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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22:15:17

정순덕(빨치산)

鄭順德
1933년 8월 11일 ~ 2004년 4월 1일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빨치산 입산 후 산청군 유격대시절2.3. 이영회 부대2.4. 입당과 부소분대장 임명2.5. 북부소지구당으로 전속2.6. 망실공비 3인조2.7. 체포 후
3. 논란4. 매체에서

1. 개요

경남 산청군 삼장면 출신의 빨치산 대원. 본관은 진주(晋州)[1].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9년 후인 1962년 10월 10일 체포되어 마지막 빨치산으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정순덕은 1933년 8월 11일(음력 6월 20일)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 안내원마을#에서 아버지 정주삼(鄭周三)과 어머니 진도원(陳道元) 사이에서 1남 4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정주삼은 정감록을 신봉하여(...) 예언에 따라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 지리산 깊은 골짜기 마을로 이주해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의 뜻은 '덕에 순응하면서 세상을 살라'였다. 9가구 밖에 안되는 마을 사람들 전체가 정감록 신봉자들이여서 마을 밖과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아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없었고, 어차피 당시만 해도 여자가 교육받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실록 정순덕>에서는 자신을 불쌍하게 보이기 위했는지 안나오지만 실제로는 황점부락 시기에 야학을 다녀 글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17세의 문맹소녀 컨셉으로 밀고 나가 일부 책에서는 계속 문맹소녀라고 나온다. <실록 정순덕>도 책을 잘 보면 2권에서는 빨치산 정치학습 시간에 배운 내용을 필기하고 수시로 보면서 외웠다는 구절이 나온다.

지리산에서 빨치산이 활동하던 1949년,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 인근 삼장면 대하리 황점부락으로 옮기게 되었고, 다음해인 1950년 5월초 성석조와 혼인했다.

2.2. 빨치산 입산 후 산청군 유격대시절

조선인민군이 산청에 들어오자, 성석조는 조선로동당 시천면당 당원이 되어 면 인민위원회(북한식 면사무소)에서 일했다. 정순덕 또한 마을 부녀자들과 함께 ‘여성동맹(여맹)’에 가입하였다.

인민군이 후퇴하자, 성석조는 인민군 패잔병을 따라 입산했다. 돌아온 경찰들은 정순덕을 수시로 경찰서로 끌고가서 고문하거나, 집에 쳐들어와서 두둘겨 팼다. 11월 정순덕의 시할머니가 경찰에 끌려간 후 소식이 두절되고, 정순덕은 그날도 경찰에게 두들겨 맞다가 남편 찾아올 방법 생각해내라고 마을 근처 비석에 묶였다. 다음날 아침 손목 가죽이 벗겨지면서 겨우 밧줄을 풀어냈지만, 도저히 마을로 돌아갈 수 없어 할 수 없이 남편을 찾아 입산하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조금 산줄기를 타고 올라가니 빨치산을 만날 수 있었고 남편도 연락을 받고 금방 나타나 두달 만에 재회할 수 있었다.

성석조가 속해있는 부대는 경남도당 연락부 소속의 30명 규모의 ‘도깨비 부대’였다. 그런데 정순덕이 입산한지 며칠 안되어 바로 ‘’‘인민재판 사건’‘’이 터진다. 산청경찰서에 보내는 연락 문서를 지니고 가던 동네 청년을 빨치산들이 붙잡고 인민재판을 열었다. 그리고 칼로 한쪽 귀씩 자른 후 배를 갈라죽였다.[2] 다음날에는 두명의 마을사람을 밀고자라며 인민재판을 통해 태워죽였고, 며칠 뒤에는 임신부를 경찰서로 통하는 편지를 갖고 있다고 배를 갈라 죽였다. 배가 갈라지자 튀어나온 태아는 완전한 사람 모습을 갖춘 사내아이였다고 한다. 이상의 인민재판은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의 <실록 정순덕> 항목에 나와 있을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다.[3]

이후 정순덕은 밥하고 빨래하는 일을 하고 도깨비 부대는 세가 70명으로 늘어 ‘진양군 인민유격대’(대장 인민군 출신의 오종환)라는 이름으로 개편된다. 그러나 빨치산은 원칙적으로 연애하는 꼴을 못본다. 지방유격대의 경우 전투력에 지장을 준다며 연애하다가 걸리면 총살형이다. 연애나 결혼한 부부나 전투력에 지장 주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정순덕 부부는 당의 지시에 의해 다른 부대로 갈라지게 된다. 정순덕은 진양군 유격대에 남고 석성조는 산청군 유격대로 간다. 결국 이들 부부는 마을에서 두달, 산에서 한달여 정도 같이 지낸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산에서는 석성조는 전투부대에서 자고, 정순덕은 여자들과 잤다.

2.3. 이영회 부대

51년초 진양군 유격대와 산청군 유격대는 통합되어 이영회 부대로 재편성된다. 이영회는 여순 사건의 14연대 반란군 상사 출신으로, 이현상과 함께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다. 이때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지방 빨치산인 박종하는 3연대장, 이영회는 5연대장, 이현상은 7연대를 직접 관할한다.

이들은 북한군이 내려오자, 하산하여 낙동강 전선에서 UN군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이기 위해 낙동강을 건너게 된다. 이때 각 50명씩 3척의 배에 나늬어 도강하는데, 이현상, 박종하 등은 무사히 건넜으나 이영회의 배는 중간에 공격받고 가라앉아 타고 있던 자들이 떼죽음을 당하여 이영회와 또 한명의 부하만 살아남는다. 한편 이현상과 박종하 등은 낙동강 동쪽에서 활동하다가 9.28 수복으로 인민군이 후퇴하자 그들을 따라 월북해 버리고, 선이 떨어져 오갈데가 없게된 이영회는 경상남도 도당을 만나게 되어 여기서 유격대 지휘관이 된다. 처음 이영회 부대의 공식 명칭은 ‘독립8지대’였다. 그런데 이현상이 실제로는 ‘독립4지대’이지만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이라고 자칭하며 부대를 이끌고 월남하여 지리산으로 내려와 남한내 모든 유격대를 산하에 넣게 된다. 이때 모든 부대들을 사단으로 개편하게 되는데, 이때 이영회의 독립8지대는 57사단이라는 이름으로 개편하게 된다.

이때 ‘독립8지대’시절 400명까지 병력이 늘어난 상태였으며, 1개 직할호위중대와 3개 전투중대로 편성되었다. 이봐 사단이라며 각 중대는 각 30명의 3개소대, 소대는 다시 3개분대로 편성되었다.

이를 51년 11월경 57사단으로 개편하였는데 1연대, 3연대, 5연대로 편제되었고, 12월에는 가야산에서 활동하던 구호택의 세력을 규합하여 9연대가 창설되었다. 사단장 이영회 다음으로 참모장과 정치위원이 있었다. 중대장급부터 간부로 칭했으며, 2개 소대에 20명 남짓이였다. 이때 정순덕은 5연대 후방부대원, 남편 성석조는 1연대 소속 삐아링 사수[4], 최후의 빨치산 이홍희는 참모장 연락병이었다. 병력은 <실록 정순덕>에는 5백명과 2천명이라는 서로 다른 구절이 있는데, 남부군과 1개월후 악양전투의 합동작전때 1백명을 동원한 걸로 봐서 5백명도 과장된게 아닌가 싶다.

이즈음 정순덕은 장티푸스의 일종인 파라티푸스에 걸려 수도산 환자트에 1개월 가량 입원한다. 이때 며칠동안 간병부 교육을 받았고, 그 자격으로 한 고위간부의 산중처의 출산을 돕는다. 당시 그 고위간부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태어난 딸이니 이름에 하늘 천(天)자를 넣어서 이름을 짓겠다고 했다. 정순덕은 며칠뒤 그 간부가 남한 빨치산내에서 이현상에게 버금가는 남도부라는 말을 듣는다. 이 이야기는 <실록 정순덕>에서 정순덕의 역할을 나타는 일화로 몇 번이나 언급되며 당시 남도부는 회의 참석차 지리산에 왔고, 딸 이름이 ‘하천형’이라는 등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정순덕이 어느 고위간부의 산중처의 산파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 간부가 남도부라는 것은 매우 의심스럽다. <남도부>, <북위38도선>에서도 나오지만 남도부는 6.25 이후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한번도 지리산에 간 적이 없고 주로 태백산맥 자락 낙동강 동쪽에서만 활동하였으며, 이현상과 남도부는 서로 연결하기 위해 몇 번 시도한 적 있으나 거리가 워낙 멀어 연락원이 상대 진영까지 넘어간 적이 없었다. 지리산 빨치산과 신불산의 빨치산 사이에 연락이 닿았던 적이 한 번 있는데, 경남도당에서 조용구 부대를 파견하여 낙동강 이동 빨치산들을 경남도당의 일원으로 넣으려고 했을 때이다. 이 일로 빡친 남도부는 신불산을 떠나 경북 일월산에서 경북과 낙동강 이동지역을 담당하는 박종근을 만나고 낙동강 이동지역의 지휘권을 확인받고 다시 신불산으로 돌아온다. '하천형' 얘기는 너무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라 다른 남도부 관련 책에서는 나오지 않는 일화이다.

57사단을 결성한지 1개월도 안된 12월 2일, 군경의 제1차 대토벌작전이 시작된다. 먼저 남부군 직속 81사단, 92사단과 합동 작전인 경남 하동군 악양 지서 습격사건인 악양전투는, 대토벌작전 하루 전날 대공세 준비중인 수도사단의 아가리에 뛰어 들어가는 대실패였다. 같은 달에는 경남 함양군 법화산에서 수도사단의 공세에서 수백명의 빨치산이 몰살당했고, 52년 1월 17일경 지리산 천왕봉 근처 대성골 전투에서 경남도당과 57사단은 군경의 포위에 결정적으로 괴멸된다. 당시 전투는 소설 <남부군>에서 이태가 ‘남부군 최후의 날’이라는 소제목으로 묘사하며, 자신이 소속된 81사단만 포위되어 작살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92사단은 물론 경남도당과 57사단, 그리고 전남도당과 전북도당 일부 부대까지 군경의 포위공세에 토끼몰이 식으로 밀려 대성골에 총집결했다가 싸그리 괴멸한 전투였다. <실록 정순덕>에서 정순덕은 1만명의 빨치산이 대성골에 빽빽이 들어찼다고 했지만, 그건 남한내 총 빨치산의 숫자에 가깝고, <빨치산의 딸>에 의하면 그 1/10인 대략 1천명 남짓이 포위된 상태였다. <이현상 평전>, <전남유격투쟁사> 등 여러책을 종합해 봤을 때 전남도당에서 ‘투쟁인민’이라고 하는 후방의 노약자들만 1천명이고 전투병은 수백명 수준으로 추정된다.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들은 이 대성골 전투로 결정적인 손실을 입는다. 특히 경남도당 지휘부는 부위원장 김삼홍을 제외하고 아예 전멸해버렸는데, 정순덕은 이때 경남도당 위원장 남경우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다. 토벌대측에서는 항공기로 소이탄을 떨어뜨려 대성골 일대를 불태웠는데 불길이 얼마나 강한지 한겨울에도 무려 5일간 타들어 갔다. 정순덕은 좁은 바위틈새에 숨어 선채로 최소 5일 이상 버티며 살아남는다. 그러나 남편 석성조는 이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며칠후 생존자에게 듣는다.

정순덕의 증언에 의하면 2천명(?)이나 되었다는 57사단은 대성골 전투로 불과 60여명 남았다. 잔존 병력은 2개 중대로 편성되었고 부대장 이영회는 부상으로 그때까지 복귀하지 못해 참모장 박창선이 대신 이끌었다. 정순덕의 중대장은 삼천포 출신의 임학주였다. 정순덕은 중대부(본부) 소속으로 간병, 취사, 환경정리를 담당하였다.

2개월후 부대장 이영회 등 부상자들이 속속 복귀함에 따라 병력은 1백명 가량 늘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대로 경남도당은 이미 전멸한 상태여서, 부위원장 김삼홍 등 일부만이 형식상으로 유지만 하고 있었을 뿐 경남도당 자체는 사실상 끝난 상황이었고, 기타 군당, 면당 유격대도 죄다 전멸하여 경남에는 이영회 부대만 존재하고 있었다. 원래도 이영회는 반란군 14연대 출신으로 이현상부대 소속이며 지방 빨치산이었던 경남도당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 이때부터는 경남도당이 유명무실한 상태라 이현상의 남부군에 더욱 가까이 접근하여 사실상 남부군처럼 움직였다.

부대는 부대장 정치위원, 참모장, 참모등 부대 지휘부 아래 3개 소부대로 편성하고, 각 소부대는 3개 구분대로 편제하였다. 소부대 까지는 정치지도원이 있었다. 부대장은 물론 이영회였고 참모장은 경남 산청군 출신의 구빨치 민영식이 맡았는데, 최후의 빨치산 이홍희가 그 연락병이었다. 참모는 박창식이었고 소부대장 3인은 천일제, 안용인, 김모씨였다.

부대개편후 얼마 뒤에는 계속해서 후방부대원이던 정순덕에게 처음으로 총이 지급된다(M1 카빈). 그동안 젊은 남성의 숫자보다 무장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전투원이 워낙 부족하여 정순덕과 다른 여성에게까지 총이 지급되고 사격술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의 취사부 역할 대신 처음으로 전투부대에 배치되었는데 성명 불상인 김 모의 소부대였다.

2.4. 입당과 부소분대장 임명

이영회 부대는 충남까지 이동하여 충남도당 부대와 연계해서 싸우는 등 나름대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52년 7월 무렵 산청군 생초면 지서 습격작전에서 김 모 소부대장은 경찰의 총을 맞고 죽는데, 정순덕은 그 시신을 후방으로 운반하여 가매장하는 것을 돕는다.[5] 이 공적을 인정받아 입당하게 된다.[6] 이때 정순덕과 함께 비서 이옥순(이영회 부대장의 애인), 도 여맹 출신의 강복순과 박복달 등 여성 4인이 함께 당원이 되었다. 당원으로서 달라진 점은 가끔 열리는 당원 ‘세포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 며칠후 훈장 수여식에서는 ‘공공메달’이라는 훈장도 받을 수 있었다(이전에 사망한 김 모 소부대장은 ‘영예훈장’ 추서됨).

이 시기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인민군 출신 3명이 탈출해 이영회 부대에게 잡혀온다. 중대장 출신의 방종환 등 장교 2명과 사병인 윤기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포로수용소에서 미군이 망루에서 감시하며 심심하면 기관총을 갈겨대어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포로 내부에서는 매일 같이 병들어 죽어 나가며, 포로끼리는 변절자를 찾아 처단하겠다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니는 암울한 상황을 이야기해준다. 이들은 이후 빨치산이 되지만 이들의 충격적인 증언은 일파만파로 퍼져, 빨치산 사이에서 절대 포로로 잡히면 안된다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 사건은 대부분의 빨치산 문학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52년 8월 부대개편이 일어난다. 51년말 대성골 전투로 경남도당 지휘부 상당수가 전사하여, 도당에 군사/정치간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동안 부대를 이끌어 오던 이영회가 도당 군사책임지도원으로 올라가고, 반란군 14연대 출신으로 그동안 남부군 승리사단에서 관일부대를 이끌어 오던 송관일이 대신 지휘관으로 이동해왔다. 이때 도당 간부 노영호가 덕유산의 북부소지구당 위원장으로 나가면서 경남부대에서 1개 소부대 30명을 차출해 갔다. 부대 정치위원으로 승리사단 정치위원 이봉갑이 이동해 왔다.[7] 그는 한때 개인적 과오로 인해 평당원으로 강등당했던 상태이다가, 이번에 이쪽으로 전속해 온것이였다.

또한 전투병력의 필요에 따라 중요 간부들이 데리고 다니던 산중처 개인비서들을 전투부대로 편입시키라고 하였다. 이에 이영회의 애인이자 여비서였던 이옥순은 전투부대로 내려왔다. 그러나 소설 <남부군>에도 나오듯이 부대 군사참모 박창선은 여비서 허정숙을 전투부대로 보내기를 거부하다가 처벌받을 위험이 따르자 함께 군부대로 귀순하였다. 박창선은 이후 사찰부대장이 되어 빨치산 사이에 악명을 날렸는데, 53년 6월에서 빨치산에 의해 사살된다.

53년 3월 중순 대원사골에서 삼장면 사찰유격대의 총을 맞아 왼쪽 허벅지 관통상이라는 큰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이후 2개월간 부상 치료를 하다가 5월 말경에나 부대로 복귀하였다.

53년 6월 청래골에 거점을 잡는 경남부대는 다시 부대개편을 하였다. 이당시 경남부대의 병력은 100명 미만으로 여성은 6~7명이며 출신성분을 보자면 인민군 출신 15여명, 반란군과 구빨치 10여명, 국군 전향자 20여명, 기타 지역 빨치산 40여명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전과 같이 부대장은 송관일, 정치위원 이봉갑이며 참모장은 이후 남부군에서 전속되어 온 이춘봉이 맞았다. 참모는 박문학이었다. 이영회는 도당 군사부장 신분으로 경우에 따라 부대를 지휘하였다. 그 바람에 경남부대는 사실상 부대장이 2명 존재하는 셈이었다. 예하부대는 다음과 같다.
호위대 7~8명
후방부장 천일재 보급, 간병부 7~8명
제1소부대장 임흥발, 정치지도원 천일재
제2소부대장 김성희, 정치지도원 안용인
제3소부대장 윤억조, 정치지도원 엄언영

각 소부대는 2개 구분대로 구성되었으며 정순덕은 제3소부대 제1구분대 부구분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구분대장은 김사갑이며 대원은 유진호, 권삼도, 김응열, 한재국 등 6~8명이었다.

60mm 박격포는 있기는 하였으나 탄약부족으로 큰 전투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고, 소부대마다 삐아링 1정이 있었고, 개인화기는 거의 M1을 사용했으나, 여성이나 소부대장급과 연락병은 칼빈을 소지했다. 참모장급 이상은 권총을 보유하였다.

정순덕이 경남부대 최초로 여성 부구분대장이 된 것은 남부군에서 여성인 박정애가 구분대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점이 감안되었다고 한다.

여순사건 반란군 출신인 부대장 송관일은 휴전직후인 53년 8월 20일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2.5. 북부소지구당으로 전속

53년 9월경 북부소지구당을 재건하기 위해 부대 이동이 단행되었다. 경남부대에서 정순덕의 제3소부대 25명과 도당-후방부대 15명이 북부소지구당으로 전속되었다. 1년전 지리산에서 30명이 떠난 북소지구당은 15명 가량으로 줄어 있었다. 당시 위원장은 노영호였다.

북부소지구당은 도당-이영회 부대에서 온 40명이 합류하여 편제가 개편되었다.
위원장 박찬봉
책임지도원 이은조
부위원장 김희준, 노영호
조직부장 유재선
선전부장 성명불상의 외팔이

노영호부대
부대장 노영호
정치위원 김교영
참모장 박문학
소부대장 이흥춘•이용순
정치지도원 하영인•엄언영

총인원은 60명이 조금 안되었다. 개편된 조직에서 정순덕은 평대원으로 내려앉았다. 위원장 박찬봉은 전남도당 조직부장으로 있다가 제5지구당 유격지도부장을 맞았다. 이때 이현상과 각 도당 위원장으로 구성된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의 7인중 1명중 하나였으니 상당한 거물이었다. 서열로 따지면 이영회보다 윗줄이었다.

이후 경남도당의 주력이였던 이영회부대원 30여명은 11월 23일 의령경찰서 습격 작전 후 돌아가다가 전멸해버리는 바람에, 이제는 북부소지구당만 남았다. 위원장인 박찬봉은 다음해인 54년 1월 토벌대에게 사살당해 경남도당 기요과장 출신의 북부소지구당 부위원장 김희준이 맡게 되었다.

그러나 조직부장 유재선이 자수함에 따라, 그의 진술에 의해 남은 빨치산의 위치는 고스란히 들통나서 지속적인 토벌을 받게 된다. 이에 병력은 급속히 줄어 60명의 세가 54년 1월경에 35명 미만으로 쪼그라든다. 이에 부대는 노영호가 직접 이끄는 소조와 정치위원 김교영이 이끄는 소조로 재편되어 소조활동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들 역시 하나 둘 군경에 의해 사살되고 어느새 이은조, 이홍희, 정순덕이라는 3인만 남게 된다.

2.6. 망실공비 3인조

경남 하동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이은조(경찰 기록은 이응조로 오기)는 함경북도 웅기 출신의 부두노동자로, 모스크바 당학교 유학까지 갔다온 공산주의자이다. 6.25가 터진후 당의 지시에 따라 경남 의령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다가 9.28 수복때는 경남 하동군 인민위원장으로 있던중 지리산으로 들어와 이영회 부대에 합류. 지리산 최후의 빨치산 3인중에서 위원장 직책으로 끝까지 싸운다.

이홍희는 정순덕과 같은 경남 산청군 삼장면 출신으로, 홍계리 서촌마을에서 여자형제만 4명인 집안에서 외동아들로 사랑을 받고 자랐다. 열다섯 나이에 인민군 ‘소년단’에 가입하게 된다. 좌우가 뭔지 모르는 시골 소년이였지만 가입하면 공짜로 공부를 가르쳐준다는 꼬드김에 넘어가서였다. 그러나 9.28 수복이 되자 가만히 있으면 군경이 돌아 왔을 때 살아 남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이홍희 역시 입산하게 된다. 이후 경남 부대에서 이영희 부대장의 연락병을 맡게 되었다.

이들 3인조는 정순덕과 이홍희의 고향이였던 경남 산청군 일대에서 돌아다니는데, 정순덕이 이후 자서전을 통해 증언하는 각종 빨치산의 역사는 이때 이은조에 의한 정치학습을 통한 것이였다.

56년 초여름에는 쌍계사 뒤편 골짜기에서 조만제, 이판순 부부와 아홉 살 짜리 딸에게 생필품을 구입하고 정보를 구해달라고 했다. 이어 빨치산 투쟁까지 함께하자는 요구에 이들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새벽에 몰래 도망갔는데, 정순덕 3인조는 숨어있다 조만제집 마당에서 이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61년 지리산 송대마을 위쪽 선녀굴에서 이은조가 경찰 매복조에 사살되었다. 시신은 정순덕에 의해 암장되었다.

62년 10월 10일에는 정순덕이 태어난 안내원마을로 가서 정위주, 정정수 형제를 위협하여 또다시 생필품 구입과 정보를 얻을려고 시도하였다. 이들이 거부하고 오히려 정순덕 일행을 사로잡을려고 하자 정위주, 정정수 부부 4명에다가 임산부였던 정위주의 아내가 막 낳고 있던 신생아까지 학살 한다.

이들 2인의 망실공비는 이미 빨치산이 아니라 일대 마을을 공포로 물들이는 무장강도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상태였다.

63년 11월 12일 안내원 마을에서 이들 2인조의 끄나풀 역할을 하던 성수복이 관할 삼장지서에 밀고를 하였다. 이에 김영국(삼장지서장)와 박기수(박기덕? 산청경찰서 대공경찰) 두 경찰관은 은밀히 매복한 끝에 정순덕과 이홍희가 성수복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포착하고 마침내 이들을 붙잡을 수 있었다. 결국 이홍희는 현장에서 사살되고 정순덕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곧 우측 골반 밑을 절단하여 오른쪽 다리는 전혀 남지 않았다. 기구하게도 그녀가 태어난 안내원 마을에서 13년만에 다시 붙잡히게 된 것이다.

2.7. 체포 후

이후 정순덕은 무기징역형을 받고 복역하다 전향서를 쓰고 감형되어 85년 가석방으로 풀려난다. 이 복역 과정에서 71년 자수한 남파간첩 김남식이 정순덕을 북한에서 큰인물로 생각하며 63년 ‘지리산 여장군’이라는 영화도 제작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때문에 정순덕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 작가 김성동이 87년 실천문학에 정순덕을 소재로한 소설 <역사를 찾아서>라는 글을 쓰게 되어 이른바 빨치산 문학 제 1탄이 되었다.

이후 출소한 정순덕은 갈 곳이 없자 음성 꽃동네에서 생활한다. 그런데 이시기에 정충제라는 퇴직교사가 김남식의 주장과 <역사를 찾아서>를 보고 정순덕에 대해 관심이 생겨 그녀의 흔적을 찾아 다니던중 꽃동네 까지 가서 친척이라고 뻥치고 면회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녀에 대한 자료를 모와 3권짜리 책을 펴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실록:정순덕>이다. 여담으로 위에서 나온 <역사를 찾아서>를 쓴 김성동은 자신이 먼저 정장군님(...)을 소재로 한 농민문학책을 쓸려고 꽃동네에 갔는데 "친척만 가능하다고 하며 면회 안시켰줬다. 그런데 정충제라는 놈이 친척을 사칭하고 면회하여 먼저 책을 내게 되었다"고 비난한다.[8]

어쨌든 정순덕은 책내용을 구술하면서 조금만 자신에게 불리하면 한마디도 하지 않아서 정충제가 살살 구슬리며 힘들게 글을 썼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이 문서의 상단부에 있는 인민재판 부분으로 정순덕은 구술한 다음날 이 부분을 빼달라고 요청했지만, 정충제는 거부 하였다. 그바람에 정순덕은 같은 비전향 빨치산들에게 비밀을 폭로한 배신자라고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게 된다. 이로 인해 정순덕과 정충제는 대판 싸우고 둘 사이는 갈리게 된다. 또한 김성동은 정장군님이 돈이나 몇푼 얻어 볼까 하고 자사전을 쓴건데 정충제가 인세도 안줬다고 그를 비난하게 된다.

반면에 책 출판후 산청군 사람이 정충제에게 와서 당시 인민 재판에서 경찰의 끄나풀이라며 죽은이는 젊은 청년이 아니라 늙으신 우리 어머니였다며 정순덕이 거짓말 했다고 꺼이꺼이 운다.

자사전 이후 언론의 관심이 쏟아지자 그녀는 서울로 가서 봉제공장에서 ‘시다’를 5년간 한다. 이후 비전향장기수의 삶터인 서울 봉천동 '만남의 집'에서 살림을 맡아 하면서 지낸다.

99년 3월 20일 점심식사를 준비하던 중 뇌출혈로 쓰러졌다. 보라매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한 달만에 깨어나 인천 나사렛한방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2000년 6.15 남북 합의에 따라 '비전향 장기수의 북송 희망자' 58명에 정순덕이 포함될 수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9월초 북송 앞둔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할머니 정순덕은 당연히 북한에 가야지. 하고 생각하며 찾아온 기자에게 "젊은이들이여, 통일사업 열심히 하라"라는 덕담(?)까지 한다. 어머니와 동생이 말릴까봐 아직 말하지 못했다는 소리와 함께. 또한 자신의 가족들에게 피해를 준사람에게 “'사람 앞 일이란 모른다'고 말이야. 사람이 언제 어떻게 될 줄 알아. 우리가 통일이 안되고 영원히 이대로 있을 같애. 사람 앞 일 생각하면 누구나 구박할 수 없는 거지”라며 은연중 북한중심의 통일이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협박까지 한다. ‘비전향 장기수 북송’이라는 말 그 자체에 나와 있듯이 정순덕처럼 전향서를 쓴사람은 대상이 아니었다. 여기에 고향이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라는 이유도 추가되었다.

이에 정순덕은 정순택[9] 등과 함께 자신의 전향은 고문과 강요가 동반된 전향 공작에 따라 전향서에 강제로 도장을 찍은데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전향을 취소하고 북조선으로의 송환을 요구했다. 전향서를 쓴 이유는 정말 전향해서가 아니라 그저 치료받으려고 쓴 거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비전향장기수들의 수기에 의하면, 당국의 전향 공작은 대단히 치밀한 것으로 단순히 전향서를 쓴 것만으로 전향 인정이 안된다고 한다. 이후 동료들을 배반하는 행위를 하고(동료의 비밀을 밀고하는 방식으로) 체제를 비판하게 함으로서, 전향자를 배신자로 찍히게 만들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고 한다. 실제 사례로 몸과 팔을 강제로 붙잡고 누르면서 백지에 지장을 찍게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는 하나의 퍼포먼스에 가까운 것으로 역시 당국에게 전향했다는 것을 인정 받기 위해서는, 실질적으로 동료를 배반하는 행위를 보여 주어야 한다. 이부분은 교정직 공무원/역사 항목에서 사례까지 들며 나와 있다.

정순덕이 평상시 자신에게 유리한 말만 하고 불리한 얘기는 철저히 감추는 언행을 일삼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전향서를 단순히 강제로 찍은 것이 전부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 만약 붙잡아 강제로 지장 찍는 행위만으로 전향이 이루어진다면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가 64명이나 나올수 있었을 까? 전부 강제로 찍게 하면 그만이지.

이후 인천 나사렛한방병원에 계속 입원해 있다가 2004년 4월 1일에 길병원에서 사망한다.

3. 논란

마지막으로 잡힌 빨치산이라는 희소성, 그리고 전향이 거부되었다는 상징성 때문인지 일부 NL 계열 운동권에서는 민족민주열사로 대우한다.

4. 매체에서



[1] 연일공파.[2] 이 부분은 <실록 정순덕>에서 나오는데 정순덕이 작가 정충제에게 증언한 다음날 꼭 어제 말한 인민재판 부분을 빼달라고 한다. 그런데 정충제는 이 부분을 들어내지 않고 그냥 출판한다. 그 바람에 빨치산 출신자 사이에서 정순덕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졌고 이 바람에 정충제와 대판 싸우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이 출판된 후 책을 읽은 어느 산청군 마을 사람이 정충제에게 와서 당시 죽은 사람은 젊은 청년이 아니라 나이든 우리 어머니였다고, 당시 빨치산들은 늙은 자신의 어머니를 잔인하게 살해했다고 울부짖는다. 그런데 <실록 정순덕>을 보면 젊은 청년을 인민재판으로 죽였는데 당시 현장에 있다가 그 광경을 보고 까무라친 청년의 늙은 부모를 자꾸 떠올린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는 죽은 것은 청년의 늙은 어머니였고 젊은 청년은 그 광경을 목격한 것인데, 정순덕은 반대로 기억한 것이다.[3] 당시 전화선은 빨치산들에 의해 절단나 있어 경찰은 민간인을 통해 연락을 주고 받았다. 경찰의 부탁을 거절하면 으앙 주금. 그러나 산은 빨치산 세상인데 경찰 편지를 가지고 산을 넘어가는 것 역시 으앙 주금. 당시에 안 태어난 것을 감사하자. 만약 당시 경찰의 편지 부탁을 받았다면 답이 없는 상황이다.[4] M1918 Browning Automatic Rifle. 줄여서 'B.A.R.'이라 부른다.[5] ‘빨치산은 동료의 시체를 반듯이 메고 간다’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남부군>에서 이태는 헛소리로 단정지었다. 최고지휘관 급 정도되면 시신을 운반하는 경우는 가끔 있었다. 그래도 정순덕의 사례는 다른 빨치산 문학에서는 거의 기록이 없을 정도로 매우 희귀한 사례였다.[6] 전쟁 이전에는 남로당에 입당하는 것은 쉬웠지만, 남북노동당이 합당하고 한국전쟁 이후로 남한출신은 입당하는 경우가 아예 막혀 있었다. 남로당 출신자조차 업격한 심사 후 로동당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7] 소설 <남부군>에서 이태에 보증을 서줘 화선입당 시켜준 사람.[8] 실제로 정충제는 자신이 정순덕의 친척이라고 주장하여 면회를 성사시켰다. 같은 진양 정씨였던 건 사실이지만 막상 통성명을 해보니 파는 틀렸다.[9] 충청도 출신으로 월북하였다가 58년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체포. 33년 복역후 출소하였다가 사망후 시체만 북송됨.[10] 다만 실제 정순덕의 남편 석성조는 소총수가 아니라, 구분대별로 1정씩 있는 경기관총 "삐아링" 사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