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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20:37:15

쓰시마 해전

러일전쟁
육전 해전
뤼순 공방전 203고지 전투 봉천 전투 황해 해전 쓰시마 해전

<colcolor=#000> 쓰시마 해전
Цусимское Сражение
Цусимское морское сражение
[ruby(日本海海戦, ruby=にほんかいかいせん)]
[ruby(対馬海戦, ruby=つしまかいせん)]
러일전쟁의 일부
날짜 1905년 5월 27일 - 28일
장소

쓰시마 해협
교전국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러시아 제국|]]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일본 제국|]]
지휘관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니콜라이 네보가토프
오스카르 엔크비스트
도고 헤이하치로
가미무라 히코노조
가토 도모사부로
아키야마 사네유키
전력 전함 8척
순양함 8척
구축함 9척
해방함 3척
총 37척
전함 4척
순양함 27척
구축함 21척
어뢰정 및 기타 함선 37척
총 89척
피해 규모 5,380명 전사
5,917명 부상
전함 6척 침몰
해방함 1척 침몰
기타 군함 14척 침몰
포로 6,106명
7척 나포
6척 무장 해제
117명 전사
583명 부상
어뢰정 3척 침몰
결과일본 제국 해군 압승
러시아 발트 함대태평양 함대와해

1. 개요2. 배경3. 발트 함대의 극동원정
3.1. 준비3.2. 이동
4. 일본의 준비5.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머나먼 길6. 전투 개시7. 전투 결과
7.1. 일본군의 노획함선 편입
8. 해전 이후9. 기타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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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제국 해군일본 제국 해군이 벌인 해전을 말한다. 일본의 함대가 대한해협 즈음에서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격멸했다. 이 결과로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이 대한제국을 통치하는 결과를 낳고 일본의 국제적 위상이 약진하게 된다.

쓰시마 해전은 당시까지 세계 최대 규모의 해전이었다. 이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유틀란트 해전,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레이테 해전이 그 기록을 차례로 경신하며 '세계 최대의 해전'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대한해협 해전으로 부르는 이들도 있으나 실제로는 한반도규슈 사이의 바다를 포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해협에서 쓰시마 섬과 일본 본토 사이의 해역인 동부 해협에서 벌어졌으니 쓰시마 해전이 옳다. 이는 한국에서도 일부에서만 지칭하는 명칭이었고, 국제적으로 이는 전혀 쓰이지 않는 명칭이다. 무엇보다 한국 전쟁 때 일어난 대한해협 해전과 혼동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반면 일본에서는 도주한 러시아 군함들을 추적하여 동해상 곳곳에서 소탕한 것까지 포함하여 "일본해 해전"이란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된다. 한국 내 일부에서 사용된 동해 해전은 일본해 해전을 그냥 말만 바꾼 것.

2. 배경

러일전쟁 발발과 동시에 러시아의 주요 군항 뤼순이 기습받아 태평양 함대는 큰 타격을 받아 사실상 항구에 봉쇄된 상태였다. 이와 같은 상황을 보고받은 러시아 정부는 태평양 함대의 봉쇄를 타파하고 제해권을 완벽히 장악하기 위한 획기적인 대책을 강구했다.

그것은 바로 본국으로부터의 증원함대였다. 러시아는 당시 태평양 함대 외에 흑해발트 해에 함대를 두고 있었는데,[1] 흑해 함대는 오스만 제국을 견제해야 하는데다, 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해협의 군함 통과를 다른 열강이 용납하지 않아서 투입이 불가능했다.

결국 러시아는 최후의 카드인 발트 함대를 꺼내들게 되었다.

표트르 1세에 의해 창설되어, 지난 수백 년간 러시아의 가장 막강한 해상전력으로 군림해온 히든 카드의 투입이었다.

3. 발트 함대의 극동원정

3.1. 준비

러시아는 해군 중장 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을 총사령관으로 하고, 발트 함대를 제2태평양 함대로 개칭했다. 당연히 기존의 태평양 함대는 제1태평양 함대로 개칭되었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1877~78년에 있었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크고 작은 공훈을 세웠으며, 세계 최강의 해군을 가진 영국에 해군무관으로 파견되어 신식 해군에 대한 이해도도 높은 편이었다. 이후 차르의 눈에 들어 주요 해군 관련 행사에는 늘 참여하여 성공적으로 함포사격 시범이나 해상기동을 선보인 인물이었다. 거기에 개인적으로도 부패와 거리가 멀었고, 부하들을 아껴 곤궁한 부하들에게 자기 봉급을 일부 떼어줄 정도이니 수병들의 존경심도 높았다. 즉, 인선 자체는 상당히 괜찮은 인물이였다.

기본 전략은 간단했다. 투입 가능한 배는 머나먼 극동으로 모조리 보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뒤, 잔존한 제1태평양 함대 전력과 합세한다. 이후 압도적인 해상전력을 바탕으로 일본군 함대를 격파 내지는 못해도 공세적 작전은 못하게끔 하여 제해권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러면 본토에서 주 전장인 만주까지 해상을 통한 보급로에 의존해야 하는 일본군은 보급로가 마비될 것이고, 일본의 해운도 붕괴되어 알아서 GG칠 것이 분명했다.

3.2. 이동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ttle_of_Japan_Sea_%28Route_of_Baltic_Fleet%29_NT.png


미카사 기념관에서 제공하는 발트 함대의 여정 영상.

결론부터 말하자면 말 그대로 세계일주였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없어서 스웨덴노르웨이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프랑스령 말리가봉독일령 나미비아네덜란드령 남아프리카마다가스카르영국령 실론 섬말레이시아프랑스령 베트남미국령 필리핀타이완 섬청나라대한제국에 이르는 엄청난 대장정을 해야만 했다.

1904년 10월 14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의 리바우 항에서 출발한 제2태평양 함대가 마침내 10월 15일, 크론 슈타트 해군기지를 떠나 일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차르는 로제스트벤스키에게 노후함들을 수리하여 제3태평양 함대를 편성해 증원시킬 것을 약속했고, 이후 이 함대가 합류했을 때 제2태평양 함대의 총 전력은 전함 7척, 순양함 7척, 보조순양함 5척, 구축함 9척등 총 28척의 전투함과 26척의 수송함 그리고 승무원 14,000명으로, 당대의 대함대였다.

하지만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대형 사고를 치는데, 11월에 도거 뱅크 해역에서 발트 함대가 엄한 어선단에 포격을 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당시 러시아 첩보기구에는 일본군 어뢰정이 유럽에 도착해서 함대의 주요 행선지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할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온 상태였다. 일본 해군의 어뢰정에게는 단독으론 유럽까지 갈 능력이 없었으니 당연히 헛소리였으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러시아 함대는 극히 조심스러워했고, 결국 북해에서 물고기 잡고 있던 영국 어선들에게 쾅! 거기다 사건이 벌어진 당시에는 야간이어서 함정식별이 어두웠고, 하필이면 어선의 기동이 영락없이 어뢰정에 의한 전함 측면 뇌격 시도와 흡사했기 때문에 오해할만 했다. 이로 인해 외교문제가 발생했으나, 그 외에는 별 일 없이 항해했다. 이후 스페인의 비고에서 함대가 나뉘어진다.

이후 이동은 나름 순조로워 함대는 11월 6일 탕헤르를 통과, 11월 12일 프랑스령 다카르(1960년 독립한 세네갈의 수도)에 도착하여 보급을 마친 후 계속 항해하여 12월 1일 리브르빌, 12월 초중순에 그레이트피시만과 뤼데리츠를 거쳐 12월 29일 마다가스카르 인근의 생트마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1905년 3월 16일, 함대는 생트마리 인근의 노지베 섬에서 출발한다. 즉,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고작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까지 무려 두달 반이나 걸렸단 소린데, 배후에는 뒷사정이 있었다. 사실 노지베에 도착한 것은 1월 초순이였으며, 함대는 이곳에서 뤼순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비보를 들었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발트 함대는 이곳에서 2개월 동안 발목을 잡히게 되는데, 그 원인은 연료 보급 문제였다. 제2태평양 함대는 독일의 함부르크-아메리카 석탄선(하팍로이드)과 전속 계약을 맺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계약이 노지베 섬에서 만료되었다. 그러나 독일이 계약 연장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옴으로써, 함대는 계약이 체결될 2개월 동안 꼼짝없이 발이 묶이고 만 것이다. 열대의 더위와 익숙하지 않은 음식, 그리고 풍토병과 맞서 싸우던 함대의 장병들에게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였다.

우여곡적 끝에 노지베를 출발한 함대는 뒤이어 분견대와 합류하여 4월 8일에 말라카 해협에 도달했고, 4월 14일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의 깜란항에 도착해 다시 석탄 등을 보급받았다. 5월 9일에는 제3태평양 함대와 합류하여 총 38척으로 늘어났으며, 깜란항에서 98km 북쪽에 있는 반퐁 항에 다시 기항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 지구를 반바퀴 돌아올 때까지 탈락한 함선이 하나도 없었다는 이유로 로제스트벤스키에 대한 인정은 세계적으로 매우 높았다고 한다.

러시아를 견제하던 영국이 발트 함대의 수에즈 운하 통행을 거부함에 따라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가는 수개월의 여정을 해야 했고, 결국 진이 빠져 쓰시마 해전에서 참패하고 말았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오해로, 영국의 견제가 아닌 러시아 해군이 보유한 전함의 실제 흘수선수에즈 운하의 당시 통항 제한 수심보다 깊었기 때문에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나중에 추가로 파견된 러시아 군함들은 규모가 작아서 수에즈 운하를 잘 통과했다.[2]

또한 일본 해군 역시도 보유한 전함이 대부분 영국제였는데 역시 선체 규격이 수에즈 운하의 규격보다 커서 일본으로 회항할 때는 희망봉을 통과해야 했다.[3]

4. 일본의 준비

일본 연합함대의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발트 함대가 무사히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면 전쟁에서 절대 못 이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일본 제국이 전쟁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초반 기습에 의한 절대적인 제해권 확보에 있었다. 만약 발트 함대가 온전히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다면 그 절대적 제해권은 단번에 무너지며, 일본 함대로는 승리를 보장할 수 없었다.

다행히 발트 함대가 마다가스카르에 머무르고 있던 1905년 1월 뤼순 공방전의 결과로 뤼순이 함락되고 태평양 함대의 잔존 세력이 모두 무너지면서 도고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우선 태평양 함대와 발트 함대의 합류를 막아내어 상대해야 하는 전력을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발트 함대가 오는 동안 일본 함대는 대대적인 정비와 수리를 통해 최후의 일전을 시도할 수 있었다.

도고와 아키야마 사네유키 연합함대 선임참모, 가토 도모사부로 연합함대 참모장, 시마무라 하야오 제2함대 2전대 사령관은 발트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가기 전에 격파해야 승산이 있다고 봤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온 함대가 정상적일 리는 없다. 보급에도 문제가 있고, 선박들도 어느 정도 정비가 필요하지만 그런 문제는 블라디보스토크 입항 이전에는 해결될 수 없다. 즉, 입항 이전에 러시아 함대와 조우하면 이 먼곳을 돌아온 함대는 악조건 속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일본 함대는 자국 영해나 그 근처에서 전투를 진행함으로 최상의 조건에서 교전이 가능했다. 그리하여 아키야마 사네유키 연합함대 선임참모는 7단 전법[4] 즉 러시아 발트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입항하기 전 세부적인 7개 대책으로 나누어 격파하려는 작전을 도입해 실시를 준비한다.

5.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머나먼 길

제2·3태평양 함대의 총괄 지휘권을 쥔 로제스트벤스키는 반퐁항을 출발하기 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 위한 항로를 두고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기함 '수보로프'호에 주요 사령관과 함장을 불러모아 작전 회의를 열었다.

결국 모든 것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하느냐 이를 막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이 점에서는 도고가 불리한 상황에 있었다. 로제스트벤스키에게는 3개의 선택지가 있었고, 도고는 방어하는 입장으로서 그 3개 중 하나를 고르고 천운에 맡겨야 했다.

그 3개는 각각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대한해협, 혼슈홋카이도 사이의 쓰가루 해협, 홋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에 있는 소야(宗谷)해협이었다.[5] 이 3개를 모두 틀어막기에는 일본 함대의 전력이 부족했다. 함대를 분산했다가는 각개격파만 당하고 러시아 함대는 그대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할 것이 분명했다.

소야 해협으로 들어서자는 의견과 큐슈, 시코쿠, 혼슈 연안을 공격하면서 쓰가루 해협을 통과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대부분의 참모진의 의견은 일거에 대한 해협 - 쓰시마 해협을 통과하는 것이였으며, 이미 함대가 지구 반바퀴 수준인 2만 8천8백km을 항해해와서 모두가 지쳐있어 전투력이 크게 떨어져있던 걸 알고 있던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의 선택 또한 대한 해협 - 쓰시마 해협이었다. 나머지 2개의 대안에 비하면 거리가 가장 짧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깜라인만 출항 이후 더 이상 보급받을 수 없는 석탄 문제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는 증기선 시대였고, 러시아의 해외 식민지가 전무한 상태에서 석탄 보급은 함대의 운명이 걸린 문제였다. 당시 로제스트벤스키의 생각은 전쟁에서 소야 해협과 쓰가루 해협으로 일본열도를 빙 돌아서 가는것은 과거 한니발, 나폴레옹의 알프스원정처럼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지구 반 바퀴 도는 동안에는 동맹국인 프랑스 항구에서 석탄을 보급받았지만, 이마저도 프랑스의 다른 동맹국인 영국의 압력으로 여의치 않았다. 영국이 방해를 한 이유는 영일동맹을 맺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서의 어선 포격 사건의 보복도 겸했다. 물론 러시아도 자체적인 석탄 보급선을 운용하기는 했지만 이 역시 석탄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했다. 대신 로제스트벤스키는 일부 함선을 다른 곳으로 보내어 상선단속 활동을 벌여 일본측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기만전술을 썼다.

이로 인해 소야 해협과 대한 해협을 놓고 고심 중이던 일본 진영 참모진들은 대부분 발트 함대의 항선지를 소야 해협으로 예상하고 거기를 지키기로 결정했으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생각은 달랐고, 또한 확고했다. 그는 참모진의 결정을 뒤엎고 대한 해협(정확히는 대한제국진해)에 함대[6]를 배치했다. 그러나 러시아 함대가 출현하지 않자,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대본영에 쓰가루 해협으로 이동하고자 한다며 허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대본영은 좀 더 기다려보자며 도고를 달랬고, 그 직후 러시아 함대의 석탄보급선이 상하이시에 입항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석탄보급선이 함대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것은 러시아 함대가 최단 루트를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도고 제독은 전 함대를 진해만에 집결시키고 일전을 기다렸다. 한편 5월 17일에 반퐁항을 출발하여 대한해협으로 향하던 제2태평양 함대는 전투를 피하기로 결정하고 5월 25일경엔 속력도 늦추고 무전도 끊었으며, 마침 쓰시마 해협에 짙게 낀 안개와 야음을 틈타 모든 함정의 탐조등도 끈 채 대한 해협 통과를 시도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결정이 당시 해전 역사상 가장 큰 패배를 불러오게 되었다.

6. 전투 개시

함형 러시아 일본
제1 태평양 함대[8] 제2 태평양 함대[9] 연합함대
전함 7 8 15 6
장갑순양함 4 1 5 8
연안 방어 장갑함 - 3 3 -
장갑함 계 11 12 23 16
순양함 7 8 15 15
구축함 및 어뢰정 37 9 46 63
5월 27일 새벽 2시 45분경, 경순양함 시나노마루(信濃丸)[10]가 발트 함대의 병원선인 '오룔호'[11]가 짙은 안개 속에서 밝게 켠 등불을 발견했다. 이를 은밀히 관측하던 시나노마루는 4시경, 대규모 러시아 함대를 확인하고 급히 본대에 타전했다.

러시아 함대 발견 소식을 들은 도고는 즉시 전 함대 출함명령을 내렸다. 출함 당시 아래 황국의 흥패와 같은 명문장인 아키야마 사네유키 연합함대 선임참모가 작성한 전보를 내려 출함시 사기를 고양하였다.
"금일 하늘은 맑고 파도는 높다."[12]

조심스레 러시아 함대를 추적하던 일본 해군 연합함대는 러시아 함대가 해협의 병목지역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오후 1시 55분, 도고는 기함 미카사에 전투개시를 알리며, Z기를 게양했다.[13]
"황국의 흥폐, 이 전투에 달려 있다. 각 대원은 한층 분발 노력하라."[14]


해전 승리를 기념하는 군가 일본해해전(日本海海戦). 소개된 음원의 1분 47초에서 1분 56초 사이에 당시 기함 미카사의 전투개시 신호의 내용이 가사로 활용되어 있다.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74d96d3c.jpg
쓰시마 해전 당시 T자 진형의 모습.

가로 방향으로 기동하는 일본 연합함대는 대부분의 군함들이 측면 방향으로, 집중적인 함포 사격을 퍼부을 수 있었지만, 세로 방향으로 기동하는 러시아 발트함대는 선두의 소수 군함들만이, 그것도 선수포만 쏠 수 있는 불리한 조건에서 싸워야 했음을 볼 수 있다. 요컨대 화력의 집중력, 규모 측면에서 일본 연합함대가 월등히 우세한 조건을 차지했던 것.

원래 도고는 어뢰정을 중심으로 하는 전법을 쓰려 했으나 해협의 거센 풍랑으로 소형함인 어뢰정의 작전이 어려웠다. 대신 도고는 아키야마 사네유키 연합함대 선임참모가토 도모사부로 연합함대 참모장, 시마무라 하야오 제2함대 2전대 사령관 등 여러 참모들 의견을 종합 고안한 그 유명한 T자 전술을 들고 나왔다. 일본 함대가 T자 진형을 취하는 동안 러시아 함대는 선제공격을 개시했으나, 러시아 함대는 주로 거리 문제로 명중탄을 얼마 내지 못했다. 더군다나 새벽 이후 일본 함대와의 꼬리잡기와 기동전 와중에 함대 진형이 3열로 바뀌면서 일본 함대가 진형 정비를 마치는 시간동안 충분한 화력집중을 하지 못했다.[15][16] 게다가 일본 함대는 14노트로 기동하고 있었지만 러시아 함대는 11노트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고[17], 일본 함대가 6,000~7,300미터까지 측정이 가능한 최신형 영국제 측거의를 장비하고 있었던 반면 러시아 함대의 측거의는 유효 측정거리 4,000미터 정도에 불과한 구형이라 그만큼 사격능력에서 차이가 났던 것도 큰 요인이 되었다.

결국 이런 요인들은 결과적으로 러시아 함대에 지옥이 되어 돌아왔다.

5분 만에 진형정비를 마친 일본 함대의 집중포화[18]가 러시아 함대를 강타했다. 사실상 그 이후로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기함 수브로프가 제일 심한 집중포화를 받았다.[19] 도고는 함대 지휘부부터 무력화시킨다는 계획으로 모든 화력을 기함 수바로프와 고위급 제독들이 탄 함선에 퍼부었다. 일본 해군의 신병기 시모세 폭약[20]과 이주인 신관[21] 등에 의해 수보로프는 금세 만신창이가 되어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 버렸다. 여러 참모와 승조원들이 전사하고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가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으며, 부하들이 사령관을 어뢰정으로 옮긴 이후에 기함 수브로프는 침몰했다. 동일 오후 7시 40분, 러시아 함대의 잔존함들이 도망치고 어둠이 깔린 이후에야 전투가 종결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전함들이 의외로 쉽사리 격침당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은 일반적인 함선의 형태인 영국식 선체를 사용한 전함을 쓴 반면, 러시아는 프랑스식 텀블홈 형식의 선체를 사용한 전함을 사용했기 때문이다.[22][23]

텀블홈 방식은 흘수선이 가장 넓고 그 위로 갈수록 피라미드 형상으로 선체가 좁아지는 형태라 자연스럽게 경사장갑을 만드는 장점이 있지만, 갑판이 좁아져서 상부구조물을 높은 곳에 올려야 하므로 무게중심이 올라가며 조금만 침수되거나 배가 흔들리면 부력을 빠르게 상실해서 침몰을 가속화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덤으로 러시아의 전함들은 장갑을 강화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비배수량에서도 설계흘수선을 1m 이상 초과하는 과적상태였던 데다가, 심지어 해전 직전에는 원래 용적량보다 훨씬 많은 대량의 석탄을 적재하고 있었다보니 흘수선이 추가로 2m 가까이 더욱 깊어지면서 현측 주장갑대는 해수면 아래로 완전히 잠기다시피 했다. 그로 인하여 해전 당시의 러시아 전함들은 피탄 시 침수가 발생하면 더 빠르게 가라앉는 비극을 맞이한 것이다. 이는 비슷한 수준으로 포탄을 집중적으로 얻어맞은 일본 해군의 기함 미카사가 전투능력을 상실하지 않고 전투 종료 후에도 자력항해가 가능했던 것을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24] 쉽게 말하자면 이 전투에서 일본 군함 단면은 모양이었던 것에 비해 러시아 군함 단면은 모양이었다. 당연히 러시아 군함이 전복되기 쉬운 구조였다.

다음 날인 5월 28일부터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로제스트벤스키가 중상을 입은 다음 지휘권을 이양받은 네보가토프 제독은 무조건적으로 항복했고, 도고는 포로들을 정당히 잘 대우해줄 것임을 약속하며 패장을 다독였다. 이때는 진짜 포로대우를 잘했다. 치료부터 식사 제공, 우편서신, 개인소지품 소유 등등. 같은 날 오후, 로제스트벤스키가 타고 있던 고속정 부이니호가 일본 함대에 발각, 정장이 항복하면서 최고사령관마저 포로가 되었다.

그 와중에 개별적으로 추격을 뿌리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간신히 도착하는데 성공한 함정은 겨우 순양함 1척과 어뢰정 2척뿐이었다.[25] 오스카 엔크비스트 제독이 지휘하는 순양함 3척은 항로를 아예 반대편으로 돌려 중립국이던 미국필리핀마닐라항에 입항했고, 엔크비스트 제독과 부하 장교들 또한 함대를 온존시킨 것을 인정받아 황제로부터 면책되었다.[26] 또한 기타 보조선박들이 중국의 상하이 등지로 도주했다. 상하이로 도망치는데 성공한 배 중 특히 유명한 것은 석탄 수송선이였던 아나디르. 이 배는 쓰시마 해협에서 함대 보급용으로 실어둔 석탄을 써가며 무려 남아프리카에 위치한 프랑스마다가스카르까지 도망친 이후에 본국에 보고했다. 다시 말해 지구 반 바퀴를 항해해서 왔다가 또다시 지구 반 바퀴 가량을 돌아가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줬다는 소리.

7. 전투 결과

러시아 최강 함대로 일컬어지던 발트 함대는 총 37척(전투 직전에 빠진 석탄 보급선 제외) 가운데 전함 6척, 순양함 3척을 합해 19척(절반)이 격침되었고, 주력 전함 2척을 포함한 7척이 항복, 나포되었으며 앞서 언급했듯이 후방에 있던 순양함 3척과 기타 선박들이 도주했다.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운좋게 도착한 함정은 순양함 2척, 어뢰정 한 척뿐으로 사실상 함대 전멸의 괴멸적 피해를 입었다.[27] 기존의 태평양 함대가 입은 피해까지 생각하면 러시아 해군은 사실상 소멸한 것이다. 이제 러시아에 해군이라고 할만한 것은 흑해 함대가 유일했다. 인명피해도 커서 장교, 사병을 합쳐 전사자도 5,380명에 달하고 중상자도 많았으며, 포로도 6천여 명에 달했다.

반면 일본은 달랑 어뢰정 3척을 잃고 117명이 전사하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그야말로 압승이었다. 교환비만 보면 유럽 열강의 해군이 비유럽국가의 갤리선 함대를 때려잡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고, 러시아로선 '변방의 3류 군대라서 졌다'는 변명도 못할 지경이었다. 본토 주력함대가 대놓고 발렸으니 당연한 노릇. 이 전투로 인해 러일전쟁의 승기가 일본으로 완전히 넘어갔고, 일본 전역은 전승 분위기에 휩싸였다.

7.1. 일본군의 노획함선 편입

일본군은 쓰시마 해전에서 나포한 함선들을 수리하고 영국식으로 개수하는 과정을 거쳐서 1907년경부터 자국군 선적에 편입시켰다. 전노급 전함이나 해방전함에 불과했지만 당장 쓰시마 해전에서 유일하게 머리수로 밀린 함종이 전함일 정도로 전함이 없었고, 아직 일본 해군이 미국이나 영국의 수준을 따라가기 부족한 상황에서 거의 공짜로 얻어낸 러시아측 전함은 일본군에게 숫적으로 매우 귀중한 전력들이었다.
1907년 전함 이와미로 재취역, 1912년 2급 해방함으로 재분류되어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중국 내 독일 조차지인 칭다오 포위전에 참전했고 전후에도 살아남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에도 참전하여 적군을 상대로 화력을 투사했다. 1921년 1급 해방함으로 분류되어 사실상 훈련함으로 쓰이다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인하여 1922년 퇴역하고, 1924년 표적함으로 격침되었다.
파손 정도가 덜하여 1905년에 바로 재취역하며 일본군에 편입되었다. 1910년 1급 해방함으로 분류되어 훈련함으로 전용되었고 1915년 공고와 히에이의 어뢰표적함으로 사용되며 격침되었다.
전투 직후인 1905년 6월에 바로 재취역했다. 이와미와 함께 칭다오 포위전에 참전했고, 그라프 쉬페 제독이 이끄는 독일 동양함대 추격전애도 잠시 참여했었다. 1921년 잠수함 지원함으로 용도변경되었다 곧 퇴역하고 기념함이 되어 후쿠오카에 정박하여 쓰시마 해전의 승전을 상징하다가 1939년 스크랩 처분되었다.
오키노시마와 함께 취역, 전후 야마구치 현의 방어를 담당하다 1차대전시 이와미, 오키노시마와 함께 칭다오 포위전에 참전했다. 오키노시마와 마찬가지로 잠수함 지원함으로 용도변경되었고 1935년 퇴역, 1936년 미야자키 앞바다에서 표적함으로 격침되었다.

이상 4척은 쓰시마 해전에서 노획된 함정들이고 뤼순 등에서 노획된 함정들도 다수 편입되었다.

8. 해전 이후

<강대국의 흥망>으로 유명한 폴 케네디에 따르면 러시아는 일시적으로 강대국 체제에서 이탈했다. 러시아는 그토록 자부하던 최강의 발트함대가 괴멸에 이르자 사실상 전역의 전투수행능력을 상실한 것이었고, 그 니콜라이 2세조차 사할린이 점령당하기 직전 종전조약을 맺으라고 각 관료들에게 재촉할 정도였으니 이를 보더라도 얼마나 피해가 막심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에게 차관받은 재원도 전비로 모조리 소모했고, 사실상 만주는 일본의 소유권으로 넘어갔으며 기존의 주요 전략인 시베리아 철도로 물자를 수송하려는 계획은 일본의 간헐적인 게릴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간지 오래였다. 패색이 짙어지자 러시아엔 민중소요가 일어나 내부통제조차 안 되던 상황이었으며 러시아의 내로라하는 해군 명장들은 죽거나 포로로 사로잡혔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총체적 난국. 즉슨, 육-해 전역의 연전연패로 인해 제정러시아의 만기를 친재하는 니콜라이 2세는 사실상 패배를 시인했다.

일본 역시 전쟁을 더 지속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신흥국으로서 무리한 전쟁 준비를 하여 일본의 경제는 파산 직전이었기 때문에 전투에서 압승을 거뒀음에도 일본은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었다. 쓰시마 해전의 승리로 수송로는 지킬 수 있었지만 그 이전에 병력이 죄다 소모된 상태였으며 공장은 파산 직전, 만약 일본이 이 해전에서 졌다면 파국을 맞았을 것이다.

또한 일본 입장에서는 전쟁을 더 지속해봤자 얻을 수 있는 추가적인 이득도 딱히 없었다. 동북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소멸시킨다는 최초의 목적은 이미 달성한거나 마찬가지였으며, 여기서 전쟁을 더 지속해봤자 사할린이나 시베리아 지역 정도나 찔러보는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영토의 가치는 크지 않았다. 당시나 지금이나 러시아라는 국가의 주축은 유럽 지역이었으며 러시아가 그 먼 길을 힘들게 원정온 것이 패전의 이유 중 하나였던 만큼, 일본도 러시아 유럽 본토를 침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어쨌거나 일본이 쓰시마 해전에서 승리했던 것은 분명한 우위였으므로, 휴전을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일본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미국에게 중재를 요청한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여 휴전 조약인 포츠머스 조약이 타결되었다. 러시아는 전쟁의 배상금 등을 무는 상황은 피했지만, 동북아시아에서의 이권을 상당부분 일본에게 양보해야 했으며 남사할린도 할양해야 했다. 동북아시아에서 영향력이 사실상 소멸해버린 러시아는 추가로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하려는 것 역시 묵인하게 된다.

장기적 국면으로 봐서도 러시아에게는 이 해전의 결과가 쓰라린 상처가 되었으며 일본에게는 상당한 득이 되었다. 발트 함대를 잃어버린 러시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자국의 앞마당인 발트해를 독일 해군에게 철저하게 봉쇄당해야 했다. 다만 러시아 발트함대 소멸은 영국이 오랜 경쟁자에 대한 걱정을 덜어낸 계기가 되었고(러시아의 영국 본토 침공 가능성이 삭제되었다) 이로 인해 그레이트 게임은 사실상 종결, 영국은 독일에게만 집중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해군력 소멸은 러시아를 승계한 소련도 마찬가지여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그 허약한 독일 크릭스마리네에게 소련 해군은 제대로 된 교전을 시도해보지 못하고 잠수함에 의지해야 했다. 그리고 수상함대 전력은 1950년대쯤이나 가서야 회복되었다. 반면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대했으며 국제적인 위상 역시 일신하게 된다. 전쟁 이전까지는 저평가 받던 위치였으나 전쟁 이후에는 서구 열강에 맞먹는 군사력을 지닌 신흥 열강으로 대접받기 시작하며 국제적인 발언력 역시 강해진다. 일본은 해군력의 중요성을 실감했으며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져 유럽이 주춤하는 동안 일본은 해군력 증강에 노력하여 상당한 성과를 본다. 이후 유럽 열강은 1921년부터 맺어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일본을 포함시켜 일본의 해군력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상황까지 펼쳐지게 된다.

한편 영국 해군의 제1 해군경(first sea lord)[28] 존 피셔는 쓰시마 해전의 승리 요인을 전투함의 빠른 속도와 거포의 화력과 사거리에 있다고 보았고, 이것에 주안점을 둔 새로운 함정을 요구한다. 영국 해군은 1905년부터 HMS Dreadnought을 건조하여 1906년에 취역시켰으며 이는 드레드노트급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전함들을 탄생시켜 기존의 전함들을 도태시키고 건함 경쟁을 새로운 국면으로 끌고 가게 된다.

그리고 일본 해군에게 이 해전은 다른 의미로 나쁜 영향을 주었다. 러시아 해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둔 일본은 자기 힘을 과신하여 한층 공격적이고 모험주의적인 대외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영국의 사학자 제프리 리건(Geoffrey Regan)에 따르면:
...created a legend that was to haunt Japan's leaders for forty years. A British admiral once said, 'It takes three years to build a ship, but 300 years to build a tradition.' Japan thought that the victory had completed this task in a matter of a few years ... It had all been too easy. Looking at Tōgō's victory over one of the world's great powers convinced some Japanese military men that with more ships, and bigger and better ones, similar victories could be won throughout the Pacific. Perhaps no power could resist the Japanese navy, not even Britain and the United States.
(쓰시마 해전의 압승은) 이후 40년간 일본 지도부를 사로잡은 신화를 창조했다. 어느 영국 제독[29]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를 건조하는데는 3년이 걸리지만, (군사적) 전통을 형성하려면 300년이 걸린다. 일본은 쓰시마 해전 승리를 통해 이 과업을 단 몇년만에 완수했다고 믿게 되었다. (중략) 모든 것이 너무나도 쉬웠다. 세계 열강 중 하나를 상대로 도고가 거둔 승리를 관찰한 일부 일본 군인들은 더 크고 더 좋은 배를 더 많이 건조하여 태평양에서도 비슷한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 어느 열강도, 심지어 영국과 미국도 일본 해군에 맞설 수는 없을 터였다.
Regan, Geoffrey (1992). "The Battle of Tsushima 1905". The Guinness Book of Decisive Battles. p. 178. Guinness Publishing.

또한 한 번의 해전으로 전쟁 전체의 승기를 가져온 경험을 가지게 됨으로써 이후로도 함대의 단기 결전에 집중하는 함대결전사상에 푹 빠지게 된다. 또한 함대결전사상에 비해선 사소해 보이지만 일본 해군의 다른 병폐도 이때부터 시작했다. 도고 헤이하치로가 기함미카사에 탑승해서 직접 선두에서 일선 지휘를 맡은 것이 신화처럼 자리잡아서, 이후 일본 해군에선 소규모 전대장 뿐만 아니라 연합함대 사령장관과 같은 최고위 사령관도 직접 기함에 탑승해서 일선 지휘를 맡아야 한다는 전통이 자리잡았다.

하지만 해전의 양상이 점차 바뀌면서 최고위 지휘관이 기함에서 지휘하는 건 효율이 떨어지게 된다. 지휘통신 및 지휘를 위한 전문 설비와 인원이 충분히 갖추어진 지상 기지에 비하면 일개 함선인 기함은 당연히 설비와 인원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기함이 교전에 휘말려서 자칫 최고 지휘부도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좋은 예로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군 태평양함대의 최고 지휘관인 체스터 니미츠는 하와이의 태평양함대 본부에서 총지휘를 하고 해전의 일선 지휘는 현장에 있는 프랭크 플래처와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임무를 분담했다.

반면 2차대전기의 일본 해군은 선두 지휘라는 구세대적 전통과 수뇌부의 관료제 및 보신주의가 맞물려 이중의 병폐를 낳게 되는데, 선두지휘시 사령부의 생존성을 위해 기함으로 주어지는 가장 크고 튼튼한 전함이 활약할 장소를 잃고 후방에서 사령부의 호텔 노릇이나 하는 잉여가 되고, 정작 사령부는 실전에 참여하지도 않는 바람에 진주만, 미드웨이, 과달카날, 레이테 등 굵직한 함대결전 및 전역에서 최고사령부의 의도가 일선부대에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하는 결과만 낳고 말았다. 전함을 호텔로만 써먹던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수송기로 이동 중 격추되자 후임 연합함대 사령장관 고가 미네이치는 선두지휘라는 명목조차 내팽개치고 지상으로 사령부를 옮겼고, 이는 일선부대의 사기 저하 및 명령 전달체계 악화를 더욱 심화시키게 되었다.

9. 기타

승자인 일본에서는 미디어로 여러 번 만들어졌다. 제국 시절부터 시작해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단골.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69년작 일본해 대해전. 그러나 일본이 이기는 영화라서 한국에 소개된 건 없다. 가장 최근에 미디어된 것은 시바 료타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NHK 대하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이다.[30][31]

그 유명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이 해전에 참전했다가 손가락을 잃었다. 다만 전투로 인해 입은 것은 아니고 일반적인 사고였다.

국제신호기 Z(줄루) 깃발이 일본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상징처럼 된 것도 이 해전의 영향이다. 해군은 물론, 민간에서도 각종 경쟁에 앞서 승리를 각오하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2차대전 패전 후에도 스포츠 경기나 중요한 경쟁, 대학시험등에서 Z기를 모토로 하는 부적이나 상품이 판매되는 등 승리의 상징처럼 쓰이게 되었다.

일본 후쿠오카현 무나가타(宗像)시에 있는 무나카타 타이샤(宗像大社)에서는 쓰시마 해협에 있는 오키노시마(沖ノ島)라는, 올림픽공원보다 작은 섬[32]에 10일 간격으로 신관 한 명을 파견한다. 오키노시마가 일본서기에도 등장하는, 타고리히메(田心姬) 여신[33][34]의 신체(御神体)라고 하기 때문에 늘 이렇게 신관을 보내는데, 쓰시마 해전 당시에 오키노시마에 파견와있던 신관이 해전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이후 무나카타 타이샤에서는 일본이 이 해전에서 승리함이 타고리히메 여신이 가호한 덕이라고 생각했는지, 쓰시마 해전이 일어난 5월 27일에 일반인 200명이 이 섬에 찾아가 작은 축제를 거행한다. 평상시에는 이 섬 자체가 신체이며 또한 천연기념물이기 때문에, 신관과 항만 관리자를 제외하고는 보통은 섬에 발을 디딜 수 없다.
세계 4대 해전 떡밥에 늘 들어가는 단골 후보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유튜버 Radio Tapok이 이 전투를 소재로 노래를 작곡했다. 월드 오브 워쉽 광고에 쓰였으며, 제목은 해전 이름 그대로 "쓰시마(Цусима)". '황제의 유언과 함께 죽을 운명(Обреченный на смерть с последних слов императора)', '죽음을 앞두고 있고, 되돌아갈 방법은 없다(Нас ждет смерть, что нет обратного пути)' 는 등 비장한 가사가 특징. 곡 역시 조금 느린 템포를 가지고 있어 '기나긴 항해 끝에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제정 러시아 해군'을 잘 묘사했다.

이때 울릉도 연안에서 자침한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급 장갑순양함드미트리 돈스코이함에 러시아군의 군자금인 금화가 잔뜩 실려 있었다는 떡밥이 있다. 2018년 7월 모 투자회사가 침몰한 돈스코이함의 선체를 해저에서 발견했다며 대규모 투자 사기를 쳤다. 증거자료나 화면은 모두 타이타닉같은 영화의 장면을 교모히 짜집기한 것에 불과했다. 결국 아직까지 식지 않은 떡밥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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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로프 비행선?!
보드게임 레비아탄즈에서는 폴란드의 한 천재 과학자[35]가 만든 공중전함 레비아탄으로 편성된 러시아 함대에게 일본 함대가 전멸한다. 그 후 조선은 러시아에게 먹히고 유럽의 열강들은 공중전함 만드는 데 광분한다.

한국 대체역사물들에서는 대체적으로 봉천 전투를 러시아의 승리로 돌리고 대신 이 전투는 원역사대로 흘러가게 하는 방식으로 러일간 밸런스를 맞추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서는 아예 쓰시마 해전을 삭제시켜 버렸다. 작가에 따르면 많은 이들의 생각과 달리 봉천에서 이겨도 쓰시마에서 지면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고.

10. 관련 문서



[1]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북방함대는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북방함대가 러시아 해군의 최중요 함대라는 위치로 올라선 것은 러시아가 북극해를 건너 미국을 상대하게 된 냉전 시기부터다.[2] 당시 영국 역시 러시아의 대함대가 어차피 수에즈를 통과하지 못하니 희망봉찍고 돌아갈 것을 예상하고 있어서 별다른 대책을 세우거나 하지도 않았다. 다만 수에즈를 통과하는 작은 러시아 군함들에게 여러가지 절차를 따지며 묶어두기는 했으나 당시 수에즈는 국제법상 영국의 영토가 아닌 이집트 정부의 영토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러시아 해군측에서 이집트 정부는 어딨냐고 강짜를 내놓은 뒤엔 별 수 없이 분견대를 보내주었다. 어쨌든 영국으로서도 러시아 해군 분견대의 발을 묶는데 어느 정도 일조를 한 셈.[3] 당시 일본의 해군함선들은 대부분 영국제였으니 구입시기가 좀만 늦었으면 러시아 해군에게 구매한 영국제 배가 끔살당했을 수도 있었다.[4] 0단: 초계를 철저하게 하여 필리핀 방면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오는 발트 함대를 최대한 빨리, 게다가 절대로 새지 않도록 발견한다. 또한 어선 등도 동원해 한반도 서부에서 규슈 서부에 걸쳐 전체적 보초처럼 초계하며 전망을 전체적으로 배치해 그후 함대를 발견했을 때에 무선으로 신속하게 통보하여 연합함대 전투 준비. 1단: 구축함이나 수뢰정을 이용해 결전 전야에 야전을 실시. 2단: 연합함대 전함으로 러시아 발트 함대와 결전한다. 3단: 구축함이나 수뢰정을 이용해 잔존한 적 함정을 야전 뇌격. 4단: 연합함대 주력을 이용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해역까지 잔존 적 함정을 추격. 5단: 구축함이나 수뢰정을 이용해 적 함정을 끝까지 야간 추격. 6단: 계속해서 연합함대 주력으로 블라디보스토크 부근까지 러시아 발트 함대 잔존 함정을 추격해 한 쪽에 몰아넣기. 마지막 7단: 기뢰를 부설한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잔존 적 함대를 다 몰아넣고 파괴시킨다.[5] 실제로 일본의 최북단에 위치한 왓카나이에는 발틱 함대의 움직임을 감시하고자 1902년에 일본 해군이 설치한 망루를 볼 수 있다.[6] 주력 전함 4척, 순양함 8척.[7] 출처: '국가의 해양력' 제2 장 '해군의 역사 -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전쟁과 함대' 179p, 책세상,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저, 임인수 옮김[8] 뤼순, 블라디보스토크[9] 구 발트 함대[10] 야마토급 전함 3번함이자 항공모함이 된 시나노와 한자가 같다.[1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ussian_hospital_ship_Orel_1890_In_later_KusuhoMaru.jpg 같은 이름을 가진 전함과 구별하기 위해 '흰독수리'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또한 전대의 여성 간호사들이 모두 이 배에 타고 있었으며 이들의 총책임자인 간호 장교 나탈리아 시베르스는 로제스트벤스키의 3번째 여인이었다.[12] 문장을 해석하면 날씨가 좋아 자신의 영해 안에서 싸우는 아군이 포격에서 앞설 것이고 러시아 군함보다 일본 군함이 높이가 낮은 특성상 파도에 방해를 덜 받아서 종합적으로 아군이 훨씬 유리하다는 뜻이다.[13] 참고로 국제 해사 신호기링크에서 Z기는 예인 바람 또는 "'투망 중이다"'를 알리는 깃발이다.[14] 황국의 흥폐가 이 전투에 달려 있다는 말은 요코스카의 도고 헤이하치로 동상 옆에 비석으로 남아 있다.[15] 러시아측 사료에 기초한 러일전쟁사에서는 구체적인 통계를 들어 러시아 함대의 명중율이 높은 편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측 사료를 토대로 작성된 언덕 위의 구름에서는 실제 참전자의 증언을 토대로 자이로스코프가 탑재되지 않은 당시의 함선으로는 알파 선회라고 알려져 있는 180도 회전중의 함선에 명중탄을 집중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함대의 최대 기회라 할 교전 초기에 명중탄을 내지 못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16] T 진형이라고는 하지만 양측이 이동 중이므로 앞을 가로막는 형태는 무리고, 러시아 함대가 취하는 2열 종진의 앞부분만을 일방적으로 포격거리에 두는 기동을 최초의 알파 선회 덕에 꾸준히 유지하면서 뒷부분의 러시아 함대는 사거리 밖에 놓은 상태가 되었기에 전체적으로 명중탄을 내지 못한 것이 훈련부족보다 더 큰 문제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보인다.[17] 이 속도의 차이가 러시아 함대가 일본 함대의 화력집중을 허용하게 된 결정타가 되었다.[18] 십자포화가 되려면 반포위진형을 구축해야 하는데 이런 장면은 전체 해전 중 일본 제3전대를 1전대가 따라잡은 후반에만 잠깐 있다.[19] 가장 먼저 침몰한 것은 2전대의 전함 오슬라비야.[20] 인화성 물질이 충전되어 있어 적함 페인트에 들러붙어 불을 붙인다.[21] 이주인 고로 제독(후일 해군 원수대장, 군령부장 역임)이 고안한 폭약 신관이며 탄이 비행하는 동안 꼬리 나사가 회전하여 안전장치를 벗기는 것이 특징으로, 매우 민감하여 포탄이 어디에 명중해도 폭발하도록 개발.[22] 당시는 철갑선의 기술이 발달한데 반해 함포의 철갑탄은 발달이 뒤쳐져서 하베이 강을 중요부위에 두른 전함은 실질적으로 침몰시킬 수 없다고 보았다. 바로 전년도의 황해 해전에서도 뤼순 주둔 함대는 격렬한 포격전을 치르고도 침몰한 전함은 없었다. 상부구조가 무력화되기는 했지만 기관부 자체는 무사해서 웨이하이까지 도주하는 것도 가능했으므로 러시아군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전함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도망칠 수만 있다면 된다고 생각했고 이 부분이 당연히 어려우리라 생각한 해전에서 믿는 구석이었다. 하지만 선체의 문제와 함께 어뢰정을 사용하기 힘들게 만든 높은 파도가 하베이 강이 둘러지지 않은 수선하부까지 드러나는 결과를 낳아 침몰로 이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텀블홀 방식의 문제는 방어력 자체보다 메타센터 높이가 높아지는 것으로 이어져 선체의 복원력을 낮추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23] 엄격히 이야기한다면 이 시기까지의 영국제 군함들도 당시 선박 건조 기술의 한계로 인해 상갑판이 흘수선보다 좁았다. 다만, 그 격차가 미미했을 뿐이고 주의해서 쳐다보아야만 선체측면이 경사져 있음을 알 정도이다. 프랑스식 텀블홈은 대놓고 흘수선이 상갑판보다 훨씬 넓은 데다가 상갑판에서 흘수선으로 이르는 측면은 곡면으로 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측면이 곡선을 그리는 프랑스식 텀블홈 선체만을 텀블홈으로 인정했으나, 상갑판이 흘수선보다 대폭 좁아지는 스텔스 설계가 도입된 현대 군함들이 등장하면서 텀블홈의 개념도 변하고 있다.[24] 프랑스에서 건조하여 러시아 해군의 태평양 함대에 편입된 체자레비치도 전형적인 텀블홈 선체이지만 전해에 벌어진 황해 해전에서 발트 함대의 전함들이 입은 것과 비슷한 피격을 받았음에도 칭다오로 도피하는데 성공한 사례가 있으므로 텀블홈 설계가 약점만을 가진 설계는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발트 함대의 사례는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최신기술에 사용자의 과다한 요구와 미숙한 건조역량이 결합할 경우 벌어지는 부작용에 가깝다.[25] 순양함 이줌루트도 무사히 탈출해 블라디보스토크 앞까지 도착했으나, 좌초하여 입항하지 못했다. 그래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이줌루트도 귀환 함정에 포함시키고 승조원들을 다른 귀환함과 동일하게 치하했다.[26] 이렇게 살아남은 함정 가운데 순양함 아브로라 호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신호탄을 쏘아올린다. 그 공로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기념함으로 보존되고 있다.[27] 당시는 리사 해전, 미국-스페인 전쟁, 청일전쟁을 포함해서 주요 해전을 통해 함대가 이 정도로 궤멸당한 예가 없을 정도로 함선의 방어력이 공격력을 웃돌던 시대였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도 이 정도의 일방적인 학살은 아니었으므로 충격이 더 컸을 것이다. 이는 함대결전사상의 강화와 드레드노트급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해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28] 군경, 해군경이란 용어는 영국의 영어로 된 관직명을 일본인이 번역하며 만든 것으로, 서구를 따라하던 일본에 있던 관직명이기도 하다. 한자로 쓰여 있지만 엄연히 일본어다. 과거에도 그랬고 요즘도 생각없이 잘 하듯, 그냥 한국어 한자발음대로 읽어 국어처럼 적는 바람에 한국어 문서에도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냥 해군참모총장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29] 앤드루 브라운 커닝엄(Andrew Browne Cunningham, 1st Viscount Cunningham of Hyndhope, 1883~1963)을 가리킨다. 다만 커닝엄은 생몰연대에서 볼 수 있듯이 2차대전 당시 활약한 군인이다. 지중해 함대의 사령관으로 추축국의 해군에 맞서 여러 번 승리했다.[30] 언덕 위의 구름 소설과 드라마 내 주인공은 세명인데 그중 하나가 쓰시마 해전 승리의 주역인 아키야마 사네유키 중좌(해전 당시 연합함대 작전담당 선임참모 겸 제1함대 선임참모)이다.[31] CG 작업은 한국 외주 업체가 참여했다.[32] 무타카타시 해안으로부터 약 60 km쯤 떨어져 있다. 면적은 약 97 헥타르로 올림픽 공원의 2/3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위경도 좌표는 북위 34.244도, 동경 130.105도. 수많은 제사 관련 유물이 발굴되어 고고학적으로도 중요하고, 환경적으로도 중요해서 이미 1926년에 일본 천연기념물로 지정받았다.[33] 일본서기 본문에 따르면, 스사노오가 죽은 자기 어머니를 보려고 저승에 가려다가, 그 전에 자기 누나인 아마테라스를 만나고자 천상계 타카마가하라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가 천상계의 군주 자리를 빼앗으려 하지 않나 의심하여 남장을 하고 무장을 갖춘 채로 강가에서 스사노오를 맞았다. 스사노오는 누나가 자기를 믿지 못함을 알고는 내기를 통해 자기 진심을 보여주겠다면서 서로가 상대방의 물건을 씹어서 뱉어보되, 자기(스사노오)가 결백하다면 남신이 나오고 흑심이 있다면 여신이 나오리라고 했다. 아마테라스가 스사노오의 칼을 받아 씹어서 뱉었더니 여신 셋이 나왔고, 스사노오가 아마테라스의 곡옥을 받아 씹어서 뱉었더니 남신 다섯이 나왔다. 이에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의 말을 인정하고 타카마가하라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일서에서는 본문과는 세부적인 사항이 미묘하게 다른 기록들이 여럿 실렸다.[34] 타고리히메 여신은 이때 스사노오의 검에서 나온 여신 셋 중 하나라고 전하며, 무나카타 타이샤는 이때 나온 여신 셋을 받든다. 일본서기 일서에 따르면 아마테라스가 이때 나온 세 여신에게 명하여 무나카타로 내려가 해로(海路)를 지키라 명했다고 한다. 부산-쓰시마-오키노시마-무나카타시가 거의 일직선상에 있기 때문에 오키노시마와 무나카타시가 해상교통의 중요한 지점이었던 역사가 반영된 이야기다.[35] 이름은 밝히지 않았으나, 폴란드계인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