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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21:29:34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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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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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4
사우디아라비아
* 1942, 1946년 월드컵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취소
[1]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에서도 일부 경기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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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IV Campeonato Mundial de Futebol
1950 FIFA World Cup Brazil™
파일:1950 FIFA World Cup Brazil Poster.png
대회 기간 1950년 6월 24일 ~ 1950년 7월 16일
개최국
[[브라질|]][[틀:국기|]][[틀:국기|]]
공인구 듀플로 T (Duplo T)
본선 진출팀 13개팀
대회 결과
우승 우루과이
(두 번째 우승)
파일:Uruguay AUF 1950.png
준우승 브라질 파일:Brazil CBF 1950.png
3위 스웨덴 파일:Sweden SvFF 1938.png
4위 스페인 파일:Spain RFEF 1950.png
수상
득점왕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파일:브라질 국기.svg
]] 아데미르
이전·이후 대회
1938년
프랑스
1950년
브라질
1954년
스위스
1. 개요2. 내용3. 개최지 선정4. 지역 예선5. 대회 포스터·마스코트·공인구
5.1. 포스터
6. 경기장7. 참가팀 정보8. 대회 진행
8.1. 조별 리그8.2. 결선 리그8.3. 우승
9. 최종 순위10. 수상11. 기록실12. 뒷이야기13. 대회 이후

[clearfix]

1. 개요

1950년 브라질에서 개최된 제4회 FIFA 월드컵. 역대 월드컵 중 2번째로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개최된 대회이자 1930년 월드컵에 이어 두 번째로 남반구에서 개최된 대회이기도 하다. 한편, 이때 거의 동시에 지구 반대편인 한반도에선 1953년까지 3년 간에 걸친 전쟁이 발발했다.[1]

2. 내용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와 같이 이 본선 월드컵도 16개국 진출 체제로 진행될 예정이었으며, 개최국 브라질과 지난 대회 우승팀 이탈리아를 제외한 14개국에 들어가기 위해 지역 예선에 참가한 국가는 총 31개였다.[2] 전범국인 독일, 일본은 참여 자격이 박탈되었고 지역예선 도중에, 또는 기껏 16개국 본선에 진출 확정하고도 2차 세계대전 복구 문제로 기권한 국가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 대회에서는 경기 수익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한경기라도 더 많이 치르게 하려는 생각으로 모든 경기방식을 8강전 없이 토너먼트 대신 리그제로 치렀다. 때문에 상당히 기형적인 조 편성도 있었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월드컵 역사상 등번호가 처음으로 선을 보였는데 지금처럼 선수에게 매겨진 것이 아니라 포지션에 따라 매겨진 것이었다.[3]

4강 결선 리그에서 우루과이가 개최국이자 난적 브라질을 꺾고 2번째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우루과이는 역대 최소 경기 우승을 기록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후유증에 각 나라들의 사정상 워낙 기권국들도 많아서 13개국 진출로 본선을 치러야 했다. 우루과이는 13강 조별 리그 4조에서 볼리비아[4] 하나만 8:0으로 이기고 4강 결승리그에 진출했다. 그리고 거기서 브라질과 스웨덴을 이기고 총합 4전 3승 1무라는 매우 적은 경기로 우승했다. 이는 전 대회 챔피언 이탈리아와 경기 수로는 타이기록이자 최소 승점 우승 기록이다.

현대와 같은 월드컵은 이 대회부터 시작했다. 판을 좀 키우려 했다가 엎어진 게 벌써 2번이다. 2회 대회는 승부조작, 3회 대회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두 번의 대회를 건너뛰고 4회 대회부터 다시 제대로 월드컵 판이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2회 대회의 승부조작으로 인해 월드컵 자체가 없어질 뻔했으며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건너뛴 것만 봐도 월드컵 최악의 악재가 두 대회 연달아 터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3. 개최지 선정

원래 개최되었어야 할 1942년 월드컵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취소되고 전쟁기간 동안 FIFA는 존폐의 위기를 겪는다.

1945년 전쟁이 끝나면서 FIFA 또한 월드컵의 재개를 모색했지만 유럽 국가들 상당수가 전후 복구로 문제를 겪고 있던 상황에 개최 신청은커녕 참가 신청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따라서 1946년 월드컵은 자연스럽게 취소, 월드컵 개최는 1950년으로 미뤄진다. 브라질에서 1950년 월드컵이 개최되는 것에 브라질과 앙숙관계였던 아르헨티나 이외에는 크게 반대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굳이 독일에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부 중립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전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월드컵을 개최할 여력이 없었기도 했다. 그래서 브라질이 단독으로 입후보를 했고, 개최권을 따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에 개최권이 간 것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이 월드컵을 보이콧하게 된다.

원래는 1년 앞당겨 1949년에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이 월드컵의 개최를 확정지은 1946년의 룩셈부르크 총회에서 결국 4년 주기대로 1950년으로 확정했다.

4. 지역 예선

이 대회 지역 예선의 자세한 내용은 밑의 문서 참고.
그리고 아무래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첫 월드컵이라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5. 대회 포스터·마스코트·공인구

5.1. 포스터

파일:/image/etimesi/2010/06/17/1_04_Copy(320).jpg
축구공을 차는 축구 선수의 발을 형상화했는데, 축구 양말에 세계 각국의 국기를 그려 넣었다. 역시 이 당시의 월드컵도 초창기 월드컵이라서 마스코트는 없었고 공인구는 듀플로 T라는 이름의 인정구가 존재했다.

6. 경기장

월드컵이 열린 도시와 구장은 다음과 같다.

7. 참가팀 정보

8. 대회 진행

8.1. 조별 리그[13강]

진하게 표시된 국가는 결선 리그 진출국. 순서는 조별 리그 순위. 사선은 기권국.
조별 리그
1조 브라질 유고슬라비아 스위스 멕시코
2조 스페인 잉글랜드 칠레 미국
3조 스웨덴 이탈리아 파라과이 인도
4조 우루과이 볼리비아 프랑스[29]

자세한 내용은 밑의 문서 참고.

8.2. 결선 리그[4강]

결선 리그
결승 우루과이 브라질 스웨덴 스페인
진하게 표시된 국가 우루과이가 우승국. 순서는 결선 리그의 순서를 따랐다.
순위 국가 경기 득실 승점 비고
1 우루과이 3 2 1 0 7 5 +2 5 우승
2 브라질 3 2 0 1 14 4 +10 4 준우승
3 스웨덴 3 1 0 2 6 11 -5 2 3위
4 스페인 3 0 1 2 4 11 -7 1 4위

자세한 내용은 밑의 문서 참고.

8.3. 우승

1950 FIFA 월드컵 우승
파일: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000000 우루과이}}}]]
두 번째 우승
★★

9. 최종 순위

순위 국가 경기 득실 승점 비고
파일:트위터 금메달 이모지.svg
[[우루과이|]][[틀:국기|]][[틀:국기|]] 우루과이
4 3 1 0 15 5 +10 7 우승
파일:트위터 은메달 이모지.svg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브라질 제4공화국|]] 브라질
6 4 1 1 22 6 +16 9 준우승
파일:트위터 동메달 이모지.svg
[[스웨덴|]][[틀:국기|]][[틀:국기|]] 스웨덴
5 2 1 2 15 11 +4 5 3위
4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프랑코 정권|]] 스페인
6 3 1 2 10 12 -2 7 4위
5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틀:국기|]][[틀:국기|]] 유고슬라비아
3 2 0 1 7 3 +4 4 조별리그
6
[[스위스|]][[틀:국기|]][[틀:국기|]] 스위스
3 1 1 1 4 4 -2 3
7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이탈리아
2 1 0 1 4 3 +1 2
8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잉글랜드
3 1 0 2 2 2 0 2
9
[[칠레|]][[틀:국기|]][[틀:국기|]] 칠레
3 1 0 2 5 6 -1 2 조별리그
10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미국|]] 미국
3 1 0 2 4 8 -4 2
11
[[파라과이|]][[틀:국기|]][[틀:국기|]] 파라과이
2 0 1 1 2 4 -2 1
12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멕시코|]] 멕시코
3 0 0 3 2 10 -8 0
13
[[볼리비아|]][[틀:국기|]][[틀:국기|]] 볼리비아
1 0 0 1 0 8 -8 0

10. 수상

11. 기록실

22경기에서 88골이 터지면서 경기당 평균 4골을 기록했다.

12. 뒷이야기

13. 대회 이후

브라질이 뜻밖에 우승을 놓쳐버리자 브라질 축구계는 물론이고 나라 전체가 비탄에 빠지며 한바탕 거대한 홍역을 치러야만 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마라카낭의 비극 문서를 보면 된다.

2023년 5월 9일, 멕시코 국가대표로 출전한 안토니오 카르바할이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1950년 월드컵에 출전한 모든 선수들이 세상을 떠났다.


[1] 6월 24일에 개최되어 1일 늦게 발발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브라질은 대한민국보다 12시간이 늦으므로 브라질에서 6월 24일은 대한민국에서 6월 25일이다.[2] 하지만 팀은 32개이다. 이는 당시 아일랜드의 정세에 의한 것으로 자세한 내용은 지역 예선 항목에 기술되어 있다.[3] 즉, 한 선수가 다른 경기에 그대로 뛰어도 포지션이 바뀌면 등번호가 바뀌는 식이었으며 선수가 바뀌어도 포지션은 같은 다른 선수가 스타팅 멤버에 오르면 등번호는 바뀐 선수가 그대로 사용하는 식이었다.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부터 선수에게 고정된 번호가 부여되었다. 현재 기준이라면 포지션별 등번호는 다음과 같다. 1: 골키퍼, 2,3,4: 중앙 수비수, 5,6: 수비형 미드필더, 7,11: 윙어, 9: 최전방 공격수, 8,10: 공격형 미드필더 이런 식이다.[4] 당시 볼리비아는 지난 1949 브라질 코파에서 우루과이를 3:2로 이기며, 1949코파 4위를 기록하였고, 1950월드컵에서 우루과이는 볼리비아를 무려 8:0으로 격파하여 복수하였다.[5] 동독은 아직 FIFA에 가입 신청도 넣기 전이라 참가하지 않았다.[6] 당시 일본은 전쟁통으로 정신이 없던 대한민국에도 밀릴 정도로 실력이 떨어져서 제재 여부와 관련없이 일본의 월드컵 경기를 기대하는 축구팬들이 거의 없었지만 서독은 예나 지금이나 유럽의 전통 강호였다. 서독이 초기 월드컵에 출전했다면 월드컵 역사의 판도 또한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7] 독일이 없는 이 두 번의 월드컵에서 모두 우루과이가 우승했는데 우루과이는 이 두 번 밖에 우승을 못했다.이거 때문에라도 우루과이는 독일을 월드컵에 못나오게 해야 할 기세[8] 오스트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나라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전쟁 직전에 독일에게 흡수되었다.[9] 유로 2012의 독일의 경우 FC 바이에른 뮌헨의 선수들을 과반수 차출했다.[10] 2010 월드컵그리스의 경우 파나시나이코스 FC의 선수들을 과반수 차출했다.[11] 1949년에 일어난 이 사고는 사고가 일어난 장소의 이름을 따서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유명한데, 이 당시에 사망한 선수 중 가장 아까운 이로는 플레이 메이커 발렌티노 마촐라를 꼽을 수 있겠다. 60년대에 이탈리아와 유럽을 주름잡았던 '위대한 인테르(La Grande Inter)'의 주축 플레이 메이커 산드로 마촐라의 아버지이다.[12] 이 사고로 인해 이탈리아 축구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탈리아가 이를 완전히 만회하기까지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써야 했으며, 이로 인해 1군 선수를 몽땅 잃은 토리노는 리그의 주도권까지 같은 연고지를 쓰는 유벤투스 FC에게 넘겨주게 된다.[13] 이 난투극의 시작점은 전반 29분, 브라질의 공격수 자이르 다호자가 아르헨티나의 주장 호세 살로몬의 다리를 부러뜨린 것이었다. 이에 격분한 아르헨티나의 홈관중들이 경기장에 난입했고 경찰이 나서서 소요를 진정시킨 후에야 다시 경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살로몬은 당시 29살이었고, 이 태클로 인해 다시는 전성기의 기량을 회복할 수 없었으며 결국 1년 후에 은퇴하게 되었다. 비센테 데라마타시쿠가 살로몬의 부상으로 싸우다 전반 30분에 동반 퇴장을 당한 건 덤이다.[14]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15] 예를 들어 하프백 월터 바르(Walter Bahr)는 고등학교 교사, 골키퍼 프랭크 보기(Frank Borghi)는 삼촌의 장례식장에 고용된 영구차 기사. 다른 사람들도 접시닦이, 우편배달부 등등 다양한 직업이 있고 이 중 상당수는 대학생들이었다.[16] 그 잉글랜드전에서 잉글랜드를 격침시킨 이변의 중심에 선 조 게이젠스원래 아이티 사람이었다.[17] 1953년, 자신들의 홈이자 축구의 성지라 일컬어지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유니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놈들'에게 3대6으로 패하고 멘붕에 빠진 사건이다. 이는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유럽 대륙의 팀에게 처음으로 자신들의 홈에서 패한 사건이었으며 그것도 대패의 굴욕을 받았다. 이후 잉글랜드는 이 상놈들에게 복수한답시고 6개월 뒤 원정을 떠났지만 1대7로 개발렸다. 이것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잉글랜드의 역대 최다 점수차 패배 기록이다. 그 팀은 바로 1950년대 초반 축구계를 평정했던 페렌츠 푸스카스매직 마자르였다.[18] 이와 유사한 사례가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때에도 있었는데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인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아르헨티나를 우승시키기 위해 1950년의 잉글랜드와 비슷하게 네덜란드 선수들이 잠자던 호텔 앞에서 고의로 소음를 내게 해서 제대로 잠을 못자게 하도록 지시를 내리기까지 했고 결국 이런 비겁한 행동을 해가며 우승을 하긴 했다.[19] 톰 아르네, 렉 라이언, 데이비드 월시, 콘 마틴[20] 지금과 달리 선수들의 막연한 국가대표팀 변경에 대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던 시절이기도 하고, 두 대표팀이 다른 조에 편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21] 다만 FAI가 IFA로부터 분리하여 나간 형태이기 때문에 관할 지역이 북아일랜드로 축소된 후에도 IFA는 아일랜드 축구 협회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있으며 분리 이전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역사는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이 승계한다.[22] 이전까지는 맨발로 축구를 했으며 이 때문에 1948년 올림픽에서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보고서에서는 인도브라질까지 갈 돈이 없어서 기권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BBC 스포츠 참고자료[23] 그 1경기도 안방경기였다.[24] 당시 튀르키예는 총비상이었다. 소련과의 국경에 20만 가까운 병력을 배치하고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었다.[25] 16개국 본선 진출[26] 당시 개막전과 결승 최종전을 치렸던 그 경기장이며 우루과이의 센테나리오 경기장, 아르헨티나엘 모누멘탈과 함께 남미 대륙을 대표하는 경기장이다. 2014년 월드컵에서도 메인 스타디움으로 쓰였다[27] 미나스 제라이스 주 소재. 세체 지 세템브루는 브라질의 독립 기념일인 9월 7일을 의미한다. 현재의 이름은 인디펜덴시아[13강] [29] 그런데 RSSSF에서는 4조에 튀르키예스코틀랜드가 배정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4강] [31] 라리가의 스페인 국적 선수 중에서 득점 1위에게 주는 '트로페오 텔모 사라'의 모델이 바로 이 사람이다. 라리가 통산 득점 3위(277골)에 올라있는 아틀레틱 빌바오의 레전드.[32] 현재는 입석이 금지되고 개보수를 거치면서 78,838석의 좌석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수용 인원이 이 정도면 충분히 대형 경기장이다.[33] 1948년 8월 2일에 떴다. 월드컵 개막에는 2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34] 다만, 1950년 월드컵에서는 모두들 브라질이 우승할 것이라고 여겼던 반면에, 2014년 월드컵에서는 브라질이 절대적인 강팀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스쿼드 차이가 있다고 한들 웬만한 축구에서 7:1이란 스코어는 강팀과 강팀 사이에서 쉽게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미네이랑의 비극으로 인한 브라질 국민의 충격이 마라카낭의 비극보다 컸다고 보기는 힘들다. 브라질 국민들이 당연시 여기던 1950년 월드컵 우승을 놓친 충격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1950년 월드컵은 출전 선수들 거의 모두가 대표팀에서 은퇴하고, 유니폼조차 아예 완전히 바꿔버렸을 정도로 브라질의 충격이 너무나 엄청났다. 전술했듯 경기장에서는 그 자리에서 권총으로 자살해버린 사람이 두 명, 심장마비로 죽은 이가 두 명이 나왔을 정도였다.[35] 포포투에서는 '미네이랑은 슬픈 코미디지만, 마라카낭에서의 비극은 아니다' 라는 기사에서 마라카낭과 달리 미네이랑에서는 폭동 한 번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인디펜던트에서도 어째서 화요일의 상처가 1950년대의 마라카낭보다 깊지 않았나라는 기사에서 브라질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지만 울지는 않았다며 마라카낭보다 큰 충격은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브라질이 위대한 축구를 보여주던 1950년대와 다르게 현재의 브라질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브라질 사람들은 그들이 언더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충격적인 패배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충격의 수준으로 보면 4강전에서 7점을 실점당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여겨진 만큼, 미네이랑의 비극으로 인한 충격도 어마무시하긴 했다. 둘 다 세계를 뒤집어 엎어버렸을 정도이니...[36] 차이점이라면 1974년과 1978년에는 각 조 1위 끼리 결승전을 치렀지만, 1950년에는 조별리그로 우승팀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