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운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
2013 |
2013 플레이어스 초이스 어워드 재기선수상 |
KIA 타이거즈 등번호 49번 | ||||
레스 (2001) | → | <colbgcolor=#09081c> 신용운 (2002~2003) | → | 마해영 (2004~2005) |
KIA 타이거즈 등번호 41번 | ||||
박창열 (2003) | → | 신용운 (2004) | → | 김희걸 (2005~2006) |
KIA 타이거즈 등번호 37번 | ||||
최향남 (2004) | → | 신용운 (2005) | → | 조경환 (2006.7.5.~2006) |
KIA 타이거즈 등번호 19번 | ||||
이강철 (2002~2005) | → | 신용운 (2006~2007) | → | 손영민 (2008~2009) |
손영민 (2008~2009) | → | 신용운 (2010~2011) | → | 손영민 (2012)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5번 | ||||
박화랑 (2010~2011) | → | 신용운 (2012~2017) | → | 양창섭 (2018~2021) |
신용운 申龍雲 | Yong-Un Shin | |
출생 | 1983년 9월 8일 ([age(1983-09-08)]세) |
전라북도 전주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전주진북초 - 전주동중 - 전주고 |
신체 | 183cm, 85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사우타 |
프로 입단 | 2002년 2차 1라운드 (전체 5번, 해태) |
소속팀 | KIA 타이거즈 (2002~2011) 삼성 라이온즈 (2012~2017) |
지도자 | 전주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9) 전주시 주니어 베이스볼 클럽 감독 (2021~) |
병역 | 경찰 야구단 (2007년 12월 27일 ~ 2009년 11월 21일) |
등장곡 | 유정석 - 질풍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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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늘 던지고, 내일 던질 수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그런 하루가 조금 더 이어지기만 바라고 있다.
ㅡ 기나긴 재활의 끝, 2,110일 만의 승리 후 인터뷰에서인터뷰 기사 원문
ㅡ 기나긴 재활의 끝, 2,110일 만의 승리 후 인터뷰에서인터뷰 기사 원문
前 KIA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소속이었던 우완 사이드암 투수. '용운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KIA 타이거즈 시절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1] 2002년 KIA 타이거즈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루키 시즌부터 중간계투 투수로 뛰다가 입단 2년차이던 2003년부터 불펜의 핵으로 자리매김, 70경기에 등판해 무려 119이닝을 던졌고, 11승 3패 4세이브 11홀드를 기록하며 무지막지하게 굴려졌다.[2] 이 때의 활약을 담보로 연봉도 엄청나게 상승을 했다.
2004년에는 팀 사정 상 마무리도 맡으며 전천후로 뛰었으나, 하필이면 당시 감독었던 김성한 감독은 위기 상황이다 싶으면 선발 투수를 내리고 바로 신용운 또는 유동훈 또는 이강철을 투입하는 경기 운영을 주로 했다. 이것은 2003 시즌 당시 마무리였던 진필중과 다른 불펜 투수들의 잦은 방화로 인한 투수 운용이기도 했지만, 이 때문에 혹사 문제가 불거져 나오게 되었다.
게다가 신용운 본인에게 충공깽이었던 사건을 하나 소개하자면, 그 소문이 좋기로 유명한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벌어진 2005년 4월 30일 경기.[3] 당시 팀이 5:4로 앞선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랐는데 2아웃 상황이었기에 경기는 이대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김종국이 양준혁의 타구를 악송구하여 이를 1루수 장성호가 놓친 것을 시작으로, 곧이어 심정수의 타구를 심재학이 열심히 쫓아갔지만 놓치면서 6:5로 끝내기 역전패를 당했던 눈물겨운 사연이 있다. 본인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굴욕이었다.[4][5]
결국 얼마 못 가 팔꿈치에 탈이 났고, 2005년 9월 토미 존 수술을 받으며 시즌 아웃, 팔꿈치 수술을 받은 후 팔 각도를 약간 올려서 변칙 쓰리쿼터 투구폼으로 수정했다. 재활 후 2006 시즌 8월 22일에 복귀했는데, 보통 토미 존 서저리의 재활 기간이 대략 1년에서 1년 6개월 이상 걸린다는 걸 감안하면 너무 성급하게 복귀시키는거 아니냐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 헌데, 이렇게 급하게 복귀한 투수가 10월 2일까지 한 달 반도 안되는 기간에 무려 37⅔이닝을 던지는 등 관리는커녕 오히려 더 혹사당하고 말았다. 당시 KIA의 감독은 투수 갈아먹기를 좋아하는 서정환. 당시 KIA는 두산, SK와 4위 싸움을 한창 하고 있었고 안그래도 부족한 투수진에 서정환이 당시 4강에 들어보겠다고 신용운을 일찍 끌어쓰고 이미 고교 시절부터 혹사당해 몸상태가 영 아니었던 한기주와 같이 굴려지는 바람에, 당시 KIA 타이거즈 팬들에게 신한카드 카드깡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결국 2007년에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당시 KIA 타이거즈는 김진우, 전병두 등 주축 투수들의 부상 이탈과 더불어 상당한 엇박자를 내고 있었는데, 신용운 본인은 불펜에서 제 몫을 하며 한때 구원승으로만 다승 선두로 치고 올라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에서 뛰던 최희섭이 국내 복귀를 선언하며 KIA 타이거즈에 입단하면서부터 팀의 포지션 연쇄 이동이 벌어지고 말았다. 최희섭의 영입과 더불어 외국인 타자였던 래리 서튼[6]을 퇴출시켰고, 그 자리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불펜 투수로 뛰던 펠릭스 로드리게스를 영입했던 것. 더불어 이 때 장성호[7]도 외야로 나가는 빈도가 잦아졌다.
그런데 골 때리는 일이 하나 더 생기고 말았다. 정재공 단장이 직접 가서 영입해 온 펠릭스 로드리게스가 선발로는 죽어도 뛰지 않겠다고 한 것. 뭐 본인이 애초에 메이저리그에서도 불펜으로 뛰던 선수이기도 하니 당연히 선발로 뛰면 힘들겠지만, 선발진이 붕괴했는데 중간계투가 문제인가? 결국 서정환 감독은 계투였던 신용운을 선발 로테이션에 집어넣었고, 이것은 팀이나 신용운 본인이나 재앙으로 다가오고 말았다. 선발 투수로 전업하기 전 신용운은 구원승으로만 6승에 평균자책점 2점대 초반의 준수한 활약을 보였으나, 선발로는 전혀 몸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탓에 선발 투수로 전업한 9경기에서 단 1승만 거두고 선발로 뛴 기간에만 평균자책점이 5점대 중반을 넘어서는 등 그야말로 탈탈 털렸다. 애초에 선발 투수를 데리고 오던가 신용운을 불펜으로 내버려뒀어야 했는데, 기껏 용병 슬롯이 하나 남는 곳에 중간계투 용병을 데려오고 선발 체질이 아닌 선수를 선발로 돌렸다가 이런 끔찍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가뜩이나 안 터지는 타선에 투수진마저 붕괴되자 결국 KIA 타이거즈는 2005년에 이어 두 번째 최하위를 기록하고 팀의 1~2선발인 윤석민과 신용운이 각각 7승에 그치면서 팀 내 최다승에 그치고 말았다.
결국 2007 시즌을 제대로 말아먹고 당초에 승선이 유력했던 2008 베이징 올림픽 최종 명단에 드는 데 실패했으며, KIA도 결국 해태 시절을 포함하여 2번째 최하위를 기록하는 굴욕을 맛봤다. 신용운은 이에 대한 불만 표시로 자신의 싸이 미니홈피에 직접 서정환 감독을 비판했다. 그리고 그 해 말 서정환 감독은 시즌 중 영입한 조범현 배터리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사퇴했다.
후임 감독으로 취임한 조범현 감독은 신용운에게 1년만 더 뛰자고 권유했다. 하지만 김성한-서정환으로 이어져 오는 혹사에 지쳐 버린 신용운은 입대를 원했고, 결국 경찰청으로 들어가 군 복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군 복무 중이던 2009년, 팔꿈치가 다시 탈이 나고 말았고, 결국에는 두 번째 토미 존 서저리를 받고야 말았다.
2010 시즌을 맞아 KIA 팬들은 신용운이 제대하여 팀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워낙 입대 전부터 몸이 망가져 있던 모양인지 팀 자체적으로 만든 3군에서 몸 밸런스를 잡고 2군에서 뛰었으나 2010년 5월 2일 상무와의 2군 경기에서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하고 6피안타 7실점(1피홈런)으로 부진, KIA 타이거즈 팬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제구고 구위고 전성기 시절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고 하며, 유승안 경찰청 감독은 경찰청 동기이자 팀 동료인 사이드암 차정민의 구위가 더 낫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본인도 크게 실망했다 카더라. 이후로 3군에서 훈련에만 매진했다.
2011년 4월 5일 복귀, 아킬리노 로페즈의 뒤를 이어 1이닝 2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하지만 1군에서는 4경기만 등판하고 다시 부상으로 2군에 내려갔다. 9월에 팔꿈치 재수술을 받았다. 결국 그 해 11월 22일에 열린 2차 드래프트에서 삼성 라이온즈에 지명되어, 질곡 많던 10년 동안의 KIA 타이거즈 생활을 마무리하였다. 본인은 예비군 훈련을 받고 나서야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8]
암흑기의 KIA 타이거즈를 지탱하면서 희생당한 비운의 선수이며, KIA 타이거즈의 굉장히 아픈 손가락이다.[9][10]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재활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는 삼성 라이온즈로 떠나게 되었으니 재활에 성공해서 부활하기를 많은 팬도 바랐다.[11]
2.2. 삼성 라이온즈 시절
2011년 11월 22일에 시행된 2차 드래프트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지명을 받아 이적했다. 부상 경력이 있는 신용운을 재활시켜 내년이나 내후년에 기용할 생각으로 지명했다고 했으며, 류중일 감독은 지명이 끝나기 무섭게 신용운을 당장 삼성 트레이닝 센터에 보내라고 지시했다. 삼성은 국내 최고의 재활 훈련 시설을 구비하고 있는 삼성 트레이닝 센터를 갖추고 있으며, 이미 삼성에서는 신용운처럼 팔꿈치 수술을 세 차례나 받았던 사이드암 투수 권오준을 성공적으로 재활, 복귀시킨 적이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삼성 트레이닝 센터에 입소해 재활했다. 그래서 이적한 첫 해에는 재활에 몰두했다.2012년 8월 29일에 올라온 기사에 의하면, 재활은 순조롭게 진행된 듯하다. 반드시 재기하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2.2.1. 2013 시즌
그간의 재활이 헛되지 않았는지 140km/h대의 공을 던지며 재기에 성공, 삼성 라이온즈의 추격조 불펜으로 낙점받았다. 그리고 친정 팀을 상대로 이적 후 첫 승을 거두었고, 삼성의 사이드 암 불펜이었던 권오준이 또 한 번 토미 존 수술을 받아 자리를 비우면서 심창민과 함께 그 자리를 잘 메워 주었다. 그리고 데뷔 첫 한국시리즈에 출전하게 되었고, 팀이 V7, 통합 3연패, 그리고 1승 3패 뒤 3연승으로 4승 3패 역전 우승이란 대기록을 장식하며 본인도 그토록 소원이던 첫 우승 반지를 끼는 영예를 안았다.
자세한 내용은 신용운/2013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2.2.2. 2014 시즌
그러나 첫 우승의 기쁨도 잠시, 다시 팔꿈치 통증을 느껴서 검사를 받은 결과 뼛조각이 발견되어 2013년 12월 27일에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다. 거기에다가 12월 31일에는 재수술까지 받았다고 하며 본인은 여러 차례 전신 마취와 수술을 받아 봤기 때문에 별 느낌은 없었다고 한다.[12] 2014년 1월 17일부터 삼성 트레이닝 센터에 입소해 재활 절차를 밟을 계획이라고 한다. 복귀 시기는 후반기로 잡았다고 한다. 다만 또 수술을 받았다는 점 때문에 일부 팬들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결국 1군은커녕 2군 경기에도 등판하지 못했다.2.2.3. 2015 시즌
무사히 수술과 재활을 마치고 개막전부터 1군에 합류, 2013년처럼 불펜의 한 축을 든든히 맡아주었다.5월 28일 넥센전에서 6회 2사 1루 상황에서 등판해 아웃카운트를 한 개도 못 잡고 볼넷과 몸에 맞는 공으로 만루를 만든 다음 박동원에게 만루 홈런을 맞으면서 강판됐다. 다음날인 5월 29일 1군 엔트리에서 빠지고 대신 조현근이 올라왔다.
2군에서는 주로 마무리로 등판하면서 비교적 호투했으나, 6월 4일 경찰전에서 4점 앞선 9회에 등판해 5실점을 하면서 어이없는 역전패를 허용하기도 했다. 6월 11일 이상훈 대신 1군에 다시 올라왔는데, 이미 임창용, 심창민, 권오준까지 사이드암 투수가 3명이나 있는 상황에서 굳이 신용운을 다시 올려야 했냐는 반응이 있었다.
5월 이후 급격하게 무너져 6월 25일 기준으로 ERA가 6.11이나 된다. 하지만 팀에 그렇게 많던 사이드암이 임창용은 마무리로 고정돼 있고, 심창민은 부상으로 2군에 있으며, 권오준은 신용운과 다를 바 없이 부진해 여전히 1군에서 던지고 있다. 당연히 필승조에선 제외되어 4점차 이상에서 던지는 추격조 내지 패전조가 되었다. 7월 5일 복귀한 장원삼을 대신해 1군 엔트리에서 빠졌다. 7월 23일 조현근과 함께 1군에 복귀했다. 7월 24일 한화전에서 9회초에 등판했는데 6점이나 앞선 상황이었음에도 아웃카운트 1개 잡는 동안 피안타 1개와 볼넷 2개로 1실점을 하면서 조현근으로 교체됐다. 이후로는 등판이 없다가 갑상선 수술로 인한 체력 저하 때문에 7월 31일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이후 류중일 감독의 지시로 BB아크행. BB아크에서 훈련을 받은 3인방 중 9월 1일 한화 2군과의 경기에서 가장 나은 모습을 보여[13], 9월 2일 1군에 올라왔다.
이번 시즌에는 부진했으나, 도박 논란으로 마무리 투수인 임창용과 홀드왕 안지만이 이탈하면서 약화된 불펜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었다.
2.2.4. 2016 시즌
오른쪽 팔꿈치 통증으로 1군 전지훈련이 아닌 2군 전지훈련에 참가했다. 시범경기에도 등판하지 못하면서 2군에서 시즌을 시작하게 됐다. 4월 중순부터 6월 중순까지, 6월 말부터 8월 초까지 결장했지만 8월 이후로는 꾸준히 경기에 나왔고 9월 1일 엔트리가 확대되면서 시즌 처음으로 1군에 올라왔다.팔꿈치 통증으로 등판을 못 했던지라, 원 포인트 릴리프식으로 짧게 한두 타자만 상대하고 교체된 적이 많았다.
2.2.5. 2017 시즌
1군은커녕 2군 캠프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정규시즌 개막 후에도 전혀 등판하지 못하다가 5월 9일 이상훈과 함께 웨이버 공시되었다. 이후 이상훈은 kt wiz에 입단하였지만, 신용운은 나이도 있고 혹사로 잦은 수술까지 받아 실전 감각을 꾸준히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인지 새로운 팀을 찾지 못한 듯 하다. 동년배인 이양기, 이여상, 이재우처럼 웨이버 공시를 계기로 은퇴를 선언할 가능성도 높은 편.3. 은퇴 후
결국 사실상 은퇴했다. 2018년 모 중학교에서 인스트럭터를 하다가 2019년에 모교인 전주고 코치를 역임했으며 2021년에는 16세 이하 스포츠 클럽 팀인 전주시 주니어 베이스볼 클럽의 감독을 맡았다.4. 피칭 스타일
사이드암 투수지만, 한때는 150km/h 안팎의 강속구로 윽박지르는 타입의 파이어볼러였다. 하지만 KIA 타이거즈 시절의 혹사로 구속을 잃고 부상을 얻었다. 삼성 시절인 13~16 시즌에는 140대 중반을 마크하며 평균은 140대 초반을 찍었다.
결국 이 부상으로 훗날 은퇴까지 하게 되지만, 그 전에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되어 삼성 트레이닝 센터에서의 재활 훈련으로 부활하여 2013년 팀의 한국 시리즈 우승에 기여하며 대표적인 재활 성공 사례의 투수로 남았다. 물론 이전부터 크게 망가진 상태라 한시즌을 풀로 뛰지는 못하고 원 포인트 릴리프로만 종종 올라갔다.
거기에 슬라이더, 체인지업, 싱커등을 던졌고 특히 싱커는 이재곤이 경찰청 복무 시절에 신용운에게 전수받았을 정도로 일품이였다.
5. 여담
- 최형우와는 초중고 동기로 계속 배터리를 이뤘으며 전주고 시절에는 신용운이 3번, 최형우가 4번 타자로 나섰다. 하지만 동기 이상으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며, 최형우의 말로는 프로에 입단한 후 서먹서먹해졌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게 신용운은 KIA 타이거즈 입단 후 계속 1군에 있었던 반면 최형우는 중간에 삼성 라이온즈에서 방출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경찰청의 창단 멤버로 입단하여 제대한 후 2008년이 되어서야 1군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해 프로에서 서로 얼굴을 볼 일이 적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최형우가 제대 후 신인왕을 먹었을 때 신용운은 경찰청에서 군 복무 중이었다. 그래도 신용운이 삼성으로 이적한 후 신용운이 최형우의 팔꿈치 재활을 책임져 준다고 했다는 등의 일화를 보면, 다시 친해진 듯하다. 신기하게도 신용운은 기아에서 삼성으로 이적했지만 최형우는 삼성에서 기아로 이적했다. 다만 신용운이 이적할때의 반응은 그동안 수고 많았고 삼성에서 잘하라는 응원과 동정심을 같이 얻었지만 최형우가 이적할때의 반응은 그 감정이라고 까일 정도로 좋지 못했다.
- 야구를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는 최형우 아버지 덕분이라고 한다. 당시 최형우의 아버지가 신용운에게 글러브를 주면서 캐치볼을 해보게 되었고, 덕분에 야구부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 쌍방울 레이더스 어린이 회원이었다고 한다.
- 경찰청에 있었을 때 이재곤에게 싱커를 가르쳐 줬다고 한다. 이 덕분에 이재곤은 전역 후 롯데 자이언츠 데뷔 후 처음으로 1군으로 올라와 맞이한 첫 시즌에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할 수 있었고, 언론에서도 촉망받는 젊은 선수가 되었다. 롯데 팬들이 이를 알게 된 것은 최악의 투코께서 인터뷰에서 이재곤을 자기가 키운 것마냥 자화자찬을 늘어놓자 분개한 한 팬이 까기 위해 신용운이 키웠다는 사실을 여기저기 힘써서 퍼뜨렸기 때문이다.
- 2013년 5월부터 안지만이랑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경산에서 사는 게 힘들었다 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7193692&cloc=
- 2018 시즌 KIA가 용병 투수 팻 딘을 불펜으로 쓰기 위하여 토미존 이력이 있는 사이드암 불펜투수 임창용을 시즌 중에 선발전환함에 따라 다시 언급되고 있다. 차이점이라면 2007년에는 단장이 잘못 데려온 용병이었고 2018년에는 프런트에서 교체 준비가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14] 감독이 똥고집을 부려 교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크며, 무엇보다 당시 신용운은 25세지만 임창용은 무려 43세로 18살이나 더 나이가 많았고, 2018년 여름은 적어도 2007년보다 훨씬 더웠다는 점에서, 체력적인 면에서는 임창용 쪽이 훨씬 불리했다. 그리고 이걸 11년 전에 겪어놓고 또 다시 방관한 프런트의 무능함에 치를 떠는 올드 팬들도 보인다.
-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한 경기 2개의 만루홈런을 허용한 투수이다. 2003년 6월 10일 무등구장에서 열린 한화전에서 김태균과 송지만에게 만루홈런 2개를 얻어맞았다.
- 어느덧 나이가 40줄에 접어들었음에도 미혼이다.
- 타이거즈 팀 후배인 이의리를 꽤나 좋게 평가하는 듯 하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말하길 전주고 코치를 하던 시절 당시 광주일고 재학생이던 이의리를 보고 그때부터 대성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프로에 와서 빠르게 자리잡고 선발투수로 성장할 줄 몰랐다며 극찬했고, 이의리가 아시안게임 대표팀 엔트리에서 탈락한 것에 대해서는 지금 모습대로라면 앞으로도 대표팀 차출과 병역특례를 받을 기회는 충분히 많으니 이번 대표팀 탈락에 대해 너무 연연해하지 말라며 애정어린 조언을 하기도 했다.[15]
6. 연도별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2 | KIA | 28 | 38 | 2 | 0 | 0 | 0 | 1.000 | 3.55 | 33 | 3 | 15 | 30 | 16 | 15 | 1.48 |
2003 | 70 | 119 | 11 | 3 | 4 | 11 | 0.786 (3위) | 3.63 | 111 | 15 | 44 | 96 | 51 | 48 | 1.23 | |
2004 | 43 | 56⅓ | 4 | 2 | 11 | 0 | 0.667 | 2.08 | 43 | 3 | 28 | 43 | 14 | 13 | 1.21 | |
2005 | 41 | 61⅓ | 4 | 6 | 7 | 4 | 0.400 | 3.08 | 56 | 6 | 35 | 31 | 26 | 21 | 1.45 | |
2006 | 18 | 37⅔ | 4 | 0 | 0 | 2 | 1.000 | 0.72 | 25 | 1 | 8 | 17 | 4 | 3 | 0.85 | |
2007 | 40 | 99 | 8 | 10 | 0 | 6 | 0.400 | 4.73 | 107 | 11 | 40 | 48 | 58 | 55 | 1.42 | |
2008 | 군 복무(경찰 야구단) | |||||||||||||||
2009 | ||||||||||||||||
2010 | 1군 기록 없음 | |||||||||||||||
2011 | 4 | 5⅓ | 0 | 0 | 0 | 0 | 0.000 | 1.69 | 2 | 0 | 5 | 3 | 2 | 1 | 1.13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12 | 삼성 | 1군 기록 없음 | ||||||||||||||
2013 | 44 | 40 | 2 | 0 | 0 | 2 | 1.000 | 2.03 | 26 | 5 | 16 | 36 | 9 | 9 | 1.05 | |
2014 | 1군 기록 없음 | |||||||||||||||
2015 | 35 | 25⅔ | 1 | 1 | 0 | 2 | 0.500 | 7.01 | 35 | 2 | 18 | 22 | 23 | 20 | 1.99 | |
2016 | 13 | 8 | 0 | 0 | 0 | 2 | - | 3.38 | 12 | 0 | 7 | 7 | 7 | 3 | 2.00 | |
2017 | 1군 기록 없음 | |||||||||||||||
KBO 통산 (10시즌) | 336 | 490⅓ | 36 | 22 | 22 | 29 | 0.621 | 3.40 | 450 | 46 | 218 | 333 | 210 | 185 | 1.29 |
7. 관련 문서
[1] 2001년 무등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제춘모의 광주동성고에 패했다. 신용운은 감투상(준우승팀 에이스 투수에게 주는 상)을 수상했다. 준결승전에서는 정상호, 이현승, 송은범의 동산고에 5-4 승, 8강전(2회전)에서는 김민철의 광주일고에게 7-1로 승리했다. 1회전에서는 이명우의 부산공고에 2-0으로 승리했다. 신용운은 3번타자, 최형우는 포수이자 4번타자였다.[2] 참고로 이 선수의 포지션은 중간계투다. 거기다가 이 당시 규정이닝은 133이닝.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3] 여담으로 이 날 경기의 시구자 원태인은 13년 뒤 삼성의 1차지명을 받게 된다.[4] 참고로 신용운은 바로 전날이었던 2005년 4월 29일에도 끝내기 안타를 맞고 패전 투수가 되었는데, 이날도 끝내기 안타를 맞음으로서 이틀 연속 패전투수가 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참고로 4월 29일 끝내기 안타를 친 선수는 박석민. 끝내기 홈런을 단일 투수로는 2경기 연속으로 얻어맞고 패전 투수가 된 홍상삼이에 대응이 된다면 신용운은 끝내기 안타를 2경기 연속으로 얻어맞고 패전 투수가 된 꼴이었다. 그리고 13년 뒤에 김윤동이 이 이 꼴을 또다시 당한다.[5] 공교롭게도 이 경기에서 KIA 패배의 원인을 제공했던 두 사람은 2023년 KIA의 감독과 단장으로 서로 만나게 되었다.[6] 수비력은 그냥 저냥인데 득점권 타율에서 처참하였다.[7] 이 일로 장성호는 발바닥과 무릎 부상으로 인해 양준혁처럼 도전했던 10년 연속 3할 타율 도전에 실패를 해버렸다.[8] 이때 많은 KIA 타이거즈 팬들이 아쉽고 미안하다는 말을 많이 했었다고 한다.[9] 김성한, 서정환 감독이 지금까지도 혹사의 아이콘으로 불리며 욕을 얻어먹는 이유 중 하나다. 한기주, 윤석민도 이 시절 많이 굴렀다. 결과는 한기주는 수술, 윤석민은 아킬레스건 부상이었다.[10] 참고 : 신용운 혹사 일지. # 한 마디로 충공깽이었다.[11] 여담으로, 한기주도 신용운처럼 삼성으로 떠났다. 그러나 삼성 트레이닝 센터에는 들어가지 않았다.[12] 2013년 5월부터 같이 살고 있던 사람들 셋이 같이 병실에 있어 줬다고 하며 그 중 하나가 안지만이었다고 한다.[13] 신용운은 삼진 2개를 잡는 등 공 9개만으로 1이닝을 퍼펙트로 막았다. 반면 백정현은 1이닝 1피안타 1삼진 2볼넷 1실점, 김현우는 1이닝 3피안타 2삼진 1볼넷 3실점을 기록했다.[14] 다만 그 용병이 2019년 최악의 용병 중 하나였던 제이콥 터너였다는 점이었다.[15] 실제로 신용운도 과거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 차출이 유력했지만 결국 부상과 구위 저하 등으로 선발에 실패하며 병역특례를 받을 기회를 날린 바 있다 보니 후배인 이의리에게 더욱 조언을 해준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상술한 자신이 싸이월드에 감정표현 했던 것 처럼 SNS에 함부로 글을 올리지 말라는 조언도 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