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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수원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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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1986 | 1987 | 1988 | 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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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복 (1988~1991) | 방수원 (1992~1994) | 김성근 (1995) | 신용균 (1996~1998) | 김봉연 (1999~20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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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갑용 (2024~) | |||||
[1]: '총괄 코치'라는 명칭을 사용한 경우 ※ 2002년은 공석 |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1번 | ||||
팀 창단 | → | 방수원 (1982~1989) | → | 강대성 (1990~1995) |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1번 | ||||
최향남 (1990~1991) | → | 방수원 (1992~1994) | → | 박철웅 (1996~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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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수원 房水源 | Bang Soo-won | |
출생 | 1960년 1월 4일 ([age(1960-01-04)]세) |
광주광역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광주서림초 - 광주동성중 - 광주제일고 - 영남대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
소속팀 | 해태 타이거즈 (1982~1989) |
지도자 | 해태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1990~1991)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 (1992~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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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준수한 활약과 개성있는 외모로 팬들, 특히 어린이 팬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타이거즈의 원클럽 프랜차이즈 스타다.
2. 선수 경력
야구 명문인 광주일고에서 동기 이상윤[1]과 함께 원투펀치 역할을 거쳐 영남대로 진학했으나,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자 3학년 때 한양대의 이상윤과 같이 중퇴하고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 멤버가 되었다.[2]당시 해태의 창단 첫 경기였던 1982년 구덕 롯데전의 선발투수로 등판하는 등[3] 프로 원년에는 154이닝을 던져 6승 7패, 방어율 3.91의 성적을 기록하며 1선발 김용남의 뒤를 받치는 2선발로 활약한다. 그러나 이 후 다음해부터 이상윤이 제 컨디션으로 돌아오면서 밀려났고, 그 이후에는 문희수, 선동열 등 호남 야구의 르네상스를 만들었던 에이스 투수들이 입단하면서 선발진에는 끼지 못하고, 롱 릴리프로 강등되었다. 원년을 제외하고 규정 이닝을 채운적은 없다. 1988년엔 80이닝을 던지며 1.69 ERA를 기록 하는 등 거의 3에 가까운 WAR를 쌓으며[4] 마지막 불꽃을 피웠다. 1989년까지 통산 599.2 이닝 18승 29패 18세이브의 성적을 남기고 1990년 은퇴식을 가진다.
현역 시절 본인이 가장 까다로워 했던 타자가 MBC의 김용달이었다. 당대 강타자였던 장효조, 이만수보다도 힘들었다고.
특별한 보직 없이 이리저리 궂은 일을 하던 선수였지만 통산 18세이브를 기록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중간계투로서 꽤 알토란같은 활약을 한 선수였다. 홀드 제도가 늦게 도입된 것이 참 아쉬웠던 선수 중 한 명이다.[5]
3. 은퇴 후
은퇴한 이후 해태 2군 코치를 맡기도 했다. 한때는 광주에서 재즈바를 운영[6]하기도 했던 그는 지금은 운암동에서 골프 연습장을 운영하는 중이다. 골프 티칭프로 자격증도 땄다.2021년 10월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하며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11월 충장축제 특집으로 5명의 선배들(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김성한, 김종모)과 함께 라이브에 참석했는데 선배들에 비해 가장 연로한 모습을 보였다.
2022년 9월 전설의 타이거즈에서는 2군 코치 시절 제자이기도 했던 최향남과 함께 출연했다.[7]
4. 피칭 스타일
패스트볼 구속이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 등 변화가 심한 변화구를 주무기로 던지는 기교파 투수였고 고교-팀 후배인 선동열과 차동철에게 슬라이더를 전수해준 바도 있다. 선동열은 이 슬라이더를 갈고 닦아 국내 최고의 투수로 성장하게 된다. 이영민 기자의 저서에 따르면, 이 슬라이더를 가르쳐주게 된 계기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게 시민군으로 오인받아 구타당하던 방수원을 선동열의 아버지인 선판규 씨가 신원보증을 서서 구해줘 집에 숨겨줬을 때, 학교 후배이기도 한 선동열이 공을 던지는 것을 보고 그립을 알려줬다고 한다.또한 '공 다섯개를 던져서 삼진을 잡을래? 아니면 공 세개를 던져서 범타로 유도할래?'라고 선동열에게 묻는 등 경기운영 능력을 중시했던 피네스 피처였다.
5. 여담
- 선판규 씨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이 깊은 분인데 소설가 한창훈의 회고에 따르면 계엄군에게 구타당하는 시민을 뛰어들어 구해준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계엄군에 붙잡혀 교도소에 갇힌 이상윤의 동생을 찾으러 나간 적도 있다고 한다.
-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과 맞닥뜨린 적도 있다. 당시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는 학교와 운동장이 광주시내 한복판 금남로에 있었기에 혼란을 피하고자 광주 도심에서 떨어진 광산군의 한 학교에 모여서 연습을 했고 연습이 끝나면 선동열의 아버지 선판규 씨가 운영하던 송정여관에서 쉬고 있었다. 당시 방수원은 영남대 재학 중이었는데 광주 집에 잠시 왔다가 대구 학교로 가는 길이 막혀버리면서 혼란을 겪었고 이 사정을 아는 선판규 씨가 후배들과 함께 연습하면서 지낼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줬다. 그러던 중 광주일고 선수 중 한 명이[8] 야구 유니폼을 입은 채로 친구를 만나러 나갔는데 그 선수의 친구가 지나가던 계엄군 트럭에 대고 욕을 한 뒤 도망쳤다고 한다.[9] 이 광경을 계엄군 장병이 못 볼리 없었고 도망친 이들 중 1명이 야구 유니폼을 입고 있었기에 계엄군은 근처에 있던 광주일고 선수들에게로 향했고 선수들은 여관으로 도망쳤다. 기어이 여관까지 찾아온 계엄군은 당시 욕을 하고 도망친 사람이 방수원이라고 오해한 탓에 그의 배에 대검을 들이대며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선판규 씨가 계엄군을 향해 무릎을 꿇고 빌면서 "내가 선동열 애비 되는 사람이오. 얘들은 야구만 하는 애들이라 아무 것도 모른다. 내가 아이들에게 계엄군을 만나더라도 아는 척 하지 말고 고개 숙이고 다니라고 잘 일러뒀다. 우리 아이들이 절대 계엄군에 욕했을 리가 없으니 살려만 주시오."라며 호소했다. 그때 마침 고교야구 마니아였던 계엄군 모 장교가 선동열을 알고 있었고 선판규 씨의 말을 믿고서 부하들을 데리고 철수했다. 군인들이 떠난 뒤 선판규 씨는 친구와 외출했던 그 선수를 죽도록 두들겨 팼다고 한다. 방수원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거리에서 시민이 군인의 총칼에 의해 죽는 걸 본 터라 자신도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고.
- 한 번은 강판을 요구하는 코감독에게 안 내려가겠다고 개기다가[10] 덕아웃으로 끌려와 경기장에서 코감독에게
코찌검맞기도 했다.[11] 방수원이 전설의 타이거즈에 나와서 선술했듯이 2019년 12월 코감독의 팔순연에서 앙금을 풀었고[12] 그 당시 개긴 것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하지만 그 때는 투승타타 시절이라 선수 입장에서는 그런 기록 하나에 연봉협상이나 계약이 좌지우지되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 노히트 노런을 하던 날은 원래 MBC에서 타 구장의 라디오 중계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우천취소로 인해 스케줄이 변경되어 급하게 광주 중계로 수정되었고 광주MBC의 아나운서가 급하게 전국중계를 한 일화가 있다. 김형주 전 광주MBC 아나운서의 기고글
- 원래 이름은 방승원[13]이었다. 방수원은 국민학생 시절 잃어버린 동생의 이름인데, 호적 정리를 하던 아버지가 그만 멀쩡히 살아있는 승원의 호적을 말소하는 실수를 범하셨고, 그래서 동생 수원의 이름으로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14] 그러나 그가 현역 시절 해태 투수로 활약하는 것을 본 동생이 잠실 야구장에 찾아와 16년만에 이산가족 상봉에 성공했고, 원래 이름이 방수원이던 동생은 방득원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동아일보 인터뷰 '수원' 이라는 이름은 인명에도 어느정도 쓰이지만 흔한 이름 까진 아니고, 방씨도 희귀 성씨까진 아니지만 인구가 적기 때문에 '방수원 이라는 이름을 가진 20대'를 비교적 찾기 쉬웠을 수도 있다. 동생을 찾아 너무 흥분된 상태라 도저히 오늘 시합을 뛸 수 없다고 코감독에게 말했더니 '저리 가!이 xx야!라고 받아친 코감독의 반응이 백미다. 여담으로 이 일화를 소개한 어느 커뮤니티 댓글로 방수원 선수의 처조카라는 사람이 말하길 동생과 상봉했지만 사이가 소원해져서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 깡마른 외모가 마치 원숭이나 외계인을 연상케 한다며 혹성탈출, E.T, 원숭이 아저씨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고[15] 생김새와 이름 석자를 이용해서 방글라데시 수입산 원숭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다. 김성한이 추가로 말한 별명은 방수엘라. 이 때문에 그런지 나이가 든 지금은 노안 속성까지 생겼다.
- 1980년대 중반 이후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해태 내에서도 이리저리 밀려다닌 탓에 다른 팀으로부터 이적 제의도 받았다. [16]그러나 먼저 태평양 돌핀스로 이적한 선배 김일권이 해태 덕아웃으로 찾아와서 "많이 경기에 출전하지 못해도 늘 승리를 거두는 팀에 있어라. 이기는 재미가 없으니까[17] 야구에 의욕이 없다. 돈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건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단념했다고 한다. 김일권이 해태 초대 군기반장을 맡던 시절 집합을 걸어서 선수들에게 "오늘 게임같이 플레이해서 지면 팬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냐? 내일 게임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이기자"라고 독려를 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하였다.[18]
- 김병현의 언더스로 투구폼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19] 김병현이 무등중 재학시절 유소년 유망주를 보기 위해 무등중을 찾았던 방수원이 언더스로 투구폼으로 놀고 있던 김병현에게 언더스로로 던져볼 것을 권유했고, 언더스로로 던졌을 때 볼이 더 잘 나가는 걸 발견한 김병현도 결국 오버핸드에서 언더핸드로 투구폼을 바꾸게 된다.
- 2003년 7월 3일[20] 재즈바를 경영하던 시절에 40대 김 모씨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건물 주차장 철판 아래로 추락한 모습을 보고 119에 신고했었다. 이 사건은 2003년 9월 2일에 방영된 KBS2 긴급구조119 2003 야~ 이제 자자! 편 에피소드로 방영되었다. # # [21]
- 소설가 스티븐 킹과 닮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5.1. KBO 리그 최초의 노히트 노런
무엇보다도 그는 KBO 리그 최초의 노히트 노런 기록 달성자다. 1984년 5월 5일[22] 광주 삼미 슈퍼스타즈전에 등판해서 리그 사상 최초의 노히트 노런 기록을 달성했다. 흥미롭게도 이날 방수원의 선발 등판은 당초 계획에 없었던 임시 선발이었다. 의도치 않게 선발진에 공백이 생겼고, 결국 김응용 감독이 임시로 내세운 선발투수가 방수원이었는데, 그 경기에서 3볼넷 6탈삼진에 무피안타라는 예상밖의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방수원 본인이 술회하기를 원래 2이닝만 잘 막으면 그 날 임무는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라 2이닝을 던진 후 덕아웃에서 스파이크를 벗고 쉬고 있었는데 수석코치가 "아야~ 지금 너 뭣하냐? 감독님이 투수 교체하라는 말 안했응께 계속 던져!"라고 말하자 다시 스파이크를 신고 마운드로 나갔다. 볼넷을 내주자 김응용 감독이 마운드로 가려고 했으나 팬들의 함성소리에 발길을 다시 돌렸고 어찌어찌 위기를 극복하며 계속 피칭을 이어갔다. 노히트 노런이 무산될 위기가 있었으나 2루 베이스를 타고 넘어가 중전안타가 될 법한 타구를 차영화가 다이빙 캐치하여 아웃을 만들어 내는 등 운도 따랐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유승안이 전화로 출연하여 설명을 덧붙였는데 그날 주전 포수 김무종 대신 유승안이 포수 마스크를 썼고 '무조건 내가 던지라는 것만 믿고 던져라'고 주문을 했다고 한다. 긴 이닝을 소화해 본적이 없는 방수원은 체력적으로 점점 한계에 다다랐고 노히트 노런 달성까지 단 한 개의 아웃카운트만 남긴 상황에서 유승안은 마운드에 올라가 방수원의 얼굴을 보면서 '전광판을 봐봐. 기록까지 아웃카운트 1개 남았다. 눈 똑바로 뜨고 미트만 보고 던져'라고 말했다. 마지막 타자는 4번 타자였던 김진우였는데 노볼 투스트라이크 상황에서 던진 투구가 손에서 빠질 때 느낌은 '아! 안타 맞겄다!' 그러나 다행히 파울이었다. 유승안이 황급하게 마운드로 올라오며 '아야! 볼 던지라마다!'라고 말하자 방수원은 '그라믄 바깥쪽으로 아예 빠져 앉으쇼'라고 주문했다. 다음 투구는 빠지는 공이었는데 심판이 스트라이크로 선언해 버리면서 그대로 경기가 끝났고, 김진우는 땅바닥에 배트를 내리쳤다.[23]
이를 두고 방수원의 우스꽝스러운 얼굴 때문에 삼미 선수들이 집중을 하지 못해서 안타를 못 쳤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그런 것과 상관 없이 그 당시 삼미는 그냥 너무 못하는 팀이었다. 그렇게 방수원은 KBO 리그 최초의 노히트 노런 투수로 역사에 남았다. 그리고 이 날의 노히트 노런이 그의 1984년 유일한 승리였으며 자신의 야구인생 통틀어 유일한 완봉승이다.
6. 연도별 성적
역대 투수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82 | 해태 | 34 | 154⅓ | 6 | 7 | 1 | - | 0.462 | 3.91 | 164 | 10 | 56 | 63 | 84 | 67 | 1.37 |
1983 | 32 | 94 | 3 | 5 | 3 | - | 0.375 | 4.98 | 101 | 5 | 58 | 31 | 62 | 52 | 1.60 | |
1984 | 25 | 66 | 1 | 8 | 0 | - | 0.111 | 3.82 | 64 | 2 | 26 | 30 | 39 | 28 | 1.27 | |
1985 | 10 | 23⅓ | 1 | 1 | 0 | - | 0.500 | 3.47 | 16 | 2 | 14 | 9 | 9 | 9 | 1.24 | |
1986 | 29 | 63 | 2 | 4 | 5 (5위) | - | 0.333 | 2.86 | 66 | 3 | 20 | 34 | 26 | 20 | 1.32 | |
1987 | 23 | 65⅔ | 3 | 2 | 3 | - | 0.600 | 4.25 | 71 | 2 | 23 | 29 | 39 | 31 | 1.39 | |
1988 | 28 | 80 | 2 | 1 | 6 | - | 0.667 | 1.69 | 63 | 1 | 25 | 23 | 17 | 15 | 1.08 | |
1989 | 16 | 53⅓ | 0 | 1 | 0 | - | 0.000 | 4.73 | 54 | 7 | 22 | 19 | 30 | 28 | 1.39 | |
KBO 통산 (8시즌) | 197 | 599⅔ | 18 | 29 | 18 | - | 0.383 | 3.75 | 599 | 32 | 244 | 238 | 306 | 250 | 1.35 |
완투, 완봉 기록 | ||
연도 | 완투 | 완봉 |
1982년 | 2완투 | 0완봉 |
1983년 | 1완투 | 0완봉 |
1984년 | 1완투 | 1완봉[노히트노런] |
통산 | 4완투 | 1완봉 |
7. 관련 문서
[1] 초등학교, 고등학교, 프로팀 입단 동기다. 중학교(방수원 동성중, 이상윤 동신중)와 대학교(방수원 영남대, 이상윤 한양대) 때만 헤어져 있었다.[2] 김일권은 국가대표팀 영구제명, 아마추어 자격 박탈 등의 징계를 받고 해태행을 확정지었다.[3] 당시 초미니 선수단을 꾸렸던 해태에는 투수가 고작 6명에 불과했는데 이상윤과 신태중은 제구력에 문제가 있었고 김용남과 강만식은 컨디션이 나빴으며 김성한은 타격을 해야 했다. 결국 별 수 없다고 생각한 김동엽 감독이 그나마 제구가 괜찮은 방수원을 역사적인 창단 1호 선발투수로 내보냈다. 그러나 1회말 아웃 카운트를 단 한 개도 잡지 못하며 난타를 당했고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롯데의 선발 투수였던 노상수는 6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며 팀의 첫 승을 따냈다.[4] 선동열 다음으로 팀 내 2위.[5] 홀드 제도가 늦게 도입된 것이 아쉬운 대표적 선수로는 송유석과 차명석이 있다.[6] 하술하겠지만 이 기간중 긴급구조 119에 사고 목격자로 등장하기도 했다.[7] 최향남이 2군에 있을 시절 인자하신 선배님이었다고 덧붙였다.[8] 방수원이 회고하기로는 선동열과 동기였던 포수였다고 한다.[9] 불암콩콩코믹스에서는 김병현이 군인에게 법규를 시전하는 걸로 묘사된다.[10] 한 타자만 잡으면 세이브 기록이 눈앞이라 그랬다고. 2루까지 도망갔다고 한다. 김응용은 너무 창피해서 다음부턴 투수교체 때 유남호 코치나 김인식 코치 등 투수코치를 올리고 본인은 마운드에 잘 안올라갔다고 한다. 그래도 나이가 들면서 당시에는 이기는 것에만 몰두했지 선수 개인기록을 챙겨주지 못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자신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 듯.[11] 김성한과 김종모가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방수원이 잘 던지는 상황이라 관중석에 수많은 관중들도 목소리를 높여 강판하지 말라고 외치는 바람에 천하의 김응용도 별 수 없이 덕아웃으로 돌아가야했다. 그러나 감독으로 권위가 무너졌다 생각한 코감독이 열받아 살인예고(코감독 : 너 이 개xx 덕아웃에 들어가있어.)를 하자 그걸 듣고 겁이 난 방수원이 기회를 틈타 경기장 밖으로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코감독 : 이 xx 어디갔어?)[12] 김응용 감독이 한대화와 방수원을 자리로 불러서 '감독직을 내려놓고 야인으로 살면서 과거를 돌아보니 감독 당시에는 왜 그렇게 이기는 것만 생각하고, 선수들이나 코칭스태프들의 마음은 생각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말을 하자 방수원은 가슴에 응어리졌던 게 눈녹듯이 녹아내렸고 마치 40년간 징역을 살다가 풀려난 기분이었다고 말했다.[13] 과거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는 승환으로 나왔으나 2021년 10월 30일 공개된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해 방승원이었다고 밝혔다.[14]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나온 본인의 인터뷰에서는 산불이 나서 자신의 초등학교 입학 원서가 불타 있었는데 그 때 동생의 것을 대신 썼다고 밝혔다.[15] 방수원은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어린이들이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본인을 그렇게 불렀겠냐고 웃어넘겼다.[16] 태평양 돌핀스에서 두배의 연봉을 제시 받았다고 한다.[17] 김일권이 당시 몸담았던 태평양은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부터 만년 꼴찌였다. 선수 말년이던 1989년에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하는 돌풍을 일으켰으나 그 해 뿐이었다.[18] 김일권은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모두 겸비했는데 늘 항상 선수들의 선두에 서서 구단과 맞서며 선수들의 권익 보호에 힘썼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선수였다. 참고로 해태의 2~5대 군기반장은 김성한, 이순철, 송유석, 이호성으로 이어진다.[19] 김병현 선수생활 문서 참조.[20] 신고된 시각은 새벽 3시 40분경.[21] 사고 당사자는 MBC 서프라이즈 배우 최윤준이, 방수원의 대역은 정종현이 연기했다. 에피소드 말미에 광주서부소방서의 오성록 구급대원이 지나친 음주가 얼마나 어이없는 결과를 초래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고사례였음을 말해주었다.[22] 바로 전날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무등경기장을 찾았다.[23] 훗날 김진우는 심판을 찾아가 '아무리 생각해도 볼이었는데 왜 스트라이크로 선언하였습니까?라고 묻자 '아야! 경기 3시간동안 심판하고 있으믄 나도 멍해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 심판들이 선수들의 선배였던지라 나이가 많아서 체력적으로 무리가 왔던 것.[노히트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