3월에는 15년만에 개막 2연전 스윕에 성공해서인지 구단 차원에서 대구 홈 개막전을 앞두고 '왕조의 부활'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42]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 등 삼성 경기가 열리는 구장에서 왕조 부활, 왕조 선언을 언급하는 팬들의 어그로성 스케치북이 중계 카메라에 잡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 2015년 한국시리즈에서 왕조가 끝난 후 2016년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로 이전하자 귀신같이 성적이 하위권으로 굴러 떨어지고 암흑기에 돌입하면서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이 명당이고 신 구장은 터가 안 좋다느니 하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물론 2014년부터 삼성의 전력 약화와 시스템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었으니 순전히 오비이락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인터넷상에선 2010년대 중반 이후 삼성의 응원가나 치어리더 수준은 좋아졌지만 성적은 추락했기에 김용일 전 응원단장과 그의 병맛 응원가들, 비교적 외모가 떨어졌던 과거의 치어리더들이 '우승 기운'(혹은 '유관 기운')이었다고 농담을 하는 팬들도 있다.
- 현재로선 삼성의 마지막 우승인 2014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승선한 선수는 2024년 기준 백정현과 김헌곤만 삼성에 남아 있다. 왕조 시대 삼성에서 우승을 경험한 선수로 범위를 넓혀도 오승환만이 추가될 뿐이다. 오승환(1982년생, 2005년 데뷔)은 팀내 최고참이고, 백정현(1987년생, 2007년 데뷔)은 팀내 선수 중 삼성에서 뛴 햇수가 가장 많으며[43] 김헌곤(1988년생, 2011년 데뷔)은 야수진 최고참이다. 그래서 종종 이들을 '왕조의 마지막 유산'이라고 칭하는데, 이들 셋 모두 은퇴가 눈 앞에 다가온 나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마지막' 유산인 셈이다. 넓게 보면 2015년 페넌트 레이스 우승을 경험한 구자욱까지 포함되기도 한다.
- '왕조의 유산'과 비슷하게 왕조의 주역으로 보긴 애매하나 왕조 멤버에 포함되는 선수들을 '왕조 ○○'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現 SSG 랜더스 소속 포수 이지영을 '왕조 포수'라고 한다든지 現 kt wiz 소속 내야수 김상수를 '왕조 유격수'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 지금은 삼성이 장기간 암흑기를 겪고 있는지라 인터넷상에서 삼성 팬들의 화력이 약해졌지만, 왕조 시절에는 삼팬이지만 인정한다로 대표되는 일명 '삼찰사'[44]들의 활동이 왕성했었다. 왕조팀 삼성의 팬이라는 선민의식에 빠져 네이버 스포츠나 디시인사이드에서 '삼)'을 붙이고 타 팀 선수들을 멋대로 비교 및 평가하고 훈수를 뒀기에 악명이 높았었다. 주된 비교 대상은 강정호 vs 김상수, 최정 vs 박석민, 장원준 vs 윤성환 정도였다.[45] 2013년엔 한 삼성 팬이 관중석에 '한화 이글스 팬분들 힘내세요!'라는 조롱성 현수막을 내걸기도 했다. 그러나 삼성이 원정 도박 사건으로 인해 2015년 한국시리즈에서 참패하고, 이후 제일기획 편입으로 모기업 지원까지 줄면서 왕조를 거치며 얇아진 뎁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암흑기에 진입하자 이런 유형은 잘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 왕조 시절 현장을 이끈 류중일 前 감독이 삼성 팬들 사이에서 최고의 감독으로 평가받는 것처럼, 배후에서 현장을 지원한 김인 前 사장과 송삼봉 前 단장도 구단 역사상 최고의 사장 · 단장으로 여겨진다. 특히 단장은 후임이 안현호(2014~2016), 홍준학(2017~2023)이라는 구단 역사상 최악으로 평가받는 단장들이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 4년 연속 통합우승을 이루는 동안 지속적으로 전력 유출과 주축 선수의 노쇠화가 진행되었지만, 한때 '돈성' 소리까지 들었을 만큼 막강한 자금력을 자랑하던 삼성답지 않게 왕조 시절 외부 수혈에 돈을 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2010년 현금 20억이 포함된 장원삼 트레이드가 삼성의 마지막 외부 수혈이었고, 왕조 이전 마지막 외부 FA 계약은 2005년 심정수 · 박진만 영입이었다.[46] 즉 채최박이나 JOKKA 라인 등 왕조 주축 멤버 대부분이 삼성에서 데뷔한 선수들이었고,[47] 류중일 감독도 1987년 입단 이래 선수 및 지도자 생활을 삼성에서만 해왔으며 코치진도 김성래, 김한수 등 삼성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이 많았다. 그러나 이런 순혈성이 무색하게도 이후 이승엽, 박한이, 윤성환, 오승환 정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주축 멤버들이 타 팀으로 이적하였다.[48]
- 왕조 멤버 중 하나였던 채태인이 술회하길, 과거 삼성은 승리수당을 선동열 감독 재임기까진 1일 단위로 주다가 류중일 감독 재임기부터 1주 단위로 주는 것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한 번에 주는 액수가 커지다 보니 대구은행에는 오만원권이 남아나질 않았다고 한다.[49] 가장 많이 받은 선수는 8연승 기간에 900만 원 이상 받았다고. 연봉은 그대로 두고 승리수당만 생활비로 쓸 수도 있는 수준이었고, 현금으로 지급했기 때문에 아내조차 모르는 돈이었다.
- 삼성과 야구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프로축구 K리그의 전북 현대 모터스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삼성은 4연패 이후에 암흑기에 빠져들었고, 전북 또한 2021년 왕조가 끝나고 2023년에 2009년 첫 우승 이후 처음으로 4위 이하로 시즌을 마감했고, 2024년엔 아예 리그 하위권에 강등 위기까지 처하며 3시즌 연속 리그 무관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50]
4. 주요 인물
※ 가나다 순으로 나열함. 볼드체는 2024년 기준 KBO 현역 선수.4.1. (우승 4회 경험)
4.2. (우승 3회 경험)
- 강명구(2011~2013)
- 김상수(2011~2012, 2014)[52]
- 오승환(2011~2013)
- 채태인(2011, 2013~2014)
- 배영섭(2011~2013)
- 심창민(2012~2014)
- 이승엽(2012~2014)
- 이지영(2012~2014)
4.3. (우승 2회 경험)
- 신명철(2011~2012)
- 정현욱(2011~2012)
- 정형식(2012~2013)
- 김희걸(2012~2013)
- 이정식(2012~2013)
- 김태완(2013~2014)
- 릭 밴덴헐크(2013~2014)
4.4. (우승 1회 경험)
- 권오준(2011)
- 정인욱(2011)
- 조영훈(2011)
- 이영욱(2011)
- 강봉규(2012)
- 신용운(2013)
- 정병곤(2013)
- 조현근(2013)
- 정현(2013)
- 김헌곤(2014)
- 박해민(2014)
- 백정현(2014)
- 김현우(2014)
- 이흥련(2014)
- 임창용(2014)
- 야마이코 나바로(2014)
5. 관련 문서
- 삼성 라이온즈/2011년
- 2011년 한국시리즈
- 삼성 라이온즈/2012년
- 2012년 한국시리즈
- 삼성 라이온즈/2013년
- 2013년 한국시리즈
- 삼성 라이온즈/2014년
- 2014년 한국시리즈
- 삼성 라이온즈/2015년[53]
[1] 헹가래를 받고 있는 인물은 류중일 삼성 감독이다.[2] 3년 연속 통합우승으로 기준을 낮춰도 삼성 라이온즈가 유일무이하다. 삼성보다 앞서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던 해태 왕조(1986~1989)도 정규시즌 1위를 달성한 시즌은 1988년뿐이었다.[3] 아시아 시리즈가 개최된 2005~2013년에 일본프로야구 구단 이외에 아시아 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한 건 삼성 라이온즈와 캔버라 캐벌리뿐이었다. 대만과 중국 구단은 우승을 가져가지 못했다.[4] 2015년을 끝으로 2021년 포스트시즌에 다시 진출하기까지 6년, 2024년 한국시리즈에 다시 진출하기까지 9년의 시간이 소요됐다.[5] 특히 삼성의 에이스 선발 투수였던 김시진이 심각했는데, 통산 포스트시즌에서 12경기(선발 10경기) 등판하여 0승 9패, 평균자책점 5.14를 기록할 만큼 매우 부진한 성적을 남겼다. 1980년대 KBO 리그에서 선동열, 최동원 다음 3인자는 되는 상위급 투수였음에도 이랬다. 삼성의 빅게임 피처에 대한 갈증은 2000년대 배영수, 2010년대 윤성환 · 장원삼이 도합 7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면서 해소되었다.[6] 물론 KBO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를 공식적인 우승으로 인정한다. 삼성 구단이 1985년 통합우승을 기념하기 시작한 건 2005년 이후 선동열 감독 시기부터였다.[7] OB 베어스(1982년), 해태 타이거즈(1983년), 롯데 자이언츠(1984년).[8] LG 트윈스(1990년), 현대 유니콘스(1998년).[9] 1986년 창단.[10] 삼성이 긴 암흑기를 겪고 있는 2010년대 후반부터 김한수, 허삼영, 박진만 등 선동열보다도 더 나쁜 평가를 받는 감독이 여럿 나타났기에 상대적으로 재평가된 부분이 있다. 현재까지도 삼성 팬덤에서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는 주제지만, 선동열이 채최박과 JOKKA 라인을 기용해 육성했다는 관점에서 보면 선 감독이 왕조 건설에 기여한 부분도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2번이나 시켜줬다는 점에서 김성근과 홍준학 라인 감독들보다 훠얼씬 낫다고 재평가받고 있다.[11] 사실 2001년 김응용이 삼성 감독으로 선임되었을 때에도 한국시리즈에서 3번이나 삼성의 우승을 좌절시킨 해태 감독을 모셔온다는 것에 대한 팬들의 반발이 컸었다. 직전에 있었던 이만수 방출, 양준혁 트레이드 등 삼성 구단의 잇따른 프랜차이즈 스타 홀대와 겹쳐 이 당시 떠나간 팬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김응용은 후임 선동열과 달리 공격 야구와 수비 시스템 등 삼성의 전통을 존중하며 여기에 자신의 야구 철학을 접목시켰고, LG에서 양준혁을 복귀시켰으며 결정적으로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함으로써 삼성의 오랜 숙원을 풀어주어 많은 팬들이 김응용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현재도 김응용은 삼성 팬덤에게 류중일 다음으로 인정받는 감독이다.[12] 1985년과 2002년엔 우승을 차지했으나, 2001년엔 한국시리즈에서 두산 베어스에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13] 한국시리즈 1차전 승리 후 인터뷰에서 이승엽이 한 말. 이 경기에서 윤성환은 선발 등판해 5⅓이닝 1실점(비자책)으로 호투하였고, 이승엽은 강명구와 함께 정말 3점을 만들어 내면서 팀은 1:3으로 승리했다.[14] 이 시즌 리그에서 30홈런을 넘긴 타자는 총 일곱 명이었는데, 그 중 세 명이 삼성 소속이었다. 나머지 네 명은 넥센의 박병호(52홈런)와 강정호(40홈런), NC의 에릭 테임즈(37홈런)와 나성범(30홈런)이었다.[15] 삼성 구단 역사에서도 한 시즌에 30홈런 타자 세 명 배출은 2003년 이마양 이후 11년만에 두 번째로 나온 기록이다.[16] 이승엽 101타점, 최형우 100타점, 채태인 99타점, 야마이코 나바로 98타점.[17] 날카로운 타구 빼아볼(페어볼). 한명재 캐스터의 샤우팅에서 나온 줄임말이다.[18] 구자욱, 박해민, 야마이코 나바로, 최형우, 박석민, 이승엽, 박한이, 이지영, 김상수.[19] 윤성환 17승, 알프레도 피가로 13승, 차우찬 13승, 타일러 클로이드 11승, 장원삼 10승.[20] 참고로 이들 4인방 중 오승환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의 말로는 매우 좋지 못했다. 임창용은 검찰 조사에서 원정 도박 사실을 시인해 시즌 종료 후 삼성 라이온즈에서 방출되었고, 이듬해 고향팀 KIA 타이거즈에 영입되어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나 김기태 감독과의 불화로 인해 2018년 말 방출되어 쓸쓸히 은퇴했다. 이후 3억 원대의 세금 체납, 지인에게 사기 혐의 피소 등 계속 금전 문제를 일으켰고 2022년에는 또 다시 불법 도박을 즐기다 적발돼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로 인해 KBO 40주년 레전드 40인에 선정되었음에도 시상식에 초대받지 못했다. 안지만은 2016년 시즌 도중 불법 도박 사이트 개설 연루 및 불법 인터넷 도박 사실이 추가로 드러나 계약이 해지되어 FA 계약금을 삼성에 토해냈고, 지금은 인터넷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윤성환은 2020년까진 표면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커리어를 이어나갔으나 2020년 말 석연찮게 방출되었고, 이듬해 6월엔 불법 도박 및 승부조작 시도 혐의로 구속되면서 많은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후 징역 10월을 선고받아 복역하고 출소했으나 6억 원대의 세금을 체납하여 국세청 고액 상습 체납자 명단에 올랐다. 현재로선 4인방 중 유일하게 정확한 근황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다. 오승환은 2019년 해외 생활을 정리한 후 성대한 환영식과 함께 친정팀 삼성 라이온즈로 복귀하였고, 43세가 되는 해인 2025년까지 커리어를 이어나갈 전망이다.[21] 이 경기는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삼성이 거둔 마지막 승리이고, 다음 포스트 시즌 승리는 무려 9년이 지난 뒤에야 나왔다.[22] 1군 엔트리 정원이 27명이다.[23] 앨런 웹스터, 콜린 벨레스터, 아롬 발디리스, 아놀드 레온, 요한 플란데[24] 1982년 삼미는 최종 승률 0.188로 마무리하며 KBO 리그 역사상 가장 낮은 승률을 기록했다.[25] 삼성이 1승만 더했다면 포스트시즌 진출이 가능했다.[26] 다만 kt wiz와의 타이브레이커(1위 결정전)에서 1:0으로 패하며 7년 만의 정규시즌 우승 기회를 놓쳤고, 플레이오프에서도 두산 베어스에게 2패로 업셋당한 것은 매우 아쉬운 점이다. 이 때문에 후술할 2024년 플레이오프 이전까진 2015년 한국시리즈 1차전이 삼성이 포스트시즌에서 승리한 마지막 경기로 남아있었다.[27] 타율 0.192, OPS 0.465에 sWAR은 -1.58로 WAR 역대 최저 5위 수준이었다.[28] 퀄리티 스타트를 19회나 달성했고 평균자책점은 2.49로 역대 삼성 외국인 투수 중 최저였음에도 삼성 불펜진이 승리투수 요건을 11번이나 날려먹는 바람에 6승 8패를 기록했다.[29] 이동걸은 당시에는 1군에서 존재감은 없었지만 1983년생 선수들만 모인 것이라 같이 찍었다. 묘하게도 혼자만 다른 선수들을 보면서 동갑내기들을 부러워하는 듯한 구도가 됐다.[30] 경기 종료를 의미.[31] 그나마 응원가 문제는 2013년 김상헌 응원단장이 들어오면서 바뀌기 시작했고, 2016년 홈구장 이전 이후로는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32] 2016년 이전한 현재의 홈구장은 최대 2만 9천 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33] 장원삼, 안지만, 김상수 등이 대표적이다.[34] 다소 긴 얼굴형과 밋밋한 눈매 탓에 모자를 쓰면 꽤 잘생겼지만 벗으면 인상이 많이 달라진다. 그래서 윤모자, 모자 미남이라는 별명도 있었다.[35] 그나마 은퇴 후 팬 서비스에 대해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은 뒤론 개선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36] 최형우는 삼성 시절에는 이승엽이라는 핵우산 밑에 있어 비판이 덜했으나, KIA로 이적해 본인이 최고참이 된 후론 팬 서비스에 대해 본격적으로 비판받기 시작했다.[37] 그러나 현재 이 둘은 2010년대 후반 이후로 갱생한 상태다.[38] 사실 류중일이 현역 시절이던 1980-90년대에 활동한 이만수, 김시진, 장효조 등 삼성 레전드 선수들이 모두 훌륭한 팬 서비스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다.[39] 한국시리즈 우승 횟수가 11회로 최다인 것은 물론 한국시리즈 승률이 11승 무패, 즉 100%다.[40] 정규시즌 우승 횟수가 9회로 최다이며 전·후기 리그, 양대 리그 시기 기록까지 합치면 17회에 달한다. 1985년 전·후기 리그 통합우승 당시엔 정규시즌 승률이 0.706이었다.[41] 2022년 뷰-수-피 조합이 결성되기 전까지 삼성 외국인 선수 총합 WAR이 제일 높은 시즌은 2015년(피가로-클로이드-나바로)이었는데, 다른 팀들의 최고 시즌과 비교하면 가장 낮은 수치였다. 최저 시즌이었던 2016년(웹스터-벨레스터-발디리스-레온-플란데)은 다섯 명의 합이 대체 선수 한 명보다 아주 조금 나은 0.11을 기록하며 리그 역사상 최악이었다.[42] 그러나 SSG 랜더스에게 3연전 스윕을 당하며 개막 시리즈의 좋았던 분위기를 날려먹었다.[43] 데뷔는 오승환이 2년 먼저 했지만 중간에 5년간 일본과 미국에서 뛰었기 때문에 삼성에서 뛴 햇수는 백정현이 더 많다.[44] 원조는 국내야구 갤러리에서 유래된 통찰사였으나, 이는 대구 지하철 참사에 대한 악질적인 고인드립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삼찰사로 순화되어 쓰였고 2015년 말에는 칩찰사로 진화했다.[45] 이 선수들이 은퇴했거나 커리어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현 시점에서 보면, 강정호 vs 김상수는 강정호는 2014 시즌 후 MLB에 진출해 뛰어난 활약을 펼쳐 추신수 · 이대호 · 이승엽과 함께 언급되는 수준까지 올라갔지만, 김상수는 2018 시즌 후 삼성과 3년 18억 FA 계약을 맺었고 2022 시즌 후엔 4년 29억에 kt로 이적하는데 그쳐 현재는 그 누구도 김상수를 강정호의 비교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최정 vs 박석민은 삼성 왕조 시절까진 서로 엇비슷했으나 박석민이 2015 시즌을 마치고 NC로 이적한 이후 기량이 하락하기 시작하면서 30대에도 꾸준한 성적을 올린 최정의 승리로 끝났다. 장원준 vs 윤성환의 경우 장원준은 통산 132승/ERA 4.28, 윤성환은 통산 135승/ERA 4.23을 기록해 매우 비슷한 커리어를 보냈다. 시장의 평가인 FA 금액도 86억(장)/80억(윤)으로, 장원준이 네 살 더 어리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같은 수준이다. 다만 윤성환은 단 한 번도 국가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한 반면 장원준은 세 차례 선발된 경력이 있어 이 부분에선 장원준이 앞서 있다.[46] 2012년과 2014년 국내에 복귀한 이승엽과 임창용은 해외 진출 이전엔 삼성 소속이었기에 예외.[47] OB 베어스 출신인 진갑용, 현대 유니콘스 출신인 장원삼, 해태 타이거즈 출신인 임창용 정도가 외부 출신이다.[48] 이 네 명은 선수 시절의 등번호가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거나, 삼성 팬덤 사이에서 영구결번 지정 여론이 있는 선수들이었다. 그러나 박한이는 2019년 숙취운전으로 불명예 은퇴하며 무산되었고, 윤성환은 2021년 불법 도박 및 승부조작 혐의로 구속되어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이젠 그 누구도 영구결번을 거론하지 않는다. 오승환은 영구결번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편인데, 도박 전과가 있는 점이 걸리긴 하나 2019년 국내 복귀 당시 삼성 구단이 환영식도 열어준 것으로 보아 프런트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하다. 도박 스캔들이 터진 지도 벌써 10년 가까이 지났고 그동안 오승환도 다른 사건사고를 일으키지 않고 성실히 선수 생활을 해왔기에 전망은 밝은 편이다.[49] 오만원권은 2009년에 처음 발행되었으니 왕조 시절이던 2010년대 초반에는 시중에 풀린 물량이 지금보다 더 적었던 것도 있다.[50] 2022년엔 울산 현대와 끝까지 1위 싸움을 하다 아쉽게 우승을 놓쳐 왕조가 무너졌고, 그래도 FA컵을 우승하긴 했다.[감독] [52] 2013년에도 페넌트 레이스 기간 주전으로 활약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선 낙마했다.[53] 페넌트 레이스 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