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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반기 통합우승으로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았다. [B]: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개최일 연기, 고척 스카이돔 중립경기 개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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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한국프로야구 포스트시즌 | |
1987 KBO 플레이오프 | 1987 KBO 한국시리즈 |
1987년 한국시리즈 우승팀 | |
해태 타이거즈 | |
MVP | 김준환 |
[clearfix]
1. 개요
1987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 |
해태 타이거즈 | 삼성 라이온즈 |
1987년 10월 21일부터 1987년 10월 25일까지 진행했던 한국시리즈.
해태가 4연승으로 완승을 거두면서 통산 세 번째 우승이자, 프로야구 역사상 첫 2연패 및 첫 한국시리즈 전승 우승의 금자탑을 세운 시리즈다. 반대로 삼성 입장에서는 원년 이래 계속되어 온 한국시리즈 부진의 늪이 계속되었던 시절의 일부다.
한국시리즈 MVP는 시즌 내내 부진했지만 한국시리즈에서 맹활약한 김준환이 선정되었다.
2. 일정
1987 한국시리즈 해태 타이거즈 VS 삼성 라이온즈 | |||||||
<rowcolor=#ffffff> 경기 | 경기 시간 | 경기장 | AWAY | 결과 | HOME | 방송사 | |
1차전 | 10월 21일 14:00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 해태 타이거즈 | 5 | 3 | 삼성 라이온즈 | |
2차전 | 10월 22일 14:00 | 2 | 1 | ||||
3차전 | 10월 24일 14:00 | 무등 야구장 | 삼성 라이온즈 | 2 | 4 | 해태 타이거즈 | |
4차전 | 10월 25일 14:00 | 2 | 9 | |
3. 시리즈 전 상황
1986년 전기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후기리그 4위로 내려 앉으면서 PO을 치러야 했고, 결국 한국시리즈에서 패배한 삼성 라이온즈는 감독을 김영덕에서 박영길로 교체하고 1987년에는 독하게 우승을 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 결과는 1987년 팀 타율 3할[1]과 전기 및 후기리그 동반 제패의 위업이었다.특히 타선이 정말 무시무시했는데, 과장 하나 안보태고 1번부터 9번까지 쉬어갈 틈이 없었다. 이 시즌 주요 삼성 타자들의 성적을 나열해보면 아래와 같다.
이만수: 타율/출루율/장타율 0.344/0.431/0.579 18홈런 76타점으로 타점 1위, 홈런, 타율, 출루율, 장타율 2위, 포수 골든글러브 수상
김성래: 타율/출루율/장타율 0.332/0,413/0.569 22홈런 70타점으로 홈런 1위, 타점 2위, 출루율, 장타율 3위, 2루수 골든글러브 수상
장효조: 타율/출루율/장타율 0.387/0.461/0.493 2홈런 58타점으로 타율, 출루율 1위, 외야수 골든글러브 수상
허규옥: 타율/출루율/장타율 0.326/0.369/0.451 3홈런 24도루 39타점으로 타율 7위
류중일: 타율/출루율/장타율 0.287/0.362/0.364 2홈런 8도루 28타점으로 유격수 골든글러브 수상
홍승규: 타율/출루율/장타율 0.276/0.340/0.401 7홈런 13도루 26타점
이종두: 타율/출루율/장타율 0.275/0.325/0.401 10홈런 14도루 38타점
장태수: 타율/출루율/장타율 0.282/0.368/0.451 8홈런 32타점, 규정타석에 33타석 미달
오대석: 타율/출루율/장타율 0.326/0.387/0.471 6홈런 40타점, 규정타석에 62타석 미달
이밖에도 백업인 김동재가 192타석에 타율 0.318 9홈런, 박승호가 222타석 타율 0.286에 4홈런을 기록하는 등 중심타선과 하위타선까지 타율 0.250 이하가 한명도 없는 지뢰밭 같은 타선이었다. 특히, 이만수, 김성래, 장효조는 스탯티즈 기준으로 리그 sWAR*과 wRC+ 순위가 각각 1,2,3 등이다. 리그를 지배한 세 명의 타자가 전부 같은 팀에 있었던 셈. 현재까지도 이렇게 강한 라인업은 보기 드물며, 2024년 현재까지도 리그 sWAR*이나 wRC+ 1~3등이 전부 같은 팀에 속했던 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정도로 삼성의 타선이 막강했다는 뜻이며, 그해 득점 2위였던 롯데 자이언츠보다 무려 150득점을 더 했다.[2]
다만 투수진은 확실히 타선에 비해 많이 약했다. 1984년~1986년 삼성의 원투펀치였던 김일융이 일본 프로야구로 복귀하고 3선발 황규봉이 부진 끝에 은퇴하며 선발진의 무게감이 확 떨어졌으며, 유일한 에이스로 23승을 거둔 김시진은 평균자책점이 3.12로, 당시 리그가 투고타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평범한 축에 속했다.[3] 진동한이 144이닝을 투구하며 12승 6패 평균자책점 2.81로 준수한 활약을 펼쳤고 권영호가 18세이브에 2.41의 평균자책점으로 좋은 모습을 보인 정도를 제외하면, 겨우 100이닝 정도 던진 양일환이나 성준 빼고 믿을만한 투수가 없었다. 빙그레의 한희민& 이상군, 롯데의 최동원&윤학길, OB의 장호연, 김진욱, MBC의 김용수&정삼흠처럼 확고한 더블 에이스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김시진도 누적된 혹사가 겹쳤는지 예전만큼의 위력이 나오지 않았다. 실제로 삼성의 마운드는 팀 평균자책점이 7팀 가운데 5등이었으며, 따라서 87년 삼성의 팀컬러는 2014년 넥센 히어로즈와 비슷하게 타자들이 점수를 대량 뽑아주면 투수들이 무난하게 막아가는 스타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삼성은 전기리그와 후기리그에서 모두 1등을 차지하며 그 위력을 과시했다.
반면 해태타이거즈는 상당히 고된 한 해를 보냈는데, 전기리그를 2위 OB 베어스에 3.5게임차로 뒤진 3위로 마감하며 PO 진출권을 헌납했고, 후기리그에서도 시즌막판까지 고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기리그 막판 삼성과의 2연전을 모두 이기며 천신만고 끝에 단 한 게임 차로 후기리그 2위를 차지하며 1987년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따냈다. 하필 홈구장인 무등 야구장에서 전국체육대회이 열리는 바람에 홈 경기를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치른 해태 타이거즈는 3차전까지 1승 2패로 지고 있었고, 4차전도 9회말 2아웃까지 한 점차로 지고 있었지만, OB 유격수 유지훤이 느린 내야 땅볼을 대시하지 못하고 처리하다가 내야 안타를 만들어주면서 극적으로 동점을 만들어 연장전에서 승리하고, 이어 5차전까지 이기면서 극적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이러한 팀 성적이 보여주듯 1987년 해태 선수들의 개인성적은 우승을 노리기에는 뭔가 부족해보였다. 김성한과 김종모가 여전히 건재하여 팀을 이끌어갔고, 서정환과 신인 백인호 등이 분전했으나, 이순철과 한대화, 김봉연 등 작년 해태의 우승의 주역들의 성적이 대폭락하며 타선이 많이 약해졌다. 투수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는데, 부동의 에이스 선동열에 그 뒤를 잇는 차동철은 여전했고, 여기에 2년차 신인 김대현(1962)과 신동수가 각성하며 선발진의 든든한 보탬이 되어주었으며, 문희수 역시 커리어하이를 찍으며 삼성에 비해서는 확실히 투수진은 좋았다.
그럼에도 막강한 전력에 충분한 휴식을 취한 삼성과 1987년 플레이오프에서 혈전을 치른 해태 타이거즈를 비교했을 때 1986년 한국시리즈와 달리 이번에는 삼성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게다가 1987년 해태는 역대 한국시리즈 진출팀들 중 유이한 득실차 마이너스 팀이었다.[4]
그러나 이 해 포스트시즌 일정이 좀 묘했는데, KBO가 짜 놓은 1987년 플레이오프 일정이 10월 7일부터 10월 12일까지였고 한국시리즈는 10월 21일부터 10월 29일까지였다. 즉, 1987년 플레이오프가 5차전까지 가더라도 1987년 플레이오프 승자가 무려 8일을 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1위팀은 경기 감각적인 면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었으며, 특히 해태 타이거즈는 플레이오프에서 5차전까지 가는 격렬한 일정에서 쌓인 피로를 무려 8일이라는 시간동안 넉넉히 다 해소할 수 있었다. 즉, 삼성이 정규시즌 1위팀으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했기 때문에 얻어야 할 체력적인 어드밴티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정이었고, 이 때문에 해태 타이거즈는 2위로 올라가 경기 경험을 쌓고 한국시리즈에 임하면 불리하지 않다고 자신하고 있었다.[5]
4. 엔트리
4.1. 삼성 라이온즈
삼성 라이온즈 1987년 한국시리즈 엔트리 | ||
<colbgcolor=#fecd00> 감독 | 1명 | 박영길 |
코치 | 5명 | 정동진, 황규봉, 유백만, 우용득, 배대웅 |
투수 | 8명 | 김시진, 김기태, 진동한, 양일환, 권영호, 김성길, 성준, 김훈기 |
포수 | 3명 | 이만수, 손상득, 박정환 |
내야수 | 8명 | 함학수, 김용국, 김성래, 이종두, 오대석, 류중일, 박승호, 김동재 |
외야수 | 6명 | 장효조, 허규옥, 장태수, 최무영, 구윤, 홍승규 |
4.2. 해태 타이거즈
해태 타이거즈 1987년 한국시리즈 엔트리 | ||
<colbgcolor=#09081e> 감독 | 1명 | 김응용 |
코치 | 4명 | 김인식, 임신근, 백기성, 박정일 |
투수 | 8명 | 이상윤, 선동열, 김정수, 차동철, 신동수, 김대현, 방수원, 문희수 |
포수 | 3명 | 김무종, 장채근, 이건열 |
내야수 | 9명 | 김봉연, 김성한, 서정환, 한대화, 차영화, 김일환, 조충열, 백인호, 박철우 |
외야수 | 5명 | 김준환, 조재환, 김종모, 이순철, 송일섭 |
5. 결과
5.1. 1차전
한국시리즈 1차전, 10월 21일 수요일, 14:00,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해태 | 김대현 | 3 | 0 | 0 | 0 | 0 | 0 | 0 | 2 | 0 | <colbgcolor=#dcdcdc,#222222> 5 | 7 | - | - |
삼성 | 김시진 | 1 | 1 | 0 | 0 | 0 | 0 | 0 | 0 | 1 | 3 | 11 | -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 | 해설: - |
1회 실책 속에 3점을 내준 김시진은 7회까지는 해태의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그러나 8회초 김성한에게 솔로 홈런을 맞고, 이어 적시타를 또 내주면서 2점을 더 실점하며 경기가 기울고 말았다. 삼성은 9회말에 연속 3안타로 1점을 추격했지만, 차동철이 2사 1루, 3루 위기에서 그 해 홈런왕이었던 김성래를 땅볼로 막아내면서 먼저 1승을 챙겼다. 안타는 삼성이 더 많았지만, 해태는 홈런과 상대 실수를 묶어 먼저 기선을 잡았다. 결국 김시진은 1984년 한국시리즈 2패, 1986년 한국시리즈 3패에 이어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도 패전을 적립하며 통산 KS 6패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다.
5.2. 2차전
한국시리즈 2차전, 10월 22일 목요일, 14:00 ~ 16:59 (2시간 59분),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해태 | 김정수 | 1 | 1 | 0 | 0 | 0 | 0 | 0 | 0 | 0 | <colbgcolor=#dcdcdc,#222222> 2 | 5 | - | - |
삼성 | 김기태 | 1 | 0 | 0 | 0 | 0 | 0 | 0 | 0 | 0 | 1 | 4 | -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 | 해설: - |
기회 자체는 삼성이 훨씬 더 많았다. 선발 김정수 상대로 안타 4개, 사사구 8개를 얻어내면서 찬스를 무수히 잡았지만, 그 때마다 범타나 병살타로 물러나면서 찬스를 날렸다. 이날 놓친 찬스를 열거하면 3회 무사 1루, 2루, 6회 2사 1루, 2루, 7회 1사 2루 그리고 최후의 찬스였던 8회 1사 1루, 3루였다. 하지만 8회 1사 1루, 3루 찬스에서 삼성은 해태가 내세운 절망의 벽인 선동열을 맞이해야 했고, 선동열은 후속 타자를 삼진과 땅볼로 요리하면서 결국 팀의 승리를 지켰다. 김정수는 7과 3분의 1이닝을 던져 1실점으로 2차전 승리투수가 되었다. 패전 투수는 김기태.
5.3. 3차전
한국시리즈 3차전, 10월 24일 토요일, 14:00, 무등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삼성 | 권영호 | 2 | 0 | 0 | 0 | 0 | 0 | 0 | 0 | 0 | <colbgcolor=#dcdcdc,#222222> 2 | 5 | - | - |
해태 | 신동수 | 0 | 0 | 2 | 1 | 1 | 0 | 0 | 0 | - | 4 | 9 | -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정도영 | 해설: 하일성 |
삼성은 9회초 최후의 찬스를 잡았다. 1회 구원 등판한 후, 삼성의 타선을 요리하던 문희수 상대로 무사 1루, 2루의 찬스를 잡은 것이다. 구원 등판한 차동철 상대로 2사 2루, 3루의 기회를 잡은 삼성은 박승호가 친 타구가 1루 베이스를 맞고 빠지지 않고, 1루수 글러브에 들어가면서 동점을 만들 기회를 아깝게 놓치면서 시리즈 3패로 몰리고 말았다.
5.4. 4차전
한국시리즈 4차전, 10월 25일 일요일, 14:00, 무등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삼성 | 김시진 | 0 | 1 | 0 | 0 | 1 | 0 | 0 | 0 | 0 | <colbgcolor=#dcdcdc,#222222> 2 | 7 | - | - |
해태 | 김대현 | 0 | 2 | 0 | 1 | 3 | 3 | 0 | 0 | - | 9 | 14 | -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정도영 | 해설: 하일성 | 캐스터: 임주완 | 해설: 김소식 |
해태는 곧바로 이어진 5회말 공격에서 무사 만루의 찬스를 잡아 밀어내기 볼넷과 안타와 상대 실책을 묶어 3점, 다시 6회말에 연속 5안타를 작렬하면서 또 다시 3점을 내며 승부를 완전히 굳혔다. 이 날 해태의 타자들은 14안타를 치면서 한국시리즈 역사상 최초의 선발 전원 안타 기록을 세웠다. 마운드에서는 5회부터 나온 김정수가 삼성의 타선을 묶으면서 경기가 끝나며 해태는 통산 세 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정규시즌 0.204로 최악의 시즌을 보낸 김준환은 3차전, 4차전의 홈런 2방을 포함해 0.500 2홈런 4타점을 기록하며 한국시리즈 MVP가 되었다.
6. 총평
단기전에서 방망이는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속설을 아주 잘 알려준 시리즈였다. 삼성이 그렇게 자랑했던 막강한 타선은 이만수를 제외하고 지독한 물타선으로 변신했는데 특히 김성래는 17타수 2안타 3병살타로 대놓고 국밥을 말았고 장효조나 허규옥 등도 정규시즌 만큼의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이만수 혼자 13타수 5안타 1홈런에 3볼넷 3도루까지 기록하며 분전했으나 다른 타자들이 전부 침묵해버려 빛을 보지 못했다. 삼성은 충격적인 4전 전패로 인해 전년 한국시리즈 3차전~5차전에 이어 한국시리즈 7연패(敗)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으며, 2024년 현재까지도 한국시리즈 직행 팀이 0승 4패로 탈락한 유일한 한국시리즈로 남아있다.[6]반면 해태 타이거즈는 정규 시즌 부진했던 선수들이 화려하게 부활하여 팀을 구원해냈다. 가을까치 김정수는 별명답게 정규시즌에서는 부진했으나 한국시리즈 2차전 선발 7.1이닝 1실점을 포함해 2경기 11.2이닝 1실점 평균자책점 0.77으로 펄펄 날았고, 한대화는 해결사라는 별명 답게 14타수 5안타 1홈런 3볼넷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특히 김준환은 정규시즌 최악의 부진을 겪으며 마음고생이 심했으나[7] 한국시리즈에서는 12타수 6안타 2홈런 4볼넷으로 미쳐 날뛰며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특히 해태 전력의 절반을 차지했던 선동열은 어깨 부상으로 플레이오프에서는 아예 등판하지 못했으며, 한국시리즈에서도 2차전 세이브 상황에서 딱 한경기 등판한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다른 투수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삼성 타선을 잠재우며 해태가 꼭 선동열 혼자만의 팀은 아님을 증명했다.
7. 여담
- 전년도에 있었던 해태 버스 방화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시 대구광역시와 광주광역시를 오가는 한국시리즈 대진표가 2년 연속으로 성사되며 당시 매우 심각했던 영호남 지역갈등이 또 다시 뜨거워졌다. 거기에 1987년은 6.29 선언과 10월 27일[8] 제6차 국민투표로 9차 개헌이 이루어진 뒤 16년 만에 직선제로 치러진 1987년 12월 16일의 제13대 대통령 선거까지 있던 해여서 영호남 지역갈등이 더욱 심각했던 해였다. 호남 출신인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가 영남에서 유세를 할 때 지지자 간의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반대로 영남 출신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와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가 호남에서 유세를 할 때도 지지자 간의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 불과 4게임만에 싱겁게 끝나면서 KBO 직원들은 줄어든 입장 수입 때문에 대단히 아쉬워 했다 카더라. 이는 프로야구 역사상 4연승 싹쓸이로 끝난 첫 번째 한국시리즈다.
- 전후기 우승을 한 팀이 1986년과 1987년에 모두 재미를 보지 못하자 전후기 우승팀에게 이점을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이 말은 해태가 1988년 전후기 우승을 모두 독식하고, 한국시리즈에서도 우승하면서 사라졌고, 1989년부터는 단일 시즌이 되어 완전히 없어졌다.
- 해태-KIA가 2024년까지 총 12차례 거둔 우승 중에서 유일하게 무등 야구장에서 우승을 결정한 시리즈다. KBO 한국시리즈의 잠실 중립 경기 규정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더구나 2013년을 끝으로 무등 야구장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지 않으면서 무등 야구장에서의 우승 헹가레는 이 때가 유일하게 되었다. 새 홈구장인 광주 KIA 챔피언스 필드는 2017년 한국시리즈를 치른 바 있으나 5차전에서 시리즈가 끝나는 바람에 1차전, 2차전만 열렸고 팀도 잠실 야구장에서 우승을 결정지었으며 이후 2024년 한국시리즈가 5차전에서 끝나게 되면서 광주 KIA 챔피언스 필드에서 우승을 결정하게 되었다. 무려 37년만에 연고지인 광주광역시에서 우승하게 된 셈이 되었다.[9]
- 1987년 후기리그 마지막 2연전에서 삼성은 우승을 확정지은 상태에서 해태에게 2연패를 당하면서 결과적으로 해태가 PO에 막차로 진출하게 도와준다. 그런데 1988년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이 빙그레에게 0:3으로 패하자 삼성그룹 비서실이 야구단을 감사했는데 여기서 1987년 후기리그 마지막 2연전에서 박영길 전 감독이 친구인 김응용 전 감독의 해태에게 전력을 다하지 않아 해태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도와주고 삼성의 우승을 좌절시켰다는 논리가 등장하면서 박영길 전 감독은 1988시즌 종료 후 해임되고 만다.
- 마찬가지로 1987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히 드랍 더 볼을 저지른 장효조는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만세 사건까지 포함이 되어 그룹 감사에서 한국시리즈 패전의 원흉으로 찍히면서 1988년 종료 후, 그 유명한 롯데와의 대형 트레이드에 포함되고 만다.
- 김시진 역시 이번 시리즈를 포함한 통산 3개의 한국시리즈에서 7전 7패라는 초라한 결과를 냈고 이후 다시는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지 못했다.[10] 그는 결국 1988년 롯데와의 대형 트레이드에서 1984년 한국시리즈 4승을 거둔 최동원과 맞트레이드되었다.
- 특이하게 전 경기가 낮 경기로 치러진 유일한 한국시리즈이다. 심지어 평일에 열렸던 대구광역시 1차전, 2차전도 낮 경기로 열렸는데, 전년도에 있었던 불상사 때문으로 추정된다.
- 최초로 서울특별시 중립 경기가 열리지 않은 한국시리즈이며[11], 최초로 홈구단이 홈경기장에서 우승을 확정지은 시리즈다. 이전까지는 동대문이나 잠실 중립에서 우승했고, 1985년 전후기 통합우승을 차지한 삼성은 부산광역시에서 우승을 확정지었다.
- 이 시리즈가 끝나고 2달 후 16년 만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부활해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는데 이 시리즈 결과와는 정반대로 대구광역시, 경상북도를 연고로 하는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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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4년에 삼성이 .301로 경신했고 2015년에 .302로 또 다시 신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2017년 KIA 타이거즈가 이 기록을 다시 갈아치웠고 이듬해인 2018년 두산 베어스가 또 갈아치우며 역대 한 시즌 최고타율의 주인은 바뀐 상태다.[2] 한편으로는 선동열 vs 최동원 득점지원 드립 많이 치는데 롯데도 평균은 하는 팀이었다. 다만 롯데는 최동원, 윤학길 외에는 에이스가 없었고 이로 인해 해태보다 투수진 전체적으로 뒤쳐졌다. 당시 막장이었던 빙그레 이글스와 청보 핀토스를 생각하면..[3] 실제로 ERA+가 고작 114.4로, 평균보다 조금 나은 정도이다.[4] 나머지 하나는 2001년 두산. 65승 5무 63패 승률 0.508 득실차 -1을 기록했다. 그리고 알다시피 두산도 똑같이 삼성을 상대로 업셋 우승을 해냈다.[5]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삼성은 실제로 우려했던 무딘 경기 감각이 시리즈 내내 발목을 잡아 내리 4패로 광탈해버렸다. 2년 뒤에 1989년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빙그레 이글스역시 똑같은 상황을 겪었고, 삼성과 마찬가지로 경기 감각 부족이 발목을 잡으면서 한국시리즈 첫 업셋 우승과 함께 1989년 플레이오프를 우승하고 올라온 해태 타이거즈의 4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의 제물이 되고 만다.[6] 삼성은 1990년과 2010년에도 4연패로 우승을 놓쳤지만, 그때는 모두 플레이오프를 거쳐서 올라왔다. 특히 1990년은 준PO-PO를 연속으로 패배 없이 올라왔으므로 전승준을 했다고 봐야 맞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한국시리즈 직행팀이 1경기도 못 건지고 싹쓸이를 당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전패준이다.[7]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준환은 아내가 출산 후 중병(혈소판 감소증)에 걸렸고 간호하느라 집 - 무등야구장 - 전남대병원을 왔다갔다하느라 그 시즌에 유독 부진했는데 한국시리즈에서 활약해 우승 및 개인상 수상을 해서 유독 기억에 남는 시즌이라고 말했다.[8] 만약 해태가 이 해 한국시리즈를 스윕하지 못했다면 이 날 잠실에서 5차전을 치를 예정이었다.[9] 삼성 라이온즈 상대로 우승한 것도 1987년과 일치한다.[10] 선수로서의 마지막 해였던 1992년에 롯데가 우승했지만, 그해 1패에 그친 김시진은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11] 이후 1991년과 2010년에도 한국시리즈는 잠실에서 열리지 않았고, 역시 4경기만에 승부가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