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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8 01:43:44

어재연

파일:어재연 초상.jpg
초상화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魚在淵
1823년(순조 23) ~ 1871년(고종 8) 4월 24일[1] (향년 48세)

조선 후기의 장군. 본관은 함종(咸從)[2], 자는 성우(性于, 聖于), 시호는 충장(忠壯).

2. 생애

1823년 경기도 음죽현 상율면 석원동(현 경기도 이천시 율면 산성1리 돌원마을)에서 아버지 어용인(魚用仁, 1786 ~ 1836. 8. 27.)과 어머니 기계 유씨(1784 ~ 1860. 2. 8.) 유한찬(兪漢瓚)의 딸 사이의 3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841년(헌종 7) 정시(庭試) 무과에 급제하고 1843년 훈련원 초관(訓練院哨官:종9품)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그 뒤 1845년 부장(部將:종6품),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종6품),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종5품), 1846년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종4품), 형조 정랑(正郞:정5품), 1847년 광양현감(光陽縣監:종6품) 등의 벼슬을 거쳐 1850년(철종 1)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문관의 품계)로 품계가 올랐고, 같은 해 평안도 중군(中軍:정3품)과 부호군(副護軍:종4품)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평안도 중군에 부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난날 광양현감 재직 시절에 조운선이 침몰한 사건에 대해 조정에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고, 이에 대한 형벌로 관직을 모두 빼앗고 장형 1백 대에 대해 돈으로 바치고 한양에서 3천리 밖으로 유배를 보냈어야 했다. 하지만 어재연은 세조함길도 관찰사로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봉되었던 어세공(魚世恭)의 12대손이었기에, 다소 감형되어 장형 90대에 해당하는 금전을 납부하고, 파직된 뒤 1851년 4월 충청도 제천현 천수역(泉隨驛)에 2년 반 동안 유배되어 강제노역을 했다.

그러다가 1년여만인 1852년 5월 석방되었고, 1853년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면서 다시 관직에 복귀했다. 1854년 겸사복장(兼司僕將:종2품), 1856년 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종3품), 1859년 내금위장(內禁衛將:종2품), 1862년 대구진영장(大邱鎭營將:정3품), 1864년(고종 1) 장단도호부사(長湍都護府使) 등에 제수되었다.

공충도(公忠道:지금의 충청도) 병마절도사(종2품) 재직 중이던 1866년에는 프랑스 해군의 피에르 구스타프 로즈(Roze) 제독이 이끄는 함대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을 수비하였다. 이후 회령도호부사(會寧都護府使:종3품) 겸(兼) 회령진병마첨절제사(會寧鎭兵馬僉節制使:종3품) 북전위장토포사(北前衛將討捕使)로 부임해서는 북쪽 변경 지방의 비적을 토벌해서 치안을 확보한 동시에 장시(場市)를 개설하는 등 변경 무역을 활성화하는 데에 일조하기도 했다.

1871년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정2품), 금위영 중군(禁衛營中軍:종2품) 등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만 체아직인 호군(護軍:정4품)에만 제수되어 요양 중에 있었다. 그러다가 같은 해 6월 1일 미 해군신미양요를 일으키자, 삼군부의 추천으로 진무영 중군(鎭撫營中軍:정3품)에 급히 제수받고 강화유수부 광성보로 출전했다.

하지만 당시 강화도의 상황은 좋지 않았는데 휘하 군사들 중 대부분이 강화도에 단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자들이었고, 징집된 군사들도 모두 원래 소속 진영이 다르다보니 훈련 상태도 제각기 달라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전술을 짜던 어느 날 동생 어재순(魚在淳, 1826 ~ 1871. 4. 24.)이 찾아와 형의 밑에서 종군하겠다고 하자 부모님께 불효를 저지를 작정이냐고 혼을 내서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어재순이 나라가 어지러운데 어찌 떠날 수가 있겠냐며 설득하였다. 결국 어재순은 형의 밑에서 종군하게 된다.

이윽고 미 해군이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하고 본진인 광성보로 쳐들어온다. 이에 6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보에서 배수진을 치고 수비하던 어재연은 6월 11일에 덕진진까지 점령한 미군의 총공세에 맞서 고군분투하였다. 여기서 손돌목돈대까지 밀리자 어재연 장군은 휘하 군사 350명과 함께 최후의 전투 준비를 하게 된다. 손돌목돈대에서 미군과 조선군은 치열한 백병전을 펼친다. 어재연 장군은 수륙 양면 작전을 전개하는 미군에 맞서 싸우며 야포 사격을 전개하다가 육박전에 돌입해서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데 미군 수병 제임스 도허티[3]가 찌른 총검에 장렬히 전사하였다.[4]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어재연 및 어재순과 휘하 군사 53명이 전사, 100명이 자결, 20명이 포로로 잡히는 처참한 패배를 당한다. 하지만 자신들과 끈질기게 싸운 조선군을 높이 평가한 미 해군에서는 어재연을 포함한 장교들을 정중히 매장해준다. 남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었던 어재연과 어재순 형제의 부인들이 전사할 경우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두 형제들에게 표식[5]을 해두었는데 표식을 보고 두 사람을 고향에 안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투가 끝난 후 조정에서는 어재연에게 병조판서(정2품) 겸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종2품)에 추증하고, 직책이 없는데도 자원 출전했던 동생 어재순에게는 이조 참의(정3품)에 추증했다.

그리고 어재연에게는 특별히 충장(忠壯)시호를 내렸다.
1873년에는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충절을 기려 쌍충비를 세웠는데 내용은 이렇다.
형은 나라를 위해서 죽고 동생은 형을 위해서 죽으니 이 가문의 충성을 널리 알려라. 늠름한 충성은 달빛과 같이 밝으니 형제가 죽음을 서로 뒤따라가서 돌아가는 것 같이 하네

파일:external/image.newsis.com/NISI20140727_0009964455_web.jpg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위치한 어재연의 묘소. 오른쪽은 남동생 어재순의 묘.

3. 여담


[1] 양력 6월 11일.[2] 양숙공파(襄肅公派)-석원(石院) 문중 25세 재(在) 항렬.[3] 명예 훈장 수훈자이다. 당시 도허티 수병의 계급은 이병.[4] 1980년대에 방영한 MBC 사극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대원군'에서는 어재연이 총에 맞아 전사하는 걸로 나온 바 있다. 황현매천야록에서는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 장군의 전투를 자세히 기록하고 묘사하는데 내용 중에는 ‘칼을 들고 싸우다가 칼이 부러지자 납으로 된 탄환을 적에게 던지며 싸웠으며 적의 창에 난자되고 머리를 베어갔다’고 한다.[5] 어재연은 상투 댕기 끝 조리개를 평소와 다른 색으로 멨고 어재순은 버선을 뒤집어 신고 있었다고 한다.[6] 당시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미군은 한문을 쓸 줄 아는 인원과 함께 왔기 때문에 이 글자가 장성기를 뜻함을 엄연히 알고서 기념사진을 찍었다.[7] 아래 사진 맨 왼쪽에 찍힌 사람.[8] 퍼비스 이병은 이 공로로 무공훈장까지 받는다. 아래 기념사진 가운데에 찍힌 사람이 퍼비스 이병이다.[9] 아래 기념사진 맨 오른쪽에 찍힌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