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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Otto Frank 오토 프랑크 | |
본명 | Otto Heinrich Frank 오토 하인리히 프랑크 |
출생 | 1889년 5월 12일 |
독일 제국 프랑크푸르트 | |
사망 | 1980년 8월 19일 (향년 91세) |
스위스 비르스펠덴 | |
가족관계 | 배우자 에디트 프랑크(1900~1945) 장녀 마르고 프랑크(1926~1945) 차녀 안네 프랑크(1929~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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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출신 유대계 스위스인[1] 사업가이자 사회운동가로, 안네의 일기의 작가 안네 프랑크의 아버지로 유명하다.2. 생애
2.1. 나치 집권 이전
1889년 5월 12일생으로 부유한 유대인 집안 출신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미하엘 프랑크(Michael Frank (1851–1909))와 그의 부인 앨리스 베티(Alice Betty (1865–1953)) 사이에서 네 자녀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1908년부터 1909년까지 경제학을 공부하였고 미국 뉴욕의 메이시스(Macy's) 백화점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1909년 9월 그의 아버지(안네와 마르고의 친할아버지)가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귀국했고, 곧 미국으로 돌아가 1911년까지 미국에서 근무한 후 독일로 귀국했다.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에 징집되어 종전 후 육군 중위로 전역하였다.[2] 전쟁 통에 재산을 잃었으나 이후 자신의 아버지가 경영했던 은행을 형제들과 함께 운영하며 금방 재산을 다시 늘렸고, 업계에서 나름 이름을 날리는 사업가가 되었다. 그리고 1925년 5월 12일에는 아헨에 있는 한 시나고그에서 고철과 산업 원자재 기업의 상속녀인 에디트 홀랜더(Edith Holländer)[3][4]와 혼인하였고, 이듬해인 1926년에는 마르고를, 그리고 1929년에는 안네를 낳았다. 아버지와 처가에서 물려받은 유산의 기반 위에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그는 번듯한 사업장과 부족함 없는 유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5]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토 프랑크(중간 머리 위 X표가 있는 인물). 훗날 은신처에서 나치에게 체포되었을 때, 방구석에 있던 오토 프랑크의 전역 증명서를 발견한 SD가[6] 은신처 사람들의 짐 싸는 시간을 원래 5분을 줘야 하는데 특별히 1시간을 줬다고 한다. 독일 제국군에서는 장교들에게 관등성명이 기입된 여행용 가방이 지급되었는데 중위로 복무했던 프랑크 역시 그 가방에다 짐을 싸고 있었다. 그리고 프랑크 가족을 감시하던 SD가 가방에 새겨진 "예비역 중위. 오토 프랑크" 를 보고는 방을 뒤져서 프랑크의 전역증을 찾아냈다. 그렇게 프랑크가 1차대전에 참전한 독일군 장교였음을 알게 된 SD가 짐 싸는 시간을 1시간으로 늘려 주었다고.
수용소로 끌려가는데 무슨 소용인가 싶을 수 있지만, 그것은 봐 주고 싶어도 직무 때문에 체포해야만 하는 사람들을 위해 현장 지휘관이 배려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수용소로 가는 길이나 수용소에서 쓸 귀금속류나 보석을 몰래 챙기거나[7] 필요한 여러 자료들을 숨기고 가족 사진을 챙기는 등의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현장 지휘관 입장에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가장 큰 특혜를 배푼 셈이다.[8]
당시 현장 지휘관은 카를 질버바우어(Karl Silberbauer) SS 상사 겸 경찰 출신 SD였는데, 그는 그의 직속 상관이었던 율리우스 데트만(Julius Dettmann) SS 중위의 명령으로[9] 게슈타포와 SD를 동반한 상태로 프랑크 가족의 은신처를 급습했다. Dettmann 중위에게 정보의 출처를 물었지만 중위는 '믿을 만한 정보원'의 정보라고만 말했다고 한다. 이후 Silberbauer 상사는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이름을 바꾸고 빈 경찰에서 근무하다가 시몬 비젠탈의 추적으로 1963년에 정체가 들통나게 되었다. 이후 Silberbauer 상사는 재판을 받을 위기에 놓였지만, 오토 프랑크가 '그는 단지 의무를 다했을 뿐이고,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변호하여 석방되었다. 다만 오토 프랑크는 이후 '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후 그는 본인이 안네의 일기에 이름이 나왔을까봐 두려워서 초판이 나왔을 때 일찌감치 구입했고, 안네 프랑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체포 당시에 오토 프랑크에게 '당신은 훌륭한 딸을 두었군'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고 했다. 이후 Silberbauer 상사는 빈에서 살다가 1972년에 사망했다.
여담으로 이 사람이 은신처에 들이닥쳤을 때 같이 있던 퀴흘레르 및 클라이만 등은 체포되었으나, 미프 히스는 체포되지 않았다. 빈 출신이었던 질버바우어가 사용하던 빈 억양을 눈치챈 히스가 “당신 빈 사람이죠? 저도 빈에서 왔어요.”라는 식으로 반응하자 동향 사람을 만난 반가움 때문이었는지 유대인이 아니었던 히스는 눈 감아 주었다고 한다. 물론 미프 또한 유대인을 도운 죄로 체포당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고, 그녀는 안네의 일기를 빼돌려 안전하게 보관하다 훗날 세상에 나오게 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이었으니 만약 그때 미프마저 아우슈비츠로 압송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2.2. 나치 집권과 제2차 세계 대전
그러나 1929년의 세계 대공황과 뒤이은 바이마르 독일의 극심한 사회-경제적 혼란 속에서 오토의 형제들이 경영하던 은행과 오토가 경영하던 사업이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1932년 아돌프 히틀러의 지도 하에 나치 독일이 집권하여 유대인 탄압 정책을 시작하자 1933년, 장모(안네와 마르고의 외할머니)가 거주하던 아헨으로 그 기반을 옮겼다. 그리고 같은 해에 아헨에서 독일 내 자산과 신변을 정리한 이후 나치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가족을 이끌고 중립국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다. 정확히는 독일 식품 기업인 오펙타(Opekta)[10]가 네덜란드로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오토에게 네덜란드 지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뒤숭숭한 독일을 피할 겸 오토도 이를 수락했다. 결과론적으로는 진작 대서양 건너 미국이나 캐나다, 영국 등으로 피신하지 않은 것이 안타까운 상황을 만들게 되었다.[11]안네는 일기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한 1933년 무렵부터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한 1940년까지 약 6년 동안을 상당히 행복한 기간으로 추억하는데, 언니와 함께 새로 다닌 네덜란드 학교에 잘 적응하여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좋은 성적을 받았고, 아버지 오토는 스위스 바젤의 한 식품 회사에서 근무하던 매제 에리히 엘리아스의 도움으로 그가 일하던 식품 회사의 암스테르담 지사에서 근무하며 기반을 다진 후 1938년에는 건실한 식품 업체를 설립하여 운영하게 되었고, 1939년에는 오토가 장모(안네의 외할머니)[12]까지 암스테르담으로 모셔오며 모든 가족이 성공적으로 네덜란드에 정착하여 제법 승승장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의 행복하던 삶도 1940년,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까지 침공하며 끝이 났다. 네덜란드를 점령한 이후 SS에서 맏딸 마르고에게 소환장을 보내자, 현실적으로 해외 도피가 어려워진 상황을 깨달은 오토는 자신이 운영하던 회사 건물에 숨어 나치가 몰락할 때까지 버티는 계획을 세워 실행하였다.[13] 이후 은신처 사람들의 리더 역할을 하면서 은신처 살림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꾸려나갔다.
성격은 무뚝뚝하고 엄격하지만 자상한 편. 성미가 급한 아내에 비해서는 다소 느긋하고 유한 편이지만, 안네는 "어머니만큼은 아니어도 구시대적이고 답답하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사춘기 소녀인 차녀 안네의 반항에 눈물 짓기도 하고, 일기 내에서지만 "내가 힘들 때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하나."는 안네의 원망을 들었다. 은신처 내에 중재자 역할과 정신적인 리더역할을 하지만 사춘기 청소년인 안네와 같은 방을 쓰면서 찌질하게 구는 뒤셀이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판 펠스와 안네가 싸움이 붙었을 때 중립만 지키는 바람에 안네가 뒤로 가면 갈수록 실망한다. 은신처에 싸움이 붙으면 안 된다는 철칙을 잘 지킨 듯 하지만, 뒤셀이나 판 단이 시간이 지날수록 음식을 훔친다거나 소포를 자기만 차지하는 행동 등을 하는 걸 보면 그걸 참은 안네가 대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어떤 확신할 수 없는 사유로 은신처가 발각되어[14] 나치에 의해 은신처 사람들이 모두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 과정에서 오토는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의 중간 수용소인 베스테르부르크 수용소를 거쳐 마침내는 폴란드에 위치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1944년 9월, 남성 전용 수용소로 옮겨지며 가족들과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 오토 프랑크는 스위스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15]와 편지와 소포를 주고 받으며 연명했다.
1945년 1월 16일, 소련군이 폴란드까지 진격하자 독일군은 아우슈비츠에서 철수했고, 건강 문제로 아우슈비츠 병동에 수용되어 있던 오토 프랑크는 1월 27일,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어 구출되었다.[16] 그리고 결국 은신처 사람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게 되었다.
2.2.1. 왜 네덜란드로 피난을 갔나?
결과적으로는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네덜란드는 독일 유대인들에게는 이상적인 피난처였다. 네덜란드와 독일은 서로 이웃에 같은 게르만족이 주류가 된 서유럽 국가이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든 언어적으로든 비슷한 구석이 많고[17], 독일어를 구사할 줄 아는 네덜란드인들이나 이미 독일에서 망명한 이들도 많아 지내기가 더 편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내의 유대인 사회도 컸기 때문에 피난 온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큰 손실 없이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결과를 아는 훗날의 시점에서 안네의 가족들이 네덜란드가 아닌 영국[18], 미국, 캐나다, 스위스[19][20], 덴마크[21], 불가리아[22], 소련[23],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멕시코, 브라질, 페루, 에콰도르[24], 아르헨티나, 칠레[25], 나미비아[26] 같은 나라들로 도주했으면 참화를 피할 수 있었을 거라고 안타까워하지만, 이 국가들은 당시 독일 출신 유대인들이 의지할 기반이 없어 이곳으로 이주하면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27] 즉, 당시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네덜란드가 다른 국가들보다 리스크가 적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엔 "설마 나치가 중립국인 네덜란드를 공격할까"는 믿음도 강했는데,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이 벨기에와 프랑스를 침공할 때도 네덜란드는 중립을 존중해 협상국 진영과 동맹국 진영 둘 다 건드리지 않았다. 다만 이때도 짓밟힌 벨기에는 중립국이었다. 즉 네덜란드라고 못 밟히리라는 생각은 반절만 그럴싸한 생각이었다. 한마디로 히틀러의 엄청난 야심을 너무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것이 오토의 최악의 오판이었다.
사실 꽤 많은 독일 유대인들이 나치를 피해 다시 한 번 중립을 선언한 네덜란드로 도피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으로 전장이 돼 아비규환이 된 벨기에와 프랑스, 그리고 영토 문제로 독일과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폴란드는 전쟁터가 될 게 뻔하지만, 네덜란드는 안전했으니 이번에도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치는 네덜란드가 바다 건너에 있는 영국과 결탁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네덜란드를 침공하였고[28][29], 이것이 프랑크 일가에 비극이 되었다. 덧붙여 네덜란드 외에 프랑스, 벨기에, 헝가리, 루마니아 등 다른 주변 유럽국가들로 도주한 독일/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들도 많았는데, 이들 또한 대부분 나치 독일군이나 나치 등 추축국에 협력하던 현지 정부의 반유대주의 정책에 의해 학살당하고 말았다.
애초에 히틀러는 이 전쟁을 아리아인을 위한 싸움으로 인식했고 유대인을 말살하는 걸 자신의 가장 큰 임무로 생각했다 겸사겸사 독일인들이 살 땅도 마련하고[30] 즉 히틀러는 유대인이 산다면 어느 곳이나 다 침공했을 것이다. 그리고 말살해 독일인들을 지켜 인류의 인종적 오염을 거부하는 것이였는데....그저 당시의 독일인이 그랬듯이 히틀러의 야심을 또다른 유럽의 지배자 수준으로 생각한 오토가 안타까울뿐이다.
2.3.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종전 이후 네덜란드로 돌아온 오토는 자신의 가족을 포함해 은신처에서 함께 살던 사람들이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고 크게 낙담했다. 이후 안네의 일기를 보관하고 있던 미프로부터 일기를 넘겨받고 이를 편집하여 출간했다.[31] 오토 사후에 원본이 출판사로 넘어가며 무편집에 가까운 판본들이 발간되었고, 오토 프랑크가 한 것 뿐만 아니라 딸 안네도 일기를 쓰는 동안 직접 한 편집과 누락도 간간히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완전한 무편집본 출간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이후 홀로코스트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고 딸과 함께 살아남은 같은 처지였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인과 재혼했고[32], 1947년에 자신의 모친을 비롯한 친척들과 조카들, 그리고 조카손주들이 거주하고 있는 스위스 바젤(Basel)로 이주한 후 여생 동안 딸 안네의 삶을 기리기 위한 여러 활동들을 지속하다 1980년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였으니 생전에 겪은 고난을 생각하면 장수한 셈이다. 다만 재혼한 배우자의 딸인 오토의 의붓딸의 증언에 따르면 오토는 죽을 때까지 안타깝게 요절한 친딸 안네한테만 지나치게 몰두했고 자신들한테는 별로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아 평생 섭섭했다고 한다.[33]
[1] 나치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1933년에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그곳에 정착했으나, 전쟁 이후 1947년에 스위스에 정착하였으므로, 최종 국적은 스위스라고 할 수 있다.[2] 제1차 세계 대전 최대 격전지 중 하나였던 솜 전투에도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오토 말고도 여러 인물들이 참전했는데, 영국군에는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이 있었고, 독일군 측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전령으로 복무했다.[3] 에디트는 1900년 1월생으로, 당시 나이 25세였다. 그리고 그날이 마침 오토의 36번째 생일이었기 때문에, 무려 11살이나 어린 제법 건실한 기업의 상속녀와 혼인한 것이다.[4] 여러 사정으로 오토의 혼인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형과 함께 두 동생들을 건사해야 했고, 거기에 아버지의 사업도 수습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1차 세계 대전과 전후 독일의 혼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말미암아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기 전까지는 여자를 만나 결혼할 여유가 없었다.[5] 안네의 일기를 보면 오토와 에디트 프랑크가 은신처에 숨어지내는 현 처지와 대비되는 이 시절을 떠올리며 씁쓸해하는 대목이 나온다. 똑같이 부유하게 살던 유대인이이었던 블라덱 슈피겔만 등의 사례만 보더라도 프랑크 일가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었으나, 아무래도 나치의 탄압 등으로 인해 재산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리거나 압류당한 상태였으니 저런 소리가 안 나올 수는 없었다.[6] 유대인 색출 담당 기관은 게슈타포였지만 프랑크 가족의 은신처를 찾아낸 건 이들이 아니라 SD라고 줄여부르는 SS 방첩대였다. 업무 특성상 SS 계급을 받고 파입된 경찰관과 정보병과로 복무했던 군 출신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7]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수기에 따르면 처음에 게토나 수용소로 들어갈 때 그렇게 철저하게 몸수색을 했어도 어떻게든 금이나 은이나 백금 등의 귀금속으로 만든 시계나 반지, 목걸이, 귀걸이, 식기를 숨겨서 반입해 성공하는 경우가 있었고, 보석 등을 숨기는 건 더 쉬운 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숨겨온 귀중품들을 이용해 물물교환을 하여 먹거리나 술, 담배, 의약품을 구하기도 했고, 좀 더 편하고 배급이 많이 나오는 작업장으로 옮겨가거나 가족들을 빼낼 뒷돈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8] 그나마 이것도 오토 프랑크가 독일군 참전용사였기 때문에 SS 장교가 혜택을 준 것이다. 당연히 일반적인 유대인들은 짐 싸는 시간이 고작 5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프랑스군이나 폴란드군, 벨기에군,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불가리아 조국전선 등에 들어가서 독일에 맞서싸운 경력이 있는 유대인들은 그 정체가 발각되면 더 가혹한 조치가 기다리고 있었다.[9] 유일하게 밀고자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었지만,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학살 혐의로 재판을 받던 중 자살했기 때문에 밀고자의 정체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10] 향신료 및 펙틴(pectin)을 취급하던 식품 회사. 1928년 설립되었으며 1995년 독일의 다국적 식품기업 독토르 외트커(Dr. Oetker)에 인수되었다.[11] 나치의 집권으로 피바람의 전조가 보이자 눈치 빠른 독일내 유대인들은 재빨리 재산을 처분하고 아예 모국을 떠나기도 했지만 그 외 대부분은 영어도 못 하는데 미국, 캐나다, 영국 등으로 갈 생각은 못 하고 독일을 떠나 주변 타 유럽 나라들로만 망명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에 나치에 의해서 학살당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기실, 제1차 세계 대전만 놓고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12] Rosa Holländer(혼전 성은 Stern), 1866년 12월 25일 ~ 1942년 1월 29일. 사망 일자에서 보듯 이 사람은 불행 중 다행으로 은신처로 도피하기 전 아직 평범한 생활을 하던 때에 세상을 떠났다.[13] 2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여럿이서 한 군데 은신하려면 당연히 많은 식량이 필요한데 재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계획[14] 친 나치 성향의 혹은 반유대주의 성향의 네덜란드인이 유대인들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나치에 밀고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게 제기되고 있다. 이 외에도 암시장 거래를 추적하던 나치 요원들에게 우연히 발각됐다는 설도 있는 등 은신처 발각의 계기에는 여러 가설들이 존재한다. 아니면 그냥 운이 없었다는 가설도 있고, 이 부분은 안네의 일기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15] 안네와 마르고의 친할머니.[16] 원래 나치 독일군의 계획은 수용소를 제발로 걸어나갈 수 있는 포로들은 독일 본토의 수용소로 옮겨 사살하고, 수용소에서 걸어나갈 기력이 없는 포로들은 수용소와 함께 폭파시켜 증거와 증인을 완전히 인멸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 작전은 현재까지도 완전히 확인되지 않은 사유로 틀어지며 수용소 폭파가 실행되지 못했고, 결국 수용소 병동의 환자와 의료인, 그리고 수용소 곳곳에 숨어 있던 사람들 등 아우슈비츠에 남아있던 피수감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실제로 만화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이자 같은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어 있었던 블라덱 슈피겔만의 경우에는 오토 프랑크가 폴란드에서 소련군에 의해 구조된 지 몇 달 후에야 이송 중 탈출하여 미군에 의해 구조되었는데, 이는 슈피겔만이 프랑크와 달리 아우슈비츠 폐쇄 당시 그나마 몸 상태가 건강하여 독일로 향하는 기차가 대기하고 있는 역까지 걸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서 독일 본토로 이송되던 중에 포로들에게 일어난 아비규환이나, 독일 내 수용소들의 비참한 상황 등을 봤을 때, 오토 입장에서는 수용소에 남아 구출된 것이 다행인 상황이 됐다.[17] 네덜란드어와 독일어는 일상 회화가 어느 정도 통할 정도로 매우 유사한 편이고, 당연히 독일어를 모어로 구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배우기에 다른 언어들보다 훨씬 쉽다. 물론 둘이 완전히 같은 건 아니라서, 안네의 일기를 보면 안네가 어른들의 네덜란드어 사용이 서툴다고 우스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안네의 경우 어린 시절부터 네덜란드에서 자랐기에 독일어를 구사할 수는 있었으나 모어로 인식한 것은 네덜란드어였고, 그 유명한 일기도 네덜란드어로 쓰였다.[18] 네덜란드 점령 이후에도 제법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네덜란드의 어부들이나 선원들의 도움으로 영국으로 도피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발각되면 유대인들은 물론 그들을 도운 네덜란드인들도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처형당했다.[19] 스위스는 오토 프랑크의 어머니, 즉 안네와 마르고의 친할머니가 선택한 망명지이기도 했다. 또한 오토 프랑크의 여동생이자 안네의 고모인 헬레네 프랑크는 앞서 언급했듯이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아예 스위스 바젤을 생활기반으로 두고 살고 있었던 터라 다행히 홀로코스트가 일어나는 와중에 무사히 생존할 수 있었다. 원래는 오토 프랑크처럼 자신의 고향인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1931년에 남편이 바젤을 본거지로 두고 있는 회사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스위스로 이민을 가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된 셈이었다. 사실 프랑크 가족이 암스테르담에서 은신처로 썼던 오토 프랑크의 회사가 다름아닌 매제의 회사의 네덜란드 지사였다. 헬레네 프랑크의 아들 버디 엘리아스(Buddy Elias)는 최근까지 생존했던 안네의 유일한 사촌오빠로, 오토 프랑크 못지않게 언론에 얼굴을 많이 비춰 프랑크 일가에 대해 증언을 많이 해주었고, 오토 프랑크 사후에는 유지와 직책을 이어받아 안네 프랑크 재단을 운영하다가 2015년에 작고했다. 이렇듯 오토 프랑크의 친지들이 이미 스위스로 오래전부터 이주해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수용소에서 안네를 만난 유대인 친구들은 프랑크 가족이 당연히 스위스로 망명가서 무사히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수용소에 있어 굉장히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고 한다. 오토 프랑크 본인도 종전 이후 말년에 여동생 일가가 사는 스위스로 이주해서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0년에 작고했다.[20] 사실 스위스는 결과적으로만 보았을 때 중립국 지위를 유지했기 때문에 현재의 시각에서는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 가장 안전한 도피처이긴 했지만, 독일 인접 국가였던만큼 독일의 침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독일어권에 속한다는 명분과 유럽의 교통과 금융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지역이라는 실리 때문에, 이미 합병된 오스트리아처럼 나치 독일이 크게 눈독들이고 있는 나라 중 하나였다. 실제로 히틀러가 몇 번 스위스 침공계획을 세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알프스산맥을 낀 험준한 산악지역에서 전쟁에 잔뼈가 굵은 스위스인들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는 점이나, 당시에는 스위스를 돈세탁장이나 국제회담장으로 사용하는 게 점령하는 것보다 더 이득이었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결국에는 침공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던 덕분에 스위스는 다행히 나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독일이 스위스를 침공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일었고, 실제로 독일은 영국을 굴복시킨 이후 스위스를 점령하여 스위스 유대인들도 학살장으로 끌고 갈 계획을 세워놨었다. 이에 일부 스위스 유대인들은 아예 짐을 싸서 저 멀리 미국이나 캐나다로 망명을 가기도 했다. 대표적인 이가 바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다행히 나치가 영국을 굴복시키고 스위스를 침공하는 일은 국왕과 총리(덧붙여 안네는 일기에서 당시 영국 총리였던 처칠에 대해 전쟁이 끝나면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라며 매우 긍정적으로 평했다)를 중심으로 단결한 영국인들의 치열한 항쟁과 영연방/미국의 도움, 그리고 나치 독일의 거듭된 오판과 그 끝에 이루어진 소련 침공으로 벌어지지 않았지만, 1940~41년 당시는 내일이라도 런던이 함락되고 그 다음 날에는 스위스에 독일의 기갑군단이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21]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게르만계 국가이고(정확히 말하자면 네덜란드는 서게르만계 국가이고 덴마크는 북게르만계 국가인 차이가 있지만) 결국 나치에게 점령당하긴 했지만, 독일 침공 후 왕실이 국외로 망명했던 네덜란드나 노르웨이 등과는 달리 왕실을 유지하고 간접 통치를 했다. 그리고 덴마크 왕실과 시민들의 비호로 많은 유대인들이 스웨덴 등 중립국으로 도피하거나 나치의 학살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피해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어서, 수백 명의 덴마크내 유대계 국민들이 아우슈비츠와 다하우 수용소로 끌려가 학살당하기도 했다.[22] 덴마크와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왕실과 정치권, 시민, 종교계의 비호로 많은 유대인들을 보호했다. 물론 아예 반유대주의가 없었던 건 아니어서 2차 대전 초기 루마니아나 그리스 점령지의 유대인들을 탄압/홀대하기도 했지만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디미터르 페셰프와 동방정교회 등 종교계에서 반유대주의 정책에 대해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정부에게 보내면서 이후 유대인을 보호하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23] 유대교 박해 자체만 놓고 보면 나치 독일과 비교해서 오십보백보이긴 했지만, 적어도 소련 정부는 홀로코스트급의 극단적인 유대인 학살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애초에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소련 정부가 표면상으로나마 종교 탄압을 중단하고 종교에 대해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당시 소련의 유대인들은 정교회 신자들만큼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소련 정부에 의해 대량으로 학살당할 일은 전무했다.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의 절대다수가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에 의해 발생했다. 소련 자체가 워낙 영토가 넓다 보니 기차나 말을 타고 중앙아시아나 캅카스 내지는 시베리아 지역으로 멀리 도망치는 방법도 있었다. 독소전쟁 직전까지 소련으로 망명한 독일인들 중에서 스탈린 체제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정된 이들이 독일로 강제송환되기는 했으나, 이 또한 표면상으로나마 스탈린 체제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강제송환을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물론 네덜란드에서만큼의 부를 누리며 살수는 없겠지만 똥밭에 굴러도 이승에서 구르는 게 나은 것처럼 어쨌든 살수는 있었을 것이다.[24] 남미 지역에서 인구 비율상 아메리카 원주민과 메스티소가 가장 많은 나라이지만 유대계나 아랍계, 이탈리아계 등 중동/유럽 출신의 백인계 민족들도 존재한다.[25] 아르헨티나와 칠레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 등 옛 추축국에서 도망쳐온 해당국의 전범과 정치범 인사들을 자국 영내에 숨겨주었던 흑역사도 존재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전까지 외교적으로 독일에게 우호적이었지만 당시 두 나라의 정치권에서는 독일의 나치당과는 달리 반유대주의 성향은 없었기에 한편으로는 전간기 말과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나치의 탄압을 피해서 미주 지역으로 도주해온 유럽국 출신의 유대계 유럽인들의 정착을 받아주기도 했다.[26] 옛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던 역사 때문에 현재까지도 독일계 주민들이 순혈 백인과 흑백혼혈을 막론하고 적지 않게 거주한다. 그래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어권 유대인들 중 일부가 지금의 나미비아 땅으로 도망치기도 했으며, 현재까지도 나미비아에는 독일계 유대인들이 거주한다.[27] 심지어 2차 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은 1년에 유대인 이민자들을 겨우 3만 명만 받거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유명 학자 및 지식인들에 한해서만 받아주는 제한적 이민법을 실시하여 나치의 학살을 피해 망명하는 유럽 출신 유대인들을 가급적 덜 받으려고 했는데 그 결과 홀로코스트 희생자 규모가 더욱 커졌다. 비슷한 일은 현대에도 일어나고 있다. 2018년 제주 난민 사태가 일어난 이유가, 어느 나라에서도 예멘 난민들을 좀처럼 받아주지 않은 탓에 내몰리고 또 내몰리던 그들이 별 교류도 없던 한국까지 오게 된 것에서 기인했다.[28] 히틀러는 중립국 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를 스위스도 침공하려고 했던 자다. 참모들이랑 여러 가지 따져 보다 득보다 실이 클 것이라고 판단해서 결국 포기했을 뿐이다. 게다가 그 스위스마저 나치 독일에게서 뒷돈을 받아챙겼다.[29] 스위스를 제외하고 중립을 선언한 유럽 국가 중 독일이 정말 진지하게 중립으로 대해주려 했던 나라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스웨덴과 발칸 반도의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정도가 중립국 비슷하게 대접받았는데 그 조건이 독일에 우호적이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스웨덴은 2차 대전 동안 독일과 적당히 교류하며 히틀러의 총칼에서 벗어났지만 발칸반도는 그렇지 못했다. 1940년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으로 영국군이 그리스에 들어오고, 유고슬라비아에서 친 연합 쿠데타가 벌어지자 이들이 연합국 가입을 공표하지 않았음에도 즉각 침공을 단행하였다[30] 물론 대부분 사람들은 레벤스라움 건설이 주된 목적이라 생각했다. 실상은 전자인 유대인 말살이 제일 컸지만[31] 다만 편집 과정에서 문제가 터졌는데, 안네가 자신의 배우자 에디트나 판 단 부인을 욕하는 것은 거의 편집하지 않았으나, 안네가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 뒤셀이나 판 단, 본인을 욕하는 것은 대부분 잘라서 출판한 것 때문이었고, 결국 사후에 비난 받았다. 이에 대해 배우자에 대한 욕을 남겨둠으로써 본인과 비교되고, 자신은 엄격하지만 자상하고 완벽한 아버지 이미지만 가져가고자 했다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32] 다만 오토는 첫 번째 부인 에디트와의 사이에서는 아들 없이 딸만 둘을 얻은데다 그나마도 모두 요절, 후처와의 사이에서는 친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그의 후손들은 전부 직계가 아니라 방계다.[33] 실제로 부모들은 친자식 간이어도 먼저 죽은 자식을 잊지못해 매달리다 남은 친자식에게 소홀해지는 경우가 더러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