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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엽(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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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엽
金東燁 | Kim Dong-Yub
출생 1938년 10월 26일
사망 1997년 4월 10일 (향년 58세)
학력 경복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투타 우투우타
포지션 2루수
소속팀 한국전력 (1961~1963)
지도자 성무 야구단 감독 (1974)
롯데 자이언트 감독 (1975~1977)
성균관대학교 감독 (1978)
한양대학교 감독 (1978~1981)
해태 타이거즈 감독 (1982)
MBC 청룡 감독 (1983, 1985~1987)
1. 개요2. 유년 시절3. 선수 시절4. 심판 시절5. 지도자 시절6. 해설자, 방송인 시절7. 기타 경력8. 사망9. 불꽃같은 쇼맨십10. 김성근과의 비교11. 일화12.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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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에미, 거 나 참 저 도루가 어드러케[1] 세이프네? 턱무하지[2] 않간?
아니 기보다 이심판, 오늘 껨 끝나고 뭐하네? 거이 노가리에 쏘주나 한잔 하자우야.
머이 어드래? 아니 기럼 노가리 말고 내 삼겹살 한번 사갔서! 거 박심판도 같이 데려 오라우.
어, 어, 기래! 기럼 거 오비(맥주)까지 한번 까자우 기래!
(제기랄, 거 참 저 도루가 어떻게 세이프냐? 너무하지 않아?
아니 그보다 이심판, 오늘 게임 끝나고 뭐해? 거 노가리에 소주나 한잔 하자.
뭐가 어째? 아니 그럼 노가리 말고 내 삼겹살이나 한번 살게! 거 박심판도 같이 데려와.
어, 어, 그래! 그럼 뭐 오비까지 한잔 까자 그래!)
실제로 김동엽의 항의는 경기 상황에 대한 어필보다는 심판과의 잡담이 주된 내용이었다.
대한민국의 야구인. 지도자 시절에는 1971년 건국대 감독을 시작으로 1987년 MBC 청룡 감독에서 물러날 때 까지 무려 13번의 모가지를 당한 파란만장한 감독 생활로도 유명했다.

별명은 위 자료사진과 같이 '빨간 장갑의 마술사'였다. 또한. "1938년에 태어나 전쟁통에 38선을 넘어온 38 따라지" 라는 의미로 등번호는 38번을 애용했다.[3]

2. 유년 시절

1938년 10월 26일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4]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싯적에 야구선수로 활약한 적이 있다. 그러나 부모님이 이런 저런 사정으로 김동엽과 떨어져 있게 되어 김동엽은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는데, 할아버지가 손자를 끔찍이도 예뻐했다고 한다. 힘이 장사였던 할아버지가 겨울에 직접 노루를 잡아와서는 목을 따서 나오는 피를 바가지에 받아 "몸에 좋은거니 전부 마셔야 한다"면서 뜨끈한 노루피를 억지로 먹였는데, 어린 김동엽이 겁에 질려 안먹고 버티자 할아버지가 몽둥이를 들고 "이놈! 어서 먹지 못하갔네?"라고 꾸짖어서 강제로 먹였다고 한다.[5] 그 외 산삼이니 녹용이니 어릴 적부터 몸에 좋다는 건 다 할아버지가 구해와서 손자에게 먹였고, 덕분에 김동엽은 예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젊은이와의 주먹 다짐에도 절대 밀리지 않는 강골과 완력을 갖게 되었다. 싸움에서는 밀리지 않다 못해 진 적이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문제는 이기는 것 까진 좋은데 상대방이 부상을 입을 만큼 크게 이기는 점이 비일비재 했다는 것이…[6]

3. 선수 시절

6.25 전쟁이 터지자 김동엽은 할아버지와 헤어져 부모님을 따라 월남했고, 피난지인 부산의 토성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하여 경복고등학교[7]성균관대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 어깨 부상으로 인해 잠시 야구를 그만두고 폭력 조직의 말단 대원으로 뛴 경력이 있는데, 이 당시 싸움판에서 턱과 치아를 크게 다치는 바람에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치아가 좋지 않아 고생했다고 한다.고등학교 당시 일화

이후 마음을 고쳐먹고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에 시험을 쳐서[8][9] 들어갔다가 같은 학교를 다니던 야구 선배의 권유를 받고 다시 야구를 시작하여 2루수로 제법 활약을 보였다.[10] 대학 졸업 후 한국전력에서 선수로 뛰었으나 폭행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1963년에 퇴단당했는데, 그 이유는 휴가를 받아 저녁에 동료와 외출을 나갔다가 폭력배들과 시비가 붙었고 완력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김동엽이 완승을 거두었으나 상대방 중 한명이 쇄골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는 바람에 쇠고랑을 찰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결국 어찌어찌 회사에서 무마를 시켰지만 그 대가로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한편으로 폭행사건으로 곤혹을 겪던 김동엽이 경찰에서 풀려난 데에는 한전 코치 어우홍의 형이자 당시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어인영[11]이 뒤에서 손을 써준 덕도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어우홍은 김동엽과 팀내 사제지간이었지만 서로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았고, 김동엽을 한전에서 쫓아내는 데 앞장선 이가 바로 어우홍이었다.

한전에서 잘린 후, 당시 한전 감독이던 김계현의 주선으로 조흥은행에 이적했지만 입단 직전에 조흥은행 광교 본사가 대형 화재로 잿더미가 되는 바람에 회사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고, 이 와중에 운동부를 운영할 여력이 없다며 야구부와 여자 농구부를 해체시켜 버리는 바람에[12] 어쩔 수 없이 바로 은퇴하고 말았다.

4. 심판 시절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지도자로 바로 가지 못하고, 대한야구협회 심판으로 활동했다. 이 당시 특기할 만한 일은 1963년[13] 제5회 아시아야구 선수권대회에 심판으로 출장, 일본팀에 대한 극심한 편파 판정을 하여 한국팀의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대회는 한국·일본·필리핀·대만 4개국이 참가했는데, 당시 한국 야구협회는 홈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꼭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심판들에게 일본팀을 집중적으로 견제하라고 지시했고, 일본전 주심을 맡은 김동엽은 스트라이크/볼을 엉터리로 판정한 끝에 일본팀의 멘탈을 나가게 하여 한국이 우승할 수 있도록 공을 세웠다 카더라.

여기서 또 다른 에피소드로, 당시 한국일보 체육부 소속 오도광[14] 기자가 김동엽의 편파 판정에 대해 "치졸한 애국심"이라는 타이틀로 그를 호되게 비판하는 기사를 올린 적이 있었다. 당시 오 기자는 김동엽과 친한 것도, 그렇다고 서로 으르렁대던 것도 아닌 그냥 살짝 면식만 있던 정도였고 김동엽에 대한 기사를 올린 사실조차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수십년이 지난 후 오 기자의 사위가 "김동엽이란 양반이 쓴 회고록(후술할 그래 짤라라 짤라)에 장인어른 얘기가 있더라"고 전하여 그 책을 읽어 보니 "그래도 오도광 기자는 냉정함을 잃지 않고 중립적인 시각으로 비판할 줄 아는 기자 정신의 소유자였다"라며 오 기자를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아무튼 오 기자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사람에게 호의적인 평을 들어서 기분은 흡족했다고 한다.

5. 지도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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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해설자, 방송인 시절

지도자 생활 외에도 특유의 입심을 앞세워 프로야구 출범 이전 TBC, KBS 등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도 맹활약 했고, 1980년 4월부터 1982년 1월까지 MBC 라디오 '홈런출발 김동엽입니다'의 진행을 맡아 MBC 라디오의 아침시간대 청취율을 끌어올리기도 했다. 그가 당대 최고의 여자 진행자로 인기를 끌었던 왕영은과 함께 진행했던[15] '홈런출발'은 매일 아침 7시 20분부터 7시 50분까지 방송한 프로그램으로 시사 문제부터 스포츠·문화계 소식까지 조간 신문에 나온 각종 이야기들을 시원하게 정리하는 시사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당시 상당한 인기를 모으면서 동 시간대 라디오 청취율 1위를 거머쥐었고 1994년에 폐지됐다.[16]

MBC 청룡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 이후 1988년 2월 KBS 제2라디오 <김동엽의 스포츠쇼(구 88스포츠쇼)> 진행을 맡았다가 1992년 시즌부터 프로야구 중계를 시작한 SBS에서 야구 해설가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4년 시즌 도중 야구 선수들의 병역 문제를 건드리는 설화를 일으켜 중도 하차하였다. 정확히는 프로야구 선수들이 군대에 가면 실력이 퇴화하니 군대에 안 가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이건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로 봐도 큰 오버였다. SBS에서 잘린 이후에는 1995년 5월 개국한 대구방송에서 1995시즌 1시즌만 해설을 맡았고 이것이 그의 생전 마지막 해설위원 활동이 되었다.

호불호가 확실하긴 했지만 해설가로서의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17] 원래부터 TV나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를 맡을 정도로 입담이 출중하기도 했고, 당시에는 감독 출신 해설가가 드물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선수들을 지휘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상황 설명 또는 예측이나 데이터 분석, 그리고 야구 전문가만의 지식을 일반 야구팬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주는 능력이 뛰어났다. 프로 감독으로서의 성과가 그다지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김동엽은 빠따로 상징되는 특유의 강압적인 지도 방식만 있는게 아니라, 나름대로 스포츠 과학이나 야구 이론에 대해 상당 수준의 지식을 보유했다는 것을 그의 해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사실 상술된 구보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세간의 인식처럼 무식한 야구인은 아니었던 셈.[18][19] 하일성은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예측하는 자신의 해설 스타일을 수립하는데 큰 영향을 준 인물로 김동엽을 꼽기도 했다.

7. 기타 경력

1981년 해태산업의 대중 양주 나폴레온 광고에 출연한 바 있다.링크.[20]

한편으로 빨간장갑 야구단이라는 독립 야구단을 만들어 2010년대의 고양 원더스처럼 프로야구에서 퇴출된 선수들을 모아 지옥훈련을 통해 다시 재활시킨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재정 문제 등으로 흐지부지 되어버린 일도 있다.

이후 예능 프로의 패널로 나오거나 1995년 3월 13일 SBS 주간시트콤 <두 형사> '빨간장갑의 비애' 편에 출연하면서 탤런트로 전업하여 후속작인 <형사5[21]>에 형사반장 김자풍 역으로 고정출연하는 등, 인생 말년에 상당한 굴곡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그 외에 기업체 강사[22], 방송계에서 리포터 등으로 활동하였다.
파일:DJ_DY.jpg
1995년 10월 15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OB 베어스 vs 롯데 자이언츠와의 한국시리즈 2차전 때 직관을 온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김대중, 이희호 부부와 함께.[23] 경기종료까지 줄곧 옆에서 경기 상황을 해설해 줬다고 한다.김대중 전 대통령과 상당한 친분관계가 있었고 1992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정계입문 언급도 나왔으나 결국은 1997년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995년 말 현대 유니콘스의 창단 감독으로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 이전부터 적립해온 지도자로서의 부정적인 평가 때문에 무산되었다(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김재박이 감독으로 취임). 당시 김동엽은 MBC 토크쇼 <김한길과 사람들>에 출연하여 "8년 동안 절치부심 하면서 기다렸다. (그라운드로)꼭 돌아갈 것"이라고 다짐을 남기기도 했다.

8. 사망

파일:김동엽_부고.jpg
김동엽의 부고 기사(경향신문 1997년 4월 11일 자)
1997년 3월 해태 타이거즈의 고문으로 복귀하였고 프로야구 정보관련 유료전화 사업을 준비하다가, 시즌 개막을 불과 며칠 앞둔 그해 4월 10일 혼자 기거하던 용산구 한남동의 독신자 아파트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면서[24] 마지막까지 세간에 큰 충격을 남기고 향년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동엽은 죽기 몇 해 전부터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이후[25]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지경에 처하는 등 상당히 어려운 말년을 지냈고 후배들에게도 종종 손을 벌리는 등 초라한 몰골을 비추기도 했지만, 그래도 항상 호탕한 웃음을 잃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고 한다. 가끔 호텔 등지에 출입해 오랜 시간을 머무르며 손님들에게 입담 퍼레이드를 펼치는데, 얘기가 워낙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일화도 있다. 운동 마치고 나가려는데 웬 덩치좋은 양반이 카운터에 서 있다면 틀림없이 김동엽이었다고.

김동엽이 세상을 떠난지 7개월 후, 그와 친분이 있었던 정치인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9. 불꽃같은 쇼맨십

생전의 김동엽은 누구보다도 쇼맨십을 즐기던 야구인이었다. 심판 시절 누구보다도 크고 요란한 판정 동작과 아웃당한 주자를 손가락으로 집어내는 듯한 제스쳐로 관중들을 포복절도 시키기도 했고, 감독이 되어서도 경기 때 직접 3루 주루코치로 나가 작전을 구사하거나, 무용을 하는 듯한 현란한 작전지시, 여성관중을 위한 팬서비스로 엉덩이에 타월을 집어넣고 일부러 두툼하게 만들어 실룩실룩 흔드는 등의 기행을 보였으며, 타자들이 끼는 빨간 배팅용 장갑을 끼고[26] 심판을 향해 일부러 크게 삿대질을 하되 실제 대화는 소위 '노가리'를 까는 등의 행동을 했다. 관중들의 즐거움을 위해 김동엽 본인 스스로 망가진 셈이나 다름 없었다.
파일:external/www.koreadaily.com/192653817.jpg
한번은 경기 중에 별것 아닌 판정이었는데, 김동엽 감독님이 더그아웃에서부터 2루심이 있는 곳까지 부리나케 달려 나오시더라고요.
그때 2루심이 김옥경 심판이셨는데, 두 분이 친하거든. 그런데 김 감독님이 달려나와서 뒷짐을 지고 배를 막 들이대는데, 김옥경 심판이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아, 왜 나왔어?" 하니까, 김동엽 감독님이 "오늘 중계 있잖네?"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날 중계가 없는 날이었거든. 그래서 김옥경 심판이 "오늘 중계 없어." 하니까 "아, 기래?" 하시더니 그냥 얌전히 들어가시더라고요.
그분은 심판에게 항의하는 것도 하나의 쇼였어요.
김용수

심지어 경기 전 심판을 만나 "야! 오늘은 한 10분 정도 나와 있을테니 준비하고 있으라우!!"라고 미리 통지하는 경우도 수두룩 했다. 그러고는 경기 중 그라운드로 튀어나와 특유의 빨간 장갑을 낀 현란한 손짓으로 심판에게 다가가 눈을 부릅뜨고 삿대질을 해대며 "오늘 날씨가 왜 이리 좋아? 덥지 않간? 오늘 끝나고 뭐해? 한잔 까네?" 이렇게 10분씩 떠들고 내려가곤 했다고...가끔 TV 중계가 있는 날이면 사전 통지 없이 "나랑 5분만 얘기 좀 하자"면서 뜬금없이 그라운드로 나오는 일도 있었고, 그러면 상대 심판은 "형님, 이 선 넘어오지 말고 5분만 떠들다 가쇼. 5분 넘기면 퇴장이유!"라고 경고(?)하면서 홈 플레이트에 발로 금을 그어놓고 김동엽의 대거리를 받아주었다. 지금 같으면 경기지연 행위로 경고를 먹을 만하겠지만 이것도 어찌보면 당시 야구판의 낭만이었는듯 하다.[27]

이렇듯 항의라고 한 것 대부분이 심판과의 노가리였고 정해놓은 항의 시간은 칼 같이 지켰던데다 본인도 심판 출신이라 어떤 선을 넘으면 퇴장을 당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는지라, 프로 감독으로 활동하는 동안 그 격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퇴장은 단 한 번도 당하지 않았다.[28]
파일:external/www.interview365.com/20087239583265361.jpg
이런 식으로 심판들과 항의를 즐겼다. 눈을 부릅뜨면서 손가락은 심판과 그라운드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지만 입으로는 실제 판정에 대한 약간의 어필과 별 영양가 없는 야 오늘 경기 끝나고 소주나 한잔 하자우야 라는 식의 수다를 떨고 있던 것이었다.
파일:external/i2.media.daumcdn.net/20110330181141.466.gif
아킬레스건 부상을 입고도 목발을 짚고 나와서 항의한다.
3루 코치로 나왔다가 주자가 횡사하자 아예 그라운드에 엎어져 대성 통곡을 하는 퍼포먼스를 보이거나 (주자는 이광은[29]) 눕동님???
파일:attachment/김동엽/12.jpg
1986년 시즌 중[30] 경기 전 이벤트에서 김용수를 데리고 나와 치어리더와 함께 아쌀하게 거시기한 춤을 추는 등등...[31][32]

이와 같이 많은 팬들을 김동엽 특유의 쇼맨십으로 즐겁게 해주곤 했다.[33][34] 한마디로 스스로 망가지며 권위를 무너뜨린 것인데, 권위주의가 많이 탈피된 현대 시대에는 매우 진보적인 모습으로 보여지지만, 지금과는 달리 권위주의가 팽배했던 시절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김동엽은 이와 같은 스스로를 낮춰가며 권위를 무너뜨린 모습 때문에 팬들과 선수단 모두에게 외면당했다. 선수들 입장에서는 우스운 모습을 보였다고해도 딱히 체벌을 안가한것도 아니고 말이다. MBC 감독 말엽에는 아예 프런트가 미즈타니를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선수단은 김동엽을 투명인간 취급했다는, 요즘 말로 치자면 김동엽을 기수열외 시켰다는 설도 파다했다. 이 점은 아래 비교 대상이 된 김성근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면인데, 김성근은(선수와 스스럼없이 어울리던 이만수를 겨냥하여) "선수와 감독이 농담을 하는 것이 훈훈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정도로 권위가 없어지면) 그 팀은 망한다"고 주장한 바 있을 정도로, 감독의 권위를 중시했고 선수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한창 승승장구하던 SK 시절조차 이겨도 거의 기쁜 모습을 안보였을 정도다. 그렇게 야금 야금 투수 생명을 갉아먹었다

또한 방송계에서도 특유의 입담을 과시하며 야구 해설은 물론《홈런출발》, 《김동엽과 함께》 등의 라디오, TV프로 진행자를 맡기도 했고, 각종 연예프로나 드라마 출연에 당시 프로야구 감독으로는 드물게 CF를 여러 편 찍을 정도로 상당한 국민적 인지도를 자랑했다.[35][36]

10. 김성근과의 비교

김동엽 특유의 강압적이며 과도한 훈련과 스포츠 과학은 안중에도 없는 근성 강조, 프런트와의 잦은 마찰 등은 바로 김성근의 특징이기도 하다.[37] 1970년대 아마야구 시절 명장 소리를 들었던 그가 1982년 이후 프로에서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한 것도 그의 야구관이 1970년대 수준에 머물러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김동엽은 김성근보다 언플이 서툴렀고, 지나치게 술을 좋아한 데다가 다혈질이어서 김성근보다 자기 관리, 인맥관리에 철저하지 못했으며, 야구계에서 자신만의 사람들, 이른바 '사단'을 형성하는데도 서툴렀다. 김동엽을 따르는 야구인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특유의 성격 탓에 그만큼 적(敵)도 많았다. 김동엽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좋게 봐도 50대 50 정도였다.

더구나 김동엽은 해태의 초대 감독 시절 조창수, 유남호 코치와 마찰을 일으킨 끝에 13경기 만에 경질당했고, MBC 청룡을 지휘할 때에도 코치를 구타하는 사건 등으로 인심을 잃은 통에 팀 내 고참급 선수들이 노골적으로 항명하는 모습을 보인 데다가, MBC의 프런트마저 김동엽의 재신임에 대해 고참 선수들의 의견을 참고했을 정도였다.[38] 반면 김성근의 경우 프런트와의 사이가 매끄럽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김동엽보다는 신사적인 모습을 보였고, 2002년 시즌 후 LG 트윈스 감독직에서 해임될 당시에는 대부분의 LG 선수들이 프런트에 항의를 표시할 정도로 선수들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쌓아놓은 면도 있었다. 사실 김동엽과 같이 술고래에 다혈질이고 자기 관리가 안되는 인물이 비단 야구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회 내의 그 어느 분야에서도 아랫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 힘든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결국 그러한 특성으로 인해 김성근만큼 프로야구계에서 장수하는 데 실패하면서 1987년 시즌 도중 MBC 청룡 감독 직에서 떨려난 이후 어떤 구단도 그를 불러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김동엽식 야구는 1980년대를 끝으로 더 이상 볼 일이 없었고, 결국 김동엽은 파란만장한 삶만 남긴 채 59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반면 김성근의 경우, 프로 감독이 되어서도 아마야구 시절 자신만의 야구 스타일을 계속 고집했고, 1990~2000년대 초반까지는 팀을 플레이오프까지 진출시키기는 성과를 만들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우승을 달성하지 못하고 김동엽처럼 여러 구단을 전전해야 했다. 그러나 김성근은 언론계 인맥을 잘 구축했고, 이런 인맥을 활용하여 언론을 통해 야구팬을 포함한 대중에게 감동을 줄 만한 어록을 푸는 등, 언플 능력 하나만큼은 탁월했다. 또한 프런트와의 사이는 좋지 않았어도 소속팀 구단주를 비롯한 최고위층과의 관계는 원만했던 데다가[39] 다시 사령탑에 오를 기회를 잡는 실력은 김동엽보다 훨씬 우월했다. 김성근이 설령 프런트와의 마찰로 인하여 유니폼을 벗더라도 앞서 서술한 특유의 언플 능력으로 자신은 프런트의 전횡에 당한 것 뿐이고, 모든 잘못은 프런트에 있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잘 포장하곤 했다. 이 때문에 2010년대까지 계속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물론 SK 와이번스를 지휘한 5시즌 동안 우승 3회에 모든 시즌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이끌어 냈으니 김성근을 아주 무능한 감독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겠지만, 1970~1980년대식의 야구 스타일로 2010년대까지 버틸 수는 없던 노릇이었고, 결국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김성근 야구의 폐단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김동엽처럼 영 좋지 못한 모습으로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논란이 많았던 인물이긴 해도 김성근의 생애 마지막 장면까지 김동엽처럼 비극적이어선 절대로 안될 일이지만, 김성근은 고양 원더스 감독 재임 시절 틈틈히 김동엽처럼 기업체 강사로 나서곤 했는데, 그 당시 납부한 연간 소득세만 3억원이 넘었다고 알려져 있다. 즉 강사료만 거의 10억원 가까이 번 셈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그동안 지도자 생활로 벌어놓은 것까지 감안하면 재력 만큼은 건재할 것이며, 게다가 70대 노인같지 않은 체력과 몸매, 그리고 60대 부터 장족의 발전을 보인 패션 감각으로 미뤄볼 때 자신의 이미지와 실제 몸관리 하나는 철저한 양반이기 때문에 김성근은 김동엽처럼 독거노인[40]으로 쓸쓸한 말년을 보낼 일은 없을 듯 싶다. 거기다 부동산도 100억대 대박이 터지기도 했고 경질 이후에도 간간이 얼굴을 비추다가 소프트뱅크의 코치 어드바이저로 선임되고 소프트뱅크를 떠난 뒤에도 최강야구에 감독으로 선임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주변에서 그에 대한 러브콜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반해 김동엽은 물론 자신의 귀책 사유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딱히 본인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책임을 굳이 피하려 들지 않고 사표를 내던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아마야구 시절에도 종종 그랬었고, 특히 1983년 한국시리즈 당시 MBC 청룡해태 타이거즈에게 1무 4패로 무기력하게 참패하며 취임 6개월만에 해고 당했을 때에도, 구단 수뇌부가 보너스 지급 거부로 인하여 시리즈 직전 팀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었음에도 모든 책임을 지휘부실이란 명목으로 김동엽에게 전부 뒤집어 씌웠다. 사실 어떤 일에 대해 변명하거나 돌려 말하는 건 질색을 하던 김동엽 특유의 직설적인 성격 탓도 있겠지만... 게다가 1987년 당시 김동엽은 MBC 프런트에 의해 일본인 투수 코치 미즈타니 히사노부에게 투수 기용권을 포함하여 상당한 선수단 운영 권한을 넘긴 상태였음에도 프런트는 전적으로 성적 부진에 대하여 김동엽에게만 책임을 물었다. 김동엽과 미즈타니의 능력 유무는 차치하더라도, 이렇듯 지휘권을 반으로 갈라 놓은 팀이 잘 돌아갈 리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미즈타니가 일본에서의 선수 시절 인지도는 높지 않았지만 당시 한국보다 훨씬 높은 일본의 야구 수준을 바탕으로 한 코칭 스킬이나 경기운용 능력 만큼은 한국인 지도자들 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러나, 지휘권이 이원화되어있고 프런트의 노골적인 불신임을 받아 김동엽이 제대로 된 리더쉽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1987년 전기 리그의 성적 부진의 책임을 전부 김동엽에게 물은 것은 분명 프런트의 무리수였다. 김동엽이 중도해임 당하고 그 해 후기리그 부터 수석 코치이던 유백만이 감독 권한대행으로 선수단을 이끌었지만, 여전히 미즈타니는 실질적인 감독 역할을 유지했고 김동엽에 비하면 훨씬 유한 성격인 유백만은 미즈타니에 대해 딱히 불만 없이 어느 정도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며 MBC는 후기리그 초반 2위까지 오르는 등 성과를 올리는 듯 했으나 이후 다시 부진의 늪에 빠지면서 4위로 후기리그를 마감하며 또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MBC가 차라리 당시 김동엽을 1986년 시즌 후에 해임하고 미즈타니를 감독으로 세웠으면 이런 어색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겠지만(아래에 설명한, 삼성 감독에서 물러난 김영덕 영입을 걷어차버린 탓도 있긴 하다.), 당시만 해도 일본에 대한 감정이(현재도 좋지 않지만) 지금보다도 극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롯데 자이언츠도위창조차도 실업 롯데 시절부터 헌신적으로 코치직을 수행했고, 강병철, 김진영 감독이 해임된 이후 여러번 감독 물망에도 올랐지만 국민 감정상, 그리고 국내 야구인들의 반발로 인하여 도저히 불가능 했다. 사실 미즈타니에 대한 디스도 대체로 국내야구인발이었다. 신용균 같은 재일교포 지도자들도 일부 국내 야구인들은 상당히 안좋게 보곤 했다. 비슷한 케이스인 재일교포였던 김성근, 김영덕은 완전 귀국했고, 한국에서 가정을 꾸리는 등, 한국 야구인들에게 여러모로 거부감이 덜했지만, 신용균은 가족이 일본에 살았기 때문에(부인이 일본인이라는 설도 있다.)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으로 재직할시에도 스포츠신문에 상당히 부정적인 기사가 도배했고, 결과적으로 1년만에 감독직을 사임하고 그 이후로 프로팀 1군 감독에 나서지 못했다. 만약 당시 김동엽이 김성근 같은 성격이었다면, 언론을 이용하여 미즈타니와 프런트의 전횡[41], 그리고 자신의 입지를 폭로하며 희생양이 되었음을 강조했을 것이다. 실제로 김성근은 2011년 시즌 도중 SK 와이번스 감독 직에서 물러나는 과정에서 SK 프런트가 후임 감독으로 내정해 둔 이만수패륜아로 매도하는 투로 발언했고, 이에 야구팬들은 김성근을 인천 예수로, 이만수를 이스카리옷 유다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김성근 또한 김동엽처럼 1980년대에 퇴출되었어야 할 야구관을 가졌지만, 갖은 언플 및 무리수에 의하여 2010년대 중후반까지 커리어를 연장할 수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실 이런 철권통치 스타일의 감독들은 이제 더 이상 프로야구계에 발붙이기 힘들게 되었다. 지금이 1960~1980년대와 같은 군사정권에 의한 강압적인 분위기도 아니고 민주주의적 사회에서 성장한 선수들을 이러한 식으로 장악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설령 장악한 듯 싶더라도 강압적이고 타율적인 플레이로는 좋은 성적을 거둘래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빙그레 이글스 창단 감독과 MBC 청룡의 감독을 역임한 배성서도 아마야구 시절의 스파르타 식으로 팀을 지휘하다가 1989년 시즌을 끝으로 야구계를 떠나야 했고, 근래에 들어서는 이광은이 2000~2001년 시즌 초반까지 LG 트윈스를 김동엽 식으로 이끌면서 2000년엔 플레이오프 진출로 나름 성과를 거두긴 했으나 이듬해 바로 부작용이 터지면서 시즌 초반 9승 25패로 성적만 폭망하고 해임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근데 이광은의 후임 감독이 김성근이었다는게 함정이다. 하지만 김성근의 LG 감독 시절은 이상훈의 헤어 스타일 관련 담판 일화로 알 수 있듯, 이광은이나 이순철 시절보다 오히려 어느 정도는 선수들의 자율권을 존중해 주던 상황이었다. 김응룡처럼 엄격하긴 했으나 의외로 야구를 잘하는 선수라면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것일지도. 프로야구 선수들은 성인이고, 고교 시절, 길게는 대학 시절을 거치며 지도자로부터 배울 만한 기술은 거의 다 배웠다고 봐야 한다. 즉, 더 이상의 성장은 스승의 가르침이나 강제가 아니라 본인의 의지나 창의성, 그리고 각성에 달려 있는 것. 프로의 명 감독은 프런트로부터 주어진 전력을 최적으로 조합하고 활용하여 최대의 효과를 내는 것이지, 아마에서처럼 선수들을 가르쳐 성장시키거나 혹은 포텐을 터트려 주는게 아니다. 김성근처럼 이미 기술적으로 완성이 끝난 선수들을 살인 펑고, 지옥 특타, 특투로 굴려봤자 체력만 방전될 뿐 기술적으로 더 나아질 리 없고 본 게임에서 집중력 저하만 부를 뿐이다. 이는 한화 시절 그의 재임 기간 중에 명백히 드러나 버렸고, 후임 지도자들이 죄없이 고생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사람 좋으면 꼴찌 라는 야구계 격언도 이제는 서서히 옛말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이것은 김동엽-김성근만의 문제라기보다는 당대 스포츠인들, 더 나아가 그 당시를 살아온 대부분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그런식이었다. 당시 명감독, 명코치라고 추앙받던 사람들, 즉 축구의 박종환, 농구의 최희암, 여자배구의 김철용, 아시안게임 금메달 리스트인 임춘애를 키워낸 김번일 등등은 욕설과 빠따질, 그리고 근성을 극한으로 강조하는 지옥훈련으로 선수들을 자기 생각은 전혀 없이 시키는대로만 하는 운동기계로 만들어서 좋은 성적을 낸 것이다. 선수들 자신들도 타율에 길들여져 있어서 자유를 주면 방종으로 흘렀기 때문에, 저런식의 지도가 더 먹혀들어간 면도 있었다. 유재학 모비스 감독의 청테이프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분위기는 현재도 스포츠계에 만연해 있는게 현실이다. 그나마 프로야구는 대중의 관심이 쏠리기 때문에 많이 달라지고 있지만, 여타 종목들 특히 올림픽/아시안게임 금메달에만 의존하는 소위 비인기종목[42]들은 아직도 1980년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바람직하다고 간주되던 방식이었고, 효과도 상당히 있었던 검증된 방식이었다. 김성근-김동엽을 비판하기 전에 당대의 그런 현실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밑에서 다시 하술하겠지만 공통분모가 많았던 만큼 김동엽과 김성근은 상당히 친한 사이였다.

11. 일화

사단은 경기 후 선수단이 단골로 이용하던 강남의 사우나에서 터졌는데,[48] 송영운이 목욕탕에서 동료와 샤워를 하면서 "아까 그거 안맞은건데 쇼한거임. 나 연기 좀 짱인듯?"이라고 실토하며 키득대던 중, 밖에서 얘기를 들은 김동엽이 벌컥 목욕탕으로 뛰어들어 와서는 "이 멍청한 놈, 그걸 자랑이라고 하냐!"라고 노발대발 하며 송영운을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 팼다고 한다.
그런데 고 이종남 기자의 저서 사람 좋으면 꼴찌에 기재된 내용은 좀 다르다. 당시 사구로 1루에 출루한 송영운이 1루 코치로 나와있던 김동엽에게 "감독님 저 사실은 안맞았어요 히히히"라고 귀띔하자 김동엽은 순간 혀를 콱 깨물고 싶은 심정이 되었고, 경기 종료 후 사우나에서 김동엽이 송영운을 불러 말하기를,
김동엽: 이보라우, 타자가 투구에 맞으면 볼데드야 인플레이야?
송영운: 볼데드죠.
김동엽: 기럼 투구가 뒤로 빠지면?
송영운: 당연히 인플레이죠.
김동엽: 알긴 아는구만! 기러믄 말이네, 아까 (3루 주자)김재박이 들어올 수 있간 없간?
송영운 : …???
김동엽의 핀잔에 고개를 갸우뚱 하던 송영운은 30분 후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던 중 "아하, 그랬구나!!"라며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 차렸대나 뭐래나. 아무튼 이후 송영운의 출장 기회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1988년 시즌을 끝으로 송영운은 유니폼을 벗고 말았다(...).
파일:김성근vs김동엽.jpg
식당에서 점심으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던 김동엽 자리에 김성근이 합석하였다.

김성근: 이기지도 못하면서 비싼 것만 드시누만.
김동엽: 그러지 말라우야. 잘 먹어야 이길거 아니가서?
김성근: 고기 먹어봤자 소화도 안될텐데 뭐?
김동엽: 닥치라우, 우린 오늘부터 10연승이야.
김성근: 10연승 좋아하시네. 오늘 내일 우리한테 다 지면 어쩌려고 그러쇼?
김동엽: 그러면 8연승이지.
김성근: 8연승 같은 소리하지 마슈. 모가지에요 모가지!
김동엽: 모가지좀 또 떨어지면 어때. 내레 땅에 떨어진 모가지 주워서 붙이는데 선수잖네. (옆에서 식사 중인 강병철을 가리키며) 는 모가지 떨어져 본 적이 없어서리 서툴겠지만 나야 뭐 수도 없이 붙여보지 않았어? 모래가 묻으면 좀 따끔따끔 하겠지만...
김성근: 그러다 모가지가 거꾸로 붙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김동엽: 더 좋지. 뒤까지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김성근: 좋기도 하겠수. 그럼 MBC가 아니고 CBM 이유.
이 대화가 있은 지 두 달 만에 김동엽은 실제로 모가지가 달아났고, 다시는 현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김성근은 2017년 5월 23일 한화 이글스 감독에서 사퇴하고, 2022년 시즌을 끝으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코치 어드바이저를 그만둘 때 까지 그라운드에 남아 있었다.[49] 그리고 최강야구 감독으로 취임했다... 참고로 저 대화에서 얘라고 불린 강병철 감독은 당시 현장을 떠나 야인으로 지내던 중이었다.[50]

12.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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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떻게의 황해도 방언.[2] 터무니없다, 말도 안된다의 황해도 방언.[3] 삼성 라이온즈 에서 뛰고 있는 동명이인의 손자뻘 김동엽도 특별한 인연은 없는것 같은데 이 등번호를 사용했었다. 그의 아버지인 김상국도 프로야구 선수였는데 현역 시절 등번호는 2번을 사용했다. 김동엽 본인은 SK에 신인으로 입단했을 당시에 남는 번호 중 하나가 38번이라서 별 생각 없이 골랐다고 한다.[4]북한 황해북도(이북5도 기준 황해도) 사리원시.[5] 그러나 살아있는 생물의 피를 섭취하는 것은 득보다는 실이 더 많다. 살아있는 생물의 혈액에는 영양분 외에도 기생충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슴피를 섭취한 임산부가 기생충 감염으로 인하여 사망한 사례도 있다. 아마 김동엽은 운이 좋게도 기생충이 적거나 혹은 없던 노루의 피였던 듯.[6] 후술하겠지만 현역에서 은퇴한 것도 주먹싸움이 화근이었다. 워낙 성격이 다혈질이었던데다, 조폭경력도 있어서 싸움을 하면 당연히 일반인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였다.[7] 33회 졸업생이다. 처음으로 프로 감독을 맡았던 해태 타이거즈의 구단주 박건배 회장이 경복고 후배였다.[8] 체육특기생이 아니라 공부를 해서 들어간 것이다. 즉, 고딩 때 딴짓거리를 하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공부한 결과가 저 정도이니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김동엽이 대입을 준비하던 시절은 본고사 세대라 지금보다 대학 진학률도 떨어졌고 입시정보도 활발하게 공유되지 않았던 시기인데다 그 본고사가 지금의 수능따윈 울고갈 정도로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로 대단한 셈. 게다가 본고사 시절 성균관대는 소위 '후기 서울대'라는 이명이 있을 정도로 입결이 높았다.[9] 허구연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술회하길 본인도 공부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고 야구부원중에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입학자도 있다고 했다. 다만, 허구연은 체육특기자로 고려대에 들어갔음에도 본인이 시험을 쳐서 고려대에 들어갔다는 거짓말을 한 것은 감안해야 한다.[10] 다시 야구를 해보라는 말에 김동엽은 다친 어깨 때문에 자신이 없다고 하자 선배는 "임마 지금 너만큼 쎄칸(세컨드, 2루수) 보는 놈도 없다"라고 설득했다.[11] 훗날 경남신문 편집국장 역임.[12] 그러나 조흥은행은 1967년에 해체된 호남비료 농구단을 인수하여 다시 여자농구계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1970년대 중~후반부터 성적이 하위권으로 주저앉으며 1984년만년필 제조업체로 유명한 빠이롯트에 팀을 매각하고 여자농구와의 인연을 끊었다. 흥미로운 점은 1997년 외환 위기의 여파로 조흥은행을 흡수합병한 신한은행이 현재 WKBL 신한은행 에스버드 구단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신한은행 에스버드의 전신은 현대산업개발 농구단이다.[13] 이 일화를 소개한 중앙일보 1992년 4월 3일자 기사에는 1966년으로 되어 있지만,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63년이 맞다.# 66년에는 대회가 열리지 않았다. 일본은 프로 선발이 아니라 사회인 팀을 내보냈으며(이때는 모든 야구 국제 대회는 아마추어 대회였다.), 이해에 시도대항 야구대회에서 우승한 세키스이 화학공업(積水化学工業)을 보냈다고.[14] 1937~2012. 1958년 한국일보 공채 수습기자 1기로 언론계에 입문하여 1995년 정년퇴직 할 때 까지 스포츠 전문 기자로 활동하며 한국일보와 일간스포츠의 체육부장, 편집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고 대한체육회 이사로도 일했다. 2012년 10월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별세하였다.[15] 성우 송도영도 보조 MC로 출연했었다.[16] 성우 양지운은 1980년대 중반 양용이라는 예명으로 홈런출발 MC를 맡아 청취자들의 인기를 얻기도 했는데, 양용이 양지운이라는 사실을 모르던 사람들은 양지운과 목소리가 닮은 신인 아나운서 내지는 방송인인줄 알았다는 에피소드도 있다.[17] 이 문서에 예시로 나온 김동엽의 말투가 대부분 황해도 방언인지라 오해를 줄 수도 있겠지만 김동엽은 일상과는 다르게 방송에서는 정확한 표준어를 썼다.[18] 예를 들어 김동엽은 경기전 식사의 양이 경기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영양학적이고 스포츠 생리학적인 설명을 해준 적이 있었다. 탄수화물 및 열량에 대한 여러가지 배경지식을 늘어놓은 가운데 그가 내린 결론은 경기전 과식은 절대 안좋다는 것. 이는 대학 체육학과를 나온 사람 아니면 알기 힘든 내용이다. 김성근 같은 경우는 경기전에 두둑히 먹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었다던데, 김동엽은 오히려 이 점에 대해 과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아마도 감독시절 선수들의 경기전 과식을 강력히 제지했을 것이다.[19] 김동엽이 학창시절에 야구를 하다 그만두고 성균관대 영문학과를 특기생이 아닌 시험 쳐서 들어갔던 걸로 추측하건대, 기본적으로 머리는 좋았던 사람이다.[20] 광고 후반에 ‘여봐라!!!’라고 소리치는게 꽤 박력이 있다.[21] 당시 주연 배우는 전영록, 김의성, 임현식, 이훈이었다. 이 드라마는 시청률 저조로 인해 종영됐는데, 당시 상대 프로그램이 KBS2의 '퍼즐특급열차'가 엄청난 인기를 끈 바람에 쓸쓸히 종영됐다.[22] 자기의 경험담을 이야기 하며, 자기처럼 잘리지 말라는 조언을 했다고...[23] 세사람 모두 고인이 되었다.[24] 나중에 사인은 난로의 불완전 연소로 발생한 일산화탄소 중독사로 밝혀졌다.[25] 1991년부터 아내와 별거에 들어갔고(이혼은 안했다.) 자식들과도 거의 왕래가 없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평소 워낙 "음주"+ "도박"을 좋아한 탓에(...해태 감독시절 조창수, 유남호 코치가 잠적한 일도 저 2사람의 항명하는 태도만이 아닌, 고인의 다혈질 모습 역시 원인제공을 했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감독생활 동안 벌어놓은 돈을 탕진한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김동엽은 1980년대 초반 가족과 함께 자주 어린이 대상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가정의 화목함을 과시하기도 했는데...[26] 그의 대표적 별명인 '빨간 장갑의 마술사'는 이 모습에서 비롯됐다.[27] 당시 프로야구는 실업야구와 차별화하기 위해서 일종의 쇼맨쉽을 선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퇴장 당한 감독이나 선수들이 일부러 억울해 하는 리액션을 취해 관중들을 웃겼다는 증언들이 이를 반증한다. 참고로 당시 선수 중에는 이만수김인식 등이 오버액션 컨셉으로 이름 높았다. 또, 이 당시 심판들은 심판복이 양복이었으며, 보호장비는 양복 안에 착용였었다. 참고로, 8, 90년대는 한, 미, 일 프로야구 심판들이 여름빼곤 다 양복입던 시절이었으며, 현재도 미국 프로야구 심판 중에 양복을 입는 심판이 존재한다.[28] 무엇보다 심판들이 김동엽의 노가리에 잘 반응해준 것도 컸다. 김동엽이 프로야구 생기기 전부터 야구 심판을 한 심판계의 선배인 것도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무시하거나 퇴장을 선언하지 않고 김동엽의 노가리에 그런대로 받아주었고, 팬들 역시 이런 노가리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29] 이광은은 MBC 선수 시절 김동엽의 스파르타식 야구는 못따르겠다며 프런트에 트레이드를 요청했다는 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 시즌 LG 감독에 취임한 이광은은 김동엽처럼 스파르타 식으로 팀을 운영하려다 반발했던 선수들의 반 태업으로 이듬해 시즌 도중 김성근 감독대행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유니폼을 벗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장면은 좀 의미심장하다. 김일권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기를 이광은과 본인을 맞트레이드하기로 했으나 막판에 엎어졌다고 한다.[30] 1986년 어린이날 잠실야구장에서는 삼성 라이온즈MBC 청룡이 맞붙은 적이 없다. 삼성이 잠실에서 경기를 치른 것은 맞지만 홈팀이자 상대팀은 MBC가 아니라 OB 베어스였다. 이 사진은 1986년 6월 14일 경기 전 장면이다.[31] 여기서 전광판을 가만히 보면 이만수1번에 가있는 묘한 위화감이 드는 타선이 보이는데 김영덕 감독이 이만수의 기록 달성을 위해 일부러 타석에 들어설 기회가 많은 1번 타자로 출전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이 사진을 남긴 1986년 시즌에 이만수는 김봉연과 함께 KBO 통산 최초의 개인 통산 100호 홈런 기록 달성을 두고 경쟁 중이었다. 한 번이라도 홈런 칠 기회를 더 주려고 김영덕이 일부러 상위 타선에 배치한 것. 이처럼 당시에는 기록을 위해 스타 플레이어를 상위 타순에 배치하는 일이 있었다.[32] 자세히 보면 김성래가 유격수로 출전한 것을 볼 수 있다. 2루수로 주로 각인되어 있는 김성래는 3루수를 포함, 제2의 전성기를 열었던 1루수까지 프로 생활 동안 많이 보았다. 2루수로 뛰던 프로 초창기에는 가끔씩 유격수 대타도 봤다. 이후 MVP를 수상했던 93년에는 1루수를 놓고 그해 신인왕을 차지한 양준혁과 경쟁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김성래의 잦은 포지션 변경은 그의 확실한 이미지를 심는 데 부정적으로 작용했다.[33] 한편으로 실업야구 롯데 감독 시절에 불 같은 성격을 못이기고 경기 도중 자신을 야유하는 관중과 삿대질을 하며 대판 싸우다 징계를 먹은 흑역사도 있다.[34] 다만 이런 쇼맨십이 관중에게는 어필했을지 몰라도 선수단에 대한 리더십이나 프런트의 신임에는 그다지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다혈질에 술고래로 여러 야구인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던 김동엽이 저렇게 그라운드에서조차 진지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면서 선수들에게 체면도 깎아먹고 프런트의 불신임을 받는 상황을 스스로 자초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35] 1981년 해태주조나폴레온, 1985년에는 세정의 스포츠웨어 브랜드 인디안, 동화약품활명수 CF 등에 출연했다.[36] MBC 청룡감독 겸 선수이던 백인천이 1982년 유한양행의 영양제 게브랄티 CF 모델로 활동했지만, 이듬해 간통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바람에 이후 CF와는 인연 없이 1990년 LG 트윈스 감독으로 선임될 때까지 야인으로 지냈다. 이밖에도 김성한, 이순철, 김재박이 퇴임 후 상조 CF를 찍은 바 있다.[37] 다만 투수 혹사의 경우 당시 두텁지 못한 선수층의 특성 상 대부분의 감독들이 안고 있던 문제점이었기 때문에, 딱히 누구를 콕 집어 탓할 수는 없다. 21세기로 넘어온 지금도 '저 감독은 투수를 너무 혹사시키는 것 아니냐'는 말이 팬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나올 정도로, 이것은 시대를 가리지 않는 문제이다. 2010년대 우승감독들도 대부분 다 투수혹사 문제가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38] 물론 선수들 모두 부정적 의사를 밝힌 건 당연지사였다.[39] 대표적인 예가 OB 베어스의 구단주이던 박용곤 회장. 그리고 SK 와이번스 감독 때도 본인을 경질한 민경삼 당시 단장하고도 사이는 나쁘지 않다.[40] 김성근은 1남 2녀를 두고 있지만 아들만 결혼을 했고, 두 딸은 독신선언을 하여 중년이 되어서도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아 부인뿐만 아니라 딸들과 계속 같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나중에 동거를 하지 않는다 해도 김성근이 바빴던 딸들의 유년기와 달리 청년기부터 중년기까지 부모와 살아와서 함께 한 시간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에 계속 교류를 많이 할 가능성이 크다. 한 인터뷰에서 기자가 야신할아버지라는 별명이 어떠냐고 묻자, 자신은 "나는 할아버지가 아니다, 손자가 없다"고 받아친 뒤, 바로 웃으며 무슨 별명이든 팬들이 관심을 가져준다면 고마운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41] 더구나 미즈타니에 대해 당시 언론은 결코 호의적이지 못하기도 했고, 반일감정의 앙금이 지금보다 심해 미즈타니에 대해 팬들이나 선수들이나 호의적이진 않았기 때문이다.[42] 선수들을 소모품처럼 여기면서도 올림픽에서의 성과로 동계올림픽 직후까지 무풍지대로 남아있던 빙상연맹의 만행들을 상기해보라.[43] 지금도 그렇지만 군인은 계급을 막론하고 민간인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군 헌병대에 신고되면 대단히 골치아프다. 그래서 되도록 민간인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고성을 지르거나 보기 민망한 행동을 하여 민폐를 일으키는 일이 종종 생기게 된다. 병사일 경우 부대 복귀 후 바로 군기교육대에 입소할 수 있고 심할 경우 피아노를 열심히 치거나 구속될 수도 있다. 부사관의 경우는 근신이나 감봉 등의 징계를 받을 수 있으며, 징계 여부를 떠나 부사관 사이에는 선임과 후임간의 군기가 엄해서 당시 BEQ(부사관 독신자 간부 숙소)에서는 구타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시절이기 때문에 밖에 나가서 민간인과 시비가 붙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44] 고교야구 선수가 어떻게 원로 야구인의 사위인지 궁금하신 분들이 있을텐데 내막은 이렇다. 루키 스타였던 이해창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어 야구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야구는 후원이 없으면 하기 힘들기 때문. 그런 그의 실력과 잠재력을 알아본 풍규명 씨가 그를 거둬 집에서 먹여주고 재워줘서 이해창은 다시 야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한편 풍규명 씨에게는 풍옥희 라는 딸이 있었는데 집에서 숙식하며 야구를 하던 이해창은 어릴 때부터 친누나 처럼 지내던 풍옥희와 눈이 맞아버렸고 이해창은 풍규명의 딸을 임신시키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당연하게도 풍규명은 극대노하며 죽일지 살릴지 고민하였으나 결국 아들처럼 키워온 이해창을 죽일 수는 없으니(...) 그대로 사위로 삼았다. 이해창은 이후에도 아내와 백년해로 중이다. 여담으로 아내분이 2살 연상인 연상연하커플이다.[45] 이건 그나마 순화된 표현이고 실제로는 김진영 앞에서 니가 선배냐면서 온갖 육두문자를 시전했다.[46] 껌은 생산 공정이 자동화되어 있기 때문에 여공을 데리고 만드는 것이 아니긴 한데 라인 중간중간엔 사람이 서 있어야 하고 시대상을 생각하면 아마 이 사람들을 여공이라고 칭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제과업계인 해태 타이거즈도 우승 보너스를 요구하는 선수들에게 이런식으로 윽박질렀다고 한다.[47] 마구마구에서는 본명이 아닌 ‘송지운’이라는 가명의 선수카드가 있다.[48] 당시 야구장엔 라커룸 시설이 미비해서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은 야구장 근처의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49] 김성근이 김동엽 사후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등번호 38을 달았다는 말이 있으나 프로 원년 코치 시절부터 38번이었다. 정확히는 김동엽과 친해서 둘 다 번호를 38번으로 달았고, 김동엽이 사망한 이후에는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번호를 38번에서 바꾸지 않았다는 이야기. 등번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보통 38번은 선수들이 다는 번호고 코칭스태프나 감독은 7~90번대를 다는 것이 일반적이라 감독의 번호로 일반적인 번호는 아니다.[50] 강병철은 1986년 시즌을 마치고 이른바 까자값 사건(상세 내용은 강병철 항목 참조)으로 롯데 자이언츠 감독 재계약에 실패한 후, 1988년 빙그레 이글스의 코치로 입단하기 전까지 야인으로 지내며 스포츠서울 객원기자 등으로 활동했다. 김동엽의 말대로 강병철은 롯데 감독에서 물러나기 전까지는 잘려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1978년 동아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여 1983년 롯데 자이언츠 타격 코치로 영입되어 이듬해 감독으로 승격될 때까지 자신의 의지 또는 다른 팀의 회유에 의해 자리를 옮긴 적은 있지만 강제로 잘려서 백수가 된 적은 없다는 의미다.[51] 그래서 김동엽은 부상기간 동안 목발을 짚고 그라운드로 절뚝대며 나와 심판에게 목발을 들이대며 항의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였다. 역시 쇼맨십의 달인이다.[52] 1986년 시즌에 107이닝을 던졌지만 2승 6패의 부진한 성적만 남겼다.[53] 물론 MBC 청룡의 초대 감독이기도 하다...[54] 일본프로야구 시절 주니치 드래곤즈 에서 뛰었고 1985~1988년까지 MBC 소속으로 플레이 했다.[55] 다만 유고웅이 주니치 시절에 모셨던 요나미네 카나메, 곤도 사다오 감독은 동시대 일본야구 감독들과 달리 선수들에게 체벌과 작전 지시를 최소화한, 메이저리그식 코칭 스타일을 선호하는 감독이었다.[56] 실업 감독으로서는 날았던 김동엽이 청룡에서 흑역사를 썼고, 김재박도 현대 유니콘스에서는 명감독이었지만 LG에서는 DTD를 막지 못했다. 류중일도 삼성 감독의 영광을 LG에서는 보여주지 못했다. 물론 류중일은 LG를 2년 연속으로 가을야구로 인도하긴 했으니 앞에 둘보다야 낫지만 그래도 구단의 기대치를 충족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