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해군의 원자력 잠수함에 대한 내용은 드레드노트급 잠수함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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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급의 유래가 된 전함 드레드노트 |
1. 개요
Dreadnought-class Battleship20세기 초반에 주류가 되었던 전함의 함급. 함급 분류 기호는 전함과 동일한 BB를 사용한다.
1906년에 영국이 HMS 드레드노트를 진수하면서 속도와 화력 등 여러 면에서 혁신적인 개념과 성능을 보여주었고, 각국에서 유사한 성능의 전함을 앞다투어 건조함으로써 드레드노트 등장 이전의 전함들은 도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드레드노트급은 이후 전함의 표준 모델이 되었으며, 거함거포주의를 본격적으로 태동시켰다. 여러모로 세계 해군력의 역사에서 큰 분수령을 이루는 전함.
쉽게 표현하면, '전함'이란 존재 자체는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전부터 있었지만, 흔히 아는 그 전함의 이미지인 결전병기, 거함거포주의 등은 드레드노트급에서 확정되었다.
드레드노트급이 나온 이후에 전함의 주포 구경이 12인치 (305mm)를 초과하면서 종합전투력이 증가하자 해당 전함들을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전함의 함급이지만 드레드노트급이라고만 표기할 경우에는 순양전함같은 유사 함급에도 붙을 수 있다. 드레드노트급 순양전함이라는 표현도 가능한 것이다.
2. 태동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 함대의 주력을 담당하던 시절의 전함은 함포 조준 및 사격술의 발달 미비로 인해 주포의 장거리 사격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어서 최대 속력으로 적 군함에 근접하여 중간포와 부포를 난사하여 적 군함에 손상을 입힘으로서 느려지게 만든 후 2000야드 (1,828.8m) 라는 초근접 거리에서 주포를 발사하여 마무리 타격을 주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주포 자체는 원거리에서도 사격을 하긴 했지만 워낙 명중률이 안좋으니 보통은 목표와의 거리 측정용으로 사용했고 로또급 확률로 적 군함에 직격탄이 나는 것을 기대하는 수준 정도였다.이러한 전투 방식은 당대에도 상당히 불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장갑순양함이 거대해지고 강력해질 뿐 아니라 어뢰도 발전해서 2000야드 (1,828.8m) 수준의 초근접거리라면 명중을 기대해봐도 좋을 수준이 되었다. 그리고 영국의 퍼시 스콧(Percy Scott)과 미국의 윌리엄 심스 (William Sims)가 각각 독자적으로 주도한 포술의 발전으로 인해 189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의 함포의 교전거리도 상당히 증가하여 6,000야드(5,500m)까지 확장되었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후기형 장갑순양함이 전드레드노트급 전함보다 종합적인 면에서 우월해진다는 점이다. 후기형 장갑순양함은 전함의 중간포를 주포로 채택하고 전함과 비슷한 배수량을 가지며 장갑이 줄어든 대신 동력기관이 늘어난 형태다. 그래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과 후기형 장갑순양함이 교전을 벌일 경우 전드레드노트급 전함보다 우월한 속력과 속도지속능력으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의 주포는 아직 명중률이 떨어지지만 장갑순양함의 함포들은 명중률이 높아지는 거리까지 근접한 후 사격을 개시해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의 중간포와 부포를 무력화하고 상부구조물에 화재를 발생시켜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의 조준을 방해한 후에 2000야드 (1,828.8m) 근방까지 초근접해서 어뢰를 날리고 후퇴할 경우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은 주포를 제대로 사용도 못해보고 어뢰에 맞아서 격침당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여기에 대응하여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 자신의 중간포와 부포를 사격하려고 해도 주포와 주포탑에 투자한 배수량이 많기 때문에 후기형 장갑순양함에 비해 중간포와 부포의 숫자가 적은데다가 속도에서 열세이므로 수동적인 전투로 진행되기 때문에 상당히 쉽게 제압당한다.
그렇다면 어차피 포술도 발전했으므로 주포를 기존보다 원거리에서부터 사격해보자는 판단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실제로는 매우 어려웠다. 함포 사격시에 목표에 포탄이 도달했는지의 여부를 알고 조준을 다시 수정하려면 직격탄으로 발생하는 연기와 지근탄으로 발생하는 물기둥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데 실제로 이렇게 하려면 주포가 사격할 때는 중간포와 부포가 사격하지 말아야 하며 반대로 중간포와 부포가 사격하면 주포가 사격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표에 발생하는 연기와 목표 주변의 물기둥이 과연 주포의 것인지 중간포의 것인지 부포의 것인지 알 수 없으므로 조준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게다가 실전에서는 적 군함보다 1발이라도 더 쏴서 먼저 타격을 입히는 쪽이 더 유리해지므로 한가롭게 주포 사격 후에 명중을 확인하고 조준을 수정한 후 다시 사격하는 동안 걸리는 긴 시간을 낭비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실제로 그렇게 하면 상대방의 중간포와 부포에 난타당해서 개박살날 가능성도 높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미 전포거포함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1903년에 이탈리아의 군함 설계자인 비토리오 에밀리오 쿠니베르티 (Vittorio Emilio Cuniberti)가 전포거포함에 대한 아이디어를 이탈리아 왕립 해군에 제출했다가 반려당하자 제인스 출판사가 발행하는 군함 연감에 기사를 올린 것이다. 해당 연감에서 비토리오 에밀리오 쿠니베르티는 배수량 17000톤에 단장 주포탑과 2연장 주포탑을 섞어서 총 8개의 주포탑에 12문의 12인치 (305mm) 주포를 장비하고 12인치 (305mm) 측면 주장갑을 장착하며 24노트 (44km/h)로 항행가능한 전함을 일명 이상적인 전함 (ideal battleship) 이라는 명칭으로 영국의 신형 전함 계획안으로 제시했다. 해당 안건은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의 중간포와 부포 자리를 주포로 교체한 수준이었으나 전포거포함에 대한 최초의 구체적인 계획안이었다.
물론 매우 권위있는 연감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일개 출판사에 실린 기사가 열강의 해군들에게 정식으로 채택될 리는 없었다. 그러나 당대 해군국인 영국 해군, 미국 해군, 일본 제국 해군은 각자 독자적인 방법으로 해당 아이디어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인다.
영국 해군의 경우에는 영국 해군 최후의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인 로드 넬슨급 전함을 건조하면서 어뢰정 격퇴용 3인치 (76mm) 속사포만 남기고 부포인 6인치(152mm)를 폐지하고 중간포인 9.2인치(234mm)로 부포 화력을 통일하면서 이상적인 전함과 비슷한 구조를 채택하였으나 모든 주포와 부포를 12인치 (305mm)로 통일하자는 것은 일단 거부한다.
미국의 경우에는 나중에 미국 최초의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되는 사우스캐롤라이나급 전함을 건조하기 시작했으나 설계안 확정이 늦어지고 진행도 느려져서 최초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아직 증기 터빈과 관련 기술력이 없다시피해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에서 쓰이던 3단 팽창식 왕복 피스톤 증기엔진을 사용해서 속도가 느리므로 모든 주포를 선체 중심선에 배치하고 계단식 배치를 했다는 장점과 전드레드노트급 전함과 같은 수준의 느린 속도를 가졌다는 단점이 공존하게 된다.
일본의 경우에는 사쓰마급 전함을 건조하기 시작했으나 예산 부족 및 12인치 (305mm) 주포를 충분하게 조달해야 하는 문제가 터졌고 자체적인 기술력도 부족해서 결국 12인치 2연장 주포탑 4기를 선체 중심선에 배치하는 설계안을 포기하고 영국의 로드 넬슨급 전함과 비슷한 최후기형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일본은 쓰시마 해전의 당사자면서도 교훈을 활용하지 못해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에도 집중했고 드레드노트가 데뷔한 뒤에도 예산이 부족하고 쓰시마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도고 헤이하치로의 반대도 작렬하여 카와치급 전함처럼 12인치 (305mm) 45구경장과 50구경장 함포를 주포로 혼용하는 망작까지 나온다. 결국 동맹관계였던 영국의 도움을 받아 공고급 순양전함의 완성품과 설계도, 건조 장비, 제조기술 전수까지 받으면서 야마토급 전함까지 이어지는 전함 계보를 이어갔다. 한편 일본은 쓰시마 해전을 통해 엉뚱하게 함대결전사상을 착안해냈고 이것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패망의 길로 인도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1884년에 찰스 앨저넌 파슨스 (Charles Algernon Parsons)가 개발한 증기 터빈이 1894년에 만든 실험선인 터비니아(Turbinia)에 장착된 후 1897년에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스핏헤드 관함식 (Spithead Review)에 무단으로 난입하여 고속성능을 보인 것에 영국 왕실과 영국 해군이 감탄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래서 1899년에는 영국 해군으로부터 신형 구축함 바이퍼 함(HMS Viper)와 코브라 함(HMS Cobra)의 수주를 따내게 되었고 해당 구축함들의 속력이 좋자 1905년에는 영국 해군이 앞으로 도입할 군함은 터빈 추진식이 될 것임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러일전쟁의 황해 해전과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제국 해군이 러시아 해군의 발트함대에게 승리하면서 해당 해전의 교훈을 당시 참관했던 장교 및 각개의 전문가와 함께 존 피셔 제독이 심층적으로 논의하게 된다. 여기서 윌리엄 파켄햄 (William Pakenham) 대위는 일본의 주력함들이 14,000야드 (13,000m) 수준의 장거리에서 12인치 (305mm) 함포를 러시아 군함에게 명중시켜서 큰 타격을 주는 반면에 러시아 주력함의 10인치 (254mm) 함포는 목표에 도달하지 않거나 명중해도 타격이 별로 없었다는 점을 말했다. 그래서 존 피셔 제독은 도고 헤이하치로의 T자 전법과 고속함대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신의 아이디어인 12인치 (305mm) 주포를 보유하고 21노트 (39km/h)로 항행가능한 새로운 전함에 대한 구체적인 안건을 확인하고 개선하며 실제로 만들어보기로 결정한다.
3. 건조
존 피셔 제독이 드레드노트급 전함에 대한 기본적인 설계 구상은 있었고 1900년대 초부터 각종 시안을 제안하고 있었으나 순양전함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 생각한 안건들은 후기형 장갑순양함의 발전형 수준이라서 실제로 개선해야 할 점이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그리고 당대의 대영제국의 상황에 맞추어서 기존의 조선소와 도크에서 건조 가능할 수준으로 배수량과 크기를 억제해야 할 필요도 충분했다.그래서 존 피셔 제독은 1904년 초에 전함의 이상적인 특성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비공식 고문들의 모임을 소집했고 1904년 10월 20일에 존 피셔 제독이 제1해군경에 임명되자 영국 해군은 차기 전함을 12인치 (305mm) 주포를 보유하고 21노트 (39km/h)로 항행가능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05년 1월에 존 피셔 제독은 앞서 언급한 비공식 고문들을 포함하여 설계 위원회를 소집하여 다양한 설계 제안을 평가하고 세부 설계 과정을 지원하게 한다.
설계 위원회는 존 피셔 제독이 해당 위원회의 모든 위원을 임명하고 스스로 위원장을 담당하는 것도 모자라서 명목상은 독립적인 위치에 있으나 실제로는 영국 해군성이 이미 결정한 것 이외의 옵션을 고려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존 피셔 제독과 영국 해군성 위원회에 대한 비판을 회피하는 방패 역할을 수행했다.
이것만 보면 어딘가의 어용 위원회같지만 실제로 설계 위원회가 한 일은 많았다. 설계 위원회가 1905년 2월 22일에 활동을 마치고 해체될 때까지 연구한 항목은 공격력 측면에서는 주포와 주포탑의 배치를 결정할 때 모든 주포탑을 선체 중심선에 위치시키고 주포탑을 계단식으로 배치하는 안에 대해서는 주포탑 천정 근방에 개방식으로 설치된 조준경이 주포 발사 화염과 충격으로 손상될 위험성이 있어서 거부했고 어뢰정 격퇴용 속사포의 구경과 종류를 결정하였다. 방어력 측면에서는 어뢰 명중시 침수에 대비하기 위한 종방향 격벽을 채택하였으며 수중에서의 폭발로 탄약고와 양탄실을 보호하는 장갑을 추가했고 배수량 증가를 막기 위해 측면 주장갑을 1인치 (25mm) 줄였다. 주행력 측면에서는 고속성능 향상과 배수량 1,100톤 절약을 위해 증기 터빈을 채택하고 스크류 프로펠러 추진축도 최대 6기까지 고려하였다.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한 설계 위원회가 1905년 3월에 최종 조사 보고서를 올리자 일단 신형 군함을 만드는 것이므로 드레드노트의 건조 및 시험이 완료될 때까지 다른 주력함에 대한 주문을 연기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설계안이 만들어질 때마다 선체의 형태를 영국 해군성의 실험용 선박 수조에서 실험하였는데 그 결과로 최종적인 선체의 형태를 결정하는데만 설계안이 7번이나 바뀌었다. 설계가 확정된 후에는 3명의 보조 설계자와 13명의 제도사로 구성된 팀이 세부 도면을 작성하였으며 군함의 건조 속도를 올리기 위해 내부의 선체 구조는 최대한 단순화하고 철판이나 구조재 같은 것도 두께만 다른 형태이고 나머지는 동일한 표준 형태로 통일해보려는 노력도 들어갔다.
이런 우여곡절끝에 드레드노트는 1905년 10월 2일부터 시공이 이루어져서 1906년 2월 10일에 진수가 이루어지고 1906년 12월 2일에 취역하게 된다. 최초의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만들어진 것이다.
4. 특징
16세기 이후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힘입어서 군함도 범선에서 철갑선으로 변화하면서 과도기에 수많은 실험적인 형태의 함선이 등장했다. 이후 함포의 사정거리 증가와 함선의 속도증가에 비해 사격 및 조준문제가 대두되었으므로 결국 주포를 2연장 주포탑 2기 정도로 제한하고, 다수의 중간포와 부포를 두는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으로 완성되었다. 흔히 말하는 전드, 전노급 전함이 바로 이런 전함이다. 일단 드레드노트 이전급 전함은 영국을 포함한 각국 해군의 전통과 요청에 부응했기 때문에 그 이후 한동안은 뚜렷한 설계 컨셉이 없이 기존의 범선 설계 방식을 고수하는 방향으로 제작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경향을 깬 것이 드레드노트다.드레드노트는 우선 기준 배수량이 1만 7000톤이 넘는다. 그러면서 속도도 21노트로 당시 기준으로는 빠른데다, 정해진 배수량을 '최대한 전투에 효율적인 방향으로' 설계하려는 시도의 정점에 달한 최초의 함선이다.
당시로서는 주포를 2 - 4문 장착하는 함선이 많던 시점에 2연장 12인치 주포탑을 5기 장착하여 주포를 10문이나 장착하므로 새로 도입된 일제 사격시 다른 나라 함선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모든 점에서 이름대로 두려운 게 없는(Dread[두려워하다] + Nought[없다, 아니다]) 함선이었고, 다른 나라들에는 '공포의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그 이후 모든 국가들의 함선 표준 규격으로 취급되어 항공기의 성능이 함선을 압도할 때까지 그 뒤를 이은 수많은 함선들이 탄생했다.
4.1. 전포거포함
드레드노트의 가장 큰 혁신점은 전포거포함을 통해서 협차사격을 본격적으로 시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드레드노트급 이전의 주력 전함들은 대구경 ~ 소구경의 함포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주력은 역시 대구경 함포였으나 장전속도가 느렸고, 전함간의 교전도 이후의 해전과 비교하면 비교적 짧은 편이었기에 대구경 함포의 재장전이라는 그 공백을 중구경, 소구경 함포의 속사로 메우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럴 경우 당연히도 각 구경마다 사거리도 다르고 분산계도 다 다르다. 그렇기에 목표를 향한 각 포대의 수정사격은 있었을지언정 전 함포에 의한 일제사격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다.
대구경 화포는 적에게 더 장거리에서 큰 타격을 가할 수 있지만 단거리에서는 느린 연사속도로 인해 의외로 적합하지 않았고, 당시에는 각각의 포탑에서 자기 대포에서 쏜 포탄이 어디로 날아가는지를 눈으로 보면서 조준해 가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장거리에서의 명중률은 극히 낮았다. 실제로 영국 해군에서도 장거리 포격 시험 이후 장거리 포격은 전혀 쓸모없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물론 이 결론을 평가하려면 넬슨 이래로 육박전을 전통으로 하는 영국 해군의 성향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실제로 장거리 포격에 여러 난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장거리 포격에서는 내 포탄이 어디쯤 떨어졌는지를 알기 위해서만도 특별한 관측기구가 필요하고, 설령 그런 관측기구를 갖춘다고 해도 어떤 착탄흔적이 어느 포탑에서 발사한 포탄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또한 각 포탑마다 이러한 기구를 갖추거나 포탑의 인원들이 그러한 기구를 다루고 포탄의 궤도를 계산할 전문지식을 갖추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각 전함들은 장거리용 주포 이외에도 중거리에서 대응가능한 중간포와 단거리에서 대응할 수 있는 부포 등 여러 종류를 갖추었고, 대구경 화포는 2 - 4문에 불과하여 근거리에서 치명타를 먹이는 역할을 담당하는 등 비중이 낮은 편이었다.
그런데 드레드노트급의 등장으로 이러한 것이 깨졌다. 드레드노트급은 이러한 기존구성을 타파하여 중구경 함포인 중간포와 부포들을 모조리 철거하고 동일구경의 대구경 함포만을 다수 탑재하고 소구경의 부포는 대공포, 적 보조함 상대용 등 보조로 사용하는 All-big-gun이라는 개념을 선보였다. 이로서 주력함포인 대구경 함포의 탄착 수정이 유일한 사격목표가 되었고 그제서야 본격적인 협차사격이 가능해졌다.
All-big-gun은 단지 큰 대포를 많이 달아서 화력이 강하다는 정도가 아니다. 협차사격을 통해 장거리에서 조준해서 명중시킬 수 있다면 다양한 전투거리를 위한 여러 구경의 대포들을 갖출 필요도 없어지고, 모든 포탑의 화포를 동일한 종류로 통일하는 편이 함교에서 지시한 조준이 포탑에 동일하게 적용되도록 하기에도 더 적합했다. 게다가 모든 포탑들이 동질적이라면 포탑 간의 탄착점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므로 훨씬 장거리에서 쉽게 탄착점을 찾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4.2. 협차사격
전포거포함이 되었으므로 협차사격의 방식으로 각 포의 각자 조준 - 각자 발사 대신, 전투함교의 명령에 따라 동일한 사격 제원으로 명령에 따라 주포를 발사한다.동일한 구경과 성능의 주포이므로, 이론상 발사된 포탄은 거의 비슷한 착탄점을 가진다. 물론 이론상일 뿐 실제로는 여러 문제로 인해 착탄점이 다르다. 일부만 열겨해봐도 정지 상태에서 쏠리는 없으므로 이동하면서 생기는 함체의 진동과 주포의 마모도, 포탄과 장약의 무게 차이등이 있고 특히 2연장 포탑의 간섭 문제의 경우에는 2연장 포탑에서 동시에 발사를 하게 되면 진동으로 인해 서로의 포탄에 영향을 줘서 살포계가 엉망이 된다.[1]
하지만 이는 영국도 설계하기 이전부터 알고는 있었고. 어차피 함포의 개별 탄착군을 식별해서 수정하기가 불가능이라 일제사격으로 쏘고 수정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어찌됐든 간에 전함의 사격은 각 포가 개별 조준해 쏘는 방식이 아닌, 중앙 지휘소가 계산한 확률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격 방식을 Straddle, 협차라 한다.
사실 장거리 포격이 해전의 미래가 될 것이란 사실은 각국의 해군 관계자들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어뢰나 포의 사거리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중 ~ 근거리 포격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에서 섣불리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전함 1척에 드는 막대한 비용이었다. 뭔가 혁신적인 시도를 해보려 해도 그 혁신이 실패했을 경우 천문학적인 비용이 증발하게 된다. 그래서 어지간한 나라는 대세를 따라가는 편이었고 식민지를 전세계에 가지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해군에 압도적인 투자를 하는 영국 정도나 할 수 있을 발상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영국 해군의 제1해군경 존 피셔 제독은 당시 벌어진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 등의 결과를 보며 앞으로의 해전이 장거리 전투가 될 것이라 확신했으며, 승리의 요인은 전함의 빠른 속도와 대구경 포의 화력과 사거리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후 피셔가 12인치 (305mm) 함포를 주포로 갖추고 21노트(39km/h) 속도를 낼 수 있는 전함을 요구하여 1906년 HMS 드레드노트가 건조되었는데, 이 배가 드레드노트급의 시발점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은 함교의 지휘에 따라서 전체 포탑이 일제 사격을 하는 방식을 채택했는데, 사실 이 자체는 삽질이었다. 어차피 개별 포탑에서 각각 조준하고 사격하는 이상 포탑마다 가능한 최대의 속도로 발사하는 편이 효율적이므로 함교의 발사 신호를 기다릴 이유가 없고, 동시에 사격하면 어느 착탄흔적이 어느 포탑의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질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셔 제독은 이 사례로부터 사격 지휘 전체를 함교에서 맡는 방식을 착안했다. 개별 포탑이 각자 조준해서 사격하고 착탄흔적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함교에서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장교들이 조준/발사 명령을 포탑들에 하달하는 것이다. 함선 전체 단위로 관측기구를 갖추고 함교의 전문적인 장교들이 관측과 계산을 실시해서 조준함으로써 이전보다 훨씬 장거리에서 적함을 명중시킬 수도 있었다. 여기서부터 협차사격의 기본이 탄생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제대로 된 사격통제장치가 등장하는데 사격용 방위반(方位盤)이다. 드라이어 사격통제장치 (Dreyer Fire Control Table)라고 불리는 방위반은 각종 거리측정기에서 모아진 데이터를 빠르게 정리하고 목표의 위치, 방향, 속도를 결정한 후 사격제원을 전선을 통해 각각의 주포탑에 빠르게 전달해서 동시에 일제 사격을 가능하게 하는 장비였다.
사격통제장치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협차사격의 신속성과 효율이 결정되기 때문에 영국도 1차대전 시기까지는 드라이어 사격통제장치의 존재 여부 자체가 기밀이었으며 수출용 군함은 당연하게도 드라이어 사격통제장치를 장착하지 않았고 애초부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열강들은 스스로 알아서 사격통제장치를 개발해야 했으며 미국은 비밀 스파이 활동으로 영국의 기술력을 빼내왔고 일본은 전간기에 영국으로부터 구식 기술력을 구입했으며 독일은 1차대전에서 패배할 때까지 사격통제장치를 완성하지 못했다. 열강의 각국이 사격통제장치를 갖추게 된 것은 전간기 중반이 지날 무렵이었으며 각 국가별로 성능간 편차와 신뢰성 차이가 심했다.
4.3. 중간포와 부포의 폐지
전함은 홀로 작전에 나서지 않으므로 접근해올 수 있는 소형 고속함정은 호위함대에 속해 있는 순양함이나 구축함이 처리한다. 전함은 동급의 전함을 최우선적으로 상대하며, 필요하다면 그 이하의 순양전함이나 중순양함과 같은 주력함을 상대한다.그래서 어뢰정 상대용 속사포만 남기고 중간포와 부포를 폐지하여 배수량을 낭비하고 피격시 유폭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구역을 최소화하였으며, 지휘통제 입장에서도 최우선 목표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4.4. 대응방어
상대하는 적 전함은 나와 동등하다고 간주하고, 적의 공격을 버티고 싸울 수 있을 정도의 중장갑을 갖추는 대응방어개념을 확립하고 방수 구획을 설치한다.해당 개념은 전함이 발전할수록 측면 방어 뿐 아니라 갑판도 방어하는 것을 중시하다가 집중방어 개념이 도입되는 등 수많은 발전작이 나오지만 기본적인 토대는 유지되었다.
4.5. 고속화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도록 왕복식 증기기관 대신 증기터빈을 사용한다. 여기에 화력이 좋은 중유보일러를 사용하려는 계획도 세웠지만, 당시 기술적 문제 및 석탄은 영국 본토에 얼마든지 있지만 석유는 (언제 공급이 끊어질지 모를)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는 등 여러가지 사정으로 석탄 보일러가 탑재되었다.그러나 전함의 속도에 대한 요구는 계속 이어졌고 결국 중유를 전문적으로 연소하는 보일러가 도입되면서 고속전함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5. 한계점
물론 신기술의 집대성인 프로토타입 성격을 가지므로 후대의 전함들처럼 모든 주포탑을 중심선상에 배치한 것이 아니라 3개만 함체 중심선에 배치하고 2개는 양 뱃전에 배치했기 때문에 모든 주포탑을 단일 목표에 지향할 수는 없었다. 동일 목표에 대한 조준은 주포탑 4개 8문이 한계라는 약점을 지닌다.이미 드레드노트를 건조할 때부터 선체 중심선에 모든 주포탑을 배치하는 것과 주포탑을 계단식 형태로 배치하는 것은 이미 제안된 바 있었고 몇 가지 문제점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거절당한 바 있었다. 그래서 영국 해군에서 이런 배치가 완전히 개선된 것은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오리온급 전함부터다. 순양전함의 경우 인빈시블급 순양전함에서 앙 애슐론(en echelon) 방식 배치를 통하여 부분적으로 해결했다.
그리고 해전이 벌어질 때 서로 다른 두 척의 전함이 동일한 목표를 공격하는 경우, 어느 탄착점이 어느 전함의 포격에 의한 것인지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의 조준을 방해하는 결과가 된다. 이 때문에 각각의 전함이 서로 다른 목표를 조준하는 것이 기본이었고, 유틀란트 해전 등에서 신호가 꼬인 영국 순양전함 부대에서 두 순양전함이 서로 같은 목표를 조준하면서 실제로 서로의 사격을 방해하는 일을 겪기도 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포탄에 염료를 탑재하여 해수면에 착탄할 경우 물기둥에 색을 입히게 만들어서 구분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당연히 전함마다 다른 색의 염료를 사용해서 물기둥의 색을 다르게 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부터는 다시 부포가 부활했는데 그 이유는 점점 대형화하는 구축함의 돌격 및 뇌격을 막으려면 고작 3인치 (76mm) 수준의 속사포로는 상대가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구축함이나 경순양함 상대용으로 5인치 (127mm)에서 6인치 (152mm)급의 부포가 탑재되기 시작했고 항공력의 발달로 인해 대구경 대공포도 탑재되다가 나중에 양자를 합친 양용포가 등장하게 된다.
드레드노트급 자체의 문제는 아니지만 해당 함급의 등장으로 이전의 전드레드노트급 전함같은 주력함들이 순식간에 퇴물이 된 것도 문제였다. 사실 드레드노트 이전의 전함들로 군비경쟁을 하려 해도 영국이 이미 상당한 척수를 보유하여 경쟁이 어려웠지만, 드레드노트급 신형전함들이라면 영국도 몇 척 없으니 경쟁할 여지가 있었다. 실제로 독일 제국이 '해군법'을 제정하여 급격한 해군 군비확장에 나서면서 영국과 건함 경쟁이 벌어졌다.
애초부터 드레드노트의 건조 배경 중 하나가 군함 건조비용 절약이었으나 결과물은 안 그래도 비쌌던 전함의 건조비가 더욱 치솟아서 대량으로 건조한다면 국가재정이 파탄날까 걱정할 정도였다. 처음에 영국에서 드레드노트를 만들 때는 "드레드노트급이 있으면 이제 전함 숫자가 좀 적어도 다른 나라를 압도할 수 있을 테니 돈 좀 아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존의 구식전함을 모두 없는 셈치고 처음부터 군비경쟁을 할 수 있게 되어 다른 나라들도 속속 드레드노트를 따라한 새로운 전함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오히려 전함 건조비용만 엄청나게 높아지는 결과가 되었다. 사실 영국에서 드레드노트가 처음 건조될 때도 같은 우려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군사적 가치를 잃은 '드레드노트 이전의 전함'을 제일 많이 보유한 나라는 다름 아닌 영국이었으니... 그럼에도 다른 누군가가 먼저 혁신적인 전함을 만들어내 영국의 해상전력을 무력화하는 것보다는 앞서 나가는 것이 나았다.
결국 드레드노트가 등장한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15년간 영국이 건조한 드레드노트급과 그 이상의 전함과 순양전함은 수십척에 달했다. 독일 제국과 미국, 일본 제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다른 열강들도 해군력 확충에 나서면서 각국은 전함 건조비용 때문에 국가 재정에 심각한 압박을 받았다. 이런 무모한 건함 경쟁이 결국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는 판단 하에 각 열강들은 1921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6. 평가
이렇게 해서 모든 주포탑에 동일한 대구경 화포를 장착하고 대응방어를 도입하고 증기 터빈을 도입하여 드레드노트가 건조되었다. 그리하여 기존의 다른 전함들보다 1.사정거리, 2.명중률, 3.화력, 4.방어력, 5.기동성까지 뛰어난 신개념 전함이 탄생한 셈이었다.따라서 드레드노트급이 만들어진 후 그 때까지 건조/운용되던 모든 전함들의 군사적 가치와 위상은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당대에는 밑바닥으로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세계의 해군력 자체가 드레드노트급의 등장으로 0부터 다시 시작했다고 여기는 반응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본래 전쟁사에서는 드레드노트와 같은 획기적인 신형 장비가 등장해도, 당장은 바로 이전까지의 기존 장비로도 물량의 우위나 운용 방식의 개선 등의 방법을 통해 질적 격차의 만회가 가능한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당시 드레드노트급의 경우엔 그러한 만회의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겼을 만큼 드레드노트가 획기적인 장비였다는 의미이다.
이를 두고 국내의 모 경제신문 편집 위원은 돈을 처바른 그녀의 등장으로 최신 유행이 하루 아침에 구식으로 전락했다는 재치있는 말로 표현했다.기사
7. 말로
미합중국 해군의 USS Texas(BB-35) |
영국식 분류로는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이지만 미국식 분류로는 드레드노트급 전함이다 |
이후로는 1910년 HMS 오라이언의 진수 당시 오라이언의 정보를 입수한 영국 기자가 드레드노트를 뛰어넘는(주로 주포 구경이) 배라는 의미로 사용한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드레드노트급들은 1차대전과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거치는 과정에서 폐기되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전함들은 모두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과 후속 전함들이었다.
HMS 드레드노트함 자체는 새로운 함종의 시초가 되었으나 더 성능이 좋은 후속 군함들에게 밀려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이미 사실상 2선급 전함이 되었으며 1915년 3월 18일에 독일 해군의 잠수함 U-29를 충각 공격한 것이 유일한 격침 전과였고 1919년에 퇴역하여 1923년에 해체되었다. HMS 빅토리처럼 기념함으로 보존할 수도 있었지만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주력함 보유 배수량 쿼터에 드레드노트가 들어가면서 다른 전함들을 살리기 위해 해체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8. 드레드노트의 배수량별 목록
- 만재 배수량 기준
8.1. 프리 드레드노트급(전노급)
8.2. 드레드노트급(노급)
제조/운용국 | 함급 | 만재/상비배수량 | 기준배수량 | 취역 | 속력 |
스페인 | 에스파냐급 전함[10] | 16,450톤 | 15,700톤 | 1913년 10월 13일 | 19.5 |
미국 | 사우스캐롤라이나급 전함 | 17,900톤 | 16,000톤 | 1910년 3월 1일 | 18.9 |
독일 | 나사우급 전함 | 21,000톤 | 18,570톤 | 1909년 10월 1일 | 20.2 |
영국 | HMS 드레드노트 | 21,060톤 | 18,410톤 | 1906년 12월 2일 | 21 |
오스트리아-헝가리 | 테게토프급 전함 | 21,595톤 | 20,013톤 | 1912년 10월 6일 | 20.3 |
이탈리아 | 단테 알리기에리급 전함 | 21,600톤 | 19,500톤 | 1913년 1월 15일 | 22 |
일본 | 카와치급 전함 | 21,787톤 | 21,157톤 | 1914년 9월 10일 | 21 |
영국 | 벨레로폰급 전함 | 22,102톤 | 18,800톤 | 1909년 2월 20일 | 21 |
영국 | 넵튠급 전함 | 22,680톤 | 19,680톤 | 1911년 1월 11일 | 21 |
미국 | 플로리다급 전함 | 23,033톤 | 21,825톤 | 1911년 8월 31일 | 20.7 |
영국/브라질 | 미나스제라이스급 전함 | 21,200톤 | - | 1910년 4월 18일 | 21 |
영국 | 세인트 빈센트급 전함[11] | 23,200톤 | 19,560톤 | 1910년 | 21 |
독일 | 헬골란트급 전함 | 24,700톤 | 22,808톤 | 1911년 8월 1일 | 20.5 |
러시아 | 임페라트리차 마리야급 전함 | 25,039톤 | - | 1915년 6월 10일 | 21 |
프랑스 | 쿠르베급 전함 | 25,175톤 | 23,103톤 | 1913년 11월 19일 | 21 |
영국 | 에린급 전함 | 25,250톤 | 22,780톤 | 1914년 8월 1일 | 21 |
이탈리아 | 콘테 디 카보우르급 전함 | 25,489톤 | 23,458톤 | 1915년 4월 1일 | 21.5[12] |
러시아 | 강구트급 전함 | 25,850톤 | 23,288톤 | 1915년 1월 11일 | 24.1 |
독일 | 카이저급 전함 | 27,000톤 | 24,724톤 | 1912년 8월 1일 | 21 |
영국 | 킹 조지 5세급 전함(1911) | 27,120톤 | 25,830톤 | 1912년 11월 16일 | 21 |
미국 | 와이오밍급 전함 | 27,680톤 | 26,000톤 | 1912년 9월 25일 | 20.5 |
독일 | 쾨니히급 전함 | 28,600톤 | 25,796톤 | 1914년 8월 10일 | 21.5 |
미국/아르헨티나 | 리바다비아급 전함 | 30,100톤 | 27,500톤 | 1914년 8월 27일 | 22.5 |
영국 | HMS 애진코트 | 30,860톤 | 27,850톤 | 1914년 8월 7일 | 22 |
8.3. 슈퍼 드레드노트급(초노급)
제조/운용국 | 함급 | 만재/상비배수량 | 기준배수량 | 취역 | 속력 |
영국 | 오라이언급 전함 | 25,870톤 | 22,274톤 | 1912년 1월 2일 | 21 |
프랑스 | 브르타뉴급 전함 | 26,000톤 | 23,558톤 | 1916년 2월 10일 | 20 |
미국 | 뉴욕급 전함 | 28,367톤[13] | 27,000톤[14] | 1914년 5월 15일 | 21 |
미국 | 네바다급 전함 | 28,400톤[15] | 27,500톤[16] | 1916년 3월 11일 | 20.5 |
영국 | 아이언 듀크급 전함 | 30,030톤 | 25,000톤 | 1912년 1월 12일 | 21.25 |
일본 | 후소급 전함 | 30,600톤[17] | 29,326톤[18] | 1915년 11월 8일 | 22.5[19] |
영국 | 리벤지급 전함 | 31,500톤[20] | 29,150톤 | 1916년 3월 | 23 |
일본 | 이세급 전함 | 32,062톤[21] | 29,900톤[22] | 1917년 12월 15일 | 23[23] |
독일 | 바이에른급 전함 | 32,200톤 | 28,530톤 | 1916년 3월 18일 | 21 |
미국 | 펜실베이니아급 전함 | 32,429톤[24] | 29,626톤[25] | 1916년 6월 12일 | 21 |
영국 |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 33,000톤[26] | 29,150톤[27] | 1914년 12월 22일 | 25 |
미국 | 테네시급 전함 | 33,190톤[28] | 32,300톤 | 1920년 6월 3일 | 21[29] |
미국 | 뉴멕시코급 전함 | 33,530톤 | 32,514톤 | 1918년 5월 20일 | 21 |
일본 | 나가토급 전함 | 33,759톤[30] | 32,720톤[31] | 1920년 11월 25일 | 26.5[32] |
미국 | 콜로라도급 전함 | 34,130톤 | 33,100톤 | 1921년 7월 21일[33] | 21 |
9. 조약형 및 탈조약형 전함
1921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1930년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체결로 어느 정도 진정 기미를 보이던 건함 경쟁이 다시금 불붙기 시작하여 조약 아래에서 건조된 전함과 조약에서 벗어난 전함이 건조되었다.9.1. 목록
제조/운용국 | 함급 | 만재/상비배수량[34] | 기준배수량 | 취역 | 속력 |
영국 | 넬슨급 전함 | 38,390톤 | 33,800톤 | 1927년 8월 15일 | 23[35] |
영국 | 킹 조지 5세급 전함(1940) | 42,237톤[36] | 38,031톤[37] | 1940년 10월 1일 | 28[38] |
미국 |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 45,233톤 | 39,285톤 | 1942년 3월 20일 | 27.5 |
미국 |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 45,519톤[39] | 37,188톤 | 1941년 4월 9일 | 27[40] |
이탈리아 | 리토리오급 전함 | 46,215톤 | 41,650톤 | 1940년 5월 6일 | 30[41] |
프랑스 | 리슐리외급 전함 | 48,950톤 | 37,450톤 | 1940년 4월 1일 | 30[42] |
영국 | HMS 뱅가드 | 52,250톤 | 45,200톤 | 1946년 8월 9일 | 30[43] |
독일 | 비스마르크급 전함 | 52,600톤 | 42,900톤 | 1940년 8월 24일 | 29[44] |
미국 | 아이오와급 전함 | 58,464톤 | 49,202톤 | 1943년 2월 22일 | 33[45] |
일본 | 야마토급 전함 | 72,800톤 | 64,000톤 | 1941년 12월 16일 | 27[46] |
10. 서브컬쳐에서의 등장
초기의 드레드노트급 전함은 이전 군함보다 크면서도 아기자기한 모습이 남아 있어 꽤 멋있다는 평을 듣는다. 그래서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를 다룬 영상 작품에 배경으로 종종 등장한다.대체역사 작품에서도 흔히 등장한다. 주로 주인공이 선점하여 만들어서 최종보스나 다름없는 영국의 해군력을 무력화시키는 용도. 다만 선체 중심선에서 어긋나 있는 주포탑 위치를 수정하거나 3연장포를 도입해 주포탑 숫자를 줄이며, 계단식으로 선수에 2기, 선미에 2기씩 주포탑을 배치하고 양용포를 탑재하는 등 가능한 한 테게토프급 전함이나 그 이후의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 컨셉으로 건조하는 경우가 흔하다.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 충무공 이순신급이라는 이름으로 건조하여 일본을 압박했다.
- '제국의 보나파르트'에서는 프랑스가 실제 역사보다 25년이나 빠르게 개발했다. 게다가 배수량은 3만 톤에 황제가 3연장 3기를 명령했고 아닌 척 하지만 황제보다 더 미쳐 있는 해군 제독들은 4연장포를 만들어 가져왔을 정도. 당연히 온갖 기술 습득을 감행해야 했으며 진수 후에도 6년 동안 테스트를 하고서야 실전배치 되었는데, 황제가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꾸준히 국력을 투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고서도 내파성을 잡지 못해 원양항해가 위험한 결함전함이었지만 싸우는 장소가 도버 해협이었기에 문제없었다.
사실 주인공은 이제 영국의 전함 전력이 무력화되어 대대적인 건함 경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딱히 성과가 증명되지 않았기에 놀라울 정도로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대신 프랑스가 드레드노트급을 독점한 상황이 되어, 총 5척이 건조되어 개전 첫날 영국 본토함대의 전함 수십척을 쓸어버린다. 함명이 잔다르크급이었기에 이후 성녀급으로 불리며 군비 경쟁의 단초가 된다. 정작 군축조약 맺은 후에는, 일부러 함선 숫자만 제한하고 배수량과 함포 구경에는 제한을 두지 않았기에 다들 제한된 숫자의 전함에 돈을 쏟아부어 호화판 전함을 만들고 있는 와중에 잔다르크급은 갑판 깔아서 항공모함 테스트 해본 후 해체했다. 한 척만 핵포탄 투발용으로 남겨놓았다.
- 카이저를 구했다에서는 독일 제국에서 먼저 만들어 아르헨티나 사태에서 위력을 과시했다. 다만 위협사격이라고 쏜 게 그만 초탄에 직격해버리는 병크를 저질렀는데, 타국들은 독일놈들이 독일했다고 생각하며 독일제 신형 전함의 사거리와 명중율에 경악한다.
- 재벌3세의 월스트리트에서는 미국이 선점했다. 주인공의 악우인 루즈벨트 대통령이 주인공의 성을 따서 디트로이트급으로 명명하려다가 실패. 핑계를 삼은 도시 디트로이트도 미해군 네이밍 전통에 맞지 않고 내륙도시라 연관성도 애매했다.
실제 역사에서의 드레드노트는 신개념을 제시한 것 치고는 군비경쟁에 의해 빠르게 구식화되어 1차대전에서조차 2선급이었는데, 여기서는 등장하자마자 단독으로 스페인 제국 함대를 쓸어버리고 뒤이어 일본 제국에도 쳐들어가 스페인과 일본, 두 제국을 몰락시킨 전함이 되었다.
11. 기타
일본에서는 드레드노트급을 노(弩)급, 슈퍼 드레드노트급을 초노(超弩)급이라고 부른다. 弩를 일본어로는 '도'라고 읽기 때문이다. 해당 한자는 일본에서 발음이 같은 한자를 차용한 것이다. '도'의 어원은 '드레드노트'의 일본식 발음인 '도레도노-또'의 첫 글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자로 '弩'를 쓰지 않고 가타카나로 'ド'급이라고 쓰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노(弩)는 쇠뇌 계열의 활중 고대 ~ 중세에 성벽이나 군함 같은 곳에 설치해서 대포처럼 사용하던 거대한 것을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므로 한자로 약간이나마 뜻이 이어진다.한국의 오래된 번역서적에서도 '도급전함', '초도급전함' 등의 표현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47] 일본 가공전기에서는 극히 드물게 'D급 전함', 'SD(Super D)급 전함'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원어로는 드레드노트다 보니, 한국에서는 초노급 등을 초드급으로 번역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48] 사실 제대로 번역하려면 노급은 드레드노트급, 초노급은 슈퍼 드레드노트급이라고 번역하는게 맞다. 그러나 만화책 번역의 경우에는 말풍선의 제약도 있으므로 힘들다. 한글 위키백과에는 '프리 드레드노트=전(前)노급 전함, 드레드노트=노급 전함, 슈퍼 드레드노트=초노급 전함'이라는 분류법으로 항목이 작성되어 있다. 이 구분법의 출처는 두산 엔싸이버백과사전이다.
여기서 유래되어 일본에서 '도(ド)~' 라는 접두어는 위 문단에서 설명했듯 '쇠뇌 노(弩)' 자로, '기존의 것보다 확연히 거대한, 우수한, 초월적인~' 같은 비교급 느낌으로 쓰인다. 슈퍼로봇대전 시리즈의 정신기인 '근성'의 상위 정신기인 '도근성(ド根性)' 같은 것이 그 예시. 하지만 접두어 '도'는 칸사이 지역에서 1906년 이전에도 쓰였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드레드노트에서 유래한다고 볼 수 없다. #
드레드노트급의 등장으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들이 무의미해졌다고 하지만 이는 다른 드레드노트급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이지 보다 체급이 작은 경순양함 이하의 적함들은 정면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즉 전드레드노트급 전함도 전함을 보유하지 못한 국가에 대한 압박에는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애초에 그런 약소국들은 굳이 전함까지 내보내지 않아도 순양함 선에서 충분히 압박을 가할 수 있었고, 전함을 출동시킬 만큼 큰 사건이라면 다른 해군강국들도 전함을 내보내어 결국 전함끼리의 대립이 되는데다가 비효율적이고 인원이 많이 필요해서 유지비가 엄청나므로 사실상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전함은 현대전에서 사라졌지만 드레드노트라는 이름은 1963년에 취역한 영국 해군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에 계승되었다.
이 드레드노트급에서 이름이 유래된 드레드노투스라는 용각류가 있다.
12. 미래형 드레드노트(드레드노트 2050)
드레드노트 2050의 개념도 |
영국 국방부의 싱크 탱크 프로젝트인 스타트 포인트(Startpoint)에서 발표한 155m 규모의 미래 함선의 컨셉이다.
아크릴-그래핀 복합 소재로 이루어져 있는 핵융합을 동력으로 삼은 워터제트[49] 추진 선박으로 연료는 해수에서 추출한 중수소다.
레일건 함포, 극초음속 미사일, 300노트 이상의 초고속 어뢰로 무장되어 있으며, 각종 UUV와 UAV가 탑재되어 있으며, 이를 이용해 탐지거리가 비약적으로 상승이 가능하다.
드레드노트 2050의 함교 상상도 |
뛰어난 자동화가 되어 있어, 승조원은 최대 0 ~ 50명이다. 단 0명은 무선조종이며, 이 경우 조종 거리가 수천 km로 제한된다고 한다.
항행중인 드레드노트 2050의 상상도 |
영국에서는 빨라야 2050년에 건조가 시작될 것으로 보고 있으며 만일 이대로만 나와준다면, 과거의 드레드노트처럼 함선계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꿀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3. 관련 문서
[1] 해결 방법은 각 포당 발사시간을 미세하게 차이를 주고 포간의 거리를 띄우면 된다.[2] http://en.wikipedia.org/wiki/Brandenburg-class_battleship[3] http://en.wikipedia.org/wiki/Russian_battleship_Navarin[4] https://en.m.wikipedia.org/wiki/Kaiser_Friedrich_III-class_battleship[5] http://en.wikipedia.org/wiki/Russian_battleship_Tri_Sviatitelia[6] https://en.wikipedia.org/wiki/Regina_Elena-class_battleship[7] https://en.wikipedia.org/wiki/Royal_Sovereign-class_battleship[8] http://en.wikipedia.org/wiki/Virginia-class_battleship[9] https://en.wikipedia.org/wiki/Danton-class_battleship[10] https://en.m.wikipedia.org/wiki/España-class_battleship[11] http://en.wikipedia.org/wiki/St._Vincent-class_battleship[12] 대개장후 27노트, 자매함 줄리오 체자레가 28.24노트에 도달한 적이 있다.[13] 대개장 후 34,000톤[14] 대개장 후 29,810톤[15] 대개장 후 33,901톤[16] 대개장 후 30,500톤[17] 대개장 후 39,154톤[18] 대개장 후 34,700톤[19] 대개장후 24.5노트[20] 대개장 후 33,500톤[21] 대개장 후 38,682톤[22] 대개장 후 35,350톤[23] 대개장후 25.4노트[24] 대개장 후 38,659톤[25] 대개장 후 35,400톤[26] 대개장 후 36,565톤[27] 대개장 후 32,468톤[28] 대개장 후 40,400톤[29] 개장 이후 배수량이 크게 늘어나고 함체의 노후화로 인해 20.5노트로 떨어졌다.[30] 대개장 후 43,580톤[31] 대개장 후 39,130톤[32] 과부하시 27노트에 도달한 적이 있으나 대개장 후 구식 전함들과 발을 맞춘답시고 일부러 25노트로 속도를 낮춤[33] 메릴랜드 취역일.[34] 미터 단위의 톤으로 기재함.[35] 자매함 로드니가 최대 23.8노트에 도달한 적이 있다.[36] 1944년 개장 후 44,460톤[37] 1944년 개장 후 39,100톤[38] 과부하 시 29.25노트[39] 1945년 개장 후 47,520톤[40] 과부하 시 28노트[41] 과부하 시 31.4노트[42] 과부하 시 32.63노트[43] 과부하 시 31.57노트[44] 과부하 시 30.8노트[45] 만재배수량시에도 30노트 유지, 과부하 시 35.4노트[46] 과부하 시 28.5노트[47] NHK의 예능 ‘치코짱에게 혼난다’에 이 표현에 대한 설명이 나왔다.[48] 한국어로는 弩가 '드' 발음이 나는 것이 아니므로 적절치는 않다.[49] 예상 순항 속도는 50노트(92km/h)로 구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