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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라바드국 حیدرآباد کی بادشاہی State of Hyderabad | |||||
국기 | 국장 | ||||
알라께 영광 있으니 Al Azmat Allah | |||||
상징 | |||||
국가 | Ya Osman 아 오스만 | ||||
1948년 하이데라바드 왕국의 강역 | |||||
1724 ~ 1948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무굴 제국 | 인도 | ||||
지위 | 무굴 제국의 봉신국 (1724~1798) 대영제국의 보호국 (1798~1858) 인도 제국의 번왕국 (1858~1947) 미승인 독립국 (1947~1948) | ||||
위치 | 인도 아대륙 | ||||
수도 | 아우랑가바드 (1724~1763) 하이데라바드 (1763~1948) | ||||
정치 체제 | 군주제 | ||||
국가 원수 | 니잠 | ||||
주요 군주 | 아사프 자흐 1세 (1720~1748) | ||||
언어 | 텔루구어, 마라티어, 칸나다어, 우르두어 | ||||
면적 | 214,187km2 (1941년) | ||||
인구 | 16,338,534명 (1941년) | ||||
종교 | 힌두교 81% 이슬람교 13% (국교) 기독교 6% | ||||
통화 | 하이데라바드 루피 | ||||
주요 사건 |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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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칸 고원 중남부에 존재했던 왕국. 수도는 하이데라바드였다.원래 이 지역은 무굴 제국의 데칸 총독령이었다. 그러나 무굴 제국이 아우랑제브의 죽음 이후 점차 쇠퇴하자 무굴의 대재상이던 아사프 자흐 1세가 델리에서 내려와 하이데라바드를 기반으로 왕국을 세웠다. 명목상으로는 무굴 제국의 속국이었으나 무굴 제국은 이미 망해가던 터라 사실상 반쯤 독립국가나 다름없었다. 아사프 자흐 1세는 스스로를 나와브보다도 격이 높은 '니잠'으로 칭하고 하이데라바드 안에서는 사실상 독립된 군주로 행세했다.
무굴 제국의 영향력이 완전히 소멸하고 대영제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한 이후에도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건재했다. 오히려 영국에 그 누구보다 빠르게 줄을 댔다.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수많은 인도계 번왕국들 가운데에서도 첫 번째로 영국의 보호 아래에 들어간 왕국이었고, 줄을 잘 선 덕에 영국 식민통치 기간 내내 그 권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1901년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수많은 인도 번왕국들 가운데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왕국이었다.
이후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인도의 거센 독립 열망을 이기지 못하고 인도를 독립시켰다. 이 과정에서 인도 중앙정부는 영국으로부터 하이데라바드 왕국에 대한 조약을 거의 그대로 계승했다. 인도 중앙정부군을 하이데라바드 내부에 주둔시키지 못하는 것만 제외하면 사실상 영국 식민지 시대와 거의 똑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하이데라바드라는 거대한 세력이 반쯤 독립된 상태로 인도 한가운데에 존재한다는 것은, 당시 분리주의 운동을 때려잡던 인도 정부에게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하이데라바드 주민들은 거의 힌두교도지만 왕실은 이슬람교도였다. 결국 인도 정부는 “미치광이들이 하이데라바드의 운명을 쥐고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폴로 작전'을 통해 하이데라바드 왕국을 침공했고, 인도의 압도적인 물량을 견딜 수 없던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무력하게 무너졌다.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1950년 1월 26일 공식적으로 인도 연방에 합병당했으며 1956년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하이데라바드 주가 안드라프라데시 주, 봄베이 주로 분리되면서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2. 역사
2.1. 무굴 제국의 봉신국
원래 하이데라바드 지방은 무굴 제국 아래에 속해있는 일개 지방이었다. 그러나 무굴 제국이 아우랑제브 사후 휘청거리면서 국력이 쇠퇴하자 하이데라바드 역시 반쯤 독립적인 상태로 떨어져 나가게 된다. 치열한 쟁탈전 끝에 하이데라바드를 차지한 사람은 아사프 자흐 1세였다. 본디 무굴 제국의 대재상직을 맡았던 인물로, 무함마드 샤 황제 아래에서 제국을 개혁하려 시도했지만 엄청난 부정부패에 실패하고 데칸으로 낙향해 돌아온 사람이었다.1724년 하이데라바드 왕국을 세운 아사프 자흐 1세는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무굴의 봉신국을 자처했지만, 사실상 그냥 독립국의 군주처럼 행세했다. 그러나 독립국이라고 해서 상황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으니, 남쪽에서 치고올라오는 마라타 제국을 상대해야했기 때문. 마라타 제국은 저물어가는 무굴 제국을 쳐부수고 인도의 패권을 장악해나가고 있었다. 당시 전쟁영웅 바지라오 1세 아래에서 최전성기를 찍던 마라타 제국을 이기기는 무리였던지라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마라타인들에게 세금과 조공을 바치면서 사실상의 속국으로 변했다. 1798년까지는 무굴 제국의 봉신국이기도 했기에 실상은 이중 속국이었다.
18세기 후반에는 마라타인들에 이어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에 들어온다. 영국군은 우월한 화력을 바탕으로 마라타 군대를 박살내고 인도를 착실하게 장악해나갔다. 하이데라바드 역시 마찬가지였던지라 1778년 처음으로 영국군이 하이데라바드 왕국 내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이때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정말 양쪽에서 얻어맞는 샌드백 신세였는데, 1795년 아직 기세가 살아있던 마라타인들에게 영토를 뜯겼고 영국군 주둔자금을 대기위해 일부 영토를 마이소르의 영국 주둔군에게 할양해줘야하기까지 했다.
2.2. 영국의 번왕국
영국 식민지 시대의 하이데라바드 전경 |
이후 하이데라바드는 영국의 충실한 보호국으로 남았다. 제2차, 제3차 앵글로-마라타 전쟁에서 영국군의 편을 들어 참전했고 앵글로-마이소르 전쟁, 1857년의 세포이 항쟁 때에도 영국의 편을 들어줬다. 이후 아사프 자흐 3세, 아사프 자흐 4세, 아사프 자흐 5세 등이 연달아 하이데라바드 니잠 직을 이었고 이들 모두 영국에 충성을 유지하면서 인도 제국 시기 내내 강력한 자치권을 누렸다.
영국의 속국이었다지만 아사프 자흐 5세 때에 일부 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 하이데라바드의 재상 살라르 중은 이전까지 죄다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던 행정체계를 대규모 개혁했다. 이전까지는 모든 실질업무가 재상의 관할이라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행정의 효율성도 극도로 떨어졌는데, 영국으로부터 선진적인 행정체계를 도입하여 행정에 대규모 개혁을 이루어냈던 것. 1867년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5개의 주와 17개의 현으로 나뉘었고 사법성, 공공사업성, 보건성, 교육성, 경무성 등이 세워졌다. 바로 그 다음해에는 각지에 주지사들을 임명하고 각 부서마다 장관 및 차관을 임명해 행정의 기틀을 다졌다.
대규모 개혁을 이룩한 아사프 자흐 5세가 죽자 아사프 자흐 6세가 1869년 3세의 나이에 새로운 니잠으로 등극했다. 워낙 어렸기에 재상 살라르 중 등을 포함해 여러 신하들이 섭정으로 대리통치했고, 아사프 자흐 6세는 14년이 지난 이후에야 성년으로써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아사프 자흐 6세는 1911년까지 무려 42년이라는 세월 동안 하이데라바드를 다스렸다. 이때 하이데라바드의 공식 언어를 페르시아어에서 우르두어로 바뀌었으며, 인도의 순장 악습인 사티가 폐지됐다. 하이데라바드와 인도 전역을 잇는 철도가 꼼꼼히 깔리며 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어서, 1908년 하이데라바드를 덮인 무시 대홍수로 인해 5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아사프 자흐 6세가 1911년 사망하자 최후의 니잠 아사프 자흐 7세가 왕위에 즉위했다. 아사프 자흐 7세는 영국 식민당국에 충실히 협조했다. 하이데라바드 국영은행을 만들어 자체적인 통화를 발행했는데 덕분에 하이데라바드는 인도에서 유일하게 자체 통화를 발행해 사용할 수 있는 번왕국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인도 식민정부에서 발행한 인도 루피를 사용했다. 1930년대에는 베굼페트 공항을 만들었고, 인도 최초의 항공사인 '니잠 데칸 항공'을 설립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 외에 대홍수를 막기 위해 2개의 거대한 호수를 판다거나 종합병원, 도서관, 공공정원 등을 확충하는 등 나름 공공시설에도 신경을 썼다고 한다.
아사프 자흐 7세 시절에 구입한 1913년형 롤스로이스 실버 고스트가 아직도 남아있는데, 주행기록이 불과 555km밖에 안 되는 신품이나 다름없는 상태라고 한다.
2.3. 인도 독립 이후
'폴로 작전'으로 하이데라바드로 진군하는 인도군 |
당시 영국인들은 여러 번왕국들에게 인도 혹은 파키스탄에 속할지 선택의 자유를 주겠다고 말했다. 하이데라바드는 고심 끝에 1947년 6월 11일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중립 선언을 했다. 하지만 인도가 그 꼴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거대한 통일 국가를 만들어야하는 인도 중앙정부 입장에서, 하이데라바드 왕국 같은 거대한 독립국이 자치권을 누리면서 인도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하이데라바드 왕족들은 무슬림이었는데, 한창 파키스탄과 종교 갈등으로 치고박던 인도 수뇌부가 하이데라바드를 눈에 박힌 가시처럼 생각하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이데라바드를 통치하던 니잠과 왕족, 귀족들은 무슬림이었기에 힌두교 중심 세력인 인도에 합류하기 싫어했지만, 반대로 힌두교도들이 많은 일반 하이데라바드 시민들은 인도에 편입되고 싶어했다. 인도는 이를 빌미로 하이데라바드를 꿀꺽할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
당시 니잠은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하이데라바드의 군대는 고작 2만 4천여 명에 불과했고 개중 훈련을 받고 제식을 갖춘 병사들은 6천여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 인도군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수많은 숙련병들이 넘쳐났고 동원할 수 있는 규모도 수백만을 가볍게 넘어갔다.
인도군 사령관을 직접 맞이하는 하이데라바드 니잠 |
1948년 9월 13일 오전 4시, 인도군은 결국 '폴로 작전'을 펼쳐 모든 방향에서 하이데라바드 왕국을 침공했다. 패닉에 빠진 하이데라바드 대표부는 유엔에 즉시 이 사실을 알리고 영국을 포함한 외국 군대의 지원을 호소했지만, 상식적으로 하이데라바드를 위해서 인도라는 거대한 인구대국과 척을 질 국가가 있을 리가 없었다. 9월 16일 파리에서 열린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하이데라바드는 사실상 버려졌다. 결국 9월 17일 오후 5시에 니잠이 공식적으로 인도에 항복했고, 하이데라바드 정부가 공식 해산당했다. 인도는 군정청을 구성해 직접 하이데라바드 지방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인도는 1950년 1월 26일 하이데라바드를 공식적으로 인도에 통합하고 니잠의 통치를 끝내버렸다. M. K. 멜로디가 하이데라바드 총리로 지명됐고 하이데라바드는 완벽히 인도 중앙정부 관할로 들어갔다. 1956년, 인도의 행정구역을 언어 분포에 맞추어 다시 재편하는 과정에서 하이데라바드 주 역시 분할당했다. 이때 하이데라바드가 안드라프라데시 주와 봄베이 주로 분할되었으며, 1960년에는 마하라슈트라와 구자라트, 카르나타카 등 여러 주들로 추가분할했다. 이로써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 인도는 하이데라바드와 정확히 반대되는 입장에 있던 카슈미르에서는 정확히 반대로 행동했다. 카슈미르는 하이데라바드와 달리 군주가 힌두교도고 백성들이 이슬람교도였는데, 인도 정부가 카슈미르를 병합한 명분은 "번왕국의 합병 여부는 군주의 선택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이는 곧바로 카슈미르 분쟁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된다.
3. 역대 니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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