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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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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등장한 초기형 전열함, HMS 소버린 오브 더 씨[1]

파일:attachment/전열함/ship-of-line-ohio.jpg
후기형에 속하는 미국의 전열함, USS 오하이오[2][3]

파일:FEcMItAhFMYYdj_Zr1LB2NajGGFbgLuqe4df5nrGqfo.jpg
1850 증기선 라 나폴레옹(La Napoleon)
1. 개요2. 운용 기조3. 이름의 유래4. 실제 활용과 구분5. 몰락6. 19세기 말 이후7. 매체에서
7.1. 대항해시대 시리즈7.2. 기타 매체에서
8. 목록9. 전열함시대의 주요 무장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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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열함(, ship of the line)은 17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유럽 국가에서 사용된 군함이다. 목조 범선 시대의 강력한 군함으로, 일반적으로 유럽식 범선 전함 중에서는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

약 2세기에 걸쳐 사용된 만큼 시대별로 외형이 크게 다르고, 초기형 전열함의 경우 전대의 복층 갑판 갤리온과 명확히 구분하기도 어렵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전열함의 특징을 굳이 언급하자면 최대한 많은 대포를 탑재하기 위해 복층으로 지어진 포곽, 그리고 이를 감당하기 위해 선수루와 선미루가 거의 사라지고 평평해진 상갑판 정도를 들 수 있다.

1840년대 말부터는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증기 기관을 도입하면서 바람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든 개선된 전열함들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등장한 철갑선에게 자리를 넘겨 주었다. 강력한 화력과 거대한 크기로 적을 압도했던 전열함은 훗날 20세기 전함의 조상이 되었다.

2. 운용 기조

범선시대에서 전열함이 가지는 위상은 근대라면 전함, 현대라면 항공모함과 같다. 전술적 역할뿐 아니라 전략적 가치까지도 매우 흡사하다.

고대 역사에 남을 만한 대해전은 주로 지중해가 무대로, 노를 젓는 갤리선이 주력함이었고 접현시켜 백병전을 벌이거나 충각 전술로 배끼리 충돌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이후 화약과 대포가 개량을 거듭하고 대항해시대가 도래하며 해전의 주역은 서서히 범선으로 이동했다. 활과 노(弩)에서 대포로 화력 방사 방법도 발전했다.

그런데 당시 대포는 현재와 달리 착탄하면 터지는 작렬탄이 아니라 통짜 쇠구슬을 날리는 방식이었다. 맞춰 봐야 배에 구멍 하나 뚫리는 데에 그치고 한 방에 배를 격침시킬 수는 없었다. 고폭탄을 만들 지식은 없었던 대신, 많은 대포를 장착해 부족한 관통력과 살상력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전투력을 올렸다.[4] 따라서 복층 갑판구조를 가진 함선이 개발되고 반대로 다수의 포화를 견딜 수 있는 장갑과 구조가 요구됐다. 전열함으로 넘어오던 과도기에는 3층 갑판 갤리온이 나왔고, 이를 더 개량한 것이 전열함이다.[5]

그렇지만 당시 전열함의 대포는 파괴력이 작든 크든 적함 격침에 비효율적인 건 사실이었다. 당시 3급 전열함의 상부 포갑판에 탑재된 18파운드 포는 30m 이내에서 무려 750mm 두께의 참나무를 관통했다. 탄속이 너무 빨라 반대편 갑판을 뚫고 나가버렸던 것이 오히려 문제였다. 이를 보완해 탄속이 느리고 포환이 큰 카로네이드 포가 나왔다. 하지만 부족한 화력은 마찬가지였다. 라운드샷 수십 발을 퍼맞고도 양쪽함 모두 떠있었고, 혹 흘수선 근처에 맞아 침수가 돼도 긴급보수를 하면 침몰하는 일도 적었다.

마스트가 전부 부러져서 항행능력을 상실하거나 간부 내지 수병의 피해가 너무 커서 사기 저하로 끝나는 게 당시 해전의 양상이었다. 화약고 유폭만은 달랐는데, 핫샷 등 뜨겁게 열받은 포탄이 화약고를 때리면서 전열함들이 터져나갔다. 이를 참고해 포탄 자체를 고폭탄으로 업그레이드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1830년경에 프랑스에서 작열탄을 사용하는 대포를 개발했고, 같은 시기 프랑스에서 증기 추진 전열함이 개발되었다. 증기추진으로 인해 더 나은 기동성이 확보되고 작열탄을 통해 당시 인화성 소재로 가득 찬 범선에게 치명타를 줄 수 있게 되자 이후 대미지를 줄여보고자 범선의 선체를 철갑으로 강화하거나 아예 철제 선체를 가진 철갑함이 나왔고. 그 철갑을 관통하기 위해서 범장을 포기하고 강력한 증기추진과 함께 확실한 한방을 보장하기 위해 선체 중앙에 대구경, 고관통 주포탑을 설치하기 시작한 게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며, 주포의 화력이 강해지자 가능해진 장거리 교전에서 쓸모없는 중간포와 부포를 들어내고 주포를 최대한 증설한 게 드레드노트급 전함이다. 이윽고 전열함의 시대가 저문다.

하지만 전열함 시대에도 포격을 할 시 대부분이 흘수선 위쪽을 맞으므로 격침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다. 굳이 격침을 하려면 파도를 이용해서 적선의 흘수선 아래 부분이 드러날 때 타이밍 맞춰 쏘는 방법이 있는데, 당시 포격 방식으로는 그런 흘수선 하단 "조준사격"이 타이밍 맞추기도 어려울뿐더러 여러 가지 면에서 상당히 힘들었다. 그냥 흘수선 위쪽을 마구마구 때려서 걸레짝을 만들어놓고 백병전에 돌입하거나 적 승조원의 숫자를 줄여버리는 등으로 상대함이 항복하면 승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목재라는 특성상 잘 가라앉지도 않아서, 대개 승리한 쪽은 항복한 함정을 나포, 자함 승조원 일부를 차출해 본국에 먼저 보내거나 자함과 동행시켜 끌고 가곤 했다. 게다가, 당시엔 나포한 적국 함선이나 상선 및 화물을 정부가 종류와 상태 등을 보고 가격을 매겨 매입하여 나포해 온 함장을 포함한 모든 승조원들에게 상금, 즉 을 줬으므로[6], 오히려 간신히 이겼더니 적함이 가라앉아 버리면 승리한 쪽 승조원들이 망했다면서 분통을 터트렸다.

나포한 배가 전투의 영향으로 불이 나면 포로 신세인 나포된 배의 승조원들은 물론 나포한 쪽의 승조원들까지 합세해 필사적으로 진화를 했다. 마찬가지로 침수가 발생하면 양측 승조원들이 협력해 필사적으로 펌프질을 하기도 했다. 육지와 달리 배를 잃는 순간 생존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지는 바다의 특성과, 뱃사람들 특유의 국적을 넘는 유대감, 근대 서구권의 전투 문화 등으로 교전이 끝나면 대개 상호 간의 적개심이 쉽게 가라앉았던 점과 가장 중요한 나포 상금 등이 작용했다. 그리고 당시 일반 선원의 대부분은 강제 징집당한 사람들이어서 충성심도 희박했으므로 제3국 항구에서 해산되거나 심하면 그냥 간부들만 변하고 그대로 운용되는 경우도 있기도 했다.[7]

3. 이름의 유래

전열함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더 많은 대포를 장착가능하도록 복층 갑판구조로 만들어진 함선들이다. 배의 측면방향으로 대포를 정렬한 이러한 구조의 함선은 진행방향에서 90도 각도 좌우측 방향에만 화력을 투사할 수 있어 측면이 가장 강력하다. 선수포와 선미포는 화력의 의미보다는 사슬탄을 발사하여 상대배의 돛에 손상을 주는 용도일 뿐이라, 기동력을 떨어뜨려 교전을 강요하거나, 추격을 회피하는 용도의 의미밖에 없었다. 방어적인 측면에서도 당시 목선들은 포격을 받으면 쉽게 관통당했기 때문에 몇 발의 명중탄 만으로 의외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배의 선수나 선미에서 포격을 받았을 경우 포탄이 배의 종심을 타고 보다 많은 구획을 관통하기에 엄청난 인명피해를 낼 수 있었으며, 선체에도 큰 구조적 피해를 입혔다.[8] 대신 명중확률이 줄어들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포탄은 3차원 포물선 운동을 하기 때문에 측면을 노출했다면 배를 넘어갔을 포탄이 배 한가운데에 낙착하게 되어 맞을 확률이 극도로 낮아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취약한 선수와 선미를 적에게 공격받는 일이 없도록 여러 척의 함선이 일렬로 서로서로 붙어서 약점을 보완해 주며 동시에 화력이 집중된 측면은 모두 함께 적을 향해서 전체 함대의 화력을 증강시키는 전술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을 전열(戰列) 전술이라고 한다. 전열함(戰列艦)이라는 이름은 이러한 전술 개념에서 따온 것이며, 영어로도 ship-of-the-line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모든 범선이 같은 장단점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으니 모든 배가 이런 형태의 싸움을 하는데, 왜 전열함급이라는 함급이 존재했느냐고 생각한다면, 전열전술은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니라 배가 줄을 선채로 이동하면서 교전한다.[9] 이 전열에 해당전투에서 유난히 약한 배가 있다면 집중적인 타격대상이 되어 손쉽게 침몰하거나 무력화될 수 있다. 그 경우 그 배 한 척이 돈좌한다면 뒤따르는 배들 전체가 길이 막히므로 진형이 분단된다. 따라서 해당 해전에서 적절한 중량급 함급이 되지 않으면 전열에 낄 수가 없었다.[10]

따라서 5급 이하 프리깃이나 호위함들도 그들끼리 싸울 때는 전열전술을 사용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국력을 뒤흔드는 결전급이 되면 4급 이상 거대한 배들이 집결하기 마련이고, 이런 싸움에선 이들은 정찰을 수행한 후, 실제 결전에선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프리깃이나 호위함들은 해적 추격, 연안 방어가 함급의 주요 목표였기에 화력보다는 기동력을 중요시한 설계와 무장을 갖추고 있어서 본격적인 결전에는 낄 수 없었다.

물론 이런 작은 함선들이 그렇다고 해전 내내 진짜 구경만 내내 하는 건 아니고, 교전이 이루어지기 전에 적의 전황과 조류 기상을 관측하여 전선을 확정하고, 교전이 이루어진 뒤 타격을 입고 전열을 이탈하는 적을 나포하거나 추격하고, 아군 전열함이 위기에 처하면 순식간에 격침당할걸 각오하고 달려들어 싸움을 돕거나 최악의 경우 아군 전열함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주어야 하기도 했다.

4. 실제 활용과 구분

당시 바다의 황제라고 불렸던 영국 함대의 경우, 배의 등급을 1~6등급으로 구분했으며, 이중 약 60문 이상의 대포로 무장한 3~4등급 함선 이상의 전투함을 전열함이라고 불렀다. 또한 전열함도 2층에서 최대 3층갑판을 채택하는 게 대부분이고, 전열함 중에서 제일 많은 수가 취역한 것은 보통 74문의 3급 전열함이었다.

실제로 1815년까지 영국 해군 내에서 취역한 전열함 대수는 최대 104문에 3층 포갑판 1급이 8척가량, 최대 98문 3층 포갑판 2급이 7척, 최대 80문에 2층 내지 3층 포갑판 3급 전열함 94척이었다, 실제로 2급 이상부터는 하부 포갑판 운용 제한과 안정성의 문제로, 후에 선체를 늘린 2층 포갑판 설계의 전열함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트라팔가 해전 당시 스페인, 프랑스 연합 내의 주 전력은 2층 포갑판을 채용한 전열함들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2층 포갑판을 주로 채용한 프랑스의 전열함들은 영국에 비해 함선 운용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되지만 선체 설계는 더 뛰어났다는 것이다. 압도적인 해군력을 바탕으로 공세에 나서야 하는 영국 해군과 달리, 방어적인 입장인 프랑스 해군에게는 전투 이후 전력보존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동일한 74문의 전열함이라도 프랑스 전열함의 함체가 더 대형이고 조함하기가 쉬웠다고 한다. 그래서 동일한 80문의 전열함이라도, 해전 당시의 파도, 바람과 특유의 안정성 문제에서 3층 포갑판을 채용한 영국 전열함은 파도가 넘나드는 문제로 종종 최하층 포문을 열지 못한 채로 전투에 임하던 것에 비하면 프랑스의 전열함은 이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참고로 프랑스 해군의 2단층 80문급 전열함은 영국 해군의 98문급 전열함과 크기와 무게가 거의 비슷했다.

또한 스페인의 전열함 역시 영국의 전열함에 비해 설계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스페인의 경우 설계에서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107척이나 건조된 프랑스의 테메레르급 74문형 전열함의 경우, 영국 해군이 굉장히 높게 평가해서 동급함의 나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한편으로 설계를 카피해서 폼페이급, 아메리카급 전열함을 건조했다. 테메레르급은 주력함 중에서는 역사상 가장 많이 건조된 함급이다.

반면에 동일한 74문급의 전열함이라 할지라도 영국의 전열함은 크기가 작은 편이었고, 이로 인해 공간이 좁아서 승조원이 활동하기가 불편하다던가, 복원성이 좋지 않아서 항해능력이나 포격 등에 있어서 곤란한 점들이 많았다. 그 예로 1740년 4월 스페인의 70문 전열함 프린세사(princessa)와 영국 70문 전열함 3척이 교전을 벌인 일이 있었는데, 3대 1의 상황임에도 최종적으로 항복할 때까지 무려 6시간 동안 교전을 벌인 일이 있었다. 이것은 프린세사가 당시 영국의 90문 전열함과 맞먹을 정도의 크기를 가졌기에 안정성이 더 뛰어났기 때문이다. 영국의 함장들이 프랑스나 스페인의 함선들을 보면 적극적으로 나포하려는 이유가 상대적으로 뛰어난 설계방식도 원인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11]

이런 차이가 나는 데에는 어느 정도는 단함의 우월성보다는 수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영국 해군 교리의 영향도 있었다. 해외 무역 의존도가 높은 영국의 특성상 필요한 군함의 수요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2차 대전 때까지 이어져서, 영국의 순양함이나 구축함은 타국의 함에 비해 단함으로는 화력 등에서 밀리는 대신, 항해 능력 등 전체적인 균형과 수적 우위를 염두에 두고 건조되었다. 프랑스나 스페인의 경우에는 예산부족도 있지만 그 대신에 숫적열세를 개별적 군함의 성능으로 우위를 확보하여 어느 정도 보강하려는 이유로 전열함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더 컸다.

실제로도 프랑스나 스페인의 전열함들은 설계방식은 뛰어났지만 결과적으로 바다 경험을 갖춘 승조원을 확보하기 힘든 대륙국가의 특성과 그에 따른 승조원의 질의 차이로 인해 영국 해군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프랑스의 경우는 수적열세 때문에 적함대 격파보다 주로 자국함대 보존에 치중했으며, 육군국가라 육군을 소홀히 할 수 없어서 해군에만 투자하지 못해 영국 해군을 완전히 앞지르지는 못했다.

그리고, 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로 프랑스의 완전한 설계상 우위는 1730년 ~ 1755년 즈음까지만 유지되었다. 1755년 이후부터는 영국이 프랑스의 기술력을 흡수한 전열함들을 취역시키며 차이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1770년대부터는 설계 능력은 별 차이가 없는 수준으로 갔다. 그래서 1760년대와 1780년대의 영국 함대와 부르봉 연합함대의 전열함 격차를 보면, 1760년대에는 영국이 60여 척 더 많을 정도로 수적 우세지만 1780년대에는 영국이 오히려 20척 더 적은 상황이 나온다. 이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저 정도로 군축해도 문제없을 정도로 기술적 차이가 없던 것도 있다. 테메레르급 74문형 전열함이나 Pomone급 중프리깃 같은 경우처럼 1780년대에 프랑스가 다시 기술격차를 벌린 경우도 있었지만 얼마 안 돼서 나포당한 후 다시 기술력을 따라 잡혔고, 영국 선박 설계사들이 발전시키면서 결국 1790년대 중반부터는 영국이 설계상 우위를 갖게 되고, 프랑스나 스페인이 영국에 대해서 확실한 우위를 갖춘 분야는 없어진 수준이 됐다.

여담으로 프랑스의 전열함들은 함선의 유지보수면에서는 굉장히 효율적이었다고 한다. 프랑스에 포로 신분으로 머물던 한 영국 해군 장교는 쉐르부르 항에서 프랑스 해군 전열함의 바닥 이물질 제거작업을 하루 만에 마치고 도크에서 나가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기록한 바 있다. 항해를 하다 보면 선저에 수중생물이 달라붙어 함의 저항 및 내구도 저하를 일으킨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함포 등을 제거하고 함을 가볍게 만든 다음, 함선을 한쪽으로 기울게 하여 반대편 선저를 보이게 하여 이물질을 제거하고 다시 반대편으로 기울여 반대편 바닥작업을 진행하는 일련의 과정을 시행하는데, 프랑스는 기중기를 사용하여 효율적으로 작업을 진행했던 반면 영국의 항구에서 비슷한 작업은 당시 1주일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그래도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는 프랑스도 해군에 대한 투자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서 영국 해군에게 여러 차례 패배를 안겨주기도 했다. 이는 장 바티스트 콜베르중상정책에 의한 결과이기도 하다. 중상정책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상선단을 필요로 하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해군력 강화는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해군전술과 교리 연구에서 선두를 달린 것은 의외로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그래서 고급 해군전술과 교리에 관한 책은 프랑스어로 된 책이 많았고, 그를 영어로 번역해서 출판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드 그라스 백작이나 드 기생 백작 등은 영국 해군에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특히 드 기생 백작은 프랑스 해군 최고의 방어 전문가로 평가받았다고 하며, 로드니 제독을 상대로 싸운 해전에서 로드니 제독의 전열돌파전술을 견고한 전열유지로 막아내 방어에 성공하여 영국 함대를 후퇴하게 만드는 등 이게 여태까지의 프랑스 해군이 맞냐고 할 정도로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쉬프랑 제독은 인도로 프랑스 전열함대를 이끌고 가서 동인도회사의 항구를 공격하고 점령하여 프랑스의 세력을 확장했고, 영국 해군과의 수차례 교전에서 승리하였다. 그로 인해 영국이 미국 독립전쟁에 증원할 병력을 인도로 돌리는 결정을 내리게 했다.

그러던 것이 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을 맞으며 프랑스는 다시 육군 국가로 전환되었다. 그 이유로는 첫 번째로는 육군보다도 훨씬 전문성이 많이 요구되는 분야가 해군인데, 귀족은 무조건 죽이던 광풍 속에서 귀족이 절대다수였던 해군 장교들이 대거 처형되거나 외국으로 도피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마찬가지로 해군은 육군보다 훨씬 다양하고 희귀한 물자를 정교하게 보급할 수 있는 체계가 필수적인데, 혁명정부의 무능으로 인해 국민들의 생필품마저 가격이 폭등할 정도로 나라 꼴이 개판이 되어 그럴 여건이 안 되었다. 또한 19세기 중반 이후로 프랑스에서는 청년학파의 대두가 결정타가 되어 결과론적인 해석이긴 하나 경쟁 상대인 영국은 드레드노트급 전함구축함 등 해군의 혁신을 주도했던 반면 프랑스는 어뢰정에 치중하다가 해군 전력에서 크게 뒤쳐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나마 전간기에는 프랑스도 해군을 열심히 양성한 덕에 뛰어난 성능의 군함이 많이 개발되었으나 프랑스 침공에서 프랑스 제3공화국이 대패하면서 그게 다 나치 독일로 넘어가거나 영국 놈들 손에 박살나버린 비극이 발생했고 전후에는 다시 해군을 재건하여 21세기에도 프랑스 해군은 영국에도 없는 원자력 항공모함을 운영하는 세계 네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영국스페인프랑스의 전열함들에 비해 협소한 공간이라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대포에 당시 머스킷 총에 사용되던 수석식 격발장치를 장착했다. 당시 일반적인 포격 방식은 대포 하나당 사관과 포수, 장전수, 대포를 지지하는 밧줄을 당기는 사람 등등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 포수가 심지가 달린 긴 장대를 대포 화약구멍에 접촉시켜 격발하는 시스템이었다. 이로 인해 장전하는 사람, 조준하는 사람, 포수가 각각 따로 있어 조준에서 포격까지 타이밍 맞추기도 힘들었을뿐더러, 파도로 인해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그리고 포격 시 대포의 후퇴 반동을 피해서 멀찌감치 떨어진 거리에서 발화용 장대 끝을 대포 화약구멍에 갖다 대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은 조준하는 사람, 포격하는 사람이 따로 있던 기존 시스템과는 달리, 조준하는 사람이 직접 줄을 당겨 격발장치를 작동시키는 시스템이라, 대포 하나하나를 담당하는 인원수가 크게 감축이 되어 보다 효율적인 선체 내부 공간이 확보되었고, 그냥 줄만 당기면 되었으므로, 파도치는 바다 위에서도 간편하게 사격을 할 수 있었으며, 기존의 재래식 방법보다 격발 후 포탄이 발사되는 반응속도도 빨라서 보다 정확한 조준 포격을 할 수 있어 트라팔가 해전 등에서 큰 효과를 보았다. 반면 스페인이나 프랑스는 기존의 재래식 포격 방식을 사용하여 포격의 정확도나 타이밍면에서는 영국보다 많이 밀렸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영국은 함포 사격에 플린트락 방식을 도입했고 프랑스는 여전히 직접 화승을 갖다 대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양자의 장단점은 명확한데, 플린트락 방식은 빠르고 간편하게 격발 할 수 있었으나, 불발 혹은 지발이 발생할 위험성이 있었다. 반면 프랑스 방식은 불발이나 지발 위험성은 작았으나, 직접 불붙은 화승을 들고 있어서 사고 위험성도 있었고, 포수들 간에 연계가 정확하지 않으면 정확한 타이밍에 사격하기 어려웠다. 지발이란 격발을 시켰음에도 발사되지 않고 뜸 들이다가 뜻하지 않게 갑자기 발사되는 경우를 뜻한다. 그리고 부싯돌 격발장치를 쓰던 영국 해군도 불발을 대비해 화승식 막대를 항상 준비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열함 중에서 상식을 뛰어넘는 함선들이 있었는데 바로 4층 포갑판 전열함이다. 이들은 실제로 제대로 활약을 해보지도 못하고 최후를 맞이한 게 대부분이었다. 당장 트라팔가 해전 당시 스페인의 1등급 전열함인 산티시마 트리니다드가 그 예다. 134문의 포를 갖춘 4층 포갑판 전열함이지만,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나포당해 영국 해군의 전력이 될 했지만, 결국 폭풍우에 좌초되어 최후를 맞이했다. 4층 전열함이 인기를 끌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는데, 조함의 어려움이 큰 이유 중 하나였다. 미국의 1등급 전열함 펜실베이니아도 상당히 험난한 운명을 자랑하는데,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남북 전쟁기에 자침했다.

예외로 프랑스의 오세앙급은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를 능가하는 크기를 가진 당시 세계 최대의 전열함이었지만,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와 다르게 거함인데도 항해성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동급함으로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당시에 나일해전에서 전투 중 화재로 폭침한 오세앙급 전열함 120문 함 오리앙호가 있다.

4층 포갑판 전열함같은 대형 전열함들이 전장의 주력으로 올라서지 못하고 특수한 사례로만 존재하는 이유는 전열함의 크기는 별로 변하지 않았는데 포갑판 숫자가 늘고 많은 수의 함포를 탑재하면 항행성능이나 내구성 면에서 악영향이 오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전열함도 목재 범선이었고 그런 이유 때문에 목재로 대형 군함을 만들 때 발생하는 뒤틀림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건 갤리선을 만들 때부터 발생한 1천년이 넘어가는 고질적인 문제였는데 헬레니즘 제국시절에 만든 20단선이나 40단선이 둔중하고 조종하기 힘들며 무거워서 해전에서는 발리스타투석기로 원거리 화력지원밖에 못해서 결국 갤리선의 주력이 3단 노선이나 5단 노선으로 되돌아가버린 사례가 존재할 정도였다.

그래서 전열함의 포문 숫자가 늘어나고 배수량도 1650년에 1500톤, 1750년에 2000톤, 1800년에 2500톤으로 불어나는 데 비해 기본적인 구조는 별로 변하지 않는데다가 전열함의 길이는 보통 49m 에서 61m 사이를 유지하니 전열함이 짧고 통통한 함형으로 변화하면서 항행성능과 속도가 더 안좋아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기술력이 상당히 늦게 만들어진 것도 문제였다. 이미 나폴레옹 전쟁이 벌어진 시기인 1804년에 영국의 함선설계가인 로베트 세핑경이 개량형 대각선 조임 장치를 개발해서 드디어 목재 선박의 뒤틀림 문제를 해결하였고 더 큰 목재 군함을 건조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미 대규모 전쟁중이었고 아무리 영국이라고 하더라도 기존보다 큰 전열함을 만들 여유가 없었다. 함선 조종장치의 개량은 더 늦어져서 기존의 타기 지레와 손잡이 막대 (tiller and whio-staff) 라는 복잡하고 조종하기 어려운 장치가 조타기 (steering wheel) 로 변경된 시기는 18세기 초반을 넘어가야 했다. 여기에 더해서 점점 전열함용으로 쓸만한 양질의 목재 조달이 어려워지고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에 기술발전으로 철갑선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전열함의 발전은 사실상 정지되고 만다.

이런 이유로 전열함은 SSBN이나 드레드노트급 전함들처럼 실제 해전에서의 활용은 매우 적은 편이었고, 일종의 결전병기의 개념으로 운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실제 해전에서는 오히려 20문에서 50문 정도의 대포를 갖춘 4등급 이하의 프리깃과 더불어 포문 20문 미만의 6등급 이외의 등외 전함이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서 콜벳, 슬루프, 커터, 브릭 같은 중소형 전함들은 전열함보다 더 많은 활약을 펼쳤다. 전열함들은 항구에서 훗날 있을 결전을 대비에 전력을 보존하거나, 항구 봉쇄의 용도로 사용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이 활용된 전투함이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또한 이런 대형 전열함은 매우 느리고 둔했는데, 순풍을 잘 타도 8노트를 넘기기 힘들 정도로 둔하였고, 키를 한 번 돌리는데도 인원이 10명 이상 요구될 정도로 조종하기도 힘들다는 단점이 있기에 활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기에 정작 근대 범선전투라면 쉽게 떠올리는 전열함이 서로서로 열을 이루면서 포격을 주고받는 그런 장관이 펼쳐진 해전은 역사적으로 찾아봐도 굉장히 드물었으며, 오히려 기동력 좋고 경쾌한 프리깃함이 해군의 주력으로서 활용되었다.

미국의 경우 전열함보다는 일반 프리깃보다 강력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전열함과도 전투가 가능한 대형 프리깃을 개발/배치하는 쪽을 택했다. 다만 이것은 당시 미 해군이 전열함을 아예 포기하고 실용적인 노선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유럽 국가들처럼 대대적으로 전열함에 투자할 상황이 안 되었던 것이 컸다.(대표적인 예로 최초의 6척(Original Six)중 하나인 USS 컨스티튜션이 있다.)

그렇다고 전열함이 쓸데없는 돈지랄 함선이라고 보는 것은 정말 위험한 생각이다. 어찌 되었던 적 전열함이 함대를 이루고 있으면 이를 상대할 방법은 똑같이 전열함을 잔뜩 끌고 와서 한 판 붙는 수밖에 없었다. 전열함이 기함에 애용된 것도, 특유의 위엄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상대 함을 아예 다가올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효율적이라고 판단되는 100문 이상 1급 전열함, 그 1급마저 초월해 버리는 스펙의 오세앙급이나 산티시마 트리니다드가 건조되었던 이유도, 전열함이라는 카테고리가 그만큼 강력한 함종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국가든 1급 전열함은 견제의 대상이었으며, 사실상 1급 전열함이 제대로 활약을 못 한 이유에는 해당 함급에 대한 극심한 견제도 한몫한다. 일단 해전에 1급 전열함이 뜨면, 2~3급 전열함과 각종 프리깃, 심지어 같은 1급 전열함이 돌격해 최대한 격침 및 나포하려고 했기 때문. 그리고 사실상 2급 정도만 돼도 충분히 견제의 대상이 되는데, 너무 크고 무거워 그 위엄만큼 해전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던 1급 전열함과 달리, 2~3급 전열함, 특히 강력한 2급 전열함은 사실상 유럽 함대의 주축이던 갤리온이나 프리깃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런 강력한 상위 2급 전열함 3척 정도가 모이면 1급 전열함도 안심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런 2급 전열함은 프리깃의 역할도 수행했는데, 너무 느린 1급 전열함(기함)이 전투해역에 도착할 때까지 적 함대를 깨부수면서 시간을 벌고, 기함급 함선을 지켜낸 것도 2급 전열함들이다. 심지어 3~4급 전열함들마저도 무시하지 못할 강력한 활약을 했으니, 결전병기로서 전열함의 위엄은 엄청나다. 애초에 대부분의 함대 구성원이었던 갤리온이나 프리깃이 절대 이기지 못할 함선인 점에서부터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물론 3층 갑판 헤비겔리온이라면 모르겠지만, 그 정도부터는 사실상 준 전열함이라고 봐야 하며, 함포나 배수량 등 여러 면에서 하위 전열함을 초월한 배라 논외로 쳐야 한다. 따라서 전열함을 이기고 싶다면, 전열함이나 전열함에 준하는 대체병기를 데려와야 했다. 강대국 아니면 한두 척 보유하기도 힘든 전열함이므로, 이 전열함 보유 척도에 따라 해양 강국이냐 아니냐가 갈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대방이 전열함 함대를 가져올 때, 똑같은 전열함 함대를 가져오거나, 그럴 수 있더라도 승리할 자신이 없다면, 그저 군항에 짱 박혀서 해안포대의 엄호나 받으면서 벌벌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전열함들은 위력이나 활용도 면에서 비교가 안 되지만 현대전에서 핵무기가 가지고 있는 위상과 유사한 면이 있다. 핵무기 또한 매우 위력적이며 전략 수립에 있어 필수요소로 취급되지만, 실제 전과는 밖에 없다.

결국 봉쇄당한 측의 국가는 함대는 있는데 제대로 쓸 수 없는 꼴이 되어버리기에, 해군이 봉쇄당한 국가의 무역선은 심심하면 프리깃과 슬루프 등 소형함선에게 나포당하기 일쑤이지만, 봉쇄를 하고 있는 국가의 무역선은 위장 사략선이 아닌 한 공격당할 일 자체가 거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해외 무역은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었기에 이를 봉쇄한다는 것은 엄청난 이점을 가져다준다. 다시 말해 전열함은 전술적인 화려함은 없었지만, 전략적으로는 막강한 존재감을 나타냈고, 이는 근대의 전함이나 현대의 핵무기의 그것과 궤를 같이한다. 괜히 영국이건 프랑스건 유럽 국가들이 전열함을 찍어낸 게 아니다. 소설 혼블로워를 보면 전열함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다.

골 때리는 점은 이렇게 항구 안에 처박혀서 아무것도 못하는 전열함들도 충분한 전략적 가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전열함들이 아무것도 못하고 항구에 처박혀 있었다고 해도 군항을 봉쇄하는 전열함들은 엄청난 유지비를 계속 퍼먹어야 했다. 프랑스 전열함들이 간단한 유지보수 정도만 하고 있을 때 영국 전열함들은 외해의 거친 바다에 시달리면서 승무원의 봉급, 식료품부터 활대, 목재, 돛, 삭구 같은 수많은 소모품들이 바다에서 빠르게 소모되었다. 이런 소모품들은 대부분 북유럽에서 간신히 구해온 값비싼 수입품들이었기 때문에 해군성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 지출에 돈을 대야만 했다. 소모재들만 사라진 게 아니라 외해에서 버티는 전열함 승무원은 사고나 질병 등으로 계속 죽어나갔기 때문에 수많은 함장들이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12]

5.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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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역작, 《전함 테메레르(The Fighting Temeraire)》[13]

목조범선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열함 시대도 철갑선이 등장함과 함께 그 끝이 보였다. 전열함에 증기기관을 결합한 기범선형 전열함이 등장하고 작열탄이 보급되자 전열함이나 프리깃에 철갑을 씌우는 철갑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범장은 석탄과 급수문제로 필수적인 요소였지만, 제국주의 시대가 무르익던 19세기에 세계의 주요 기항지에 석탄 저탄창과 급수 시설 네트워크가 구축되자 돛은 그저 손이 많이 가고 자리만 차지하는 짐이 되고 말았다. 아울러 보다 확실한 방어력을 위해 선체 전체를 금속화하는 후기형 철갑선이 등장하자 범장이 도태되었고, 단순한 목재 범장 전열함은 점점 쓸모없는 물건이 되었다. 철갑선 초기엔 철갑선으로 개조되는 사례라도 있었지만, 전금속 선체를 새로 뽑는 패러다임이 도입되자 전열함은 재활용도 안 되는 물건이 된 것. 애초에 주력이었던 시절에도 실전은 시궁창이었는데, 하물며 구식이 되고 나서는...

1862년 남북 전쟁에서 세계최초로 철갑 증기함끼리 전투가 있었다. 이 싸움의 주인공은 연방 해군의 USS 모니터와 연합 해군의 CSS 메리맥. 당시 화포로는 서로 장갑을 뚫을 수가 없어 충각 전술까지 써봤지만 승부가 나지 않아 결국 양쪽 모두 후퇴했다. 문제는 철갑선과 기존 범선간에 전투가 벌어지면 철갑선은 범선의 포탄을 튕겨버리지만,[14] 범선에는 철갑선의 포탄이 퍽퍽 들어가므로 철갑선이 압도적으로 이긴다는 점이다.

또한 회전포탑의 개발과 화약과 대포의 발전으로 더 먼 사거리를 가졌으면서도 압도적인 파괴력이 있는 대포와 포탄이 속속 개발되었고, 1866년에는 원시적인 어뢰도 등장하는 등 해상 무기의 발전이 진행됨에 따라 구시대의 전열함은 완전 무용지물이 되었고, 현대적인 드레드노트급 전함들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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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6년 리사 해전 기록화. 중앙의 함선이 오스트리아 해군의 카이저 함이며 주변을 둘러싼 함선들은 이탈리아 해군의 철갑함들이다.

예외는 있다. 1866년 보오전쟁 당시 리사 해전에 참전하였던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의 91문급 전열함인 SMS 카이저 함이 그 주인공이다. 당시 카이저 함은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신형 철갑함 4척에 포위당한 채 일방적으로 난타당했는데, 불리한 상황임에도 오히려 충각 돌격과 함포 포격으로 총 2척을 전투불능으로 만들고 생환했다. 위 유화가 바로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물론 이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며 카이저 함 역시 침몰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것에 가깝다. 여기에는 카이저 함 승조원들의 숙련된 조함 능력 외에도 운 역시 상당히 좌우했다. 특히 이탈리아 해군의 최신예 충각 철갑함으로서 회전 포탑에 300파운더 암스트롱포를 장비한 아폰다토레 함이 가장 큰 위협이었다. 카이저 함은 2차례에 걸친 아폰다토레 함의 충각 공격은 간신히 피했으나 주포에 단 한 차례 피격당한 것만으로 승조원 20명이 사상당하는 등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카이저 함의 대응 사격으로 인해 아폰다토레 함의 포탑이 고장나 후속 포격을 막을 수 있었고, 카이저 함이 분투하며 시간을 버는 동안 빌헬름 폰 테게토프 중장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본대의 철갑함들이 달려들어 이탈리아 해군을 패퇴시켰다. 리사 해전의 최종적인 승리 역시 결국은 철갑함들을 통해 이뤄진 것이었다.

6. 19세기 말 이후

다만 세로로 좁고 길게 만들 수밖에 없는 배의 구조상 여전히 군함에 설치되는 발사 무기의 화력은 배의 측면에 가장 집중되었으며, 따라서 전열 전술 자체는 1차 대전까지 계속 이어졌다. 회전포탑을 채용하였지만 여전히 현측포를 유지한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끼리 전형적인 전열 전술로 근접해서 싸웠던 쓰시마 해전 또한 좋은 예다.

세월이 흘러 포술의 발달에 힘입은 드레드노트급 전함과 협차 사격술의 등장으로 기존의 측면포대를 이용한 전열 전술은 사실상 종말을 고했지만, 주포의 사거리가 늘어나고 사격술이 바뀌었을 뿐이지 여전히 함선들끼리의 포격전에서 가장 유효한 대형은 함대의 화력을 모두 집중시킬 수 있는 전열 대형이었다. 그래서 전열 전술을 완전히 끝장낸 것은 1/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을 고사 위기로 밀어 넣었던 독일 제국 해군/크릭스마리네잠수함, 대서양에서 그 크릭스마리네를 때려 부수고 태평양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한 항공모함함재기, 태평양 전쟁 끝 무렵에 끔찍하고 무시무시하게 데뷔한 대함 미사일의 등장이었다.[15]
훈련함으로 사용되는 HMS 우스터 함[16]
1914년 5월 11일, 불타는 HMS 웰즐리. 아래에 언급된 블랙프린스급 전열함 웰즐리 함과는 다른 함선이다. 개칭 전 함명은 HMS 보스카웬이었다. 1844년에 74문급 3급 전열함으로 건조되었고, 특별한 이력 없이 1873년 퇴역하여 웰즐리 해양학교의 연습함으로 사용되었다. 1914년에 계류 도중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1932년, 예인선에 이끌려 영국 해군을 사열하며 HMS 빅토리의 곁을 지나가는 테메레르급 전열함 HMS 임플라커블. 트라팔가 해전에서 적으로 만났던 두 함선이 124년만에 재회하는 순간이다.
1급 전열함 HMS 빅토리와 고속전함 HMS 퀸 엘리자베스, 영국 해군의 근세와 현대를 상징하는 주력함 두 척이 나란히 담긴 영상. 1930년 포츠머스 항에서 촬영되었다.

더불어 대부분의 전열함들은 상부구조물을 들어내고 그 위에 창고식의 지붕을 얻어 창고선으로 사용하거나 수병들의 숙소 또는 훈련함으로 사용했고 이들 대부분은 함령이 1백 년 이상이 대부분이라 배 안에서 각종 퀴퀴한 냄새가 났다고 한다. HMS 빅토리도 이런 식으로 활용되다가 20세기 초반에 영국 내 시민단체들의 항의로 복원한 경우이다. 이 창고선들은 대부분 1950년대에 해저 방파제로 침몰당했으며 이는 영국군의 폭약실험에 많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몇몇 함선들은 건조된 지 150년이 다 되어가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활동했다. 뱅거급 전열함 웰즐리와 테메레르급 전열함인 임플라커블 호가 대표적으로, 웰즐리는 결국 루프트바페의 공습으로 침몰했고, 임플라커블은 석탄 창고로 활동하다가 전후인 1949년에 해체되었다. HMS 웰즐리는 역사상 가장 마지막으로 격침된 전열함이자, 유일무이한 항공 폭격으로 침몰한 전열함이다.

현재는 가장 유명한 1급함이며 호레이시오 넬슨 제독이 탑승한 배로도 유명한 HMS 빅토리(HMS Victory)가 유일한 전열함으로 남아있으며 현재 영국 해군의 함선 명부에도 올라와 있다. 가장 오랫동안 현역으로 남아 있는 군함이다. 물론 실제 전투 업무는 수행하지 않고 의장 임무만 맡고 있다. 현재 지상 건선거에 고정되어서 항해가 불가능한 상태이다. 실제 항해가 가능한 가장 오래된 현역함은 미국의 중프리깃인 USS 컨스티튜션이다.

7. 매체에서

근세를 다루고 있는 매체에서 바다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면 거의 무조건 등장한다. 보통 2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목조선으로 건조할 수 있는 최상급 화력을 지닌 전투력
2. 비싸고 느림

어찌 보면 현실의 전열함의 특성을 그대로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영화나 게임 같은 매체에 등장하는 전열함들은 신기할 정도로 승무원 수가 적어, 잘해야 100명 정도밖에 안 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전열함의 승무원 수는 엄청나게 많았으며 함포 수에 따라 다르지만(당연히 포가 많을수록 승무원도 많다) 함포가 100문인 대형 전함의 경우 승무원은 대략 천 명이다.

7.1. 대항해시대 시리즈

북해 해역에서 발전도 및 무장도가 높고 조선소가 있는 도시에서 건조할 수 있다. 북해에서 만들 수 있는 종결급 선박 중에서 스쿠너/바크/바켄틴/쉽이 올라운드형이라면 전열함은 전투에 특화된 선박이다.
조선소가 있는 유럽 항구에서 건조할 수 있으며, 오스만을 제외한 유럽 6개국 본거지에선 각 군별 공용 선체가 있다면 그 선체로 된 전열함을 만들 수 있다.
장갑전열함은 유럽의 일부 항구 및 6개국 개척지에서도 전열함과 같은 조건으로 건조할 수 있으며, 렙제는 36/24/64로 서비스 초반에는 전열함의 상위 선박이었다.
이후 티에라 아메리나카 확장팩에선 일등전열함이 추가됐으며 렙제는 40/26/69다. 일등전열함은 오스만을 제외한 각국 본거지에서만 건조된다.

일반 전열함은 운항 조건이 모험/교역/전투 순으로 16/8/52레벨이라 캐쉬 선박이 많이 풀리기 전에는 처음으로 타는 선측포 5슬롯 선박에 스펙도 서비스 초반 기준으로는 매우 좋았으나 후속 선박들이 계속 출시되면서 주류 선박에선 밀려났고, 장갑전열함과 일등전열함도 마찬가지다. 이후 상위 전열함[18]이 계속 출시되며 게임 내 전열함의 맥을 잇고 있다.

일반 전열함만 해도 폭풍 간지이기에 초창기에는 전열함을 모는게 전투유저의 로망이었다.

서양 선박 건조단계가 20티어일 때 조선소가 있는 유럽 항구[19]에서 건조할 수 있다. 운항 시 패널티를 받지 않는 레벨은 모험/교역/전투 순으로 34/34/68이다.

7.2. 기타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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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8. 목록

9. 전열함시대의 주요 무장

10. 관련 문서


[1] 기존의 군용 갤리온과 비교하면 지브가 없어서 일반적인 사각돛을 사용하였지만 선미루(함교)가 낮아진 전열함의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2] 후미가 높은 갤리온의 특성이 강하던 초기형과 달리 후미가 낮아져 근대 범선의 특징인 평탄형 선체를 가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3] 1812년에 취역한 작은 범선인 1대 오하이오 다음으로 해당 이름이 붙은 2대 오하이오다. 3대 오하이오는 메인급 전함 3번 함 BB-12 오하이오이며 4대 오하이오는 몬태나급 전함 2번 함 BB-68 오하이오(취소), 5대 오하이오는 오하이오급 전략원잠 1번 함 SSGN-726 오하이오.[4] 쉽게 이야기하면 예전 대포는 상대 군함을 단숨에 격침시키기는 어려워서 2차 대전 당시의 전함처럼 3연장 포탑 3~4개 정도의 포만 운용했다가는 도저히 격침 자체가 불가능해 현측에다 대포로 도배를 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사실 격침도 힘들었을뿐더러 격침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정부에서 지급해 주는 나포 보상금이 엄청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해전에서는 격침까지 갈 것도 없이 승조원 손실로 지친 쪽이 항복하고, 한때 적이었던 서로 간에 힘을 합쳐 배를 보수하던 것이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나포된 순간 배의 지휘권은 넘어갔는데 전투가 끝났을 때 배는 만신창이이니 다시 땅을 밟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배를 고치는 방법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5] 조선같은 경우 포격은 상대 선박의 전투력을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갔으며 이렇게 무력화된 배를 불화살이나 주화로 불태우는 방식으로 처리했다.[6] 지금도 그렇지만 군함을 건조하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과 긴 시간이 소모되므로 금방 수리해서 투입할 수 있는 나포함의 가치는 상당히 컸다. 군함 건조로 인해 영국에서는 목재가 될 나무가 씨가 말라서 북미의 삼림지대에 의존하는 판이었고 당연히 비용도 그만큼 올라서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요즘 군함은 나포해도 무기체계나 운용 방식이 낯설어 바로 투입할 수 없으나 이 시대는 그러한 점들이 거의 똑같았으므로 가능했던 것이다.[7] 웃기게도 후자의 경우 육군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18세기에 들어서는 해군보다는 낫다고 해도 당시 병은 박봉에 업무강도도 높고 위험한 직종이었던 터라 딱히 충성심도 없어서, 패전한 측의 포로들이 즉시 적국의 군대에 편입되는 일이 많았다.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8] 반대로 철갑선 시대 이후에는 배의 측면이 약점이 된다.[9] 가만히 서 있으면 상대 전열이 아군 후미를 타고 들어가서 T자형으로 두들기려고 할 테니 서로 꼬리잡기 형태로 빙빙 돌게 된다.[10] 전열전술이 일어날 때 가장 먼저 포격을 맞는 것도, 가장 많이 맞는 것도 선봉에 있는 배들이고. 다음이 가장 후미에 있는 배들이다. 따라서 가장 강력한 배는 최선봉에 있는 배로, 주로 기함이 그 역할을 했고 부제독이 탄 두 번째로 강한 배는 가장 후열에 있는 배였다. 가운데에는 상대적으로 약하고 신참승무원들이 탄 배들을 배치했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 제독이 적 전열의 중앙을 공격한 것도 적의 이러한 약점을 공략하여 일정한 피해를 감수해 적의 전선을 분단하여 한번에 전투를 마무리 지은 것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이런 중앙돌파 전술을 숙련된 해병과 제독들이 있는 함대에 시도하는 건 자살행위이며 이러다 패전을 겪은 제독도 많았다. 배를 잃거나 패전하면 재판에 회부하는 건 일반적이지만 대개 무죄판결을 받게 되는데 이런 전술을 사용하다 패전했을 경우 거의 예외 없이 사형에 처했다. 즉 도박수다. 넬슨은 드뇌브의 함대를 쫓아 지중해부터 아메리카까지 몇 번이나 낚여서 이동했던 터라 화가 머리끝까지 나있었고 자국의 해병과 해군의 힘을 믿고 있었기에 불리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중앙돌파를 선택했고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는 이에 대응하지 못해 함대가 전멸해 버렸다. 당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숙련도 부족도 문제였지만, 임무자체가 넬슨에게서 도망치는 걸로 배정되어 있는 상태라 전투에 휩쓸리지 않은 멀쩡한 배들이 응전하느냐 도주하느냐로 의견이 갈려서 제대로 대응조차 못했다. 만약 다른 배들이 르두터블처럼 악다구니처럼 응전했으면 결코 완승을 거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11]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나포 상금이었다.[12] 당시 수병을 납치 모집하는 건 함장의 책임이었기 때문에 수병이 한 명 죽어나가면 함장은 그만큼 숫자를 채워야 하니 부담될 수밖에 없었다. 신병이면 그나마 다행인데 숙련 수병이 죽었다면 뭐...[13]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14] 훗날에 나올 성능 좋은 포탄들도 동급의 함선끼리 붙으면 튕겨내거나 막아버리는데 하물며 구형 포탄으로는 어림도 없었다.[15] 독일의 프리츠 X는 대함 미사일이라기보다는 활공 유도식 항공폭탄에 가까웠다.[16] 우스터 함의 원래 함명은 HMS 로열 소버린으로, 1833년에 전통적인 범선형 1급 전열함으로 설계되어 제작에 들어갔다. 그러나 19세기의 급격한 해군 발전 속도로 인해 수 번의 건조 중단과 설계 변경, 함명 개칭을 거쳐 건조 시작 27년 만인 1860년에야 HMS 프레데릭 윌리엄이란 이름의 기범선형 전열함으로 완성되어 1864년에 취역한다. 무장은 30문의 8인치 포와 54문의 32파운더 포, 2문의 68파운더 포로, 나폴레옹 전쟁기였으면 대적할 이가 없을 정도의 중포들을 86문이나 장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고작 12년의 현역 생활을 하고 1876년 퇴역, HMS 우스터란 이름으로 다시 개칭되어 템스강 해양훈련대학에 연습함으로 보내져 1948년까지 수십만 명의 해군사관생도 및 예비 상선사관들을 교육하는 장으로 활용되었다. 1948년에 침수되어 강바닥에 착저했고, 5년 뒤인 1953년에 건져져 해체되었다. 위 영상은 British Pathé의 기록보관소의 한 구석에서 2019년에 발견되었다. 필름에는 아무런 정보도 적혀 있지 않아 위 영상이 촬영된 정확한 시기는 불명이다.[17] 세비야, 리스본, 베네치아, 마르세이유, 암스테르담, 런던[18] 실존했던 유명 전열함 이름을 붙였다.[19] 런던, 도버, 플리머스, 칼레, 암스테르담, 브리스틀, 상트페테르부르크, 쾨벤하운, 마르세유, 나폴리, 베네치아, 제노바[20] 사진은 미션 중 잡게 되는 쥘리앵 뒤 카스의 배 엘 알카 델 마에스트로(마에스트로의 방주). 기본적인 맨오워와 모델링은 같다.[21] 물론 이는 블랙 펄 호의 선원들이 불사의 좀비 선원인지라 그런 것이며, 저주가 풀리자 역으로 제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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