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마지막 생존자(The Sole Survivor). 큰 재난이나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 또는 무리를 말한다.2. 현실
역사적 사건의 마지막 생존자들(위키피디아)위키피디아의 마지막 생존자 문서 모음
2.1. ㄱ
- 강민철 (1955~2008) -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의 테러범들 중 마지막 생존자.[1] 북한의 암살 위협을 두려워하다가 2008년에 교도소에서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2] #
- 강영일 - 영등포교도소 집단탈옥 사건 당시 인질극을 벌인 범인 4명 중 유일한 생존자. 1967년생.
- 강윤국 - 대한민국에서 의사 칭호를 받은 독립운동가 중 마지막으로 생존했다.
- 고중덕 - 마지막까지 생존해있는 조선귀족 겸 친일반민족행위자다.
- 귀도 마제티 -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의 이탈리아 대표팀 스쿼드에 포함된 선수들 중 마지막 생존자. 1993년 11월 26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김종필 - 삼김 중 가장 마지막으로 생존했었다.[3]
- 기무라 지로에몬[4] - 19세기에 태어난 것이 공인된[5] 남성 중 마지막으로 생존한 사람이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통역으로 일했으며, 집배원으로 일하다가 정년퇴직한 것도 1962년이었다. 2013년 6월 12일 향년 11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6]
- 김창규 - 마지막으로 생존했던 중장 계급 공군참모총장, 중장 계급 국군 참모총장들 중에서도 마지막 생존자였다.[7] 2020년 11월에 100세로 사망했다.
2.2. ㄴ
- 나가이 케이지 - 펠렐리우 전투에 참전했던 마지막 일본군 생존자.[8] 동굴에 숨어서 1947년까지 저항하다가 투항했다.[9] 일본에 귀국한 뒤 과자점을 운영하다가 2019년 향년 98세로 사망했다. 펠렐리우 섬에서 산호 하나를 갖고와서 평생 펠렐리우에서 죽어간 전우들을 생각했다고 하고, "일본의 평화헌법은 세계에 일본이 자랑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평생 전쟁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 나카소네 야스히로 - 쇼와 시대 일본총리들 가운데 레이와 시대가 열리는 모습까지 보고 사망한 유일한 생존자이다.
- 네스터 마타 - 1957년 필리핀 제7대 대통령 라몬 막사이사이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던 세부섬 C-47 추락사고의 유일한 생존자. 추락사고로 인해 탑승자 26명 중 막사이사이 대통령과 수행원을 포함한 25명이 사망했지만[10], 당시 필리핀 헤럴드지 소속 기자였던 네스터 마타만 비행기 밖으로 튕겨져 나가서 유일하게 생존했다. 네스터 마타는 추락현장 인근에 거주하던 농부에게 구조되었지만 추락현장이 오지에다가 교통이 좋지 못해 발견된 지 18시간만에 후송되었고, 심한 화상을 입어서 병원에 6개월 동안 입원해 있었다. 이후에도 언론인 활동을 계속하다가 2018년 향년 92세로 사망했다.
- 노먼 클리스 - USS 엔터프라이즈 소속 제6 정찰폭격비행대(VS-6) 급강하폭격기 조종사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 카가, 히류, 중순양함 미쿠마에 명중탄을 기록해 함들의 침몰에 기여했다. 미드웨이 해전에 참전한 급강하폭격기 조종사 중 최후 생존자로 2016년 4월 22일에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타계하기 전에 집필한 자서전인 <Never Call Me a Hero>가 <미드웨이 해전과 나> 라는 제목으로 2023년, 우리 나라에에 번역 출간되었다.
- 니콜라이 벨랴예프 - 베를린 공방전 당시 라이히스탁에서 전투를 벌이고 라이히스탁을 점령하는데 앞장선 제150 '이드리차' 소총병사단의 병사들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2015년 12월 8일 93세로 사망했다.
- 다카히토 친왕 - 아키히토 상황의 삼촌뻘 황족들 중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사람이자 옛 제국헌법 하에서 귀족원 의원을 지낸 마지막 생존자였다.
2.3. ㄷ
- 댄 키팅 - 아일랜드 내전 당시 IRA 소속 참전자들 중 마지막 생존자. 전후에도 오랫동안 IRA 소속으로 남아 있었으며, 사망하기 전까지 아일랜드 정부에서 주는 연금을 거부했었다. 2007년 105세로 사망했는데, 사망 당시 아일랜드 최고령 노인이었다.
- 딕 처칠 - 1919년생 영국 공군 장교로 '대탈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영화 The Great Escape에서 묘사된 Stalag Luft III 포로수용소 탈출 사건의 생존자 26명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다. 2019년 2월 12일, 만 99살로 세상을 떠났다.
- 딘코 사키치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강제수용소 사령관 중 마지막 생존자. 2008년 7월 20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옥사했다.
2.4. ㄹ
- 라자르 폰티첼리 - 제1차 세계 대전 프랑스군 참전자들 중 최후의 생존자. 원래는 이탈리아 사람이지만 6살에 프랑스 제3공화국에 온 뒤 1914년 전쟁이 발발하자 나이를 속이고 외인부대로 입대하였지만 1915년 이탈리아 왕국도 전쟁에 참가하게 되면서 이탈리아군으로 재징집되었다. 전후 1920년 형제들과 함께 프랑스에 형제들의 이름을 딴 금속 가공회사 “폰티첼리”를 세웠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땐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로도 활동했다. 2008년 사망하기 전까지 유럽 전승 기념일에 꾸준히 참여하기도 했으며 사망 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군인들 중 마지막으로 남은 프랑스군 참전자여서 프랑스 정부에서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프랑스의 위인들이 안장된 팡테옹에 안장해주는 것으로 그를 예우해 주겠다고 했으나 모두가 같이 싸웠는데 나만 특혜를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예우를 거부했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에서 계속 그를 설득한 끝에 국장을 승낙했고, 2008년 향년 110세로 사망했다.[11]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영결식에는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와 전 대통령이었던 자크 시라크가 참석하였다. 영결식 영상 여담으로 형제들이 함께 세운 회사는 2023년 현재도 운영중이다.
- 랄프 퍼켓 주니어 - 6.25 전쟁 명예 훈장 수훈자 중 마지막 생존자. 청천강 북쪽의 전략적 요충지인 205고지 점령 과정에서 중공군에 맞서 활약했다.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으며, 1971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2021년 205고지 전투의 전공으로 뒤늦게 명예 훈장을 수여 받았으며 수여식에는 역대 최초로 당시 방미 중이던 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이 수여식에 참석했다. 6.25 전쟁 명예 훈장 수훈자인 히로시 미야무라가 2022년에 사망한 이후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던 6.25 전쟁 명예 훈장 수훈자였으며 2024년 4월 8일 9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레옹 고티에(Léon Gautier) -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여한 프랑스군 177명의 마지막 생존자로 2023년 7월 3일 프랑스 칸 병원에서 향년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 레지널드 C. 웰치 - 1871-72 초대 FA컵 우승팀인 원더러스 FC의 선발 출전 선수 중 마지막 생존자. 1939년 6월 4일 87세로 사망했다. 잉글랜드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공식 국가대표 축구 경기에 출전한 잉글랜드 선수단 중에서 마지막 생존자이기도 하다.[12]
- 로버트 스콧 - 아문센 vs. 스콧으로 불리는 노르웨이와 영국의 남극점 정복 경쟁에 참가한 영국 측의 탐험대장으로, 남극점에 도달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그 이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대원들이 하나 둘 죽어가더니 결국 3월 말엽에는 마지막 생존자가 되었으며 약 1주 뒤인 1912년 3월 29일경, 43세를 일기로 동사하고 말았다.
- 로버트 핸슨 - 가장 유명한 B-17 폭격기 "멤피스 벨"의 승무원들 중 마지막 생존자. 1942년 11월부터 1943년 5월까지 "멤피스 벨"의 통신병에 배정받아 "멤피스 벨"과 함께 유럽 전선에서 활동했으며, 1944년에 만들어진 "멤피스 벨"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직접 출현했고 1990년에 나온 영화 촬영장에 당시 살아있던 다른 승무원들과 함께 방문하기도 했다. 현지시간으로 2005년 10월 1일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로후스 미슈 - 히틀러의 경호원이자 퓌러붕커의 마지막 생존자. 히틀러가 자살하기전 2주 동안 전화 교환원을 맡았다. 최종 계급은 SS중사. 종전 직후 소련군한테 붙잡혀서 1953년까지 수감되었다가, 석방 이후 베를린에서 거주하였으며, 2013년 9월 5일 96세로 사망했다. 2004년작 영화 다운폴이 개봉했을 당시에는 생존 중이여서 자막으로 현재 베를린에 살고 있다고 언급되었다. 실존인물 또한 다운폴을 시청했다.[13][14]
- 루 콘터 - 진주만 공습 당시 침몰했던 전함 USS 애리조나의 승조원들 중 2020년대에도 생존해 있던 생존자 2명[15] 중 1명이자 마지막 생존자.[16] 이후 장교로 임관해 6.25 전쟁에도 참전했고 1967년 소령으로 전역했다. 2024년 4월 1일 102세로 사망.
- 루돌프 헤스 - 나치 독일의 부총통으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형을 선고받은 전범들 중 가장 오래 살았다. 헬무트 콜의 내각과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까지 목격했다.
- 르네 렌스 -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와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의 프랑스 국가대표 스쿼드에 포함된 선수들 뿐 아니라 2차대전 이전 월드컵에 참여한 모든 선수들 중 마지막 생존자. 2014년 3월 12일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리처드 E. 콜 - 둘리틀 특공대 대원들 중 마지막 생존자. 당시에는 중위였으며 제임스 둘리틀이 직접 탑승한 1번기의 부조종사였다. 전후까지 살아남아 6.25 전쟁에도 참전했다. 1966년까지 베네수엘라 친미정권의 군사고문으로 복무하다 최종 계급 중령으로 퇴역했고, 자신들의 이름이 신형 폭격기의 코드네임으로 붙는 것도 목격하고 2019년 4월 10일 향년 10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대령으로 추서되었다.
2.5. ㅁ
- 마커스 러트렐 - 영화 론 서바이버로도 제작된 2005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있었던 레드 윙스 작전에서 탈레반에게 궤멸된 네이비 씰 특수부대원들 중 마지막 생존자.
멍센샤오- 최후의 만주어 원어민으로 2020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을 기점으로 만주어는 원어민이 있는 언어로서는 완전히 사어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바이두 백과, 구글, 빙에 멍셴샤오를 검색해도 무관한 내용만 나와서 진위를 알 수 없는 데다, 2024년 통계에는 6명으로 집계되었기 때문에 명백한 허위 사실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 소련의 최고지도자 중 마지막 생존자. 2022년 8월 30일에 91세로 사망.
- 밀비나 딘 -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생존자들 중 가장 마지막까지 장수했다. 사고 당시 생후 2개월로, 2009년 향년 97세로 사망했다.
- 미야모토 겐키 - 도쿄 국제공항 지상 충돌 사고 해상보안청 722편 생존자중에 1명이고 위중한 상태지만 병원에서 3개월 뒤 잘 회복됐다. 계속해서 치료와 제활에만 집중하기로 한다고 했다.
2.6. ㅂ
- 바비 찰튼 - 뮌헨 비행기 참사 당시 있었던 선수단 중 마지막 생존자. 2023년 10월 21일 향년 86세로 사망.
- 바츨라프 하벨 -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 중 마지막 생존자. 2011년 12월 18일 향년 75세로 사망.
- 버즈 올드린 -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들 중 마지막 생존자. 2024년 현재까지도 생존 중이다.
- 베른하르트 호이어 -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크릭스마리네의 전함 비스마르크의 마지막 생존자. 2018년 3월 8일 타계했다.
- 배리 깁 - 영국의 록그룹 비 지스 멤버. 2003년 모리스 깁이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2012년에는 로빈 깁이 간암으로 사망하면서 비지스 멤버 중 유일하게 생존해있다. 비지스 멤버는 아니지만 형제 중 솔로로 활동해 큰 인기를 끌었던 앤디 깁 역시 1988년 사망했다.
- 베스나 불로비치 - 야트 항공 367편 추락사고의 유일한 생존자로, '낙하산 없이 가장 높은 고도에서 떨어져 생존한 인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고, 2016년 노환으로 별세했다.
- 보리스 구츠 - 10월 혁명의 마지막 생존자. 적군 소속 군인이었다. 2006년 104세로 사망.
- 브래드퍼드 프리먼 -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모델인 제101공수사단 '이지 중대(Easy Company)'의 마지막 사병 출신 생존자이자 유일한 생존자였다. 2022년 7월 3일 향년 97세로 별세함으로서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 빌리 맥키넌 - 스코틀랜드의 축구 선수. 세계 최초의 공식 국가대표 축구 경기에 출전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선수단 모두 포함한 마지막 생존자. 1942년 5월 24일 향년 90세로 사망.[17]
2.7. ㅅ
- 사도 요한 - 예수를 따르던 12사도 중 가장 나이가 어리고 가장 장수하였다. 예수의 승천 당시 10대 중후반 내지 20대 초반의 나이로 추정되며, 서기 2세기를 본 유일한 사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시대적 배경이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죽음과 함께 끝나나, 사도 요한은 그 후 네르바와 트라야누스의 치세도 보고 죽었다. 이 때문에 사도 요한은 예수의 부활 및 승천 이전을 다룰 땐 앳된 소년의 이미지, 말년에는 나이든 초기 기독교 원로의 이미지가 같이 존재한다. 또한 말년에 쓴 요한 복음서는 공관 복음서 중 가장 늦게 쓰여졌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12사도 뿐만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 등 12사도가 아닌 인물을 포함한 모든 신약성경의 등장 중에서도 마지막 생존자이기도 하다.
- 사와미(沢見) 일등수병 - 일본 해군육전대 위생병으로, 마킨 섬 전투[18]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일본군 병사다. 나머지 포로는 조선인 노무자들로, 일본군 인원으로서 생존한 이는 사와미 일등수병 단 하나뿐이다.
- 사카마키 가즈오(酒巻和男) - 1918년생. 갑표적(甲標的-일본 해군의 초소형 2인승 잠수정) 특공대로 진주만 공습에 참가한 10명의 대원들 중 유일하게 생존하여 태평양 전쟁 일본군 포로 1호가 되었다. 작전 중 본인의 갑표적이 좌초하여 이나가키 기요시(稲垣清) 이등병조와 탈출했으나 이나가키 병조는 익사, 본인은 해안가에 떠내려온 후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처음에는 일본군답게 자살하려 했지만 이후 생각을 바꾸고 다른 일본군 포로들이 자결하려는 것을 막고 설득하는 등 품행이 좋아 미군 경비병들에게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19] 종전후 귀국, 도요타에 입사하여 브라질 지부에서 장기간 근무하다가 1987년 은퇴했으며 이후 1999년 11월에 타계했다. 저서로는 "포로 제1호"를 남겼고, 사적으로는 미국 텍사스에서 열린 역사 박람회에 참가했던 1991년까지 절대 자신의 전쟁경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하며, 박람회 당시 전시된 자신이 탔던 갑표적과 50여년만에 재회하자 그자리에서 오열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그의 장남의 이름이 전우였던 이나가키 키요시와 같은 키요시라고 한다.[20]
- 사무엘 빌렌베르그 -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에서 벌어진 봉기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중 마지막 생존자. 1943년 수용소 봉기에서 살아남은 200명과 함께 수용소에서 탈출했고 전후까지 살아남은 67명 중 한명이 였다. 전후에는 1950년에 폴란드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히브리 대학교에서 조각소조를 전공하였고, 이후에는 예술가로 활동하며, 홀로코스트 관련 작품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다가 2016년에 93세로 사망했다.
- 삼축당 김씨 - 고종의 후궁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해 있었다. 1970년에 80세로 사망했다.
- 성옥염(成玉艶) - 한국사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를 모셨던 상궁으로, 한국사 전체에서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궁녀였다. 2001년 5월 4일 향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세실리아 시헌 - 노스웨스트 항공 255편 추락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 사고 당시 4살배기 여자아이였다. 당시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오른쪽 손목에 비행기 문신을 했다고 한다.
- 시어도어 밴커크 -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당시 히로시마 작전에 참여했던 B-29 "에놀라 게이" 폭격기 승조원들 중 마지막 생존자, 작전 당시 항법사였으며 1946년 소령으로 제대했다. 생전 인터뷰에서 원자 폭탄 투하에 대해 “전쟁을 빨리 끝내 더 많은 인명손실을 막을 수 있었다”라고 해서 논란이 있던 적 있었다. 2014년에 94세로 사망했다.
- 시그리드 비요른스도티르 (Sigrid Björnsdóttir) - 마지막으로 기록된 그린란드 바이킹 여성으로 1408년 9월 12일 올라프의 아들 토르스테인과 (Thorstein Olafsson) 흐발세이 교회에서 결혼했다.
- 신격호 - 대한민국의 재벌 창업주들 중 마지막까지 살아있던 사람이다. 2020년에 98세로 사망했다.
- 신상사 - 야인시대에 출연한 주요 조직폭력배들 중 마지막까지 생존한 인물이다. 2024년 8월 10일 사망했다. 이로서 야인시대에서 등장한 조직폭력배 인물들은 전부 세상을 떠났다.[21]
- 스핑 - 청나라 말기때인 1911년에 출생한 인물로 2024년 6월 29일 11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22] 스핑의 죽음으로 황실 시절 중국[23]을 경험한 인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심차 로템 - 바르샤바 게토 봉기 전투원들 중 마지막 생존자.[24] 게토 봉기에서 살아 남은 생존자들 중 한 명이었으며,[25] 이후에 벌어진 바르샤바 봉기에 합류했다. 전후 살아남은 가족들과 함께 이스라엘로 이주 했으며, 2018년 94세로 사망했다. 게토 봉기 비전투원들 중 마지막 생존자는 알리자 알라메드로 2023년 현재도 생존해 있다.
- 쑤징허 - 마지막으로 생존한 외국인 독립유공자이다.
- 쑨야오팅 - 청나라의 마지막 환관이자 중국사 전체의 마지막 환관. 환관이 되기 위해 거세했는데 몇 개월 뒤 청나라가 멸망해버린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그래도 다행히 청나라 소조정과 만주국에서 환관으로서 일했으나, 둘 다 멸망한 후에는 매우 힘겨운 삶을 살았다.
- 쑹메이링 - 중화민국의 본토 시절 엄청난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을 자랑했던 4대가족 중 마지막 생존자로, 장제스 총통의 부인이다. 2003년 106세의 나이로 미국에서 별세했다.
- 아브드 알 라흐만 1세 -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를 학살할 때 간신히 도망쳐 살아남은 왕자로, 후우마이야 왕조의 개창자. 다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 외에 몇 명 더 살아남긴 했다.
2.8. ㅇ
- 아서 스미스 - 1939년 귄터 프린이 이끄는 U-47에 의해 침몰한 리벤지급 전함 HMS 로열 오크의 생존자 424명중 마지막 생존자. 침몰당시 17세의 나이에 로열 오크에 해군 견습생으로 탑승해 있었으며[26], 침몰에서 살아남았고 이후에는 지중해 전역에서 종군하다가, 실론 해전에도 참전 했다. 2차대전이 끝난 1947년에 전역하였고, 전후에는 영국항공의 전신인 브리티시 유로피언에 입사하여 스튜어디스 총 책임자로 근무 했다가 2016년에 94세로 사망했다.
- 아이린 트리플렛 - 남북 전쟁 유족연금 수급자중 마지막 생존자. 19세기인 1861년에 벌어진 남북전쟁에서 21세기 까지 유족 연금을 수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 모세가 남북전쟁 당시 남군, 북군 모두에서 종군한 이력 때문이다.[27] 아버지 모세의 경우 남북전쟁이 끝난지 20년 뒤인 1885년에 연금 수령을 신청 하였고 두번의 결혼 만에 83세의 나이때 딸 아이린을 득녀했다.[28] 아버지 모세는 1938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아이린의 경우 평생 독신에 정신장애가 있어서 어머니와 함께 요양원 생활을 하다가[29] 1967년에 어머니가 사망한 이후 홀로 요양원 생활을 하던 2020년 6월 7일 낙상사고로 인한 합병증으로 향년 90세로 사망했다.
- 아프리키야 항공 771편 추락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 당시 10세 네덜란드 국적의 소년
- 안토니오 카르바할 -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의 멕시코 국가대표 선수.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 출전한 모든 선수들 중 마지막 생존자. 2023년 5월 9일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알렉스 고리 - 러일전쟁에 참전한 마지막 러시아 제국군 생존자, 1989년 108세로 사망.
- 알시데스 기지아 -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의 우루과이 국가대표 우승 스쿼드에 포함된 선수들 중 마지막 생존자. 2015년 7월 16일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야쿠프 사타르 - 오스만 제국군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오스만군 최후의 생존자이자, 1차 세계 대전 이후 터키 독립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 중에서 최후의 생존자였다. 2008년 4월 2일에 110세로 사망했다.
- 야마다 에모사쿠 - 시마바라의 난의 내통자이자 최후의 생존자.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
- 어드레드 르누아르 - 사마르 해전에 참전한 호위구축함 USS 새뮤얼 B. 로버츠의 승조원중 마자막 생존자. 2022년 3월 20일에 사망했다.
- 엄이경 - 동학농민운동의 마지막 생존자. 그는 운동의 발단인 만석보 축조 당시에 돌을 나른 것을 시작으로 20살 때인 1895년에 동학에 가담하여 각종 전투에 참가했으며, 전봉준의 경호원 겸 연락병으로 참전했다. 개항부터 시작하여 대한제국의 성립과 멸망,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 전쟁, 서울의 봄과 대한민국 제5공화국까지 지켜보고 1985년 향년 11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에드워드 셰임스(Edward D. Shames) -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모델인 제101공수사단 '이지 중대(Easy Company)'의 마지막 장교 출신 생존자. 2021년 12월 3일 9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0]
- 에밀리오 레코바 - 첫 월드컵인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의 우루과이 국가대표 우승 스쿼드에 포함된 선수들 중 마지막 생존자. 1992년 9월 12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에토 마모루 - 러일전쟁에 참전한 마지막 일본군 생존자, 1903년에 징집되었고 러일전쟁 격전중 하나인 뤼순 공방전에 참전했었다. 1917년 미국으로 이민했으며 미국에서 사망할때까지 미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었다.1992년 110세로 사망했다. 여담으로 그의 아들 중 한명이 알 카포네 밑에서 일했던 일본계 마피아 켄 에토(1919-2004)다.
- 엠마 모라노 - 공식적인 19세기 출생자들 중 마지막 생존자이다. 그녀는 1899년에 태어나 2017년에 향년 11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 오렐 세실 - 설리번 5형제로 유명한 애틀랜타급 경순양함 USS 주노(CL-52)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중 마지막 생존자. 과달카날 해전에서 손상을 입고 후퇴하던 도중 근처에 있던 일본군 잠수함 I-26에서 발사한 어뢰를 맞고 침몰했으며[31] 침몰 직후에는 승조원 100여명이 생존해 있었지만, 구조대가 오지 않아 8일동안 표류한 결과, 오렐 세셀을 포함한 10명만 살아남았다. 이후 2008년 오스틴급 수송상륙함 USS 주노(LPD-10)의 퇴역식에 초청받아 퇴역 행사에 참여한후 2010년 90세로 사망했다.
- 오토 쿰 - 슈츠슈타펠 장성들 중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인물로 2004년 사망했다.
- 오토 프랑크 - 안네의 일기를 쓴 안네 프랑크의 아버지이자 은신처에서 지내던 유대인들 가운데 최후의 생존자. 은신처에 숨은 8명의 유대인들은 1944년 8월 4일에 나치 독일에 의해 발각되었고, 결국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수용소에서 사망하였으나 오토 프랑크만은 아주 운 좋게 살아남으면서 안네의 일기가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되었다.
- 오하라 주사부로(小原忠三郎) 오장(하사) - 핫코다산 참사의 마지막 생존자. 구조된 후 동상으로 양 발과 손가락을 절단해야 했으며, 1970년 91세로 국립병원에서 사망.
- 오희옥 - 마지막까지 생존한 여성 독립유공자. 2024년 11월 17일에 98세로 사망했다.
- 우키시마호 사건의 생존자들 중 살아있는 생존자 3명
- 우키타 히데이에 - 세키가하라 전투의 마지막 생존자.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그의 삶은 비참함이 극에 달했는데, 27살부터 사망하는 83살까지 평생을 하치조 시마에 갇혀 살아야만 했다.
- 위베르 제르맹 - 나치에 항거한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최후 생존자. 1940년부터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합류해 1942년 비르하킴 전투, 튀니지 전투, 엘 알라메인 전투에, 1944년 용기병 작전에 참전했다. 1946년까지 군대에 복무한 후 생셰롱(Saint-Chéron) 코뮌의 시장, 피에르 메스메르 총리 정부의 프랑스 우편전화통신부 장관 등 정치인 생활을 하기도 했다. 현지시간으로 2021년 10월 21일 10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장례식은 2021년 11월 11일 프랑스의 종전 기념일에 국장으로 치러졌다.
- 윌리엄 루크 - 신미양요의 마지막 생존자. 당시 휴 맥키 중위[32] 를 지키려 동료 두 명과 함께 조선군에 맞섰고 온몸에 자상을 입은 채 살아남아 명예 훈장도 받았으나 조선군의 공격으로 인한 머리 부상으로 경련에 시달리다 1923년 77세로 사망했다.
- 유리코 비 - 다카히토의 부인이자 다이쇼 덴노와 데이메이 황후의 며느리들 중에서 마지막 생존자로, 레이와 시대를 본 유일한 인물이다. 2024년 11월 15일 101세로 사망했다.
- 유유즈 - 신해혁명과 우창 봉기의 마지막 생존자. 동맹회 소속으로, 양샤 전투에도 참가했다. 생몰년은 1889-1993.
- 이갑성 -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근간이 되는 3.1 운동에 기여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6.25 전쟁, 대한민국 역대 공화국을 거쳐 대한민국 제5공화국까지 지켜보고 1981년 사망했다.
- 이레니스 물롱게 - 몽펠레 화산폭발의 목격자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2살 때인 1902년 고향 근처에서 펠레 화산이 폭발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는데 그로부터 무려 111년 후인 2013년 향년 112세[33]를 일기로 사망했다. 특정 대형 사건을 직접적으로 겪은 인물 중 특정 기간으로부터 죽을 때까지 걸린 기간이 가장 오래 걸린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 이반 마르티누시킨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의 유대인들을 해방시킨 소련군 중에서 최후의 생존자. 2023년 기준 생존 중이다. 2021년 6월 7일에 향년 98세로 세상을 떠난 다비드 두시만이 최후의 생존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오보로 드러났다.
- 이성호 - 마지막으로 생존했던 중장계급 해군참모총장. 2019년 94세로 사망했다.
- 이영숙 - 김일성을 추종한 1세대 원로 빨치산 중에서 마지막 생존자. 소련이 김일성 추종 조직을 부대로 재편한 "제88독립보병여단"에 포함되어 있어서 2021년 전승절에는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축하 서한을 받기도 하였다. 2021년 11월 105세로 사망했다.
- 이우석(1896~1994) - 청산리 전투의 마지막 생존자. 서로군정서 소속 4소대 4분대장으로 참전했다. 이휴 자유시 참변에 휘말려 고초를 겪다가 1947년 귀국했지만, 친일파들이 득세한 세상에 등을 돌리고 행상과 막노동으로 지내며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러면서도 한일기본조약의 보상금으로 받은 예산으로 국가유공자 연금을 받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으로 여겨 건국훈장 수여를 거부하다 1990년에 이르러서야 정부의 설득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민주화와 문민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를 지켜보고 1994년 6월 26일 서울보훈병원에서 9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이재곤 - 대한제국의 매국노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 이학래 -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조선인 일본군 중 마지막 생존자. 죽음의 철도 공사현장에서 포로감시를 맡았다. 2021년 3월 26일 향년 96세로 사망했다.
- 일본군 잠수함 I-29 침몰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일본군 수병 - 6발의 어뢰로 한 번에 다수의 미군 군함들을 격침, 대파시킨 에이스 잠수함장 키나시 타카카즈(木梨鷹一) 중좌가 지휘하던 잠수함이 필리핀 인근 해역에서 격침될 때 단 한 명의 승조원만이 생존하였다.
-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의 생존자 4명
2.9. ㅈ
- 장리슝 - 대장정에 참여한 중국공산당 측 인물 중 마지막 생존자.
- 장세정 - 한국 가요사 최초의 걸그룹인 저고리 시스터즈의 멤버. 일찍 요절했던 다른 멤버들에 비해 81세까지 생존하였다. 2003년 2월 16일 별세.
- 전두환 - 20세기에 재직한 경험이 있는 대한민국 대통령 중 마지막 생존자. 이승만 1948년 취임 / 1965년 사망, 윤보선 1960년 취임 / 1990년 사망, 박정희 1963년 취임 / 1979년 사망, 최규하 1979년 취임 / 2006년 사망, 전두환 1980년 취임 / 2021년 11월 사망, 노태우 1988년 취임 / 2021년 10월 사망, 김영삼 1993년 취임, 2015년 사망, 김대중 1998년 취임 / 2009년 사망
- 정순덕 - 조선인민유격대 중 마지막 생존자. 1962년에 마지막으로 경찰한테 생포되어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1985년에 전향서를 쓰고 출소하였다. 그 후 2004년에 71세로 사망하였다.
- 제임스 밴 플리트 - 이른바 '별들의 기수' 중 마지막 장성 생존자. 1992년 9월 2일 사망했다.
- 조지프 박스홀 -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에서 살아남은 상선 사관중 마지막 생존자. 침몰 당시 타이타닉호에서 4등 항해사로 재직했으며, 구명정2호정에 지정되어 살아남았다. 이후 1차대전당시 소집되어 해군 장교로 전쟁에 참전했으며, 전후에 화이트 스타 라인에 복귀하여 항해사로 계속 일하다가 1940년에 은퇴했다.[34] 1958년작 영화 타이타닉호의 비극에서 자문으로 참여했고, 1967년에 향년 83세로 사망했다. 유언에 따라 시신은 화장 후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지점에 뿌려졌다.
조윤-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의 동생으로 조선인으로 살길 거부하고 이름을 견(犬)으로 바꾸고 복식과 거주지마저도 고려식을 유지할 정도로 고려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 고려 최후의 생존자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조선의 2등 개국공신에 책봉되어 태종과 세종 시기까지 관리 생활을 했다.- 조지 H. 게이 주니어 - 미드웨이 해전 당시 뇌격기 조종사로 1차 공습에 참가했다가 비행대대가 전멸하고 본인만 살아남았지만 바다 위에서 미드웨이 해전의 전환점인 운명의 5분을 육안으로 생생히 보았다. 해전 이후 30시간 동안 바다에서 표류한 끝에 미합중국 해군 소속 PBY 카탈리나 비행정에게 발견되어 구조되었고, 체스터 니미츠 제독을 만나 당시 상황을 보고했다. 이후 1992년 미드웨이급 항공모함 USS 미드웨이의 퇴역식에 초정받아 퇴역식을 지켜보았고 현지시간으로 1994년 10월 21일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화장된 후 미드웨이 바다에 뿌려졌다.
- 존 윌퍼스 주니어 -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도조 히데키 체포조 중 마지막 생존자, 미 육군 정보부 특무조 소속이였으며 항복조인식 이후 도조 히데키를 체포하러 갔던 5명 중 마지막 생존자이기도 했고, 도조 히데키 자살 미수 사건을 목격하였다. 2013년 94세로 사망했다.
- 존 핀 - 진주만 공습 당시 전공으로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15인 중 마지막 생존자.[35] 공습당시, 항공병기사로 해군항공대 기지인 카네오헤 만 비행장에서 근무하였다. 공습으로 주기된 기체들이 모두 파괴당했음에도, 멀쩡한 기관총들을 꺼내어 긴급 거치, 2시간여에 걸쳐 일본군들과 필사의 사투를 벌였다.[36] 치열한 교전으로 왼팔 어깨 등에 심각한 총상을 입고 공습이 끝난 후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응급치료만 한 후 당일 저녁에 기지에 복귀하여 기지를 정비하는 데 합세, 모두를 놀라게 했다. 1942년 9월 항모 엔터프라이즈 함상에서 니미츠로부터 직접 명예훈장을 수훈받았고, 2010년에 향년 101세로 사망했다.
- 존 크루크 생크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빅토리아 십자무공훈장을 받은 참전자 중 마지막 생존자. 2차 대전 당시 영국 공군 소속이 였으며, 1944년 카탈리나 비행정으로 작전을 수행하던 도중 U보트에서 발사한 대공포로 인해 온몸에 10곳이 넘는 관통상을 입고도 끝내 U보트를 격침 시키고 생환한 전과로 빅토리아 훈장을 수여받았다. 2023년 현재 103세로 생존중이다.
- 줄리안 코엡케 - 1971년 12월 24일 발생한 LANSA 508편 추락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 생물학자인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서바이벌 관련 지식으로 정글에서 열흘 동안 버틴 끝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구조되었다. 같이 비행기에 타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는 안타깝게도 며칠 만에 사망했다.
- 주발 - 초한지 최후의 생존자.
- 지미 카터 - 냉전 시대 때의 미국 대통령 중 마지막 생존자. 2024년 현재까지 계속 생존 중이다.
2.10. ㅊ
- 찰스 H. 쿨리지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 중에 명예 훈장을 받은 참전자들 중 마지막 생존자.[37] 1942년 미육군에 입대하여 북아프리카 전선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전선, 유럽 전선에 참전했으며 프랑스 전선이던 623고지 전투에서 수류탄으로 적 보병과 두 대의 전차를 파괴했다. 이 전투에서 활약한 공로로 1945년 6월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2021년에 9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8]
- 체스터 네즈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바호 암호병들 중 마지막 생존자, 1942년에 미합중국 해병대에 입대해서 과달카날 전투, 펠렐리우 전투등 여러 전투에 참전했으며, 2차 대전 전후에는 6.25 전쟁에도 참전했다. 2007년에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수여 받았으며, 2014년 93세로 사망했다.
- 최재욱 -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했던 1급 수행원 15명 중 마지막 생존자. 사건 당시 얼굴에 폭탄 파편을 맞아 대통령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중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가 생존했던 것은 당시 수행원 참배 대열에서 그가 맨 뒷줄 구석에 있었기 때문이다. 부상 회복 이후 경향신문[39] 사장과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 겸 대변인을 거쳤으며 민주정의당과 민주자유당 당적으로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후 국민의 정부에서는 환경부장관과 국무조정실장을[40] 지냈다. 사건 당시 생존했던 이기백 장군과 더불어 유이한 생존자였고 이기백 장군이 세상을 떠난 후 4년 11개월이 지난 2024년 11월 17일 향년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11. ㅋ
- 콘스탄티노스 2세 - 그리스 왕국의 국왕 중 마지막 생존자. 2023년 1월 10일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클로드 출스 -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투병과 출신 참전자들 중 마지막 생존자. 1915년에 14살의 나이로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전후인 1932년에 호주 해군으로 옮겨서 1956년까지 복무했는데, 1차 대전의 마지막 순간인 독일 대양함대가 자침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더불어 제2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한 바 있는데, 양차 세계 대전을 겪은 후 심각한 PTSD에 시달렸던 탓에, 죽을 때까지 전쟁을 혐오했다.
- 키우 삼판 - 폴 포트와 이엥 사리, 이엥 티릿과 누온 체아와 같은 크메르 루주의 수뇌부 중 현재까지 생존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2.12. ㅌ
- 테드 브리그스 - 비스마르크 추격전 당시 침몰한 HMS 후드의 3명의 생존자들 중 마지막 생존자. 후드가 격침된 이후 다른 2명의[41] 생존자와 함께 부유물에 올라가서 버티다가 구출되었다.[42]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6.25 전쟁, 제2차 중동전쟁에도 참전하였고, CPO로 진급하였다가, 장교로 임관해 1973년에 대위로 퇴역했다. 후에 HMS 후드 협회 초대 회장과 3대 회장을[43]역임하였고 2008년에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13. ㅍ
- 프란시스코 바라요 - 첫 월드컵인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의 출전 선수들 중 마지막 생존자.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에 소속되었으며 2010년 향년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프란츠 퀸스틀러 - 1900년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동맹국 참전군인들 중 최후의 생존자. 2008년 타계.
- 프랭크 버클스 -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남았던 제1차 세계 대전 미군참전용사로 1917년 16세의 나이로 입대해 프랑스 전선에서 구급차 운전병으로 복무했으며, 1919년 전역당시 최종 계급은 상병이었다. 2차대전당시에는 해운 회사에서 근무하며 필리핀에서 근무하던 도중 일본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3년동안 포로생활을 하였다. 1945년 고향으로 돌아온후 농장을 운영하다가, 2011년 5월 향년 11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플로렌스 그린 -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자 중 최후의 생존자. 하지만, 이 사람은 전쟁 막바지인 1918년에 영국 공군에 입대해서, 영국 본토의 비행장에서 정비사로 근무한 게 전부라서, 실질적으로 1차 대전 참전자 최후의 생존자로 불리는 사람은 전쟁 초기에 참전하여 전투병으로 활약했던 상술한 클로드 출스다.
2.14. ㅎ
- 피에트로 라바 -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의 이탈리아 국가대표 우승 스쿼드에 포함된 선수들 중 마지막 생존자. 2006년 11월 5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하라다 가나메 - 1916년 출생. 일본 해군 항공대 에이스 파일럿. 파나이 호 사건, 진주만 공습에 참가한 일본군 조종사들 중 마지막 생존자로, 미드웨이 해전에도 참전했고[44],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군기에 격추되었으나 운좋게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때 팔에 입은 관통상으로 인해 일선에서 퇴역한후 카미카제 비행교관을 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종전 후에는 낙농업자로 일했고, 거의 매일같이 자신이 격추시킨 미군 조종사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악몽을 꾸면서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당신이 빼앗아온 목숨을 보상하고 싶으면, 앞으로 자라날 새 생명을 키워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듣고 유치원을 개업해서 원장이 됐고, 자주 유치원생들하고 소통했다고 한다.[45] 1991년, 걸프전이 한창일때 하라다는 젊은이들이 폭탄의 불꽃을 보고 환호하는것을 본 후 젊은 세대들이 전쟁의 끔찍함을 모르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후, 반전운동가 활동을 시작했고, "현재 일본의 지도자들은 전후세대에 태어나서 전쟁의 무서움을 모른다. 그들은 전쟁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며 당시 일본의 지도자들하고 다를 게 없는 자들이다"는 말을 하며 일본 정치인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평화주의 강연에 힘쓰고 차남에게 유치원을 넘겨준 이후에도 아이들과 소통하다가[46] 2016년 100번째 생일을 앞두고 향년 99세로 사망했다. 한 인터뷰에서는 "천황폐하 만세, 대일본제국 만세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싸우다 죽으러 가는사람들 중 그런말을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못봤다. 모두 하나같이 독신자는 어머니(お母さん), 결혼한 사람은 아내와 자식의 이름을 외쳤다"라고 증언했다(영상 10:31).
- 하판락 - 친일 고문경찰 중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이었다.[47]
- 해리 패치 - 제1차 세계 대전 참호전에서 싸운 영국군 참전자들 중 최후의 생존자, 1916년에 징집되어 파스샹달 전투에 참전했으며 전투중 부상으로 인해[48] 1917년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전후에는 배관 회사를 차려서 운영했으며 65세에 은퇴 후 2008년 111세로 사망했다. 사망 전 107세의 나이에 브리스톨 대학교에서 명예 예술 석사 학위를 수여 받았으며 세계 최고령으로 명예 학위를 받은 사람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 되었다.
- 해럴드 빌로 - 벌지 전투 당시 벌어진 말메디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중 최후의 생존자. 2022년 5월 17일에 향년 9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해럴드 브레이 -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에서 살아남은 314명의 생존자 중 최후의 수병 생존자. 2023년 현재 95세로 생존중이다.
- 허셜 우드로 윌리엄스 - 이오지마 전투, 더욱 넓게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활약으로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참전자들 중 마지막 생존자. 1943년 미합중국 해병대에 입대하여 제2차 괌 전투, 이오지마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오지마 전투에서 일본군의 기관총 공격을 없애기 위해 약 32kg에 달하는 화염방사기를 들고 홀로 적진으로 돌격해 화염방사기로 공격하고 연료가 떨어지면 뒤로 물러나 연료통을 교환한 후 다시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행동을 무려 4시간 동안 반복해 총 7개의 진지들을 파괴했다. 전후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45년 10월 5일 백악관에서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명예 훈장을 받은 이후에도 1969년 전역할 때까지 해병대에 계속 복무했다. 전역 이후에도 강연, 비영리 단체 우디 윌리엄스 재단(Woody Williams Foundation) 설립 등 현역·퇴역 군인들과 그들의 가정을 위해 왕성히 활동하였다.[49] 2021년 증손자가 자신을 뒤이어 미 해병대 훈련소를 수료하는 것을 지켜본 후 현지 시간으로 2022년 6월 29일, 9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미해병대 공식 트위터
- 허버트 던로이터 - 유틀란트 해전에서 침몰한 순양전함 HMS 인빈시블의 생존자 6명 중 마지막 생존자. HMS 인빈시블의 포술장교 였으며, 탄약고 유폭으로 침몰한지 20분만에 구축함 HMS 베거에 의해 6명의 생존자와 함께 구조되었다. 이후 갓 취역한 리나운급 순양전함 HMS 리나운의 함장을 역임했으며, 제독으로 진급하여 1932년 해군 소장으로 퇴역했다가 1977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헨리 앨링엄 - 제1차 세계 대전 전투중 유틀란트 해전에 참전했던 마지막 참전자이며 영국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1차 대전 참전자이기도 했다. 1915년 해군항공대에 입대했으며 유틀란트 해전에 참전하였고, 영국 공군 창설에 합류하여, 영국 공군 창립멤버 중 한명이 였다. 전후에는 포드에서 근무했으며, 2009년 113세로 사망했다. 사망 전에는 세계 최고령 남성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도 등재됐으며 4대손까지 보았다.[50]
- 헬렌 비올라 잭슨 - 남북 전쟁 참전용사 유족 중 마지막 생존자. 2020년 12월 16일 향년 101세로 사망했다. 76세 연상의 남북전쟁 참전용사와 유족연금을 목적으로 서류상 결혼을 했으나 전처 딸의 협박으로 실제 연금을 수령받지는 못했다. #
- 호르스트 에켈 -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에서 우승한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멤버들 중 최후의 생존자. 2021년 12월 3일, 89세로 사망했다.
- 호소노 하루오미 -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멤버 중 마지막 생존자.[51]
- 후고 브로흐 - 마지막 나치 독일 공군 에이스
3. 픽션
가상 매체에서는 작품의 주제를 강조하거나, 캐릭터의 비장미를 더하기 위해 마지막 생존자라는 설정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 생존자 캐릭터는 트라우마 때문에 대체적으로 고독하며, 타인과의 교감을 거부하고 사건의 주모자가 있다면 복수를 생각하기도 한다.희생자들은 대체로 가족 단위인 경우가 많고, 스케일이 커지면 종족 단위의 마지막 생존자가 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는 해당 캐릭터가 약소 문명의 이종족일 때 많이 보인다. 만약
세계정복을 다룬 소재에서는 신에 버금갈 정도로 비범하거나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로 나와서 일당백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간혹 마지막 생존자로만 남지 않고 후손을 두거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가치와 문화 등을 다른 자들에게 전달하여 후대까지 이어지게 만들어 자기 자신이 혈연적 혹은 정신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시조가 되기도 한다.
4. 관련 문서
[1] 나머지 두 명은 범행 직후 사살되거나 부상당한 상태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이 집행되었다.[2]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의 피해자 중 마지막 생존자는 최재욱이다.[3] 김대중은 2009년, 김영삼은 2015년에 서거했으며 마지막 남은 김종필은 2018년 사망하였다.[4] 木村次郎右衛門, 1897~2013[5] 사실 개발도상국들은 과거 통계 체계가 미비했기에 음바 고토처럼 자신이 주장한 생년이 실제인지 알 수 없어 장수 기록을 경신하지 못한 경우가 수두룩하다.[6] 한국으로 따지면 갑오개혁 때 태어나서 방탄소년단 데뷔년도까지 산 것이다.[7] 중장 계급 국군참모총장 중 마지막 생존자는 육군참모총장은 2020년에 7월에 사망한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이었으며, 해군참모총장은 2019년에 사망한 이성호 예비역 해군중장이었다.[8] 일본 대본영의 총옥쇄 명령과 선동으로 인해 99% 이상의 병력이 사망한 전쟁사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투들 중 하나였다. 약 1만여 명 정도 됐던 일본군 수비대원들 중 살아남아서 일본땅을 밟을 수 있었던 일본군 병사는 단 54명(전투 직후 포로가 된 일본군 19명-{육군 7, 해군 12명}+1947년에 항복한 나가이 케이지 포함 34명+50년대에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자란 채 짐승의 몰골을 하고 생포돼 일본으로 송환된 어느 일본군 1명)뿐이었다. 이외 포로들은 일본, 조선 등에서 온 노무자들. 그런데 그 생존한 노무자들 숫자도 수백에 불과했다.[9] 이 과정에서 항복하자고 의견을 낸 동료가 있었는데, 처형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쓰치다 기요카즈(土田喜代一) 라는 일본 해군 수병(계급은 상병)이 탈주를 감행, 어차피 탈주한 이상 돌아가도 동료들한테 살해당할 게 뻔하기에 미군 지프를 세워서 미군에 항복, 일본이 졌다는 사실을 알고 동료들을 설득시켜서 투항시켰다. 이후 츠치다 상병은 수십 년 후 손녀와 옛 전우와 펠렐리우를 재방문하여 한때 적이었던 미 해병대원들과 화해의 악수를 하기도 했으며(처형당한 동료를 묻었던 곳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2018년 10월 타계한다.[10] 막사이사이 대통령의 시신은 유품인 손목시계와 시신의 치아를 치과 진료 기록과 대조하여 확인되었다.[11] 시신은 이브리쉬르센 지역에 있는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12] 스코틀랜드 선수단의 마지막 생존자는 빌리 맥키넌.[13] 다운폴에서 로후스 미슈 역 을 맡은 배우 하인리히 슈미더는 2010년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실존인물인 로후스 미슈 보다 먼저 사망했다.[14] 로후스 미슈는 2005년 인터뷰를 통해서 다운폴 시청 후기를 남겼는데 영화에서 묘사된 장면과 실제 일어난 일을 비교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정확하게 묘사했지만 영화의 몇몇 장면을 극적인 효과를 위해 과장 시켜 표현했다고 밝혔다.[15] 나머지 1명은 애리조나함의 수상기 인양용 크레인 기사 켄 포츠. 공습 당시 육지에 외출했던 포츠는 공습이 시작되자 애리조나함으로 급히 복귀하였고 다행히 폭발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공습이 끝난 후 폭침당한 애리조나함의 승조원 시신 수습에 참여하였고 행정상의 문제였는지 포츠의 어머니에게 실종 및 전사통보가 오발송되기도 했다. 이후에 포츠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육상에서 근무했으며 1945년 제대 후 중고차 사업을 하다가 1990년에 은퇴했다. 2023년 4월 22일 향년 102세로 사망했다.[16] 마지막 장교 생존자는 조지프 랭들 소령이었으며, 2015년에 100세로 사망했다.[17] 잉글랜드 선수단의 마지막 생존자는 초대 FA컵 우승팀인 원더러스 FC의 선발로 출전한 레지널드 C. 웰치.[18]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첫번째 미션의 그 마킨 섬 전투다.[19] 그러나 포로가 되는것을 대죄로 여겼던 일본군 상부는 그의 존재 자체를 말소시켜 버렸고, 이나가키 병조와 특공대장 이와사 나오지(岩佐直治) 대위, 후루노 시게미(古野繁実) 중위, 요코야마 마사하루(横山正治) 중위, 히로오 아키라(広尾彰) 소위, 사사키 나오키치(佐々木直吉) 일등병조, 가미타 사다무(上田定) 이등병조, 요코야마 시게노리(横山薫範) 일등병조, 가타야마 요시오(片山義雄) 이등병조 등 사카마키 소위를 제외한 9명의 대원들을 전원 2계급 특진시키고 "9군신"으로 추대했다. 죽으면 영웅, 살아남으면 천하에 죽일놈[20] 한자만 清에서 潔로 다르다고 한다.[21] 현재 야인시대 등장인물 중 생존한 인물은 전부 정치인들 뿐이다. 이찬오, 김수한, 채원기, 신기범, 김을동 등.[22] 최장수 노인이였던 후안 빈센테 페레즈가 2024년 4월 2일 사망한 이후로 88일동안 세계 최장수 남성이였다[23] BC 221년 진의 중국 통일 ~ 1912년 청나라 멸망[24] 비공식적 마지막 전투원 생존자는 2021년에 사망한 레온 코펠만이다.[25] 로템이 살아 남을수 있었던 이유는 독일군에게 게토가 함락 되기 전에 하수구를 통해서 게토를 탈출했기 때문이다. 위에 각주에 서술한 레온 코펠만의 경우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탈출하여 이후 벌어진 바르샤바 봉기에도 합류했다.[26] 당시 15~17세의 해군 견습생이 100여명 정도 승선해 있었는데 침몰 당시 많은 견습생들이 사망하였고, 침몰 이후에 18세 미만은 군함에 탑승하지 못하도록 법이 생겼다.[27] 모세의 경우 16세에 남군에 지원했지만 북군에 패퇴해 도주하다 북군에 합류한 뒤 남군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는 데 도움을 준 공로가 있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제대군인부로부터 평생 동안 연금을 수령했었다.[28] 재혼 당시 아내와 나이 차이가 무려 46세나 차이가 났다.[29] 어머니 또한 정신장애가 있었다.[30] 당시 참전했던 이지 중대 전체에서 마지막 참전용사 출신으로는 위의 브래드포드 C. 프리맨이 유일한 생존자였고, 그도 2022년 7월 3일 세상을 떠났다.[31] I-26은 원래는 같이 퇴각하던 기함 USS 샌프란시스코를 노렸다고 한다. 하지만 발사했던 어뢰는 샌프란시스코를 빚나갔고 하필 빚나간 어뢰가 주노에 명중해서 침몰했다.[32] 전투 중 조선군의 조총 공격에 가랑이를 맞아 사망했다. 단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창에 찔려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맥키를 쏜 조선군은 루크와 동료들에게 사격을 당해 전사했다고 한다.[33] 1900년생이나 사망 당시에 생일이 지나지 않았다.[34] 사고의 영향인지 선임인 2등 항해사 라이톨러와 함께 선장이 되진 못했다. 대신 라이톨러의 경우 1차대전당시 같이 소집되어 구축함 함장으로 재직했으며, U보트를 격침시킨 전과로 훈장을 받았고 박스홀 또한 전쟁당시 어뢰정 정장으로 활동하긴 했다.[35] 이들 15명은 태평양 전쟁 당시 첫 명예훈장 수여자이기도 하다. 10명은 사후 추서, 5명은 생존 수훈을 했지만 생존 수훈자인 캐신 영 대령은 과달카날 해전에서 전사했다.[36] 1970년작 영화 도라 도라 도라 에서 해군항공대 기지가 공습을 받는 와중에 일본 전투기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는 군인이 묘사되는데 해당 군인이 존 핀이다.[37] 유럽전선은 4월에 나치 독일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지만, 태평양 전선에서는 일본 제국과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그러므로 공식적인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은 옥음방송이 나온 1945년 8월 15일로 기준을 삼는다. 아래에 서술한 허셜 우드로 윌리엄스는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10월에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38] 여담으로 아들인 찰스 H. 쿨리지 주니어는 미국공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1968년에 졸업 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으며, 미합중국 공군물자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고 중장으로 전역했다.[39] 지금은 진보적 성향의 매체로 탈바꿈했지만 1980년대에는 전두환 정부와 가까운 성향의 관영 매체였다. 이진희와 정구호가 이 시기에 임명됐던 대표적 친정부 성향의 경향신문 사장들.[40] 보수 정당과 보수 정권에서 몸담았던 그가 국민의 정부에서 관료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정부가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의 연립정부 체제였기 때문이다. 관료로 일할 당시 그는 자민련 소속이었다.[41] 윌리엄 던다스 소위(1965년 사망), 로버트 틸먼 장포수병(1995년 사망)[42] 원래는 침몰 직후 생존자가 더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자 저체온증으로 대부분 사망하여 최종 생존자는 3명에 불과했다. 남은 3명의 생존자들도 부유물에 올라타서 서로를 잡으면서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부르며 버티다가 2시간 뒤, 현장에 도착한 구축함 일렉트라에 의해 구조되었다.[43] 2대 회장은 같은 후드의 생존자였던 로버트 틸먼이 회장을 역임했다가, 1995년에 틸먼이 사망하자 3대 회장으로 회장직을 다시 역임했다.[44] 이때 일본군은 항모 4척을 전부 잃었기 때문에 하라다를 포함한 일본군 파일럿들은 바다에 불시착한 뒤 주변의 일본 군함에 구조됐다. 군함은 팔다리가 없거나, 얼굴이 식별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된 중환자들 천지였고, 당시 하라다는 딱히 부상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중환자를 먼저 돌봐달라고 군의관에게 얘기했지만, 오히려 군의관은 '"전쟁에서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무기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환자는 우선순위에서 맨 뒤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45] 인터뷰에서 그는 "제 인생 초기에 저는 무자비한 살인마였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죽인 사람들에 대한 죄의식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쫓아가서 격추했죠. 참 끔찍한 짓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매일 유치원에 갑니다. 저는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 친절함과 배려심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46] 98세였을때, 고령의 나이에 불구하고 오랫동안 서서 강연을 하다가 강연 종료 후 쓰러져서 병원으로 이송되기도 했다.[47] 실제로 하판락은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친일파 708인 명단을 발표할 때 명단에 든 대상자 중 유일하게 생존한 인물이었다.[48] 생전 히스토리(텔레비전 채널)에서 방영한 1차 대전 다큐멘터리에서 본인이 직접 등장하여 증언을 했었는데 부상을 당하여 후송되었을때 마취제가 없어서 무마취 상태에서 파편을 제거 했을때 수술을 담당하던 군의관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날 정도로 생애 최고의 고통을 느꼈다고 증언했다.[49] 슈퍼볼 LII에 참석하여 자신을 포함한 15명의 명예 훈장 수여자들을 대표하여 심판·선수들 앞에서 코인 토스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이름이 붙은 원정이동기지선 USS 허셜 "우디" 윌리엄스 호의 취역식에 참석해 수병들 앞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다.[50] 자녀는 베티, 진 두 딸이 있었으며, 진은 2001년에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였고, 베티는 1970년 어머니(헨리 앨링엄의 아내)의 사망 이후, 아버지와 불화로 인해 40년동안 연락을 끊고 살았다가, 2009년 아버지의 장례식 때 모습을 드러냈다. 여담으로 헨리 앨링엄은 자신이 사망하기 전까지 큰딸 베티가 죽은 줄 알았다고 한다.[51] 타카하시 유키히로는 2023년 1월 11일에, 사카모토 류이치는 2023년 3월 28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