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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 해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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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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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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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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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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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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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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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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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 해전
Naval Battle of Malaya
マレー沖海戦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Prince_of_Wales_and_Repulse.jpg
▲ 공격받고 있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리펄스[1]
날짜
1941년 12월 10일
장소
남중국해
교전국
[[영국|]][[틀:국기|]][[틀:국기|]]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
지휘관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틀:깃발|]] 톰 필립스 경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틀:깃발|]] 존 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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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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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윌리엄 테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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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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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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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지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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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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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틀:깃발|]] 쇼지 하치로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틀:깃발|]] 나카니시 니치
전력 전함 1척[2]
순양전함 1척[3]
구축함 4척
뇌격기 34기
공격기 51기
정찰기 3기
피해 규모 전함 1척 침몰
순양전함 1척 침몰
840명 전사
항공기 4기 손실
항공기 28기 손상
수상기 2기 실종
18명 전사
결과
일본 제국 해군의 승리
영향
태평양에서 영국 왕립해군의 영향력 상실, 일본의 남중국해 제해권 장악

1. 개요2. 명칭에 대해3. 배경4. 진행 과정
4.1. 영국 해군의 전략 기동4.2. 일본군의 남방작전4.3. 영국 해군의 오판4.4. 출격과 회항4.5. 영국동양함대궤멸
5. 결과6. 평가7. 여담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태평양 전쟁 극초기인 1941년 12월 10일에 일본군의 남방작전에 대응하고자 출격한 영국 해군 Z기동함대와 이를 요격하기위해 나선 일본 제국 해군 항공대 사이에 벌어진 해전. 해군이 제공권 한 번 잃으면 어떤 꼴이 나는지를 확실히 보여준 전투이며, 실론 해전과 더불어 영국 해군 역사상 두번 다시는 생각도 하기 싫을 최악의 흑역사이다.

또한 비스마르크 추격전, 야마토 격침과 더불어 해전의 주도권이 전함을 비롯한 거함에서 항공모함과 함재기/항공기로 넘어간 것을 상징하는 해전이기도 하다.

2. 명칭에 대해

영미권에서는 해전 명칭을 붙이지 않고 'Sinking of Prince of Wales and Repulse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의 격침)'으로 주로 표현한다.

이렇게 적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 Naval Battle로서 성립하려면 함대함 교전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일본과는 달리 영국은 공군이 독립되어 있었고, 미국 역시 사실상 독립한 상태인데다가 해군 항공 주특기가 주요 분야로 있었기 때문에, 영미권에서 항공모함의 기여도가 없거나 미미한 상태에서의 항공기 VS ETC라면, Air Strike and Result 로 간주된다. 그리고 같은 논리로 해군 수상함도 지상군과 교전하면 Bombardment (포격)이라고만 부른다. 반면 일본은 항공대가 그만한 지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육군 혹은 해군의 것으로 쳐서 '해전'이 된다.

영미권에서 이 문제는 생각보다 까다롭다. 왜냐하면 Naval Battle이라고 하면 '뱃놈'들이 뭘 해줬는지가 있어야하기 때문이고, 그런게 없는데도 해전이라 부른다면, 예나 지금이나 항공 주특기의 독립성에 시비를 거는 것이거나, 파일럿들이 X빠지게 해놓은 성과에 수상함들이 숟가락을 올리는 것이기 때문. 이러한 이유로 해전이라 부를 것 같은데 해전이라 부르지 않는 다른 예시로는 과달카날 해전의 '막간극'이라든가[4], 포클랜드 전쟁의 셰필드 격침을 들 수 있다.[5] 같은 이유로, 노르웨이 침공에서는 해군 함선없이 육상 포격으로 격침시킨 블뤼허의 격침을 해전으로 보지 않는 반면, 구축함 VS 중순양함의 교전에 불과했던 글로웜의 최후는, Final Battle이라고 불러준다.

다른 두번째는 Battle이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의 문제다. 즉 Battle은 양자가 교전에 참여한 상태(Engagement)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공방전(Decisive Results)이 되어야 한다. Engagement에 대해 좀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엄밀히는 사단급 이하, 중대급 이상 규모의 아군과 적군이 작전 목표를 가지고 충돌하여, 어느 한쪽이 목적을 달성하거나 상대의 목적 달성을 좌절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첫번째 Naval Battle과도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일반적으로 수상함이 항공기와 교전하거나, 지상군이 포격중인 수상함과 교전하는 경우는 (어느 일방이 너무 불리한 탓에) 작전 목표가 항공기 혹은 포격중인 수상함을 파괴하는 것인 경우는 거의 없다. 수상함이 지상발진 항공기와 교전하는 경우는 작전 목표를 수행하기 이전에 그냥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Engagemet만 있고 Decisive Results가 없는 경우, 굳이 이것들을 따로 분류해야 하는 경우에 skirmish라고 부른다.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함재기들과는 달리, 잠수함들이 항공모함이나 전함을 격침시켜도 Battle이라는 꼬리표를 절대 안붙여주는 이유는 당연히 격침된 대상이 잠수함을 대상으로 Engagement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침공의 HMS 글로리어스가 격침될때, 호위함이었던 Acasta, Ardent의 교전은 Engagement라고 표현하지만. Glorious는 그냥 Engagement없는 sinking이다.

Decisive Results 의 경우는 어느 정도 가치판단이 있을 수 밖에 없으므로, 이 부분에서 서로의 평가가 다르다면 함선끼리 교전했을지라도 명칭이 다를 수 있다. War가 Decisive Results를 낳는 일련의 Battle로 구성된다고 볼때, 페낭 해전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반면 그 기준이 전과라고 친다면, 일본 기준으로 해전이 될 것이다. 글로웜의 경우는 더 적절한 예시인데, 작전상 큰 흐름에 영향이 없다고 보는 주류적인 입장에서는 Action이라고 평가하고,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이 본격적으로 충돌하게 되면서, 어드미랄 히퍼를 조기에 강판시키는 바람에 1차 나르빅 해전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면 Battle로 간주하게 된다.

그 결과, 말레이 해전은 일본 기준으로는 해전이지만, 영미권 기준으로는 영국의 태평양 영향권 상실이라는 Decisive Result가 확실하긴 하나 함대함 교전이 아닌 수상함 VS 항공기의 대결이고, Z부대가 작전 목표를 가지고 일본 항공 세력과 충돌한 것이 아닌 일방적인 공습을 당한 것이므로, 이 전투는 그냥 파일럿들의 Trophy로서의 Sinking이 된다. 서로의 호칭을 바라보는 경우, 일본에서 보기에는 전과를 축소한걸로 보이지만, 영국 기준에서는 일본은 부사관 파일럿들이 해군 장교 지휘 하에 종속되어 있었고 독립성이 없었으니 그렇게 부르겠네... 정도로 생각하게 된다.

덧붙여서 저러한 차이를 잘 알 수 없었던 일부에선 서구 측에서 전투의 결과로 자신들이 당한 일방적인 패배를 정확히 묘사하지 않고 의미축소 했다는 오해가 생긴 적도 있다.

3. 배경

1941년 10월에 일본 제국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 온건한 노선을 밟던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몰락한다. 일본과의 전운이 감돌자, 영국 전시 내각에선 태평양 영국령의 방위를 강화하는 방안을 논의한다. 이때 해군에서는 넬슨급 전함리벤지급 전함을 보내는 것을 제안하였으나, 넬슨은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고, 로드니는 승조원 휴가에 소규모 개장이 예정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현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리벤지급 전함과 넬슨급 전함은 속도도 느렸기 때문에 이탈리아가 버티고 있는 지중해를 포기하고 희망봉을 돌아 싱가포르로 간다면, 제때 도착할 수 있을지나 문제였다. 타란토 공습이 성공하긴 했지만 아직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지중해 항로의 큰 위협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칠의 제안을 따르지 않는다면 영국은 답이 없는 두 가지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다. 하나는 지중해를 통해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이탈리아 해군&공군과 한판 붙고 나서 손상을 겪지 않은 함대만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것인데, 이건 추축국에게 영국 함대가 대거 동아시아로 이동했다고 광고까지 하는 꼴이 되고, 반면 희망봉을 통해서 빙 돌아가는 루트는 함대 자체의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지만, 정작 함대가 일본이 침공하는 시점에 제때 도착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다수의 전함을 동원한 영국 해군은 무력하게 패배하진 않겠지만, 태평양의 영국령들은 영국 해군이 도착하지 못한 탓에 일본 해군과 싸우지도 못하고 굴복하게 될 것이었다. 덧붙여서 이때 리벤지급 전함이 지중해로 갈지 희망봉으로 갈지는 논의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10월 20일, 내각에서는 논의 끝에 리벤지급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가용한 전함이던 킹 조지 5세급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를 남아프리카 케이프 타운으로 보내기로 한다. 이후 극동의 상황을 봐가면서 이 전함을 다시 싱가포르로 보낼지 여부를 결정할 것이었다. 혹시 모를 본토의 위기가 온다면, 이 전함을 다시 영국으로 불러들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자, 일본군이 서방 국가들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철수하기는 커녕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는 막장 행보를 보여주었다. 이제 영국 내각에서 극동에서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방안을 논의해야하는 시점이 왔다. 여기서 해군참모총장이던 더들리 파운드 경의 계획은 넬슨급 전함인 넬슨과 로드니, 그리고 리나운급 순양전함 리나운리벤지급 전함 4척을 파견하여 9척의 일본 전함과 맞서는 것이었고, 이는 최신예 전함인 킹 조지 5세급 전함과 예비용 기동 부대 역할의 리펄스를 독일의 전함 티르피츠샤른호르스트의 2척 및 이탈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본토에 남겨두고, 그를 제외한 영국의 모든 전함을 투입하는 대규모 작전이었다.

하지만 독일, 이탈리아의 해군과 치고받는 와중에 그렇게나 거대한 주력함 투입계획이 통과될리가 없었다. 당장 위험해역을 항해하는 호송선단 하나당 전함이 2 ~ 3척씩 투입되는게 현실이었다. 그래서 애초에 더들리 본인도 통과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의문스러워 하는 사람도 있으며, 10월의 계획을 조금만 바꿔서 동일한 말을 반복하며 내각의 군사적 비전문성을 조롱한게 아닌가 하는 말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실현되도 문제인 것이 일단 투입할 주력함의 속도가 최상의 조건에서도 최대 23노트 수준으로 느린데다가 리벤지급 전함은 전간기의 경제난을 겪고 2차대전이 터지면서 전가의 보도처럼 잦은 출격을 하는 동시에 다른 곳에도 자금이 투입된 결과 노후화와 정비불량등으로 인해 실제로는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수준의 속도인 18노트 수준만 내도 다행일 수준이었다. 넬슨급 전함은 상대적으로 상황이 나았지만 애초부터 한정된 배수량인 3만5천롱톤에서 공격과 방어를 중시하고 어쩔 수 없이 주행을 희생하면서 덩치에 비해 동력기관이 적은 편이라 평시에도 과부하상태로 가동하고 항행성능도 매우 안좋아서 종합적으로 본다면 리벤지급 전함과 도찐개찐의 상황이었다.

이렇게 항행속도가 느린 상태에서는 싱가포르에 도착할 쯤에는 싱가포르가 이미 일본군에게 함락당할 위험성도 높았으며 대공화기도 저성능인데다가 충분치도 않아서 일본군의 공습을 막아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물론 전함의 숫자가 많으므로 말레이반도를 침공하는 일본군을 호위하는 수준의 일본측 함대로는 상대하기가 곤란하니 잠시동안 일본군의 진격을 방해할 수는 있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진주만 공습을 끝내고 오는 제1항공함대를 비롯한 일본 제국 해군의 주력을 만나면 순식간에 제공권을 상실해버리고 공습의 찜질을 당하다가 느린 속도로 제대로 후퇴하지도 못한 채 함대가 전멸할 위험성도 컸다.

처칠은 더들리 파운드 경의 계획에 반대하고 신형 전함인 킹 조지 5세급 1척과 리나운급 순양전함 리펄스,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인도미터블로 구성된 최신예 주력함들을 소수 정예로 파견하는 것만으로도, 통상 파괴전을 수행하려고 하는 일본 해군을 상대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파병 반대파와 해군참모총장을 설득하기 위해, 북대서양과 지중해에서의 독일과 이탈리아의 활동이 모든 함대를 영국 본토에 두어야 할 정도로 활발하지 않을 것이어서 함대를 보낼 여유가 있으며, 해당 함대가 일본의 작전에 잘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을 보였다. 또한, 처칠 본인은 구형 전함은 최신예 주력 전함에게 질 수 밖에 없는게 상식이던 당시의 관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이 자신감은 과거의 나온 서적에서는 꽤나 조롱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실은 이미 이 시기에 울트라 작전을 통해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고, 일본의 암호 해독에도 상당한 진전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해군의 기동을 미리 알 수 있으므로 교전 선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 자신감이었다.[6] 그리고 실제로도 티르피츠의 출항 여부를 예보하는 용도로 써먹고도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처칠은 파병할 생각이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군인들은 보급이 나오고 그걸로 싸워서 이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내각은 그 보급을 만들어야 하고, 국민들에게도 나누어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원과 자본이 필요하다. 영국의 경우 아시아 지역의 주요 식민지는 인도, 버마, 말레이시아, 호주뉴질랜드가 있었고, 이들을 통제하는 핵심 거점이 싱가포르였다. 그리고 거기서 중국의 해안선을 타고 올라가면 중국과의 무역을 위한 홍콩상하이가 있었다. 일본과 전쟁을 하는 경우, 홍콩, 상하이를 지킬 것이라는 기대는 아무도 하지 않았으며, 실제로도 군대가 지키지 않고 싱가포르로 철수해버린다. 하지만 싱가포르, 인도, 버마, 호주는 사수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인적 물적 자원의 역내 교역을 할 수 없고, 영국 본토로 자원도 자본도 인력도 들어오지 않게 된다. 그러면 당장의 전투는 이기더라도 전쟁은 지는 꼴이니, 영국령을 내줄 것이라면 애초에 왜 함대를 보내는지조차 의문스럽게 된다. 그리고 이 우려는 현실이 되어, 말레이 해전의 패배, 이탈리아의 지중해 봉쇄,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모든 영국의 식민지 교역로가 폐쇄되었고, 영국은 미국에게 카리브 해의 섬들을 내주며 북미 대륙에 생명선을 이은 채로 연명해야 했다. 그리고 누적된 전쟁 적자 때문에 전후에는 열강국의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그러니 처칠은 그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 아시아에 해군을 보내야 했고, 일본의 진공 속도에 맞춰서 가용할 수 있는 주력함 중에서 가장 빠른 것들을 골라내서 태평양에 보내야했기에 앞서 말한 소수 정예의 파견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전쟁이 터지고 초기 전황이 안좋으면 투입했던 해군 함대를 빠르게 철수시켜서 다른 곳으로 보낼 생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태평양함대가 대타격을 입자 영국시간으로 1941년 12월 9일 밤 11시에 열린 전쟁내각 회의에서 Z기동함대를 진주만으로 파견하자고 처칠이 주장했고 전쟁내각은 해당 주장에 찬동했다. 회의가 매우 늦은 저녁에 열린 상태라 다음날 아침에 구체적으로 Z기동함대의 주력함인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리펄스에 대한 조치를 명령할 것인지 결정하기로 하고 일단 회의를 끝냈으나 이미 때가 늦어서 회의가 끝난지 2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두 척의 주력함이 침몰하고 만 것이다.

4. 진행 과정

4.1. 영국 해군의 전략 기동

결국 처칠의 주장대로 톰 필립스 경을 사령관으로 함대를 싱가포르로 파견했다. 함대 구성은 각각 전함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 순양전함 HMS 리펄스, 구축함 HMS 일렉트라, HMS 익스프레스, HMS 엔카운터, HMS 주피터다. 10월 23일에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구축함만 데리고 홀로 출발해서, 11월 16일에 케이프타운에 도착한다. 이 시점에 이미 지침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보급을 받고 나서 싱가포르를 향해 바로 떠나게 된다. 함대는 11월 28일에 실론 섬 콜롬보에서 보급을 받기 위해 기착했고, 여기에 주둔하고 있던 리펄스가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합류한다.

그런데, 당초에 함대에 합류하기로 했던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인도미터블은 11월 3일에 카리브 해에 있는 자메이카 킹스턴 항구에서 프린스 오브 웨일즈 함대와 합류하기 위해 출항하다가 항구에서 육지 위로 배가 올라가버린 상태였다. 인도미터블은 미국 버지니아 주 노퍽에서 12일간 수리를 해야했고, 함대에 합류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보급을 받은 케이프타운에는 항공모함 허미즈가 별다른 임무가 없는 상태였지만, 영국 해군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프린스 오브 웨일즈만 파견한다. 그 이유는 허미즈는 최대속력이 25노트였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은 최대 항속이 30노트였기 때문에 데려가려 한 것인데 25노트는 다른 두 척의 전함보다 너무 느렸고, 함대를 구성한 취지에 어긋나서 데려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일어난 결과를 생각해볼 때 차라리 함대 속력을 25노트 이하로 줄여서라도 항공모함을 데려가서 함대 상공을 방어하는 엄호 전투기를 머리 위에 올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항공모함 없이 인도양에서 결집한 함대는 1941년 12월 2일에 싱가포르에 입항했고, 여기서 Z함대(Force Z)가 결성된다. 이 함대는 내각의 지시에 따라 말레이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며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영국령으로 침입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후 리펄스는 2척의 구축함을 데리고 호주로 출발하지만, 싱가포르 방어를 위해 회항한다.

처칠은 '일본 해군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2척의 전함을 싱가포르로 보냈다'고 대외적으로 발표한다.

4.2. 일본군의 남방작전

12월 7일(싱가포르 시간으로 8일. 이후 서술은 싱가포르 시간.)에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했고, 영국에도 그 소식이 전해졌다. 국제정치적으로는 독일과 사투를 벌이던 영국에게는 미국이 참전하게 되므로 좋은 소식이지만 태평양과 인도양 방면의 실제 전황면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처칠과 영국 전시 내각 역시 Z함대의 주력함 2척만으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를 지키면서 일본 해군을 저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처칠은 싱가포르가 공격받는 경우에는 진주만에 있는 미 해군 전함들의 도움을 받고, 그렇지 않다면 영국 전함을 진주만으로 보내서 미국 태평양 함대의 해군력을 증강시키려는 구상을 하고 있었는데, 도와달라고 하려 했던 그 전함들이 진주만에서 대부분 박살난 것이다.[7]

진주만 공습이 성공하자, 홍콩과 필리핀에 대한 공세를 시작으로 일본군의 남방작전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중국 본토를 점령한 육군과 바다의 해군으로 홍콩을 칭칭 둘러싸고 영국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진주만 기습이 끝나자마자 선전포고 없이 8일부터 공세를 벌인다. 영국군은 홍콩에 주둔중이던 함대를 전부 싱가포르로 철수시킨 상태였으나, 홍콩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 육군, 도와주기 위해 도착한 캐나다 육군, 그리고 예비역 지역방위대인 홈가드는 일본군과 사투를 벌였으며, 25일이 되어서야 홍콩이 함락된다.

필리핀의 미군도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결국 3월 12일에 더글라스 맥아더가 호주로 탈출하고, 6월 9일에 코레이도르 섬과 드럼 요새가 항복하면서 필리핀이 모두 함락된다.

일본군은 말레이시아의 코타바루에 상륙했고, 말레이 반도의 영국 공군기들을 차례로 파괴해 나갔다. 게다가 일본군의 남방 작전은 기밀 사항으로 꽁꽁 숨겨두었던 일본 육군의 Ki-43 하야부사가 데뷔한 전투였으니, 말레이 반도 방면에서의 항공기의 전투 교환비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말레이 반도의 영국 공군력은 사실상 소멸하고 만다.

이렇게 영국 공군이 힘을 못 쓴 이유가 있다. 동남아에 주둔중인 영국 공군은 전투기의 주종이 F2A 버팔로로 성능이 크게 뒤떨어지는다가 숫자도 부족했고, 조종사들의 실력도 중일전쟁을 치르고 온 일본 조종사들에 비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다.

항공기의 경우에는 개전 전의 경제난도 있었고 개전 후에도 독일, 이탈리아와 치고받던 영국 본토 항공전북아프리카 전역 때문에 슈퍼마린 스핏파이어호커 허리케인의 보급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 전투기는 영국 본토의 환경에 맞춰져 있었고, 열대 지역에서의 작전에 대비된 기체들이 아니어서, 후에 이들 기체를 보급받은 호주군도 곤욕을 치른다. F2A 버팔로는 때마침 미국에서 등장한 가성비 항공기였으나, 실전에서의 성능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1941년 6월에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는 독소전쟁이 터짐으로서 약간의 여유가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1선급 전투기를 약간이라도 동남아 방면에 보급하지 않은 처칠이었다. 이미 항공력 증파를 요구하는 수많은 보고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본토 항공전같은 작전에서 폭격기가 비행하는 구간중 일부라도 호위기를 붙여놓으려고 1선급 전투기를 모두 붙잡아 둔 피해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만일 소수라도 스핏파이어나 허리케인이 싱가포르에 있었다면 그렇게나 빠르게 항공기를 소모해버리고 제공권을 날려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홍콩과 필리핀, 말레이에 대한 공세와 거의 동시인 8일 아침에 싱가포르도 일본 항공기의 공습을 받았다. 그리고 싱가포르를 공습한 항공기 부대로부터 싱가포르에 전함 2척이 정박중이었다는 사실이 보고되자, 당시 남방함대사령장관이었던 오자와 중장은 제22항공전대에 즉시 공격명령을 내린다. 제22항공전대는 처칠의 공개발표를 듣고나서,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Z함대를 저격하기 위해 G4M 폭격기 36대를 증강시켜 준비한 항공기 부대였다.

4.3. 영국 해군의 오판

현지에 있던 Z함대 지휘관이었던 톰 필립스 제독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의 영미연합군 수뇌부와 미팅을 마친 상태였고, 2척의 전함으로는 어림도 없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하지만 말레이시아로 침공해 들어오는 일본군의 공세를 저지하라는 지시를 받고, Z함대는 싱고라에 있을 것이라 예상된 일본 함대를 저지하기 위해 출항해야 했다.

그러나 영국 공군으로부터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톰 필립스 제독은 상황을 너무나 낙관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군의 항공기가 대양에서 작전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전투가 벌어진다 해도 함선들이 일본 항공기의 공격 정도는 무난히 막아낼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이미 노르웨이 침공이나 진주만 공습 등의 전훈으로 대공포만으로는 공습을 막아내기 어렵다는 전훈은 얻었으나 일본의 장거리 대함공격 능력에 대해서 당대에 백인에게 만연했던 백인 우월주의적 사상으로 제멋대로 오판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오판을 마냥 비난할수도 없는 것이, 말레이 해전 직전까지 "작전 항행 중에 항공기의 공습으로 침몰한 전함"은 단 한척도 없었다. 진주만 기습에서 보듯이 항공기에 의한 전함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까지는 인지하고 있었으나 원양에서 작전 항행할 경우 비행기의 항속거리 등에 따라 공습이 쉽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항공기의 구조와 조종사의 안전을 희생해가면서까지 항속거리에 목숨을 건 데다가[8] 이미 실전경험까지 풍부하게 장착한 일본이었다.

물론 당시 현지에 있던 극동총사령관(Commander-in-Chief, Far East) 로버트 브룩포팸 공군대장처럼 영국군에도 항공력의 위험성을 잘 아는 인물도 있었고 중국총사령관(Commander-in-Chief, China) 제프리 레이턴 해군중장처럼 극동지역에서 오래 근무해서 현지에 정통한 지휘관도 있었다. 하지만 동양함대 총사령관 톰 필립스 제독은 해군대장의 계급을 가지는데다가 영국 수도인 런던에 있는 영국 해군성의 명령을 직접 받는 입장이었으며 곧 극동 지역의 영국 해군을 총지휘하는 임무를 받았다. 따라서 브룩포팸이나 레이턴 등의 조언을 들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따라서 싱가포르 시간으로 12월 7일 저녁 늦게 브룩포팸 대장과 최근 정세와 향후 활동에 대해 논의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내용을 영국 본토의 해군성에게 보고하면서 톰 필립스 제독은 자신이 이후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때우는 짓을 해버렸다. 이유는 해군참모차장이라는 최고위 직책까지 해본 톰 필립스 제독이 현지에서 엄청나게 먼 영국 본토의 해군성에서 자신에게 세밀하게 명령내리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으로 덕분에 현지의 영국 육군과 영국 공군을 지휘하는 로버트 브룩포팸이건 영국 해군성이건 간에 톰 필립스 제독이 Z기동함대를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빠르게 대응한답시고 호위함을 매우 적게 데리고 가는 실책까지 저질렀다. 2일만 싱가포르에 머무르면 중순양함 1척, 네덜란드 해군의 경순양함 1척, 미국 해군의 구축함 4척을 호위함으로 추가할 수 있었다. 만일 이들 군함들을 모조리 끌고 나갔다면 대공화력이 크게 강화되었을 것이고 전투기의 상공엄호도 가능해졌을 것이며 앞서 말했듯이 영국 본토에서 새로운 명령이 내려와서 진주만에 있는 미국 태평양함대와 합류하게 되므로 좀 더 전력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톰 필립스 제독의 오판이 패배의 가장 큰 요인인 것은 맞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문제를 일으킨 더 근본적인 원인은 극동지역과 동남아 지역에 비슷한 계급을 가진 서로 다른 군종에 속한 고위장성들이 사령관 직책을 담당하는 복잡괴기한 현지의 지휘체계가 1차 원인이고 뒤늦게서야 일단 극동총사령관 로버트 브룩포팸 공군대장으로 지휘권을 일원화하려고 하니까 영국 해군성에서 공군 장성말을 듣기 싫다고 해서 해군만 따로 톰 필립스 제독이 지휘하도록 한 일원화 실패에 있다.

만일 로버트 브룩포팸 공군대장이 지휘권을 잡고 있었다면 싱가포르에 폭격이 온 것을 감안해볼 때 일본군이 장거리 폭격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바로 깨달을 수 있으며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사이공에서 말레이반도 남부까지의 740km 수준의 원거리를 항공폭격할 수 없다고 믿는 톰 필립스 제독의 편견을 고치고 좀 더 많은 호위함이 합류하도록 Z기동함대의 출항을 늦출 것이며 함대 상공을 지키는 엄호기도 제대로 파견해놓았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두 척의 주력함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크게 올라간다.

4.4. 출격과 회항

제22항공전대는 명령에 따라 오전에 바로 정찰기를 출격시켜 Z함대를 찾기 시작했다. 정찰기는 영국 전함이 싱가포르에 정박중이라는 오보를 전했고, 일본 항공대는 그에 따라 폭탄을 장비하고 출격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오후 3시에 I-65 잠수함이 Z함대를 발견하고는 위치를 보고했고, 항공대는 폭탄 무장을 어뢰로 교체하는데 시간을 낭비하느라 출격했을때는 이미 오후 7시가 넘은 시점이었다. 이때 Z함대는 항공 엄호 없이는 작전수행이 힘들 것이라는 해군 중장 필립스 제독의 판단에 따라 이미 싱고라 공격을 포기하고 싱가포르로 회항하는 중이었다. 한편 오후 5시 30분에 보고를 받은 오자와 중장은 중순양함 5척을 포함한 수뢰전대를 이끌고 Z함대의 요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고 스콜과 같은 날씨때문에 Z함대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 되자 영국 함대는 일본 항공대를 피해 싱가포르로 귀항할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일본 항공대는 자국의 타카오급 중순양함 쵸카이를 프린스 오브 웨일스로 착각하고 조명탄을 발사하는 등 수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9]

10일, 일본군은 새벽이 밝자마자 정찰기를 띄워 Z함대를 찾기 시작하면서 발견되기도 전에 공격대를 미리 발진시켜놓고 영국 함대가 발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에 Z함대는 일본군 잠수함 I-58에 의해 발각되었으나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 무렵 Z함대는 쿠안탄 해안에 일본군 함대가 있다는 오보를 받았다. 필립스 중장은 무전을 받았으나 위치가 밝혀질까봐 무선침묵을 지키면서 회답을 하지 않고 쿠안탄으로 향했고, 함대가 쿠안탄으로 이동하겠다는 보고를 받지 못한 사령부는 항공엄호를 보내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서 추가하자면 필립스 제독은 출항하기 전 10일 낮 동안 싱고라 상공에 전투기 엄호를 요청하였다.
그후 8일에 출항한 Z함대는 5시간후인 오후 10시 43분에 전문을 받았다. 그 내용은 10일에는 전투기에 의한 엄호는 불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싱고라 상공이라는 말이 빠져있었다. 이를 본 필립스 제독은, 상황이 매우 나빠 싱고라 상공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든 항공엄호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항공엄호를 요청하지 않고 무선침묵을 지켰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어뢰에 맞고 나서도 전투기의 엄호를 요청하지 않고 오히려 구축함 파견을 요청한 것을 볼때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히려 교전 1시간후에 리펄스의 함장이 필립스 제독이 아직도 항공지원을 요청하지 않은 것을 뒤늦게 알고 경악하며 긴급히 영국 공군에 항공지원을 요청했지만 벌써 적절한 시기를 놓친후였다.

만약 항공요청이 제대로 되었다면 영국함대는 생존할 가능성이 있었다. 일본 해군 항공대는 항속거리 문제로 호위 전투기가 전혀 없이 베트남 사이공에서 공격기들만 출격했기 때문에, F2A 버팔로도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말레이 반도의 영국 공군이 개전 초반에 치명타를 입어서 지원이 힘들어진 상황이긴 했지만 아직 가동할 수 있는 전투기가 많이 남은 상태고 주력함 2척이 상공 엄호기를 요청하는 데 대응을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늦게 나온 항공요청을 받고 함대 상공에 영국 전투기가 날아오긴 했다.

이 오인 정보로 인해 해안을 수색하는데 또다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한 Z함대는 쿠안탄에 일본 함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퇴각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쿠안탄을 비행하던 일본군 정찰기가 그들을 발견한 뒤였다.

4.5. 영국동양함대궤멸

12월 10일 오전, 일본군 정찰기 중 1기가 쿠안탄에서 끝내 Z 함대를 발견하여 G3M[10] 폭격기들이 2차례에 걸쳐 출격했고, 오전 10시 및 11시 13분경에 각기 폭격을 실시했다. 총합해서 8대의 폭격기와 25대의 뇌격기가 공격에 참가했다.

이 폭격에서는 250kg 폭탄 1발만이 명중했다. 명중탄은 리펄스의 우현 후방에 위치한 수상기 격납고와 그 아래에 있던 해병숙소를 관통한 후 보일러실을 덮고 있는 장갑판 위에서 폭발했다. 이 폭발로 해병숙소와 사출기 부근에 불이 났으며 왈루스 수상기 1대가 파괴되어 바다에 버려야 했다. 인명피해는 1명이 죽었고 몇 명이 다쳤는데 부상자 중에는 폭발의 충격으로 보일러실 천정의 증기배관이 파열되면서 증기가 누출되어 화상을 입은 화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이 폭격을 기점으로 영국 함대는 일제히 대공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리펄스에 공격이 집중되었으나 폭탄 피격 후에는 6발의 폭탄과 16발의 어뢰를 모두 피하는 달인급 조함술로 피해를 최소했다.

진짜 타격은 뇌격기 편대에 의해 이뤄졌다. 17기의 일본군 G3M 편대가 11시 40분경에 뇌격을 실시했고, 여기서 어뢰들 중 1기가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B번 엔진실에 명중해 침수됐고, 한쪽 스크류를 잃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속력은 최대 항속의 절반인 16.5노트(30km/h)로 떨어졌다. 함체는 좌현 뒷쪽으로 11.5도나 기울어져 평소 해면에서 7.3m 에 달하던 좌현 후갑판의 높이가 60cm 까지 내려갔다. 설상가상으로 후방 구역에서 전기가 나갔고 이로 인해 후방의 통신, 조명 및 환기가 지장을 받았으며 많은 대공포들이 작동불능이 되었다.

고작 4분간의 교전에서 어뢰 1발 피격을 당한 것에 비해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손해가 막심한 것은 좌현 바깥쪽 스크류 프로펠러 추진축을 잡아주던 지지대 부근에 어뢰가 명중해서 지지대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해당 위치는 군함의 설계자들이 피격을 예상하지 못한 구간이라서 지지대가 박살나자마자 추진축이 정위치를 벗어나서 고속회전하다가 부러지면서 격벽을 부수고 배관을 망가뜨리는 등 엄청난 내상을 입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침수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동력기관이 정지하고 전기가 끊어지고 전화가 두절되고 탄약고가 침수되는 등 사실상 반쯤 망가진 신세가 된 것이다.

12시 20분경에 26대로 구성된 G4M 편대가 추가로 뇌격을 실시했다. 선두에 선 6기의 뇌격으로 상처입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어뢰 3기가 적중했다. 이미 앞서의 어뢰 명중으로 인해 제대로 회피운동도 못하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우현에 어뢰를 3발 맞았는데 함수와 함미와 함체 중앙에 고르게 어뢰를 맞은 결과 침수가 18,000톤에 이르렀으며 속력은 8노트로 하락하고 1개의 스크류 프로펠러만 가동가능했으며 발전기도 2개만 작동했고 선체 대부분의 지역에 전기가 끊어져서 환기, 조명, 배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실상 전투불능상태로 서서히 침몰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치명상을 입자 나머지 G4M들이 모조리 리펄스로 목표를 변경했고 곧 리펄스에도 어뢰들이 달려들었다. 특히 양쪽으로 나누어져서 동시에 어뢰를 발사한 것이 주효했고 리펄스는 우수한 조함 실력으로 어뢰들을 회피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우현에서 다가오는 8발의 어뢰를 피했으나 좌현으로 다가오던 3발의 어뢰중 1발의 어뢰가 좌현에 명중한 것을 시작으로 4분만에 총계 5발 이상의 어뢰가 리펄스를 강타했다. 안타깝게도 리펄스는 1차대전때 건조된 노령함인데다가 자매함 리나운과 달리 대개장도 받지 않아서 어뢰공격을 받아도 버텨낼 벌지도, 현대적인 장갑도 갖추지 못했다. 물론 대개장을 안한 것은 아니라서 벌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리나운이 킹 조지 5세급의 출현 전까지 영국의 최강 전함이었던 퀸 엘리자베스급의 벌지를 재생해서 장착한 반면, 리펄스는 퀸 엘리자베스급의 건조 비용에 부담을 느끼고 싼맛에 뽑아낸 리벤지급의 벌지를 재생해서 달았는데다가, 그나마도 리펄스는 이렇게 해도 되는지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 베이스였다. 결국 난타당한 리펄스는 6분만에 함수쪽으로 전복되어 침몰했다. 그러나 전투 중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인지 당시 리펄스의 함장이었던 윌리엄 테넌트 대령은 살아남아서 서인도 제도 함대 사령관까지 승진한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도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12시 40분경에 추가로 달려든 일본군 폭격기들이 500kg 폭탄 7발을 투하해서 1발을 명중시켰는데 직격탄은 좌현 후방의 사출기 갑판을 관통한 다음 127mm 두께의 주장갑판 위에서 폭발하여 함체에 추가적인 피해를 주면서 엄청난 인명손실을 가했다. 해당 지역은 일명 영화갑판이라고 불리는 지역인데 앞서의 피해로 인해 의무실에 조명과 전기가 연결되지 않자 임시 의무실로 사용되고 있었던 곳으로 200여명에 이르는 부상당해 쓰러져 있던 수많은 영국 승조원들과 부상병을 치료하던 의무진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외에도 지근탄의 폭발과 함께 함체의 외판이 벌어지면서 침수가 가속화되었다.

더 이상의 저항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톰 필립스 제독은 퇴함을 명령했고, 몇분 지나지 않아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침수로 기울어지다가 좌현 방향으로 전복되기 시작했다.

한편 이 시점에서 전멸 직전에 이른 Z함대는 무선침묵을 깨고 모스 부호로 SOS 신호를 타진했다. 이에 깜짝 놀란 호주 제453비행중대의 F2A 버팔로 10대가 부리나케 달려와 오후 1시 15분에 도착했지만 이미 일본 항공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물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과 리펄스의 잔해를 구경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참고로 이들이 조금만 더 빨리 출격했다면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격침을 피할 수 있었다는 말이 있으나, 애초에 F2A 자체가 좋다고 말하기 어려운 전투기인데다가, 머릿수가 너무 적어서, 이들이 조금 더 일찍 도착했어도 Z함대의 운명이 바뀌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다행히 호위구축함들이 신속히 구조작업을 했기 때문에 많은 승조원이 구조될 수 있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구축함 익스프레스가, 리펄스의 승조원들은 구축함 일렉트라와 뱀파이어가 구조했다.

톰 필립스 제독은 만류하는 참모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배를 빠져나가지 않고 배와 운명을 함께 했다. 부하들에게 건넨 필립스의 마지막 유언은 "굿바이." 함장 존 리치 대령[11]은 마지막까지 퇴함을 지휘하다 최후의 순간 탈출했지만, 함이 침몰하면서 발생한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목이 부러져 전사했다. 침몰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존 리치 대령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한편 일본은 1941년 12월 10일 당일 영국동양함대궤멸이라는 군가를 만들어 방송하며 전과를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5. 결과

말레이 해전 승리를 발표하는 대본영발표

영국 해군이 자신있게 파견했던 함대의 궤멸은 영국 및 연합국에게 충격을, 일본에게는 환희를 안겨줬다. 총리 윈스턴 처칠은 아침에 전화를 받기 위해 깨어나서, 그 전화 통화로 동양함대가 사실상 소멸하였다는 보고를 '2척의 전함이 격침. 공격자는 항공기로 판단. 사령관 톰 필립스 전사.'라는 간단한 형식으로 들었다.

처칠은 충격으로 입을 열지 못했다고 하며 말레이 해전에서 상실한 2척의 전함 피해 보고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충격을 안긴 일이라고 자신의 회고록에 기록하였고, 여기에 더해서 싱가포르의 함락이 영국 역사상 가장 참담한 패배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이제 태평양에 배치된 영국과 미군의 해군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포에 사로잡힌다.

영국 해군은 태평양에서 더이상 의미있는 작전을 펼칠 수 없다고 보고 태평양에서 철수한다. Z기동함대가 당시 영국에서 원거리까지 파견 가능한 고속군함들이기도 했고 2척의 주력함을 1일만에 모조리 상실한 타격이 컸던 것이다. 그나마 HMS 리펄스는 구형이니 그렇다쳐도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건조한지 9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일본군을 얕보고 있던데다 최신예 전함이 있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왔으니... 그리고 철수 과정에서도 잡음이 있어서 영국 해군과 영국 육군과의 정보 교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영국 육군은 싱가포르를 방어하면서 이미 지킬 필요없는 싱가포르 섬 북부의 세레타 해군 기지를 지키고 있었으며 싱가포르 섬 북부 지역의 방어선 건설공사도 세레타 해군 기지 방어문제 때문에 지연되고 있었다.

싱가포르를 떠난 영국 해군 함선들은 실론 섬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인도네시아)로 다시 전개되었다. 이어진 자바 해전에서 미국, 영국, 호주, 네덜란드로 이루어진 연합군 해군 함대가 사실상 전멸하면서, 영국군이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로 전개한 해군력도 소멸하고 말았고, 태평양의 연합군 해상 세력은 미국이 진주만 공습에서 보전했던 미약한 함대만 남았다.

영국군은 실론 섬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HMS 워스파이트와 4척의 리벤지급 전함을 추가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은 다음 해인 1942년 2월 15일에 싱가포르 전투를 통해 싱가포르까지 함락시키고 기세가 오른 상태였다. 4월 초에 일본 해군은 인도양까지 진출해서 실론 섬을 공습하기까지 했으며, 이때 영국 해군은 교전을 회피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국 항모 허미즈와 순양함 2척이 일본 해군의 공격으로 추가로 침몰했다. 실론 해전의 결과, 일본군의 폭격으로 콜롬보와 트링코말리의 해군 기지 배후 시설이 타격을 입었고, 더 이상의 작전 지원이 어렵게 되었다. 영국 해군은 배치한 전함을 다시 다시 동아프리카와 지중해로 철수시키고, 이렇게 해서 영국 해군은 태평양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지, 일본 해군 역시 실론 섬의 해군 기지를 파괴하고, 영국 해군의 반격이 없을 것이라는 점에 만족했다. 그리고 나서 일본 해군은 미군과의 함대 결전을 준비한다.

다만 영국의 내각이 태평양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고,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 지중해 항로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영국 해군은 말레이 해전 이전까지는 타란토 공습, 마타판 곶 해전같은 일련의 전투가 있기는 했으나, 독일 해군의 전함들에게 보여준 집착들과 비교해볼 때, 이탈리아 해군을 파괴하려는 시도는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었다. 그 이유는 수에즈 운하의 알렉산드리아와 영국령 지브롤터로 지중해를 잠가두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개발한 중동 유전으로부터 본토로 수송되는 석유의 수입이 사실상 끊기기는 하였으나, 미국 본토에서 석유를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여전히 미국에게 돈을 주고 석유를 사왔고, 유전의 위치만 바뀐 셈이었다. 알렉산드리아 주둔 함대와 육군이 고립되는 문제가 있긴 했으나, 비용이 많이 들기는 해도 희망봉 항로가 존재했고, 인도를 통해서 보급받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말레이 해전 이후로는 지중해 항로의 가치가 도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1941년 11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이어진 3차 몰타 항공전에서 영국이 낼 수 있는 최상의 카드였던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3월 초에 과감하게 투입하게 된다. 그리고 수세로 일관하던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공세를 재촉하다가, 1942년 8월에 사령관 오킨렉을 해임하고 새로운 사령관을 부임시키는 강수를 두게 된다. 하지만 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은 완강히 저항했고, 북대서양노르웨이, 그리고 몰타 섬의 사투가 종반전을 치닫은 1943년 겨울이 돼서야, 발등의 불로부터 한숨 돌리고 태평양에 다시 해군력을 투사할 여력이 생긴다.

영국 해군이 지중해와 대서양에서의 전투를 마무리하던 시기였던 1943년 기간 동안, 태평양에서는 미군과 영연방인 호주군이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 일대의 정글에서 사투를 벌인 끝에 남부 태평양에서 승기를 굳혔다. 이후, 1944년 1월에서 2월에 걸쳐 미군이 마셜 제도를 손에 넣고 일본해군의 핵심기지였던 트럭 섬에 공습을 가해 무력화시킴으로써 중부 태평양을 장악하기 시작하고 그 여파로 남부 태평양도 사실상 확보하였을 때, 영국 해군이 태평양에 복귀했다. 그리고 곧바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일본군이 벌인 임팔 작전에 맞선다.

대략 2년 뒤에 돌아온 영국 동양함대의 기함으로 스리랑카에 전개된 주력함은 리펄스의 자매함이었던 리나운이었다. 그리고 말레이 해전의 교훈을 살려서 항공모함 부대와 같이 왔고 일본과 맞서싸운 주역도 항공모함이었다.

6. 평가

말레이 해전은 진주만 공습, 비스마르크의 침몰과 함께 해전의 주도권이 함선에서 항공기로 완전히 옮겨졌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 전투이자 전함으로 대변되는 거함거포주의에 사형선고를 내린 사례로 역사에 남았다.

전함이 항공기의 공격을 받은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고, 타란토 공습과 같이 항공공격만으로 전함이 상실되는 전례도 있었다. 하지만 타란토의 경우 정박중인 함대를 급습한 것이었다. 비록 항공엄호가 제공되지 않았지만 전투태세를 갖추고 정상적으로 항해중인 전함이 다른 요소는 일절 배제된 채 오로지 적 항공기의 공격에 의해서만 대파, 격침된 사례는 이전까지 없었다. 이 때문에 당시 각국의 군 지휘부 상당수는 항공기가 가지는 군사적 가치를 실제보다 낮게 보고 있었다. 정상적인 교전상황에서는 전함을 항공기만으로 격퇴하기는 어렵거나 최소한 입증되지 않았다는 인식이 강했다.

거기에다 당시 일본의 항공기술에 대한 과소평가는 연합군 지휘관들의 판단을 더욱 흐리게 만들었다. 일본에겐 독일과 이탈리아가 가진 장거리 대함공격능력이 없다는 것이 당시 연합국 지휘관들의 통념이었던 것이었다. 실제로는 추축국 중에서 제일 가는 장거리 대함공격능력, 특히, 뇌격능력을 가진 것은 일본이었지만 연합군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과 편견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 및 리펄스의 격침과 함께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상기한 처칠의 반응은 이러한 인식이 제대로 박살난데 따른 충격이었다. 처칠뿐만 아니라 당시 군부 및 정치계, 나아가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그 파급력은 매우 컸다. 그럴만한 것이 당시 전함이 가지는 전략병기로서의 가치와 인식은 전후에 핵병기가 가지게 된 그것과 동급이었기 때문이며, 게다가 이러한 전략병기가 '동양인 군대'에게 무력화되었다는 충격이 시너지를 일으켰다.

그 충격에서 벗어난 뒤 각 국 해군 수뇌부들 사이에서는, 해군의 함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도 효과적인 항공엄호가 필요하며, 각 함선의 대공화기도 대대적으로 증설 및 개량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함대 상공의 제공권을 쥐지 않으면 함대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양상은 이후에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당시 영국함대의 상공 엄호에 투입할수 있었던 항공세력은 호주방면에 배치된 10기의 F2A 버팔로뿐으로 항속거리에 비해 배치지점이 너무 멀었고, 수량도 모자라니 지속적인 항공엄호는 꿈도 못꾸는 상황이었으나 그래도 싱가포르에 주둔하던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소속의 버팔로 전투기들은 쿠안탄까지 항공지원이 가능했다. Z기동함대 투입 초기에 전열에서 이탈해버린 항공모함 인도미터블과 남아프리카에 입항했던 시점에 별다른 임무가 없던 허미즈를 Z함대에 포함시키지 않은것도 아쉬워지는 대목이다.

물론 항공모함이 있다 한들 당시 투입 가능한 영국군 함재기들의 수량과 전투능력 역시 모자라기는 매한가지였다. 시파이어는 1942년 11월에 가서야 처음으로 투입되고 그 이전에는 그나마 쓸만한게 시허리케인인데 이 또한 1941년 말에나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배치된 함재기들은 페어리 풀머같은 괴작이었다. 그래서 일본군 항공세력과의 정면대결은 무리였지만, 항공세력을 함대 상공에 즉시 투입할 수 있는 만큼 적어도 당시에 전투기 엄호가 전혀 없는 일본해군 공격/폭격기 편대에 대한 대응은 훨씬 수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오히려 일본해군 장거리 공격기 편대들이 영국공군에게 걸려서 큰 피해를 입었을게 확실한 상황이었다.

한편, 영국 해군이 자랑하던 대공방어체제는 레이더사격통제장치부터 대공포까지 총체적 난국을 드러냈다. 가장 큰 원인으로는 폼폼 포와 연동된 HACS(High Angle Control System)시스템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지목되었다. HACS는 레이더로 목표의 제원을 얻고 연동된 대공포의 편고각과 시한신관값 등을 조정해 발사하는 대공사격통제장치로 그때까지 눈으로 보고 쏘는 다른나라 대공포에 비해 나름 첨단을 달리는 물건이었으나 당시로도 몇가지 한계(이를테면 이후 Gyro Rate Unit이 나올때까지 적기의 진행방향을 예측하는 계산이 부족했다.)가 있었으며 특히 1차 원인은 영국이 HACS를 대서양이나 지중해를 주 전장으로 상정해 만들고 테스트했기 때문이었다. HACS는 1941년 크레타 섬 전투와 할버드 작전 등에서 실전을 겪었는데 당시로서는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싱가포르같은 열대 지역에서는 뜨거운 열과 높은 습도로 Type 282 사격관제 레이더부터 작동불능에 빠졌으며 2파운더 탄약까지 변질하여 작동에 문제가 생겨버린 것이다.

대공포도 대구경이건 소구경이건 문제가 많았다. 특히 킹 조지 5세급 전함양용포QF 5.25인치(134mm) 50구경장 Mk.1 양용포가 큰 문제였는데 분당 7 ~ 8발의 느린 연사속도에 -5도에서 +70도라는 작은 포신상하각도, 78.7톤이라는 무거운 중량으로 인한 초당 10도라는 포신부앙속도 및 포탑회전속도는 사실상 민첩한 부포에 가까웠지 대공포로서는 실격수준이었고 사소한 충격에도 전기가 나가고 윤활유가 새면서 포탑 전체가 작동을 중지하는 등 신뢰성에도 문제가 많은 망작이었다. 심지어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는 포탑 자체의 방수성능까지 문제가 있어서 침수가 일어나므로 개선까지 했는데도 저 지경이었다. 그래서 제조도 어렵고 생산비용도 높은 해당 양용포는 더 이상의 보급을 포기하고 이미 장착한 것들은 지속적인 개량을 통해서 뱅가드의 RP10 Mark I* 에 이르러서야 쓸만해졌으나 이미 시기를 놓쳤다.

소구경 대공포인 폼폼 포는 열대 해역에서의 작전에 많은 문제를 보여주었다. 우선 열대 해역의 습기 때문에 탄약 불량이 자주 발생하였고, 예광탄이 없는 문제도 있었다. 대공포 자체의 문제와는 별개로 개별 함정에 배치된 수량이 부족하다는 점까지 겹쳐서 항공공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가 없었다. 적기를 저지하지도 못하거나 운좋게 저지하더라도 그 시점에서 이미 적기는 무장을 조준한 후 발사하거나 투하한 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탄약을 개량하고 형식도 간소화하며 너무 무겁고 둔중한 8연장 기관포좌보다 작고 민첩한 4연장 기관포좌와 유사시 수동조작도 가능한 단장 기관포좌를 더 많이 보급했으며 사격통제장치도 좀 더 나은 것을 장착했다.

또한 이 해전은 비스마르크 추격전야마토의 격침과 더불어서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 사이에 항공기의 성능이 급속히 발달했음과 동시에 서서히 해전의 주도권이 대형군함에서 항공기로 이동되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각국의 함선, 특히 전함을 비롯한 주력 함선들은 대공포를 최대한 많이 부착하고, 구식 대공포를 몽땅 교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는 구형 함선들은 이후 작전운용에 크게 제약을 받게 되었고, 반대로 대공방어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던 쪽은 이후의 전투에서 주역으로 나서게 된다. 특히, 미국의 경우 레이더 관제에 의한 대공사격 집중방식과 VT신관의 조합이 매우 효과적이어서 공격해들어오는 적 항공세력을 대공포화만으로 죄다 잡아버린 사례도 있다.

정치, 군사적으로는 태평양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이 사실상 소멸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1941년 말은 대서양 전투가 굉장히 치열했던 시점이었고 급기야 이 시기에는 일부 U보트가 미국 동부해안까지 진출하기 시작해[12] 수세에 몰리고 있던 당시의 영국으로서는 태평양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나설수 있는 여력이 더 이상 없었다. 위에서 언급된 영국 수상 처칠의 반응은 전함 한두척의 손실에 대한 충격 뿐만 아니라, 영국이 태평양에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위세를 떨칠 수 없음을 알게된 절망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영국의 영향력은 마이너 리그 취급받던 중국 - 버마(현 미얀마) - 인도 전선 정도에만 국한되었고, 유럽전선에서 연합군이 확실하게 승기를 잡은 1944년에 이르러서야 영국 태평양 함대 (British Pacific Fleet)를 새로이 조직하여 일선에 뛰어들 수 있었지만 그나마도 미 해군의 연합세력으로서 참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영국 해군은 과거 오대양을 전부 통상 작전영역으로 삼던 대영제국 시절의 위상을 되찾지 못하고 대서양만을 활동 범위로 삼는 지역 해군으로 남아야하게 되었다. 이건 영국 자체의 국력 하락과 식민지 상실이 큰 원인이었지만.

7. 여담

8. 관련 문서


[1] 사진의 왼쪽 중간에 검은 연기를 피우는 배들 중 사진의 앞쪽에 있는 배가 프린스 오브 웨일스이고 뒤의 배가 리펄스다. 사진 맨 앞의 구축함은 E급 구축함 HMS 익스프레스이다.[2] HMS 프린스 오브 웨일즈[3] HMS 리펄스[4] 엔터프라이즈의 기여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5] 사실 포클랜드 전쟁 자체가 엄밀한 기준의 Naval Battle은 없는데 해군 함선은 여럿 가라앉은 이상한 전쟁이다. Naval battle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함선뿐만이 아닌 미사일, 항공기 등이 주가 된 현대 해전을 효과적으로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6] 퍼플을 제외한 하급 암호들은 이미 털리고 있었다. 다만 더들리 파운드 경도 울트라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발언이 무지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7] 이 사실을 모르는 채로, 일본이 진주만 공습없이 동남아를 침공한다는 대체 역사 소설들이 꽤 많다. 진주만 공습은 일본 입장에서 전쟁의 초중반 주도권을 쥐기 위한 거대한 작전이었다. 이론상으로는 해당 공습에서 미국 전함들이 격침되는 건 물론이고 항공모함들도 격침되었어야 했다. 그것과 동시에, 미국의 석유 저장고 세트를 파괴하여 태평양에서의 해군작전에 제동을 걸며, 진주만에 있던 대공포나 활주로를 비롯한 대공전투 시설들도 훼손하여 하와이의 전략거점으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최종장인 미드웨이를 미군이 요새화하기 위해 하와이에 정박시켜 둔 물자들도 파괴하여 미드웨이의 요새화를 차단해야 했다. 다시 말해서 진주만 공습은 일본이 그토록 부르짖던 함대결전이었고, 진주만 공습을 실패했다고 하는 이유 역시 저 목표들 중 전함 격침을 제외한 단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괜히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장관이 함대를 모두 잃어도 좋으니 상기된 목표물들을 반드시 파괴하라고 명령했다는 야사가 도는게 아니다. 그 정도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성공해야하는 작전이었기에.[8] 제로센의 정신나간 속력과 기동력, 항속거리를 얻기 위해 치른 대가는 기체의 내구도였다. 제로센은 설정된 최고 속력까지 끌어올리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고 오히려 다른 전투기들을 능가하는 가속력과 선회력을 보여줬지만, 상정된 것 이상으로 속력을 올리면 풍압을 못 이기고 와장창 부서진다.[9] 이때 일본 함대와 영국 함대의 상대거리는 약 10km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일본 항공대가 중순양함 쵸카이에 터트린 조명탄은 영국 함대에서도 육안으로 발견했다. 만약 조금만 더 거리가 가까웠으면 정말로 해전이 벌어졌을수도.[10] G4M이 등장하기 이전의 일본 해군 주력 육상공격기. 96식 육상공격기로 칭하기도 한다.[11] 비스마르크 추격전 당시 비스마르크의 주포탄이 함교에 명중했을 때도 별다른 부상 없이 살아남았었다. 참고로 이 당시에는 대령 본인과 부하 한 명만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원들이 전부 몰살당한 상황이었는데도.[12] 심지어 그중에서도 간큰 잠수함 한 척은 야음을 틈타 뉴욕 항구에 잠수상태에서 침투, 다시 부상해 뉴욕의 사진을 직접 찍어온 경우도 있었다. 자세한 건 라인하르트 하데겐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