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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16:15:58

비스마르크해 해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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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해 해전
Battle of the Bismarck Sea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ttle_of_the_Bismark_Sea.jpg
▲ 작전 요도[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ismarck_Sea_141996.jpg
연합군의 폭격에 피격된 일본 제국 육군 수송선 '켐부마루'[2]
날짜
1943년 3월 2일 ~ 4일
장소
비스마르크해
결과
연합군의 승리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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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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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라 마사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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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미카와 구니치
전력
중폭격기 39기
중형 폭격기 41기
경폭격기 34기
전투기 54기
어뢰정 10척
구축함 8척
병력 수송선 8척
항공기 100기
피해규모
폭격기 2기 격추
전투기 4기 격추
13명 사망
병력 수송선 8척 침몰
구축함 4척 침몰
전투기 20기 격추
2,890명 이상 사망

1. 개요2. 발단3. 전개4. 절정5. 결말과 여파6. 여담7.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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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3년 3월 1일부터 3월 5일까지 비스마르크해에서 벌어진 해전. 소탕전은 3월 14일까지 이루어진다. 이 해전으로 인해(병력 및 물자부족 등의 이유로) 일본군은 뉴기니 방어에 실패하게 되었다.

2. 발단

과달카날 전역이 일본군의 참패로 끝나던 1943년 1월 말, 동부 뉴기니의 동남부 지역인 파푸아 반도 일대에서도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에 의해 일본군이 축출되고 있었다.(코코다 트랙 전투, 밀른만 전투, 부나-고나 전투) 과달카날과 동부 뉴기니 동남부를 잃은 일본군은 솔로몬 제도 일대와 뉴기니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미군의 공세에 대응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일본군 대본영은 파푸아 반도를 비롯한 동부 뉴기니의 동남부[3]를 일단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동부 뉴기니 전체를 아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동부 뉴기니 전체가 미군 손에 떨어지는 순간엔 뉴기니와 뉴브리튼섬 사이의 비티아즈 해협(Vitiaz Strait)과 댐피어 해협(Dampier Strait)을 거쳐 일본이 점령한 동남아 일대로 통하는 해상 진격로가 열리게 되며, 남태평양의 핵심 거점인 뉴 브리튼 섬의 라바울이 위협받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대본영은 과달카날에서 철수를 결정함과 동시에 뉴기니와 솔로몬 일대의 요충지를 공략하여 장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뉴기니 전역의 일본군은 부나- 고나에서 북서쪽으로 떨어진 해안지대의 라에-살라모아 지역을 최전방 거점으로, 다시 북서쪽 방향의 마당-웨왁 지역을 후방 거점으로 하여 육군 3개 사단을 증원하여 이 일대 방어를 강화하는 작전 계획을 세웠다.[4] 이 계획에 따라 3개 사단 중 2개 사단이 1월~3월에 걸쳐 마당-웨왁지역으로 배치가 예정된다.

이 계획에서 요충지로 떠오른 곳이 와우였다. 라에-살라모아에서 남서쪽 내륙 산악지대에 위치한 광산 마을[5]인 와우는 일찍부터 연합군 세력에 들어가 있던데다[6] 비행장도 있어서 라에-살라모아 지역에 대해 잠재적인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뉴기니 일대의 일본군도 이 지역을 계속 주목하고 있었다. 다만, 과달카날 전역과 뉴기니 동남부에서의 격전이 한창이던 1942년에는 이쪽에 병력을 돌릴 여유[7]가 없었으므로 와우와 해안지대로 통하는 길목만 차단하고 있었지만, 1943년 1월 초에 연대 규모의 일본군이 증원되면서 와우 지역을 점차 위협하기 시작했다.

부나-고나 전투가 마무리 되어가자 호주군과 미군은 라에-살라모아 지역 공략의 교두보로서의 와우의 가치를 깨닫고는 와우 지역에 대해 대대적인 증원을 명령했다. 같은 시기에 일본군도 와우를 공격했지만 지리에 어두웠던 상태로 살라모아-와우로 이어지는 밀림으로 뒤덮힌 험난한 산길[8]을 진격로로 택했다가, 진격과 보급이 지체[9]되고 폭격기수송기를 동원한 연합군의 증원까지 맞으면서 공략에 실패했다. 이 전투를 거치면서 와우는 3000여명의 병력이 주둔한 연합군의 교두보가 되었다.

와우가 본격적으로 연합군의 교두보가 되자, 일본군은 상기한 방어 계획에서 배치 지역을 미처 결정하지 않은 1개 사단[10]을 전방 지역인 라에-살라모아 지역에 곧바로 배치하기로 결정한다. 동부 뉴기니에서의 방어와 반격을 종용하던 대본영의 압박과 육로 이동이 매우 열악한 뉴기니 현지 사정[11]이 겹친 결과였다. 이에, 일본 해군소장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 지휘하에 8척의 구축함과 8척의 육군 수송선을 통해 약 7,000명의 증원 병력과 물자를 호송하는 계획이 세워진다.

이 호송계획은 솔로몬 일대에서의 수송작전에서 교훈을 얻어서 각 수송선은 필요한 물자의 종류와 인원을 조금씩 나누어서 균등하게 적재하여 만일 수송선이 거의 다 격침당해도 1척만 도달하면 부족하나마 제대로 된 증원이 가능하도록 했으며, 구축함과 수송선의 승조원들도 되도록 이런 종류의 작전에 경험이 많은 자들을 선별했고, 보트와 주정을 많이 적재해서 변변한 항만 시설이 없는 곳에서도 빠른 양륙이 가능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선단을 호위하는 항공기도 100대를 뽑아낼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다.

이 수송작전의 최대 위협은 연합군 항공기들이었다. 앞서 와우를 공략했던 부대도 라바울에서 라에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공습을 받았으며, 와우를 공략할 당시 항공기를 이용한 지형정찰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도, 지도상 최단거리만 찾다가 진격로를 험난한 산길로 택했던 이유도 제공권이 열세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본군 수뇌부는 연합군이 자신들의 의도를 모르는데다 이 일대에서의 연합군 가용 항공전력이 적어서 설령 중간에 들키더라도 집중적인 항공공격을 받지는 않을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수송작전의 실무를 맡던 현지 사령부와 예하 일선 부대에서는 앞선 와우 공략 부대의 수송작전 당시 연합군의 항공 공격을 직접 겪어봤던 터라 성공확률보다 실패확률을 더 높게 치거나 잘해야 반반의 확률로 보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 일선부대의 우려는 상당부분 맞아들었다. 연합군은 이미 일본군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으며[12] 2월 중순경엔 일본군 증원병력의 상륙 지점을, 2월 말에 이르면 라바울 북쪽으로 출발하여 뉴브리튼섬 북쪽을 항해하다가 뉴브리튼 섬과 뉴기니 사이의 해협을 통해 라에로 향할거라는 예상 항로까지 모두 파악했다.[13] 그리고, 일본군의 예상보다 약 1.7배의 항공 전력을 갖고 있었으며, 일본군 수송선단을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전술도 가다듬고 있었다.

3. 전개

미 육군 제5항공군에서는 일반 폭탄을 사용해 해상전투를 수행하는 방법을 한참 연구중이었는데, 그러던 중 물수제비처럼 폭탄을 물에 튕겨 함선을 격침하는 물수제비 폭격(원문은 Skip Bombing[14]) 이라는 방법에 주목한다. 예전부터 초저공으로 비행하면서 지표면에 폭탄을 튕겨서 지상목표물의 측면을 타격하는 방식이 있었는데 이것을 대함공격에 활용한 것이다. 이 전법은 유럽 전선의 영국공군이 먼저 선을 보였고, 이후 영국군과 미군 간 교류 과정에서 이 전법이 소개되어 제5공군에까지 전해졌다. 이 당시 미 육군 항공대 내에서 대함 공격 기회가 제일 많았던 제5공군은 물수제비 폭격 전법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다.

이 당시 미육군항공대의 대함공격 방식은 하나같이 효율이 낮았다. 중폭격기들의 고고도 수평폭격은 함선들이 조금만 변침해도 대부분 명중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고, 그렇다고 고도를 낮추면 일본 전투기와 함정의 대공포에 격추당하기 딱 좋았다. 그나마 가장 효과적이었어야 할 항공뇌격은 기체를 저공 저속의 조건에 노출시켜야 했으므로 일반적인 저공폭격보다도 더 위험했던데다, 맞춘다 한들 터지지 않는 미군 어뢰 특유의 저질 성능과 구린 신뢰성 때문에 효과는 거의 없었다. 실제로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육군항공대 소속 폭격기들의 대함공격작전 결과가 이 단점들을 모두 보여줬다. 고공폭격은 죄다 빗나갔고, 뇌격에 나섰던 기체들은 단 한발의 어뢰도 타격을 주지 못한 채 작전기의 절반이 격추당했으며[15], 중고도폭격[16]조차도 기총사격으로 소수의 인명피해를 입힌걸 빼면 이렇다할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사정은 1943년 당시 뉴기니를 담당하던 제5공군도 다를게 없어서 지속된 출격에도 불구하고 함선 격침 전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당장, 앞서의 일본군 와우 공략부대를 수송하던 선단을 노린 수차례의 폭격에서도 수송선 5척, 호위 구축함 5척 중 수송선 1척만 격침시켰다.

연구 끝에 나온 물수제비 폭격방식은 다음과 같다.
목표 전방 600~750m 지점에서 부터 60~75m 고도로 시속 300 중반~400km 속도로 접근하며, 접근 중엔 전방화력(기총소사)을 최대한 퍼부어서 적함의 대공포화를 제압한다. 목표로부터 약 100m 내외 거리에 도달하면 5초 지연신관을 세팅한 225kg 철갑폭탄 서너발을 연달아 투하하고 고도를 높여 이탈한다.

물수제비 폭격은 수송선이나 구축함 같은 비장갑이거나 경장갑 함선에 대해서 기존의 대함공격 방식보다 압도적인 위력을 보였다. 뇌격과 비슷한 수준의 초저공으로 진입하지만 뇌격보다도 2배 빠른 속도로 목표에 돌진할 수 있었다.[17] 어뢰의 경우, 정상적으로 투하되어 작동하더라도 느린 속력 때문에 목표가 된 배가 회피할 여지가 있었지만, 물수제비 폭격방식으로 투하된 폭탄은 기본적으로 100m 내외 근거리에서 투하되어 폭격기가 달려들던 속도에서 별로 줄지 않은 상태로 어뢰보다 훨씬 빨리 목표물에 달려들었기 때문에 회피기동을 할 여지 자체가 없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저 폭탄이 불발되거나 운 좋게 빗나가기[18] 만 바랄 수 밖에 없었다. 선체 측면에 폭탄이 명중하기 때문에 현측장갑이 없거나 빈약한 함선은 마치 어뢰에 맞은 것처럼 현측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게 되며, 이는 곧 침몰로 이어졌다. 설령 물수제비뜨기가 되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저공 수평폭격이므로 투하된 폭탄이 그대로 명중하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통상적인 수평폭격에 비해 명중률도 매우 높았다. 실제로 본 해전에서 물수제비 폭격의 명중률은 약 50%에 달했다.

물론 위험성도 있었다. 물수제비 폭격을 하는 기체는 저공에서 목표물을 향해 직선으로 달려들어야 하므로 목표함선의 대공포화에 그대로 노출될 수 있었다. 때문에 물수제비 폭격에 나선 기체들은 진입 중 목표 함선의 대공포화를 제압하고자 전방 화력을 증설했으며 심지어 상부 포탑도 전방으로 고정해서 쏠수 있게 했다. B-25의 경우, 총 10정의 50구경 중기관총을 전방으로 쏠수 있게 되었는데, 이 화력은 방호가 약한 대공포좌들을 제압하기에 충분했다. 그 외에 폭탄이 일찍 터져서 폭발에 같이 휘말린다던가 너무 저공으로 진입했다가 목표물과 접촉하여 추락[19]하기도 했으나, 이는 여타 전투행위에서도 발생하는 수준의 리스크였다.

파일:external/www.ibiblio.org/AAF-IV-p142e.jpg

한편, 일본군의 증원 의도를 파악한 연합군은 일본군의 수송작전을 막기 위해 통상적인 출격도 될수록 자제한 채 수송선단이 모습을 드러내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를 위해 동원 가능한 모든 항공기를 이 근방에 집결시켰기 때문에 항공기의 총수는 338대 이상이었다.

4. 절정

3월 1일에는 수색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선단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3월 2일 오전 10시경, 초계중이던 B-24 폭격기 한 대가 수송선단을 발견하고 B-17 폭격기 편대가 한 시간 간격으로 두 차례의 공습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수송선 교쿠세이마루가 침몰하고 데이요마루, 노지마 두 척이 손상을 입었다. 그날 저녁에도 11대의 B-17이 동원되어 폭격을 가했지만 수송선 한 척에 경미한 피해를 주는 것으로 그쳤다. 이 때 침몰한 수송선에서 구조한 800~900여명의 병력은 이들을 구출한 구축함 유키카제, 아사구모에 타고 빠른 속도로 라에로 향해 무사히 상륙하는 데 성공한다.

일본군 수송 선단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3월 3일의 공격이었다. 보파이터 중전투기, B-17, B-25 폭격기, A-20 하복공격기로 구성된 200여대의 폭격기P-38 라이트닝, P-40 워호크로 구성된 100여대의 전투기에 의한 대대적인 공습이 있었다.

3일 새벽에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의 보포트 뇌격기 8대가 선단을 공격하기 위해 출격했다. 하지만 기상 악화로 두 대만이 선단을 발견하고 어뢰 공격을 가했지만 피해를 주지 못했다.

그 후 오전 10시, 합계 100여 대에 이르는 대규모 공격대가 일본군 선단 상공에 도착한다. 이때는 기상 조건도 좋아져서 연합군과 일본군 모두 양측을 미리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 이어진 항공공격은 동시다발적으로 모든 함선에 여러 방향으로 이어지면서 일본 함대의 방어를 무력화시켰다.

우선 13대의 미 육군의 B-17 폭격기가 7000피트의 중고도 상공에서 수평폭격을 가했다. 일본 해군 제로 전투기들이 B-17 요격에 나섰고, 폭격기들을 호위하던 P-38과 공중전이 벌어졌다. 잠시 후 추가로 B-25 폭격기 부대가 도착해 역시 중고도에서 폭격을 수행했다. 이 폭격으로 일부 선박에 피해를 입히기는 했지만 많은 전투에서 그랬듯 중고도에서의 수평폭격은 큰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덕분에 일본군 선단은 폭격을 회피하느라 대열이 흐트러져 호위 구축함들과 수송선의 거리가 벌어졌고, 효과적인 대공방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공격은 일종의 미끼였다.

B-17을 요격하러 나선 일본군 전투기들은 B-17과 호위하던 P-38 전투기들과의 전투로 중, 고고도에 묶여있었다. 뿐만 아니라 호위함대의 대공화력도 중고도의 폭격기들에 향해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 이번엔 저공에서 B-25와 보파이터, A-20 하복 공격기로 구성된 또 다른 폭격대가 들이닥쳤다. 이번에는 전투기의 원호도 없는데다 대열이 흩어져 제대로 대공화망을 구성할 수 없던 일본군 선단은 20mm 기관포 4문+7.62mm 기관총 6정으로 중무장한 보파이터들과 현지개수로 기수에 12.7mm 기관총 8정을 장착(+ 기체 전방으로 향한 상부 포탑의 2정)한 B-25들의 기총소사에 그대로 노출되었다.[20]

파일:external/img.photobucket.com/BismarckSeaLowLevel_zps947e78a5.jpg
일본군 수송선을 공격하는 B-25 폭격기.

이 공격으로 일본군 선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선박 자체의 피해는 물론 수송선에 타고 있던 상당수의 승조원들과 육군 병력이 기총소사에 피해를 입었을 뿐 아니라,[21] 특히 연합군 폭격기들은 일본 해군 구축함의 함교와 방호가 취약한 대공포좌를 기총소사의 주요 표적으로 삼았다. 그 결과 대공포좌 상당수가 이 기총소사에 무력화되었을 뿐 아니라, 구축함 함교의 장비와 인원이 피해를 입어 전투능력이 크게 저하되었다. 호위함대 사령관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까지도 보파이터의 기총소사에 중상을 입을 정도였다. 신나게 기총소사를 퍼부은 후, 연합군 폭격기들은 말 그대로 오리사냥감(sitting duck) 신세가 된 일본군 선단에 마스트 높이의 초저공에서 물수제비 폭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수송선들 7척 전부가 큰 피해를 입었다. 전투 시작 10분 만에 모든 수송선들이 행동불능이 되어 버렸다. 수송선을 호위하던 구축함들 중 3척-아라시오, 시라유키, 토키츠카제-이 격침 또는 대파되었고, 나머지도 적잖은 손상을 입고 퇴각해야 했다.

파일:external/www.ibiblio.org/AAF-IV-p142b.jpg
초저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A-20 하복 공격기.

오후에도 B-25 폭격기들이 다시 공습을 가했다. 그나마 속도가 빠른 구축함들은 죽어라 도망친 끝에 8척 중 5척이나마 목숨을 건졌지만, 전날 격침당한 1척을 제외한 남은 수송선 7척 모두는 이날 공격으로 격침당했다. 사실상 전멸한 것.

그리고 다음 날인 4일 아침에는 B-17 폭격기의 공격으로 생존자 구조 작업 중이던 일본 해군 구축함 한 척이 추가로 격침당했다.

4일, 일본군은 부나의 연합군 비행장에 공습을 가했지만, 피해는 경미했다.[22][23]

게다가 공습 후에는 3월 14일까지 미 해군의 어뢰정과 전투기에 의한 소탕전까지 이어졌다. 한국에는 보통 이러한 미군의 철저한 생존자 척살을 일본군이 먼저 추락한 미군 폭격기의 조종사를 무참하게 살해한 보복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는 좀 다르다. 연합군 조종사 제임스 머피는 우드무어 중위가 탑승한 B-17이 격추될 당시 일본군이 탈출하는 승무원들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분노해서 일본군 생존자들을 죽이기로 했다고 보고했지만 실은 이미 우드무어의 B-17이 박살 나기 전 이미 연합군 조종사들은 일본군 생존자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하고 있었다.[24] 만약 일본군이 탈출하는 승무원을 공격했다는 것이 학살의 이유라면 일본군 또한 연합군의 기총소사가 먼저였다고 항변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연합군은 (일부는 정말 복수심이 있었을지 몰라도) 일본군 기지가 멀지 않으니 생존자들이 빠르게 재합류할 수 있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생존자 소탕을 한 것이다.[25] 일부 연합군 조종사들은 이 명령을 거부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작전 전이든 작전 중이든 생존자들을 남김없이 소탕하라는 명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6] 위에서 언급되었듯 우드무어가 죽기 전에 이미 기총소사를 가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작전 전에 내려진 명령으로 보이는데, 이러면 사실상 복수라는 것은 소탕의 정당성을 갖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던 셈이다. 일반적으로 일본군보다는 미군에 우호적이기 마련인 한국 밀덕계에서는 이를 여과 없이 일본이 먼저 잘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5. 결말과 여파

이로 인해 수송선 8척 모두가, 구축함 중 4척[27]격침되고, 선단 상공을 호위중이던 제로센 6기(3월2일 2기, 3월3일 4기)가 격추되었다.[28] 살아남은 나머지 구축함도 상당한 피해를 입고 호송작전 지휘관인 기무라 제독도 중상을 입었다. 이 와중에도 강운함으로 유명한 유키카제는 별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수송선이 죄다 격침되면서 대다수 육군 병력들이 땅을 밟지 못하고 물고기 밥이 되거나, 정처없이 표류하다가 연합군의 대대적인 소탕작전에 의해 포로로 잡히거나 사살당했다. 심지어는 식인 풍습을 가진 현지 원주민들에게 당했다고도 한다. 이런식으로 3,000명의 병력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이 수치도 필사적인 구조작업 끝에 손실을 줄인 것이다. 간신히 살아남은 병력들 중 라에에 도착한 병력은 겨우 1,200명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사실상 맨몸으로만 도착한지라 당장의 전력 보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2,700명의 병력은 출발지인 라바울로 몸만 건져서 되돌아갔다. 일본 육군은 해군에게 이렇게 구출된 병력들을 라바울로 돌려보내지 말고 라에로 바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몸만 보냈다가 무슨 민폐를 끼칠거냐는 투의 핀잔만 듣고 거부당했다.

이 공습으로 연합군 역시 폭격기 2대, 전투기 4대를 손실[29]했지만, 일본군이 입은 타격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이 전투가 일본군에 준 여파는 매우 컸다. 일단, 일본군의 뉴기니 방어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미 뉴기니의 동남부 지역을 잃은 상태에서 뉴기니 내륙의 연합군 거점을 제압해야만 뉴기니의 일본군 점령지를 안정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는데, 그 전제조건인 병력 증강/확보에 큰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 전투 이후 뉴기니 지역에 대한 보급과 관련하여 일본군 수송선은 더이상 뉴브리튼섬 남쪽으로 내려 오지 않게 되었다. 전방 지역인 라에에 대한 보급은 구축함과 잠수함을 이용한 쥐수송이나 뉴브리튼 서쪽 글로스터곶에서 소형배를 타고 건너가는 방법만 남았다. 과달카날에서 보급 부족으로 인해 일본군이 겪은 고난이 뉴기니 라에-살라모아 지역에서 재현된 것이다.

이 수송작전이 대실패로 끝나자 일본군 수뇌부들은 육군, 해군 너나 할 것 없이 뉴기니 전선이 당장 붕괴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이 당시 일본 육군은 라바울과 솔로몬 제도에 집중하던 해군과 달리 뉴기니 전선에 더 집중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뉴기니 전선 유지에 비상이 걸리자 라바울을 비롯한 솔로몬 제도에 전개했던 일본육군항공대 전력을 모두 철수시키고 뉴기니 일대를 담당하는 웨왁 기지로 재배치시켰다. 이미 진행중이던 후방지역 병력 상륙 계획도 다시 검토하여, 상륙하지 않은 잔여 병력을 보다 전방지대로 상륙시키려 했지만, 일선의 반발로 계획이 다시 변경되는 일도 벌어졌다. 라에로 가려다가 라바울로 되돌아간 병력들은 이후 쥐수송 등으로 조금씩 이동하여 어떻게든 라에에 도착하긴 했다. 그러나, 보급선이 크게 위협받는 상황[30]에서 전선의 유지는 점점 어려워졌다. 특히, 당장 최일선이 된 라에-살라모아 지역이 연합군의 역습에 당하는 것, 더 나아가 라에 배후의 비티아즈 해협 일대가 연합군 손에 떨어지는 건 시간 문제가 되었다. 일선으로 이어지는 보급선을 유지하기 위해 전방지역(라에)과 후방지역(마당)을 잇는 도로 건설에 착수하기도 했지만, 당시 일본군의 능력으로는 제 때 이 도로를 뚫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일본 해군의 경우 상술한 라바울 포위 가능성을 더욱 우려하고 있었다. 이 사건 이전에 미군이 과달카날 북서쪽의 러셀 제도를 점령하여 전진기지를 만들고 신형 전투기를 동원해 솔로몬 제도 중부 부건빌 섬의 일본군 기지에 대한 공습을 시도하는 등 솔로몬 제도에서 미군이 반격에 나설 조짐이 조금씩 보였던 판에, 뉴기니 방면의 증원 실패 소식이 들려왔다. 이 전투로 소중한 구축함 4척을 잃어버린 데 이어 솔로몬 제도 중부지역에 대한 미군의 기습에 휘말려 구축함 2척을 또 잃어버리자,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솔로몬 전선 유지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에 미군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기 위해 항모 함재기들까지 지상기지로 동원[31]하여 과달카날과 뉴기니 일대의 연합군 기지에 대한 대규모 항공공격(이호 작전)을 단행하였지만, 초라한 전과만 거두고 항공기 피해만 입은 채 실패했다.(1943년 4월 7일~14일) 그러나, 야마모토에게 검증없이 올라온 전과 보고는 터무니 없이 과장[32]되었고, 이를 그대로 믿은 야마모토는 솔로몬 해역 일대의 일선 항공기지인 부겐빌 섬의 부인기지로 시찰을 나갔다가 암호 해독을 통해 그의 이동을 파악한 미군이 출격시킨 전투기 기습 공격에 의해 사망하고 만다.(1943년 4월 18일)

요약하자면 수송작전실패로 인해 불안이 더해진 일본 육군은 황급히 방어태세를 정비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일본 해군은 조급하게 반격에 나섰다가 적의 군세는 꺽지도 못한 채 되려 최고지휘관을 잃게되는 최악의 결과를 받아들게 된 것이다.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과달카날 전역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라바울의 포위를 목표로 일련의 거대한 작전(Operation Cartwheel / 수레바퀴 작전)을 이미 수립해둔 상태였고, 1943년 중반부터 솔로몬 제도 일대와 동부 뉴기니 일대에서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 보급선이 끊긴 동부 뉴기니의 일본 육군은 자신들의 전방 거점이었던 라에와 살라모아에서 계속 저항했지만 결국 1943년 9월에 연합군에 의해 밀려나 버렸다. 야마모토가 죽은 뒤 일본해군 수뇌부의 역량은 더욱 떨어졌고, 솔로몬 제도에서도 일본군은 일방적인 수세에 몰려서 연합군에게 자신들의 점령지를 점점 내주기 시작했다.

결국 1943년 말에 이르면 일본군 스스로 우려했던 일이 현실화되어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 대부분의 지역이 연합군의 손에 떨어졌다. 뉴기니에서는 연합군이 비티아즈 해협 일대를 장악하고 본격적으로 웨왁과 마당을 위협하기 시작했으며, 라바울이 있는 뉴브리튼 섬에도 연합군이 침공하면서 남태평양 일대를 담당하는 중요 거점이었던 라바울은 포위당한채 점점 말라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일대의 전황이 악화되자 일본 육군은 1943년 9월에 설정된 절대방위선 안쪽의 방어에 집중하면서 사실상 동부 뉴기니 전체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빠른 진격에 비해 방어태세 정비가 늦어져서 1944년 초중반에 맥아더 군의 서부 뉴기니 침공때엔 이 일대에 대한 추가 증원을 포기하였다. 동부 뉴기니의 일본군 거점이었던 웨왁은 여전히 건재했으나, 맥아더군이 서부 뉴기니를 침공하면서 본토로부터 고립된 채 잉여로 전락해 버렸다.

반대로, 일본해군은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일대가 절대방위선에서 제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위선에 미군이 도달하는 시간을 지연시킬 목적으로 이 일대의 방어에 더욱 집착하였으나, 일본 해군이 이 일대에 정신이 팔려있던 1943년 11월부터 미 해군의 진짜 주력이 중부태평양을 돌파하기 시작(길버트 제도 침공, 먀셜제도 침공, 캐롤라인 제도 공습)하면서 전황은 크게 뒤집어진다. 특히, 캐롤라인 제도 공습으로 인해 후방기지인 트럭 섬의 해군기지가 박살나 버리자 일본 해군이 그토록 매달리던 라바울은 순식간에 군사적 가치를 잃고 말았다.[33]

한편, 이 전투 이후 표류하다가 사살된 일본군 시체로부터 일본 육군의 주요 기밀문서가 연합군 손에 넘어갔다. 특히, 이 당시 일본 육군 장교들의 전체 명부 최신본이 고스란히 연합군 손에 넘어갔으며, 연합군은 이를 통해 일본 육군 전력을 파악하게 된다.

이 전투 이후, 일본 육,해군 할 것 없이 연합군의 항공력이 미치는 곳으로의 상륙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일선부대를 중심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배경이 지극히 일본군다운데, 육군은 자신들의 병력 이동간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해군에 대한 불신이, 해군은 육군의 작전에 자신들의 아까운 함선들만 날려먹는다는 불만이 그 배경이었다.

이 분위기는 일본 육군의 항공전력 구성에도 장기적인 영향을 끼쳤다. 불안정한 제공권하에서 전선으로 이동하는 일본 지상군 병력들이 연합군의 항공기에 의해 떼죽음 당하는 일이 계속 이어지자, 일본 육군은 지상병력에 대한 항공엄호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일본육군은 43년 9월 이후로 일명 '전투기 초중점주의'를 도입하고 육군항공대 전력내 전투기 비중 확대 및 신형 전투기 배치를 꾀한다. 이는 항공력을 앞세운 미군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한 성격이 다분했다. 반면, 일본해군은 해군 항공대의 체질 전환이 꽤나 늦어져서, 공격기, 폭격기 중심의 전력구조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고, 미군이 일본 본토 코앞에 들이닥친 시점이 되어서야 제로센을 대체할 신형 전투기의 개발이 이뤄졌지만 너무 늦었다.

6. 여담

수송작전의 지휘관이었던 기무라 제독은 그가 학교 성적이 낮고 전투 능력이 떨어진다며 무시하고 깔보던 해군 장교들에게 꼬투리를 잡혀 선단 호위 임무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찍히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해당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기무라 제독은 무능력은 커녕 훗날 키스카 섬 철수 작전의 기적을 이뤄 낸 명장이 된 지극히 정상적인 능력있는 지휘관이었고, 이런 사람조차 대응하지 못하고 중상을 입을 정도의 사지로 장병들을 내몬 일본 육해군 수뇌부야말로 비정상적이자 무능력의 절정에 다다른 인간들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댐피어 해협(Dampier Strait)의 비극으로 불린다. 뉴브리튼 섬과 뉴기니 사이의 해협은 가운데의 섬을 중심으로 뉴기니쪽은 비티아즈 해협(Vitiaz Strait), 뉴브리튼쪽은 댐피어 해협으로 칭하는데, 이 전투 당시 일본군의 항로는 비티아즈 해협을 지나는 코스였으나, 당시 일본군은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댐피어 해협으로 칭했기 때문에 이같은 별칭이 붙었다. 70년대 나온 태평양 전쟁 및 구일본군의 해전사와 관련된 부분을 다루거나 한 일본어 서적이 해적판으로 나왔을때 이러한 해적판들에서 단피루(변이음 반영에 따라서는 담삐루)[34] 해전이나 단피루 비극이라는 용어가 대부분 이 사건, 만화 지팡구에서도 언급이 된다.

7. 외부 링크

Battle of the Bismarck Sea
Battle for Australia Association The Battle of the Bismarck Sea
Battle of the Bismarck Sea, 2-4 March 1943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National Museum of the U.S. Navy, Battle of the Bismarck Sea
Chapter V Battle of the Bismarck Sea


[1] 검은 선은 일본 제국 해군 선단의 움직임을, 붉은 선은 연합군의 공습을 표시한 것이다.[2] 3월 3일 침몰[3] 부나-고나 일대를 기점으로 동쪽 지역[4] 대본영은 아예 한술 더 떠서 1942년에 공격에 실패했던 포트모르즈비를 육로를 통해 다시 공격할 생각-그러니까, 코코다 트랙 전투를 시작 하던 당시와 똑같은 생각-도 갖고 있엇던 듯 하나, 현지 사정, 특히 험난하기 짝이 없는 지형을 체험한 라바울 현지 사령부에서는 이런 분위기에 반발했다고 한다.[5] 금광이 있다.[6] 일본군이 뉴기니에 쳐들어오자 현지인으로 구성된 친 연합군 민병대가 결성되었고, 연합군 병력도 조금씩이나마 증원되고 있었다.[7] 병력 수송에 필요한 함선, 수송선들이 죄다 솔로몬 일대의 임무에 투입되고 있었다.[8] 이른바 블랙캣 트랙이라 불리는 곳으로 격전이 있었던 코코다 트랙 못지 않게 험난한 길이다. 와우에 일찌감치 비행장이 들어선 것도 이 육로를 통한 이동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9] 지리에 어두웠던 탓에 기존에 있던 길이 아니라 잘 안 쓰이던 길을 억지로 찾아가던 통에 행군하다가 길을 못 찾고 도로 되돌아가거나, 호주군을 코앞에 두고는 길을 잃어 공격 일정을 연기하는 등 혼란상이 연출되었다. 이로 인해 갖고 있던 식량도 다 떨어지고 결국엔 풀 뜯어 먹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이거 영락없는 과달카날...[10] 앞서 와우를 공략했던 연대 병력도 바로 이 사단의 예하부대였다.[11] 전방인 라에와 후방인 마당은 직선 거리만 따져도 200km를 훌쩍 넘겼으며 실제 이동 거리는 이것보다 더한데다 도로마저 정비되지 않았다.[12] 앞서 언급한 일본군 연대규모 공격대가 라바울을 출발하던 당일에 맞춰 이들이 탄 선단을 목표로 공습을 가할 정도 -비록 간발의 차이로 선단은 놓쳐버렸지만- 로 연합군의 정보력은 상당하였다.[13] 앞선 와우 공략부대는 뉴브리튼섬 남쪽으로 향하여 최단거리 코스로 항해했으나 연합군 항공공격에 쉽게 노출되었다.[14] 일본군 아니랄까봐 육해군의 명명법이 서로 달라, 해군에서는 되튀어 오른다는 뜻으로 반도(反跳)폭격이라 표현했고, 육군에서는 날듯이 튀어온다는 도비(跳飛)폭격이라 칭했다. 태평양 전선에서는 해군 쪽 기록이 육군 쪽보다 풍부하고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현대에는 보통 반도폭격이 더 많이 쓰인다.[15] 해군항공대 소속 데버스테이터의 참상에 가려져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드웨이에서 출격한 육군항공대 소속 B-26 4대도 뇌격에 나섰다가 2대가 격추당했다. 2차 대전중 미 육군 항공대의 실전 뇌격 기록은 이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기록이 그나마 알려져 있고, 그 외의 기록은 알려진 바가 없다.[16] 약 1천미터 고도였다. 전투 막바지에 하와이에서 미드웨이로 증원차 오던 B-17들이 일본함대를 공격했는데, 연료 잔량 때문에 고도를 높이지 않고 그대로 공격했다.[17] 이 당시 미군 항공어뢰의 투하조건은 미드웨이 해전 당시의 고도 15 m에 진입속도 200 km/h라는 '나 격추해줍쇼' 하는 막장스런 조건보다는 고도 조건이 쬐끔 나아졌지만 여전히 까다로웠다.[18] 폭탄이 너무 튕겨올라서 함선 너머로 지나가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19] 실제로 훈련 중 이런 사고가 발생했다.[20] 이 와중에 일본군 선단은 저공으로 돌입하는 보파이터 폭격기들을 외형히 흡사한 보포트 뇌격기로 오인했다. 이 전투에 앞서 보포트 뇌격기로부터 어뢰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본군 선단은 어뢰공격에 노출되는 면적을 최대한 감소시키기 위해 보파이터들이 진입하는 방향으로 선수를 돌려 세로 대형을 취했다. 그런데 이 또한 연합군의 낚시에 걸린 것이었다. 보파이터 부대는 뇌격으로 착각하라고 일부러 뇌격코스로 진입했던 것. 덕분에 그나마 대열이 흐트러져 이미 효율이 떨어진 대공화망이 더 비효율적인 상태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기총소사로 일렬로 죽 긁고가기 딱 좋은 표적이 된 것이다.[21] 수송선에 타고 있던 일본 육군 병력들이 공격해오는 연합군 폭격기들을 향해 소총으로 대항하려다 기총소사에 몰살당하는, 영화 같은 장면도 벌어졌다고 전해진다.[22] 남서태평양 연합군 항공대를 지휘하던 태평양 지구 미 육군 제5항공군 사령관인 육군 중장 조지 C. 케니 장군은 그의 메모에서 이 날의 일본군의 보복 공습에 대해 기록하며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짓'(원문은 '마구간의 말을 도둑맞은 다음에 after the horse had been stolen from the barn'이다)이라 말하며, "일본군 항공 사령관이 바보라는 게 정말 다행이다. (공습에 동원된) 저 백 대의 비행기들이 지난 3일 수송선단의 머리 위에서 벌어진 대 전투에 투입되었다면, 우리의 임무는 무척 힘들어졌을 텐데 말이다"라고 비웃었다. 다만 일본군은 선단호위에 가용 전투기 전력을 모두 투입하였고, 4일의 편대는 폭격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선단호위에 투입됐다 하더라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용한 항공전력이 있음에도 수송선단이 궤멸해버리고 전투가 끝난 다음에야 연합군 비행장을 공격한 것을 비웃는 뜻 정도로 보면 옳을 것이다. 그에 반해, 연합군은 바로 3월 3일 전투 당일에, 일본군의 항공엄호를 약화시키기 위해 20여기의 A-20 하복 폭격기를 동원해 라에의 일본군 비행기지를 공격했었기 때문이다.[23] 일본군 입장에서 변명하자면 이미 과달카날 전역을 거치면서 항공전력이 크게 소모된 탓에 뉴기니 일대의 연합군 기지들에 대한 사전 견제 공격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어설프게 공격해봤자 자신들의 의도를 연합군에 알리는 꼴만 되니 아예 선단 상공 호위에만 집중했지만, 연합군의 전력 규모와 새로운 전술에 무력화 되고 말았다.[24] In fact, Allied aircrews had commenced strafing survivors immediately after the initial attacks—before the loss of Lieutenant Moore's plane. And aircrews who hadn't witnessed Japanese fighters fire on the Americans in their parachutes also participated in the strafing of Japanese survivors. 출저[25] Gillison, Douglas (1962). Royal Australian Air Force 1939–1942. Canberra: Australian War Memorial[26] johnston, mark (2011). Whispering Death: Australian Airmen in the Pacific War. Crows Nest, New South Wales: Allen & Unwin. ISBN 978-1-74175-***-3.[27] 후부키급 구축함 2번함 시라유키, 아사시오급 구축함 1번함 아사시오, 4번함 아라시오, 카게로급 구축함 10번함 토키츠카제[28] 2일- 252공 이치히라 비장 행방불명, 252공 노다 이비조 불시착후 구조, 3일- 즈이호 비행대 단죠 상비조 피격 후 전사, 즈이호 비행대 마키 비장 Moore중위의 B-17과 충돌 전사, 204공 야토 비장 불시착후 구조, 204공 니시야마 이비조 행방불명, 영어권 위키 비스마르크해 해전에 있는 Fortress Rabaul: The Battle for the Southwest Pacific, January 1942 – April 1943, 페이지 313 출처에서는 손실 7기 손상 3기[29] 3일- 제 43 폭격기 편대 B-17 우드무어 중위 마키기와의 충돌으로 탈출에 성공한 승무원은 기총소사로 전원 전사, 제 90 폭격기 편대 B-25 파일럿 불명 착륙 중 추락, 제 39 전투기 편대 P-38F 파우로트 중위 행방불명, 제 39 전투기 편대 P-38F 이슨 중위 행방불명, 제 39 전투기 편대 P-38F 쉬프렛 Jr. 중위 행방불명, No.30 SQ 보파이터 존스 중위 불시착 구조[30] 뉴기니 섬은 지형적 특성상 동부와 서부가 사실상 갈라진 상태였고 동부 뉴기니 안에서도 육로 수송이 매우 힘들었기 때문에 보급은 라바울을 경유하거나 멀리 후방의 중부 태평양에 있는 팔라우나 트럭으로부터 오는 해상 수송에 의존해야 했다.[31] 상술한 바와 같이 그때까지 솔로몬 제도의 항공전력을 담당하던 한 축이었던 육군항공대 전력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면서 이 일대의 일본군 항공전력이 약화된 사정 때문에 항모기동부대의 반발을 자신의 지위로 억누르며 동원했다.[32] 약 30척에 달하는 함선과 180대에 달하는 항공기를 파괴했다고 보고되었지만, 실제 연합군의 피해는 7분의 1에 불과했다.[33] 미군이 라바울을 직접 공략했다면 태평양상의 미 지상군을 묶어두기라도 했겠지만, 현명하게도 미군은 라바울을 포위만 한 채 그대로 건너뛰어 버렸다.[34] 비슷한 오역으로는 <담피르>라는 이름의 캐릭터가 있다. 항목 참조. 심지어 이 캐릭터는 영미권에서도 오역된 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