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런의 절대방위선에 대한 내용은 절대방위선(나이트런) 문서 참고하십시오.
絶対防衛線[1] / 絶対国防圏[2]
1. 개요
태평양 전쟁 시기 후반부 일본 제국이 수세에 몰리면서 사용하던 용어다. 과달카날 전역을 위시로한 솔로몬 제도 일대에서의 소모전에 따른 피해와 동부 뉴기니 지역의 전황 악화에 위기감을 느낀 대본영에서 1943년 9월말에 인도네시아 남부 도서지역 일대-뉴기니 서부지역-캐롤라인 제도-마리아나 제도-오가사와라 제도를 묶는 해상방어라인을 절대방위선이라 칭하고 이 권역을 절대국방권으로 지정해서 사수한다는게 핵심 내용이다. 절대방위선/절대방어선/절대국방권 등의 이름이 혼용되지만 이름, 주체나 방침 정도만 바뀌었을 뿐 거의 같다.1944년 2월에 캐롤라인 제도의 트럭 환초가 미 함대의 공습에 의해 무력화된 데 이어 4월에는 맥아더가 서부 뉴기니를 침공하면서 방위선에 금이 가 버렸고, 결국 1944년 6월부터 벌어진 필리핀 해 해전, 사이판 전투와 제2차 괌 전투로 인해 마리아나 제도가 미군 손에 떨어지면서 절대방위선/국방권 체제는 모두 무너지고 일본은 결호작전으로 본토방위선을 치게 된다.
2. 의미
이름만으로 보면 마치 마지노선처럼 "다른 곳은 빼앗기는 한이 있어도 이 선만은 지켜내겠다"는 인상이 강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태평양전쟁 개전 초기에 일본이 점령한 거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고 있어서 "우리가 점령한 땅은 모두 지키겠다"는 선언적인 의미 이상은 없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 선언의 대상은 일본 국민이 아니라 천황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이 시기 전황이 180도 급변해 일본군이 연패에 빠지며 점령지를 잃자 실의에 빠진 쇼와 덴노가 히스테릭한 행동을 벌였고, 그에 당황한 대본영이 쇼와 덴노를 안심시키기 위해 내건 계획이라고 할 수 있는 것.본질적으로는 점감요격작전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못한 일본군의 현실 파악능력 문제다. 점감요격작전의 핵심은 진주만 공습으로 1941년 당시의 미 해군 전력을 무력화하고, 그들이 예측한 재건기간 2년 동안 태평양의 주요 진격로가 될 섬을 요새화 시켜서 막는다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이 절대방위선이란건 결국 자기들 기준에 재건기간이었던 이때 요새화한 섬에서 미 해군을 막다가 기회를 잡은 지점에서 함대결전을 벌이자라는 점감요격작전을 수행하다보면 언젠가 맞닥뜨리게 될 미 해군과의 함대결전 라인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점감요격과 함대결전을 어디서 벌일지도 못 정했고, 어디로 미군이 올지도 모르면서 기존 계획만 밀어붙인 것.
거기에다 이렇게 방위선을 설정했으면 방위선 밖의 영역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포기하거나 방위선 안쪽의 방어역량 강화에 나서야 했으나, 실제로는 라바울을 비롯한 솔로몬 제도 일대와 방위선 동쪽의 마셜제도에 대해 계속해서 자원을 투입하고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방위선 안쪽의 방어준비는 소홀해졌다. 일이 이렇게 된데엔 미국의 전략과 전쟁수행능력, 본질적으로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미국의 작전능력 확대를 잘못 평가한 일본 군부, 특히 솔로몬 전역에 집착한 연합함대와 대본영의 실책이 크다.
3. 무너지는 과정
1943년 중반들어서 미국은 일명 '개구리뜀뛰기(Leapfrogging)', 또는 '섬 건너뛰기(Island hopping)'라 불리는 거점 우회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솔로몬 전역의 콜룸방가라를 우회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이 신경써서 구축한 거점들을 지나치고 대신 그 주변의 방어가 취약한 곳을 점령한 뒤 빠른 속도로 비행장, 군항을 건설해 거점으로 삼아 항공기와 군함을 이용해 일본군의 보급선을 끊어서 지나쳐버린 일본군 거점을 말려죽이는 전법이었다. 라바울이나 트럭처럼 방어가 강력한 곳은 지상군을 투입하는 대신에 주변을 고립시킨 상태에서 폭격만으로 무력화했다.일본군은 미군이 자신들의 거점을 지상군으로 직접 공격하면서 진격속도가 지체되리라 생각했다. 우회전략이 표면화된 뒤에도 미군이 거점을 새로 마련하는데엔 시간이 걸릴거라 생각하였지만, 미군은 거대한 보급능력과 공병의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일본군의 예상을 비웃듯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점령지를 순식간에 군사기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빠른 거점 확보 능력을 등에 업은 미군의 진격속도는 일본군의 예상을 항상 앞질렀다.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지상기지의 항공기 지원하에 해군 함대가 기동방어를 하며 미군의 해상 침공을 저지해야 했으나, 절대방위선을 정하는 시점에서 일본군의 항공전력은 연합군 항공전력에 열세해 진데다 전투력도 저하되어 연합군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 일본군의 항모기동부대는 산타크루즈 해전을 끝으로 종합 전투력이 와해되어 버렸다. 항모부대 재건에 나서고 있었지만, 지상기지의 항공전력 지원에 항모부대의 항공기들도 동원되어 피해를 입곤 하면서(이호 작전, 로호 작전) 재건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전함들은 속도가 느려서 기동 방어에 나설 수가 없었다. 기동력이 좋은 구축함이나 순양함급 군함들은 전쟁 초,중반에 우수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미 해군 수상함대를 상대했지만, 태평양 전쟁 중반(1943년 후반기)부터 미 해군 수상함정들의 전투력이 올라가자 그동안 일본군이 우위를 보이던 수상함간 야간 단독 전투에서도 밀려 버렸다. 1943년 11월 부건빌 전역을 지원하기 위해 나섰던 일본군 함대가 미군 수상함정의 반격(엠프레스 오거스타 만 해전, 세인트 조지 곶 해전)과 항모기동부대의 공습을 받아 패퇴한 이후, 1944년 중반까지 연합함대는 사실상 움츠러들어서 미군이 몰려오는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한 것도 모자라서 미군을 피해 근거지를 점점 뒤로 물려야 했다.
거기에다 1943년 격전의 중심이었던 솔로몬 제도와 뉴기니 일대에만 정신이 팔린 탓에 미 태평양함대의 중부 태평양 돌파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고 있었다. 중부태평양 돌파의 시작이었던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이 크게 피해를 입고 시간을 지체한 탓에, 일본군은 중부 태평양 한복판의 마셜 제도를 돌파하는데에 시간이 많이 걸릴거라 예상[3]했지만, 전략과 전술을 재점검한 미군은 중부태평양에서도 거점우회전략을 구사하여 일본군의 거점은 놔둔채 핵심지역들만 공략하는 방법으로 마셜제도를 빠르게 손아귀에 넣은 한편 방위선의 중심 거점 중 하나인 트럭 환초를 비롯한 캐롤라인 제도는 아예 지상군을 보내지도 않고, 폭격만으로 무력화해버렸다. 상술한 라바울을 포함하여 캐롤라인 제도 전체와 마셜제도 일부 지역은 종전때까지 일본군 점령지였으나 전황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뒤이어진 마리아나 제도 침공에서도 마찬가지 양상이 벌어졌다.
1944년 중후반이나 되어야 미군이 방위선에 도달할 거라 본 일본군의 예상과 달리 1944년 초부터 방위선이 본격적으로 위협을 받기 시작하자, 일본군은 그제서야 방위선 안쪽의 방어능력 구축에 나섰지만, 시간은 일본군의 편이 아니었다. 전쟁 후반에 들어서면 미군의 진격 속도와 방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내내 휘둘리는 일본군 수뇌부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가 되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B-29라는 초장거리 폭격기로 마리아나 제도에서 일본 본토를 직접 타격할 수단도 만들었고, 원자폭탄이라는 한 발의 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초토화할 화력의 무기도 만들었으며, 레이더 기술의 발전으로 일본 특유의 야간전투도 무력화시키는 압도적인 과학기술력 차이가 지정학적 이점조차 없애버렸다.
4. 태평양 전쟁에서의 비중
미군의 전략이나 일본군의 대응과는 별개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곳들이 다수 위치하여 상당히 큰 전투들이 이어졌다. 헤일스톤 작전, 혼작전[4], 필리핀 해 해전, 사이판 전투, 제2차 괌 전투, 이오지마 전투 등등 태평양 전쟁 후반기의 전투들이 거의 이 곳을 중심으로 해서 이어졌다.[1] 절대방위선[2] 절대국방권[3] 일본군은 미군이 마셜 제도를 손에 넣는 건 1944년 7월경이나 되어야 가능할거라 보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년 2월에 마셜 제도의 주요 지역이 미군에 점령당했다.[4] 맥아더군의 서부 뉴기니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 해군이 벌인 작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