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非暴力主義 / Nonviolent resistance / Nonviolent action / Civil resistance비폭력 저항 또는 비폭력 행동은 종종 시민 저항(civil resistance)이라고도 하며 폭력과 폭력의 위협을 자제하면서 사회 변화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상징적 항의, 시민 불복종, 경제적 또는 정치적 비협조를 하거나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에 따라 사티아그라하 및 건설적 프로그램(constructive program)을 비롯한 기타 방법을 통한 실천(practice)을 말한다. 흔히 권력의 억압이나 폭력 혹은 국가의 옳지 않은 정책이나 법률에 대해 현재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무언가가 바뀌어야 한다고 느끼는 개인이나 그룹이 비폭력으로 저항 및 불복종으로 강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비폭력(非暴力)과 주의(主義)를 합쳐 '비폭력주의'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고 있지만 오역이며 '비폭력 저항'이 올바른 표현이다. 영어 "Nonviolent resistance(revolution)"가 무저항주의(無抵抗主義)라는 용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국어사전에도 등록되어 있고 자주 쓰이는 단어지만 엄연히 오역이다. 일단 nonviolent 자체가 '무저항'이 아니라 '비폭력'을 의미하며, 그 내용 상으로도 폭력적인 수단 이외의 다른 수단으로 저항하거나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Nonviolent resistance(revolution)"이다. 그러므로 저항하지 않는 주의라는 뜻의 무저항주의라는 용어는 매우 부적절하다.
2. 역사
비폭력주의는 여러 예를 볼 수 있는데 아테네의 고전적 비극작품인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등에도 그 예가 있으며 고대 로마의 유대인이나 평민들의 군역거부, 기독교도의 이교예배강제에 대한 거부 등의 예도 있다. 고대 인도에서도 힌두교도·불교도·자이나교도가 보여줬던 아힌사[1]도 이러한 비폭력주의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11세기 이교도라고 불렸던 카다리파에도 비폭력주의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비폭력주의의 전통은 여성참정권 운동이나 제1·2차 세계 대전기의 평화운동, 반나치스 저항운동과도 이어져 있다.현대의 비폭력주의로 유명한 사람은 러시아의 대문호인 레프 톨스토이를 들 수 있다. 크림전쟁 종군 무렵부터 톨스토이는 현존질서에 대한 비협력 군역·정부근무·납세·배심원 취임거부 등을 주장했고, 그의 영향을 받은 톨스토이주의자들은 볼셰비키 정권 하에서도 무기를 들지 않고 투옥이나 처형을 받아들였다. 톨스토이가 그 구원에 힘썼던 두호보르 교도도 비폭력주의로 유명하다.[2]
비폭력주의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마하트마 간디다. 간디는 "무살생, 비폭력(Ahimsa)은 가장 위대한 사랑이다. 그것은 최상의 법칙이다. 이것만이 인류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다. 비폭력을 믿는 사람은 살아 있는 신을 믿는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비폭력주의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결집시켰다. 이는 외세를 두려워만 하던 인도인들에게 자긍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 힘으로 인도는 독립을 쟁취하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간디가 이러한 운동을 벌일 수 있었던 힘은 소로, 톨스토이, 러스킨으로부터 받은 영향과 인도의 아힌사 전통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기반한 사티아그라하 운동은 ‘스스로 정의와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여 적대자의 회심을 촉구’하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인도의 독립운동 과정 중에 생긴 불복종·비협력·비폭력의 저항주의를 간디주의라고 한다.[3]
간디주의는 이후 미국 흑인해방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미국 흑인 해방운동의 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은 비폭력의 대중적 시민불복종운동을 벌였다. 그는 흑인이 백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얻어내기 위한 ‘공민권 운동’을 이끌면서 1963년의 워싱턴 대행진 등의 비폭력운동을 이끌었다.
티베트 독립운동을 총지휘하는 달라이 라마 14세도 비폭력주의를 끝까지 고집한다. 그러나 2008년에 비폭력 저항노선을 무시하는 중국 정부의 진압 때문에 반발하기도 했지만 위구르 독립운동이 쿤밍역 칼부림 테러로 인해 중국 민중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지지를 급격하게 잃고 결국 중국은 위구르를 더욱 잔혹하게 탄압하는 것으로 답한 것처럼 계속 비폭력주의를 이어가는 게 더 이득이 될 것이다.
박근혜 정부 퇴진 운동은 약 반년간 벌어진 가장 큰 규모의 비폭력시위로, 결국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는데 성공한다.
3. 원리
고전적으로 권력은 소수의 지도층이 지니고 있고, 이 권력을 사용해 대중을 원하는 방식으로 이끌며 지도층의 구성원이 바뀔 수는 있으나 이 권력은 불변한 것이라는 이론이 받아들여졌다.[4]그러나 이에 반하는 이론이 대두되었는데 권력은 대중에게서 나오고 대중이 이 권력을 지도층에게 쥐어주는 것이며, 대중은 지도층이 자신이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면 그 권력을 빼앗을 수 있다는 이론이 생겨났다.[5]
비폭력주의는 권력이 후자의 이론으로 인해 생기는 것으로 보고, 지속적으로 그들의 권력에 저항해 결론적으로 권력을 되찾는 것이다.
우선 비폭력주의는 주위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쉽다. 자신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피해를 줘야 한다는 부담이 사라지기 때문에 한 번 시작하면 주위에서 지지를 얻고 직접 참여도 늘어난다. 한쪽이 폭력을 행사하는데도 다른쪽이 비폭력주의로 나선다면 선악 관계가 분명해지기 때문에 폭력을 행사하는쪽이 주위를 인식한다면 계속 폭력적으로 나서기 힘들고, 설사 그러지 않더라도 비난 및 지지를 잃기 쉽다. 비폭력주의 집단을 상대하는 집단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효과도 나타낸다. 그 이후에 나오는 모든 결과가 좋으면 비폭력주의를 택한 집단에 찬사가, 만약 안 좋으면 그렇게 나온 상대 집단에 비난이 쏟아지는 난감한 상황을 떠안기는 식이다.
비폭력주의는 거대한 심리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사실 비폭력주의는 폭력적인 상황보다 용기가 더 필요하다. 상대방은 폭력적 상황을 예상하거나 애초에 폭력적으로 상대하기로 계획하고 나오는데 정작 본인이 할 것은 "폭력을 휘두르지 말고, 설사 자신이 맞더라도 상대방을 때리지 말고 저항해라."라는 아무런 방어 수단 없이 운동에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꽤나 큰 담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를 상대하는 입장에서도 불리한 점은 있다. 우선 폭력적인 운동을 진압하는 것과 다르게 인력과 물자를 더 넣는다고 진압 성공 확률을 더 높이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과잉진압을 하면 역효과만 일어난다. 빠르게 지지를 얻는다는 비폭력주의의 특성을 보면 얼마 있지 않아 집단이 매우 커질것 인데 만약 이들이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냐는 우려가 부상하기 시작한다.[6] 실제로 비폭력 운동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이 자주 일어난다. 정해진 시간에 집단 행동을 해서 결속력을 보여주는 행진, 집회가 대표적이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규탄 시위에선 군대에 맞서 시위대가 Toyi Toyi라고 부르는 대규모의 춤을 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패한 비폭력주의도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은 목표가 명확하지 않거나 다른 이유로 강력한 리더십의 부재로 갈팡질팡한다는 것이다. 피해를 받으면 그만큼 돌려줘야한다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는게 비폭력인데, 이때는 우리가 왜 비폭력주의를 외치는지, 결국 목표가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강조하면서 비폭력 운동을 계속 이어나가야하고, 행여나 발생하는 양방 폭력사태도 소규모 사태로 중단시키고 비폭력주의가 주를 이끈다면 결국 성공한다. 그러나, 때에 따라 비폭력주의 운동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언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음으로 사람들의 이탈도 쉽게 일어난다. 대중을 이끄는 자의 역할이 더더욱 중요해지고 이에 성공한 마하트마 간디 및 마틴 루터 킹이 위인으로 묘사되는건 이 때문이다.
4. 한계와 비판
A freedom fighter learns the hard way that it is the oppressor who defines the nature of the struggle,and the oppressed is often left no recourse but to use methods that mirror those of the oppressor. At a point, one can only fight fire with fire.
투쟁의 방법을 정하는 것은 억압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억압하는 사람들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억압하는 자들이 쓰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을 참으로 어렵게 알게 된다. 어느 시점부터는 강대강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넬슨 만델라[7][8]
투쟁의 방법을 정하는 것은 억압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억압하는 사람들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억압하는 자들이 쓰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을 참으로 어렵게 알게 된다. 어느 시점부터는 강대강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넬슨 만델라[7][8]
I believe it's a crime for anyone being brutalized to continue to accept that brutality without doing something to defend himself.
자신을 방어하지 않고 계속 잔인하게 고통당하는 것은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믿는다.
말콤 엑스
자신을 방어하지 않고 계속 잔인하게 고통당하는 것은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믿는다.
말콤 엑스
The concept of nonviolence is a false ideal. It presupposes the existence of compassion and a sense of justice on the part of one's adversary. When this adversary has everything to lose and nothing to gain by exercising justice and compassion, his reaction can only be negative.
비폭력주의는 잘못된 이상이다. 그것은 상대방이 동정심과 정의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깔고 있다. 그런데 상대방이 동정심이나 정의감으로는 아무 소득이 없고 잃기만 한다고 판단한다면, 그(상대방)는 계속 나쁜 짓을 저지르기 마련이다.
조지 잭슨, 흑표당의 당원이자 블랙 게릴라 패밀리의 창시자
비폭력주의는 잘못된 이상이다. 그것은 상대방이 동정심과 정의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깔고 있다. 그런데 상대방이 동정심이나 정의감으로는 아무 소득이 없고 잃기만 한다고 판단한다면, 그(상대방)는 계속 나쁜 짓을 저지르기 마련이다.
조지 잭슨, 흑표당의 당원이자 블랙 게릴라 패밀리의 창시자
비폭력은 어떤 의미에서 최악의 폭력이다.
자크 데리다
한편 체 게바라, 레온 트로츠키, 찬드라 보스는 비폭력주의와는 강경하게 반대 입장에 있는 사상가였다. 이들은 비폭력주의가 부르주아 계급의 도덕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강요하려는 시도이며 폭력은 혁명적 변화의 필수이며 자위권은 기본권이라고 주장했다.자크 데리다
조지 오웰은 간디의 비폭력 저항 전략이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권리가 있는 국가에서만 효과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의문을 표했다. 만일 인도를 식민 지배하는 국가가 영국이 아닌 권위주의 독재 국가였다면 씨알도 안 먹히는 운동이었다는 뜻이다.[9][10] 자크 데리다는 폭력이 인간의 삶에 있어 원초적인 요소이며, 비폭력주의는 자신만의 비폭력 도덕 원리를 내세워 타자의 주체적 인식을 배제하여 나만의 진리로 중심화하고 동일화시켜 타자를 억압하고 속박하는 어떤 의미에선 최악의 폭력이라고 맹비판하며 더 적은 폭력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비폭력주의의 비판가들은 비폭력 운동의 성공적인 사례에서는 무력 또한 동원되었지만 곧 잊혀지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냉정하게는 힘의 논리 앞에서 매우 무력하다는 것이 커다란 단점이다. 간디조차 폭력적인 사람에게 비폭력을 가르칠 순 있어도 겁쟁이에게는 비폭력을 가르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몇몇 사상가들은 비폭력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무력투쟁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성공적인 비폭력 저항 운동은 언제든지 폭력 운동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심어주면서 힘을 과시했다. 아힌사 사상이 짙은 인도에서도 정작 걸핏하면 유혈 사태가 일어나는데 이는 폭력을 억압하기만 한 부작용이라고 주장한다.
5. 관련 인물 및 단체
6. 대중 문화에서의 관련 인물 및 단체
- 원피스 -
몽키 D. 드래곤 및 자용군- 원래 비폭력 단체였으나 세계정부가 비폭력운동에 가하는 폭압적인 진압을 목격한 뒤 폭력저항운동으로 전향. - 진격의 거인 - 칼 프리츠 - 극단적 비폭력주의 사상으로 마레 민족의 반란이 일어나자 저항을 포기한 채 자신과 자신의 민족을 섬에 가두고 멸망을 기다렸다.
[1] 일반적으로 폭력을 이용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인도 독립운동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에 의해서 정치이념으로서 거론되고, 비협력 불복종의 점성이 강한 운동의 근간을 이루었는데 그가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의 인권보호를 위해서 정치운동의 이념으로서 안출한 〈사티야그라하(진리의 파착)〉에 기원한다. 이 비폭력의 원어는 아힌사(ahinsā)인데, 이는 원래 고대 베다의 제사의 중요한 요소로서 가축을 살해하는 것(힌사)에 대해서, 윤회와 거기에서 이 해탈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강조된 큰 덕목으로, 모든 생물을 상처를 내거나 죽이거나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데 가령 불교나 자이나교에서는 오계의 하나로서 간주하며 한역어로는 〈불살생〉이라고 한다.[2] 톨스토이는 1904년 러시아와 일본이 싸운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 전쟁을 강력히 비판했으며, 당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인들한테 불교를 가르치던 일본인 승려인 샤쿠 소엔한테 같이 손잡고 반전투쟁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샤쿠 소엔은 "이 전쟁(러일전쟁)은 정의롭다"며 거부했다. 이렇게 러일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으로 본 일본인 승려는 샤쿠 소엔뿐만이 아니었는데 러일전쟁이 터지자 일본 불교계는 이 전쟁이 '기독교적 악마 국가'인 러시아를 상대로 하는 정의로운 전쟁으로 간주하여 일본의 여러 불교 종단에서 종군승려 파송 제안이 하도 쇄도해 일본 정부 당국이 아예 종군 승려 수를 제한해야 할 지경이었다.백인이여, 불교가 그렇게 평화적인가[3]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간디는 영국을 상대로 폭력적인 수단만 쓰지 않았을 뿐이지, 영국에 대한 협조나 복종 일체를 거부했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반드시 독립을 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간디의 비폭력을 조선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일제에 복종하고 협조했던 것과 동일시하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하는 일이다.[4] Monolithic power theory[5] 예를 들어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권력이 지도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하고 있다.[6] 실제로 시리아 내전, 미얀마 내전은 대규모 시위에서 시작해 내전까지 번진 것이다.[7] 지금에야 비폭력 흑인 인권 운동으로 유명한 인물이지만 의외로 젊은 시절에는 비폭력에 한계가 있다면서 변호사 사업도 집어던지고 비밀리에 군사 훈련까지 주도하다가 체포될 정도로 무장 투쟁에 열심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격 연습으로 새 한 마리를 쏘아 맞혔는데 이를 지켜본 어느 여자아이가 "왜 새를 쏘아 죽였어요? 엄마새가 슬퍼할 거예요."라고 말한 것이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아 결국 감옥에서 완전히 무장 투쟁을 버리고 27년 만에 출소한 후에는 지금 우리가 잘 아는 비폭력운동에 힘썼다. 그런데 이 글의 출처가 대통령 재임 중 발간된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1994)인데 비폭력운동으로 전환했음에도 비폭력운동의 한계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8] 반대로 말하면 억압자들이 비폭력을 폭력으로 잔인하게 진압하기 전에는 왠만하면 비폭력 저항운동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9] 실제로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영국이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에 골머리를 앓자 저항 세력이 안 나올 때까지 전부 죽이라고 조언했고, 나치 독일은 유럽 점령지에 설치한 국가판무관부에서 이를 직접 실행했다. 그 결과는 당연히 무장 투쟁으로 돌아왔다.[10] 만약 일제가 동남아를 전부 지배하는 데 성공하고 인도 마저 함락 되었다면 영국 보다 더 잔인한 통치를 할 게 뻔한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