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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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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으로 인한 올스타전 취소 }}}}}}}}}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5번
결번 <colcolor=#ff0000> 김무종
(1983~1988)
정회열
(1990~1997)
}}} ||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271929_STD.jpg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시상식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김무종(왼쪽)[1]
파일:/image/109/2005/05/06/200505061216071100_1.jpg
1983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홈에 뛰어들다 아웃된 후 허탈해 하는 이해창을 보고 웃고 있는 김무종(왼쪽).[2]
김무종
金茂宗[3] | Kim Mu-Jung
일본명 키모토 시게미([ruby(木本, ruby=きもと)] [ruby(茂美, ruby=しげみ)]) → 타키무라 시게미([ruby(滝村, ruby=たきむら)] [ruby(茂美, ruby=しげみ)])
출생 1954년 4월 7일 ([age(1954-04-07)]세)
일본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사쿠라가오카 고등학교 (졸업)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72년 드래프트 8라운드 (히로시마)
소속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3~1982)
해태 타이거즈 (1983~1988)
지도자 삼성 라이온즈 1군 배터리 코치 (1991~1993)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이후4. 여담5. 연도별 성적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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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재일교포 출신의 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포지션은 포수.

일본명은 키모토 시게미(木本茂美)로 원래 한국명은 김무미지만 어감이 안 좋다는 이유로 김무종으로 개명당했다.[4] 또한 현역 생활 은퇴 후 일본으로 돌아간 후 성을 키모토에서 타키무라(滝村)로 바꿨다고.

2. 선수 경력

2.1. 일본프로야구 시절

일본 야마구치현사쿠라가오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2년 드래프트 8순위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했다.[5] 그러나 프로 11시즌 동안 1군 출장이 겨우 15경기에 불과할 정도로 철저히 2군에 묻혀 있었다.

2.2. 한국프로야구 시절

1983년 한국야구위원회의 재일교포 선수 영입 계획에 의해 한신 타이거즈에서 뛰던 투수 주동식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다. 원년의 해태는 박전섭[6]과 김경훈[7]이 번갈아 가며 마스크를 썼는데 상대팀 주자들이 대놓고 뛰어도 거의 잡지를 못할 정도로 허약한 안방을 자랑(...)하던 팀이었지만, 김일권이 같은 팀이었음을 다행으로 알라 김무종의 입단으로 최강의 배터리를 구축하게 되었다. 비록 2군에만 있었다지만 일본야구를 경험한 김무종은 한 수 앞선 투수리드와 강한 어깨, 견고한 블로킹으로 해태 투수들을 이끌면서, 타율 0.262, 12홈런, 60타점을 올리며 개인타격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8] 그리고 해태가 MBC 청룡을 꺾고 1983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1984년 MBC 청룡의 공격형 포수였던 유승안이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해태로 왔지만[9] 주전포수는 여전히 김무종이었고 좋은 타격을 보여줬다. 1985년이 되자 리그 평균 이하의 공격력으로 내려갔으나 여전히 주전을 차지하고 포수 치고 타격은 좋은 편이었다. 1986년 유승안이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로 떠나고 신예 장채근이 들어왔지만 아직 김무종이 주전 포수를 지켰다.[10] 이 해 올스타전에서는 MVP를 수상했다. 1987년에도 마찬가지로 전해와 마찬가지로 주전으로 활약하며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1986년 한국시리즈, 1987년 한국시리즈)을 맛봤다.

그러나 1987년 시즌 중반부터 엄지손가락이 뒤로 젖혀지는 포수들의 직업병[11]이 심해지며 조금씩 포수 자리를 장채근에게 내주었고, 비록 고국이라고는 하지만 타국이나 다름없는 낯선 한국에서의 생활과 재일교포에 대한 냉대에 지쳐 우울증까지 도지면서[12] 결국 1988년 잠재력이 폭발한 장채근이 주전을 꿰차게 되었고 김무종은 고작 9경기 9타석만 나오며 이 시즌을 마무리했다.[13] 그리고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벗고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프로 6시즌 통산 타율 0.240, 41홈런, 192타점을 기록하였다.

통산 wRC+가 약 92정도 되는 공격이 되는 포수였으며, 노련한 포수 리드, S급이라 평가받은 수비능력으로 해태 안방을 든든하게 지키며 초창기 해태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다.

3. 은퇴 이후

1991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에 취임한 김성근의 부름을 받고 삼성의 배터리 코치로 한국 프로야구에 복귀하였다. 이듬해 말 김성근이 감독직에서 물러난 가운데에서도 코치직을 유지했지만 1993년 한국시리즈를 패퇴로 끝난 뒤 재계약을 포기하고 다시 일본으로 떠나야 했다.[14]

이후 일본에서 운수업, 정확히는 트럭 운전을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2011년 2월 6일 NHK에서 방영된 재일교포 야구인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백구(白球), 선수들은 바다를 건넜다"에 출연했다.#

4. 여담

과거 프로야구 매니지먼트 게임인 프로야구매니저에서 연도에 상관없이 사용가능한 클래식 카드로 출연하여 다시 관심을 받았었다. 이유가 뭔고 하니 KIA 타이거즈, 해태 타이거즈의 포수 카드들 중에 타격과 수비가 동시에 되는 유일무이한 옵션이기 때문이다. 수비 SS등급 달성이 가능하고 교정과 육성에 따라 교타 110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

마구마구에서는 성명권 문제로 인하여 김이종이라는 이름의 선수카드에 그의 기록과 능력치가 수록되어 있다.

성격이 좋기로 소문나있다. 제구력 난조로 프로 초기 어려움을 겪던 김정수에게 맘 놓고 세게 던지기만 하면 된다고 격려했다고 한다. 선동열이 주전포수인 본인 말고 신예포수인 장채근과 배터리를 짜겠다고 해도 별 불만이 없었다고 한다.

2021년 김성한과 김종모가 유튜브 채널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하여 밝힌 일화로 어느 날 게임에서 패하여 화가 난 김응용 감독이 선수단을 모두 차에 태워 전라남도 장성군에 내리게 하고 광주광역시까지 뛰어서 돌아올 것을 지시했는데 같은 재일교포 출신인 주동식과 같이 한국말이 서툴러서 "이건 프로야구 아니야!" "빠가xx"를 연발하며 불만을 내뱉었다고.[15]

같은 해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송유석은 가장 보고 싶어하는 선배로 김무종을 뽑았다. 파랑새 존[16] 상금 50만원 중 20만원을 봉투에 담아 그 당시 연습생이던 송유석에게 주었으며 20만원은 송유석의 한 달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일본프로야구계에서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송유석의 고생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서 챙겨준 것이고 송유석은 '훗날 내가 스타가 되면 나도 꼭 후배들을 챙겨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한다. 현재 일본 연락처를 알지 못해 아쉽다고 말하면서 꼭 전설의 타이거즈 방송을 보면 연락해달라는 부탁의 말도 남겼다.

다행히 옛 해태 선수들 일부와 연락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성한이 2023년 8월 방영된 전설의 타이거즈에 주동식과 함께 출연했을 때 짤막하게 전화 인터뷰를 했고 김무종도 "광주에 가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전화 인터뷰에서는 한국을 떠난 지 오래 됐지만 한국프로야구에서 6시즌을 보냈고 코치 생활도 했던 만큼 유창하지는 않아도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5.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사사구
1974 히로시마 2 2 0.000 0 0 0 0 0 0 0 0
1975 3 2 0.000 0 0 0 0 0 0 0 0
1976 1군 기록 없음
1977
1978
1979
1980 2 1 0.000 0 0 0 0 0 0 0 0
1982 8 15 0.200 3 0 0 1 2 1 0 0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사사구
1983 해태 93 309 0.262 81 19 2 12 60 43 2 20
1984 66 217 0.244 53 14 1 7 22 22 0 22
1985 87 263 0.247 65 14 0 7 35 28 1 26
1986 101 317 0.224 71 6 2 8 44 19 0 25
1987 89 243 0.226 55 8 1 7 31 25 1 22
1988 9 8 0.125 1 1 0 0 0 0 0 0
<colbgcolor=#ffff88> NPB 통산(4시즌) 15 20 .150 3 0 0 1 2 1 0 0
KBO 통산(6시즌) 445 1357 .240 326 62 6 41 192 137 4 115

6. 관련 문서


[1] 사진의 오른쪽 인물은 장명부로 시즌 다승왕 및 베스트10 투수 부문 수상자이기 때문에 같이 나왔다.[2] 이 때 김무종은 이해창에게 "아웃이에요, 아웃"이라고 말했다. 이 사진은 이듬해 KBO가 발행한 1984년도판 프로야구 연감의 표지를 장식했다.[3] 개명 전 김무미(金茂美).[4] 한자 문화권에서 아름다울 미(美)자가 남자 이름에 쓰이는 곳은 일본 이외엔 거의 전무한 편이다.[5] 나중에 장명부와 같이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하는 내야수 이영구와 팀메이트이자 룸메이트 였다.[6] 1959년생, 김성한의 군산상고-동국대-해태 동기생이다. 1982~1985년 해태에서 뛰었다.[7] 신일고 야구부의 창단멤버이자 주장이었으며 고교 시절 청소년대표로 뽑혔다. 고려대 진학 대신 실업팀 상업은행에서 뛰었으며 1982년 해태에서 한 시즌만 뛰고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해태 팬들에게는 스카우터로 잘 알려져있다.[8] 김종모 김봉연 김성한 다음으로 잘 쳤으며 리그 전체를 봐도 상위권이고 타석도 팀에서 5번째로 많다.[9] 유승안은 MBC 청룡에서 프로 첫 개막전에서 선발 포수이자 4번타자로 중용되는 영광을 누렸으나 개막전 끝내기 찬스에서 과욕을 부리다 득점에 실패했고 결국 백인천 당시 감독에게 단단히 찍히게 된다. 이후 MBC의 주전 포수는 김용운이 기용됐고 유승안은 그 뒤로 밀려났으며 1983년에도 유승안의 경기 출전 시간은 늘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롯데에서 데려온 차동열까지 MBC 포수 경쟁에 가세하자 결국 팀 내에서 자리를 잃고 해태로 트레이드 된다.[10] 실제로 장채근은 김무종과 매우 친하게 지냈고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김무종의 백업으로 있던 시절 본인이 타석에 자주 들어서지 못하자 출장 기회에 대한 불만이 생겼다. 그러던 중 대구 원정경기를 마치고 고교 선배인 이순철과 숙소 근처 포장마차에서 술을 먹다가 이순철이 "야! 언제까지 백업으로 있을래? 김무종에게 이겨야 할 것 아니냐? 감독님한테 가서 너 좀 써달라고 따져"라고 말했다. 만취 상태에 이른 장채근은 김응용 감독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이를 두고 장채근의 룸메이트였던 김종모는 "장채근이 김응용 감독을 위협하려다가 거꾸로 엄청나게 맞았다"고 말한 바 있지만 상황의 당사자인 장채근은 "술김에 김응용 감독 방에 들어간 것은 맞지만 대들지는 않았으며 본인 좀 자주 기용해달라고 무릎 꿇고 빌었다"고 회상했다.[11] 이로 인해 은퇴한 포수들이 많은 편이며, 2015년 시즌 직전 은퇴한 현재윤도 이런 케이스.[12] 이 당시 김무종은 언론에 "내 고향은 현해탄이다" 라고 털어놓을 정도로 한국인들의 푸대접에 대해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동료인 주동식의 증언에 따르면 삼성 라이온즈와의 대구 원정경기 후 술을 잔뜩 마시고 만취한 김무종이 호텔 로비에서 "(반쪽바리라고) 차별하지 말라"며 울부짖은 적도 있다고 한다.[13] 그러나 정회열의 등장으로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주전 자리를 내준 장채근은 결국 1994년 최해식과의 맞트레이드로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됐다. 그리고 1995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한다.[14] 삼성은 그를 대신해 미국 연수 중이었던 김경문을 영입했다. 그리고 삼성1차 암흑기를 김경문과 함께 했다. 망해쓰요[15] 광주까지 돌아간 방법들이 다양한데 김성한은 택시를 불러서 탔고, 김일권, 김준환, 김종모, 장진범, 송일섭은 뛰어서, 일부 선수들은 지나가던 차를 붙잡고, 송유석경운기를 타고 돌아갔다고 한다.[16] 무등야구장 외야펜스의 일부분으로 홈런 타구가 이 쪽 펜스를 넘기면 특별 상금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