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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08 18:21:08

김재하(기업인)

金載夏
1953년 5월 2일 ~

1. 개요2. 생애3.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본관은 경주(慶州).

삼성 라이온즈에 무려 11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근속하였으며,[1] KBO 리그를 대표하는 명 프런트이자 삼성 라이온즈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과 왕조의 기틀을 만든, 역사상 최고의 단장 중 하나로 불린다.[2] 특히, 그가 떠난 후 삼성 라이온즈에서 팀은 물론 리그 전체적으로도 악평을 받는 단장들인 안현호, 홍준학[3]이 등장했기에 더욱 그가 빛나보이는 면이 있다.

2. 생애

1953년 5월 2일 경상북도 경주군(현 경주시) 서면 도리1리[4]에서 태어났다.# 아화초등학교와 대구상업고등학교, 대구대학 회계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 영남대학교 경영대학원영남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각각 인사조직 전공으로 경영학 석사 학위[5]행정학 석사 학위[6]를 취득하였다.

1972년 삼성그룹 산하 제일모직에 입사해서 경리과에서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7]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창단 작업에 관여했으며, 이후에도 제일모직과 삼성 라이온즈를 오가면서 근무하였다.

1999년 11월 삼성 라이온즈 단장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직급은 상무보. 이후 11년간 과감한 투자를 바탕으로 2002년과 2005년, 2006년의 3회 우승을 이끌어내며 우승의 한을 푸는 데 기여하였다.[8] 2010년 12월 김용응 사장과 함께 동반사퇴하였다. 표면상 이유는 건강상 문제라고 하나 실제로는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 때문에 사임했던 이건희 회장이 다시 그룹에 복귀하면서 후계구도를 정리하기 위해 그룹 2인자로 행세했던 이학수 부회장 인맥을 정리할 때 같이 쓸려나간 것이었다. 그 와중에 이학수 사장의 고교선배인 김응용 감독과 김응용의 제자인 선동열까지도 모두 이학수 인맥으로 찍혀서 삼성 라이온스에서 물러났다.

건강상의 이유로 삼성 라이온스에서 사직했지만 실제로 다시 한달만에 김범일 대구시장의 요청에 따라 2011년 1월부터는 대구 FC 단장 겸 대표이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이후 김범일 시장의 개입으로 프런트가 막장이 되면서 대구 FC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김범일 시장은 이를 빌미로 오히려 김재하 단장을 강하게 압박해서 결국 2013년 자진사퇴의 형식을 빌어 사실상 강제 퇴직시켰다. 이에 분노한 대구 FC 팬들이 김범일 시장후보 출마 반대 시위를 벌이는 등[9] 적극적으로 대처, 결국 2013년 중간에 복귀했다.

2014년에 조광래 단장이 선임되면서 이임했다.

고위임원임에도 불구 직접 경기를 관람하거나 프런트의 사무를 직접 처리하고 팬들과 소통이 잘되는 등 좋은 모습이 많아 대구시민들에게는 야빠, 축빠를 막론하고 재하느님, 재하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2023년 기준으로는 그의 후임자들인 안현호, 홍준학이 20년 넘게 근속한 베테랑임에도 불구하고 베테랑으로써 팀을 운영하는 능력을 발휘하기는 커녕 구시대적인 운영으로 언론플레이나 해대며 독재적 경영으로 팀을 망치자 더욱 평가가 상승했다. 김재하의 몇 안되는 단점으로 그가 단장으로 있을 때 저 둘을 해고하지 않은 것을 꼽을 정도. 물론 저때 저 둘은 단장이 되기 한참 전이라 김재하 단장이 신경쓸 정도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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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홍준학 현 단장보다 훨씬 긴 것은 물론 두산 베어스 김태룡 단장과 엇비슷한 수치이다.[2] 김재하가 있던 시절은 삼성이 돈성으로 불리던 시절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김재하는 투자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육성으로 삼성을 당대 최고의 강팀으로 끌어올린 단장으로 평가된다. 빅마켓 프런트의 대표주자인 팻 길릭과는 정반대.[3] 이 둘은 동갑내기에 비슷한 시기 삼성에 입사해서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동료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투자 스타일은 정반대이지만 둘 다 본인들이 입사하던 시기인 1990년대식의 구시대적 야구관으로 팀을 운영하고 언론플레이에만 치중해 팀을 망친 인물로 꼽힌다.[4] 경주 김씨 집성촌이다.[5] 경영학 석사 학위 논문 : 知覺된 職務特性이 從業員의 動機誘發에 미치는 影響에 관한 硏究(지각된 직무특성이 종업원의 동기유발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6] 행정학 석사 학위 논문 : 國際化에 對備한 地方政府와 企業間의 協力과 生産性 提高(국제화에 대비한 지방정부와 기업간의 협력과 생산성 제고).[7] 당시 김재하의 경리과 선임이 바로 이건희 회장체제에서 15년 넘게 회장 비서실장, 그룹 구조조정본부 사장을 지내면서 2인자로 군림하던 이학수이다. 당연히 김재하는 이학수 사단의 일원으로 분류된다.[8] 그래서 김재하 단장의 직급은 계속해서 높아져갔다. 2002년 1월에 상무로 승진했고, 2005년 1월에 김응용 사장 취임에 맞춰 전무로 승진, 다시 2009년 12월에 부사장으로 승진했으나, 1년 만에 용퇴했다.[9] 김범일 시장은 이외에도 여러가지 문제가 불거지면서 지지율이 떨어져서 결국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출마를 포기하고 퇴임했다. 새누리당 소속 대구광역시장이라 출마만 하면 당선이긴 한데, 당내 경선을 통과할 자신이 없었다는게 정확하다. 출마했어도 당내 경선에서 박주영청구고등학교 선배인 개축빠 권영진한테 발렸을 거라는게 지역언론의 평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