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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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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595959><colcolor=#ffffff> 김재현[1]
金在現 | Kim Jae-hyun
파일:김신조(2020).jpg
출생 1942년 6월 2일 ([age(1942-06-02)]세)
함경북도 청진부
(現 함경북도 청진시)
국적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 (1942~1945)

[[북한|]][[틀:국기|]][[틀:국기|]] (1948~1968)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1968~)[2]
본관 수안 김씨
직업 목사 (은퇴)
종교 개신교
가족 배우자 최정화
슬하 1남 1녀
학력 서울침례회신학교 (학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 학사)
약력 조선인민군 지상군 복무
민족보위성 총참모부 정찰국 124부대 복무
성락삼봉교회 목사
서울성락교회 목사
한나라당 북한 인권 및 탈북자·납북자 위원회 고문

1. 개요2. 생애
2.1. 1.21 사태 이전2.2. 1.21 사태2.3. 사건 이후
3. 대중매체에서4. 저서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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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북한이탈주민 출신 목사. 북한의 남파 무장공작원 출신이자 개신교 목사1.21 사태 당시 청와대를 습격했던 남파 무장공작원 31명 중 한 명이다. 사건 이후에는 대한민국에 귀순해 살고 있다.

2. 생애

2.1. 1.21 사태 이전

1942년 6월 2일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이후 평안남도 순천으로 이주했으며 만 5세에 평양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고 만 19세에 조선인민군 지상군으로 복무하던 중 124부대라고 부르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공작원이 되었다.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과거 북한에서 6.25 전쟁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전쟁이라고 배웠고 특히 전쟁 시기 폭격의 경험이 군에 지원하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2.2. 1.21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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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공작원(124부대) 31명이 북악산을 넘어와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 고개[3]까지 침투하였다. 침투조 중 하나였던 그는 교도소 공격조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른 공비들이 사살당하던 와중에[4] 김신조는 검문을 피하기 위해 독립가옥에 숨어서 무기와 장비를 모두 드보크에 묻어 두고 자폭용 수류탄 한 발만 들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1월 22일 새벽 2시 25분에 제30사단 92연대의 잠정 1개 중대와 5분 대기조가 인왕산 하단의 세검정 계곡에 있던 독립가옥에서 김신조를 발견하였다. 상당한 교전을 주고받다가 군에서 "나오면 살려준다"고 회유하니 결국 김신조는 수류탄을 들고 나왔다. 자폭할 수도 있었는데 그냥 떨어트리고 손 들고 나왔다.

04시 15분경 김신조를 인계받은 방첩대는 그를 보자마자 '무기는 어디에 숨겨뒀냐?'고 물었다. 김신조의 직접 안내로 특공대원 25명은 전날 김신조가 매복했던 비봉 승가사 옆 200미터 지점에서 드보크를 찾아 침투 시의 일부 장비를 회수하였다. 이후에도 김신조는 정보 제공 등의 방법으로 공비 소탕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파일:attachment/1.21사태/2008070600935_1.jpg


우리 31명 임무는... 저 청와대 내부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가지 따고...(영상의 1분46초)[5]
생포 직후 김신조
이 말은 기자회견에서 나온 건데 이때의 모습과 체포 당시의 얼굴이 약간 다르다. 기자회견 때 모습이 좀 살이 붙었는데 방첩대원에게 두들겨 맞아서 얼굴이 부었다는 얘기가 있다고... 지금은 종영된 예능인 MBN황금알에서 나온 증언에 따르면 당시 생포당해서 가뜩이나 쳐 있는데 기자회견에 대한 언질조차 주지 않은 채 수갑을 채우고 의자에 앉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다른 공비들이 전부 사살당하거나 북으로 도주한 와중에 본인만 유일하게 투항하여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 중에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는 말이 실시간으로 전국으로 생중계되었고 전 국민이 기절초풍했다. 웬만해선 정치에 개입을 안 하던 육영수방첩대에 한 마디 하기까지 했다. 해당 발언은 기자회견에 대한 언질조차 주지 않은 채 수갑 채우고 의자에 앉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한편 북에선 김신조가 투항하여 남한에 귀순했단 정보를 얻자 북한에 있었던 가족들이 수용소로 압송되어 오랫동안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북한 귀순자들에 의하면 김신조의 가족 중 일부는 사형되었다는 소문도 돌았다고 한다.

2.3. 사건 이후

전향 이후 2년 넘게 효자동 방첩대에서 조사받으며 지내다 군에 많은 정보를 제공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 4월 10일 풀려났다. 대한민국으로 전향하여 공소취하 처리되어 구속에서 풀려난 후 결혼[6]하고 1970년대 초부터 서울의 동작구 흑석동 시범아파트[7]에서 살았고 중앙정보부의 감시는 꾸준히 받았다. 1970년대 중순부터 사당동으로 이사하여 아내와 가게를 차리고 자영업을 했다.

이후 1996년 목사 안수를 받아 서울성락교회[8]에서 목사를 하다가 은퇴하고 2010년에 한나라당 북한인권위 고문열에 임명되기도 했다. 군대에서 안보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는 은퇴했지만 서울성락교회에는 공식적인 은퇴목사라는 직함이 없기에 '원로목사'라고 불린다. 현 교회 측 3부 예배에 항상 출석 중이다.

술집에서 오줌 누던 중 웬 청년한테 뒤통수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얼굴을 알아본 청년이 술에 취한 상태로 "너 때문에 군대에서 개피봤어. 이 개새끼야." 라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수도 서울에 공비들이 침투하는 희대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육해공군의 복무기간이 최대 6개월 이상 연장되는 바람에 당시 청년들의 증오가 매우 심했다.[9] 김신조는 그냥 죄송하다고 사과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만히 맞고 있지 않고 싸웠다는 주장도 있다.

김만철 씨가 탈북 후 남한행을 고민하자 한국 정부에선 귀순자인 김신조와 이웅평을 보내 설득했는데, 마침 김신조는 김만철과 같은 동네 출신이어서 이를 언급하며 설득했다고 한다.

민간인까지 살상한 살인마가 버젓이 방송에 나온다며 김현희와 함께 욕하는 사람들도 아직까지 많은데, 일단 김신조는 자신은 투항하고 자수하였으며 직접 죽인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물증도 있다. 드보크에 숨겼던 총과 탄창에 탄약이 모두 가득 차 있었고 총 내부에 화약흔도 없었다. 즉, 임무에 투입된 이후 발포를 한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만약에 저 총이 김신조의 것이 맞다면 총으로 사람을 죽인 적은 없었고 그것이 재판에서 증명되어서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내자 검찰이 공소를 취하했다. 정부에서는 한국화약에 일자리를 주선해 주기까지 했다. 다만 2, 3개월 다니다 그만뒀고 이후 전술했듯 종교인으로 살았으며 안보강연과 신앙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다. 또한 본인 주장으로는 중간에 만난 나무꾼을 살해하고 은폐하자는 동료를 말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걸 증언해줄 동료들은 모두 죽거나, 도망쳤으니 일단 본인 주장밖에 없긴 하지만 김신조의 증언으로는 일단 본인 손으로 누굴 살해한 적은 없는데다 실제로 이를 반박할 증거도 나오지 않아서 유야무야 넘어갔다.

2012년 1월 21일에 채널A 뉴스에 출연했다.

2015년 1월 21일에 채널A “정용관의 시사병법”에 출연하여 1.21 사태 당시 상황에 대해 증언하였다. 채널A 출연 영상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1 2020년 9월 24일자에 출연했다. 당시 파주 쪽으로 침투해서 나무꾼 4명과 마주친 이야기와 그 중 한 명의 동생이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였으며 당시(27세) 투항하면 살려주겠다는 말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마음 속의 물음에 이념과 사상을 떠나서 살고 싶다는 마음에 투항하게 되었다고 한다.[10]

2021년 10월 31일에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도 출연했다. 이만갑 출연영상 2022년 1월 21일에는 1.21 사태 54년을 맞아서 태영호 의원과 대담하였다. 태영호 의원과의 만남

2022년 6월 7일 미국 방송에 출연해 인터뷰했다. 현 서울성락교회 교회측 3부 대예배 출석 중이다.#

3. 대중매체에서

4. 저서

5. 관련 문서



[1] 대한민국에 정착한 후 김신조에서 김재현으로 개명했다. 교과서에도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밖에 다니기 어려워서 개명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2] 대한민국 헌법에는 북한 국민들도 법적으론 대한민국 국민이기에 명목상으로는 1948년부터 한국인이다.[3]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 즈음에 있던 고개. 현재의 자하문 고개로 사건을 언급한 비석과 사망자의 동상이 있다.[4] 28명은 사살되었고 2명은 북한으로 도망간 것으로 추정된다.[5] 당시 신문보도에서는 감히 그대로 모가지라고 할 수 없어서 xxx라고 표기되었다.[6] 남한에 살아 본 적도 없는 김신조(함경도 출신이라 남북분단 전인 유년기에도 남한에 와 본 적이 없었다.)가 아내를 어떻게 주선받았는지, 아내가 누구의 가족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중정이 관여했을 거라는 것만 알려져 있다. 2022년 인터뷰에 의하면 김신조의 아내가 기사를 읽고 김신조에 첫눈에 반해 성경 구절이 쓰여진 편지를 김신조에게 보냈고 그 일로 결혼까지 이어졌다고 한다.[7] 당시 삼척 무장공비 사건에서 투항한 공비인 김정명이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고 함께 중정의 감시를 받았다.[8] 현 이단시비가 있는 개신교 계열 교회(참고)이다.[9] 특히나 당시는 군 가혹행위가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극심하던 시절이다.[10] 그런데 김신조가 증언한 나무꾼들의 태도가 시대에 따라 오락가락해 의문이 든다. "4명의 나무꾼들은 벌벌 떨면서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해방군으로서 환영되리라고만 배워온 김신조의 마음에 한 가닥 의문이…」라고 썼다(동아일보 1968.11.6).", "「(1968년 1월) 19일 오전 10시쯤 총조장인 김OO과 나는 총으로 위협해 나무꾼을 붙잡았다. 그는 얼굴이 하얘져 달달 떨기 시작… “누구랑 같이 왔어?” “동생이 쪼기 있어요.” 나무꾼의 어깨를 쳐 앉은 채로 동생을 부르도록 시켰다.」(경향신문 1996.10.17)" 그런데 이것이 2020년이 되면 나무꾼 형제들이 자신들을 거짓 환영하여 안심시켰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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