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두어 اورنگ آباد
영어 Aurangabad인도의 두 도시 모두 같은 표기이다.
1. 마하라슈트라 주의 도시
인도 중서부 마하라슈트라주의 도시. 나시크에서 동쪽으로 120km, 아마드나가르에서 동북쪽으로 80km, 잘나에서 서쪽으로 5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120만명으로, 다양한 민족과 종교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언어적으로는 마라티어 61%, 우르두어 23.5%, 힌디어 12%로 나타난다. 종교 분포는 힌두교 51%, 이슬람 31%, 불교 15%, 자이나교 2%, 기독교 1% 순이다.
타지마할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비비 까 마끄바라가 유명하다. 근교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아잔타 석굴과 엘로라 석굴, 1327-34년간 델리 술탄국의 수도였던 다울라타바드 (데바기리) 성채 등의 볼거리가 있다. 장미식당이라는 한식당이 있어서 여행 도중에 한국음식을 찾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들르기도 한다. 여담으로 파키스탄의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 자마아티 이슬라미의 창립자 아불 알라 마우두디가 이곳 출신이다.
1.1. 역사
1610년 말리크 암바가 아메드나가르 술탄국의 수도로 세운 도시로, 당시 지명은 카드키였다. 그의 사후 아들 파테흐 칸이 파테나가르로 지명을 바꿨으나, 1636년 무굴 제국령이 된 후 1653년 데칸 총독으로 봉해진 아우랑제브가 자신의 이름을 붙여 아우랑가바드로 개칭하였다. 이후 황제에 오른 아우랑제브는 1681-83년간 도시에 머물며 데칸 원정에 나섰고, 무굴 황실의 영향으로 도시는 크게 발전하였다. 아우랑제브가 떠난 후에도 도시는 무굴 제국의 주요 군사 기지이자 비단 생사지로 번영하였고, 당시 인구는 20만에 이르렀다.무굴 제국이 쇠퇴하자 1724년 니잠 아사프 자 1세가 데칸에서 자립하였고, 아우랑가바드는 1763년 하이데라바드 천도 전까지 아사프 자 왕조 (하이데라바드국)의 수도였다. 이후 쇠퇴하던 아우랑가바드는 19세기 말엽 면직 공장이 세워지며 산업화되었으나 20세기 초엽 데칸 기근을 겪으며 재차 침체기를 겪었다. 1980년대 파키스탄과의 갈등으로 힌두주의가 득세하며 무굴 황제의 이름이 붙여진 아우랑가바드에 대한 개명 시도가 일었다. 그중 지지를 얻은 지명은 마라타 제국의 2대 차하트라파티인 삼바지 보살레의 이름을 딴 삼바지나가르였고, 이는 2022년 6월 주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2. 비하르 주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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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타지마할 | 비비 까 마끄바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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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북동부 비하르 주의 도시. 바라나시에서 동남쪽으로 130km, 파트나에서 서남쪽으로 90km, 부다가야에서 서쪽으로 50km 떨어진 평원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10만명으로, 1/4의 무슬림과 3/4의 힌두교도로 구성되어 있다. 농업이 발달하였다. 수르 제국 시절 전략적 거점으로 중시되었고, 서북쪽 30km 지점 사사람에는 수르 제국의 창거자 셰르샤 수리의 영묘가 있다.
2.1. 갤러리
셰르 샤 수리 영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