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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 | |
이름 | 발렌티노 마촐라 Valentino Mazzola |
출생 | 1919년 1월 26일 이탈리아 왕국 카사노 다다 |
사망 | 1949년 5월 4일 (향년 30세)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키 170cm | 체중 75kg |
포지션 | 인사이드 포워드 |
소속팀 | 알파 로메오 (1938~1939) 베네치아 FC (1939~1942) 토리노 FC (1942~1949) |
국가대표 | 12경기 4골 (이탈리아 / 1942~1949) |
가족 | 아들 산드로 마촐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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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가 팀의 절반이다. 남은 절반은 나머지 우리 10명에 의해 이루어진다.
마리오 리가몬티
마리오 리가몬티
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이자 토리노 FC의 전설적인 선수로 수페르가의 비극의 희생자 중 한 명이다.
산드로 마촐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선수 생활
2.1.1. 클럽
2.1.1.1. 초기
마촐라는 운동으로 성공한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운동에도 재능을 보였는데 수영과 사이클에서 그러했다. 하지만 마촐라는 유벤투스 FC의 팬답게 축구의 길을 선택했고 낡은 깡통을 차고 드리블하며 축구 연습을 해서 툴렌(Tulen)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마촐라는 지역팀 중 하나인 GS 트레솔디에서 뛰었다. 하지만 마촐라가 11살 때 마촐라의 아버지가 트럭에 치여 사망, 마촐라는 졸지에 소년가장이 되어 밀라노의 알파 로메오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알파 로메오 팀에서도 뛰면서 본격적으로 축구 선수의 길에 접어들었다.알파 로메오를 선택한 것이 제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습니다. 제가 밀라노에 갔다면 훨씬 많은 급여를 받았을 거고 공장일은 하지 않았겠죠. 하지만 일하는 것이 더 좋았어요. 게으름으로 제 경력과 건전한 열정을 망칠 위험이 있었으니까요.
발렌티노 마촐라
발렌티노 마촐라
1939년 전쟁이 발발하여 마촐라는 베네치아로 가서 해군으로 복무했다. 해군으로 복무하면서 베네치아 FC의 선수로도 활약했는데 여기서 그는 그의 축구화를 아낀답시고 맨발로 플레이를 하게 되었고 이것이 전화위복, 더욱 유명해졌다.
처음부터 마촐라가 베네치아에서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신체적 문제로 자주 명단에서 빠지던 주전 공격수 페르니고의 빈자리를 메워가면서 마촐라의 기량은 점점 향상되어 갔다. 1940년 12월 29일, 유벤투스 FC와의 경기에서 마촐라는 마리오 바를리엔을 포함, 유벤투스 수비수 2명을 더 제치고 골키퍼가 손을 쓸 수 없는 위치에 공을 꽂아넣는 아름다운 득점 장면을 연출해냈다.
그리고 베네치아에서 그의 활약이 최고조로 달했던 대회가 바로 1940-41 시즌의 코파 이탈리아였다. 베네치아를 이끌고 코파 이탈리아의 결승까지 진출했고 결승전의 상대는 AS 로마였다. 결승전에서 베네치아는 아마데이에게 전반 4분부터 5분 만에 해트트릭을 얻어맞고 끌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마촐라의 37분 득점에 이어 후반에는 결국 동점을 만들어 재경기로 이끌었다. 재경기에서 결국 베네치아는 1:0으로 승리, 현재까지 팀의 역사상 유일한 메이저 트로피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마촐라의 활약에 사람들은 그를 이탈리아의 전설 주세페 메아차와 비교를 하기도 했고 그에게 입단 제의를 한 곳이 바로 토리노의 두 구단, 유벤투스와 토리노 FC였다.
2.1.1.2. 토리노 FC
원래 마촐라는 유벤투스 FC에 입단하기로 구두 계약을 맺었던 상태였지만 토리노 FC는 마촐라를 데려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20만리라와 선수 두 명을 유벤투스에 내주면서 마촐라와 동시에 에치오 로이크도 토리노에 데려오는데 성공했다.[1]토리노 이적 처음부터 마촐라가 팀에 녹아든 것은 아니었다. 1942년 그들의 세리에 A 데뷔전에서 마촐라와 로이크는 말 그대로 형편없는 데뷔전을 치렀다. 패스와 컨트롤은 뭔가 부정확했고 호흡도 맞지 않았다. 토리노는 암브로지아나 인테르에 0:1로 패했고 그들은 패배의 원흉 취급을 받았다. 마촐라와 로이크가 이런 이미지를 씻는 데에는 2달이 걸렸다. 그리고 시즌 막바지에 마촐라는 리그와 컵대회에서 결정적인 득점을 기록, 토리노를 이탈리아 축구계 최초의 더블로 이끌었다.
1946년부터 팀 컬러를 제대로 갖춘 토리노는 세리에 A에서 최강팀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팀들을 승점 10점 차 이상[2]으로 가뿐히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고 그들을 막을 팀은 없어보였다. 게다가 마촐라는 주장으로서 단연 그란데 토리노의 핵심 선수였다.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놀라운 활약의 순간은 1946-47 시즌 리그 29라운드 비첸자 칼초전이었는데, 고작 3분 만에 해트 트릭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1947-48 시즌의 마촐라는 부상으로 인해 다소 들쑥날쑥한 경기력을 보였다. 1947년 10월 5일, 토리노는 AS 로마전에서 아마데이에게 득점을 허용해 전반전에 0:1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프 타임때 토리노 선수들은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경기장에 나왔고 후반전에 로마의 골문에 7골을 넣어버렸다. 이 중 3골은 허벅지 부상으로 경기장에서 조기 퇴근한 마촐라의 몫이었다.
1948년 5월 23일, 트리에스티나 칼초와의 경기에서 토리노는 무득점으로 경기를 마쳤고 마촐라는 조바심을 내던 팀원들에게 패스 공급을 거부했다. 이 사건에 대해 마촐라가 부상으로 인한 피로로 휴식을 원했다는 해석도 있었지만 그가 토리노를 떠날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다. 그러나 마촐라는 다시 토리노의 스쿠데토 방어를 이끌었고 25골을 넣어 잠피에로 보니페르티에 이어 리그 득점 랭킹 2위에 올랐다.
1948-49 시즌이 시작되기 전 토리노는 브라질로 투어를 떠났지만 마촐라를 포함한 6명의 선수들은 계약을 마무리짓지 못한 상태였다. 마촐라는 시즌 시작 전까지 구단과 합의점을 찾지 못해 토리노의 시즌 개막 경기에 결장했다. 결국 마촐라는 토리노와의 계약서에 사인했고 팀은 순항했지만 그는 각종 부상으로 훈련을 소화하기 벅찬 모습을 보였다.
2.1.2. 국가대표
마촐라는 실비오 피올라 이후 이탈리아 대표팀의 주장에 임명되었고 대표팀에서 12경기에 출전, 5골을 넣었다.2.1.3. 수페르가의 비극
이 사고가 일어날 당시 마촐라는 각종 부상에 고열을 동반한 인후염, 협심증 증세까지 있었어서 4월 30일에 있었던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와의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촐라는 참고 포르투갈에 건너가 SL 벤피카와의 친선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복귀길에 터진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인해 마촐라는 향년 30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면서 그의 팀과 함께 영원한 전설로 남게 되었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마촐라는 기술도 훌륭했지만 거기에 엄청난 체력과 양발 사용 능력, 기술, 빠른 스피드를 갖췄기 때문에 말 그대로 그를 상대하는 수비수들에게는 악몽이었다. 게다가 그는 뛰어난 플레이 메이킹과 인사이드 포워드임에도 현대 축구라면 중앙 미드필더로 분류될 만한 수비 능력, 주장으로서의 카리스마, 작은 키에도 공중볼 다툼에 우위를 점하게 하는 점프력까지 갖추고 있던 이탈리아 축구계 최초의 올라운드 플레이어라고 알려져 있다.마촐라는 1947-48 시즌 제노아 CFC전에너 발레리오 바치갈루포가 퇴장당하자 골키퍼로 뛰기도 했다.
마촐라는 이번 시즌 쉬운 경기와 어려운 경기 모두에서 팀의 상승세에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그는 항상 자신의 모든 일을 해냈고, 수비, 미드필더, 공격에서 팀 동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섰다. 그는 매 경기 1분부터 90분까지 한결같은 의지로 플레이하고, 패배에 맞서며, 갑작스럽고 매우 정확한 슛으로 성공을 추구하고 달성하는 사람이다. 그는 가장 유용하고 수익성이 높은 선수이다.
루이지 카발레로(1944년 7월)
루이지 카발레로(1944년 7월)
저는 팀에 가장 유용한 선수, 반드시 계약해야 할 선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면 펠레, 디 스테파노, 크루이프, 플라티니, 마라도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촐라를 먼저 생각하고 그들을 생각하겠죠.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4. 어록
당신이 팀에서 변하는 만큼, 당신은 축구에서 승리할 수 있다.
축구는 항상 11명으로 이루어진 게임이다.
5. 사생활
마촐라는 1942년 3월 15일에 에밀리아 리날디와 결혼, 알레산드로와 페루초[3], 두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마촐라와 에밀리아는 마촐라의 은둔에 가까운 생활, 엄격하면서도 세심한 성격으로 인해 갈등을 빚었다. 결국 부부는 1947년에 이혼했고 마촐라는 큰 아들 알레산드로의 양육권을 얻어왔다. 마촐라는 1949년 4월 20일, 당시 19세였던 주세피나 쿠트로네와 재혼했지만[4] 마촐라는 재혼 후 불과 2주 만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5]마촐라의 전처와 후처는 마촐라의 사후에 여러가지 문제로 싸웠는데 하나는 큰 아들 알레산드로의 양육권 문제였다. 알레산드로는 후처 쿠트로네에 의해 보르고 산마르티노의 부유한 사업가이자 마촐라의 오랜 지인이었던 브루노 간디니에게 보내졌다. 사고 이후 전처 리날디는 토리노로 알레산드로를 데리러 갔지만 알레산드로는 그곳에 없었다. 쿠트로네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이 마촐라의 뜻이라고 했지만 리날디는 변호사의 도움으로 알레산드로를 카사노 다다에 데려왔고 그곳에서 알레산드로는 동생 페루초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들은 마촐라의 시신 안치 문제로도 싸웠는데 이것은 쿠트로네의 승리로 끝났다. 리날디는 처남 실비오와 마촐라의 고향 카사노 다다에 사는 친구들과 친척들의 의견을 모아 마촐라의 시신을 카사노 다다에 안치할 것을 주장했고 토리노 지사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쿠트로네는 마촐라의 어머니와 나머지 세 형제의 지원을 받아 마촐라의 시신을 토리노에 안치할 것을 주장했고 토리노 지사는 승인을 철회했다. 마촐라는 생전에 자신이 죽으면 토리노에 묻히길 원했다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마촐라의 어머니였다.
마촐라의 유산 2,200만리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3분의 1은 쿠트로네에게, 나머지 3분의 1씩은 두 자녀에게 상속되었다.
이후 마촐라의 아들들은 주세페 메아차의 눈에 띄어 인테르의 유스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특히 큰 아들 알레산드로가 아버지처럼 1960년대의 그란데 인테르를 이끄는 핵심 선수가 되었는데 그 아들이 바로 산드로 마촐라이다.
6. 뒷이야기
- 마촐라는 10살 때 아다 강에 빠진 소년을 구해준 적이 있는데 그 소년은 AC 밀란의 주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수비수 안드레아 보노미였다.
발렌티노와 어린 산드로 |
- 마촐라는 경기를 뛰다 유니폼의 소매를 걷어올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은 팀 동료들의 움직임이 작전에 맞지 않거나 팀의 플레이가 잘 되지 않을 때 팀 동료들과 팬들에게 보내는 노여움의 표시였다.
- 베네치아 FC와 토리노 FC 시절 마촐라의 동료였던 에치오 로이크와는 서로 성향이 안 맞아 처음에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마촐라도 과묵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 친절한 면이 있고 다소 충동적인 성격이었지만 로이크는 매우 조용하고 수동적인 성격이었다. 로이크는 처음에 마촐라를 싫어했고 마촐라가 오만하다고 오해했지만 곧 오해를 풀고 사이좋게 지냈다.
- 마촐라는 종종 자신이 죽게 된다면 전쟁이나 사고로 죽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실제로 사고로 생을 마감한 것을 생각해보면 뭔가 조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 브라질 출신 AC 밀란의 레전드인 주제 알타피니는 그의 플레이가 발렌티노 마촐라와 비슷하여서 마촐라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 밀라노 지역에서 드리블에 강점을 보이는 선수를 칭해서 '베네치아니'라 하는데 이 역시 베네치아에서 활약하던 마촐라에게서 나온 별명이다.
- 산드로 마촐라는 1964년에 당시 황혼으로 달려가고 있던 저승사자 군단 레알 마드리드와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만나게 되었다. 산드로 마촐라는 그 경기에서 2골을 넣어 인테르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페렌츠 푸스카스는 그에게 다가와 유니폼 교환 신청을 하며 "난 네 아버지와 경기를 했었지. 너도 그 못지 않구나."라고 칭찬했다.
7. 수상
7.1. 클럽
- 세리에 A 우승 5회: 1942-43, 1945-46, 1946-47, 1947-48, 1948-49(토리노 FC)
- 코파 이탈리아 우승 2회: 1940-41(베네치아 FC), 1942-43(토리노 FC)
7.2. 개인
[1] 베네치아는 105만 리라의 이적료를 토리노에게 받아 클럽의 빚을 모두 상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둘에 들어간 총 125만 리라는 페루초 노보가 당시까지 썼던 이적료 중 제일 큰 돈이었다.[2] 당시에는 현재처럼 승리시 승점이 3점이 아닌 2점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승점차이는 현재보다 더 큰 전력의 차이를 의미한다.[3] 당시 토리노의 회장이었던 페루초 노보의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주었다.[4] 재혼 과정에서 에밀리아의 반대로 인해 마촐라는 소송까지 갔고 에밀리아에게 500만리라를 지불했다고 한다.[5] 재혼 당시 서류 통과가 안된 상태였기 때문에 사망 당시 마촐라는 공식적으로 미혼이었다. 서류 통과는 마촐라가 사망한 후에야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