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 타이거스 시절. | |
이름 | 세키모토 켄타로(関本 賢太郎)[1] |
출생 | 1978년 8월 26일 ([age(1978-08-26)]세) 나라현 카시하라시 |
국적 | 일본 |
포지션 | 내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6년 드래프트 2위 |
소속팀 | 한신 타이거스 (1997~2015) |
응원가 | 구 응원가[2] 신 응원가[3] |
1. 개요
일본의 전 프로야구 선수. 오랫동안 한신에서 여러 포지션을 맡으며 약방의 감초같은 활약을 한 토박이 야수였다.2. 데뷔 이전
어린 시절에는 나라현 카시하라시에서 자랐다. 이후 텐리 고등학교[4]로 진학, 고시엔 2회전 경기까지 진출했으나 센다이 육영 학원 고등학교에게 패했다. [5]이후 1996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2순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 등번호는 64번을 배정받았다.[6]
3. 한신 타이거스 시절
입단 첫 해부터 '대형 내야수'라는 기대를 받았으나, 1997년 2군에서 타율 1할대를 기록했다. 하지만 1998년부터 유격수로 전향하였고[7] 1999년에는 2군 올스타전에 참가하게 된다.한 해 뒤인 2000년 2군에서 타율 2할 7푼 6리와 9홈런을 기록하여 10월 3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경기에서 1군에 데뷔하였다.
2001년에는 오른쪽 어깨 수술을 받고 1군과 2군 모두 출장하지 못하였지만, 2002년부터 등번호를 한신의 전설적인 외국인 선수 랜디 바스의 등번호였던 44번으로 바꾼 이후, 5월 8일 1군 첫 안타, 25일 1군 첫 홈런을 기록하였다.
이후에는 1군과 2군을 왔다갔다 하다가 2004년 110경기에 출장하며 112안타 5홈런 41타점, 타율 3할 1푼 6리를 기록하여 아쉽게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지만 가능성을 보였다. 이 시즌을 끝으로 원래 3번을 달던 야기 히로시가 은퇴하자 등번호 3번을 물려받았고, 97경기에 출장하였다.
2006년에는 주전 3루수였던 이마오카 마코토의 부상[8]으로 132경기에 출전하여 3할 1리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그럼에도 규정타석을 충족하지 못하였다(...)
이후 2008년, 등록명을 본명으로 바꾸고 카와카미 겐신으로부터 통산 첫 만루홈런을 뽑아내는 등 활약을 펼쳐 드디어 프로 첫 규정 타석을 충족하였다. 성적은 136경기 출전, 128안타 8홈런 52타점으로 타율은 2할 9푼 8리.
2009년에도 규정타석을 충족하며 잘 출장하다가 2010년, 크레이그 브라젤과 아라이 타카히로, 토리타니 다카시등의 내야 구성으로 인해 주전 출장 기회가 확 줄었고, 이후 2015년까지 주로 대타로 출전하다 은퇴하였다. 현역 말년엔 오승환과도 한솥밥을 먹으며 한국 팬들에게도 나름 이름을 알렸다. 은퇴 이후 그가 달던 등번호 3번은 2016년 신인 1차지명을 받은 오오야마 유스케가 달게 되었다.
4.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는 현역 시절의 경험을 살려 야구 평론가와 해설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5. 관련 문서
[1] 1997년부터 2007년까지는 발음이 똑같지만 한자가 다른 関本 健太郎를 등록명으로 사용.[2] 迫り来る速球を叩き込め健太郎 歓声を背に受ける男の雄姿 (다가오는 속구를 힘차게 때려라 켄타로 함성을 등에 지는 남자의 웅대한 모습)[3] 勝負をつけろ今こそ 頼むぞ賢太郎 みなぎる力燃えたぎらす根性魂 (승부를 내라 지금 당장 부탁한다 켄타로 넘쳐 흐르는 힘 불타오르는 근성의 혼)[4] 나라현의 야구 명문으로 천리교 재단이 운영한다. 후지모토 히로시 감독이나 나카무라 쇼고 등을 배출한 고등학교이다.[5] 김용강 전 선수가 이 학교 출신이다.[6] 이 번호는 현재 한신의 신인 투수인 오카도메 히데타카 선수가 쓰고 있다.[7] 원래 한신 유격수였던 쿠지 테루요시가 주니치로 이적했다. 그 빈 자리는 세키모토 본인을 비롯해 와다 유타카나 기타 신인들이 돌아가며 메우다가 2004년 토리타니 타카시가 등장하고 나서야 안정화되었다.[8] 이 시즌부터 이마오카는 급격한 하락세를 겪고, 결국 2009년 전력외 통보를 받고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 후 거기서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