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36349> 유틀란트 해전 Battle of Jutland Skagerrakschlacht | |||
제1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SMS 뤼초와 SMS 데어플링어에게 공격당한 뒤 유폭하는 HMS 인빈시블.[1] | |||
날짜 | |||
1916년 5월 31일 ~ 1916년 6월 1일 | |||
장소 | |||
북해, 덴마크 인근 | |||
협상국 | 동맹국 | ||
교전국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
지휘관 | 영국 해군 [[틀:깃발| ]][[틀:깃발| ]][[존 젤리코| ]] 대함대총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데이비드 비티| ]] 순양전함함대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세실 버니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호러스 후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로버트 아버스넛† 외 다수[2] | 독일 해군 [[틀:깃발| ]][[틀:깃발| ]][[라인하르트 셰어| ]] 대양함대총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프란츠 폰 히퍼| ]] 정찰부대장 [[틀:깃발| ]][[틀:깃발| ]][[루트비히 폰 로이터| ]] 외 다수[3] | |
병력 | 전함 28척 순양전함 9척 장갑순양함 8척 경순양함 26척 구축함 78척 기타 2척 (총 151척) | 전함 16척 순양전함 5척 전드레드노트 6척 경순양함 11척 어뢰정 61척[4] (총 99척) | |
피해 규모 | 인명: 전사 6,097명 부상 674명 포로 177명 함선: 순양전함 3척 침몰 장갑순양함 3척 침몰 구축함 8척 침몰 | 인명: 전사 2,551명 부상 501명 함선: 순양전함 1척 침몰 전드레드노트 1척 침몰 경순양함 4척 침몰 어뢰정 5척 침몰 | |
결과 | |||
독일의 전술적 승리, 영국의 전략적 승리 | |||
기타 | |||
제1차 세계대전 최대 규모의 해전 |
유틀란트 해전: 영국 왕립 해군 vs 독일 제국 해군 |
1. 개요
유틀란트 해전(Battle of Jutland / Skagerrakschlacht)은 1916년 5월 31일 ~ 6월 1일 사이에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 그리고 세계 해전 사상 유일하게 드레드노트급 전함 함대가 서로 부딪친 대해전이다. 독일 측에서는 스카게라크 해전이라고 부른다. 또한 역사상 가장 많은 전함이 동원된 해전이다.
20세기 초반 당시 강대국 국력의 상징이었던 전함은 그 중요성만큼이나 귀중하게 다뤄져 실전에서 대함대가 격돌을 벌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해전을 제외한 기타 해전은 2~4척 규모의 분견대 단위로 작전을 나가다가 순양함이나 순양전함 한두척이 가라앉거나 피해를 입는 양상의 해전이 벌어졌고, 이것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거의 그대로 재현된다. 그런데 양국 합쳐 드레드노트급 전함만 44척이 동원된, 근대 이후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의 대해전이 바로 유틀란트 해전이다.[5]
2. 전개
2.1. 배경
독일 제국은 1900년대 초반 해군력을 급속히 키워가며 영국이 가진 해상지배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애초 독일은 영국이 프랑스 제3공화국,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는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영국이 지중해 등지에 전력을 분산할 것이라고 가정했지만 실제로 영국이 해군 전력을 스코틀랜드 북방의 스캐퍼플로에 집중, 북해를 봉쇄했기 때문에 영국 해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따라서 독일 해군은 영국 대함대를 일부 끌어내[6] 축차적으로 전력을 소모시키려는 전략[7]을 내세웠다.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1916년 5월 히퍼 제독이 순양전함 5척, 경순양함 5척, 어뢰정 30척으로 구성된 정찰부대(Scouting Forces/Aufklärungsstreitkräfte)를 이끌고 미끼용으로 먼저, 그리고 셰어 제독이 이끄는 드레드노트급 전함 16척,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6척, 경순양함 6척, 어뢰정 31척으로 구성된 대양함대가 뒤를 이어 출격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은 개전 초 침몰한 독일 해군 함정에서 암호표를 입수해 독일 해군의 무선 통신을 상당수 감청해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틀란트 해전 직전의 영국은 독일측의 함대 규모가 정확히 어느정도 규모인지, 목적이 무엇인지까진 파악할 수 없었다. 영국 해군은 독일 해군보다 먼저 출항하여 데이비드 비티 제독이 지휘하는 드레드노트급 전함 4척, 순양전함 6척, 경순양함 14척, 구축함 27척, 수상기모함 1척으로 구성된 순양전함함대(Battlecruiser Fleet)를 먼저 내보내고 존 젤리코 제독이 지휘하는 드레드노트급 전함 24척, 순양전함 3척, 장갑순양함 8척, 경순양함 12척, 구축함 51척, 기뢰부설함 1척으로 구성된 대함대가 그 뒤를 따랐다.
2.2. 전력 차
양군의 전력은 아래와 같다.
함 종 | 대영제국 vs 독일제국 |
드레드노트급 전함 | 28척[8] vs 16척[9] |
전(前)드레드노트급 전함 | 0척 vs 6척[10] |
순양전함 | 9척[11]vs 5척[12] |
장갑순양함 | 8척 vs 0척 |
경순양함 | 26척 vs 11척 |
구축함 | 78척 vs 61척 |
주포 수량 | 305mm ~ 381mm 344문 vs 280mm~305mm 244문 |
보다시피 총 전력에서 영국이 확실한 우위를 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량 뿐 아니라 전함의 설계와 성능에 있어서도 대체로 영국의 우위. 다만 하필 이렇게, 대규모로 비슷한 기술력의 국가와 함대전을 하는 것은 영국에게도 처음이었기에 자잘한 문제가 많았고 이것이 순양전함이 다수 격침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영국 해군은 포탄에 들어가는 폭약으로 피크르산을 썼는데, 피크르산 포탄은 독일 순양전함의 장갑 표면에서 폭발할 뿐 관통력은 좋지 못했다. 독일 순양전함들은 전체적인 성능에서 앞서진 않았을지언정 영국 순양전함에 비해 대체적으로 장갑이 두꺼웠다. 양국 순양전함 간의 교전에서 영국이 유독 많은 피해를 본 것이 그 때문이다. 이외에도 속사 관련된 문제도 있는데, 이는 후술한다.
2.3. 망치를 든 계란들의 전초전
양 측의 조우, 교전 시작→퀸 메리의 실책으로 영국 측 혼란 발생→라이온 무력화, 인디패티거블 격침→제5전함전대 개입→퀸 메리 격침→경순양함들의 개입과 노마드, 네스토어 격침→제3순양전함전대 개입→독일 경순양함들의 체스터 난타→인빈시블의 지원으로 비스바덴 무력화데이비드 비티 제독이 지휘하는 순양전함대와 히퍼 제독이 지휘하는 정찰부대의 전력차이는 10:5[13]이었으나 비티와 에반 토마스[14] 간의 신호 미스로 제5전함전대가 순양전함들과 분리되게 된다. 이 상태에서 비티는 히퍼가 지휘하는 정찰함대를 발견하고 그대로 공격에 들어가면서 총 전력에서는 2:1이지만는 실제로는 6:5로 감소한 상태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문제는 영국측이 사격 배분의 실수로[15] 독일 순양전함 한 척(데어플링어)이 공격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공격하게 놔두었다는 것이다.
결국 전투 시작 얼마 안 되어 기함 라이온이 뤼초에게 대파당하고[16] 인디패티거블이 폰 데어 탄에게 격침당한다.[17] 한편 라이온이 이탈하자 데어플링어는 목표를 퀸 메리로 돌리고 데어플링어와 자이들리츠의 협공을 받은 퀸 메리는 탄약고 유폭으로 폭침한다.
순양전함들이 영 고전을 면치 못하고 밀리자 순양전함대 사령관인 비티 제독은 기함의 함장에게 이렇게 말하며 낙담했다.
"Chatfield, there seems to be something wrong with our bloody ships today."[18]
"챗필드, 오늘따라 우리 '망할' 배들이 뭔가 문제가 있는것 같다."
다행히 뒤쳐졌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을 위시한 제5전함전대가 합류하여 히퍼의 함대에게 반격을 가해서 다시 영국측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 굿이너프 제독이 수평선에서 엄청난 연기를 발견했고, 접근해서 확인 한 결과 전 독일 대양함대가 코 앞에 와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해군 성은 이날 낮에 독일 대양함대는 항구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비티와 젤리코에게 전문을 보냈었기에 깜짝 놀란 비티는 후퇴를 결정했는데, 이때 제5전함전대는 또 신호를 못받아서 뒤쳐지게 된다. 덕분에 제5전함전대가 독일 주력함대에게 포탄 몇발을 얻어맞기는 했으나 큰 피해는 아니었고, 비티는 독일 함대를 젤리코가 지휘하는 주력함대 쪽으로 유인하기 시작한다. 이후 비티에게 후드 제독이 지휘하는 제3순양전함전대가 합류하게 된다."챗필드, 오늘따라 우리 '망할' 배들이 뭔가 문제가 있는것 같다."
2.4. 본격적인 전투
독일 함대는 영국 주력함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신나게 영국 함대를 추격하였고 젤리코는 독일 함대를 맞이하기 위하여 단종진을 치고 독일 함대를 T자로 가로지르면서 포격을 가한다. 그제서야 영국 주력함대의 존재를 알아차린 독일의 셰어 제독은 서둘러서 함대를 반전시켜서 후퇴한다. 이 과정에서 독일은 20발의 명중탄을 기록하였고 영국은 23발의 명중탄을 기록하였으며 제3 순양전함 전대의 기함 인빈시블[19]이 탄약고 유폭으로 격침되고 독일 순양전함 뤼초가 인빈시블에게 심한 손상을 입고 무력화된다. 또 영국의 듀크 오브 에든버러급 장갑순양함을 위시한 제1순양함 전대가 독일의 함대를 가로막았지만 역으로 디펜스가 심하게 얻어맞아 침몰했고, 워리어도 난타당해 대파당하고 만다.[20]
그러나 셰어는 이 상황에서 다시 함대를 반전시켜서 영국 함대에게 들이미는 오판을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젤리코는 또 한번 독일 함대를 T자로 가로지르면서 거의 일방적으로 독일 함대를 난타하게 되고 셰어는 다시 한번 후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37발의 명중탄을 기록한 반면 독일은 자이틀리츠가 2발의 명중탄을 기록하였을 뿐이다. 셰어는 다시 한번 후퇴하였고 영국 함대의 전열을 돌파하기는 불가능하고 야간에 후퇴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반면에 젤리코는 야간전을 회피하고 다음날 아침에 결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2.5. 야간전
하지만 후퇴 과정에서 주변 경계 및 보조 임무를 맡았던 순양함, 구축함 사이의 전투가 더 치열했으며 특히 독일 주력함대가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최단 거리로 본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영국 순양함과 구축함들이 형성한 경계선을 강행돌파하면서 피비린내나는 야간 전투가 벌어졌다.젤리코는 독일 함대의 귀항을 차단하기 위해 전함 전열 후방에 구축함들을 배치해 독일 전함들이 돌파를 시도하면 구축함들의 뇌격으로 밀어내려고 했다. 셰어는 보조함들의 정찰과 무선 감청을 통해 영국의 함대 배치를 알아내고 구축함 진형을 찢고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영국도 무선 감청을 통해 독일 함대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해군성의 실수로 해독만 하고 이 정보를 함대에 알리지는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 정작 함대에게 알려진 정보도 전장의 정찰 보고와 상충되고 있었는데, 앞서 독일 함대가 출항하지 않았다는 잘못된 정보로 인하여 해군성을 불신하게 된 젤리코는 현장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번에 틀린 것은 현장의 정찰 보고였다.
독일의 가젤급 경순양함 프라우엔로프가 뇌격으로 격침된 것을 시작으로 지독한 난전이 펼쳐진다.
- 영국 구축함 5척이 격침 - 아르덴트, 포춘, 터뷸렌트, 티퍼레리, 스페로호크
- 독일의 카를스루에급 경순양함 로스토크가 뇌격으로 격침.
- 영국 구축함 스핏파이어가 근접한 나싸우가 발사한 주포의 폭압에 함교가 박살나지만 생존.
- 포젠이 경순양함 엘빙을 들이받아 침몰시킴.
- 낮에 디펜스와 워리어를 상실한 제1순양함전대가 본대로 귀환하던 중 독일 함대와 조우해 블랙 프린스가 15분 만에 격침.
- 포메른이 난전 끝에 침몰함.
- 낮에 무력화되었던 뤼초가 뇌격처분.
- 인빈시블에게 얻어맞고 손상을 입었던 비스바덴, 퇴함 작업을 끝낸 워리어도 침몰.
결과적으로 상대의 급수가 너무 차이가 나는지라 보조함끼리의 전투는 영국이 우세했지만, 독일 함대 주력과 영국 보조함의 전투는 영국이 밀려버리는 사태가 전개된다.
전체적으로 영국은 순양전함 3척, 장갑순양함 3척, 구축함 8척 총 113,300톤 규모의 손실을 입은 반면, 독일은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1척, 순양전함 1척, 경순양함 4척, 어뢰정 5척 총 62,300톤의 손실을 입는 데 그친다.
3. 결과
격침된 함선 목록. Battlecruiser action이 비티와 히퍼의 전초전, Fleet action이 본게임, Night action이 후퇴하며 발생한 야간전이다.겉으로 보이는 영국의 전술적 패배원인으로는 도거 뱅크 해전의 교훈으로 독일 전함들이 탄약고와 포탑에 철저한 방염대책을 추가한데 반면 영국은 속사에 주력하기 위해 포탑 내에 적정량보다 많은 포탄과 탄약을 쌓아놓는 등 탄약의 안전한 취급에 대해서는 기존보다 더 소홀해졌고, 이것이 포탑/바벳을 뚫고 들어온 적탄에 포탑과 양탄기에 쌓인 탄약들이 유폭하며 함을 폭침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티 제독의 순양전함대에서 특히 부각되었는데 속사에만 집중하느라 안전 대책과 명중률에 소홀해졌고[21] 이에 대해서 젤리코 제독이 지적을 했음에도 반발하며 무시했고 그 결과 유틀란트 해전에서 순양전함이 폭침하면서도 전과는 거의 올리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정작 본인의 기함은 대파되었지만 살아돌아왔다.
독일의 순양전함 자이들리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대표적인 불침함이다.
당장 자이들리츠를 위시한 독일의 순양전함들은 미친듯이 두들겨 맞고 거의 침몰 직전까지 몰렸지만 강도높은 훈련과 이전 해전들을 분석해 얻은 결론들을 바탕으로 한 잘 짜여진 매뉴얼대로 응급수리를 하고 탄약고를 재빨리 침수시켜 유폭을 막는 등 적절한 대응으로 결국 살아남았다. 건조당시 예상했던 적의 화력을 훨씬 능가하는 15인치 철갑탄을 몇 발이나 맞았으므로 살아서 돌아왔을 때 자이틀리츠는 침수가 심해 배의 흘수가 너무 깊어져서 입항이 힘들 정도로 손상이 심해[22] 장기간의 수리가 요구되어 한동안 전력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전술적인 측면에 한정하더라도 독일의 압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격침된 함정 중 1급 전력은 영국의 퀸 메리와 독일의 뤼초우뿐이다. 영국의 인빈시블과 인디패티거블은 비교적 오래된 함정이라 비교적 가치가 적어서 손해이기는 하지만 앞의 두 함정만큼의 손해는 아니다. 그리고 독일의 포메른은 아예 가치가 없는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고 격침된 영국의 장갑순양함 3척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한편 침몰한 독일의 경순양함 4척 중 3척은 최신형이라 순양함급에 있어서는 독일의 손해가 더 큰 편이다. 게다가 기술력과 경험의 문제로 독일 함정의 평균 수리기간은 영국 함정의 수리기간의 2배가 넘어갔고,[23] 수리가 필요한 군함은 영국의 2배인 14척이었다. 무엇보다도 젤리코는 귀환한 당일에 해전 이전의 전력 거의 전부를 동원할 수 있었지만 독일의 셰어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전략적으로는 영국의 승리였다. 사실 젤리코의[24] 뒤를 이어 대함대의 사령관이 된 비티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독일 해군이 출동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전략적인 승리도 결국은 독일 해군의 출동의지에 달려 있었다는 어정쩡한 것이었지만, 결국 이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게 치명타를 입히지 못한 독일 해군은 이후 영국 수상함대에 대한 도전을 포기하고 군항 안에 틀어박혀 있게 되고, 대신 유보트를 이용한 통상파괴전에 집중하게 된다. 이에 대한 아래의 명쾌한 비유가 유명하다.
"The imprisoned got out of their cell, punched the jailer & then returned."
"죄수가 감방에서 나와 간수를 후려치고 다시 감방으로 돌아갔다."
"죄수가 감방에서 나와 간수를 후려치고 다시 감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통상파괴전이 미군의 참전을 이끌어내는 한 이유가 되기도 했고[25] 결과적으로 그걸로 영국을 굶겨 죽이지도 못했다. 게다가 백일 공세이후 사실상 패전이 결정된 독일을 빠르게 항복시킨 단초도 킬 군항의 반란으로 알려진 수병 폭동이었다.
4. 영향
사실상 유일한 전함간 함대결전이라 그 후 전함 설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조준장비의 발달로 장거리 사격전이 가능해지고 그 결과 갑판으로 떨어지는 대낙각탄[26]에 대한 방어가 중요해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함의 측면방어 대신 갑판방어가 중요시되고 동시에 주포의 대구경화가 진행된다.[27] 또한 전함과 함께 함대결전에 쓰이기엔 순양전함이 너무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1차대전 직전에 불었던 순양전함 건조 열풍도 사그라들게 되었지만 이후에도 순양전함 건조계획은 존재했다. 미국의 렉싱턴급 순양전함, 일본의 아마기급 순양전함, 영국의 G3급 순양전함은 전부 유틀란트 해전 이후 계획된 함선들이다. 이 중 순양전함으로 완공된 것은 없으나[28] 이는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원인이지 유틀란트 해전으로 취소된건 아니다.소수 의견으로는 근대 백여 년동안 세계 제일의 실력을 자랑한다던 영국 해군이 건설된지 고작 30년도 못 채운 독일 해군을 거의 모든 함대 세력을 동원한 전투에서 명시적으로 이기지 못하고 반대로 명시적으로 전술적인 패배를 당했다는 점에서 유틀란트 해전은 영국 해군이 몰락하는 출발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도 있다. 그러나 독일의 전술적 승리도 완승이 아니라 판정승 수준으로만 이겼고 전략적으로는 영국의 판정승이었다.[29] 그리고 이 전투 이후 영국 해군은 성공적으로 독일 해군을 봉쇄했고, 독일 해군은 그야말로 유보트를 이용한 무제한 잠수함 작전 외엔 살길이 보이지 않았다.
유틀란트 해전에서 영국측 사령관이었던 젤리코와 비티는 2차 세계 대전때 킹 조지 5세급 전함의 4번함과 5번함의 이름으로 사용될 예정이었지만, 해전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윈스턴 처칠 해군장관에 의해서 각각 앤슨과 하우로 교체당했다. 사실 독일 함대를 전멸시킬 뻔한 기회가 있었지만 양측 사령관의 불화와 선택으로 그걸 놓쳤다는 시각이 우세했기 때문이기도 했다.[30] 그러나 두 사람 전부 해전 이후에도 잘만 승진해서 해군참모총장(First Sea Lord)까지 역임했던 걸 보면 보면 두 사람의 경력에 큰 문제로 작용한 것 같지도 않다.
여기에 더해서 젤리코는 선전보다는 경과보고와 분석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고가 늦었다는 이유까지 가세해서 일이 커졌다. 영국 함대가 크게 패했다는 비보도 아니거니와, 비록 피해를 더 크게 입긴 했으나 사실상 거의 전술적 무승부였기에 급하게 보고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겠으나, 해전의 결과가 영국에 늦게 도착했고 앞서 해전의 결과가 도착한 독일의 승전 주장 때문에 영국의 주가가 폭락하기도 했다. 결국 젤리코의 보고가 도착하고 처칠이 그 보고를 바탕으로 영국의 전략적 승전을 알리는 바람에 여론이 다시 돌아왔지만 이때의 경험 때문에 처칠이 젤리코와 비티에 대해서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다.[31]
전후 나온 음모론에 의하면 처칠, 젤리코가 서로 결탁해서 주가조작에 유틀란트 해전의 결과 발표를 이용했다고 한다. 이건 사실이 아니고 이런 고발을 한 사람은 체포되었다.
5. 매체에서의 등장
1993년 Software Sorcery 라는 회사에서 DOS용 CD-ROM 게임으로 나온 적이 있다.일본 인터넷에서 유행한 가공전기물 《바다 독수리의 연회》에서는 비티의 활약으로 유틀란트에서 독일 함대가 전멸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 이후 독일의 조기항복과 세계적인 거함거포주의의 증대와 기타 사정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에서 함대결전이 일반화 된다.
대체역사소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단지 언급으로 독일 북양함대와 영국 대함대가 몇번 교전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히려 유틀란트 해전의 패러디는 영국・프랑스 연합함대와 북부의 함대가 태평양에서 교전하는 "세나라 해군의 전투"이다. 여기서는 북부의 함대가 영불 함대를 전멸시키기 직전 갑자기 난입한 일본 함대로 인해서 전략적 승리에 실패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이 해전을 본격적으로 다룬 국문도서는 없다. 대체역사소설 1904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의 지원을 받은 독일과 영국이 붙는다. 독일 해군은 한국의 도움을 받아 더 긴 사정거리와 더 정확한 명중률로 무장한 신형 함포를 달고 영국 대함대와 함대결전에 나선다. 영국 해군은 사거리와 명중률의 열세로 얻어맞기만 하고, 독일 함대에 포위섬멸 당한다. 영국은 이 전투에서 무려 해군력의 7할을 상실하여 북해의 제해권은 물론 가까운 아일랜드 해헙의 제해권마저 내주고 만다. 결국 영국은 전 국토 요새화와 방어에 전 국력을 기울이고, 영국을 지원할 항로가 위협받게 된 미국은 위안스카이가 통치하는 황국이 한국을 치도록 유도했지만 계획은 사전 공작 단계에서 한국에게 발각, 도리어 한국의 보복 명령을 받은 일본 연합함대가 하와이를 공격한다.
Hearts of Iron 시리즈의 MOD인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설정상 1918년에 2차 유틀란트 해전이 일어난다. 독일 제국은 미국의 참전을 두려워해 1917년 무제한 잠수함 작전 재개를 하지 않으며 유보트 대신 대형함 생산에 주력했고 대양함대의 환상이 깨진 상황에 봉쇄는 여전한지라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지금까지 모았던 배들을 일거에 투입해 영국 왕립해군과 영혼의 한타를 벌인다. 그 결과 1차 전투의 규모를 압도하는 피튀기는 혈전이 벌어졌고 특히 독일은 도이칠란트급 전함 2척, 헬골란트급 전함 1척, 카이저급 전함 1척, 바이에른급 전함 1척으로 전함만 총 5척이 침몰되는 피해를 입는다. 1차에서 전투는 독일이 승리하고 전략적으로는 영국이 승리했던 것과는 반대로 2차에서는 전투는 영국의 승리였으나 쌍방의 손실이 너무 심해 이를 계기로 대독 해상 봉쇄를 완전히 포기하면서 전략적으로는 독일이 거대한 이득을 취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여기서의 교훈으로 모든 국가가 거함거포주의에 집착하며 역대급 드레드노트 경쟁이 펼쳐졌고 해군 군축 조약 등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전투 중 영국 항공기의 뇌격으로 바이에른급 전함 3번함 작센이 소파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으로 영국 해군의 소장파에서 항공모함으로의 교리 선회를 주장했지만 묵살당했다. 도를 넘는 드레드노트 경쟁으로 국력이 소모되며 1925년 영국 혁명이 일어나 브리튼 연방이 세워지고 왕실 인사 및 보수파는 캐나다로 피난했다. 1936년의 게임 시작 시점에는 세계 최강 독일 제국이 거함거포주의를 맹신하고 도전자 브리튼이 항공모함으로 선회한 상태에서 일본과 미국 역시 항모 중심 교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대체 역사 소설 매국노의 원수 자식에서는 '대함대를 보조하되, 북해에서는 손을 떼고 지중해 순찰을 해달라'[32]라는 영국 해군의 태도에 분노한 미국 해군 원정 함대가 주인공 이대일의 아이디어로 '독일 놈들이 어디로 가든 간에 항구로 들아올 거니까 기다렸다가 공격하자'라는 작전을 시행하는 전개가 추가됐다. 당시 미국 해군의 전투함은 공격력, 방어력은 몰라도 기관 출력이 딸려서 정상적으로 싸운다면 큰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독일 해군은 이미 영국 해군과 한판 붙으면서 기관이 제 힘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속도에서 밀리는 미국 해군도 큰 어려움 없이 독일 해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것에 성공했다. 독일 함대는 영국과 미국 두 나라의 해군에게 연속으로 얻어맞아서 최신형 주력 전함을 10척 이상 일는 등 전체 함대의 1/4 조금 넘는 함선을 잃고 말았다. 카이저 마리네의 궤멸로 이어질 정도는 아니어도 평생 후유증이 남을 정도의 중상이었으며 두번 다시 해상 봉쇄선 돌파는 엄두도 못내는 상황이 된 것. 이에 반해 미국 해군은 기뢰나 아군 오사로 인해 몇몇 함선이 대파된 것을 제외하면 피해는 전무했다. 즉, '재주는 영국이 부렸지만 공적은 중간에 끼어든 미국이 낚아챈' 상황이 된 것. 한편 전투가 끝난 후 이런 상황을 알게 된 영국 사회는 경악해서 '왜 미국 해군과 협력하지 않았냐', '모든 면에서 우위인 우리 영국 해군이 왜 이렇게 큰 피해를 입었냐' 등으로 엄청나게 시끄러워졌다. 반대로 미국 사회는 이 대전과에 대환호성을 질렀다.
6. 관련 문서
[1] 근처 구축함에서 촬영된 사진이다.[2] 찰스 매든, 월터 코언, 에드워드 알렉산더-싱클레어 등[3] 리하르트 폰 에카만, 한스 콜베, 한스 하르트만, 게오르크 폰 홀츠도르프, 휴고 도밍크 등[4] 여기서 어뢰정은 구축함을 뜻한다. 독일 제국 해군은 대부분의 구축함을 어뢰정으로 분류했다.[5] 동원된 군함의 규모와 배수량을 따지자면 레이테 만 해전이 역사상 제일 큰 해전이기는 하지만, 전함 숫자로 따지면 유틀란트가 더 규모가 크다. 일단 레이테 만 해전에는 항공모함이 대량 동원된 점도 있고. 기본적으로 해전의 규모는 배수량으로 따지는게 맞으니 레이테 만 해전이 역사상 최대의 해전이 맞다. 물론 여러가지 기준이 있겠지만, '전함이 주 전력인 해전' 중에서 유틀란트 해전을 넘어설 해전은 없다고 보면 된다.[6] '영국 해안도시에 포격을 가하고 튀면 영국 함대가 요격하기 위해서 튀어나올 것이다. 그때 상대할 만하면 격파하자.' 정도가 독일의 생각이었다.[7] 특히 우선목표가 된 것이 영국 해군의 순양전함들이었다. 독일 해군의 순양전함들이 영국 해안도시를 포격하러 갈 때마다 이 영국 해군의 순양전함들을 신경써야 했고 결국은 제대로 걸려서 독일 순양전함전대의 순양전함 3척은 겨우 귀환했지만 장갑순양함(당시 독일 해군은 순양전함 괴벤을 지중해에 파견했다가 1차대전 발발로 귀환이 불가능해져서 결국 오스만 제국에게 넘겨야 했다. 그래서 숫자를 맞추기 위해 장갑순양함을 순양전함 전대에 포함시켰다.)이 격침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영국 순양전함들을 유인해 오면 기다리고 있던 독일 전함들이 작살낸다는 컨셉이었지만 본문에도 나오듯 독일의 주력함들이 바다로 나온 걸 감청해 낸 영국 해군이 역으로 이 독일 전함들을 때려잡으려고 전함들을 내보낸 것이다. 그래서 독일 해군이 영국 전함부대들과 적극적으로 교전하지 않고 후퇴했던 것이다. 애초부터 영국 전함들과의 결전을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에..[8] 벨레로폰, 슈퍼브, 테메레르/세인트 빈센트, 콜링우드, 벵가드/넵튠/콜로서스, 허큘리스/에린/애진코트/캐나다/오라이언, 모나크, 컨커러, 썬더러/킹 조지 5세, 센츄리온, 애이잭스/아이언 듀크, 벤보, 말보로/워스파이트, 벨리언트, 바럼, 말라야/리벤지, 로열 오크[9] 나사우, 베스트팔렌, 라인란트, 포젠/헬골란트, 오스트프리슬란트, 튀링겐, 올덴부르크/카이저,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셰, 카이제린, 프린츠레겐트 루이트폴트/쾨니히, 그로서 쿠어퓌르스트, 마르크그라프, 크론프린츠[10] 헤센/도이칠란트, 하노버, 포메른†, 슐레지엔, 슐레스비히-홀스타인[11] 인빈시블†,인플렉시블, 인도미터블/인디패티거블†, 뉴질랜드/라이온, 프린세스 로열/퀸 메리†/타이거[12] 폰 데어 탄/몰트케/자이들리츠/데어플링어, 뤼초†[13] 순양전함 6척+고속전함 4척(제5전함전대)vs순양전함 5척[14] 제5전함전대의 지휘관.[15] 라이온과 프린세스 로열이 선두의 뤼초를, 퀸 메리가 데어플링어를, 타이거가 자이들리츠를, 뉴질랜드가 몰트케를, 마지막 인디패티거블이 폰 데어 탄을 사격하도록 명령했으나, 퀸 메리가 느닷없이 자이들리츠를 쏴갈기면서 데어플링어에게 마음 놓고 반격할 기회를 줘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16] 함 중앙에 위치한 포탑이 피격당해 유폭할 뻔했으나 포탑에서 살아남은 장교가 물을 채워서 폭발은 막았다.[17] 제5전함전대가 이 직후 폰 데어 탄의 뒤를 치긴 했으나 격침하지 못했다.[18] Chatfield는 기함 라이온의 함장이던 어늘 챗필드(Ernle Chatfield). bloody에는 터무니없는, 괘씸한 등의 뜻이 있고 숙어로 hell이 붙으면 빌어먹을 이라는 뜻이 있음.[19] 그래도 직전에 경순양함 비스바덴을 유폭, 대파시키는 전공을 세우긴 했다.[20] 디펜스는 유폭하면서 생존자를 한명도 남기지 못했지만 워리어는 68명의 전사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상대적으로 여유롭게 퇴함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5전함전대의 '''워스파이트의 키가 갑자기 고장나 독일 전함들의 한가운데로 난입하며 도발을 해서였다.[21] 실제로 비티가 지휘하는 순양전함대의 명중률은 매우 낮았다.[22] 당장 위 사진을 보면 자이들리츠의 주포가 포신이 빠져 있는데, 이는 전투 중 손상되거나 파괴된 것이 아니라 홀수가 너무 깊어서 항구 입항이 어려워지자 무게 감소를 위하여 승조원들이 입항전에 제거한 것이다. 이렇게 간신히 무게를 줄이는 작업을 하고나서야 자이들리츠의 흘수가 얕아져서 입항할 수 있었다고.[23] 이는 기재 태세와 손상 통제에 대한 전훈을 독일 해군이 영국 해군 대비 일찍 얻은 것과 전장의 행운이 독일 쪽으로 작용한 결과도 크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피격량 자체는 동등 내지는 독일 해군이 더 컸지만, 영국 해군의 순양전함들이 유독 유폭하면서 영국 쪽의 손해가 상대적으로 커진 것이다. 반면 독일 해군은 더 많이 얻어 맞고 중파/대파된 배가 많지만 여하간 침몰은 면했기에, 겉으로 보이는 전손(Total loss)은 적어도 전투 직후 재동원 가능한 전력에선 열세가 심해진 것이다. 만약 영국 해군 쪽에서 유폭이 안 났거나, 독일 해군 쪽에서도 비슷하게 유폭이 났다면 전술적 측면에서도 자이들리츠는 확실히 격침되는 등 영국의 승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24] 젤리코는 유틀란트 해전을 치른 몇달 뒤 제 1 해군경(해군참모총장이라고 보면 된다.)으로 영전한다.[25] 물론 결정적인 이유는 치머만 전보 사건과 러시아 제국의 동부전선 이탈이었지만 통상파괴전도 아예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다.[26] 함선의 탄이 장거리를 날아가면 장약에 의한 속도를 상실하게되고, 따라서 포탄의 무게에 따른 낙차가 발생하게된다. 때문에 전함의 탄은 대구경의 굉장히 무거운 탄이었으므로 낙각이 더욱 커지게 된 것이다.[27] 그러나 이어없게도 이 전투에 참여하였던 독일 측은 이후 베르사유 조약의 영향으로 건함 경험을 잃게 되었고, 결국 2차 세계대전 직전 건조한 비스마르크 전함에서 갑판방어를 고려하지 않고 측면방어에 투자하는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만다.[28] G3는 계획 자체가 취소되었고 렉싱턴급과 아마기급은 항공모함으로 개조되었다.[29]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보는 영국 해군의 진짜 몰락은 그로부터 25년 후에 벌어진 말레이 해전과 뒤이어 벌어진 실론 해전이다. 이 두 전투에서 완패하며 영국은 태평양 일대의 재해권을 약 3년 가까이 상실하였기 때문.[30] 다만 이후 1935년에 젤리코가 사망했을 때 비티가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에 참석한걸 보면 그런 불화와 별개로 둘 사이의 관계가 그렇게 나쁜건 아니었던것 같다.[31] 사실 젤리코는 이전부터 처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처칠도 두고두고 젤리코를 깠다.[32] 당시는 그 유명한 갈리폴리 상륙작전이 실패하고 몇 개월 뒤였다. 즉, 말이 순찰이지 자기네들이 실수한 거 대신 처리해달라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