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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7:53:03

명량/역사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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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적 사실 관련
2.1. 인물들의 호칭 관련2.2. 교지의 시점 오류2.3. 전투에 참여한 함선 숫자 관련
2.3.1. 개봉 전2.3.2. 개봉 후
3. 복장 관련
3.1. 계절 옷차림 오류3.2. 조선 수군 복장·장비 관련3.3. 일본군측 복장 관련
4. 해전 관련
4.1. 영화상에서 등장한 무기 목록
4.1.1. 조선수군 승자총통, 조총 미사용4.1.2. 조총 만능설 관련
4.2. 폭발 관련
4.2.1. 개봉 전4.2.2. 개봉 후
4.3. 백병전 관련
4.3.1. 개봉 전4.3.2. 개봉 후
4.4. 충파 관련4.5. 자폭선 공격 관련4.6. 그외 전투 관련
5. 함선 관련
5.1. 세키부네의 크기 관련
5.1.1. 반론: 일본 함선은 상당히 커졌다
5.2. 대장선의 내구도 논란
6. 일본어 대사 관련7. 그 외

1. 개요

김한민 감독의 전작인 최종병기 활에서 보여준 상당히 공을 들인 시대 재현에서 많은 사극팬들의 지지를 받은 바 있으므로, 그보다 더 많은 예산이 투입된 이번 영화가 더욱 더 사극팬들의 기대를 받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시대 재현에 있어서 오류가 많은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으며, 영화적 허용으로 볼 수도 있을만한 요소로 보기에는 사실성을 떨어뜨리는 항목들이 많아서 따로 문서가 분리되었다. 이 영화 이후 개봉되는 동주박열이 역사 내용을 따르면서 성공을 거두거나 성공이 예상되고 있어 명량이 시대 재현을 제대로 못한 것은 명백한 비판점이다. 또 2017년에 개봉한 덩케르크가 생동감 넘치는 공중전을 엄청난 수준의 시대 재현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멋진 장면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극중 화려함을 위해 시대 재현을 무시해도 된다는 발언이 얼마나 몰지각한 것인지 공개적으로 밝혀진 셈이다. 김한민 감독이 연출한 모든 이순신 3부작에 나오는 문제점은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이 전투에 앞서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는지는 생략하고 전투에만 치중한 것도 큰 문제점 중 하나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대부분의 해전은 노량해전을 제외하고는 극적인 부분이 많지 않다. 이는 이순신 장군이 수군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감독은 조선 수군의 능력보다는 운이 따랐다는 어불성설한 설정을 집어넣었다. 결국 신파를 위해서 개연성과 현실성을 모두 무시하게 된다. 심지어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능력도 폄하한 설정이 무수히 많다.

2. 역사적 사실 관련

명량 해전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세부적인 관련 사항은 명량 해전 항목 참조. 아래는 영화와의 차이점을 집중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참고로 실제사례나 역사를 바탕으로한 대다수의 영화가 기존 사실보다 부풀려서 좀 더 드라마틱하고 극적으로 표현하는데, 명량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앞서 말한 대다수의 영화가 주인공 측을 더 강하게 만든 것에 반하여 이 영화는 약화시켰다.

2.1. 인물들의 호칭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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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순신한산해전 이후 정2품 상계 정헌대부에서 절충장군으로 품계는 낮아졌어도 여전히 정3품 당상관 절충장군이자 정3품 수군절도사였다. 당연히 장군으로 부르면 안되는 것이다. 애초에 품계 서열이 낮은 것은 정치적인 문제일 뿐이며, 해군참모총장 자리에 대장이 아닌 중장이 피치못할 사정으로 임명되었더라도[2] 아랫사람들은 직함인 참모총장으로 호칭할 것이기에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통제사에게 "장군"이라고 칭하는 건 엄청난 결례다. 최소한 이순신의 휘하의 수군이라면[3], 극 초반 배설이 언급한 "통제공"이나 "통상", "통상대감", "통제사 대감" 등의 존칭으로 부르고, 아랫 부장들을 "장군"이라고 불러야 지휘 서열에 문제가 없는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이순신이 정유년에 파직되어 직위 해제된 뒤, 명량해전 이후 다시 정2품 정헌대부의 품계를 되찾기 전까지도 부하들을 비롯한 주변인들에게 계속해서 통상 대감이나 통상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파직 됐던 사람이라지만 정2품 상계 정헌대부까지 올라간 경력이 있고, 삼도수군통제사의 직함을 가진 이상 굳이 그보다 아래 품계인 정3품의 관료를 부르는 호칭인 영감이라고 불러서 상관의 떨어진 직급을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조선시대에 직함의 중요성은 현재 우리가 상상하던것 이상이라, 현직이 없이 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전직을 불러주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다만 이런 존칭의 어감 자체가 TV사극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겐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므로 각본상에서 의도적으로 친숙한 어감인 "장군"으로 호칭을 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도 같다.

2.2. 교지의 시점 오류

국왕 선조가 내린 수군 혁파 교지에 적힌 연도가 터무니없이 틀려버렸다. 교지에 나온 만력 30년은 1602년으로 7년 전쟁은 이미 끝났고 이순신은 시공을 넘어온 미래의 교지를 받은 게 된다. 1597년 정유는 실제로는 만력 25년, 선조 재위 30년이므로 이 둘을 혼동해 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고는 하지만 날짜도 틀린 것으로 봐서 (교지의 날짜는 9월 20일, 명량해전은 음력 9월 16일) 다른 교지를 보고 베낀 다음 본문만 수정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애초에 선조 30년 같은 기년법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기본적인 사실에서 오류를 일으켜 버렸다. 교지의 년도가 틀렸음을 지적한 포스팅

2.3. 전투에 참여한 함선 숫자 관련

2.3.1. 개봉 전

영화 시놉시스나 포스터를 보면 12척의 판옥선이 330척의 왜선을 무찔렀음을 강조하고 있다. 난중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아군의 참전숫자가 12척[4]이라서 그렇게 되었다는 제작사의 코멘트가 있었는데, 그렇게 따지자면 적선단의 규모도 동 사료에 의해 133척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고려해야 할 점은 난중일기는 충무공의 시점에서 쓰여진 기록이므로 적선단의 규모가 133척이라는 기록은 충무공의 시야 또는 전투 종료 이후 전과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정리되었을 숫자로 보여지며, 일본측 기록에는 최대 333척까지 참여했다는 사료도 있으며, 이충무공 전서같은 사료에는 200척 이상 최대 330척까지 기록되는 점을 고려할 때, 꼭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는 구석이 있다.

또한 상업영화에서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위한 마케팅의 일환으로 아군의 숫자는 최대한 적게, 적군의 숫자는 최대한 크게 묘사해 명량 해전이 가지는 숫적인 열세를 극복한 위대한 전쟁이라는 극적인 효과를 노린 문구로 보는게 타당할 것이다.

2.3.2. 개봉 후

아군의 12척이라는 숫자는 그대로인데 그걸 맞춘 내용이 왜곡되었다. 첫째 1척의 거북선을 건조 중이라는 설정을 넣었으나 당시 조선 수군은 12척의 판옥선을 겨우 운용할 상황이었다. 거북선은 판옥선보다 크기는 작았지만 돌격선이라는 특성상 더 많은 화포, 화약, 수군이 필요했기 때문에 건조하지 않았다.

왜군의 규모도 홍보물의 330척이라는 설정과는 다르게 실제로 스크린에 보여지는 함대 규모는 난중일기에 나오는 133척에 근접한 수준으로 묘사된다.[5]

3. 복장 관련

3.1. 계절 옷차림 오류

1597년 9월 16일에 벌어진 해전인데 겨울옷(가령 누비옷)들을 껴입고 있다는 지적이 있으나, 명량해전은 음력 9월 16일에 벌어졌으니 양력으로는 10말에서 11월 초인 늦가을과 초겨울의 중간 시점이다. 당시는 기후가 현재 한국보다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했지만 동시대 대부분 문명들처럼[6] 계절맞춤옷 한두 가지로 기후를 극복하는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얇고 통풍이 잘 도는 옷부터 누비로 기온을 저장하는 옷까지 여러 종류의 의류를 다양하게 껴입는 식으로 체온을 조절했을 뿐더러 내륙기후와 해양기후가 완전히 달랐기에 때문에 등장인물들이 입는 겨울옷이 조금 과하다는 지적 정도는 가능해도 시대 재현 오류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굳이 따지고 싶다면 당시 해안 거주민들의 초겨울 복식을 가져와야 우길 수 있는 정도.

3.2. 조선 수군 복장·장비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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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나 제작진의 관련 발언이 무색하게 충무공을 비롯, 조선군이 입고있는 갑주나 복장 양식에 시대와 동떨어진 부분이 존재하고 있다.

충무공의 갑주를 보면, 기존 창작물에서는 이순신이 조선 후기의 갑옷인 두석린갑을 입고 있던 적이 많던 것에 비해 당대에 널리 입었을 것으로 추정되는[7] 찰갑류와 두정갑을 표현한 것까지는 좋으나, 찰갑을 가죽끈으로 매듭짓는 수결법은 아예 반영이 안 되어 있고[8] 찰갑의 전체적인 외양 또한 그 어떤 유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정체불명의 갑옷이다.

조선 초중기 찰갑은 비록 유물 자체는 극히 적으나 최소한 수결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찰갑편 유물은 있으며, 국조오례의 등 구체적인 외형을 그대로 묘사한 회화 자료도 있기 때문에 복원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특히 국조오례의의 회화는 겉모습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호항 등 구체적인 부품명까지 적혀 있으며, 악학궤범에서는 비록 의장용이기는 하나 구조적인 면에서는 실전용 찰갑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황화갑을 바닥에 펼친 전개도까지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때문에 일부 매니아들은 자체적으로 조선 찰갑을 제작해서 입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이다. 즉 참고할 만한 자료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고증을 무시하는 선택을 한 것.

게다가 투구에 달린 드림은 두정갑 양식인데 기존 유물들에서 볼 수 있는 드림의 크기와 달리 너무 삽살개 처럼 크고 넓게 늘어져 있다. 드림의 형상 자체도 잘못되었지만 근본적으로 몸에는 찰갑을 입고 투구에는 두정갑이 달려 있다는 점 또한 이상한데, 투구 드림과 몸통 갑옷이 둘 다 두정갑이면서 각자 색깔이 다른 경우는 조선 후기 회화에서 확인된 바가 있으나 아예 다른 양식인 경우는 그 어떤 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갑주에 있는 찰갑편, 즉 미늘에는 금형에서 찍어낸 듯한 도깨비 문양이 다닥다닥 박혀 있는데 이 역시 조선시대 찰갑에서는 확인된 바 없는 양식이다.[9] 허리에는 작은 갑옷을 하나 덧댄 뒤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데, 전형적인 중국식 갑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양식이다.[10] 게다가 이순신 갑주는 가슴 쪽에 박힌 금박 용 문양 장식은 찰갑의 구조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장식성만 생각한 나머지, 판갑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버리는 바람에 두정갑+찰갑+판갑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양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용 문양장식은 400만원이나 하는 고가로 장군의 위엄을 위해서 따로 주문했다고 하는데, 오히려 촌스럽고 쌈마이한 느낌이 강하다.

이순신의 갑주를 다른 무관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저런 장식을 넣은 것으로 보이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갑주 재현의 전체적인 질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또한 허리띠에는 플라스틱 삘이 진하게 나는 도깨비 문양이 달려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갑주를 고정하는 허리띠 위에 전대라고 불리는 넓은 포를 추가적으로 둘러매기 때문에 허리띠가 두드러지게 보이지는 않는다. 이는 흔히 역사, 갑옷 덕후들 사이에서 '챔피언 벨트'라며 조롱당하는 소품인데, 비단 명량뿐만 아니라 고증에 신경을 쓴다는 대하사극에서도 끊임없이 등장하는 양식이기는 하나 다른 사극에서도 잘 지키지 않는 고증이라고 해서 고증오류가 아닌 것은 아닌만큼 아쉬운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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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사관학교 광장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을 만든 김영원 한국조각가협회 명예회장이 제작을 맡았으며, 조용진 한국얼굴연구소장, 이민웅 해군사관학교 교수, 무예24기보존회 출신 최형국 박사 등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이 자문위원으로 참여해 얼굴·복장·무장·전사(戰史) 등을 철저하게 재현했다.
이순신이 무슨 갑옷을 입었는지는 사료나 회화자료가 없기에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당대 수군의 보고나 기록에서 찰갑 기록이 많이 보인다는 점,[11] 그리고 두정갑은 고려 때부터 원의 영향을 받아 쓰이고 있었다는 점,[12] 무엇보다도 이순신의 5대손 후손이자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봉상 장군 갑주의 경우 두정갑이라는 점을 볼 때 찰갑이나 두정갑류로 재현을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명량에서는 두정갑과 찰갑, 판갑을 뒤섞은 판타지 갑주를 채택하고 말았으며, 각 갑주의 형태를 제대로 구현하지도 못했다.

이런 지적에 대하여 의상감독은 사료를 기본으로 하지만 그림과 연기자의 액션과 영화적인 멋을 강조하였다고 답변하였는데, 밑의 제작기 영상을 보면 책들을 수없이 뒤졌다며 마치 고증을 충실하게 지킨 듯한 발언을 하고 있어 여러모로 말의 앞뒤가 안 맞는 모습을 보여줬다. 종합적으로 갑주의 재현 수준만 놓고 보자면 고증 관련 발언은 사실상 무의미한 수준이다.

부장들의 갑주 또한 충무공의 그것에 비하면 장식적인 요소가 덜할 뿐 고증과는 아무 상관 없는 복식이다. 잠시 등장하는 권율 역시 전형적인 중국식 갑주를 걸치고 있다.

승병들의 경우 작중에서 어두운 색이라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앞치마 형태를 하고 앞에 卍자가 그려진 약식가사를 입고 있는데 이 역시 재현 오류. 앞치마 형태의 약식가사는 본래 일본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한국에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일본 불교가 들어오던 구한말~일제 강점기이며, 한국 불교에서 이를 정식으로 도입한 것은 해방 이후다. 그마저도 일상적으로 입는 빈도를 보자면 대한불교조계종에서나 낮은 직급의 스님들이 입을 뿐, 전통적인 가사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태고종을 비롯한 대부분의 종단에선 찾기 힘들다. 생활수행을 중시하는 원불교에서는 행사시가 아니면 잘 입지 않으며, 진각종의 경우 더 간략화시킨 것을 사용한다. 차라리 현대 군종승려들이 입는 반가사를 쓰는 것이 욕을 덜 먹었을 것이다.

약식가사뿐만 아니라 승복 자체도 문제가 있는데, 현대 한국의 승려들이 입는 회색 승복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조선시대에는 승복이 검은색이었으며, 회색 승복은 성철(승려)가 처음 도입한 것이다. 실제로 이것 때문에 북한에서 자기네 나라가 종교의 자유가 있다며 거짓 선전을 하기 위해 임명하는 가짜 승려들은 여전히 검은색 승복을 입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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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참하관은 오늘날의 부사관, 당하관은 위관급 장교영관급 장교, 당상관은 장성급 장교에 해당된다.[13]

또한 일반 병사들이 전부 다 갑주를 걸치고 있는데, 흔히 드라마에서 재현해 왔던 '水자 하나 덩그러니 새겨넣은 하늘색 포졸복'보다는 현실적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극중 연출처럼 일반 병졸들까지 전원 두정갑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풀착장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적다. 동래성 해자 출토 유물이나 탄금대 전투 당시 선조가 신립에게 수은갑을 내렸다는 기록 등 당대의 유물과 기록을 분석해보면, 임진왜란 때는 두정갑보다는 찰갑이 더 많이 쓰였을 가능성이 높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전근대 전쟁에서는 일반 병졸들이 갑주를 풀세트로 잘 입고 다녔을 가능성이 몹시 낮기 때문이다.[14]

즉 병졸들은 갑주를 입더라도 흉갑에 투구 정도만 걸쳤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이는 비단 조선 수군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 대다수 전쟁에서 일반적인 상황이다. 다만 갑주 착용 여부와 별개로 극중 병졸들이 입고 다니는 두정갑은 차양이 없거나 투구의 양식이 유물과는 딴 판이거나 하는 등 고증에 맞지 않는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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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후대에 그린 기록화인 조선전역해전도를 보면 조선 수군들이 죄다 두정갑을 입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후대에 그려진 그림이라 고증에 참고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유물인데,[15] 본작에서는 미술 전반이 이 그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보인다.

조선군 병사 전원이 갑주를 입고 싸운 것은 엄밀히 말해 재현 측면에서의 접근이라기보다는 '희망사항'에 가까우며, 당장 임란이 끝난 이후 기록에선 엄연히 '통제사의 병력도 갑옷을 입지 않고 싸웠다'고 하는 판에 전원 갑주 착용은 엄연한 재현 오류라는 의견도 있다. 이에 대해, 이 기록은 임란 이후 100여년 지난 후의 실록 기사이며, 조선시대 후기의 기록에서 전선 1척, 사후선 1척을 운영한 함평현의 기록에는 수군용으로 철갑과 투구 50벌씩을 보유한 기사를 보면 병사들도 제대로 갑주를 착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라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조선군의 갑주 부족 문제는 국초부터 꾸준히 지적된 것으로, 위의 임란후 기록 한줄이 전부가 아니다. 조선군은 원칙적으로 전원이 갑옷을 준비해 입도록 되어있지만, 이 원칙을 도저히 지킬 수가 없다는 지적은 실록에 수두룩하게 나온다. 예를 들어 중종 17년의 실록 기사를 보면, 조선의 가장 정예병들이라고 할 수 있는 6진의 군사들도 태반이 갑옷을 입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또한 후기 기록 중에 1개 현이 갑주 50벌을 보유했다고 해서 모든 군영이 충실하게 갑주를 보유했다고 볼 이유는 없다. 반대로 갑옷과 장비 미비에 대한 기록도 많다. 이런 상황과, 특히 임란 당시의 어려운 현실을 고려해봤을 때, 조선군 병사 전원의 갑주 착용이 '희망사항'에 가깝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다만 갑옷을 충실히 보유한 현이 함평현 1개 현만 있었던건 아니다. 영암읍지에 따르면 영암현엔 이진진과 어람진이 있었는데 이 두 진은 각각 철갑옷과 철투구 47벌씩을 보유하고 있었다.[16] 어란진은 여기에 가죽갑옷과 가죽투구 20벌을 추가적으로 더 보유하고 있었다. 진도군의 경우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철갑옷과 철투구를 69벌 보유하고 있었다.[17]

임진왜란 5년전인 정해왜변 당시에도 철갑옷을 대량으로 만들어 병사들에게 지급했다는 기록도 남아있고.난중일기에도 이순신장군이 각 진과 보 등을 순시하며 갑옷을 점검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보면 갑옷은 충분히 병사들이 제대로 갖춰입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순신 장군이 점검할 당시에는 이일 등이 점검할 때와 달리(분명 이일은 뇌물을 받고 넘겼을것이다.) 녹슬고 해진것이 많아 보나 진을 책임지는 군관이나 이방 등을 벌주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통영시에서 2011년(영화 촬영 이전)에 한산도 대첩 당시 통제영 조선수군의 복식을 복원하여 강남패션 페스티벌에 참여했었는데 여기서는 병사에게 흉갑 형태의 찰갑과 투구를 입힌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상기 복장 고증 여부를 떠나 명량해전 전후로 조선 수군은 칠천량 패전으로 인해 군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장수들과 병사들이 병사들이 없었다고 이순신 장군 난중일기에도 기록이 남아있다. 오죽 못 갖추었으면 왜군 전선에서 얻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깃발을 옷으로 만들어 입었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였다. 조선시대는 현대 군대처럼 군복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징병된 본인이 포목을 직접 구해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군장점에서 보직에 맞는 군복을 맞춰가야 했다. 때문에 당시는 전란 중이었고 조선수군은 칠천량 해전으로 삼도수군이 전멸에 가까운 상태였기 때문에 차라리 남루한 복장으로 입고 있었어야 하는게 맞다.

또 조선군이 장비하는 환도도 길이가 카타나 수준으로 긴 것은 둘째치고[18] 패용까지 타치와 동일하게 칼자루가 전방을 향하며 날이 바닥을 향하도록 패용한다. 수많은 사극에서 전혀 반영되지 않았던, 딱 보기에도 타치나 카타나 패용과는 구분이 가능한 조선 특유의 환도 패용은 명량까지 와서도 반영되지 못했다. 다만 환도 패용의 경우 칼자루 전방 패용, 활을 쏘기 위해 후방에 패용하거나 아예 후기로 가면 조총을 쏘기 위에 뒤춤에 패용하기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식의 반영이 꼭 틀리기만 한것은 아니다, 다만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방식인 칼자루 후방 매기가 전혀 반영이 되지 않았다는 점만이 아쉬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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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이 역시 마찬가지로 당시 조선군의 환도가 검신 등의 외형에서는 일본도와 두드러지는 차이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나 손잡이 부분에서는 어피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극중 조선군 대다수는 끈으로 둘둘 말은 일본식 손잡이로 된 환도를 사용한다.[19]

복식은 아니지만 이순신 본선의 수(帥)자 깃발이 두어 번 등장하는데, 깃발의 帥자가 컴퓨터로 프린트한 글씨체로 보인다.

하지만 대장선에 걸린 수자기만큼은 미군으로부터 반환받은 어재연 장군기에 맞추어서 재현한 것으로, 생각보다 현대적이다. 최근에 반환받아 매스컴을 탔으니 사람들 기억에도 남았을 것이고, 구한말이라 이순신이 활약하던 시대와는 거리가 있으나 어찌되었든 조선의 장군이 실제로 사용하던 깃발이라 이쪽으로 재현한 듯.

3.3. 일본군측 복장 관련

파일:external/8583ca957b17d982054076bea5087b57f0c3cc2451d35e9c514aa5464dc7bd29.jpg 파일:external/7fc609ab8b447e49db2e32d29bbcca62eed5292f4e6572fc4b32f292507b719c.jpg
일본군측 무장의 갑주에 관한 문서
일본 장수들의 갑주를 일본에서 직접 제작해 들여왔다고 했는데, 갑주 재현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극중 등장한 일본 갑주가 헤이안 시대에 주로 사용하던 오오요로이 아니냐는 것인데, 사실 명량의 일본 갑주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주력이었던 당세구족(도세이구소쿠)에 가까운 형태다. 극중 등장한 갑주는 오오요로이라기에는 어깨 쪽에 달린 견갑이 매우 작으며, 천으로 몸통 갑옷 전체를 덮은 오오요로이 특유의 양식도 보이지 않는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투구에 오오요로이를 연상케 하는 날개장식이 있기는 하나, 저런 장식이 당세구족에서 아예 안 쓰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고증오류라고 보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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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투구.
갑옷 양식과 별개로 극중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착용한 갑주는 고증오류가 있는데, 와키자카는 실존 인물이 착용했던 투구 디자인이 현재까지 멀쩡히 전해짐에도 불구하고 그냥 전형적인 일본식 투구를 쓰고 있다. 구루지마 쪽은 더 심각한데, 다케다 신겐의 갑주에서 투구 쪽에 달린 특유의 털 장식만 검은색으로 바꾼 것이기 때문이다. 구루지마가 실제로 착용한 갑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다면 그냥 일반적인 당세구족을 입혀도 되었을 텐데, 굳이 실 착용자가 명확한 갑주를 가져온 이유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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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 다카토라의 갑주 역시 고증에 100% 부합하지는 않는다. 실제와는 달리 갑옷이 금색이기도 하고, 특히나 해당 그림 가몬을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몬과도 상당히 비슷하기 때문에 도도가 아니라 태합인 히데요시같은 느낌이 들 지경. 도도 다카토라의 갑주 다만 대폭 축소시키기는 했으나 어쨌든 투구에 달린 특유의 날개장식은 그대로 살리는 등 기본적인 원형은 살렸다.

4. 해전 관련

비판이 많던 철쇄설은 배제했으나 이순신의 대장선이 전투 초반 홀로 역류를 견디며 분투하다가 아군이 합류하고 물살이 바뀌면서 몰아쳤다는 명량해전의 큰 얼개는 지켜지고 있다.[20] 세부적인 면에서는 비판을 받고 있다.

스토리상 해전의 큰 얼개는 다음과 같다.
1. 일본 수군 1대와 교전, 적선 다수 격파
2. 물살이 격해지며 피섬으로 이동, 추격대와 백병전
3. 공포에 질린 병사가 화약통 발화, 근접부대 섬멸
4. 대장선 건재 알린 후 아군 합류+구루지마 본대 접근
5. 구루지마 격파 후 일본 수군 사기 저하로 퇴각, 추격+충각 섬멸

이중에 주로 비판받는 장면은

4.1. 영화상에서 등장한 무기 목록

파일:external/pds26.egloos.com/f0485312_5678df571bb3b.jpg 파일:external/i.jjang0u.com/143456048475614.jpg
판옥선의 주력 함포로 등장했다. 주로 무쇠로 만든 철탄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해전 장면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사실 조선 수군의 주력 함포는 지자총통 이하급의 현자총통과 황자총통이었으며[33], 천자총통은 화약을 많이 잡아먹는다는 이유로 잘 사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함포가 천자총통 일색인 것은 고증오류라고 볼 수 있다.
명량 해전 당시 주력이 된 함선은 경상우수사 배설의 잔존 함대였으므로 이미 천자총통이 현자총통으로 대부분 교체가 끝났을 시점의 배들이며, 통제공이 육지를 순회하며 총통을 긁어모았다 하더라도 모든 화포를 천자총통으로 교체했을 확률은 매우 낮다. 행주 대첩 당시 권율이 사용한 천자총통은 이순신에게 받은 것인데, 이 총통들 역시 해전에서는 더 이상 쓰지 않는 잉여물자이기에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함포가 전부 천자총통인 것은 천자총통 특유의 육중한 비주얼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본작에서는 바퀴가 달린 동차에 천자총통을 실어서 운용하는데, 사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바퀴 달린 포가를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임진왜란 직후에 쓰여진 화포 운용 교본인 신기비결에서는 화포를 땅에 고정해두고 쏘라고 할 뿐 구체적으로 화포를 실어나르는 물건이 언급되지 않으며, 동차는 19세기에 쓰여진 융원필비에서 처음 등장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고증오류이기는 하나, 결국 현재로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함포를 어떻게 고정했는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34]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증과 별개로 영화 속 연출만 놓고 보면 개연성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마지막에 판옥선들이 일제히 일본 수군을 들이받으며 때려부수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극중에서는 조선 수군이 충각전술을 쓴다는 설정이 있는데[35], 이때 화포가 마구 굴러다니며 병졸들이 깔리는 등 대혼란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충각전술을 쓴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함선이라면 당연히 설계상 함포가 고정이 되어 있다던지 하는 식으로 충격에 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게 맞는데, 그런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본작 내에서 등장하는 연출만 놓고 보자면,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달려드는 판옥선들을 보고 "충파! 저 녀석들이! 다같이 죽자는 것이냐?"라며 경악하기 때문에 정말로 앞뒤 안 가리고 들이받는 장면을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36]
* 대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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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선이 구루시마의 세키부네에게 포위되는 상황에서 근접한 적함에 비격진천뢰를 발사하는 화포로 등장한다. 임진왜란 당시 수군이 대완구를 사용한 것 자체는 맞지만[37], 문제는 대완구를 설치한 포차가 마반차라는 것. 마반차는 고종 5년인 1868년, 그러니까 흥선대원군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 비격진천뢰
위에서 언급된 대완구에서 발사된 폭발형 포탄이다. 심지가 타들어가는 일종의 지연신관식 작동을 통해 근접한 세키부네에 발사된 이후 갑판의 틈을 통해 하부 격군실에 떨어져 시밤쾅!! 당연히 피격된 해당 세키부네는 걸레짝이 되어 침몰한다.
* 신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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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전 초반부, 돌입해오는 구루시마의 1진이 천자총통의 집중포화에 엉키고 설켜서 진형이 흐트러진 순간 대장선의 사수들이 일제히 발사한다. 작중 등장한 무기는 소신기전에 가까운 형태로서, 작은 폭발통을 매달은 화살의 형태다. 그러나 발사 방법은 재현 완전 실패. 조선전역해전도에 그려진 잘못된 발사법을 그대로 답습했다. 신기전은 화살 뒤쪽에 활줄을 거는 오늬가 없어 보통 화살처럼 쏠 수 없으며, 철저하게 자체 추진력으로만 날아가는 로켓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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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역해전도에서 신기전을 활로 쏘려는 조선군. 그러나 이는 명벽히 역사와 다르다. 조선전역해전도는 16, 17세기 당시의 물건도 아니고 조선에서 그린것도 아닌 300년도 넘은 후의 20세기 일본에서 그려진 작품이기 때문에 고증에 맞지 않는 묘사가 매우 많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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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헌에 그려진 신기전 그림과 대신기전 복원품.
실록의 세종 29년 기록에 신기전의 사용법(세종 118권, 29년(1447 정묘 / 명 정통(正統) 12년) 11월 22일(신해) 1번째기사, '평안, 함길도 도절제사에게 주화의 소용량을 보고하게 하다' 참조).[38]을 봐도, 활로 쏘다는 기록은 없다. (실록에는 주화라 나오지만 바로 다음해인 세종 30년 주화의 공식명칭이 신기전으로 바뀌기 전 기록이라서 주화로 나오는 것 뿐이다.) 그렇다고 국내의 일부 네티즌들이나 서적에서처럼 제작진이 조선시대 사용한 불화살인 석류화전(石硫火箭)과 신기전을 헷갈렸는가 하면[39] 그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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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석류화전 복원품이다. (천을 감싼 건 안에 화약뭉치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극중에서 화공선이 대장선을 향해 접근하자 사수들이 발사하는데, 신기전과 달리 화살 뒤 천뭉치를 감싼 게 분명하게 보인다. 특히 일본 화공선 위에 젖은 짚더미에 박혀 불이 꺼져버려 위력을 상실하는 장면까지 나와 의외로 화살을 자세히 볼 수 있다.
* 조란환
맨 처음 대장선에 접안해 승선하려는 왜병들에게 슬로우 모션으로 선사한 일종의 산탄이다. 수많은 쇠구슬 다발을 총통에 넣어 발사한 형태이며 원래대로라면 조란환에 피탄된 왜병은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정도로 찢겨져 고어물을 찍었겠지만 영화 등급을 맞추기 위해서인지 신체 손상은 거의 묘사되지 않고 피만 살짝 살짝 흩날리는 정도이다. 영화에서는 극중 등장한 총통이 대부분 천자총통인 탓에 천자총통에서 발사하는데, 기본적으로 그 어떤 구경의 총통에서도 사용 가능한 물건이다. 실제로도 판옥선에 승선을 시도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자주 사용된 포탄이며, 그 외에도 개인화기인 승자총통이나 불랑기포, 대조총에도 산탄을 넣어 사용하기도 했다.
* 대장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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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FSDS?
치열한 전투와중에 구루시마가 회심의 카드로 보낸 화공선을 발견하고 대장선에서 부랴부랴 대응책을 찾는 과정에서 이미 모든 포탄을 소모했다는 상황속에 무기고 문을 열자 안에 남아있던 대장군전이 턱하고 쓰러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나대용의 신중한 조준끝에 발사된 대장군전은 화공선에 명중하는 성과를 보였지만, 폭발이 아닌 관통이 목적인 무기이므로 과관통을 일으키며 이렇다할 저지력을 보여주진 못한채 화공선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주는데 그쳤다.[40]
* 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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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의 기본 무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이 나오며 한국사극에서 선보이던 심지총과는 확연히 다르게 재현이 잘되었다. 여러모로 버프를 먹어서 손이 한방에 날아가기도 하고, 명중률은 저격수를 운용하기까지 할 정도... 아래의 조총 만능설 항목 참조.
* 일본
조총과 관련해 재현 오류가 있다. 실제로는 조총 도입 이후에도 왜군들은 활을 조총보다 더 많이 사용했는데, 죄다 조총만 사용하고 있다. 정작 주력이어야 할 일본활과 화살은 도도 다카토라의 지휘대 한쪽에 장식용으로 놓여있다(...).[41]
* 오오즈츠(大筒, 대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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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 1조로 운용하는 대구경 조총. 이순신을 엄호하는 방패병들을 말 그대로 날려버리는 위력을 보여준다.
* 호로쿠비야
대장선에 근접한 왜병들이 손에 들고 빙빙 돌리다가 던진 폭발형 무기. 파편이 날리는게 아니라 화염병과 비슷하게 착탄한 지점에서 화염이 피어오르는 일종의 소이탄으로 나온다. 그러나 실제하고는 안 맞는 부분으로, 실제로는 같은 시기 한국의 질려포통처럼 폭발하는 작렬탄이고, 내부에도 위력 증가를 위한 쇠조각이 있다.
* 일본군의 대포
와키자카의 기함을 보면 누각 좌우에 매달린 대포를 볼 수 있다. 실제로 사용되는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짧게 나와 확실하진 않으나, 매끈한 포신과 포신 뒤쪽 부분이 네모난 것으로 보아 불랑기포 항목에 있는 오토모 소린이 기증받은 서양 불랑기포로 보인다. 삭제장면에선 와키자카가 준비한 무기로 좀 더 비중 있게 나온다. 다만 저기서는 안택선 들보에 매달아서 쏠수 있다고 하는데 신재호의 주장에 따르면 정상적으로 갑판에 거치할수 있었다고 한다. 전술했듯이 조선군 병졸들이 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정갑을 풀착장하고 있는 점, 소신기전을 활로 발사하는 장면에 대포를 들보에 매달아서 쏘는 것까지 여러모로 제작진이 조선전역해전도를 주요 참고자료로 사용한 티가 나는데, 조선전역해전도는 한참 후대에 그려진 작품이라 고증이 맞지 않는 묘사가 매우 많다. 고증 면에서는 주요 참고자료 자체가 잘못된 것.*

4.1.1. 조선수군 승자총통, 조총 미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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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해전 당시 사용되었던 것이 유력시되는 승자총통실제 발굴되었음에도, 정작 작중에서는 승자총통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 아쉬운 부분. 또한 백병전 비중에 비해 이순신 장군이 빗발치듯 쏟아부었다고 하였던 승자총통과 활 등의 투사무기에 대한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또한 조선군이 원거리 화기로 총통과 완구, 활만 사용하나 시대적으로 조선군도 조총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시점이다. 참고로 이순신은 1593년 9월에 왜군의 조총 복제에 성공했고, 이순신 외에도 조선 내 각계의 조총 복제 노력과 항왜들의 지원으로 사극의 모습과 달리 임란 중반부를 거치면서 조선군도 어느 정도 조총을 사용했다.

4.1.2. 조총 만능설 관련

이순신의 배에서 초요기를 내걸 때 일본 측에서 조총으로 저격을 시도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 중반에 나오는 구루지마의 부하 저격수 '하루' 인데, 다른 일본군들이 새총 쏘다시피 지향사격을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초요기를 세우려는 병사와 송희립을 저격하고 이순신 장군도 저격하려 하는데 이렇게 조총으로 저격을 하는 연출이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다. 하지만 당장 왜란 당시에도 평양성 전투, 용인전투 등에서 조선군 장수들이 저격을 당한 사례가 빈번히 언급된다.

파도에 흔들리는 선박 위에서 다른 선박 위의 목표물을 저격하는게 말이 안된다는 비판에 한 의견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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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전투 초기 돌격해오는 일본 함대에게 포격하는 과정에서 포탄으로 공격해야 마땅할 정도로 먼 거리에서 조총을 사격하는 위엄을 볼 수 있는데[45], 조총에 각을 주어 사거리를 늘리는 운용은 실존했으나 그렇다고 그렇게 멀리까지 날리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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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의 곡사사격법에 대한 설명 이미지.

즉 곡사사격이 언뜻 황당해보이긴 하나 곡사사격 자체가 오류는 아니다. 하지만 사거리가 과장되었다는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일본군의 조총 사격은 대부분 판옥선의 선체와 방패에 막히긴 하지만 일부는 틈을 파고들어 사상자를 내는데, 연출 자체에 오류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인지 애매한 부분이다. 투구를 쓴 병사가 머리를 들었다가 헤드샷 당하는 장면이나 50구경 기관총도 아닌데 조총 탄환에 손목이 날아가는 장면이 다소 오버스럽긴 하다. 특히 그정도 곡사로 쏠 정도의 거리면 조총 유효사거리조차 지난 시점일텐데 이러면 부상자조차 내기 힘들다 (그냥 하늘에서 쇠구슬이 후드드득 떨어지는정도 될것이다.). 특히 영화의 조선 수군은 갑옷으로(심지어 대부분이 두정갑!!으로.)중무장했기 때문에 이런 사격으로는 눈 같이 민감한 부위에 맞지 않는 이상 전혀 피해를 줄수 없다.

전반적으로 영화상에서 일본군의 조총 사격에 의한 피해보다는 선상 백병전에 의한 피해가 더 크게 묘사된다. 백병전을 하지 않는 나머지 10척 함선들은 인원 피해모습이 거의 없기 때문.

4.2. 폭발 관련

4.2.1. 개봉 전

예고편에서 등장하는 해전 장면 중 포탄을 맞은 세키부네가 화염을 내뿜으면서 산산조각나는 장면이 있다. 당시 조선의 화포는 주로 철탄을 쐈기 때문에 저런 강렬한 폭발은 말이 안된다는 고증덕후들의 비판과 영화적 연출로 봐야한다는 의견 및 왜군 화약 보급선에 명중했기 때문이라는 반론까지 재기되었다.

일각에서는 폭발 그 자체를 두고 논란이기도 한데, 사실 화약 보급선에 맞았다고 해도 큰 폭발이 일어나는 건 어색한 일이기는 하지만[46], 조선 수군은 단순 철환만 쏜 것이 아니다. 당시 조선 수군은 조란환, 대장군전은 물론 '폭발'하는 파열탄인 비격진천뢰[47]도 웅포 해전 등에서 사용한 기록이 있는 등 생각보다 다양한 탄종을 운용했으므로, 비격진천뢰가 화약 보급선(혹은 자폭선)에 명중했다면 충분히 폭발을 일으켰을 가능성은 있다[48]

4.2.2. 개봉 후

예고편에서 논란이 된 대폭발 장면은 구루지마가 회심의 카드로 준비한 화공선으로 밝혀졌다. 배 안에 가득 화약통을 채우고서 도화선을 이용해 자폭을 수행하려는 설정이었다. 완벽한 허구다. 역사 재현 문서에 많이 등장하지만 실제 명량해전 당시 왜수군은 조선 함선에 가까이 접근은 했지만 어떠한 유효 타격도 입히지 못하고 저지당했다.

4.3. 백병전 관련

4.3.1. 개봉 전

파일:external/cdn.warisboring.com/Roaring.png예고편에서 등장한 선상 백병전 장면부터 논란이 시작되었다.

주된 쟁점은 난중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대장선의 피해는 전사자 2명, 부상자 3명으로 나와있다는 것으로 이는 예고편의 장면처럼 처절한 백병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예고편의 백병전 장면이 영화에 등장하면서 논란이 심화되었다.[49]

4.3.2. 개봉 후

파일:external/img.bemil.chosun.com/20140729010259.jpg 파일:external/img.bemil.chosun.com/20140729010326.jpg
명량은 전체 러닝타임의 50% 가량인 전반부는 해전을 앞둔 조선측 분위기와 일본측 분위기를 보여주며 거기에서 드러나는 각종 인물들의 심리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고, 나머지 후반부인 50%가 순수히 해전 그 자체를 묘사하고 있다.

그 중 선상백병전 장면은 2차례에 걸쳐 등장하며 해전 내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역사적 사실에는 맞지 않는 연출이다. 난중일기에서 명량 해전 당시를 묘사한 대목을 보면 대장선의 피해는 사망 2명, 부상 3명이며 적선 31척을 깨부숴 물리쳤다고 되어 있는데, 어마어마한 수적 열세에 몰린 상태였는데다가 전투 초반 수 시간 동안은 무려 대장선 혼자서 역류를 받아내면서 싸웠던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상자가 적다는 것은, 대장선에 일본군이 아예 올라타지도 못했다는 말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은 일본군에 비해 백병전 실력이 몹시 뒤떨어졌으며, 이 때문에 조선 수군은 화포를 활용해 왜선이 다가오기 전에 격침시키거나 조란환으로 승조원들을 살상하고, 그러고도 달라붙는 데에 성공한 왜선은 판옥선 특유의 높은 선체를 활용하여 일본군에게 공성전과 같은 상황을 강요하는 등 갖가지 요소를 활용하여 일본군이 올라타 백병전을 벌이는 상황을 틀어막았다. 일본 쪽 기록에 보면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을 보면 매우 성가신 접근전을 펼쳤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접근전이라 함은 영거리 백병전이 아니라, 화포와 조란환, 화살, 신기전, 비격진천뢰 세례에서 살아남아 판옥선으로 기어오르는 일본군을 창칼로 찔러 떨구는 것을 말한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안위의 판옥선에는 실제로 왜선 3척이 달라붙는 데에 성공하여 백병전이 일어났는데, 이순신 장순과 중군장 김응함이 화포를 쏴서 구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본작에서는 주로 이순신의 대장선을 중심으로 전투씬이 펼쳐지기 때문에 안위의 함선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김한민 감독이 출연했던 배우들과 다큐형식으로 찍은 명량 : 회오리 바다를 향해서의 GV에서도 이 백병전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이에 감독의 입장은 이순신 장군의 배에서 백병전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처음에는 넣지 않으려고 했으나 막상 촬영에 들어가 보니 너무 밋밋해서 치열함을 위해 부득이하게 그 장면을 넣어야 했다고 밝혔다.

4.4. 충파 관련

극중에선 물살을 이용해 조선 수군이 왜선들을 직접 들이받아서 공격하며 이를 두고 와키자카 야스하루"충파!"라며 경악하는 장면까지 등장하지만, 완전한 허구다.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 내내 판옥선으로 직접 왜선을 들이받는 충각전술을 사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애초에 조선 수군이 아니더라도 충각전술 자체가 세계적으로 널리 쓰인 적이 없는 전술이다. 해전에서 충각전술을 본격적인 주 전술로 활용했다는 것이 실증된 사례는 고대 지중해에서 그리스나 로마가 사용한 것 외에는 없으며, 이들마저도 배를 무작정 들이받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충각전술만을 위해 설계된 특수한 함선을 사용한 것이며, 충각으로 들이받는 행위 또한 영화 속 판옥선마냥 아예 적선을 격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적선에게 약간의 피해를 입히면서 동시에 아군이 적선에 쉽게 올라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50]

반면 판옥선은 충격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뾰족한 구조물도 없고, 구조적으로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특수한 노가 있는 것도 아니며,[51] 건조 과정에서 용골을 사용하지 않는 전형적인 한선의 구조를 차용하고 있기 때문에 설계상 충각전술을 염두에 뒀다고 할 법한 구석이 전혀 없다. 그리고 판옥선이 적선과 부딪히면 적선만 충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판옥선에도 충격이 들어오게 되는데, 정말 잘 무장한 함선이라고 해도 중화기는 불랑기포 몇 문이 전부인 일본 수군에 비해 판옥선은 대형 화포가 널려 있기 때문에, 충격을 받으면 무거운 쇳덩어리들이 갑판 위를 마구 굴러다니며 사상자를 내고 선체를 엉망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 크기가 아주 작은 고바야부네나 세키부네가 격렬한 전투 중 판옥선과 충돌하여 파손될 수는 있지만, 조선군이 직접 배를 몰고 들이받았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이순신 장군의 기본 전술은 노량해전을 제외하고는 적을 유인해 포위망까지 끌어들인 후 원거리 포격으로 궤멸시키는 것이었다. 충각 같은 근접 공격을 했다간 왜수군의 특기인 월선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수군이 충각전술을 사용했다고 잘못 알려진 데에는 이순신 장군이 올린 장계에 등장하는 '당파'나 임진왜란 기록들에 등장하는 '충파'라는 단어 떄문인 것으로 보인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깨어서 부순다'라고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장계의 뒷부분을 보면 총통을 쏴서 적선을 '당파'했다는 언급이 추가적으로 등장한다. 즉 이순신 장군이 이야기한 당파와 충파는 포격전으로 적선을 격침시킨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조선 수군은 명량 해전 전까지 배설이 빼돌렸던 판옥선 10척과 추가로 건조한 3척이 전력의 전부였다. 한 척의 판옥선도 아까운 상황에서 굳이 함선에 막대한 손상을 입히는 전술을 쓰는 것은 말이 안된다. 또 이순신 장군은 노량 해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해전에서 왜수군을 포위망으로 유인해 장거리 포격하는 전술을 즐겨 사용했다.

4.5. 자폭선 공격 관련

왜군이 임준영과 조선 포로들을 태운 배로 자폭 공격을 시도하는데 허구다. 실제로 왜군이 조선 수군에게 접근한건 전투 초반 이순신 장군 대장선이 홀로 나가 싸울 때와 안위의 판옥선이 포위된 단 두번 뿐이다.[52]

4.6. 그외 전투 관련

5. 함선 관련

5.1. 세키부네의 크기 관련

파일:external/d23f08d11b987a8a1d8e8a49393342384fbd5ef79bf96ca52824bbc55031f72d.jpg 파일:external/img.bemil.chosun.com/20140729010307.jpg
영화상에 등장한 왜군의 함선은 크게 기함격인 아타케부네(안택선)와 주력 전투함선인 세키부네 두 종류다. 이 중 아타케부네는 판옥선과 비등한 크기로 묘사되어서 큰 문제는 아니지만, 자주 등장하는 세키부네의 경우 판옥선의 여장(갑판에 설치된 난간처럼 보이는 것)과 높이차이가 별로 없을정도로 상당한 높이를 가지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판옥선은 해상의 성벽과도 같을 정도로 왜병 입장에서는 백병전을 벌이기 이전, 판옥선에 승선하는 과정부터가 상당한 난관이었을 정도로 두 함선의 체급차이가 상당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영화상에선 세키부네도 죄다 중대형 함선으로 등장한다는것.

영화상에선 판옥선에 근접한 세키부네에서 갈고리를 던져서 거리를 좁히고 널판지 비슷한 나무 사다리를 걸어서 승선을 시도하는데, 기록으로 보자면 두 함선간의 높이 차이 때문에 보통은 왜병이 길다란 사다리를 타고 수직에 가깝게 기어 올랐다고 하며, 이런 왜병을 저지하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창을 쑤셔대거나 기다란 장검으로 댕겅댕겅 하거나 활을 쏘거나 돌을 던지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저지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한다.[53] 그럼에도 영화상에선 세키부네에서 판옥선으로 도선하는 왜군에게 조란환으로 영거리 사격을 할 정도로 두 함선의 높이차가 없다!

아마도 상위 항목에서 언급된 논란의 백병전을 염두에 두고 실제의 크기보다 다소 과장하여 함체를 키워서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판옥선과 비슷한 크기의 세키부네의 존재 자체는 실제라는 것이다. 화선항목에 나오듯이 일본에서는 에도막부 시기 목할법의 도입 이전에는 같은 배라도 배 크기가 들쭉날쭉이었다. 그러나 작중에서는 모든 세키부네가 하나같이 판옥선이나 아타케부네와 거의 같은 크기를 가진 싸움배마냥 나오는 것은 역사와 다르다. 역사적인 면을 감안한다면 해적 출신인 구루지마 수군의 세키부네들은 소형으로, 그렇지 않은 와키자카나 도도의 세키부네는 대형으로 하는 게 맞다.[54]

5.1.1. 반론: 일본 함선은 상당히 커졌다

또 이르기를,
"적의 수가 매우 많았으니 당초에 풍파에 쓸려 죽었다는 설은 헛소리였다. 그들을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한산으로 후퇴했더라면 형세가 극히 좋고 막아 지키기에도 편리하였을 것인데 이런 요새를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니 매우 잘못된 계책이다.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絶影島) 앞바다에는 나가기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 과연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전에도 말했거니와 저 왜적들이 6년간을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 한 장의 봉전(封典)을 받기 위해서였겠는가. 대체로 적의 배가 전보다 대단히 크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포와 화전(火箭)도 배에 싣고 왔는가?"
하니, 명원이 아뢰기를,
"이는 알 수 없고 김식(金軾)의 말에 의하면 왜적이 우리 배에 접근하여 올라오자 우리 장사들은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패몰되었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30년 7월 22일
칠천량의 패전을 보고받고 선조가 비변사와 회의를 하면서 일본군의 배가 전보다 대단히 커졌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으니 김응남이 그렇다고 하는 모습이다. 그러니 칠천량 해전 이후에 벌어진 명량해전에서의 일본 함선 묘사는 적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5.2. 대장선의 내구도 논란

일종의 주인공 보정이라고 보이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이순신이 탑승한 대장선의 끈질긴 생명력이다. 순수히 영화상에 묘사된 해전의 과정에서 이순신의 대장선은 구루시마 함대의 끈질긴 대공세를 계속 이겨내는데, 처음 선상 백병전 과정에서 PTSD에 빠져 이성을 잃은 병사가 장루 근처의 화약통에 불을 붙여 대폭발을 하는데도 그 여파를 받았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판옥선의 갑판은 멀쩡했다. 특히 해전 클라이막스에서 구루시마가 보낸 화공선이 거의 충돌 직전 아군의 지원사격에 또다시 대폭발을 일으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번에는 심각한 타격을 입는 것으로 묘사된다.

화공선 이전에는 멀쩡했던 판옥선의 외형이, 폭발 이후에는 좌현 격군실 중앙부분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설상가상으로 선체 하부에 물이 들어차 다급하게 물을 퍼내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에 구루시마 안택선의 충각공격이 시기 적절하게 발생한 대형 회오리에 의해 막히긴 했으나, 심한 데미지를 입은 판옥선 선체는 회오리에 휘말린 와중에도 몇번이고 안택선과 접촉이 있었다. 또한 아군의 지원으로 안택선이 침몰한 이후에는 정작 대장선은 회오리에서 자력으로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심대한 손상을 입어 선상의 장수들이 이순신을 바라보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장면도 나온다.

하지만 이 또한 천행으로 묘사한 어민들의 도움[55]으로 위기를 극적으로 빠져나오며, 이후 합류한 아군 선단과 함께 바뀐 조류를 타고 왜군에게 일제히 충각돌격[56]을 시전하는데 다른 아군 함선들은 원래 단단한 판옥선에 이렇다 할 전투도 하지 않아 멀쩡하지만, 이미 자력으로 회오리를 벗어나기도 어려운 지경의 처절한 상태의 대장선이 아무렇지도 않게 적선단을 들이받는 충각을 보여주는 것은 주인공 보정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설명이 안 된다.

여담으로 충각 돌격 과정에서 갑판 위의 함포들이 고정되지 않아 이리저리 굴러다녀 부상자를 발생시키는 걸 볼 수 있는데, 아마 몸을 사리지 않는 적극적인 공격을 보여줄 의도였겠지만 그냥 공격 전에 함포를 고정시키기만 했어도 되는, 전술적으로는 무의미한 손실이다. 게다가 작품 내적으로도 이미 앞 장면에서 대부분의 함포를 갑판 아래로 내려 측면 일제사격으로 주변을 둘러싼 적을 공격하는데 써버렸고 다시 전부 끌어올리는 장면은 없었다. 대장군전 한발을 위한 한개의 함포만이 다시 갑판위에서 쓰였는데 이 장면에서는 굴러다니는 함포가 한두개가 아니다.

6. 일본어 대사 관련

감독의 전작인 최종병기 활에서도 거의 사어에 가까웠던 만주어를 잘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았으므로, 이번 영화에서도 왜군측 등장인물들은 몰입감을 높이기 위하여 모두 일본어를 구사한다. 그러나 일본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줄 아는 관객 입장에서는 어설픈 일본어 억양으로 인해 몰입감이 심각하게 떨어진다.

이 일본어 대사에 대해 여러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티저에서 류승룡이 'リシュンシンはワシがこの手で捕まえる'라는 대사를 치는데, 동사 자체가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사용되기엔 미묘하다. 저런 상황이라면 '적장을 토벌하다' 내지는 '물리치다' 정도의 의미를 갖는 동사 討つ 내지 討ち取る를 써야 했다. 정 포박한다는 뜻을 살리고 싶었다면 「捕まえて参ろう、引っ捕まえて見せよう、捕まえてご覧にしんぜよう」등의 표현이 나았을 것이다.

만주어는 심지어 원래 쓰던 민족들마저도 잊어가고 있는 언어라 잘 살려냈다고 평가받았지만, 사실 알아들을 사람도 거의 없고[57] 국내에 일본어 능력자가 만주어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상태에서 오류가 많은 일본어 대사는 상당한 불만과 비판을 받고 있다. 거기에 류승룡의 발음이 심각하게 어눌하고 부정확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중.[58]

시사회에 참가한 일본인 관객으로부터는 류승룡의 어색한 일본어 발음 때문에 많이 깨고[59], 일본 수출은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반응도 나왔다. 여기 다만 일본어 발음의 문제와는 별개로 일본 사학계가 '별것 아닌 사건' 정도로 치부하면서 덮으려 드는 임진왜란 관련 작품이고, 현재 한일 양국민의 감정이 나쁜 이 상황에서 똑같은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불멸의 이순신과는 달리 명량이 일본에 수출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일본 극장에서 대대적인 개봉을 하지 않았을 뿐 DVD는 발매되었다.

메인 예고편과 티저 예고편에서 등장하는 구루지마 미치후사(류승룡 분)의 대사 중 "조선은 내가 먹을 것이다"라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어 논란이 되었다. 일본 다이묘들이 개인적으로 군대를 운용하는 경향이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모리 다카마사라는 히데요시의 군감까지 참가하는 전투에서 이런말을 했다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잘 해봐야 준장 정도 계급인 자가 국가 원수의 명령을 받고 적국을 침공했을 때 "이제 이 나라는 내가 먹겠다"라고 발언한 것이나 다름없는 셈. 따라서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는 본국에서 파견한 정치장교가 있는 상황에서 역사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실제 영화상에선 사석에서 자신의 심복과 "관백은 곧 죽을테니 내가 조선을 먹튀하겠다..."식으로 말하는, 그러니까 저 말도 안 되는 의도로 말한 게 맞았기 때문에 오히려 잘못이 아니게 된 대사다. 전국시대를 지나온 일본 다이묘라면 타국에 영토욕과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이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작중 모리 다카마사가 아예 안 나오기도 하고. 조선 출병시 700명밖에 안 데리고 온 말단 다이묘가 할 말이 아니란 말은 있지만,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말단 병사에서 시작해서 일본을 통치하는 위치에 올랐으니 자기도 못할 건 없지 않겠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이상한 설정은 아니다.

극중에서 일본군이 조총을 발사할 때마다 "우테(撃て)!"라고 하는데, 사실은 "하나테(放て)"라고 해야 고증에 맞다. 우테는 화살을 쏠 때 사용하는 표현이고 하나테는 화약무기를 쏠 때 사용하는 표현이기 때문인데, 이는 임진왜란 때까지만 해도 아직 군대에서 활과 총을 같이 쓰던 시대여서 화살을 쏘는 행위와 총, 화포 등 화약무기를 쏘는 행위를 구분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언어 고증을 잘 살린 모노노케 히메를 보면 핸드 캐논을 발사할 때 하나테라고 외치는 걸 들을 수 있다. 참고로 일본군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조선, 중국은 물론이고[60] 서양에서도 그랬다.[61]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거북선을 '메쿠라부네(めくらぶね[盲船\], 눈먼 배)'라고 불렀는데, 작중에서는 거북선을 메쿠라부네가 아니라 '깃코센/기코센(きっこうせん/きこうせん[亀甲船\])', 즉 한자식 이름인 '귀갑선(龜甲船)'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대사 문제는 아닌데, 작중 자막에 계속 '와키자카 야하루'라고 나온다. す/ス가 아닌 つ/ツ로 오해한 것인지...

7. 그 외

조선 병사들이 밤에 거북선을 지키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횃불을 든 병사들의 위치가 거북선과 너무 가깝다. 거북선도 몸체는 나무로 만들어진지라 불에 취약한데 저렇게 가까이 불을 들고 있으면 까딱하다가 다 태워먹기 십상이다(...) 이건 역사 재현이 아니더라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라 아쉬움이 있다. 또한 화재 위험이 낮은 초롱등도 당대에 많이 썼고 거의 손전등과 같은 형태인 조족등도 있었는데 전혀 구현되지 않았다. 이건 다른 사극들도 마찬가지지만....
* 영화상에서도 이순신이 사용하는 검에 "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62]라는 유명한 문구를 새겨놓은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문구가 새겨진 검은 2m에 가까운 장검[63]이며 이순신이 실전에서 사용한 검에 그 문구가 새겨져 있는 것은 역사와 다르다고 볼 수 있으나, 대중들에게 이순신의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는데 상징적인 문구라서 새겨넣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오류로는 이순신의 전투용 칼이 좌대에 놓인 것. 조선시대에는 좌대에 칼을 놓지 않았고 거치대에 세워드거나 끈을 이용해 벽에 걸어두었다. 좌대에 칼을 놓는 것은 현대에 일본에서 들어온 검도 영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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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닻은 이렇게 생기거나, 아니면 적당한 크기의 돌에 줄을 감은 돌닻(정碇)을 사용했다.
...9월 10일 밤중에 적병이 거짓 물러가는 체하다가 몰래 되돌아와 적의 대장이 직접 전투를 독려하였다. 여러 왜적이 모두 방패로 가리고 머리를 감싸고서 처음에는 동문(東門)을 공격하였는데, 앞에서 한꺼번에 올라가게 하고 뒤에서는 천개의 총으로 일제히 사격하여 성 위에 사람이 설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김시민은 무리를 지휘하여 활과 쇠뇌와 포를 쏘고 돌을 굴려 내리니, 적병이 이르는 곳마다 죽어 넘어져 쓰러진 시체가 삼대처럼 즐비하여 일단 공격을 완전히 좌절시켰다...-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10월 1일(정해)


[1] 조선시대 '장군'이라는 칭호는 사실상 첨절제사나 만호에게나 붙일 수 있고, 정3품 이상인 당상관부터는 쓰지 않는 호칭이라고 생각했다. 무관 역시도 2품으로 승진하면 문반 품계인 '가선대부'를 받기 때문에 장군 칭호를 쓰지 않는 것이 원칙. (2품부터는 무관 역시 문관의 품계를 받는다는 것은 고등학교 국사책 부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참고로 이순신은 한산도 해전 이후 그 품계가 정2품 상계 정헌대부까지 올라갔다.)[2]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는데 대한민국 해군 제 19대 해군참모총장 김홍렬 제독으로,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군 수뇌부 숙청 때 해군참모총장과 해군중장 3명이 모두 해임되면서 소장이던 김홍렬 제독이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는데, 전쟁시 외에는 2계급 특진이 안되는 군 인사법 규정 상 2년 임기 중 첫 1년은 중장 계급으로 참모총장에 재직했고 1년을 채운 후에야 대장으로 진급하여 다음 1년간은 대장 계급으로 재직했다.[3] 함대사령관에게 휘하 대위~대령급장교가 자신들과 비슷하게 호칭한다고 보면 된다.[4] 이 부분 역시 아군 함선은 12척이 아니라 13척이 맞다. 당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1척을 인솔하였으며, 후반에 전장기세가 아군에도 유리했음에도 응전하지 않았을뿐 전장에는 있었다(...) 해당전투 후 결국 보직변경을 요청하여 육군으로 보직을 옮겼다.[5] 왜군은 선봉 구루지마, 중군 와키자카, 후군 도도로 나뉘며, 각 제대별로 기함격인 안택선 1척에 약 30여척 내외의 세키부네로 구성된 것으로 보여진다.[6] 즉 현대 사회와 달리[7] 왜 추정이냐하면 조선 초중기 갑주 유물이 몇 점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류성룡 찰갑 이전 800년 동안은 갑주 유물 자체가 거의 없다. 정말 몇 점 안된다. 오히려 삼국시대 갑주 유물이 더 많다. 조선 후기 두정갑이나 두석린갑은 그래도 유물이 좀 있는 반면에, 조선 초중기의 유물은 거의 없다.[8] 의상감독의 답변에 의하면 시간과 비용, 재질의 문제로 그대로 묘사하지는 못했다는 답변을 했다.[9] 문양을 넣은 찰은 발해 시대 유물은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찾을 수 없다. 멀리서 보면 쭈글거리는 느낌이 오히려 찰갑보다 지갑의 느낌을 준다.[10] 조선시대 무관의 복식 중 광대라고 하여 허리띠 안쪽에 두르는 게 있기는 하나, 방호력을 올린다기보다는 비상식량을 담는 등 추가적인 수납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라 말 그대로 천주머니일 뿐이지 본작의 갑주처럼 두툼한 양식이 아니다.[11] 당대에 일반화된 갑옷은 두정갑이니 두두미갑이니 이런 명칭을 살리지 않고 단순히 갑으로 표기했는데 조선 전기는 찰갑, 후기에는 두정갑을 갑으로 지칭했다.[12] 성종대 국조오례의에도 두정갑이 등장한다.[13] 정3품 상부터가 당상관, 이하가 당하관, 당하관중에서 정7품 이하가 참하관, 이상이 참상관이다. 당상관의 기준으로 무관은 정3품 상 절충장군 이상이 당상관이고, 어모장군 이하가 당하관이다. 수군이라면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좌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 정도만 당상관이다. 참상관은 종3품 순천부사 우치적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인 종6품은 현감, 부장, 종사관까지이고, 정7품은 참군 등이 해당된다.[14] 동서양을 막론하고 갑주는 대단히 비싼 물건이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갑옷으로 둘둘 감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양반, 기사, 사무라이 등 지배계급이거나 용병처럼 싸움이 곧 직업인 사람들 외에는 거의 없었다.[15] 후대에 그려진 서양의 십자군 기록화가 죄다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참고로 십자군 시대에는 사슬 갑옷이 대세였으며, 플레이트 아머는 그보다 수백 년 뒤의 물건이다.[16] 어란진은 전선 1척과 병선 1척, 사후선 2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진진은 전선 1척과 병선 1척, 방선 1척과 사후선 2척을 보유하고 있었다.[17] 여기에 추가적으로 엄심갑과 엄심 4벌을 보유하고 있었다.[18] 엄밀히 따지면 틀린 것이 아니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일본도에 맞서기 위해 길이가 길어지고 두 손으로 잡을 수 있게 한 환도가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다.[19] 이순신이 쓰는 환도 역시 이러한 손잡이를 차용하고 있지만, 현충사에서 소장 중인 이순신 장검을 바탕으로 디자인되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검은 일본에서 도검 장인 일을 하다가 탈출한 태구련 등의 장인을 시켜 만들었기 때문에 실제로 일본도의 손잡이 양식을 하고 있다. 영화 내에서도 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라는, 실제 유물에 적혀져 있는 유명한 문구를 클로즈업하는 장면도 나온다.[20] 특히 전투 초반에 대장선이 역류에 거스르는 상황에 있었음은 2011년에 나온 비교적 최신 학설인데 이를 전면수용하였다.[21] 원래 전투 시에는 화전(불화살)에 의해 돛이 탈까봐 접기는 한다. 왜 돛대는 세워 뒀는지는 의문이다.[22] 왜수군의 기록에 따르면 판옥선 월선은 성벽을 오르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때문에 이순신 장군이 출전한 해전에서는 왜수군의 월선이 거의 없었다.[23] 실제 기록에는 이순신 장군이 홀로 앞장서있을 때 왜수군이 가까이 오자 신속하게 포격을 가해 접근 조차 못했다. 굳이 찾자면 안위 함선이 포위될 뻔 했으나 이것도 이순신 장군의 포격으로 저지되었다는 기록은 있다.[24] 판옥선은 360도 돌며 사면에서 포격하는 배로 섬을 등지는건 고유 전투 기술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육지전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는 걸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해상전에는 맞지않다.[25] 닻은 브레이크와 같은 것으로 끊으면 배는 표류하게 된다.[26] 판옥선의 무게는 약 170톤으로 추정된다. 격군들이 노를 반대 방향으로 열심히 저었다고는 하나 강한 물살에 밀려가고 있던 상황에서 삿대로 버티는건 불가능하다.[27] 난중일기에는 분명히 중군영하기와 초요기를 같이 올렸다고 언급했다. 중군장 김응함이 바로 달려온 것도 이 때문이다.[28] 명량해전에서 왜수군은 유효한 근접전을 전혀하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의 전매특허이기도한 원거리 포격으로 수적 열세에도 왜수군을 괘멸시켰다.[29] 위 화공선씬 때문에 추가한 장면으로 한때 강강술래를 보고 왜수군이 당황했다는 루머를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30] 명량을 포함한 모든 임진왜란을 다룬 작품들이 간과하는게 협선이라는 보조함이다. 임진왜란 당시 판옥선, 거북선 외에협선들이 크기에 맞게 수색, 전령, 전투 수행 뿐만 아니라 보급에도 투입되었다. 특히 판옥선은 말그대로 공격선이고 사면에서 함포 사격을 했기 때문에 보급은 필수였다. 이를 위해 근처에서 협선들이 항상 대기 중이었기에 대장선이 폭약이 떨어지는건 말이 안된다.[31] 이건 현대 기술도 불가능하다. 상위 문서에도 서술했든 판옥선은 100톤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선이다. 또 당시나 지금이나 조류 파악이 가장 기본인 수군이 회오리가 가장 심한 곳에 있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다.[32] 명량해전의 전략은 왜수군을 좁고 회오리가 강한 해협에 가둬놓고 원거리 함포 사격으로 궤멸 시킨 것이다. 굳이 전술을 쓰자면 절대 월선을 허용하지 않았다.[33] 이는 일본 수군이 사용하는 함선의 내구도가 약했던 탓에 천자총통보다 구경이 작은 화포를 사용해도 충분한 화력이 나왔기 때문이다.[34] 신기비결은 육군용 교본이라 수군과 관련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35] 설정이라고 한 이유는 당시 조선 수군은 충각전술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충파 관련' 항목 참고.[36] 그런데 후속작 한산: 용의 출현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도 충각전술이 묘사되는 걸로 보아(...) 과연 이런 의도를 가지고 연출한 것인지는 의문이 있다.[37] 비격진천뢰가 대완구용 포탄이다.[38] 검색시에는 조선왕조실록에 '주화의 이익'이라 친 뒤 세종실록에 나오는 1건을 보면 된다.[39] 이런 오류가 널리 퍼진 이유는 중국에서 우리나라의 신기전과 같은 무기를 화전(火箭)이라 부르고, 우리나라도 종종 화전, 혹은 신기화전이라 불렀기 때문이다.[40] 물론 대장군전이 관통하는 과정에서 포로 격군을 결박했던 쇠사슬이 파손되면서 임준영의 행동에 제약이 다소 사라졌으며, 그로 인해 화약통을 물에 빠트리면서 대장선에 위험을 신호했고, 이를 알아차린 준사에 의해 다음 대처가 진행되도록 한 상황을 이끌어냈다.[41] 어디까지나 아직 당시 일본군의 주 원거리 투사무기는 활이었다.[42] 여담이지만 이전에 명량해전을 다뤘던 김경진소설 격류에서는 일본 제일의 저격수가 이순신을 저격하려고 특별히 고용되어 참전, 조선 대장선의 장수를 저격 사살하였으나 이는 이순신을 보호하기 위해 미끼 역할을 했던 순천 감목관 김탁이었고, 저격수는 분노한 순천 부사 우치적의 애기살 역저격으로 죽는 묘사가 있다.[43] 판옥선의 길이가 약 25m임을 생각하면 작중 보여지는 거리는 거의 1km, 못해도 수백m에 달한다.[44] 전설적인 저격수로 알려진 시모 해위해가 바로 스코프 없이 저격을 선호했기로 유명하지만, 역시 인간의 한계 때문에 500m를 넘어가는 저격을 하지는 못했고, 보통은 150m 안팎의 단거리 저격이 일반적이었다.[45] 마치 유탄을 쏘듯 각도를 재서 곡사로 퍼붓는다.[46] 아부키르만 해전에서 불타던 오리앙호가 대폭발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건 타닥타닥 불타다가 폭발한 것이다. 다만 서양 배는 너무 두꺼워서 포탄이 도저히 하부까지 뚫고 들어갈 수 없었던 점도 감안해야 한다.[47] 다만 비격진천뢰는우리가 아는 것처럼 불꽃을 일으키며 터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한쪽 구멍으로 화염과 파편이 뿜어져 나오는 식이다.[48] 그외에도 적은 확률이지만 자폭선 내부에 횃불등 잠재적 불씨들이 있었을 확률이 있다(사실 애초에 자폭선내에 자폭을 위한 도화선도 작중내에 묘사되었다).[49] 실제 역사 속에서도 근접전에서는 일본군이 강해 이순신도 웬만하면 적에게 근접전을 허용하지 않고, 대포로 사격 및 화살로 적을 부수는데 집중했다고 한다. 노량해전만 해도 당시에 이순신이 전사한 원인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이순신이 적진에 포위된 진린의 배를 구출하기 위해 돌격하였다가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고 자신도 눈 먼 총알에 맞아 전사한 것이다. 당시의 조선은 중기로 오자마자 중기병과 근접전에 쓰는 무구에 대해 천외시하는 경향이 강하게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이런 사태가 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탄금대 전투 당시에도 기병이 전부 궁기병에 국가에서도 근접전으로 하는 칼싸움과 창보다는 궁술을 중점으로 합격시켰는데 이로 인해서 조선은 일본군에게 근접전을 허용해 버리면 대책이 없는 병사들이 되었다. 그래서 이순신이 바다에서 선전할 무렵에 지상군들은 고전한 것이다(...)[50] 이 시기 이후로도 간간히 충각전술을 한 사례가 있기는 하나, 대부분 일시적인 이벤트에 가깝지 주요 전술 중 하나로 활용한 사례는 없다.[51] 고대 그리스에서 만든 충각전술 전용 함선은 노를 이중으로 배치했기 때문에 갤리선치고는 어마어마한 속도가 나왔다. 반면 판옥선은 노의 배치가 특별히 기존 한선과 다른 지점이 없다. 오히려 속도만 놓고 보면 선체가 작고 가벼운데다 항해성이 좋은 첨저선 구조를 차용했으며, 선상백병전을 주 전술로 삼은 탓에 적선에게 최대한 빨리 달라붙어야 했던 일본 수군의 세키부네가 판옥선보다 더 빨랐을 가능성이 높다.[52] 기록에서 이순신이 장군이 포격해 막았다는 것으로 보아 가까이만 왔던 것으로 보인다.[53] 임진왜란 이전 전국시대 일본에서 한창 내전이 일어날 때도 해전에서 세키부네가 아타케부네를 상대로 싸우거나 작은 세키부네가 큰 세키부네를 상대로 싸울 때 이런 식의 싸움이 일어났다.[54] 전근대 일본 싸움배 중 가장 큰 배인 아타케부네가 등장한 이유 자체가 조선기술의 발달도 있지만, 해전이 해적 출신의 독립 수군세력 중심에서 일반 지방영주들도 해군을 양성하면서, 해전에 익숙하지 않은 무사 계급이 사령관으로 앉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선상 백병전이 발달한 일본에서도 일단 내 배가 크면 적이 도선하기 힘들어 방어가 유리하고, 이쪽에서 활과 조총을 날려 쉽게 상대할 수 있다는 점은 유효했다.[55] 파일:external/c2f17e120352c673057e36d21b700efc99bfda92a5a00aaab9576210d760ddbf.jpg 이 장면도 억지인 것이, 거대한 판옥선을 어민들이 작은 고깃배를 끌고나와 그것도 갈고리를 걸고 사람의 힘으로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장선 안에 있는 노꾼들이 호응해서 남아 있던 노를 필사적으로 젓기도 하고, 배는 바다에 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의외로 현대의 수백 톤이 넘는 철선조차도 줄을 걸고 여러 명이 동시에 인력으로 잡아당기는 것만으로도 천천히 딸려갈 수도 있다. 그러니까 저 장면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것은 잔잔한 바다 위나 항구에서의 이야기이고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가는 배를 끌어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물리학적으로 생각해보아도 F-ma를 완전히 무시하는것이다. 당연히 0에 작은 힘들 더하면 움직이는것은 당연하나, 이미 소용돌이의 힘도, 질량도 넘사벽이다.[56] 영화상에서는 일본군과 조선인 모두 충파라는 용어를 쓰는데 영화상의 창작 용어다. 고대든 근세든 현대든 이러한 전술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57] 사실 그 구사자 없는 만주어조차도 조금 언어에 감각이 있는 사람들은 발음이나 억양 등에서 곧바로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58] 제작보고회 자리에서 류승룡은 직접 일본어 구사에 관해 "외국인이 한국어를 발음할때 느껴지는 어색함이 있는것처럼 자신의 일본어 발음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양해를 바란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59] 다만 발음 문제만이라면 어차피 일본은 수입하는 외국 작품들은 대부분 더빙을 적용하는게 일반적이므로 이게 문제가 될 가능성은 적다.[60] 한중일 3국은 화살을 쏠 때에는 射(쏠 사)를, 화약무기를 쏠 때에는 放(놓을 방)을 사용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궁기병이 돌격하며 화살을 쏘는 행위를 두고 '치사'라고 표현하며, 본작을 비롯한 이순신 관련 영상물에서 줄기차게 등장하는 '방포하라!'는 표현 역시 놓을 방 자를 쓰는 것. 일본어 '우테'에 사용하는 한자는 撃(칠 격)이긴 한데, '사격'이 쏠 사에 칠 격이기 때문에 결국 일맥상통하는 표현이다.[61] 영어권에서는 화약무기가 등장하기 이전, 활이나 투석기를 쓸 때 "Fire!"가 아니라 "Loose!" 혹은 "Release!" 등의 표현을 썼다. 서구권 사극에서 정말 잘 안 지키는 고증이기도 한데, 복식 고증으로 극찬받은 킹덤 오브 헤븐에서도 투석기를 날리면서 "Fire!"라고 외치는 고증오류가 있다.[62] 삼척서천(三尺誓天)-석자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동색(山河動色)-강산이 떨고, 일휘소탕(一揮掃蕩)-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혈염산하(血染山河)-피로 강산이 물들도다.[63] 현충사에 보관된 이 장검은 실전용 검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