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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14:34:32

양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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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헌수
梁憲洙
본관 <colbgcolor=#fff,#1f2023>남원 양씨
출생 1816년(순조 16) 혹은 1821년 (순조 21 )[1]
경기도 지평현 하서면 광탄리
(現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2]
사망 1888년(고종 25) 11월 (향년 72세)
경기도 양근군/지평현 (現 양평군)
부모 부친 - 양종임(梁鍾任)
자 / 호 경보(敬甫) / 하거(荷居)
시호 충장(忠莊)
약력 제주목사
정족산성 수성장지
한성부좌윤
황해도 병마절도사
어영대장
삼군부사
공조판서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선 후기의 장군. 병인양요강화도에서 정족산성 전투를 지휘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1816년 경기도 지평현 하서면 광탄리(현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에서 통덕랑(通德郞:정5품 문관의 품계)과 부사정(副司正:종7품)을 지낸 양종임(梁鍾任)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래로 동생 양면수(梁冕洙)가 있었다. 유학자 이항로[3]의 제자이며 최익현하고 친구이다.[4]

권무군관(勸武軍官)을 역임하다가 1848년(헌종 14) 증광시 무과에 병과 42위로 급제하고 1849년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철종 때는 참상으로 승진했고 이후 희천군수와 갑산부사로 부임했다. 1865년 제주목사로 있었을 때는 선정을 베풀었는데 탐관오리 백기호를 처벌해 백성들의 신망을 받았고 가을에도 역시 태풍 피해를 복구했으며 진휼을 요청하는 등 한 해를 제주도에서 보냈다. 1866년에는 승정원의 동부승지와 어영청의 천총(千摠)[5]을 맡으면서 당연직으로 준천사(濬川司)[6]의 도청(都廳)[7]도 겸했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병인양요 문서
3.4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정족산성 문서
2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순탄한 관직 생활을 보내다가 병인양요를 당해 어영청 강화부 정족산성 수성장이 되었다. 1866년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략했는데 양헌수는 좌선봉장으로서 500여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지상에서 프랑스군의 신경을 건드리다 기습적으로 도하해 정족산성에 주둔했다. 양헌수는 조선군의 조총이 사거리와 총탄 수에서 프랑스군 무기보다 성능이 떨어졌기 때문에 성벽 뒤에 숨어 있다가 프랑스군이 성에 가까이 오면 집중 사격하는 전술을 택했는데 프랑스 해군 대령 올리비에가 사실 적지 한복판에 와있는 상황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조급해할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그로 인해 조선의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군 6명이 죽고 30명이 부상당했는데 프랑스의 기록에는 3명이 죽고 35명 부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8]

양헌수는 병인양요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는데 한성좌부윤이 되고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했다. 재직하던 1871년에는 국방력 강화를 위한 별위사제도(別衛士制度)를 정착시키기 위해 매년 도시(都試)를 시행했는데 성적만을 보고 곡식과 면포를 포상했다. 공로를 인정받아 1년 더 임직했으며 황해도 연안에서 활동하던 해적을 상대로 크게 승전보를 울리기도 했다. 1873년 어영대장에 이어서 1875년 2월 형조판서가 주어졌으나 실제로 부임하지는 않았다. 1876년에는 김병학, 홍순목, 이용희 등과 함께 강화도 조약에 반대했는데 이걸로 보아 개화파는 아니고 보수적인 척화론자로 추정된다.[9] 흥선대원군파였던 모양인지 1882년 임오군란명성황후의 상을 치렀고 삼군부가 다시 설치되는 과정에서 조영하, 김병시, 김기석(金箕錫)과 함께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가 되었다. 1884년 공조판서에 임명되어 재상이 되는데 무관이 재상까지 오르는 드문 사례이다. 1887년 독련사로 천거되나 늙은 나이를 근거로 나아가지 않았는데 결국 1888년 11월 73세에 사망했다. 양헌수의 무덤은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덕수리 산59-3에 있으며 양헌수의 신도비도 양평군에 있는데 출생지와 사망지 모두 양평군이기 때문이다.

3. 여담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3092601900001300_P2.jpg

[1] 무과방목무보에는 조선 1821년(순조 21)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3] 이항로는 3살 때 천자문을 뗐다고 한다. 최승로, 이이 등 천재라 불린 인물들은 천자문을 3살 때 뗐다.[4] 같은 이항로의 제자로는 최익현, 박문일 등이 있다.[5] 조선시대에 각 군영에 속한 정3품 무관 벼슬.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 진무영 따위에 두었다. (출처:네이버 국어사전)[6] 조선시대에 서울 안의 개천을 치는 일과 사산(四山)을 지키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영조 36년(1760)에 두어서 고종 19년(1882)에 한성부에 합쳤다. (출처:네이버 국어사전)[7] 조선시대에 준천사에 속한 정3품 벼슬. 어영청의 천총이 겸임하였다. (출처:네이버 국어사전)[8] 문수산성에서 한성근이 양헌수와 같은 전략으로 프랑스군이 27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주장한다. 이 공으로 한성근 역시 양헌수처럼 출세가도를 달린다. 허나 이는 프랑스 기록엔 존재하지 않는다.[9] 병인양요 때 서양과 싸우기는 했으나 외국과 개항하는 일에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미국 배를 물리친 박규수가 개화론자였던 것과 비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