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해군의 HMS 에흐큘르 함[1]. 1803년 6월 28일 아이티 혁명 당시 생 도밍그의 프랑스 해군을 봉쇄하는 작전을 수행하던 도중 프랑스군의 로메인급 프리깃[2] 푸흐스이방 함에게 종사[3]를 당하는 모습이다. |
프랑스 해군 아쉴레(아킬레우스) 함의 모형 |
1. 개요
1782년부터 1813년까지 프랑스 해군에 인도된 74문 주력 전열함이다. 프랑스식 함선분류법에 따르면 74문급, 영국식 함선분류법으로는 3급함이다.[4][5] 원래 테메레르란 이름으로 활동하다 영국 해군에 나포되어 편입된 동명함의 이름을 계승하였다. 자크노엘 사네(Jacques-Noël Sané)가 자신의 초기 설계작인 아니발급 74문 전열함을 바탕으로 설계하였으며,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며 프랑스 해군 건함국 감독관이기도 했던 장 보르다가 1786년에 입안한 대규모 건함 프로젝트에서 프랑스 해군의 차기 74문 주력함급으로 선정되어 자그마치 107척이 건조되었다.[6] [7]오랫동안 생산되고 많이 이용된 베스트셀러 함종이었기에 바리에이션도 많은 편이다.2. 개발사
2.1. 74문 2층 포갑판함의 등장
1700년대 초부터 프랑스의 건함 사상은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새로이 뽑혀나오는 프랑스 함선들은 화력에 몰빵해서 항해에 지장이 올 정도인 영국 해군의 함선들보다 더 강력하고 안정적으로 설계되었다. 예를 들어 1706년 건함계획으로 건조된 영국 70문 3급 전열함의 포갑판 길이가 45.7m, 1733년 당시의 70문함이 46m로 큰 차이가 없었던 반면, 프랑스의 경우 1702년 영국에 나포된 70문급 펠메 함이 47m, 1744년 건조된 70문급 마니아님 함은 52.9m로, 거의 6m 가량 거대해졌다. 이는 1741년 당시 계획된[8] 강화된 영국 1급함의 갑판 길이인 53.3m에 맞먹는 크기다. 이 엄청난 크기 차이는 스페인 함선들과 비교해도 마찬가지였고, 때문에 영국 함선들은 나날이 발전하는 프랑스-스페인 함선들을 상대하는 데 매우 애를 먹었다. 프린세사와 영국 전열함들의 전투 |
그리고 결국 당시 영국 해군 수뇌부에서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젠킨스의 귀 전쟁[9]이 한창이던 1740년 4월 8일, 영국 70문 3급 전열함 HMS 레녹스, HMS 켄트, HMS 오르포드 세 척이 스페인 해군의 64문함 프린세사 1척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3대 1의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영국 함대는 프린세사와 장장 6시간을 싸우고 나서야 나포할 수 있었다. 심지어 프린세사는 전투 전부터 이미 함체가 손상된 상태였고 64문의 포를[10] 장착하고 있었을 뿐이었음에도 70문함 세 척과 호각 이상의 전투를 치르며 레녹스를 중파시키고 켄트를 무력화시켰다. 이는 영국함 세 척이 고작 1000톤급이었으며 24파운더와 12파운더를 주무장으로 달고 있었던 반면, 프린세사는 자그마치 1700톤에 달한데다 32파운더와 18파운더를 장착하고 있었기에 벌어진 사태였다. 비록 영국함 세 척이 1600년대 중후반에 건조된 노후함이었고 프린세사는 1730년에 나온 신전함이란 사실을 감안해도 이는 심각한 문제였는데, 이는 영국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노후함까지 뽕을 뽑아 수적 우세를 유지하더라도 신전함으로 구성된 적국 함대에 제대로 대응하기가 매우 어려워질 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경악한 영국 지휘관들은 폭발했고, 1744년에는 자국 70문함은 프랑스 52문함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에 불과하다는 어마어마한 혹평까지 나왔다. 그러자 영국 해군 당국은 1741년 계획안[11]을 통해 주력 함급인 3~4급함들을 대대적으로 손질하여 60문함을 58문함으로, 70문함을 64문함으로 개조한 대신 더 강한 함포를 실어 전체적인 작전지속능력과 화력의 증대를 꾀했다. 그러나 이렇게 뒷북을 요란하게 쳐댔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64문함과 90문급 2급함 사이의 간극을 메꿔줄 새로운 개념의 함선을 자체 개발하진 못했다.
이렇게 영국이 열심히 삽질하는 동안 루이 15세 집권기의 프랑스 왕국에서는 3층 포갑판 전열함의 강력한 화력과 기존의 70문 2층 포갑판 전열함의 항해성을 결합하여 더 강력한 주력함급을 개발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산물이 바로 74문 2층 포갑판 전열함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74문 2층 포갑판함 자체는 이전에도 존재했으나 이들은 포갑판 길이가 프랑스 피트로 154피트를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했고, 이 때문에 중무장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36파운더 포는 고작 13문을, 18파운더 또한 14문만을 탑재한데다 나머지 함포는 약한 8파운더 포였으니 실질적으론 70문함에 비해서도 그닥 낫다고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1739년, 프랑스의 함선 설계자 소(小) 프랑시스 쿨롱이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는 이런 어정쩡한 기존 74문함의 설계를 대대적으로 손봐 포갑판 길이를 164 프랑스 피트까지 늘리고 28문의 36파운더와 30문의 18파운더를 올려버렸고, 별 쓸모도 없는 8파운더는 10기 내외만 장착한 신형 전함 테러블 함을 진수시켰다.
피니스테레 곶 전투에서 영국에 노획되어 유니언 잭이 박힌 영국 해군기를 펄럭이고 있는(...) 프랑스 전열함들. 중간의 두 큰 함선들 중 우측에 위치한 함선이 테러블 함이다. |
하필 74문인 이유는 신형 2층함 설계의 한계 때문이었다. 신형 74문함들은 높이를 낮춘 대신 길이를 늘린 형태이기에 항해 안정성과 전투지속능력은 좋았어도, 목재 용골의 피로도가 동급 3층함의 그것에 비해 매우 컸다.[12] 쉽게 말해 길게 뽑은 함선 위에 과도한 중무장을 때려박았다가는 나무 중심축이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두 동강이 날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74문이 2층함의 함체가 안정적으로 버틸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무장의 최대치였다. 프랑스의 생 에스프히급과 같은 80문 2층 포갑판함들이 최상급 1급과 주력함급인 74문급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건조되었으나 이들은 더 길고 포 숫자도 6문이 많은데다 18파운더 자리에 24파운더를 대신 주렁주렁 달고 다닌 만큼 조작이 상대적으로 불편했고, 파도가 치기라도 하면 하부 포갑판으로 물이 새어들어오기도 했으므로 주력이 되지는 못했다.[13][14] 대신 프랑스는 74문함을 대형 모델(grand modèle)과 소형 모델(petite modèle)로 이분화하여, 포문수는 같게 하되 대형화 모델에서는 18파운더를 24파운더로 교체하여 화력의 강화를 꾀했다. 여하간 이 이후 74문함은 유럽 해군의 명실상부한 주력함급으로 자리잡는다.[15]
2.2. 영국의 추격과 테메레르급의 개발
골머리를 싸매던 영국 해군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 당시 테러블과 그 동형함 인빈시블을 노획하여 그 우월성을 접한 이후 74문을 차기 3급 주력함급으로 선정하고 이를 확보하고자 노력했다.[16] 우선 기존의 2급 함선들이 74문급으로 축소 개조되었으며, 1745년 건함 계획으로 건조되던 더블린급 70문 3급 전열함들은 74문을 탑재할 수 있도록 조금 확대되었다. 1759년에는 프랑스의 이원화 설계 개념도 받아들여 연장형(large model)과 일반형(common model)으로 나누었으며, 노획한 인빈시블을 복제하여 첫번째 연장형 전열함인 발리언트급 3급 전열함 두 척을 건조하였다. 이 함선들은 프랑스의 대형 모델과 마찬가지로 연장된 선체위에 18파운더 대신 24파운더를 올려서 더 강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17] 1760년에는 이후 건조될 일반형 74문급 3급함의 기본이 된 벨로나급 전열함이 취역했다. 이후 건조된 애러건트급, 엘리자베스급 등의 함급들은 대부분 여기서 수선하 부분의 설계를 조금씩 손보는 수준에 머물렀다.테메레르급은 이러한 영국의 맹렬한 추격 속에서 설계되었다. 무장은 테러블 함과 차이가 없었던 대신 함 배수량을 기존의 1750톤급에서 대형 모델 수준의 1900톤 가량으로 확 잡아늘렸다. 이는 2층 포갑판함으로써는 한계치에 다다른 수준의 배수량이었기에 다른 어떤 74문함보다 더 큰 구조적 안정성과 여유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그렇기에 프랑스는 기술적 격차를 열심히 좁혀온 영국 74문 3급함들과의 경쟁에서 다시 한 발 앞서나갈 수 있었다. 가령 1793년 건조된 테메레르급 폼페이가 영국식 적재중량톤으로 1901톤이었던 반면, 20년 후인 1812년에 건조된 일반형 3급함인 뱅거급 전열함[18] HMS 인더스의 경우 영국식 적재중량톤으로 고작 1756톤이었다. 그래서 영국은 90문 2급 전열함 나무르를 74문 3급함으로 개조하거나 테메레르급을 적극적으로 나포하기도 했고[19] 마르스급, 에이젝스급과 같은 연장형 74문급을 더 건조하거나 테메레르급을 아예 폼페이급, 아메리카급으로 베껴가기도 하며 프랑스와의 함선 체급 차이를 메꾸고자 했다.
3. 기본 정보
함급 | 테메레르급 |
함형 | 3급 주력 전열함 |
제조국 | 프랑스 |
운용국 | 프랑스,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
계획 | 120척 |
완공 | 107척 |
취소 | 13척 |
세부 함급 | |
테메레르형 | 18척 |
두케인형 | 46척 |
다누베형 | 26척 |
카사드형 | 2척 |
쉬프랑형 | 3척 |
플루톤형 | 25척 |
총 | 120척 |
4. 이 함급의 유명 함선
4.1. HMS 임플라커블(뒤게 트루앙, HMS 푸드로얀트)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트라팔가 해전 기념식 당시의 모습. 오른쪽이 임플라커블이며 왼쪽의 함선은 레다급 프리깃 HMS 트링코말리로 보여지나 확실하진 않다. 사진에서 임플라커블은 "영국은 제군이 각자 의무를 완수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는 넬슨 제독의 개전 신호를 깃발로 표현하고 있다. |
본래 함명은 뒤게 트루앙(Duguay-Trouin). 프랑스 로슈포르에서 1800년에 취역했다. 1802년 첫 임무로 아이티 혁명 진압을 명받아 동형함 두케인 및 38문 프리깃 게리에르[20] 와 함께 수송선단으로 위장하여 생 도밍그로 파견되었으나 애로건트급 74문 3급 전열함 HMS 벨레로폰[21], HMS 엘레판트, HMS 뱅가드 및 컬로덴급 74문 3급함 HMS 테세우스의 봉쇄로 고립되었다. 이때 게리에르와 뒤게 트루앙은 탈출했으나, 두케인은 영국에 나포되었다가 1804년 자메이카 앞바다에 좌초되었고 이듬해에 해체되었다.
러시아 제국 해군 전열함 세보르드를 굉침시킨 임플라커블과 센타우르 |
트라팔가 해전에서는 프랑스 함대의 전위에 배치되어 있었고, 덕분에 후미에서 벌어진 전투에 휘말리지 않고 다른 세 척의 동료 함선들과 함께 살아서 도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을 쫓아온 영국 전열함 HMS 시저[22], HMS 나무르[23], HMS 히어로[24]와 HMS 커레이저스[25]외 수척의 프리깃과의 전투 끝에 나포되어 영국 해군 소속의 HMS 임플라커블 호로 개칭되었다. 1808년에는 발트 해에서 스웨덴 해군 전열함대와 연합하여 러시아 제국 해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마르스급 74문 전열함 HMS 센타우르 함과 합세해서 러시아 제국의 야로슬라블급 74문 전열함 브세보로드 함[26]를 공격하여 탄약고 유폭으로 침몰시켰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군항인 크론슈타트를 봉쇄했다. 이후 나르바 만에서는 러시아 차르의 소유물을 나르던 수송선단을 덮쳤으며, 한때 적이었던 HMS 벨레로폰, HMS 멜포메네, HMS 프로메테우스와 함께 러시아 포함들을 공격하여 그들이 운반하던 군용 화약들을 날려버렸다.
이후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고 있던 이베리아 반도로 보내져 스페인의 페르난도 7세를 구해내려 했으나 그가 영국의 구원을 거절하여 실패했다. 대신 장드디외 술트와 클로드 빅토르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공세를 받는 카디즈 항으로 가서 리처드 키츠 제독이 이끄는 영국-스페인 연합함대의 기함으로써 지역을 방어해냈다. 그리고 멕시코에서 군자금을 싣고 왔으며, 1813년 플리머스 항으로 돌아갔다.
1930년, 예인선에 이끌려 한때 적이었던 HMS 빅토리와 124년만에 재회하는 임플라커블. |
전후인 1840년에는 영국 지중해 함대 소속으로 이집트 총독 메흐메드 알리의 군대가 점령한 오스만 제국령 시리아로 보내져 무력 시위를 벌이고 오스트리아 제국군, 오스만 제국군 함대와 함께 아크레의 이집트군을 포격했다.[27] 1844년 예비역으로 분류되었고, 1855년 훈련함으로 전환되어 남은 백 년의 세월을 보냈다. 세계대전 중에도 연습함으로 사용되었는데 1943년에는 푸드로얀트라는 새 이름을 받기도 했다. 지지리도 운이 없어 영국 본토 항공전이 한창이던 1940년에 나치 독일 공군의 폭격을 받아 침몰했던 블랙프린스급 74문 3급 전열함 HMS 웰즐리 함[28][29]과는 달리, 임플라커블은 별다른 위협을 받지 않고 종전을 맞았다.
그러나 전후 영국이 이 배를 유지할 돈이 없는 관계로 1949년에 채널 제도 올더니 섬[30] 앞바다에 자침[31] 처분되었다. 영국 해군 내에서 빅토리에 이어 가장 오래된 함선이자, 1920년대에 모금 운동까지 해서 살린 배란 점에서 정말 안타까운 부분이다. 사실 전후 대부분의 국가들이 돈이 없어서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전함 HMS 워스파이트 등의 2차대전의 역전의 용사들도 해체하는 마당에 못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자침시키기는 아무래도 좀 아까워서 원래 주인이었던 프랑스에 반환하려고 했으나 프랑스는 대전 대부분의 기간 동안 나치 독일에게 전 국토가 점령당했었던 만큼 영국보다 훨씬 상태가 좋지 않아 반환을 거절했다. 침몰할 때 영국 국기와 프랑스 국기를 같이 달았다. 이때 일화가 좀 있다. 폭파할 때 적정량보다 많은 폭약을 쓴 바람에, 깃발이 꽂힌 상갑판이 침몰하기 싫다는 듯이 함체에서 분리되어 오래도록 파도를 맞으며 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침몰하고 나서 며칠 후에는 그 남은 잔해 중 일부가 프랑스의 해변으로 떠올라왔다고. 임플라커블의 침몰 이후에야 오래된 함선들을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이 본격적으로 폭발했고, 이는 영국이 1869년에 건조된 클리퍼 커티 삭 호를 보존하기로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자침 직전 선수상과 주요 설비를 철거하는 모습. 내부의 모습 또한 찍혀 있다. |
임플라커블의 침몰 영상 |
임플라커블의 유산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 개가 남아 있다. 우선 영국 그리니치에 있는 영국 해군 박물관[32]에는 임플라커블의 함미 부분과 선수상이 전시되어 있다. 둘 다 진품이다. 함미에는 영국 해군기와 프랑스 삼색기가 모두 꽂혀 있다. 그 외 캡스턴은 임플라커블이 건조된 장소인 프랑스 로슈포르의 해군 박물관에서 볼 수 있으며, 선장실 문은 스코틀랜드 던디에 박물관함으로 개조되어 정박 중인 레다급 38문 프리깃[33] HMS 유니콘 함에 전시되어 있다.
참고로 유니콘 함 또한 1824년에 건조된 매우 오래된 함선이다. 다만 원형을 그리 잘 유지한 편은 아니므로, 제대로 된 레다급 프리깃을 보고 싶으면 스코틀랜드 하트풀에 보존 중인 동급함 트링코말리 함[34]을 보러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게다가 이 함선 또한 임플라커블과 연관이 좀 있는 함선이기도 하다. 1930년대 임플라커블과 트링코말리 두 함선은 공동으로 보존 결정이 내려져 연습함, 수용함, 석탄창고로 사용되었고, 영국 해군의 역사 그 자체로서 국가적 행사에 불려다녔다. 그리고 임플라커블이 1943년에 받은 푸드로얀트라는 이름 또한 트링코말리와 공동으로 받은 것이다. 다만 트링코말리는 현역에서 물러나고 6년 후인 1992년에 원래 함명으로 다시 개칭되었다.
4.2. 르두터블
그림의 중앙에 있는 함선. 양 옆은 HMS 빅토리(좌)와 HMS 테메레르(우) |
항목 참조
5. 하위 함급
- 1번함의 제원을 기준으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5.1. 테메레르형
함명 | 테메레르 |
함급 | 테메레르급 |
기공 | 1782년 5월 |
진수 | 1782년 12월 17일 |
퇴역/침몰 | 1803년 침몰 |
무게 | 2,966톤 |
길이 | 55.87m |
폭 | 14.9m |
무장 | |
하부 포갑판: 36파운더 롱건 28문 | |
상부 포갑판: 18파운더 롱건 30문 | |
선수/선미: 8파운더 롱건 16문, 36파운더 카로네이드 포 4문 | |
재질 | 목재 |
건조 수 | 18척 |
5.2. 두케인형
1796년 프랑스 혁명전쟁 중 아일랜드 원정[35] 당시의 두케인형 드화 들롬(Droits de l'Homme. 인권이란 뜻.) 함. 중앙이 드화 들롬 함이며 그 왼쪽은 영국의 아덴트급 64문 전열함 HMS 인디패티거블[36], 오른쪽이 아마존급 36문 프리깃 HMS 아마존 함이다. 당시 드화 들롬 함은 549명의 병력을 아일랜드에 내리고 인근에서 8일간 활동하다 본국으로 귀항했는데, 브르타뉴 플로즈벳 앞바다에서 이 둘과 조우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 당시 기상 상황은 최악이었고, 넘치는 파도의 유입을 막아야 했기에 드화 들롬은 강력한 하부 포갑판의 36파운더를 쓸 수 없었다. 영국 해군 프리깃 두 척은 이를 노리고 전투를 벌였고, 열세 시간을 싸운 끝에 드화 들롬의 모든 돛과 키, 닻을 아작내곤 표류하게 만들었다. 결국 드화 들롬은 인근의 해안에 좌초하여 파괴되었다. 사망자는 300명이 넘었다. 한편 간 크게 전열함에 덤빈 두 영국 프리깃의 운명은 명확히 갈렸다. 아마존은 대파되어 프랑스 해안에 좌초되었다가 살아남은 승조원들 전부가 포로로 잡혔던 반면, 인디패티거블은 돛과 삭구들 거의 전부를 못 쓰게 된 상황에서도 기어이 항해가 가능할 만큼 수리해낸 끝에 영국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사상자는 경상자 19명 뿐이었다. |
함명 | 두케인 |
함급 | 테메레르급 |
기공 | 1788년 1월 |
진수 | 1788년 9월 2일 |
퇴역/침몰 | 1803년 영국에 나포, 1805년 해체 |
무게 | 2,966톤 |
길이 | 55.87m |
폭 | 14.9m |
무장 | |
하부 포갑판: 36파운더 롱건 28문 | |
상부 포갑판: 18파운더 롱건 30문 | |
선수/선미: 8파운더 롱건 16문, 36파운더 카로네이드 포 4문 | |
재질 | 목재 |
건조 수 | 46척 |
5.3. 다누베형
함명 | 폴로나이스 |
함급 | 테메레르급 |
기공 | 1804년 4월 |
진수 | 1808년 5월 |
퇴역/침몰 | 1825년 침몰 |
무게 | 2,966톤 |
길이 | 55.87m |
폭 | 14.9m |
무장 | |
하부 포갑판: 36파운더 롱건 28문 | |
상부 포갑판: 18파운더 롱건 30문 | |
선수/선미: 8파운더 롱건 16문, 36파운더 카로네이드 포 4문 | |
재질 | 목재 |
건조 수 | 26척 |
이 함형의 최종 건조분 3척은 나폴리에서 건조되어 조아킴 뮈라가 왕으로 있는 나폴리 왕국 해군에 인도되었다.
5.4. 카사드형
함명 | 베테랑 |
함급 | 테메레르급 |
기공 | 1794년 11월 |
진수 | 1803년 7월 |
퇴역/침몰 | 1833년 침몰 |
무게 | 2,966톤 |
길이 | 56.47m |
폭 | 15.05m |
무장 | |
하부 포갑판: 36파운더 롱건 28문 | |
상부 포갑판: 24파운더 롱건 30문 | |
선수/선미: 8파운더 롱건 16문, 36파운더 카로네이드 포 4문 | |
재질 | 목재 |
건조 수 | 2척 |
대형화 함급. 상갑판의 18파운더 포를 24파운더로 교체한 화력강화형이다. 안정성을 위해 2피트 가량 길고 반 피트 가량 넓게 설계되었다. 이 때문에 건조 속도 또한 타 함선들에 비해 꽤나 늦어졌는데, 대부분의 함선들이 2년 내에 진수되었던 반면 이 함형의 함선들의 제작에는 자그마치 9년이 소요되었다. 1816년에 상갑판의 24파운더들은 안정성 문제로 인해 전부 18파운더로 교체되었다.
5.5. 쉬프랑형
함명 | 쉬프랑 |
함급 | 테메레르급 |
기공 | 1801년 8월 |
진수 | 1803년 9월 |
퇴역/침몰 | 1815년 |
무게 | 2,966톤 |
길이 | 55.87m |
폭 | 14.9m |
무장 | |
하부 포갑판: 36파운더 롱건 28문 | |
상부 포갑판: 24파운더 롱건 30문 | |
선수/선미: 8파운더 롱건 16문, 36파운더 카로네이드 포 4문 | |
재질 | 목재 |
건조 수 | 3척 |
나폴레옹 정권의 첫 해군장관이었던 피에르 알렉상드르 포페이의 요구로 만들어진 소형화 함급. 총 두 척이 완공되었고, 밀어주던 포페이 장관이 1801년 사임함에 따라 세 번째 함선인 Pacificateur는 건조가 중단되었다.
5.6. 플루톤형
함명 | 플루톤 |
함급 | 테메레르급 |
기공 | 1803년 8월 |
진수 | 1805년 1월 |
퇴역/침몰 | 1808년 스페인에 나포/ 1816년 침몰 |
무게 | 2,900톤 |
길이 | 55.87m |
폭 | 14.9m |
무장 | |
하부 포갑판: 36파운더 롱건 28문 | |
상부 포갑판: 24파운더 롱건 30문 | |
선수/선미: 8파운더 롱건 16문, 36파운더 카로네이드 포 4문 | |
재질 | 목재 |
건조 수 | 25척 |
소형화 함급. 주로 나폴레옹 제국의 괴뢰국들인 네덜란드나 베네치아, 안트베르펀 등지에서 건조되었다. 이 지역들은 갯벌이 많아 수심이 깊지 않았고, 이 때문에 이들 함형은 흘수를 낮게 잡아 재설계되었다.
6. 영국 해군의 파생 함급
6.1. 폼페이급
지브롤터 해협 해전에서의 폼페이급 1번함 수퍼브(Superb). 뒤에 있는 함선 두 척은 스페인 해군의 산타 안나급[37] 112문 전열함들이다. 그림 중앙의 불 붙은 함선이 레알 카를로스이며 멀쩡한 함선이 그 동형함 에르메네힐도 함. |
영국 해군이 1793년 툴롱에서 노획한 테메레르급 두케인형 폼페이함을 거의 그대로 복제하여 만든 함급이다. 수퍼브, 아쉴레 2척이 건조되었다.
1번함 수퍼브는 매우 독특한 이력을 하나 보유하고 있다. 지브롤터 해협 해전 당시 수퍼브는 유능한 리처드 굿윈 키츠 함장의 지휘 하에 카디즈로 급파되었다. 때문에 해상봉쇄에는 얼마 참여하지 않았고, 덕분에 지브롤터의 영국 해군 함선들 중 가장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매우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이를 알아본 영국 함대 사령관 제임스 사마레즈 경은 수퍼브에 패주하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에 대한 추격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의 기대대로, 수퍼브는 7월 12일 밤 스페인 함대를 따라잡았다. 수퍼브의 바로 앞에는 스페인의 112문 산타 안나급 전열함 레알 카를로스함과 그 동형함인 에르메네힐도 함이 나란히 항진 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3급함이 1급함을 상대로 단독으로 덤비는 일은 상식적으로 거의 일어나지 않으며, 맞붙는다 하더라도 체급 차이로 인해 3급함이 패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퍼브의 키츠 함장은 야음을 틈타 이 거함 두 척을 기습하기로 결정한다.
[[파일:450px-RealCarlosAlejoBerlingeromuseonavaldemadrid.jpg | width=90%]] 수퍼브의 어이없는 희생양이 된 스페인 해군의 산타 안나급 112문 전열함 레알 카를로스 |
우선 두 척의 산타 안나급 중 오른쪽에 위치한 레알 카를로스함의 우현에 접근한 수퍼브는 좌현 일제사격을 가해 스페인 함대를 혼란에 빠뜨리고 자리를 이탈하여 어둠 속으로 숨었다. 수퍼브의 일격은 레알 카를로스함의 우현을 휩쓸고 화재를 일으켰으며 일부 포탄은 카를로스함 좌현의 에르메네힐도 함을 강타했다. 난데없는 일제포격에 휘말린 두 스페인 함선들 또한 곧 총원전투태세를 갖추고 반격을 개시했지만 그들은 적군함이 어디에 있는지, 또는 얼마나 많은 영국 해군 함선이 공격해 왔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곧 서로를 야습해온 영국 함선이라 오해하여 아군을 향해 성대하게 포격을 개시했다.
두 척의 산타 안나급 간의 전투에서 불리한 쪽은 이미 한 번 일제포격을 받은데다 불까지 붙은 레알 카를로스 함이었다. 아군의 맹렬한 포격을 받으며 불길에 삼켜지던 레알 카를로스 함의 저항은 서서히 잦아들었고, 함선은 오래지 않아 거의 무력화됐다. 혈투 끝에 승기를 잡은 에르메네힐도 함은 종사를 가해 마지막 일격을 먹이기 위해 불타오르는 카를로스함의 후미로 접근했다. 그런데 그때 돌풍이 불어와 두 함선의 돛을 한데 얽어버렸고, 카를로스 함을 삼키던 불이 에르메네힐도 함으로도 확 번져왔다. 얼마 후 그렇게 어둠 속에서 맹렬히 불타오르던 두 자매 함선은 거의 동시에 탄약고 대폭발을 일으키며 침몰하였다. 폭발로 인한 사망자만 자그마치 1700명에 달했다. 한편 유유히 빠져나온 수퍼브는 사상자 하나 없이 적국의 상급 주력함을 두 척이나 제거하고 금의환향하였다.
폼페이급 2번함 아쉴레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스페인 해군의 몬타니에급 80문 전열함 아르고나우타[38], 프랑스 해군의 테메레르급 아쉴레[39] 및 엘리자베스급 74문 3급함 베르윅[40]과 연달아서 싸우고도 고작 13명을 잃은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아쉴레와 싸운 세 척은 모두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는데, 아르고나우타는 208명의 사상자를 내고 항복 후 나포되었으며 베르윅은 승조원의 절반에 달하는 250명의 사상자를 내고 항복했다. 두 척 모두 전투 이후 몰아닥친 폭풍에 침몰했다. 테메레르급 아쉴레는 사실상 동일 함급에 동명함이기까지 했던 영국 해군 아쉴레에게 침몰당하는 동족상잔을 겪진 않았으나, 곧이어 엘리자베스급 74문 3급함 HMS 디파이언스, 넵튠급 98문 2급함 HMS 드레드노트[41] 와 런던급 98문 2급함 HMS 프린스[42] 세 척 사이에 끼어 삼면에서 얻어터지다 탄약고가 유폭하여 침몰했다. 생존자는 고작 158명이었다.
6.2. 아메리카급
1812년 5월 22일 전투 당시의 1번함 HMS 노섬벌랜드. 그림의 맨 오른쪽 함선이다. 나머지 세 척은 프랑스 함선들로, 왼쪽부터 맘루크, 그리고 침몰 중인 아리아네와 앙드로마크다. 당시 노섬벌랜드는 프랑스 그화(Groix)의 해안에서 해상봉쇄를 수행하던 중 통상파괴를 위해 막 출격한 프랑스 해군의 팔라급 40문급 프리깃 아리아네와 앙드로마크, 그리고 16문 브릭선 맘루크와 조우하였으며, 12문 브릭선 그라울러의 도움을 받아 다음날까지 전투를 치러 아리아네와 앙드로마크 두 척을 침몰시켰다. 프랑스 프리깃들은 해안포대의 도움을 받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두 함선은 각자 시간차를 두고 탄약고가 유폭해 굉침당했다. 브릭선 맘루크도 흘수선 아래에 여러 발의 포탄을 맞아 침몰 직전까지 몰렸지만 무장과 짐을 바다에 갖다버리고 전속력으로 내달려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진수된 지 1년만에 파괴된 이 두 운 없는 프리깃들의 잔해는 1986년에 발견되었고 1996년에 일부가 건져졌다. 현재는 셸부르에 위치한 '바다의 도시(Cité de la Mer)' 해양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
1794년 노획한 테메레르급 기본형 아메리카함을 기반으로 복제한 함급. HMS 노섬벌랜드, HMS 리나운 2척이 건조되었다.
1번함 HMS 노섬벌랜드는 1798년 바나드에서 건조되었다. 1801년 몰타 점령에 종군한 것을 시작으로 대서양과 지중해의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특히 1806년 벌어진 카리브 해의 생 도밍그 해전에서는 리워드 섬 전대의 전대장 알렉산더 코크란 소장의 기함으로 참전하여 함대의 선두에서 적극적으로 전투를 이끌었다.
1805년의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 스페인 해군 전열함 세력의 등뼈를 부러뜨렸지만 모든 프랑스 주력함들이 용궁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대서양 함대의 모항인 브레스트 항의 전열함대는 전력을 온존했고, 실제로 트라팔가 전투 얼마 후인 1805년 말에는 이미 카리브의 영국 상선단을 습격해대고 있었다. 이에 존 토마스 덕워스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이들을 격멸하기 위해 출동했다. 기함은 HMS 수퍼브 함이었다.[43] 1805년 12월 26일 레섹(Leissègues) 제독의 프랑스 함대를 발견한 덕워스 제독은 주변의 영국 함선들을 소집했고, 노섬벌랜드는 HMS 아틀라스[44] 함과 함께 1806년 1월 12일 그의 함대에 합류했다. 한편 프랑스 해군은 아조레스 해의 겨울 폭풍을 피해 생 도밍그에 숨어 함선을 수리하고 낙오된 함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영국 해군의 기습에 대비해 해안을 따라 전열함들을 일렬로 배치했고, 해안과 전열함 열 사이에 프리깃들을 정박시켰다. 그러나 레섹 제독의 명으로 몇 척의 함선은 자메이카 방면으로 떠나 있었기에 정박 중인 전열함은 고작 다섯 척이었고, 많은 수의 선원들, 심지어 레섹 제독과 그의 함장들은 뭍으로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재수 없게도 덴마크 스쿠너 하나가 이 모습을 보고 도망쳐 덕워스의 영국 해군에 이 사실을 알렸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7척의 전열함을 포함한 영국 함대가 생 도밍그를 덮쳤다.
전투 개시 직후 임페리알에 달려든 노섬벌랜드 |
전투 개시와 동시에 2열로 나눠진 영국 함대에서 노섬벌랜드는 프랑스 함대와 가까운 서쪽 열에서 두번째 위치에 있었다. 전위에 위치한 기함 수퍼브 함이 프랑스 해군 함렬의 전위에 위치한 알렉상드르 함[45]에 포격을 개시한 것을 신호로, 노섬벌랜드는 바로 뒤에 따라오던 HMS 스펜서[46] 함의 엄호 속에서 알렉상드르 함의 바로 뒤에 있던 프랑스 함대의 기함 오세앙급 118문 1급 전열함 임페리알 함에 달려들어 15분간 맹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곧 이 모습을 본 알렉상드르 함이 수퍼브와 전투를 벌이다 말고 노섬벌랜드와 스펜서의 사이에 끼어들어 종사를 먹이기 위해 함렬을 이탈했으나 이를 곧바로 눈치챈 스펜서 함이 배를 꺾어 알렉상드르의 측면으로 돌진하곤 난타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내 일대 전체에서 혼전이 벌어졌다. 노섬벌랜드는 수퍼브와 함께 스펜서를 지원하고자 몇 발의 대포를 쏘았지만 자욱한 연기로 인해 목표를 맞추지 못했고, 오히려 스펜서를 오인사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 임페리알 함이 1급함의 압도적인 일제포격을 준비하며 정신이 딴 데 팔린 수퍼브를 향해 측면을 조준했다. 이 포격이 성공했으면 기함의 무력화와 함께 영국 해군이 혼란에 빠졌을 것이며 승리를 장담하기도 힘들어졌을지 모른다. 특히 임페리알은 상갑판의 12파운더 포들을 모조리 18파운더로 교체한 첫 번째 1급 함선이었기에, 스페인 해군의 산티시마 트리니다드가 이미 용궁으로 간 1806년 시점에서는 사실상 전 세계의 어느 함선들보다도 우월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코크란 소장이 신속하게 노섬벌랜드를 임페리알 함과 수퍼브의 사이로 몰아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며 임페리알의 압도적인 포격을 대신 받아냈고, 덕분에 수퍼브와 덕워스 제독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일제사격으로 노섬벌랜드는 만신창이가 되어 표류하며 전투에서 사실상 이탈했다. 노섬벌랜드는 이 전투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영국 함선으로, 21명의 선원이 사망했고 74명이 부상을 입었다.
큰 피해를 입은 노섬벌랜드가 무력화된 대신 영국 해군 우함렬의 함선 HMS 카노푸스[47], HMS 도네갈[48], HMS 아틀라스 및 뒤쳐졌던 HMS 아가멤논[49]이 난전에 참여하여 프랑스 해군의 함렬에 파고들어 그때까지 저항하던 알렉상드르의 항복을 받아내고, 종사를 날려대며 돌진하여 후미의 브레이브[50], 주피터 함[51]마저도 항복시켰다.[52] 남은 프랑스 함선은 임페리알과 디오메데[53] 두 척 뿐이었지만 이들도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승산이 없음을 직감한 두 함선은 영국 해군의 사격범위를 피해 환초 내부로 피했으나 좌초되었고, 곧 수병들은 배를 버리고 탈출했다. 대부분이 부상자였기에 이 탈출 행렬은 수 일간 이어졌다. 그리고 탈출한 프랑스 해군 수병들을 수용하기 위해 보내진 영국 보트들은 두 함선의 남은 잔해를 불태워버렸다.
그 후 1807년에는 덴마크의 카리브해 식민지들을 점령했고, 전쟁이 끝난 직후 HMS 벨레로폰에게 항복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넘겨받아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보냈다.
7. 관련 문서
8. 외부 자료
[1] 1798년 3월에 프랑스 로리앙 조선소에서 완공되었으나, 한 달 뒤인 4월 21일 처녀항해를 시작한 지 고작 1시간 후 조우한 영국 해군의 마르스급 74문 3급 전열함 HMS 마르스의 공격을 받아 나포되었다. 당시 에흐큘르는 마르스의 압도적인 공격에 자그마치 260명 가량의 승무원을 잃고 항복했으나, 마르스 또한 함장을 포함한 60명 가량을 잃었다. 그 이후 헤르큘레는 1810년까지 영국 해군함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여담으로 영국 해군에는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 허큘리스(Hercules)라는 헤라클레스의 영어식 함명을 가진 군함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딱히 개명하지는 않았는지 HMS Hercule라는 프랑스식 이름 그대로 취역한다.[2] 포문 수 34~42문. 후에 나폴레옹 정권의 첫 해군장관이 되는 함선 설계자 피에르 알렉상드르 포페이가 설계했다. 상당히 실험적인 함급으로, 초기에는 20기의 24파운더와 육상 포격용 12인치 구포로 중무장한 '포격 프리깃'으로 건조되었다. 심지어 함내에는 가열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전용 화로까지 장착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설계는 매우 비효율적인데다 위험하기까지 한 것으로 판명되어 곧 기존의 구포와 24파운더, 화로는 모조리 철거되었으며, 대신 18파운더 포들로 무장한 일반적인 형태의 프리깃으로 개조되었다. 총 9척이 건조되었고, 푸흐스이방 함은 이 자매들 중 가장 막내이다.[3] raking fire. 적 함선의 선미나 선수에 종방향으로 사격하는 것. 이 경우 포탄이 함선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날아가며 진행 방향에 있는 모든 것들을 싹 휩쓸어버리기에, 종사를 받은 함선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심지어는 단 한 번의 종사를 받고 무력화된 함선들도 많았다.[4]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 104문 1급함 HMS 빅토리(우), 넵튠급 98문 2급함 HMS 테메레르(좌)와 포격전을 펼치는 프랑스 74문함(영국 기준 3급함) 르두터블(중앙). 세 함급의 크기와 모습을 비교해볼 수 있다. 리처드 그랑빌(Richard Grenville)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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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열함의 등급 구분법은 나라마다 달랐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1급 2급 3급 하는 식으로 구분하는 방식은 영국 해군식이다. 한편 루이 15세 이후로부터 제1공화국 시절까지의 프랑스는 118문과 110문, 90문함을 통합한 1급 밑으로 중간급인 80문급, 주력함급인 74문급을 두는 방식의 분류법을 사용했다가 나폴레옹의 제정이 수립된 이후로는 118문급, 110문급, 90문급, 80문급 하는 식으로 완벽히 포문 수로 나누어 구분했다.[5] 때문에 두 방식은 유사하긴 해도 차이가 좀 있다. 가령 프랑스 제1공화국 시기의 양 국가의 최상급 함선인 영국 1급함과 프랑스 1급함은 100문 이상의 함포를 가진 3층함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유사했으나, 프랑스 1급은 보통 영국 1급보다 배수량도 몇백 톤 더 컸고 포도 열 문 이상을 더 달고 다녔다. 한편 영국의 주력함급인 3급함은 함포를 74문 탑재한 2층 전열함만을 의미하는 프랑스 74문급과는 달리 64문함과 80문함 또한 포함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위치한 영국 2급함과 프랑스 80문함은 한층 더 심한 차이를 보인다. 영국 2급함은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양산된 1급함이란 성격이 강했기에 3층 갑판에 90~98문의 함포를 장착했다. 반면 80문함들은 영국 2급함들보다 다양한 상황에 적용될 것을 염두에 두고 활용성에 초점을 맞춰 설계되었기에 3층 갑판을 포기했으며, 대신 선체를 연장하여 2층 포갑판 및 24파운더와 같은 전보다 더 큰 함포들을 장착했다. 때문에 영국에 노획된 프랑스 80문함들은 동급의 영국 2급함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들은 대신 74문과 같은 3등급을 부여받았다. 한편 영국 2급과 같은 90문급 3층함은 18세기 중반 이후의 프랑스에서는 거의 건조되지 않았으며, 얼마 남지 않은 노후화된 90문급 함선들은 전부 1급함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다만 제국 시기에 채텀급 90문함 두 척이 프랑스가 네덜란드에 세운 괴뢰 정권인 바타비아 공화국 해군의 1급함으로써 새로이 건조되었던 적은 있다. 이들은 바타비아 공화국 자체가 프랑스 제국에 흡수된 후 프랑스 해군에 편입되어 단 둘뿐인 90문급 지위를 부여받았다.[6] 이 건함계획을 통해 건조될 신 1급함과 80문급함인 오세앙급 118문 1급 전열함과 토낭급 80문 전열함 또한 사네의 설계작이었다.[7] 사네는 그 외에도 많은 함선들을 설계했다. 그가 직접 설계한 전열함 종류만 여섯으로, 아니발급과 테메레르급, 토낭급과 오세앙급 외에도 오세앙급의 110문급 축소판인 코메흐스 드 파리급, 토낭급의 후계함인 80문급함 뷔상토르급 두 함급을 설계했다. 그리고 40문 프리깃들인 팔라급, 비르지니급, 오흐탕스급과 38문급 에베급 또한 그의 작품이다.[8] 실제로 건조되진 않았다.[9]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북부 남아메리카 지역) 및 카리브 해의 패권을 놓고 영국과 스페인이 벌인 전쟁. 전쟁 이름이 이 따위(...)인 이유는 로버트 젠킨스란 영국 상선 선장이 스페인 해안 경비부대 측에 잡혀 귀가 잘렸다는 사건을 계기로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이는 젠킨스의 일방적인 주장이었고, 스페인 측이 귀를 잘랐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이 사건으로 높아지던 양국 간의 긴장이 폭발한 것은 사실이다. 이 전쟁은 후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카리브 해 전역으로 이어진다.[10] 원래 70문함으로 건조되었으나, 실제로는 64문만을 달고 다녔다.[11] 기본적으로는 1719년 건함계획의 연장선상에서 수립되었다.[12] 3층 포갑판함의 경우 흔들림과 승무원의 비전투 피로도가 심한데다 항해성도 낮긴 했으나, 길이가 조금 더 짧았고 세 번째 갑판이 위에서 용골에 걸리는 힘을 분산하여 구조적으로는 더욱 안정적이었으며, 수리에 들어가는 자재와 비용 또한 더 적었다.[13] 다만 이들은 영국 해군 내에서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던 2급 3층 전열함들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90~98문에 달하는 포들을 3층 포갑판에 쑤셔넣은 형태였던 영국 2급함들은 함포를 100문 넘게 달고 다니던 1급함과 높이는 같았지만 길이가 짧고 폭이 좁았다. 때문에 이들은 80문함에 비해 속도도 더 느렸고, 조타성도 더 나빴고, 파도가 칠 때의 흔들림도 오뚝이마냥 훨씬 심했다. 이 열악한 항해성으로 인해, 1796년에는 스피트헤드에서 급히 출격한 영국 해협 함대 소속 2급함 네 척이 서로를 들이받아버린 적도 있었다. 함 내 생활도 거지같아서 아래 언급될 런던급 2급함 HMS 프린스에서는 사관들이 무슨 건초더미처럼 지낸다는 불평이 나올 정도였다. 화력 또한 2급함은 상갑판에 18파운더와 12파운더를 달고 있어서 24파운더를 달고 있는 80문함에 비해 질적인 측면에서는 열세에 있었으며, 심지어 파도가 심하게 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균형 문제 때문에 98문이라는 포문 수의 양적 우위도 발휘하기 힘들었다. 이 경우 2급함은 물이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장 강한 32파운더가 달린 하갑판 포문을 닫고 싸워야 했으나 80문함은 36파운더를 포함한 모든 함포를 전부 사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산된 함선 수도 80문함들이 더 많았다. 나폴레옹 전쟁 종전 시점에서 2급함의 숫자는 8척이었던 반면, 프랑스 80문함은 19척이 존재했다.[14] 그러나 2급함의 장점은 이런 활용도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80문함들보다 어쨌든 10~20기 더 많은 함포를 달고 있었고, 더 큰 배수량과 3층 갑판의 구조적 안정성, 높은 높이가 제공해 주는 근접전 시의 유리함 및 더 먼 시야를 바탕으로 종합적으로는 80문함보다 더 우월한 전투력을 갖췄다. 파도 심한 날에 80문급이 유리하다는 것도 2급을 상대로 어느 정도 호각으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며, 이 경우에도 그들이 체급 열세를 뒤집고 2급함을 나포하거나 이기기는 상당히 힘들었다. 게다가 2급함들은 1급함만큼 답이 없을 정도로 비싸거나 느린 것도 아니었기에 그런대로 굴려지면서 여기저기 파견 나갈 수도 있었다. 또한 부수적인 효과이긴 했지만 3층 포갑판과 거대한 덩치 덕에 상대방이 2급함을 1급함이라고 착각하고 내빼는 경우도 있었다. 즉 2급함들은 타국의 80문함들보다 다양한 상황에서의 활용도는 낮았을지언정 1급함의 양산형으로써 주력함대의 뼈대를 구성한다는 목적에는 아주 적합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일단 선형진을 짜고 적 함대와 붙기만 한다면 밥값을 제대로 해냈다. 74문함들은 압도적으로 압살했고, 24파운더를 달고 있는 80문함들을 상대할 시에도 우세한 위치에서 전투를 진행할 수 있었다.[15] 다만 덴마크와 스웨덴 해군은 발트 해의 낮은 수심 문제로 인해 한동안 70문함을 더 선호했다. 이는 저지대에 위치한 네덜란드나 갯벌에 건설된 베네치아 공화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국가들 또한 74문함을 꾸준히 건조했지만, 바다 밑바닥에 걸리지 않기 위해 영국이나 프랑스의 동급함들에 비해 더 작은 경우가 많았다.[16] 이 과정에서 50~60문 4급함은 점차 도태되어 많은 수가 해체되거나 영국 동인도 회사의 상선 또는 무장상선(이스트 인디아맨)으로 팔려나갔다. 다만 이들은 수심 낮은 북해 연안과 발트 해, 미 동부 연안 등 74문함이 가기 힘든 지역에서의 작전에서는 요긴하게 쓰였다. 이는 4급 정도로도 이 지역에 위치한 국가들(북유럽 국가들과 네덜란드, 또는 미국)의 해군 주력함들과 대등 이상의 전투가 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이들은 프리깃으로 구성된 소함대를 이끌고 식민지를 방위하거나 도서 지역에서의 전투를 수행하기 알맞았기에 완전히 도태되지는 않았다. 반면 남은 70문 및 64문급 3급함의 운명은 이들보다 비참했다. 70문급은 74문급으로 개조된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64문 3급함으로 개조되었으나 이미 기존의 64문 3급함들도 74문함에 밀려 사라져가고 있었고, 결국 1782년 건조된 크라운급 64문 3급함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64문함은 신규 건조되지 않는다.[17] 하지만 테메레르급의 등장에 대항하여 마스급이 등장하기 전까지 연장형 74문함의 건조는 발리언트급 이후로 30년 가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18] 나폴레옹 전쟁 당시인 1806년부터 1812년까지 무려 40척이 건조된 74문 3급 전열함급. 설계상으론 멀쩡했지만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민간 회사에 발주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군납비리가 난무하여 내구도가 좋지 않았다. 접합부에 사용할 구리못을 빼돌리고 머리 부분에 구리 도금을 한 쇠못을 대신 박아 넣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비리 유형이었다. 이 때문에 이들의 별명은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서 따온 40척의 도적들이었다. 열 척의 함선이 1800년대 중반에 50문급 프리깃으로 격하되었고, 4척은 부유포대로 개조되어 그 중 몇몇이 크림 전쟁에 투입되기도 하였다.[19] 물론 적 선박을 나포할 경우 거액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긴 했다. 당시 함장의 경우 현재 금액으로 수십억원에 달하는 액수를 받을 수 있었다. 때문에 18~19세기 당시에는 적군에 나포되어 싸우는 군함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 그렇기에 함선 나포가 오늘날에는 괴이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이상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20] 영국에 노획된 이후 미영전쟁 당시 미국 중프리깃 USS 컨스티튜션 함과의 단함 전투에서 아작난 것으로 유명한 함선.[21] 당시 영국군의 최고 수훈함 중 하나.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는 캐나다급 74문 3급 전열함 HMS 마제스틱과 함께 프랑스 해군 브뤼예 제독의 기함이었던 오세앙급 118문 1급 전열함 오리앙 함 및 토낭급 80문함 토낭에 달려들어 혈투를 벌였다. 결국 체급 차이로 인해 무력화되어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오리앙을 약화시키는 데는 성공했고, 곧이어 몰려온 다른 영국 함선들의 공격으로 인해 오리앙은 화재가 일어나 폭침하고 토낭은 나포되었다. 한편 트라팔가에서는 스페인 해군의 몬타니에급 80문 전열함 모나르카 함의 선미에 종사를 두 방 먹여 순식간에 무력화시키곤 프랑스 해군의 테메레르급 에이글레 함, 노획된 엘리자베스급 74문함 스위프트슈어 및 스페인 해군의 74문함들인 산 후안 네포무세모함과 바하마 네 척과 격렬한 육박전을 벌였다. 특히 에이글레함과의 혈전은 르두터블과 테메레르, 빅토리의 싸움 못지않게 참혹하여, 서로 함체를 묶어버리곤 상갑판에서 도선을 시도하며 총질을 해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아래의 포갑판들에서도 양 함체가 붙어버리자 대포를 뒤로 아예 밀어버린 뒤 포문으로 도선을 시도하거나 상대 포문 안에 총을 갈겨대고 수류탄을 집어던져대기까지 했으며, 이 때문에 벨레로폰의 탄약고가 한번 유폭할 뻔 하기도 했다. 이 처절한 전투가 끝났을 때 벨레로폰의 사상자는 사망자 27명과 부상자 123명, 총 정원의 35%에 달했는데 그 중에는 저격당해 사망한 쿡 함장도 있었다. 그럼에도 벨레로폰은 승리했고, 모나르카와 바하마 두 척을 나포한 공적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영국으로 망명을 시도할 때 그의 항복을 받아내며 그 영광의 절정을 찍었다. 그러나 벨레로폰은 그를 플리머스 항에서 내려주지 않고, 대신 영국 정부의 명령에 따라 아메리카급 전열함 HMS 노섬벌랜드에 옮겨 태워 세인트 헬레나로 보내버렸다. 노후화가 심해 그런 정치적 거물을 대양을 건너 실어나르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 함선이니만큼 임플라커블과도 여러 번 만났는데, 첫 만남은 아이티 혁명 당시이며 트라팔가에서도 적으로 만났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몇 년 후에 러시아-영국 전쟁 당시에는 협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22] 80문 3급 전열함.[23] 1745년 건함계획에 따라 건조된 90문 2급 전열함. 그러나 트라팔가 직전에는 개조되어 74문급으로 축소되었다.[24] 페임급 74문 3급 전열함.[25] 74문 3급 전열함. 영국의 함선설계자 존 헨슬로우가 설계했다. 연장형 74문함으로 특별히 건조되었으며, 상갑판의 18파운더를 모조리 24파운더로 교체하여 화력 또한 동급에 비해 강력했다.[26] 세보르드 함이라고도 불린다.[27] 이때 이집트 해안포대는 너무 고각으로 발사하여 명중탄을 거의 내지 못한 반면, 영국 해군이 이끄는 연합함대는 거의 일방적으로 아크레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막바지에는 아크레의 탄약고가 유폭하여 천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영국 수병들이 포츠머스 해안에 새로 건설된 해군 포격 연습장인 HMS 엑설런트에서 훌륭한 포격 교육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28] 항공 폭격으로 침몰한 유일한 전열함으로 기록되어 있다.[29] 블랙프린스급은 영국이 노획한 덴마크 해군의 74문 전열함 크리스티앙 7세함의 구조를 바탕으로 축소설계한 함급이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의 봄베이 조선소에서 총 4척이 극비로 건조되었다. 웰즐리는 일단 서류상으로는 이 함급의 1번함이다. 그러나 함급명이 웰즐리급이 아니라 블랙프린스급인 데에는 사정이 좀 있는데, 다름 아닌 미국의 중프리깃 USS 컨스티튜션 함 때문이다. 컨스티튜션은 미영전쟁 와중인 1812년 12월 29일에 영국 해군의 팔라급 38문 프리깃 HMS 자바 함을 나포한 후 태워버린 적이 있다. 고작 프리깃 한 척이었지만 문제는 자바 함이 다른 함선들에 보내질 승무원들과 함장들, 뱅거급 전열함 콘월리스 함의 함저에 설치할 구리판, 그리고 웰즐리 함의 설계도를 운반하던 중이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영국 해군의 금쪽같은 전열함 두 척의 건조에 엄청난 차질이 빚어졌다. 콘월리스 함은 함체는 이미 완공된 상태로 수 개월이나 구리판을 기다려야 했고, 극비로 취급되어 건조되던 웰즐리 함은 급한대로 콘월리스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아예 재설계해야 했다. 이 때문에 웰즐리 함은 서류상으로는 블랙프린스급 전열함으로 분류되지만 사실상 뱅거급 전열함의 41번째 함선으로 취급되며, 웰즐리급으로 명명되었어야 할 함급명 자체도 2번함인 블랙프린스에게 빼앗긴 것이다. 후에는 콘월리스와 함께 아편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30] 이는 매우 상징적인 위치 선정이다. 채널 제도는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다 영국 왕실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국 공작 가문이던 시절 프랑스 땅에 보유했던 영토의 마지막 남은 잔해이기 때문. 따라서 채널 제도는 구 프랑스 왕국의 마지막 남은 영토이기도 하다. 프랑스와 영국 두 국가의 해군 함선으로 임무를 수행한 임플라커블의 무덤으로 이만큼 적절한 곳은 없을 것이다.[31] 선체 하부를 폭파시켰다. 근현대적 철제 군함이 아닌 목제 군함이라서 밸브를 열어 물을 들일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32] 세계 표준시로 유명한 그리니치 천문대 바로 아래, 길을 사이에 두고 구 영국 해군대학과 마주보고 있다. 위에 언급된 커티 삭 호도 이 근처에 정박해 있다.[33] 영국의 프리깃 함급. 사네가 설계한 에베급 38문 프리깃 에베 함을 노획한 뒤 복제한 함급이다. 총 47척이 건조되었다. 속도는 13노트로 매우 빨랐지만 장점은 그뿐이었고, 기존의 영국제 성공작인 라이블리급 38문 프리깃보다 여러 모로 퇴보한 모습을 보여줬다. 우선 항해성이 나빠 옆질이 심했던데다 바람을 거슬러오르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적재량도 그닥 크지 않았기에 작전 기간 동안 필요한 충분한 양의 청수를 담을 수도 없었다. 청수 문제는 미생물 오염으로부터 그나마 안전한 철제 식수탱크가 보급된 이후에야 그나마 나아졌다. 때문에 이 함급을 모는 영국 함장들은 자신들의 배가 항상 흔들리면서 파도를 뒤집어쓴다고 '젖어있는 배'라고 까대거나 상부에 용골 부분을 손 좀 보라고 항의하곤 했다.[34] 1817년에 인도 봄베이(현 뭄바이)에서 건조되었다. 굳이 뭄바이에서 건조된 이유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영국의 숲들이 고갈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건조 주체는 인도 업체인 와이다(Waida) 사였다. 인도의 조로아스터교도인 '파르시' 출신의 노지 누스루완지 와이다를 창업주로 하는 이 회사는 1736년부터 봄베이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함선을 납품하며 성장했고, 1750년에는 아시아의 첫번째 드라이 독을 건설하기도 했다. 이 봄베이 조선소는 영국 식민제국의 주요 조선소 중 하나로서 미영전쟁 당시 프랜시스 스콧 키가 포로로 잡혀 있다가 미국의 국가인 The Star-Spangled Banner를 작곡한 것으로 유명한 HMS 민덴 함, 아편 전쟁 당시 난징 조약이 체결된 HMS 콘월리스 함이나 위에 이미 언급된 웰즐리 함 등의 수많은 함선들을 건조했다. 그리고 와이다 가문이 제작한 선박의 진수식에서는 설계자가 은제 못 하나를 함선의 용골에 직접 박아 넣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는데, 이는 배의 행운을 기원하는 파르시 조로아스터교들의 의식이었다. 그 외에도 와이다 가문은 봄베이를 다양한 면에서 유럽적으로 재개발하여 봄베이를 영국 식민제국의 아시아 지역을 총괄하는 중심지로 성장시킨 숨은 주역이라고 평가된다. 현재는 산하에 식품가공업체나 직물 산업, 저가 항공사 등의 여러 회사들을 거느린 거대한 그룹으로 성장했다. 당시 건설된 뭄바이 조선소의 드라이 독 또한 일부가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35] 아일랜드 원정은 영국의 후방을 긁어대기 위해 추진되었으나 처참히 실패했다.[36] 44문 중프리깃으로 개조된 상태였다.[37] 스페인 해군의 선임 설계자 호세 로메로 이 페르난도 데 란다가 설계한 전열함급. 112문의 포를 장비한 거대한 3층갑판 전열함이었음에도 높은 파도 속에서도 안정적인 전투 수행이 가능할 만큼 잘 설계되었다. 1784년부터 스페인 해군의 주요 해군기지였던 갈리시아의 페롤과 식민지인 쿠바 도독령의 하바나 조선소에서 도합 7척이 건조되어, 포리지마급 112문급 전열함 2척과 개조된 112문함 산 카를로스함, 그리고 산티시마 트리니다드함과 함께 스페인 해군의 최고 주력함으로 활동했다.[38] 몬타니에급 4번함. 몬타니에급 역시 데 란다가 설계한 함선이다. 1번함과 자매함들의 설계에 조금 차이가 있는데, 1번함인 몬타니에는 74문함이었던 반면 자매함들은 80문함으로 건조되었다. 24파운더와 18파운더를 주무장으로 달고 있었으므로 36파운더와 24파운더를 장착한 프랑스의 80문급보다는 화력이 조금 모자랐다. 다만 2번함 넵튜노는 1805년에 18파운더를 24파운더로 환장했기에 자매함들보다는 좀 더 강력했다. 건조된 네 척 모두 트라팔가 해전에 참전했다.[39] 이 문서 상단에 대표로 올라온 사진 속 함선이다.[40] 1775년 건조된 영국 해군의 함선이었으나, 1795년 프랑스 해군에 나포되었다.[41] 넵튠급의 3번함. 넵튠급 세 척 모두 트라팔가르 해전에 참전했다. 당시 1번함 HMS 넵튠은 스페인 해군의 4포갑판 132문함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를 다른 함선들과 함께 다굴쳤고, 2번함 HMS 테메레르는 HMS 빅토리에 달려든 프랑스 해군함 르두터블과 엄청난 혈전을 벌였다.[42] 런던급은 1769년부터 4척이 취역한 영국의 2급함이다. 원래 90문급이었으나 설계의 여유가 있어 98문급으로 변동되었다. 프린스는 이 함급의 2번함으로, 트라팔가에서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의 항복을 받아내었다.[43] 위의 폼페이급 수퍼브 함 맞다.[44] 듀크급 98문 2급 전열함의 4번함. 다만 1802년에 74문급으로 개조되어 1806년 당시에는 3급 전열함으로 재분류되었다.[45] 토낭급 80문 전열함의 7번함.[46] 74문 3급함. 영국으로 망명한 프랑스인 함선 설계자 장루이 바랄리에가 설계했다. 프랑스인이 설계한 만큼 테메레르급과 맞먹는 1900톤급의 큰 함선이었다.[47] 토낭급 80문 전열함 6번함. 알렉상드르의 동형함이지만 포가 4문 더 많다. 프랑스 해군함이었으나 건조된 지 고작 반년 후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노획되어 영국 해군의 80문 3급함이 되었다.[48] 노획된 테메레르급 전열함.[49] 아덴트급 64문 3급 전열함 3번함. 넬슨 제독이 함장 시절 몰았기에 애정을 많이 가졌던 배다. 트라팔가 해전에도 참전하여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시류에 밀려 도태되던 64문함이었기에 넬슨이 몰던 1793년 당시에도 관리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생 도밍그 전투에서도 관리 부실로 인해 속도가 매우 떨어져 있었고, 이 때문에 더 큰 다른 함선들을 못 쫒아가 전투가 거의 끝난 다음에야 전장에 도달했다. 결국 이 시대를 잘못 만난 작은 함선은 전투 이후 브라질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다 1809년에 라플라타 강 하구에서 좌초되었다.[50] 테메레르급의 대형화 모델인 카사드형 2번함.[51] 테메레르급. 이 전투의 결과 영국에 노획되었다. 그리고 1807년 영국의 코펜하겐 공격 당시 육전대를 상륙시켜 덴마크군 포대를 공격했다.[52] 이때 아틀라스 함은 충각 공격을 두 번이나 실시했다. 우선 도네갈 함의 맹렬한 공격을 피해 달아나던 주피터 함을 들이받아 진로를 가로막고 항복시켰다. 그리고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임페리알 함을 공격하던 도중 갑자기 나타난 디오메데 함에게 일제 사격을 받아 혼란에 빠졌다가 아군인 카노푸스 함을 들이받기도 했다. 당시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알 수 있다.[53] 테메레르급.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 104문 1급함 HMS 빅토리(우), 넵튠급 98문 2급함 HMS 테메레르(좌)와 포격전을 펼치는 프랑스 74문함(영국 기준 3급함) 르두터블(중앙). 세 함급의 크기와 모습을 비교해볼 수 있다. 리처드 그랑빌(Richard Grenville)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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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열함의 등급 구분법은 나라마다 달랐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1급 2급 3급 하는 식으로 구분하는 방식은 영국 해군식이다. 한편 루이 15세 이후로부터 제1공화국 시절까지의 프랑스는 118문과 110문, 90문함을 통합한 1급 밑으로 중간급인 80문급, 주력함급인 74문급을 두는 방식의 분류법을 사용했다가 나폴레옹의 제정이 수립된 이후로는 118문급, 110문급, 90문급, 80문급 하는 식으로 완벽히 포문 수로 나누어 구분했다.[5] 때문에 두 방식은 유사하긴 해도 차이가 좀 있다. 가령 프랑스 제1공화국 시기의 양 국가의 최상급 함선인 영국 1급함과 프랑스 1급함은 100문 이상의 함포를 가진 3층함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유사했으나, 프랑스 1급은 보통 영국 1급보다 배수량도 몇백 톤 더 컸고 포도 열 문 이상을 더 달고 다녔다. 한편 영국의 주력함급인 3급함은 함포를 74문 탑재한 2층 전열함만을 의미하는 프랑스 74문급과는 달리 64문함과 80문함 또한 포함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위치한 영국 2급함과 프랑스 80문함은 한층 더 심한 차이를 보인다. 영국 2급함은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양산된 1급함이란 성격이 강했기에 3층 갑판에 90~98문의 함포를 장착했다. 반면 80문함들은 영국 2급함들보다 다양한 상황에 적용될 것을 염두에 두고 활용성에 초점을 맞춰 설계되었기에 3층 갑판을 포기했으며, 대신 선체를 연장하여 2층 포갑판 및 24파운더와 같은 전보다 더 큰 함포들을 장착했다. 때문에 영국에 노획된 프랑스 80문함들은 동급의 영국 2급함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들은 대신 74문과 같은 3등급을 부여받았다. 한편 영국 2급과 같은 90문급 3층함은 18세기 중반 이후의 프랑스에서는 거의 건조되지 않았으며, 얼마 남지 않은 노후화된 90문급 함선들은 전부 1급함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다만 제국 시기에 채텀급 90문함 두 척이 프랑스가 네덜란드에 세운 괴뢰 정권인 바타비아 공화국 해군의 1급함으로써 새로이 건조되었던 적은 있다. 이들은 바타비아 공화국 자체가 프랑스 제국에 흡수된 후 프랑스 해군에 편입되어 단 둘뿐인 90문급 지위를 부여받았다.[6] 이 건함계획을 통해 건조될 신 1급함과 80문급함인 오세앙급 118문 1급 전열함과 토낭급 80문 전열함 또한 사네의 설계작이었다.[7] 사네는 그 외에도 많은 함선들을 설계했다. 그가 직접 설계한 전열함 종류만 여섯으로, 아니발급과 테메레르급, 토낭급과 오세앙급 외에도 오세앙급의 110문급 축소판인 코메흐스 드 파리급, 토낭급의 후계함인 80문급함 뷔상토르급 두 함급을 설계했다. 그리고 40문 프리깃들인 팔라급, 비르지니급, 오흐탕스급과 38문급 에베급 또한 그의 작품이다.[8] 실제로 건조되진 않았다.[9]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북부 남아메리카 지역) 및 카리브 해의 패권을 놓고 영국과 스페인이 벌인 전쟁. 전쟁 이름이 이 따위(...)인 이유는 로버트 젠킨스란 영국 상선 선장이 스페인 해안 경비부대 측에 잡혀 귀가 잘렸다는 사건을 계기로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이는 젠킨스의 일방적인 주장이었고, 스페인 측이 귀를 잘랐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이 사건으로 높아지던 양국 간의 긴장이 폭발한 것은 사실이다. 이 전쟁은 후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카리브 해 전역으로 이어진다.[10] 원래 70문함으로 건조되었으나, 실제로는 64문만을 달고 다녔다.[11] 기본적으로는 1719년 건함계획의 연장선상에서 수립되었다.[12] 3층 포갑판함의 경우 흔들림과 승무원의 비전투 피로도가 심한데다 항해성도 낮긴 했으나, 길이가 조금 더 짧았고 세 번째 갑판이 위에서 용골에 걸리는 힘을 분산하여 구조적으로는 더욱 안정적이었으며, 수리에 들어가는 자재와 비용 또한 더 적었다.[13] 다만 이들은 영국 해군 내에서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던 2급 3층 전열함들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90~98문에 달하는 포들을 3층 포갑판에 쑤셔넣은 형태였던 영국 2급함들은 함포를 100문 넘게 달고 다니던 1급함과 높이는 같았지만 길이가 짧고 폭이 좁았다. 때문에 이들은 80문함에 비해 속도도 더 느렸고, 조타성도 더 나빴고, 파도가 칠 때의 흔들림도 오뚝이마냥 훨씬 심했다. 이 열악한 항해성으로 인해, 1796년에는 스피트헤드에서 급히 출격한 영국 해협 함대 소속 2급함 네 척이 서로를 들이받아버린 적도 있었다. 함 내 생활도 거지같아서 아래 언급될 런던급 2급함 HMS 프린스에서는 사관들이 무슨 건초더미처럼 지낸다는 불평이 나올 정도였다. 화력 또한 2급함은 상갑판에 18파운더와 12파운더를 달고 있어서 24파운더를 달고 있는 80문함에 비해 질적인 측면에서는 열세에 있었으며, 심지어 파도가 심하게 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균형 문제 때문에 98문이라는 포문 수의 양적 우위도 발휘하기 힘들었다. 이 경우 2급함은 물이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장 강한 32파운더가 달린 하갑판 포문을 닫고 싸워야 했으나 80문함은 36파운더를 포함한 모든 함포를 전부 사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산된 함선 수도 80문함들이 더 많았다. 나폴레옹 전쟁 종전 시점에서 2급함의 숫자는 8척이었던 반면, 프랑스 80문함은 19척이 존재했다.[14] 그러나 2급함의 장점은 이런 활용도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80문함들보다 어쨌든 10~20기 더 많은 함포를 달고 있었고, 더 큰 배수량과 3층 갑판의 구조적 안정성, 높은 높이가 제공해 주는 근접전 시의 유리함 및 더 먼 시야를 바탕으로 종합적으로는 80문함보다 더 우월한 전투력을 갖췄다. 파도 심한 날에 80문급이 유리하다는 것도 2급을 상대로 어느 정도 호각으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며, 이 경우에도 그들이 체급 열세를 뒤집고 2급함을 나포하거나 이기기는 상당히 힘들었다. 게다가 2급함들은 1급함만큼 답이 없을 정도로 비싸거나 느린 것도 아니었기에 그런대로 굴려지면서 여기저기 파견 나갈 수도 있었다. 또한 부수적인 효과이긴 했지만 3층 포갑판과 거대한 덩치 덕에 상대방이 2급함을 1급함이라고 착각하고 내빼는 경우도 있었다. 즉 2급함들은 타국의 80문함들보다 다양한 상황에서의 활용도는 낮았을지언정 1급함의 양산형으로써 주력함대의 뼈대를 구성한다는 목적에는 아주 적합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일단 선형진을 짜고 적 함대와 붙기만 한다면 밥값을 제대로 해냈다. 74문함들은 압도적으로 압살했고, 24파운더를 달고 있는 80문함들을 상대할 시에도 우세한 위치에서 전투를 진행할 수 있었다.[15] 다만 덴마크와 스웨덴 해군은 발트 해의 낮은 수심 문제로 인해 한동안 70문함을 더 선호했다. 이는 저지대에 위치한 네덜란드나 갯벌에 건설된 베네치아 공화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국가들 또한 74문함을 꾸준히 건조했지만, 바다 밑바닥에 걸리지 않기 위해 영국이나 프랑스의 동급함들에 비해 더 작은 경우가 많았다.[16] 이 과정에서 50~60문 4급함은 점차 도태되어 많은 수가 해체되거나 영국 동인도 회사의 상선 또는 무장상선(이스트 인디아맨)으로 팔려나갔다. 다만 이들은 수심 낮은 북해 연안과 발트 해, 미 동부 연안 등 74문함이 가기 힘든 지역에서의 작전에서는 요긴하게 쓰였다. 이는 4급 정도로도 이 지역에 위치한 국가들(북유럽 국가들과 네덜란드, 또는 미국)의 해군 주력함들과 대등 이상의 전투가 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이들은 프리깃으로 구성된 소함대를 이끌고 식민지를 방위하거나 도서 지역에서의 전투를 수행하기 알맞았기에 완전히 도태되지는 않았다. 반면 남은 70문 및 64문급 3급함의 운명은 이들보다 비참했다. 70문급은 74문급으로 개조된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64문 3급함으로 개조되었으나 이미 기존의 64문 3급함들도 74문함에 밀려 사라져가고 있었고, 결국 1782년 건조된 크라운급 64문 3급함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64문함은 신규 건조되지 않는다.[17] 하지만 테메레르급의 등장에 대항하여 마스급이 등장하기 전까지 연장형 74문함의 건조는 발리언트급 이후로 30년 가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18] 나폴레옹 전쟁 당시인 1806년부터 1812년까지 무려 40척이 건조된 74문 3급 전열함급. 설계상으론 멀쩡했지만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민간 회사에 발주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군납비리가 난무하여 내구도가 좋지 않았다. 접합부에 사용할 구리못을 빼돌리고 머리 부분에 구리 도금을 한 쇠못을 대신 박아 넣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비리 유형이었다. 이 때문에 이들의 별명은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서 따온 40척의 도적들이었다. 열 척의 함선이 1800년대 중반에 50문급 프리깃으로 격하되었고, 4척은 부유포대로 개조되어 그 중 몇몇이 크림 전쟁에 투입되기도 하였다.[19] 물론 적 선박을 나포할 경우 거액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긴 했다. 당시 함장의 경우 현재 금액으로 수십억원에 달하는 액수를 받을 수 있었다. 때문에 18~19세기 당시에는 적군에 나포되어 싸우는 군함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 그렇기에 함선 나포가 오늘날에는 괴이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이상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20] 영국에 노획된 이후 미영전쟁 당시 미국 중프리깃 USS 컨스티튜션 함과의 단함 전투에서 아작난 것으로 유명한 함선.[21] 당시 영국군의 최고 수훈함 중 하나.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는 캐나다급 74문 3급 전열함 HMS 마제스틱과 함께 프랑스 해군 브뤼예 제독의 기함이었던 오세앙급 118문 1급 전열함 오리앙 함 및 토낭급 80문함 토낭에 달려들어 혈투를 벌였다. 결국 체급 차이로 인해 무력화되어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오리앙을 약화시키는 데는 성공했고, 곧이어 몰려온 다른 영국 함선들의 공격으로 인해 오리앙은 화재가 일어나 폭침하고 토낭은 나포되었다. 한편 트라팔가에서는 스페인 해군의 몬타니에급 80문 전열함 모나르카 함의 선미에 종사를 두 방 먹여 순식간에 무력화시키곤 프랑스 해군의 테메레르급 에이글레 함, 노획된 엘리자베스급 74문함 스위프트슈어 및 스페인 해군의 74문함들인 산 후안 네포무세모함과 바하마 네 척과 격렬한 육박전을 벌였다. 특히 에이글레함과의 혈전은 르두터블과 테메레르, 빅토리의 싸움 못지않게 참혹하여, 서로 함체를 묶어버리곤 상갑판에서 도선을 시도하며 총질을 해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아래의 포갑판들에서도 양 함체가 붙어버리자 대포를 뒤로 아예 밀어버린 뒤 포문으로 도선을 시도하거나 상대 포문 안에 총을 갈겨대고 수류탄을 집어던져대기까지 했으며, 이 때문에 벨레로폰의 탄약고가 한번 유폭할 뻔 하기도 했다. 이 처절한 전투가 끝났을 때 벨레로폰의 사상자는 사망자 27명과 부상자 123명, 총 정원의 35%에 달했는데 그 중에는 저격당해 사망한 쿡 함장도 있었다. 그럼에도 벨레로폰은 승리했고, 모나르카와 바하마 두 척을 나포한 공적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영국으로 망명을 시도할 때 그의 항복을 받아내며 그 영광의 절정을 찍었다. 그러나 벨레로폰은 그를 플리머스 항에서 내려주지 않고, 대신 영국 정부의 명령에 따라 아메리카급 전열함 HMS 노섬벌랜드에 옮겨 태워 세인트 헬레나로 보내버렸다. 노후화가 심해 그런 정치적 거물을 대양을 건너 실어나르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 함선이니만큼 임플라커블과도 여러 번 만났는데, 첫 만남은 아이티 혁명 당시이며 트라팔가에서도 적으로 만났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몇 년 후에 러시아-영국 전쟁 당시에는 협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22] 80문 3급 전열함.[23] 1745년 건함계획에 따라 건조된 90문 2급 전열함. 그러나 트라팔가 직전에는 개조되어 74문급으로 축소되었다.[24] 페임급 74문 3급 전열함.[25] 74문 3급 전열함. 영국의 함선설계자 존 헨슬로우가 설계했다. 연장형 74문함으로 특별히 건조되었으며, 상갑판의 18파운더를 모조리 24파운더로 교체하여 화력 또한 동급에 비해 강력했다.[26] 세보르드 함이라고도 불린다.[27] 이때 이집트 해안포대는 너무 고각으로 발사하여 명중탄을 거의 내지 못한 반면, 영국 해군이 이끄는 연합함대는 거의 일방적으로 아크레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막바지에는 아크레의 탄약고가 유폭하여 천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영국 수병들이 포츠머스 해안에 새로 건설된 해군 포격 연습장인 HMS 엑설런트에서 훌륭한 포격 교육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28] 항공 폭격으로 침몰한 유일한 전열함으로 기록되어 있다.[29] 블랙프린스급은 영국이 노획한 덴마크 해군의 74문 전열함 크리스티앙 7세함의 구조를 바탕으로 축소설계한 함급이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의 봄베이 조선소에서 총 4척이 극비로 건조되었다. 웰즐리는 일단 서류상으로는 이 함급의 1번함이다. 그러나 함급명이 웰즐리급이 아니라 블랙프린스급인 데에는 사정이 좀 있는데, 다름 아닌 미국의 중프리깃 USS 컨스티튜션 함 때문이다. 컨스티튜션은 미영전쟁 와중인 1812년 12월 29일에 영국 해군의 팔라급 38문 프리깃 HMS 자바 함을 나포한 후 태워버린 적이 있다. 고작 프리깃 한 척이었지만 문제는 자바 함이 다른 함선들에 보내질 승무원들과 함장들, 뱅거급 전열함 콘월리스 함의 함저에 설치할 구리판, 그리고 웰즐리 함의 설계도를 운반하던 중이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영국 해군의 금쪽같은 전열함 두 척의 건조에 엄청난 차질이 빚어졌다. 콘월리스 함은 함체는 이미 완공된 상태로 수 개월이나 구리판을 기다려야 했고, 극비로 취급되어 건조되던 웰즐리 함은 급한대로 콘월리스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아예 재설계해야 했다. 이 때문에 웰즐리 함은 서류상으로는 블랙프린스급 전열함으로 분류되지만 사실상 뱅거급 전열함의 41번째 함선으로 취급되며, 웰즐리급으로 명명되었어야 할 함급명 자체도 2번함인 블랙프린스에게 빼앗긴 것이다. 후에는 콘월리스와 함께 아편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30] 이는 매우 상징적인 위치 선정이다. 채널 제도는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다 영국 왕실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국 공작 가문이던 시절 프랑스 땅에 보유했던 영토의 마지막 남은 잔해이기 때문. 따라서 채널 제도는 구 프랑스 왕국의 마지막 남은 영토이기도 하다. 프랑스와 영국 두 국가의 해군 함선으로 임무를 수행한 임플라커블의 무덤으로 이만큼 적절한 곳은 없을 것이다.[31] 선체 하부를 폭파시켰다. 근현대적 철제 군함이 아닌 목제 군함이라서 밸브를 열어 물을 들일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32] 세계 표준시로 유명한 그리니치 천문대 바로 아래, 길을 사이에 두고 구 영국 해군대학과 마주보고 있다. 위에 언급된 커티 삭 호도 이 근처에 정박해 있다.[33] 영국의 프리깃 함급. 사네가 설계한 에베급 38문 프리깃 에베 함을 노획한 뒤 복제한 함급이다. 총 47척이 건조되었다. 속도는 13노트로 매우 빨랐지만 장점은 그뿐이었고, 기존의 영국제 성공작인 라이블리급 38문 프리깃보다 여러 모로 퇴보한 모습을 보여줬다. 우선 항해성이 나빠 옆질이 심했던데다 바람을 거슬러오르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적재량도 그닥 크지 않았기에 작전 기간 동안 필요한 충분한 양의 청수를 담을 수도 없었다. 청수 문제는 미생물 오염으로부터 그나마 안전한 철제 식수탱크가 보급된 이후에야 그나마 나아졌다. 때문에 이 함급을 모는 영국 함장들은 자신들의 배가 항상 흔들리면서 파도를 뒤집어쓴다고 '젖어있는 배'라고 까대거나 상부에 용골 부분을 손 좀 보라고 항의하곤 했다.[34] 1817년에 인도 봄베이(현 뭄바이)에서 건조되었다. 굳이 뭄바이에서 건조된 이유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영국의 숲들이 고갈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건조 주체는 인도 업체인 와이다(Waida) 사였다. 인도의 조로아스터교도인 '파르시' 출신의 노지 누스루완지 와이다를 창업주로 하는 이 회사는 1736년부터 봄베이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함선을 납품하며 성장했고, 1750년에는 아시아의 첫번째 드라이 독을 건설하기도 했다. 이 봄베이 조선소는 영국 식민제국의 주요 조선소 중 하나로서 미영전쟁 당시 프랜시스 스콧 키가 포로로 잡혀 있다가 미국의 국가인 The Star-Spangled Banner를 작곡한 것으로 유명한 HMS 민덴 함, 아편 전쟁 당시 난징 조약이 체결된 HMS 콘월리스 함이나 위에 이미 언급된 웰즐리 함 등의 수많은 함선들을 건조했다. 그리고 와이다 가문이 제작한 선박의 진수식에서는 설계자가 은제 못 하나를 함선의 용골에 직접 박아 넣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는데, 이는 배의 행운을 기원하는 파르시 조로아스터교들의 의식이었다. 그 외에도 와이다 가문은 봄베이를 다양한 면에서 유럽적으로 재개발하여 봄베이를 영국 식민제국의 아시아 지역을 총괄하는 중심지로 성장시킨 숨은 주역이라고 평가된다. 현재는 산하에 식품가공업체나 직물 산업, 저가 항공사 등의 여러 회사들을 거느린 거대한 그룹으로 성장했다. 당시 건설된 뭄바이 조선소의 드라이 독 또한 일부가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35] 아일랜드 원정은 영국의 후방을 긁어대기 위해 추진되었으나 처참히 실패했다.[36] 44문 중프리깃으로 개조된 상태였다.[37] 스페인 해군의 선임 설계자 호세 로메로 이 페르난도 데 란다가 설계한 전열함급. 112문의 포를 장비한 거대한 3층갑판 전열함이었음에도 높은 파도 속에서도 안정적인 전투 수행이 가능할 만큼 잘 설계되었다. 1784년부터 스페인 해군의 주요 해군기지였던 갈리시아의 페롤과 식민지인 쿠바 도독령의 하바나 조선소에서 도합 7척이 건조되어, 포리지마급 112문급 전열함 2척과 개조된 112문함 산 카를로스함, 그리고 산티시마 트리니다드함과 함께 스페인 해군의 최고 주력함으로 활동했다.[38] 몬타니에급 4번함. 몬타니에급 역시 데 란다가 설계한 함선이다. 1번함과 자매함들의 설계에 조금 차이가 있는데, 1번함인 몬타니에는 74문함이었던 반면 자매함들은 80문함으로 건조되었다. 24파운더와 18파운더를 주무장으로 달고 있었으므로 36파운더와 24파운더를 장착한 프랑스의 80문급보다는 화력이 조금 모자랐다. 다만 2번함 넵튜노는 1805년에 18파운더를 24파운더로 환장했기에 자매함들보다는 좀 더 강력했다. 건조된 네 척 모두 트라팔가 해전에 참전했다.[39] 이 문서 상단에 대표로 올라온 사진 속 함선이다.[40] 1775년 건조된 영국 해군의 함선이었으나, 1795년 프랑스 해군에 나포되었다.[41] 넵튠급의 3번함. 넵튠급 세 척 모두 트라팔가르 해전에 참전했다. 당시 1번함 HMS 넵튠은 스페인 해군의 4포갑판 132문함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를 다른 함선들과 함께 다굴쳤고, 2번함 HMS 테메레르는 HMS 빅토리에 달려든 프랑스 해군함 르두터블과 엄청난 혈전을 벌였다.[42] 런던급은 1769년부터 4척이 취역한 영국의 2급함이다. 원래 90문급이었으나 설계의 여유가 있어 98문급으로 변동되었다. 프린스는 이 함급의 2번함으로, 트라팔가에서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의 항복을 받아내었다.[43] 위의 폼페이급 수퍼브 함 맞다.[44] 듀크급 98문 2급 전열함의 4번함. 다만 1802년에 74문급으로 개조되어 1806년 당시에는 3급 전열함으로 재분류되었다.[45] 토낭급 80문 전열함의 7번함.[46] 74문 3급함. 영국으로 망명한 프랑스인 함선 설계자 장루이 바랄리에가 설계했다. 프랑스인이 설계한 만큼 테메레르급과 맞먹는 1900톤급의 큰 함선이었다.[47] 토낭급 80문 전열함 6번함. 알렉상드르의 동형함이지만 포가 4문 더 많다. 프랑스 해군함이었으나 건조된 지 고작 반년 후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노획되어 영국 해군의 80문 3급함이 되었다.[48] 노획된 테메레르급 전열함.[49] 아덴트급 64문 3급 전열함 3번함. 넬슨 제독이 함장 시절 몰았기에 애정을 많이 가졌던 배다. 트라팔가 해전에도 참전하여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시류에 밀려 도태되던 64문함이었기에 넬슨이 몰던 1793년 당시에도 관리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생 도밍그 전투에서도 관리 부실로 인해 속도가 매우 떨어져 있었고, 이 때문에 더 큰 다른 함선들을 못 쫒아가 전투가 거의 끝난 다음에야 전장에 도달했다. 결국 이 시대를 잘못 만난 작은 함선은 전투 이후 브라질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다 1809년에 라플라타 강 하구에서 좌초되었다.[50] 테메레르급의 대형화 모델인 카사드형 2번함.[51] 테메레르급. 이 전투의 결과 영국에 노획되었다. 그리고 1807년 영국의 코펜하겐 공격 당시 육전대를 상륙시켜 덴마크군 포대를 공격했다.[52] 이때 아틀라스 함은 충각 공격을 두 번이나 실시했다. 우선 도네갈 함의 맹렬한 공격을 피해 달아나던 주피터 함을 들이받아 진로를 가로막고 항복시켰다. 그리고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임페리알 함을 공격하던 도중 갑자기 나타난 디오메데 함에게 일제 사격을 받아 혼란에 빠졌다가 아군인 카노푸스 함을 들이받기도 했다. 당시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알 수 있다.[53] 테메레르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