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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16:17:59

이오지마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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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연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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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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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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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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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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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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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게토 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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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이탈리아 내전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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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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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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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파일:external/i2.cdn.turner.com/150220105605-01-iwo-jima-battle-0220-super-169.jpg
상륙을 시도하는 미 해병대(2월 19일)[1]
파일:external/www.missioncontinuesblog.org/IwoJima.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tars_and_Stripes_on_Mount_Suribachi_%28Iwo_Jima%29.jpg
이오지마에 상륙하는 미군. 뒤에 있는 차량은 LVT(A)-4. 스리바치산 정상에 게양된 성조기
이오지마 전투
The Battle of Iwo Jima | 硫黄島の戦い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의 일부
파일:attachment/이오지마 전투/iwo.jpg
이오지마의 위치
날짜
1945년 2월 19일 ~ 3월 26일
작전명
Operation Detachment (분리 작전)
장소
일본 제국, 도쿄 도 이오섬
<colcolor=#000> 교전국[[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미국|]]
지휘관 미국 해군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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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깃발 명칭
]][[체스터 니미츠|]]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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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스프루언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마크 미처|]]
미국 해병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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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깃발 명칭
]][[홀랜드 스미스|]]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틀:깃발|]] 이치마루 리노스케
결과
미군의 승리
영향
일본 본토 공습의 교두보 확보
일본 제국군의 조기경보 체계 무력화
병력 70,000명(250,000명)[2]
함선 500여 척
23,060명
전차 23대
해안포 33문
대전차포 69문
화포 438문
대공포 300여 문
피해규모 전사 및 실종 7,315명
부상 19,189명
호위항공모함 1척 침몰[3]
호위항공모함 1척 소파[4]
정규항공모함 1척 대파[5]
전사/실종 17,527여 명
포로 216명

1. 개요2. 양측의 대비
2.1. 일본군2.2. 미군
3. 경과 4. 기타
4.1. 이오지마의 깃발4.2. 루즈벨트에게 보내는 서(書)
5. 창작물

1. 개요

승리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 모두가 의심했던 것은, 우리 중 어느 누구라도 살아남아서 최후에 묘지에 참배할 수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Victory was never in doubt. What was in doubt in all our minds was whether there would be any of us left to dedicate our cemetery at the end.)
- 제3해병사단장 그레이브스 B. 어스킨 소장
이오지마에서 싸운 군인들 사이엔, 비범한 용기는 당연한 미덕이었다.
(Among the men who fought on Iwo Jima, uncommon valor was a common virtue.)
- 체스터 니미츠 제독, 이오지마 전투 이후[6]

태평양 전쟁 말엽인 1945년 2월 19일부터 3월 26일까지 서태평양의 전략적 요충지인 이오 섬을 두고 벌어진 미 해군해병대일본 제국 육군 및 해군육전대 간의 전투.

도쿄에서 거의 정남쪽으로 1,216km 떨어진 서태평양 해상에 위치한 이오지마는 원래 별 볼일 없는 아주 작은[7] 화산섬이었지만, 사이판 점령 이후 중부 태평양에서 미 해군이 진격하자 이에 일본 해군이 이곳에 비행장과 레이더 기지를 건설한다. 이 기지는 지리적으로 일본 본토 바로 앞의 전진 기지인데다, 본토 폭격을 목적으로 인근을 지나가는 미 육군항공대B-29 폭격기를 요격하거나 본토에 경보를 해 줄 수도 있었다.

반대로 미 육군 항공대는 일본 본토 폭격 때 일본의 요격기를 무력화할 B-29의 호위기인 P-51 머스탱을 띄울 비행장으로 이오지마를 생각했고, 그와 함께 일본 본토 폭격을 마치고 귀환하는 B-29 폭격기들 중 문제가 생긴 기체가 착륙할 비상 활주로를 만들 장소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 섬이 필요해진 상황이었다.[8] 또한 전략적으로 보아도 이오지마를 점령하면, 이오지마와 인접한 일본의 가장 중요한 지정학적 방어진지인 오키나와를 점령하는데 중요한 기착지로 활용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전략적인 위치 때문에 미군은 이오지마의 공략을 결정했는데, 이전까지의 무능하고 무책임한 일본군 지휘관과 달리 미국을 잘 알고, 자신의 전략적 목표를 잘 알고 있던 책임감 있는 용맹한 지휘관이 하필 이오지마에 있었던 탓에, 이오지마에서 피 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2. 양측의 대비

2.1. 일본군

파일:attachment/GeneralTadamichiKuribayashi.jpg
육군 중장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후술할 해군의 이치마루 제독과 명목상 동급이었으나, 실질적으로 이오지마의 육해군 수비 병력 전체를 지휘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27px-Ichimaru_Rinosuke.jpg
▲ 이오지마의 일본 해군 측 최선임자였던 해군 중장 이치마루 리노스케 (市丸利之助) 제독은 제27항공전대 사령관[9]으로 해군 육전대를 이끌며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와 함께 이오지마 전투를 지휘했다.

이오지마 전투는 이전까지 해안가에 참호를 파고 적이 오기를 기다리던 일본군의 기존 전술로 맞서던 태평양 전선에서의 전투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당시 뒤늦게 이오지마 수비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장군의 전술에 기인했다.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던 그는 마리아나 해전에서 이미 해군이 무력화 된 이상 이오지마 방어는 사실상 강요된 자살행위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예정된 희생을 조금이라도 일본에 유리하게 이용할 방법을 강구했다.

그리하여 구상한 그가 생각한 방어 전술은 장기 방어전을 통해 최대한 미군의 희생과 출혈을 강요해서 본토에 시간을 벌어 주면서, 한편으로는 일본 본토 상륙을 눈 앞에 둔 미군에게 상륙전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겨서 일본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상황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는 패배를 기정사실로 상정하고 해안 방어 진지보다는 땅굴을 만들어서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였고 전멸을 앞당기는 옥쇄 돌격을 엄격히 금지하고 가능한 오래 병력을 유지하면서 조직적인 전투를 집요하게 지속하기 위한 지침들을 만들어 부하들에게 숙지시켰다. 이는 상당히 유효한 조치였다. 만일 이러한 조치가 태평양 전역 모든 일본군 사령관의 기본적인 방침이었다면 미군의 진격은 아마도 2~3년은 더 지체되었을것이고 미군 또한 큰 피해를 감안해야했기 때문에 미국 정계에서도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모든 전쟁에서 패망 직전 상황에 처한 군대에, 그에 걸맞지 않게 유능한 지휘관이 투입되면 아수라장을 넘어 지옥도가 연출되었던 역사들 처럼 다다미치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군의 상황을 생각하면 실로 유능한 지휘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때문에 이오지마 역시 일본군, 연합군 모두에게 지옥도가 되었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의 새로운 전술 때문에 이오지마 전투의 시작인 해안 상륙 시점부터 미군은 전혀 낯선 전황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그 당시 일본군은 해안선 방어를 할 때 '군대는 상륙하는 그 시점에 가장 방어가 취약하다.'는 논리를 따라 상륙정이 다가오는 동안 해안선 가까이에 대기하다가 적군이 상륙하면 바로 그때 공격하는 전술을 취하였다. 문제는 이 전술은 공수 양측의 물량과 화력이 어느 정도 비등하다는 전제가 있을 때 성립한다는 것. 태평양 전역 곳곳에서 전력을 줄줄이 말아 먹고 본토마저 위협받는 이 시점에서 미국은 일본을 압도하는 물량과 화력을 지녔다.

객관적으로 상륙하는 시점이 가장 취약함은 맞지만, 미군은 이미 타라와 전투에서 일본군이 구축한 방어선에 호되게 데인 이후로는 상륙에 앞서 구형 네바다급 전함, 펜실베이니아급 전함, 테네시급 전함, 뉴멕시코급 전함들의 대구경 함포를 이용한 상륙 준비 포격[10]항공모함 함재기를 동원한 공습을 펼쳐 해안에 설치된 토치카나 방어선을 철저히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그랬기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 일본군은 해안선에 올망졸망 참호파고 모였다가 사이좋게 포탄에 맞아 사망하여 대다수 군부대가 작전불능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다음날 반자이 돌격을 감행하며 자멸하다보니 미군의 공세속도는 매우 빠를수 밖에 없었다.

구리바야시는 이런 해안선 방어 전술의 문제점을 곧바로 파악했고 이미 패배를 기정사실로 여긴 그는 새로운 전술로 전환한다. 그는 해안선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은 자살행위이니까 이를 중지시킨 뒤 해안선 안쪽으로 병력을 빼고, 부임 직후 곧바로 거대한 땅굴로 연결된 탄탄한 방어망을 구축했다.[11] 그리고 일본군의 고질병 반자이 돌격을 금해 쓸데없이 나가 죽기보단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서 저항하도록 명령했다.[12] 이렇게 구리바야시의 현실적이고 효율적으로 구축된 방어망으로 인해 미군은 기존 그대로 3일간 무자비 포격을 가한 뒤 당당하게 상륙했으나 땅굴로 인해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일본군의 땅굴 벙커에 의해 이제까지 태평양 전선에서 마주쳐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일본군을 맞이하였다.[13]

2.2. 미군

파일:external/i1089.photobucket.com/USS_New_York-11firingonisland.jpg
●1945년 2월 16일, 이오지마에 14인치(356mm) 주포로 포격하는 USS 뉴욕 전함

미군이 촬영한 이오지마 공략 컬러 영상

당시 이오지마의 일본군 수비대는 마리아나 해전으로 일본군 해군이 사실상 궤멸되어서 증원병력 수송도 힘들고 항공지원도 힘든 상황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제공권, 제해권도 빼앗겼기에 자연스럽게 미 해군의 해안 봉쇄로 군수 지원이 끊긴 상태였으며, 미 태평양 함대는 미 해군 항공대와 미 육군 항공대, 해군 함정을 동원하여 1944년 6월부터 무려 아홉 달 동안이나 이오지마를 폭격 및 포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섬의 모습이 연기에 싸여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8인치 함포에서 20 mm기관포까지 모두 동원해 섬이 박살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퍼부어댔지만, 이미 그 시점에 일본군은 지하 동굴에 틀어박혔다. 사실 일본군에게는 이오지마에 배치된 것 자체가 "싸우다가 죽어라."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일본군도 악착같이 버틸 수 밖에 없었다.

상륙을 앞두고 상륙 지상군인 제5상륙군단장 해리 슈미트 해병 소장은 원활한 상륙 작전을 위해 해군에게 10일 간 상륙 준비 포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 제5함대 상륙지원 기동부대(TF-52) 사령관 윌리엄 블랜디 제독은 연이은 포격으로 인해 포탄 부족으로 그 요청을 거부했다. 슈미트는 절충안으로 다시 9일의 포격을 요구했지만, 블랜디는 단지 3일 간의 포격에만 동의했다. 이로 인해 5상륙군단과 TF-52가 서로 떽떽거리면서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결국 상륙 준비 포격은 3일 남짓 이루어졌고 그대로 상륙할 수밖에 없었다. 5상륙군단의 상급부대인 미 제5함대 56기동부대(TF-56, 5함대 상륙 해상군, 상륙작전시 상륙함을 지휘한다.) 사령관인 홀랜드 스미스 해병중장은 전쟁 후 자서전에서 이오지마 전투 당시 해군의 상륙준비포격 부족으로 해병들의 피해가 컸다고 격렬히 불평했다.

이로 인해 상륙 부대의 피해가 컸다는 주장도 있지만, 쿠리바야시 장군이 지하 땅굴을 워낙 잘 구축해서 별 효력이 없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게다가 이미 9달이나 포격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10일 더 한다고 상황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 아버지의 깃발에서 해병대 지휘관이 통신기를 들고 '포격 더 안 해 주면 당신네 해군도 다른 곳에 못가고 여기 발 묶이는건 마찬가지요. 기어이 3일 동안만 해주겠다고? x나게 고맙군!'라고 하면서 떽떽거리던 장면이 이 부분이다.

미 해병대와 미군 상층부는 이오지마의 정확한 상황을 몰랐던 것과 연이은 승리에 도취되어서 작은 섬 이오지마 점령에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 않을 것으로 명백한 오판을 하였다. 가장 큰 오판은, 저 손바닥만한 섬에 병력이 있어봐야 얼마냐 있겠냐와 저런 손바닥만한 섬 어디에 숨을 데가 있겠냐는 방심이었다. 원래대로면 이오지마의 수비병력은 쿠리바야시,이치마루가 이끄는 육,해군 4개 대대 7천여명의 병력이 전부였지만, 공교롭게도 일본군이 사이판 전투의 중요성때문에 다급하게 본토에서 사이판으로 파견한 보병 제145연대와 전차 제26연대가 미처 사이판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이판이 함락되는 바람에, 갈 곳을 잃은 육군 2개 연대 병력이 이오지마에 대기하게 된 것이다. 이때문에 원래대로면 10:1을 넘는 병력차가 일본군 합계가 2만명이 되면서 3:1까지 줄어들고 저 병력이 가져온 전차,대전차포,대공포등 중화기로 인해 당시 일본군 상황으로썬 거의 오키나와 못지 않은 화력까지 가진채 맞닥뜨린 것이다. 그리고 그마저도, 쿠리바야시가 수적 열세를 인정하고 섬 전체에 계란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유황도 지하에 조선인 노무자와 일본군 병사들을 총동원해 지하에 개미굴 수준의 땅굴 요새를 지어 미군 함포의 빗발치는 사격을 피했다가 사격이 멈추고 해병대의 진격이 시작되면 나타나 필사의 항전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미군 입장에선 "아니 여기 왜 이렇게 병력도 많고 화력도 센 거지?"라는 상황에 직면한 것.

심지어 여전히 일본군의 학습효과와 저항의지를 깔보고 있어 펠레리우 전투를 겪고 나서도 다른 일본군들 같이 이오지마의 일본군도 상륙 시점에 총공격을 가하고 바로 그 저녁에 야음을 틈타 남은 병력을 모두 반자이 돌격에 사용할 것이라 예측했으며 이것만 견뎌 내면 미군의 일방적인 소탕만 남을 것이라 판단했다.[14] 그러나 정작 해병대 상당수가 상륙할 때 일본군은 전혀 공격하지 않았고, 해병들이 다가올 반자이 돌격에 대비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는 동안에도 자신들의 지하 벙커에서 나오지 않았고 일본군은 이들이 상륙을 더 많이 했을때 일제히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 날 상륙부대의 3개 해병사단이 해안선에 상륙하고 해안선에 진지를 구축하던, 모든 해병들이 해안선의 발이 푹푹 빠지며 더군다나 가파른 지형 때문에 대형 장비를 상륙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으며 화산재 같은 모래에 발이 묶인 바로 그때 일본군의 총 공격이 시작되었다.

3. 경과

파일:attachment/marines-iwo-landing.jpg

갑작스러운 일본군의 기관총 사격과 동굴 벙커에서 쏘아대는 일본군 포병의 사격으로 인해 해안선에 상륙한 해병대는 혼란에 빠졌고 철저히 준비한 일본군의 포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미군도 질세라 동굴 벙커를 향해 대포를 쏘면서 벙커를 무력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반면 미 해병대는 해안선에서 머뭇거리면 죽는다는 인식이 확실시 하면서 빗발치는 총알을 뚫으며 진격해나갔고 너무 많은 미해병대의 수로 인해 부족한 보급으로 총알이 떨어진 일본군은 이내 미해병대의 필사적인 반격에 뚫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당일 쌍방의 인적 물적 손실이 막대하였고 개전 첫날에만 미합중국 해병대 2,500여 명이 전사 및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하는 피해가 났다. 당시 전황 보고를 들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물론 일본군 쪽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오지마 수비군 22,000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5,000명 에도 못 미쳤고, 그나마도 태반이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포로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미 해병대가 철저하게 일본군 수비대를 쓸어 버렸기 때문이고 일본군은 일본군대로 귀축영미로 세뇌된 상태라서 미군 포로가 되느니 수류탄을 까서 스스로 자살하거나 마지막 총검돌격으로 미군에게 스스로 죽거나가 일상 다반사였다. 설상가상으로 미해병대는 일본의 땅굴과 벙커에 대한 특효약이었던 화염 방사기를 동원해 벙커와 동굴을 통째로 태워 버리는 일은 다반사였으며, 공병대가 TNT를 던진 뒤 화염방사로 지져서 엄청난 폭발을 일으켜 동굴 내부를 싹 쓸어 버리거나 불도저로 동굴을 메워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즉, 다 죽어서 잡을 포로가 없었다. 소수나마 일본군 병사들이 항복하거나 낙오되어 미군에게 포획된 사례가 있었으나 당시 일본군 포로를 잡지 않던 해병대의 관습과 더불어 일본군의 악명 높은 가짜 항복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이들 역시 대부분 사살당했다. 이오지마 전투의 참상과 그의 동료 해병이 일본군 부상병을 처형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하는 미 해병 참전 군인의 증언

해군 수병들과 해병대원들은 상륙 직전까지만 해도 "1주일 만에 끝나겠지? 저런 별볼일 없는 섬 따위... 일본 애들도 얼마 못 버틸 테고 말이야." 하는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로 전투의 전망을 낙관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일본군은 지연전을 목표로 섬 전체를 요새화시켜둔 상황이었다. 상륙 직후의 막대한 희생과 스리바치산 함락 이후로도, 미군은 구리바야시가 구축해둔 방어선으로 인해 섬 내륙 지역으로 더디게 전진하며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특히, 센다 사다스에 소장이 지휘하는 혼성 제2 여단의 강력한 저항에 미군은 3월 22일부터 여드레 동안 사상자 약 3,000여 명이 발생해 센다가 지키는 타마나 산을 우회해야 했다. 하지만 타마나 산의 일본군은 개전 17일후 폐쇄된 참호안에서 화염방사기에 타죽을 운명에 놓이게 된다. 센다는 쿠리바야시에게 옥쇄하겠다고 요청하나 쿠리바야시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본대에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결국 미군의 공격에 본대에 합류 직전 센다 군은 전멸하고 센다와 참모진들은 자결했다. 이후 쿠리바야시는 센다의 최후를 보고 받고 최후의 전투를 준비했다.

3월 26일, 쿠리바야시는 남은 병력 300여 명을 이끌고 마지막 돌격을 감행했으나[15] 실패하였고 대부분 병력이 전사했다. 이때 함께 돌격한 쿠리바야시도 전사한 듯하다. 이것이 일본군의 마지막 조직적 공격이었다.

이 후 일본군은 이오지마 곳곳에서 일본군의 유격전이 있었지만 큰 피해는 주지 못했고, 일본군은 이 소규모 유격전 때문에 1,200여 명이나 전사했다.

파일:attachment/FlameThrowers.jpg

결국 1주일 만에 끝난다는 전투는 끔찍한 희생자를 만들면서 1개월 이상이나 계속된 끝에 예상대로 미군의 상처가 가득한 승리로 끝난다. 이 전투는 최초로 일본군보다 미군의 인명 피해가 컸던 전투였다. 물론 미군의 인명 피해는 부상이 대부분이었으나 이는 기존까지 미군이 겪지 못한 뼈아픈 참사였다. 물론 일본군 자체는 전 병력이 전사하다시피하여 사실상 궤멸했지만. 전 병력 110,000명 중 미 해군 및 해병대의 전사자는 6,821명, 부상은 19,189명에 실종이 494명이었다. 일본 육해군은 22,000명 가운데 4,000명만 남고 전원 전사했다.

결과적으로 뒤이은 오키나와 전투까지 합쳐져서 일본군에게 호되게 데인 미군은 쿠리바야시의 의도대로 일본 본토까지 공격하는 것에 상당한 부담감을 가지게 되었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쿠리바야시가 이 전투를 통해 미국이 부담감에 눌려 일본과의 전쟁수행을 포기하고 협상에 들어가는 것을 기대한 것과 달리, 빠른 시일 내로 전쟁을 끝내야 했던 미국은 육군과 해병대의 일본 본토 상륙을 아직 유효한 카드로 생각하는 동시에 공중 전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일본 본토 상륙작전때 이오지마처럼 일본군의 처절한 항전을 기억한 미군 상층부와 당시 미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일본 본토 상륙작전 전에 맨하탄 프로젝트를 통해 완성된 리틀보이, 팻 맨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하는 원인이 되었다.

4. 기타

4.1. 이오지마의 깃발

파일:아버지의 깃발.jpg
Holland, the raising of that flag on Suribachi means a Marine Corps for the next 500 years.
홀랜드, 수리바치의 저 깃발은 해병대의 다음 500년을 의미하오.
제임스 빈센트 포레스탈 해군 장관, 1945년 2월 23일[26]
누구나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본 기억이 있을 사진이다. 미 해병대 소속 군인들이 이오지마에서 가장 높은 스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이다. 사진의 원 제목은 "Raising the flag on Iwo jima"이다. 영화 '아버지의 깃발' 포스터를 비롯하여 미 해병대 전쟁 기념관을 비롯하여 수많은 곳에 석상으로도 만들어져 있다.

원래는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2대대 E중대 부중대장 해롤드 G. 쉬리어 중위가 3소대와 대대본부에서 차출한 소대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정상을 점령하여 더 작은 크기의 첫 번째 깃발을 먼저 세웠고, 후에 산 정상으로 보급물자를 전달하러 온 2소대의 1개 분대 병력이 좀 더 큰 두 번째 깃발을 세웠는데 사진 속 깃발이 그것이다. 맨 처음 세워진 깃발은 전투가 계속되다가 급하게 올리느라 좀 작은 깃발을 사용했다. 이 때의 사진도 남아 있는데 해병대 기관지 "레더넥"의 종군 카메라맨 루이스 R. 라워리 하사가 촬영했다. 이후 대대장 존슨 중령은 이 깃발을 대대 금고에 반납, 대대 소유물로 보관하고 "대신 더 큰 깃발을 달라!"라고 지시, 진주만 공습 당시 격침된 함선에 있었던 성조기를 보관하고 있던 LST에서 해병대원들이 꺼내와 두 번째로 깃발을 세우다가 사진이 촬영된 것. AP통신 소속 종군기자였던 조 로젠탈(Joseph John Rosenthal, 1911~2006)이 찍은 이 사진은 그해 퓰리처 상 사진 부문을 수상했다. 워낙 광원이나 구도가 완벽하고 역동적이라, 당시에도 로젠탈이 이 사진을 찍기 위해 군인들에게 깃발 세우는 연출을 반복시켰다는 소문이 꽤나 나돌았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 때 같은 곳을 촬영한 영상이 있고 회고록과 증언 등이 나와 사라진 상태다.

이 두 가지 버전 사진 중에 두 번째 버전 필름이 먼저 미국으로 들어가 전국의 신문 1면에 실리게 되었다. 심지어 신문 1면을 보관하게 깃발 계양장면 사진이 접히지 않게 해달라는 독자들의 요청에, 배치를 바꾸어 다시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두 번째 버전의 사진의 구도가 워낙 완벽하여, 첫 번째 사진이 먼저 미국으로 들어 갔다고 해도 이 정도로 큰 방향이 있었을지 의문이 될 정도이다. 이후 이 사진은 미 해병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어 전후 미국 각지에 세워진 해병대 기념비들 역시 사진 속 장면을 본따 세워졌다.

그러다 2016년 미 해병대는 사진 속 인물들이 기존에 알려진 것과 약간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기존에 알려진 내용을 정정했다. 깃발을 세운 인물들도 상황이 워낙 긴박하여 헷갈려 하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기억을 조합하여 진실을 찾게 되었다.

이 사진은 본국에 보내지자마자 잔악한 일본군을 상대로 미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상징이 되었고, 정치적 쇼맨십에 능했던 루즈벨트 당시 미 대통령은 이 해병들을 본국으로 송환해, 맨해튼 프로젝트 등에 쓸 전시 국채 판매의 광고판으로 써먹으려 했으나, 송환 명령이 내려지기 전 앞서 말한 3명이 전사하는 바람에 나머지 해병들만 본국으로 송환됐다. 이 기간 중 아이라 헤이즈 해병은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다. 아이러니한 건 이 사람만 찐이고 브래들리와 개그넌은 사진 속 인물이 아니었으며, 실제로 두 번째 깃발을 올린 슐츠와 켈러는 이를 해병대 지휘계통을 통해 바로 잡으려다 해병대의 관료주의에 의해 묵살된 이후 공개적으로 진실회복을 위한 노력은 포기하고 주변에만 사실을 밝혔다.[27]

위 사진의 주인공들은 다음과 같다. 특이사항으로, 사진에 나온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최후가 좋지 못했다.[28]
파일:external/www.iwojima.com/57mike.gif -1919년생, 체코슬로바키아(현재 슬로바키아) 출신.[29]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2대대 E중대 2소대 소총분대장. 계급은 병장
-원래 도로공사 인부였으나 1939년 미 해병대에 지원 입대. 쿠바 관타나모 해군기지 소총경비중대와 해병대 제1여단 7연대 3대대 본부중대, 패리스 아일랜드 신병 훈련교관(DI)으로 복무했고, 해병 중의 해병이라는 제3레이더스대대에서 근무하다가 1944.1.8일 미 해병대 사령관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 해병 중장의 해병대 내 엘리트 부대 해체 명령에 따라 28해병연대 E중대 2소대의 소총분대장으로 복무 중이었다.
-1945년 3월 1일 이오지마에서 아군 함포의 오폭으로 전사[30]
마이클 스트랭크
파일:external/www.iwojima.com/hblock.jpg -1924년생 텍사스주 요크타운 출신. 스트랭크 분대의 부분대장, 계급은 상병.
-고등학교 미식축구선수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미 해병대에 징집되었다.(징집기수) 신병훈련 수료 후 해병대 공수부대에 지원, 해병 중의 해병이라는 미 해병대 제3사단 제1공수연대 본부중대와 1공수연대 1대대 화기중대, 1대대 본부소대에 근무하다가 1944.1.8일 미 해병대 사령관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 해병 중장의 해병대 내 엘리트 부대 해체 명령에 따라 28해병연대 E중대 2소대 소총분대 부분대장으로 복무 중이었다.
-1945년 3월 1일 마이크 스트랭크가 전사하자 분대 지휘를 맡지만 그 역시 스트랭크가 전사한 지 수 시간 만에 일본군의 박격포 공격으로 전사.[31]
할론 블록
파일:external/www.iwojima.com/57sos1.gif -1925년생 켄터키주 힐탑 출신. 스트랭크 분대의 소총수, 계급은 일병.
-고등학교 졸업 후 냉장고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일하다 1944년 징집되었다.(징집기수)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E중대에 배치되어 1945년 3월 21일 이오지마 전투 당시 일본군 저격수의 총탄을 맞고 전사.
프랭클린 수슬리
파일:external/www.iwojima.com/ihayes.jpg -1923년생 애리조나주 새크랜턴 출신. 스트랭크 분대의 소총수, 당시 계급은 일병(최종 계급은 상병)
-피마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건설현장 목수로 일하다, 1942년 미 해병대 상근예비역으로 징집되었다.(징집기수) 신병훈련 수료 후 해병대 공수부대에 지원, 해병 중의 해병이라는 미 해병대 제3사단 제1공수연대 3대대에 근무하다가 1944.1.8일 미 해병대 사령관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 해병 중장의 해병대 내 엘리트 부대 해체 명령에 따라 28해병연대 E중대 2소대 소총분대 소총수로 복무 중이었다. 사진으로 인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 영웅으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진정한 영웅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곳에서 전사한 군인들이라 말했다고 한다. "45명의 소대원 중 단지 5명만이 살아남고, 250명 중대원 중 27명만이 죽거나 다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영웅이겠는가?" 또한, 그는 저 깃발이 꽂힌 날 상륙했으므로 역사적인 순간에 그 자리에 있었다면 몰라도 사진에 찍혔다고 영웅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상부는 관심이 없었고, 국채 판매고를 올리는 데만 열중했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 사람들은 그에게 가게를 차려 주었으나. 그 대신 해병대 작업복을 입고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을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물론 가게는 말아먹고 이곳저곳을 방랑하다, 1955년 애리조나의 인디언 보호 구역에서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
아이라 헤이즈
파일:220px-Harold_Schultz.jpg -1925년 디트로이트 출신,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2대대 E중대 3소대, 계급은 일병(최종 계급은 상병)
-1943년 미 해병대 상근예비역으로 징집되었다.(징집기수) 28해병연대 E중대 3소대 소총분대로 자대 배치를 받아 소총수로 복무 중 이오지마 수바라치산 정상 전투에 참전하여 두 번째 깃발을 세웠지만,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6년 사진속 인물로 공식 판별되었다. 당시 정상에는 전투에 참가한 3소대 병력과 전투 후 물자를 보급하러 온 2소대의 1개 분대(스트랭크의 분대) 병력이 섞여 있었는데, 슐츠는 전투에 참가하여 첫 번째 깃발을 세운 3소대 병력이었고, 전투 후 도착한 2소대의 스트랭크 분대가 두 번째 깃발을 세울 때 그들을 도와 함께 깃발을 세웠다. 그는 죽을 때까지 공개적으로 자신이 사진 속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고, 가족 등 주변에만 진실을 밝혔다. 1995년 사망. 사진속 인물중 가장 오래 천수를 누렸으나, 자녀가 없어 기념해 줄 사람도 없다.
해럴드 슐츠
파일:Corporal_Harold_Pie_Keller.jpg -1921년 아이오와 출신,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2대대 E중대 3소대, 최종 계급은 상병
-이오지마 수바라치산 정상 전투에 참가하여 두 번째 깃발을 세웠지만,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9년 사진속 인물로 공식 판별되었다. 사후 고인의 유품 속 문건에 당시 해병대 지휘계통을 통해 두 번째 사진 속 인물이 본인이라는 사실을 밝혔지만 당시 해병대 관료주의에 묻혀 이 주장이 묵살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는 이후 공개적인 문제 제기는 포기하고, 가족과 직장 동료 등 주변에게만 사실을 얘기했다. 1979년 사망. 그나마 뒤늦게 사실이 밝혀지면서 고향인 아이오와에서는 기념되기 시작하였다.
해럴드 켈러
파일:external/www.iwojima.com/bradleynavy.jpg -1923년 위스콘신주 앤티고출신,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2대대 E중대 3소대 의무부사관이었다. 계급은 해군 의무병장(PM2).
고등학교 졸업 후 장의사로 일하다 1942년 해군에 징집되었다. 해군 의무병으로 오클랜드 해군병원에 근무하다가 해병대 28연대 E중대 3소대로 전입했다. 그는 이오지마 스리바치산 정상 전투에 참가하여 첫 번째 깃발을 세운 인물이었지만 2016년까지 두 번째 깃발을 세우는 사진 속 인물로 오인되었다. 스리바치산 전투 이후 인명 구조 및 부상에 따른 공로로 해군 십자장을 받았다. 자신들이 영웅이라는 사람들 말에 그는 "우리들은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지 영웅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1994년 사망. 아들 제임스 브래들리는 역사학자가 되어, 베스트 셀러이자 자기 아버지와 부대원들의 삶을 그린 저서 '아버지의 깃발'을 썼다. 사후 두 번째 성조기 게양 사진 속 인물이 아님이 밝혀져 말이 좀 나왔지만, 교전이 없었던 두 번째 게양 때가 아닌 도중 총격전도 벌어졌던 첫 번째 게양 때 현장에 있으며 전투를 겪었고 그와 별개로 이오지마 전투에서 영웅적인 행위를 해 해군 십자장을 받은 전쟁 영웅이란 사실이 변하진 않아 도덕적으로 문제되진 않았다. 아들이 이오지마 전투를 다시 세상에 알린 공적을 인정해서 흐지부지 넘어갔다. 제임스 브래들리도 아무 이의 없이 이를 인정했다.
존 브래들리

4.2. 루즈벨트에게 보내는 서(書)

이오지마의 일본 해군측 최선임자인 이치마루 제독은 미군이 지휘소 근처까지 쳐들어오자 죽음을 직감하고, 대담하게도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직언을 고하기로 하고 편지를 쓴다.

이를 하와이 출신 해군 하사관인 미카미 히로부미(三上弘文) 병조에게 영어로 번역하게 하여 일본어, 영어 각각 1장으로 된 문서를 무라카미 해군 대위에게 건넸다. 무라카미 대위는 최후의 돌격에서 전사했는데, 이 서한은 일본 장교들의 시신을 뒤지던 미군에게 발견되어 7월 11일 미국의 신문에 게재되었다.

그 내용인즉슨, '여태까지 앵글로색슨을 위시한 백인들이 세계를 나눠 먹고 있었는데 욕심이 너무 많은 것 아닌가? 우리 일본이 아시아의 유색 인종들을 해방시켜서 잘 살아보려고 하는 것인데 반대했기에 전쟁이 난 것이다. 우리의 진심을 이해하고 양보 좀 해다오.' 는 것으로,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헛소리지만 읽어 보면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보인다. 영문, 일문 편지 전문출처 이는 일본 군부가 선전한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의 실체가 일선 군부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만큼 일본 국민들이 군부와 덴노에게 철저하게 세뇌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단 수병이나 위관급 장교도 아닌, 나름대로 배웠다는 엘리트인 제독조차 이런 개소리를 진지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처럼 이치마루 제독도 시신이 수습되지 않았지만 마지막 돌격시 함께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5. 창작물


일본의 영상툰

[1] 하얀색 줄이 가로로 처진게 전부 미군 상륙정이 지나가면서 내는 파도이고 뒤로 보이는 봉우리가 바로 이오지마 전투의 최대 격전지 중 하나였던 스리바치산이다.[2] 이오지마 전투에 종군한 미군의 전체 군종(Armed Forces)의 미 해군, 미 해병대, 미 육군항공대의 총합 병력이 250,000명이며 섬에 상륙한 지상군으로 일본군과 직접 교전한 미군은 70,000명이다.[3]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CVE-95 비스마르크 시. 카미카제 자폭 공격으로 침몰. 일본의 공격으로 침몰한 최후의 미군 항모.[4]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CVE-94 룬가 포인트[5] 렉싱턴급 항공모함 CV-3 새러토가[6] 니미츠의 이 '비범한 용기는 당연한 미덕이었다' 발언은 해병대 창설 이래 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미 해병대 장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54년 세워진 해병대 전쟁 기념비 기단에 새겨져있다.[7] 찌그러진 마름모 형태로, 말은 작다고는 하지만 장축이 8.5km 정도 되어서 군대가 상륙하지 못할 정도로 작진 않았다. 전차를 밀어넣기엔 애매하지만 활주로 깔고 2만 명이나 되는 병력이 버팅길 수는 있는 크기. 물론 이 정도 크기의 섬에서 자급자족은 말도 안 되고, 무조건 보급을 받아야만 했다.[8] 다만 현대에 연구된 바에 따르면 이오지마 비행장의 일본공군은 이미 이오지마 점령 이전에 궤멸된 상태였었고 B-29의 손실은 일본본토에서의 요격이나 대공포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였으며 고장으로 인한 망실은 몇대도 되지않았기에 미국의 폭격기 보유대수를 생각하면 무시가능한 수준이였다. 이오지마에서 입은 피해가 너무나도 컸던 나머지 이오지마의 전략적 가치를 과도하게 홍보할 수 밖에 없었던 것.[9] 항공대는 진즉에 전멸하여, 잔존 병력은 모두 육전대로 편성됐다.[10] 위엄 쩌는 파괴력으로 탱크와 비행기 잘 잡아먹기로 유명하던 독일의 8,8cm FlaK도 인치로 환산하면 3.46인치 정도 된다. 이 전함들이 구식이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무식하게 9문 12문씩 탑재하고 다니는 12~16인치 대구경포의 파괴력은 지상 공격용으론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155 mm(약 6.1인치) 곡사포의 살상반경이 50 m 정도이다. 미국의 전함 테네시의 14인치 함포의 별명은 '수영장 제조기'였으며 대공용 부포로 5인치(127 mm)를 달았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서부전선 사진들을 찾아보면 티거와 판터등이 통째로 뒤집혀 대파된 사진들을 볼수있는데 이게 대부분 전함보다 작은 구경을 주로 쓰는 미육군 포병대의 화력에 당한것이다. 육군포병이 아무리커봤자 8인치 전후였는데(그나마 240mm=약 9.45인치포가 있긴했다.) 네바다급, 펜실베이니아급, 테네시급, 뉴멕시코급은 14인치(356mm) 함포를 10~12문씩 주렁주렁 달고 있으니 파괴력은 비교불가이다. 그리고 전함은 주포만 달고 있는게 아니라서 5인치 6인치급의 부포도 대량으로 탑재하고 있었다.[11] 다만 이오지마가 화산섬이라 유황 가스가 많아 한 팀에 1명이 1분 간격으로 뛰어들어가 공사를 하고 바로 뛰어나오는 식으로 해야 해서 전투 당시 원래 계획의 80% 정도 완성된 상태였다.[12] 이런 전술은 후일 오키나와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단, 어디까지나 옥쇄를 주 목적으로 하는 자살적인 공격을 금지한 것이지 반격 자체를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쿠리바야시는 필요하다면 화력 지원 하에 소규모로 국지적인 반격을 가하는 것은 허용했는데, 이때 적에게 이동할 때에는 사격을 가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은엄폐 및 기도비닉을 유지하라고 강조했다. 기존의 반자이 돌격은 말이 공격이지 사실상 얌전히 자살하는 식으로 옥쇄하느니 적에게 총 한방이라도 쏴보고 죽겠다는 생각으로 가하는 경우가 많아 은엄폐를 별로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에 비하면 상당히 합리적인 명령이었다.[13] 사실 펠레리우 전투에서 일본군도 이오지마 전투와 비슷한 방식으로 미군을 괴롭혔지만, 펠레리우 전투가 워낙 무명이라 이 쪽이 더 많이 알려졌다.[14] 펠레리우 전투에서도 마찬가지로 반자이 돌격을 하긴 했으나, 무지성 돌격인 평소의 것이 아니라 적이 코앞에 올때까지 죽은듯 숨어있다 빠르게 치고 빠지는, 매우 상식적이고 우수한 전략이였기에 미군은 엄청난 피해와 함께 극심한 고전을 겪게 된다. 미군이 이런 충격을 받고도 상륙전에서 적을 무시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그렇게 상식적인 항전을 하던 일본군 지휘관이 전사하거나 장기전으로 궁지에 몰리면 그 밑에 있던 무능하고 조급한 하급지휘관이나 타군 지휘관이 다시 이전의 무지성 전술을 또 고집해왔기 때문이다. 가둬놓고 압박하다보면 참지 못해서 나오거나 육군의 지시를 듣지 않는 해군 육전대가 대기명령을 무시하고 돌격했다가 각개격파당하는 식으로 소모전이 진행된 탓에 이오지마 오기전까지 일본군은 항상 똑같다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것이다.[15] 반자이 돌격이 아닌 제대로 된 돌격[16] 미국의 예비군은 한국의 상근예비역과 유사한 제도이다.[17] 슈퍼볼 LII에 참석하여 명예 훈장 수여자들을 대표하여 심판, 선수들 앞에서 코인 토스를 하기도 했으며, 2020년 3월에는 본인의 이름이 붙은 원정이동기지선 USS 허셜 "우디" 윌리엄스 호의 취역식에 참석하여 수병들 앞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다.[18] 영화 아버지의 깃발을 보면 이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미군이 이오지마 섬을 함락한 직후, 곧 엔진이 파손된 B-29 폭격기가 연기를 내뿜으며 간신히 착륙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실제로는 비행장 남북에서 전투를 벌이는 그 긴박한 상황에 파손된 B-29가 착륙한 것이 첫 번째이다. 전투중인 비행장에 착륙할 정도로 이오지마 비행장은 대체불가였다.[19] 커티스 르메이는 이오지마의 전투 상황을 듣고, "이제 우리 B-29 항공대가 해병대가 흘린 피에 보답할 차례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오지마 공략을 가장 강력하게 요구한 육군 항공대 장군이 바로 커티스 르메이였기 때문.[20] 이오지마보다 면적이 더 넓은 섬은 치치지마등 몇군데 더 있지만, 모두 섬의 지형상 활주로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다.[21] 당시 얼마나 상황이 절망적이었냐하면 마지막 남은 항행 가능한 전력조차 야마토와 세트로 오키나와에서 자살특공으로 수장시킨 이후 연합함대는 아예 띄울 배가 없는 수준이었고 4월달부터는 연안이 기뢰밭이 되어 기껏해야 가이텐 정도만 띄울 수 있는 수준이었다. 사냥감에 비해 태평양에 배치된 미국 잠수함이 너무 많아서 미국 잠수함은 메달이라도 하나 따자는 식으로 온 태평양을 휘젓고 다녔다.[22] 오죽하면 통신보안에 그렇게 철저한 미군이 이오지마 이후 B-29에 대해서만큼은 통신보안이 널럴해서 일본 통신감청반이 B-29의 작전목표를 5시간 전에 미리 듣고 보고하는데도 폭격을 전혀 막지 못했다.[23] 아버지의 깃발에서 이기라고 불리는 실존인물이다.[24] 브래들리의 묘사에 따르면 여러번 총검에 찔려 살해되었다. 피가 난 자상과 나지 않은 자상이 여러군데 몸에 보였다고 묘사했다.[25] 사진은 이오지마의 깃발으로 유명한 두 번째로 게양된 성조기이다. 진주만 공습으로 침몰한 LST의 치장 물자를 얻어와서 전투 도중 게양 후 스리바치 산의 돌풍으로 인해 성조기 일부분이 훼손되었다고.[26] 다만 이 사진을 찍을 때가 아닌 첫 번째 성조기를 내걸었을 때 이 말을 했다.[27] 사후 고인의 서류 속에서 당시 필립 H. 토리 소령이 사실을 묵살한 문건이 발견되었다.[28] 3명은 이어진 전투에서 전사했고 1명은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 나머지 2명은 비극적으로 사망하지는 않았지만 평생 사진의 진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주목 한 번 못 받고 사망했다.[29] 루신인이다. 본명은 미할 스트렌크(Михал Стренк).[30] 전에는 박격포를 맞고 전사했다고 했었으나 책에서는 아군의 오사인 것으로 판명되었다.[31] 사진에서 맨 오른쪽에 위치했는데 그의 어머니는 미국 신문에 실린 이 사진을 보고 가장 오른쪽에 있는 해병대원을 자신의 아들로 한 눈에 바로 알아봤다고 한다. 정부에서 초기 발표시 다른 사람으로 발표했기에 아무도 믿지 않았으나 18개월 후 의회 조사 결과 할런 블록 본인으로 밝혀졌다. 뒷 모습밖에 안 보이는 흑백사진인데도 알아보다니, 어머니의 안목이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