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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조선귀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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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의 조선 세종 시절 음악가:
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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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 박연
朴延 | 朴燕
파일:attachment/박연/Weltevree.jpg
네덜란드 알크마르의 한 마을이자 그의 고향인 더레이프(De Rijp)에 세워져 있는 벨테브레이의 동상.[1]
네덜란드명 Jan Janse de Weltevree
얀 얀서 더벨테브레이
출생 1595년
네덜란드 공화국 노르트홀란트주 알크마르
(現 네덜란드 왕국 노르트홀란트주)
사망 1656년 (향년 61세)
또는 그 이후[2]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現 대한민국)
직업 군인

1. 개요2. 생애3. 돌아가지 않은 까닭4. 대중 매체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네덜란드에서 귀화한 조선의 무관. 본명은 얀 얀서 더벨테브레이(Jan Janse de Weltevree), 귀화 후 하사받은 조선 이름은 박연이다.

화란[3] 출생으로 조선정착한 최초의 유럽인이다.[4] 박연이라는 이름은 '벨테브레이', '얀'과 비슷한 발음을 따서 지은 것이다.

2. 생애

암스테르담 북쪽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5]인 드레이프(De Rijp) 출신으로 추정된다. 어느 시점에서 선원이 되어, 1626년에는 홀란디아(Holandia)호의 승무원으로 근무했다. 30대 초반인 1627년 바타비아로 항해하다가 표류해 제주도에 상륙했으나 곧바로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그가 탑승한 아우베르케르크호가 나포한 중국 상선을 동인도 회사 본부가 있는 바타비아로 몰고 가기 위해 부하들과 함께 중국 상선에 옮겨 탔다가 태풍을 만나 아우베르케르크호와 헤어지고, 식수가 떨어지자 마침 가까이 보이던 제주도에 부하 두 명을 거느리고 상륙했는데, 그때 중국 상선의 원래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배를 탈환해 도주해 버리는 바람에 제주도에 남겨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

당시 네덜란드에 조선(고려)은 식인 풍습이 있는 나라라고 알려져 있어서 효종의 사위인 정재륜의 공사견문록에 따르면 벨테브레이가 네덜란드에 있을 때 고려인들은 인육을 먹는다고 들었다며 처음 제주에 상륙했을 때 마침 밤이라 병졸들이 횃불을 켜고 다가오자 선원들이 자신들을 잡아먹을 준비를 하는 줄 알고 하늘이 사무치게 통곡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 시대 전반의 관례로는 조선과 통교하고 있는 나라 중에 접경국 출신의 표류자는 직접 송환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무조건 명나라로 보내 조치를 의탁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명과 후금이 서로 싸우는 등 정세가 좋지 않았기에 부산의 일본 왜관에 의뢰해서 일본으로 보내 조치를 의탁하려 했으나, 일본은 박연의 일행이 절리지단(切利支丹 - 크리스천)[6]이란 이유로 거절했다.[7] 그러자 조선 조정은 곧바로 송환을 포기했다. 결국, 그는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며 결혼해서 귀화했다.

병자호란이 발발할 때 동료 2명[8]과 함께 참전했으나, 박연만 살아남았고 동료들은 전사했다. 그 후 항복해 온 일본인청나라 사람들을 감시하는 일, 청나라를 피해 조선으로 귀화해 온 명나라 사람들을 비롯한 외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 자리, 대포를 개량하는 일 등을 맡았다.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헨드릭 하멜조선으로 표류했을 때 통역을 맡기도 했다. 갓 쓰고 한복 입은 백인, 그것도 같은 나라 출신이 와서 하멜과 동료들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26년이나 지나서 조선에 적응이 다 되었고 반대로 네덜란드어를 같이 나눌 사람들도 병자호란 때 죽어서 도통 말을 나누지 못해서 통역을 꽤 낯설어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나와있다. 하멜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네덜란드 말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서툴렀다고 한다. 다만 며칠 동안 같이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다시 능숙해졌다고 한다.[9] 이 때 조선인들이 하멜에게 벨테브레이를 가리키며 "이자가 어느 나라 사람인 줄 아는가?"라고 물었고 하멜이 "이분은 우리 네덜란드 사람[10]이 틀림없습니다."고 대답하자 조선인들은 웃으면서 "틀렸다. 이자는 조선 사람[11]이다."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성리학적 이데올로기 하에서는 외국인이라 하더라도 조정의 통치에 감화되어 전향하는 경우 향화인(向化人)이라 하며 우대를 했을지언정 오랑캐 취급은 하지 않았는데, 벨테브레이 역시 비슷한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하멜 표류기에서는 오로지 사무적인 얘기만 나눈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윤행임이 지은 <석재고(碩齋稿)>에 따르면 벨테브레이가 하멜 일행을 처음으로 만난 뒤 숙소에 돌아와 소매가 다 젖도록 울었다고 한다. 하멜로서는 표류하고 나서 얼마 안 지나서 만난 이역만리에 사는 네덜란드 사람 정도였겠지만 벨테브레이로서는 수십 년 만에 만난 동포였으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하멜은 자신을 서울 강가에 배웅해주던 1656년까지만 해도 벨테브레이가 살아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예순 살이 넘은 고령의 나이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기록이 없어 언제 죽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기록상으로는 조선 여자와 결혼해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혼혈이라 네덜란드 얼굴과 조선 얼굴이 반반 섞여 있다고 놀랍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이후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며 그의 후손을 자처하는 박씨 문파도 없다.[12] 박연은 외국 귀화인으로는 드물게 본관을 하사받지 않았기에 족보를 통해 후손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여계 후손[13]만 남으면서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의 자손들도 처음에는 혼혈의 특색이 진하게 나타났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한국인들과 오랜 통혼 때문에 한국인과 얼굴을 구분할 수 없어졌을 것이다. 벨테브레이가 네덜란드에 남기고 온 자식을 통해 이어진 후손이 소르본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1991년경에 한국에 있는 박연의 후손을 찾으러 한국에 입국해 학계와 치안본부(경찰청)의 도움을 받아 수소문을 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어 출국했다고 한다. 2014년에는 한국 쪽 후손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네덜란드 쪽 후손과 만나 유전자 감식을 받아보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10년이 넘도록 후속 기사가 없는 것을 보면 후손이라는 증거는 찾지 못한 듯하다.

3. 돌아가지 않은 까닭

일단 박연의 정착에는 그의 입장이 딱히 반영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당시는 명-청 교체기로 정세가 불안정했고, 일본 측에서도 키리시탄 박해로 인해 그의 송환을 거부했으니 박연은 사실상 돌아갈 방법이 없어 조선에 반강제로 정착한 케이스다. 그래도 정말로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다면 후대의 하멜처럼 억지로 몰래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텐데,[14]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아 체념이든 뭐든 눌러앉을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박연이 무슨 기록을 남긴 것은 아니기에 명확하게 그의 심정을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소속과 신분을 감안하면 그런 결정이 크게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와 조선의 기록[15]을 추적한 결과, 벨테브레이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사략선 아우베르케르크호의 (무장장으로 추정되는) 간부급 선원이었다.

그런데 당시 선원은 대표적인 막장 인생 중 하나였고[16]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유럽에서 가장 먼 거리까지 항해하는 회사였기에 더더욱 근무 여건이 열악했다. 다양한 통계에 따르면 네덜란드에서 출발한 상선이 일본의 나가사키까지 항해하고 복귀하는 데는 최대 2년이 걸렸으며, 그 동안 선원의 2/3 이상이 사망했다. 선원들의 평균 수명은 40살 정도에 불과했다. 마이크 대시의 '미친 항해'에 의하면, 동인도 회사는 이런 이유로 선원 충원에 어려움을 겪었고 기록이 나쁜 사람이나 범죄자 출신도 자주 뽑아 썼다고 한다. 안 그러면 선원을 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동인도 회사 선원 출신이라고 하면 뭐 하고 살았길래 거기까지 갔냐며 다른 뱃사람들조차 채용을 꺼렸다고 한다. 하물며 정규 상선도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는 그냥 흉악범 취급사략선의 간부라면 안정된 직업이라곤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실제로 헤어진 모함 아우베르케르크의 선원들은 단단히 벼르고 있던 포르투갈 해군[17]에 체포돼, 전원 마카오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즉 그가 선원 생활을 계속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선원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을 것이고, 운 좋게 교수형을 피했더라도 10년 가량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가 파도에 잡아먹히든 질병에 쓰러지든 해적에게 살해당하든 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조선에서는 서양식 무기 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마침 박연은 여기에 해박했기 때문에 조정에 쓸모를 입증해 중용받을 수 있었다. 즉 가진 것 하나 없는 시골 흙수저로 태어나 먹고살기 위해 거친 생활을 하던 사람이, 어쩌다 조선에 표류한 후로는 가진 기술을 나름대로 인정받고 후한 대접을 받자 눌러살기로 마음먹었으리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18]

하지만 동시에 이역만리에서 몇 남지 않은 동료를 잃고 영영 고향을 볼 수 없게 된 그리움은 컸던 모양인지,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인조에게 일본으로 갈 기회를 여러 번 요청했으나 거절당해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조선 입장에서도 수십 년간 조선에서 일하며 훈련도감의 핵심 인물이자 조선의 군사 정보에 대해 깊숙히 관여하게 된 사람을 마음대로 돌려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4. 대중 매체

5. 관련 문서



[1] 제작자는 엘리 발튀스(Elly Baltus). 공식 홈페이지 조선에서 무관직을 지냈기 때문에 융복을 입은 모습으로 표현했다. 왼쪽 허리에는 머스킷, 왼쪽 가슴 부위에는 카메라 3대가 오른발은 자동차, 왼발은 가 조각되어 있다. 항해자의 물품과 조선의 복식, 그가 만들었던 화약 무기 그리고 대한민국의 주요 수출 산업으로 박연의 복잡한 인생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서울어린이대공원에도 복제품이 있다.[2]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61세가 되는 1656년까지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하지만 이후 하멜은 벨테브레와 만난 적이 없고, 그에 대한 소식도 따로 전해들은 적이 없다. 즉 언제 사망했는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다.[3] 네덜란드는 '홀란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어서 동아시아에서는 홀란트를 한자로 치환한 화란으로 불렀다. 일본에선 포르투갈어 '올랑다(Holanda)'를 옮긴 '오란다'로 읽는다.[4] 정착이 아닌 서양인의 최초 조선 상륙 기록은 1582년 제주도에 표착한 마리이(馬里伊)라는 사람이다. 이는 포르투갈어로 선원을 뜻하는 마리녜이루(Marinheiro)의 음차이며, 본명은 알 수 없다. 그는 명나라 사행길을 통해 중국으로 송환되었다.[5] 2005년 기준으로 4,000명이다. 우리로 치면 파주시나 연천군에 속한 면읍 같은 곳이다.[6] 일본식 표현으로는 키리시탄(キリシタン)이다. '키리'를 切り로 훈차한 방식의 아테지이다.[7]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가톨릭 탄압 정책을 취했고 결국 벨테브레가 조선에 표류한 지 10여 년 뒤엔 시마바라의 난을 겪으며 가톨릭과는 완전히 척을 지게 된다. 이 당시 네덜란드는 개신교국이라 가톨릭과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에도 막부 사이에 분쟁이 있던 시기여서 네덜란드인에게도 적대적이었다.[8] 디럭 헤이스버르츠(Direk Gijsbertz), 얀 피르터르즈(Jan Pierterz).[9] 어렸을 때부터 익힌 모국어는 시간이 지나 까먹더라도 조금만 연습하면 금방 기억을 되찾는다. 현대 귀화인들의 경우에도 모국어를 자주 사용하지 않아 거의 까먹었더라도 며칠만 계속 사용하면 금방 감을 되찾는다. 예를 들어 유년기에 도미하여 20대 중반에야 귀국한 유일한 박사는 유년기를 미국에서 지낸 탓에 귀국 당시에는 한국어 말하기를 서툴러했으나, 금방 감을 되찾고 나중에는 한국어 연설을 멀쩡히 할 정도의 회화 실력을 되찾았다.[10] 실록 기록에는 '남만인(南蠻人)'이라고 나와 있다.[11] 하멜 표류기에는 '코레시안(Coresian)'이라고 표기되어 있다.[12] 한국경제에서는 원산 박씨가 그의 후예라는 기사를 냈으나 원산 박씨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13] 딸이나 손녀 등 여성 직계 자손의 후손이다.[14] 하멜은 어려운 처지에서도 동료들과 꾸역꾸역 돈을 모아 동네 어부의 어선을 구입했고, 이 배로 일본에 건너가 탈출했다.[15] 같이 표류한 부하 2명이 벨테브레이를 '호탄만'이라고 불렀다는 조선 측 기록이 있는데, 호탄만은 네덜란드어 Hoofdman(대위 혹은 과장을 의미) 정도로 추정된다.[16] 냉장고 같은 보존시설이 없으니 염장고기십스 비스킷(ship's biscuit)처럼 맛 따위 신경쓰지 않고 보존성만 극대화한 음식만을 먹어야 했고, 신선한 식품이 없으니 괴혈병각기병을 기본 소양처럼 달고 살았다. 또한 물은 변질이 쉬워서 물 대신 독주로 목을 축여야 했고, 당연히 샤워는커녕 세수조차도 하기 힘들었다. 거기에 배 내부에 물이 고였다가는 목재가 부식되고, 균이 증식해 질병이 생길 수 있으니 허구한날 걸레질을 하고 청소해야 했다. 맛대가리 없는 식사와 끔찍한 위생 환경, 그리고 높은 근무 강도에 따른 불만을 막기 위해 구타도 심했다. 그리고 각종 해난 사고의 위험에도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서 살아 돌아올 확률보다 죽어서 시체도 못 찾을 확률이 훨씬 높았다. 사실 현대에도 고된 일인 것은 마찬가지로, 원양어선 등의 선원은 대부분 개도국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도맡아 하는 분야다.[17] 이 당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아시아 해상에서 경쟁하는 사이였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는 대월 후 레 왕조찐씨 정권에 군함, 컬버린, 탄약을 제공했고, 포르투갈도 질세라 응우옌 가문광남국에 똑같이 지원해 주는 대리전을 펼치기도 했다.[18] 하멜과 벨테브레이의 결정적인 차이가 이것이다. 하멜은 부유한 집안 출신의 정식 선원이었고, 선원 시절 회계 담당이었기에 무기 제작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래서 하멜은 조선 조정에서 방치한 채 이곳저곳 끌려다니며 부려먹혔고, 고향에 가면 돌려받을 것도 있으니 돌아가리라 마음먹을 이유는 충분했다.[19] 현재는 네덜란드 농림축산식품부 특사로 활동 중이다.[20] 원작에서는 주인공 윌리엄에게 조선을 탈출할 방법은 없으니 그냥 포기하고 조선에 정착해서 살아볼 것을 권유하는데 아예 훈련도감에 자리까지 알아봐 주겠다고 한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원작과 드라마 둘 다 경상도 사투리로 얘기하는데 심지어 인물 소개 항목을 보면 "지는 마 원래는 네덜란드 사람이었는데예. 인자는 마 조선 사람 다 됐다 아인교? 인자는 네덜란드 말도 다 잊아뿌고 우리 조선말이 더 편합니더. 지는 마 조선이 너무 좋심더."라고 소개되어 있다.[21] 하멜은 네덜란드 소속이다.[22] 언어 레벨이 다소 논란이 되는데, 네덜란드어 2레벨에 조선어 1레벨이다. 너무 조선에 오래 살아서 네덜란드어가 매우 어색했다는 역사적 사실과는 반대로 적어놨다. 참고로 하멜은 네덜란드어 4레벨 조선어 2레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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