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18 23:20:13

김정행(야구선수)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동명이인인 유도 선수에 대한 내용은 김정행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김정행의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19번
이석규
(1984)
김정행
(1985~1988)
전용권
(1989~1991)
}}} ||
파일:attachment/kimjunghaeng.jpg
김정행
金正幸
일본명 [ruby(金井, ruby=かない)] [ruby(正幸, ruby=まさよし)] (카나이 마사요시) | Kanai Masayoshi
출생 1952년 5월 15일 ([age(1952-05-15)]세)
일본 구마모토현 타마나시
국적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학력 구마모토 현립 구마모토 공업고등학교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73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주니치)
소속팀 주니치 드래곤즈 (1974~1982)
롯데 오리온즈 (1982~1984)
롯데 자이언츠 (1985~1988)

1. 개요2. 선수 경력
2.1. 일본프로야구 시절2.2. 롯데 자이언츠
3. 은퇴 후4. 연도별 성적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주니치 드래곤즈, 롯데 오리온즈, 롯데 자이언츠에서 활동한 일본 태생의 프로 야구 선수다. 일본명은 카나이 마사요시(金井正幸).[1]

우완 오버핸드이자 182cm의 장신으로 직구는 한결같이 140km대를 마크하고 변화구는 커브, 슬라이더, 슈트를 무기로 삼았다. 그러나 제구력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2. 선수 경력

2.1. 일본프로야구 시절

구마모토공고 졸업 후 사회인야구 왕자제지 카스가이 팀을 거쳐 1973년 자유계약으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 나가시마 시게오의 은퇴 시합인 1974년 10월 14일 더블헤더 1차전에서 선발투수로 데뷔했다. 이후 주로 원 포인트 및 패전처리 투수로 등판하다가 1982년 시즌중에 야스기 쇼지(安木 祥二)와의 트레이드로 롯데 오리온즈에 입단했다. 잠시나마 마무리투수를 하기도 했지만 위기관리능력부재(방화)로 다시 이듬해부터 중간계투로 보직이동을 했다.

150을 상회하는 스피드를 보유하고 있는데도 그 능력을 잘 살리지 못한 선수로 알려져 있는데, 주니치 시절 팀의 에이스였던 선배 호시노 센이치가 뒤에 주니치 감독을 맡기 전 해설가로 활동할 때 김정행에 대한 평가에 따르면 10년 동안 프로물을 먹었는데도 처음 입단때와 조금도 변한게 없는 투수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2.2. 롯데 자이언츠

그러다 1984년 시즌 종료 후에 재일 한국인 신분으로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는데, 오랜 일본야구 경험을 안고 뛰어든 한국프로야구에서 그런대로 괜찮은 구위를 보여주었지만 일본에서 중간계투로만 뛰어오다 보니 선발로 나선 한국에서 스테미너의 문제를 보여왔다.[2]
1986년 6월 5일, 김정행은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당시 빙그레 이글스를 상대로 8대 0으로 이기면서 프로야구 사상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김정행은 사사구를 4개나 내줬지만 삼진 5개를 같이 잡았다. 투구수는 106구.[3]

그런데 같은 날 열린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불가리아전에서 우리나라가 김종부의 동점골로 1대 1로 비겨 16강행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각 신문이 온통 그 기사로 도배를 하는 바람에 김정행의 노히트노런은 아예 기사도 없이 제목으로만 간단히 처리당하는 비운을 겪고 만다.

김정행의 노하우를 높이 산 롯데는 1987년부터 플레잉코치로 기용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그 당시 절대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롯데의 에이스 최동원사이가 너무 나빠서 안타깝게 무산되고 말았다.[4]

3. 은퇴 후

롯데를 거쳐간 재일교포 투수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성공한 케이스로 꼽히는 김정행은 은퇴한 이후에도 계속 롯데가 코치영입을 검토했으나 1990년 장명부를 롯데 투수코치로 선임하게 되면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영입 검토만 그렇게 많이 해놓고 다른 사람 선임하는 건 도대체 무슨 센스인 걸까.

4.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5]
<rowcolor=#373a3c>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1985 롯데 19 115⅓ 7 5 0 - 2.73 103 6 54 4 55 1.36
1986 20 118 7 7 0 - 2.90 94 5 61 7 51 1.31
1987 17 102 6 5 0 - 3.62 95 3 41 1 46 1.33
1988 15 94 8 4 0 - 3.64 82 3 50 3 29 1.40
KBO 통산
(4시즌)
71 429⅓ 28 21 0 - 3.19 374 17 206 15 181 1.35

5. 관련 문서


[1] 어찌된 일인지 한국어 위키백과 등 한국어 웹에는 카나이 마사'유키'라고 잘못 표기되어있다.[2] 지금도 선발로 200이닝을 던지면 많이 던지는 축에 속하지만 당시의 한국의 에이스들은 그정도 이닝을 소화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김정행은 4년동안 한결같이 100이닝 정도밖에 소화를 못했기 때문이다.[3] 빙그레의 배성서 감독의 변명은 이랬다고 한다.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치지. 계속 볼만 던져 대니 칠 수가 있어? 볼넷만 8개잖아." 하지만 당시 동아일보 기사KBO 레코드북에 따르면 사사구 4개만 허용했다고 나온다. 그만큼 볼질이 심했다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4] 김정행은 최동원의 부친 최윤식 씨가 보여준 열성적인(혹은 과잉) 아들 관리에 대해서도 "저 사람(최윤식 씨)은 코치도 아니면서 왜 연습장에 들어와 있는거냐?"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적이 있었다.[5] KBO에서의 성적만 기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