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초 노보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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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6대 |
이름 | 페루초 노보 (Ferruccio Novo) |
생년월일 | 1897년 3월 22일 |
사망년월일 | 1974년 4월 8일 (향년 77세) |
국적 | 이탈리아 |
출신지 | 이탈리아 왕국 토리노 |
포지션 | 수비수 |
신체조건 | 미상 |
소속팀 | 토리노 FC (1913-?) |
감독 | 이탈리아 대표팀 (1949-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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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전 축구 행정가.2. 생애[1]
2.1. 선수 생활
노보는 1913년부터 토리노 FC의 수비수로 뛰었지만 언제까지 선수 생활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2.2. 토리노 FC 회장
선수 은퇴 이후 노보는 가죽 액세서리 공장을 운영하며 친정팀을 고문으로 후원하고 있었다. 그러다 노보는 1939년에 토리노의 회장에 추대되었다. 당시 토리노는 라이벌 유벤투스 FC의 세리에 A 5연패를 지켜보며 아돌포 발론체리, 훌리오 리보나티 등 20년대 토리노를 수놓았던 스타 플레이어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노보는 영국의 축구팀들과 에도아르도 아녤리를 벤치마킹하면서 토리노를 자생할 수 있는 클럽으로 만들고자 노력했고 그 결실이 바로 그란데 토리노였다. 노보는 뛰어난 달변가이자 부드러운 독재자였지만 옳은 말에는 기꺼이 귀를 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 바탕에는 사람에 대한 포용도 있었다. 유벤투스의 레전드였던 펠리체 보렐이 토리노에 왔을 때에는 계속된 무릎 부상으로 선수로서의 생명은 거의 끝나버린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노보는 보렐을 내치지 않고 보렐이 토리노에 머물던 1년간 기술자 역할을 하도록 지원했고 보렐의 존재는 그란데 토리노의 주춧돌 중 하나가 되었다.
여기에 발렌티노 마촐라를 필두로 한 적재적소의 선수와 감독의 영입이 더해져 토리노는 1942-43 시즌, 15년 만에 다시 스쿠데토를 가져올 수 있었지만 전쟁으로 리그가 2년간 중단되었다.
리그는 중단되었지만 다행히 축구 자체가 중단되진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축구는 일반인들에게는 전쟁으로 인한 고단함을 잠시 잊게 만드는 도피처였고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선수들에게도 기량 유지에 분명히 도움이 되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토리노는 그들이 바라마지 않던 세리에의 맹주로 군림했고 4년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그들의 엔딩은 타의로 이뤄진, 참혹한 비극으로 끝났다. 노보는 1953년까지 토리노의 회장직을 역임했다.
2.3.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
선수로 노보는 대표팀과 연이 없었다. 하지만 1948년 올림픽에서 이탈리아가 8강 탈락하자 노보가 비토리오 포초의 후임이 되었다.1949년 2월에 대표팀 감독의 임기를 시작한 노보는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의 주축이었던 그란데 토리노 멤버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에 걸맞게 이탈리아는 첫 2경기에서 포르투갈 4:1, 스페인을 3:1로 꺾으며 쥘 리메 트로피 영구 소유를 위한 첫 발을 잘 뗐다. 그러나 사고로 인해 노보와 그란데 토리노 멤버들은 단 2경기만 마치고 영원히 이별해야 했고 이탈리아의 트로피 사수 전망은 매우 험난해졌다.
노보는 이탈리아 대표팀을 이끌고 우승팀 자격으로 1950년 월드컵에 참가했다. 아마 노보가 누구보다 그란데 토리노 멤버들의 영전에 쥘 리메 트로피를 바치고 싶은 사람이 제일 컸으리라. 그러나 이탈리아는 스웨덴에 밀려 탈락했고 노보는 바로 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놨다.
3. 뒷이야기
- 그란데 토리노의 캡틴 발렌티노 마촐라는 둘째 아들의 이름을 노보의 이름을 따 페루초로 지을 정도로 노보를 깊게 신뢰했다.
- 비토리오 포초와 노보의 관계는 썩 원만하진 않았지만 서로를 존경하는 관계였다고 전해진다.
4. 수상
- 스포츠 공로 금성장(Stella d'oro al Merito Sportivo): 1968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14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